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역•선교 > 기도
신비주의와 기독교의 신비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5.18  14:19:2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신비주의와 기독교의 신비

-건전한 신비체험은 죽은정통의 좋은 치료제이다-

   
▲ 신비와 외경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전통 교회에는 신비와 외경이 사라진 지 오래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저녁에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불량배라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마을에는 저녁에 불량배들이 많이 몰려와서 주민들의 안녕을 침해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특정 시간에 마을을 거닐거나 서성거리는 사람은 불량배로 취급하여 처벌했다.

체포된 사람은 법정에 호소했다.
법원은 체포된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저녁에 마을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불량배라는 마을의 규정이 너무나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저녁에 마을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불량배일수도 있고 바람 쐬기 위해 산보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둘을 구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마을에 위임된 권한의 남용이라는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오늘날 신비주의라는 말처럼 오용되고 남용되는 말도 드물다.
또한 신비주의라는 말처럼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말도 드물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많은 경우 신비주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보자.

• 방언하고 신유하는 사람들은 신비주의적인 열광주의자들이다?
이 말은 대형 교회로 성장한  순복음교회를 비판한 말 중의 일부이다.
방언이 한국에 소개된 지도 어언 반 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방언 가지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사람은 신비주의자다?
언젠가 보수주의 목사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그게 바로 (불건전한) 신비주의지 뭐냐!”라고 반박했다.

오늘날, 음성듣기나 환상보는 것 같은 사적 계시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철부지 열광적 신자나 신사도운동·성령운동자들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명망있는 신학자들인 웨인 그루뎀 박사, 고든 피 박사, 존 파이퍼 박사 및 심지어는 보수적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이트리스 박사조차 인정한다.

그런데도 기적중지론자들은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오, 그것은 직통계시이며 성경 외의 특별계시를 주장하는 이단'이라고 호들갑 떤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이 잘못되었고, 건전한 영적 경험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제대로 은혜 받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사도 요한의 제자인 속사도 폴리캅은, 『 폴리캅의 순교』에 보면, 순교 직전 기도 중에 환상을 통해 자기가 베고 있던 베개에 불이 붙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곧 로마당국에 체포되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미리 알았다.

-콘스탄틴 황제는 전쟁 중, 십자가 방패에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글자가 새겨진 환상을 보고 그대로 하여 황제에 즉위한 후 기독교를 인정하는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에서, 일제시대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된 후 해방될 때까지 3년간 보린원 (고아원) 원장을 하면서 시간을 정해 언덕에 올라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이상한 환상을 보았는데, 언덕 밑으로 삼천리 강산이 한 눈에 보이고 흰 돌로 지은 교회당이 그 강산을 꽉 메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떤 후 순간적으로 ‘일본은 틀림 없이 망하고 조국은 분명히 독립한다. 독립된 조국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해방 후 1949년 3월24일 기공예배를 통해 지은 건물이 바로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당이다.

이른 예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이런 간증에는 눈을 감는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신자가 하는 예언이나 환상을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 ‘잘못된 유추의 오류’ 등을 통해 심리 현상이나 마귀의 장난-점치는 행위-로 간주해 버린다.
 

필자는 말한다.
성경은, 말세에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져서 꿈, 예언, 환상을 볼 것이라고 기록한다(행 2:17-18).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다. 그런데도 반성령운동파들은 잘못된 기적중지론, 계시종료론에 매여 이런 것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잘못 주장한다.

말세지말인 요즈음은 성령이 더욱 강하게 부어져서인지, 아이들도 조금만 기도하면 쉽게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성인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사모하지 않고 얼마나 기도하지 않았으면 이런 축복조차 누리지 못하는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영적 게으름부터 먼저 회개해야 할 자들이다.
 

 신비주의 정의의 어려움

이상 간단히 살펴 보았지만 신비주의란 용어가 사람에 따라 얼마나 남용되고 오용될 가능성이 농후한 지를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자기의 영적 수준, 체험 수준이 신비주의의 커트라인이다.
방언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방언하는 사람은 신비주의자이다.
방언은 하지만 쓰러지는 현상이나 음성듣기와 환상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런 것을 하는 자가 신비주의자이다.

예를 들어 김삼은 자기가 방언을 하는 지 방언은 적극 변호한다. 그러나 쓰러지는 현상을 짐승이 독침 맞아 쓰러지는 것에 비유하고 입신이 모든 잘못된 것의 원인이라고 비판한다.

반(反)이단 전문가인 밥 파산티노와 그레첸 파산티노는 어떤 용어의 개념을 너무나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확장하는 것은 「마녀 사냥꾼들」(Witch Hunters)이 즐겨 사용하는 잘못된 논증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하면 박정희 정권 시대의 긴급 조치 같은 것이다.
외국에서 국가 원수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행위는 ‘긴급 조치 xx조 위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용어의 정의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정적들이 박 대통령에 대해 입만 벙끗하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시킨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개념을 명확히 한 후에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늘날 수많은 개혁보수주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조차 기사와 이적의 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체험까지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차별적으로 반대파를 정죄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명한 개혁신학자인 찰스 핫지도 그의『조직신학』에서 신비주의를 제대로 정의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믿는 보수 복음주의자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른다. 반면, 개혁주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록된 말씀과는 상관 없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른다 고 한다.
 

그렇다고 필자는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를 다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이 의도하는 말 그대로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오늘날 교회 내에는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방언하고, 방언 찬송하고, 신유하고, 예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성령 안에서 춤을 추는 것 등,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그 자체가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니다 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필자는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신실한 주의 사자들이나 신자들이 체험하는 신령한 것조차 부정하는 자들을 달리 표현할 말이 어디 있는가?


미스테리온(신비)의 의미

성경에서 '신비'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미스테리온’이다.

성경이 말하는 비밀이나 신비 즉 미스테리온은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지혜이며 이전에는 감추어 졌다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제는 완전히 드러난 구원의 복음을 말한다(롬 16:25; 고전 2:7, 8상; 고전 4:1; 엡 1:9등).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 곧 계시의 복음 전파 사역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미스테리온은 이제 더 이상 신자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비밀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이다(마 13:11; 막 4:11; 눅 8:10 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미스테리온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 유대인이 완악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롬 11:25).
•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살후 2:7).
• 보통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도 있다(고전 13:2).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으로 소수만이 가지는 특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고전 12:10; 14:24, 25), 신앙의 성숙으로 인해 말씀을 보다 깊이 깨닫는 것 등을 말한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초신자 보다 성경의 내용을 더 많이 알고 의미를 더 깊이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방언하는 자는 그 내용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내용의 비밀을 아신다(고전 14:2). 그러나 방언 통역을 하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신자의 몸이 홀연히 변하는 현상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고전 15:51).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체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들을 비밀(미스테리온)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미스테리온의 의미를 적어도 두 가지로는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개혁주의 영성신학자인 하워드 라이스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의 불건전한 지성주의, 불건전한 이성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윌리암 보즈만은 그의 저서인 칼빈(깰뱅)의 자서전에서 칼빈을 두 가지 모순되는 방향으로 이해가 가능한 복잡한 인물이라고 결론짓는다.
첫째는 중세의 스콜라주의 전통을 지지하는 원칙주의자로서의 칼빈이다.
이렇게 칼빈을 이해한 경우의 기독교는 정체적인 정통으로 흐르기 쉬우며 기독교 신자는 어떤 지위를 물러 받은 사람이다.

칼빈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질서와 지성을 갈망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학자적인 정통주의를 고안해 내었으며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인간의 어떠한 체험도 의심하였다.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은 기도와 신자들의 삶에 대해 말은 많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의 두려움과 외경심 이외의 신비 체험은 인정하지 않았다. . . .
그러나 칼빈의 다른 면을 강조한 사람들은 인생의 역설을 칭송하고 모호성을 이성화하기를 거부했으며 믿음의 마음으로 신비 (체험)를 받아 들였다"
(Howard Rice, Reformed Spirituality · 『개혁주의 영성 』).

하워드 라이스가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신앙의 두 측면 즉 지성적인 측면과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측면, 드러난 계시와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신비성을 인정해야 한다.


신비 체험의 특징

보수복음주의자인 윈프리드 코르두안은 그의 저서인 『신비주의』(Mysticism)에서 신비 체험의 특징에 대해 말한다(Winfried Corduan, Mysticism,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1).

“신비주의자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며 초월적인 체험을 통하여 절대자와 직접적인 교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신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한다.
(성부 신비주의, 성자  신비주의, 성령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러면서 코르두안은 신비 체험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첫째 신비 체험은 하나님과의 연합(unity) 체험이다.

물론 모든 신자는 믿는 순간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신분적으로 연합된다(롬 6:5). 그러나 이것은 신분적인 연합이며 실제로 연합을 누리는 것은 평생의 과정이다.

신자가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남녀의 결혼에 비유할 수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혼인신고를 하면 둘은 법적으로 연합된 일심동체이다.
그러나 법적, 신분적으로 하나가 된 것과 실제로 사랑과 신뢰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별개이다.
꾸준한 노력, 희생, 사랑, 헌신을 통해 법적, 신분적 하나됨을 누리고 이루어가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비록 법적, 신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해서 그로 인한 모든 혜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말씀보기, 기도, 헌신, 충성, 사모함을 통해 혜택을 실제화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법적, 신분적 개념이 아니라 체험적, 관계적 개념이다.

용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우리는 연합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저들은 연합으로 끝난다’고 비판한다. 한 단어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간단한 원리를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범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처음 믿음은 칭의의 믿음이고 나중은 성화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연합으로 이르러야 한다’.
최초의 신분적 연합에서 연합의 혜택을 실제로 누리는 연합에까지 이르러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신비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은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성으로 제대로 포착하는 것은 물론 말로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좋은 경치나 풍광을 볼 때, 너무나 좋아서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보면 실망한다.
기계인 카메라를 통해 들어온 사진은 닮은 꼴이지만 자연과 풍광의 웅장함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비체험도 마찬가지다.
그 체험은 너무나 강렬하고 전인격적이기 때문에 필설로 감당이 안 된다[beyond description].
전문가들은 이런 체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ineffable) 체험이라고 한다.
 

신앙에서 신비체험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18세기의 서구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에 젖은 정통신학은 성경의 모든 신비체험은 성경인물에 국한시키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교리 정립에만 에너지를 쏟아왔다.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그래도 이런 것이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감성시대, 영상시대에 접어들자 이성 중심, 교리 중심의 신학은 신자들의 실제 신앙생활과 괴리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파고 들어온 것이 바로 동양 신비주의이다.
동양 신비주의는 산업사회와 기계문명의 단조로움, 차가운 이성주의에 식상한 현대인들에게 직관적, 신비적, 초월적 체험과 지식을 제공한다.
신사도운동, 성령운동은 현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아직도 수백 년 전 이성시대에 정립된 신학의 잣대로 현대의 신사도운동·성령운동을 비판한다. 갓 쓰고 한복 입고 곰방대 물고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쓰는 옛날의 선비가 영화와 동영상에 익숙하고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일하는 21세기 현대인을 비판하는 격이다.
은사운동·성령운동에서 하는 사역은 ‘복음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담는 그릇,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사실 동양적 신비주의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갖는 신비체험을 오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이런 것도 모르고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고 감성과 직관을 무시한 치우침’,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 ‘잘못된 유추의 오류’로 인해 신비체험, 초자연적 체험이나 인도를 말하면 금방 뉴에이지다, 사교다 라고 ‘성급하게 일반화’ 해버린다.

성경은 논리나 교리 서적이 아니다.
이제 대적자들은 성경을 좌뇌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우뇌로 보는 훈련도 해야 한다.
성경을 좌뇌로 보면 교리만 보이고, 교리로만 보면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나 우뇌로 보면 비유, 직관, 이미징, 상상, 초월적 체험에의 동참 등의 역동성을 통해 신앙에 생기가 돌고 열정이 쏟아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좌놔와 우뇌는 같이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지나치게 좌뇌중심적이다. 중산층 백인남성신학의 나쁜 부산물이다.
물론 신사도운동·성령운동가들 중에는 지나치게 우뇌중심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교리와 체험, 부흥과 개혁은 같이 가야 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동양의 신비체험에서는 ‘무아지경’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대적자들은 신비 체험을 통해 사람이 무아지경에 들어가면 마치 무뇌자(無腦者)가 되어 이성, 판단, 사고가 정지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체험에 들어가면 이전에 육신적 생각, 탐욕, 죄악된 생각들이 정화되어 오히려 정신과 생각이 더 맑아지고 감성이 풍부해지고, 집중력이 강한 상태에 들어가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더 분명해지고 성경 말씀도 더 잘 깨달아진다.
말 그대로 육신적 자이를 잊어버리고 영적 자아, 순수한 자아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은혜 충만하게 받았을 때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때 무뇌자가 되어 이성, 판단, 사고가 정지되었는가? 아니다.
임재체험, 신비체험은 그런 정도, 상태가 강화된 체험이라고 보면 된다.

필자는 임재기도·관상기도를 통해 수시로 이런 상태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강을 누린다.
무아지경의 전 단계에만 들어가도 두뇌에서 알파파가 방출되어 집중력, 창의력이 개발되고, 몸에서는 세로토닌 호르몬이 방출되어 충동적인 노르아드레날린(스트레스, 분노 시 방출), 방방 뛰게 만드는 도파민의 균형자 역할을 하여 내면의 기쁨과 평강을 제공한다. 이런 유익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특히 입시생 ,고시생들이 명상기도, 호흡기도에 몰두한다.

물론 세상 방식은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면 귀신의 공격을 받기 쉽다.
그러나 필자의 체험, 다른 신실한 목회자/신자의 간증에 의하면, 신자는 예수의 피와 성령의 보호하심을 간구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잘못될 가능성은 드물다.

만일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이 좋은 것을 배제하는 것은,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고, 구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이렇게 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겁이 많아서 아예 하지 않는다.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신비체험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사람이 겁쟁이, 좀팽이가 된다.

지금 대부분의 대적자들이 이런 모습이다.
초월적 체험을 사모하면서도 겁이 많아서 혹시 마귀에게 잡힐까 봐 두려워한다.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들)(마 7:11), 성령(눅 11:13)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도 있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초가도 좋지만 빈대가 무섭고, 장은 좋아하지만 구데기가 무섭다는 식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신들이 두려움을 주는 마귀에게  잡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신비체험에 들어가는 상태에 대한 용어도 천차만별이다.
무아지경, 황홀체험, 의식 변형상태, 아하!체험, 몰입상태, 열반, 입신 등.
기독교에서는 아직 통일된 용어가 없어서인지, 입신체험, 성령체험 등으로 부르는데 필자는 임재체험이라고 부른다. 성령체험에는 방언 같은 능력을 받는 능력체험, 요한 웨슬레 같은 성화체험, 임재체험과 같은 신비체험 등 다양한 체험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용어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진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에 요즈음 세계적인 심리학자, 비종교적 명상가들, 종교적 명상가들은 물론 초월적 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일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비체험이다. 이런 것은 돈이나 학문으로 살  수 없고, 인간의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필요를 잘 채워주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세계적인 유명 인사는 물론 세계적인 대기업인 구글, IBM은 물론 한국에서도 사원들의 정신복지, 창의력, 집중력 개발을 위해 지금 명상과 영성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이단사냥꾼 행크 해너그라프는 모든 하나님 체험을 ‘의식변형 상태’란 심리적 용어로 잘못 설명한다.
심리학에서는 회심체험도 이상한 심리현상으로 설명한다.
미국에서 미국 교단에 소속된 어떤 한인 목사가 성령체험을 했다.
그랬더니 본부에서 심리 검사를 받으라고 난리였다고 한다.

성경과 상황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시는 것은 마귀에게  빼앗긴 좋은 것을 탈환, 회복하시는 것이지 마귀의 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거꾸로 생각한다. 하나님이 마귀의 것을 차용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한때 록앤롤이 청년들의 마음을 도둑질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교회에 찬양과 경배를 허락하셔서 록앤롤에 빼앗긴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셨다.

-지금 우상숭배에 찌든 후진국은 물론 미국, 유럽에서도 점성술 타롯카드 등이 붐을 이루고 있다.
한국은 한술 더 떠고 있다. 토종인 점, 굿, 토정비결, 사주팔자, 주역에 더하여  수입제인 타롯카드 점성술사들이 온라인은 물론 백화점 지하철 출구에 포진하여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추슬러주고 있다.

한국에는 기독교 신자 30%가 점을 친다고 한다.
앞 일에 대해 불안하고 답답한데 교회에서는 해답을 얻지 못하니 믿음이 약한 사람들, 예수 믿기 전에 점을 많이 친 부녀자들, 큰 사업과 주요 결정을 앞둔 사업가가 정치가들이 용한 점쟁이를 찾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회복시키신다. 점쟁이들에게 빼앗긴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신자가 예언하면 점 치는 것으로 착각한다.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살 빼기 위해 요가학원을 찾는 크리스천 자매들,
-알파파 방출을 위해 명상센터를 하는 크리스천 학생들,
-마음의 평강을 위해 명상을 하는 목사와 크리스천들,
-불안한 미래를 해소하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 크리스천들,
-신비체험을 하기 위해 요가나 쿤달리니 체험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

교회가 이런 것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다.
교회가 이런 것들을 채워주지 못하니까 다른 데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런 것을 주시기 위해 사교와 비슷한 방법-일반은혜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사실은 원래 모든 방법이 하나님의 것인데 마귀가 먼저 불법 도용한 것뿐이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내용과 방법, 알맹이와 그릇을 구분하지 못하고, 방법이나 그릇이 같으면 내용이나 알맹이도 같을 것이라는 ‘일반은혜 혜택에 대한 오해’, ‘잘못된 유추의 오류’로 인해 ‘이런 행위 자체를 비성경적, 마귀적으로 성급하게 일반화는 오류’를 범한다.
 

또한 알맹이나 내용이 같아도 '어떤 의도'로 '어떤 관계'에서 하는가도 중요하다.
섹스(sex)를 예로 들어보자.

마약 먹고 하는 섹스, 홍등가의 섹스, 인도 요가의 섹스요법, 이방종교의 성전(聖殿) 섹스, 부부간의 섹스, 혼외 섹스, 비신자의 섹스, 크리스천의 섹스가 있다.
남녀가 만나서 하는 섹스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기쁨과  황홀감-내용-이 동반되고 하는 방법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사교에서, 마약 먹고 섹스하기 때문에 크리스천 부부도 섹스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신자라고 하면서도 섹스에 무관심하여 가정이 깨어지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신비체험도 마찬가지다.
신비체험, 황홀체험은 마약, 동양종교의 명상이나 뉴에이지는 물론 하나님도 주신다.
그렇다고 신자가 신비체험 하는 것을 부인하고 금지해야 하는가?
그런데 금지해야 한다고 목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골수 개혁주의자들,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한다. 자기들이 맛을 못 보아서 그렇지 맛을 제대로 보면 ‘이 좋은 것, 왜 내가 안 했지’라면서 후회할 것이다.
 

신비주의의 분별

어떤 신비 체험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인지, 또는 악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저명한 개혁신학자인 찰스 핫지가 그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한 비성경적 신비주의의  분별법은 다음과 같다.

 • 성경의 충분성을 저해하며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주장하는 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가?-몬타니즘의 오류. 그러나 성경 말씀에 종속되는 ‘사적인 계시’-개인 예언이나 음성 듣고 환상 보는 것 등-은 지금도 지속된다.

성경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직관이나 명상에 더 의존하는가?-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오류.
그러나 말씀 이해도 교리와 직관-깨달음-의 균형잡힌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의 제도, 법령, 학문들을 무시하며 말씀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조명’(Inner light)을 더 중시하는가?-미국 퀘이커 교도들의 오류.
제도와 법령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우선하면 관료주의, 형식주의, 전통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현재 한국 교회는 이러한 폐해에 빠져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

죄와 회개는 무시하고 신비적이고 황홀한 체험만을 추구하는가?-독일 신비주의자들 및 틸리히 같은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의 오류.
한편, 죄와 회개만을 말하고 신비적 황홀 체험을 무시하는 정통 신학, 정통 교회도 문제다.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는 범신론적인 주장을 하거나, 하나님 아닌 것에 수동적으로 나의 모든 모든 것을 맡기는가?-침묵주의자들, 힌두교, 불교와 같은 범신론자들이나 뉴에이지 운동가들의 오류.

기독교에 잘 알려진 토마스 머튼같은 명상가들은 '범신론적 경향'이 다분하다.  신자는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신자가 연합체험을 추구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부부는 한 육체(헬라어 사륵스, flesh)라고 말하는데 그렇다고 부부가 합쳐져서 화학적으로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가? 임재기도를  통해 신자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근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초월성. Transcendence]이시지만 동시에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내재성.  Immanence]이시다. 개혁신학과 전통 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초월성, 거룩, 주권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신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 사랑, 사람의 자유의지는 지나치게 무시해왔다.
임재기도, 관상기도는 이런 단점과  부족함을 잘 보완해 준다.

하나님의 초월성, 거룩이 부성(父性)이라면 하나님의  내재성, 사랑은 모성(母性)이다.
현대사회는 점점 모성으로 치닫고 있다.
부성만 강조하면, 엄마 없이 엄한 부친 아래 자란 자녀처럼, 신자들의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활력을 상실한다.  지금 전통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 결과 교리 바르고 전통은 바르다고 하지만-실제로 바른지는 의문이지만-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결핍으로 인해 바른 행위가 따르지 못하는 죽은 정통교회, 행위로는 죽은 신자를 양산하기 쉽다.

하나님의 부성도 모성으로 보완되어야 신자들의  정서가 풍부해지고, 역동성, 활력을 회복한다. 신비체험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체험이다. 신비체험은 오늘날 상처와 스트레스가 많고, 교리와 논리로 인해 메마르고 건조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체험이다.
 

성경적 신비 체험의 유익 

• 처음 사랑이 유지된다(계 2:4-5).

• 뜨거운 신앙을 유지한다 (계 3:15-16; 시 42:1).

• 세상적 부요보다는 영적 부요를 더 사모한다(계 3:17-18).
신비 체험이 결여된 사람들은 전통, 교리, 학력을 유난히  내세운다.

• 위기를 잘 극복하고 심령의 치유를 경험한다

•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고후 3:18; 요일 3;2-3).

•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잘 유지한다(시 25:14; 요 15:15).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신비 체험이 결여되면 신앙은 종교화, 율법화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인도함 보다는 전통과 법령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결국은 교리와 전통은 바르지만 열정과 행위는 결여된 죽은 정통을 양산한다. 죽은 정통이 건전한 신비 체험으로 보완될 때 살아있는 정통이 될 수 있다.

 

[관련기사]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5610> 서울시 송파구 백제고분로39길 21-19, 201호  |  대표전화 : 0707-554-0585  |  팩스 : 0504-037-0050  |  Mail to : gloriatimes@naver.com
발행인·편집인 :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 구요한 발행인  |  후원계좌 : 국민은행 529401-01-218720 예금주 임마누엘선교회  |  사업자등록번호 : 123-89-06414
Copyright © 2017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