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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Q&A] 체험과 교리(1)-방언을 하게 되다
구요한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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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6.03  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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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Q & A]

체험과 교리(1)

-체험 없는 교리는 인간이 만든 허상이다- 

 

A : (찬 것을 급하게 마시다가 갑자기 머리가 멍하고 띵했다. 한참 추스른 후) 아, 이제야 살겠다.
B : 나도 그런 체험이 있다. 찬 것 먹을 때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먹거나 마셔야) 해야 한다.
C : 그래? 난 그런 체험이 없는데……
A :  그래? 어떻게 그런 체험이 없지? 찬 것 급하게 먹은 적이 전혀 없다고? 찬 것을 먹다가 머리가 띵한 적이 없다고?
C : 그래? 그런 적이 없어.
A & B : 그래 참 신기하네? 어떻게 그런 체험이 없지?
C : 그래? 어째 그런 일이 일어나지?

체험을 한 A와 B는 즉시 말이 통한다. 그러나 C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C에게 찬 것 급하게 먹다가(혹은 마시다가) 머리가 갑자기 띵하고 어지럽다고-이것도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아무리 ‘설명’해 줘도 ‘감’을 잡지 못한다. 물론 이 정도 체험 유무를 갖고 서로가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경우는 다르다.
체험한 성령운동파는 체험하지 못했으면서 막무가내로 비판하는 반성령운동파가 이상하게 보이고 체험하지 못한 반성령운동파는 그것들의 외적 유사성만을 보고 심리현상이나 마귀가 주는 이교적 현상이라면서 공격한다. 또한 성령운동파가 성경해석을 하면 '왜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고 비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이나 마귀의 일이나 심리적 현상이나 외양은 비슷하다는 것이고, 건전한 체험 없이 논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자.

필자는 성인이 되어 미국에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수 주일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교회만 갔다 오면 더 마음이 갈급하고 짜증이 났다. 나중에야 그 이유는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교회는 신자를 교회에 묶어두는 수준이라면 그 다음 교회는 그 나마 구원의 은혜는 있는 교회였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이 둘은 장로교와 감리교이다.

그러다가 순복음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겉은 순복음교회지만 그 당시만 해도 주변교회들의 핍박이 심하여 순복음교단의 대표 목사는 한국 사랑의교회에서 시작한 제자훈련을 도입할 때였다. 필자가 출석한 교회의 담임목사도 순복음의 기본인 방언, 신유 및 축사는 인정하지만 그외에는 말씀 중심으로 가려고 노력하였다. 제자훈련 덕분에 말씀을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에 재미도 붙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방언을 하지 못할 때였다.


방언을 하게 되다

주변의 신자들이 방언을 해야 한다면서 권면하고 강제(?)하기 시작했다. 방언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모르니 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데 마치 방언을 해야 우등 신자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이 싫었다.

“난 방언은 못 하지만 제자훈련을 통해 말씀은 더 많이 알고 행동거지도 너희 보다 낫다. 나에게 그런 것 강요하지 말라”는 식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잡지를 읽던 중,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방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구해야겠구나.”
‘하나님 저도 방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주실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 다음 주일 새벽기도에 참석한 후 실컷 졸다가 눈을 떴더니 나도 모르게 혀가 돌아가면서 어떤 말을 하고 있었다. 방언이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필자는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물론 필자는 방언을 쉽게 받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기도해서 받고 또 어떤 사람은 20년을 기도해서 받았다고도 한다.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것이지만 사람에 따라 주시는 방법이나 기간이 다르다.

방언 기도를 하니 너무 좋았다.
사실 필자는 이맘때쯤 말로 하는 기도에 한계를 느낄 때였다. 어떤 내용의 기도 제목을 정해서 기도를 한 후,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좀 더 깊이 기도를 하고 싶은 경우나 좀 더 간절하게 기도를 해야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잘 몰랐다. 또한 기도는 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방언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좀 더 깊이 기도할 경우 그 주제에 대해 말로 어느 정도 한 후에 그 내용을 머리로 생각하면서 방언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성령이 방언을 통해 그 기도를 깊고 간절하게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내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 지를 모를 때 그 문제를 생각하면서 간절히방언을 하면 나도 모르게 그 문제에 대한 기도의 방향이 보이고 해결책이 깨달아진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사람들은 이 구절은 ‘방언에 관한 구절이다, 아니다’면서 논쟁하는데 필자는 일반 기도나 방언 기도 모두에 해당되는 구절로 본다. 방언 기도든 일반 기도든 모든 기도가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지금도 기억하는 현상은 방언 기도 하기 시작한 후부터 귀신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도 중이나 무심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주변에 어떤 형상의 귀신이 붙어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신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흉몽 중에 본 형상들, Sci-fi 『스타트랙』이나 공포 영화 등에 나오는 귀신들을 생각하면 된다.

필자는 작가나 감독에게 귀신의 모습이 그렇게 현시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성령 체험을 하면 영안이 열리고 귀신의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후 필자는 수십 년의 기도 중에 한번도 귀신의 존재를 보지 않고 기도한 적이 드물다. 내가 보고 싶지않아도 깊이 기도하다 보면 그들의 존재가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방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그치고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도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방언 체험 이후 사도행전을 보는 안목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성령'이란 말이 나오면 대충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방언을 받고부터는 성령이란 단어나 방언이란 단어가 눈에 쉽게 들어오고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렇다. 세상 일이든 영적 일이든 내가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한계이다.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나와 다르다고 반대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넓은 마음,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왜 반성령운동파의 논문이나 글에는 체험적인 것이 없는가?
자기들의 체험의 세계, 관심의 세계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니까 언급하지도 않고 다루지를 않는다. 생각과 머리로 할 수 있는 인식적이고 교리적인 주제만 다루기 마련이다. 신학생들 또한 웨슬레, 휫필드 및 조나선 웨드워즈와 같은 부흥사의 현장 묘사가 생생한 1차적인 자료가 아니라 신학자나 교수가 신학적으로 여과시킨 2차 자료만 접하다 보니까 아무리 신학을 공부해도 체험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대한 정보는 없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 ‘방언’이란 단어에 눈이 뜨이는 현상은 필자가 방언이란 성령 체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예언’이란 단어도 이후 필자가 음성을 듣고 예언사역을 한 후에야 더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더 객관적일 수가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는 찬 것을 급하게 먹으면서 머리가 띵한 체험이 없는 사람이 그런 것에 대해 더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론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체험할 수가 없고 영적인 것 또한 모든 것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찬 책이다. 성경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하나님의 현현-천둥, 불, 구름 등-으로 사람을 만나주셨고 지금도 만나주신다.

성령운동파는 오늘날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만난 체험이 없는 자들이 오히려 체험있는 자들을 비판한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성경 어디에 이런 구절이 있는가? 자기들의 무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라.
 

왜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

반성령운동파는 성령운동파들이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그들은 무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초자연적이고 체험적으로 기록한 구절은 이런 교리와 저런 핑계를 대면서 오늘날의 신자와는 상관이 없다고 해석한다. 오랫 동안의 무체험을 당연시 하여 인간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성경해석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이제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 해야 한다.

체험은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 내용을 확증한다.
체험이 없으면 인간의 논리로 기적중지론 신학,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 신학, 계시종료론 신학 등과 같은 그럴듯한 이론을 만들어서 오히려 성경 내용을 부인한다.
 

이성시대는 저물고 지금은 감성시대, 체험시대, 직관시대이다

오늘날 반성령운동의 선봉에 서있는 신학은 대부분이 종교개혁 이후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의 전성기에 성립된 신학이다. 그러나 세계 제1,2차 대전을 지나면서 한껏 뽐내던 서구의 이성주의 철학은 몰락해 버렸다. 그런데 이성주의를 바탕으로 정립된 신학은 아직도 시대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시대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제대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제대로 개혁이 되지 않으니 감성시대, 체험시대, 직관시대인 21세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뇌 과학은 성령운동파의 체험적 감성적 예배, 초자연적 하나님 체험이 사람의 영혼이나 신체에 얼마나 유익한가를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더군다나 성령운동은 사람들의 절실한 문제인 가난과 질병의 문제까지 실질적으로 해결해 준다. 그런데 반성령운동파는 아직도 ‘가난이 미덕이다’, ‘칼빈은 걸어다니는 병원이었다’면서 가난과 불치를 미화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고 모든 병자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주장보다 더 극단적인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성령운동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성시대에 젖은 일부 목사, 신학자 및 이성적 성향의 사람들처럼 교리적 신학과 과거의 전통에 경도된 사람들은 성령운동파의 예배와 체험을 싫어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적 교회의 축 늘어진 행사식 예배 보다는 성령운동파의 축제식 예배를 선호한다. 이것은 청년들 뿐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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