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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부흥①] 개혁이냐 부흥이냐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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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10  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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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부흥①]

개혁과 부흥

- 교리를 강조하는 개혁과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은 같이 가야 한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갈구하고 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애창하는 노래  부흥 은 부흥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속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 . . . .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한국 교회는 교인 수가 늘어나면 ‘우리 교회 많이 부흥했다’는 식으로 부흥이란 말을 사용하다 보니 부흥집회를 하고 교인의 숫자가 늘면 ‘우리 교회에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흥(revival)은 장기집회나 개인의 심령부흥이나 교회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한 대로 ‘집단적으로 사도행전적인 성령충만’을 받은 부훙의 결과 그 은혜가 지역교회를 넘어 다른 교회와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과연 진정한 부흥이 왔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는가?’이다.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아니요!’이다. 오히려 부흥을 간절하게 사모하는 기존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흥을 제일 대적한다는 사실이다.

부흥을 강조하는 한국의 김00 목사는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북미주의 어느 교회에  단 한 번  참석해 보고는 ‘부흥은 이래야 된다’는 과거의 책들이 제시한 근거에 의해 평가, 비판한 후  ‘그곳에는 부흥은 없고 (희한한 영적) 현상만 있더라’고 성급하게 결론지어 버린다.

이것은 마치 ‘교회는 이래야 된다’는 당위성을 정해 놓고 아무 교회나 단 한 번 방문한 후 ‘그 교회에는 사랑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에는 거룩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교회를 평가하면 교회 다운 교회가 얼마나 될까?
아마 지상교회에서는 이런 기준에 맞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흠이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지상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웨슬레처럼 “하나님, 불완전해도 좋으니 부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부흥에 대한 오해

왜 이런 오해가 점철되는가?
부흥을 사모하는 종교지도자나 기존 교인들이 새로운 운동을 핍박하고 오해하는 주된 이유는 새로운 부흥이 그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말을 영어로는 offend라고 한다. 새로운 부흥에는 대부분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강조점과 생소한 영적 현상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이 전통과 기존의 가르침에 익숙해 있는 신자들의 심성과 기대와 프라이드를 건드린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알고 수백 년 동안 연구하고 보존해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그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 하나 깨뜨려버리셨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는 일이었다.

사도들은 어떠한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보기에는 자기들처럼 이름 있는 랍비의 신학교를 다니지도 않고, 자기 교파의 안수도 받지 않은 어부출신의 무식쟁이들이 자기들과 다른 ‘도’를 전하는데, 문제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자기들의 교권과 기득권에 심각한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들은 사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정죄하고 만다.

종교개혁은 어떠한가?
막강한 로마교회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도 믿고 자신의 공로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루터라는 한 수도승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어느 지도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루터는 자기 목숨을 노리는 로마 교회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평생을 도망 다니면서 불안에 떨며 살았다.

웨슬레의 전도운동은 어떠한가?
당시 교회는 죽은 정통의 늪에 빠져 전통과 예전(예배의 형식)에 빠져 있었다. 전통과 기득권에 연연하는 성공회가 보기에, 성령의 은사와 야외 예배를 주도하는 웨슬레의 전도방식이 영 못마땅했다.

오순절 운동은 어떠한가?
오늘날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말도 못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다. 이들은 ‘개구리 소리 같은’ 방언을 하면서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체험)의 '유일한 외적 표적'이라고 주장했으니 기존 교계가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이후 이 운동은 기존 교단 내로 전파되어 은사운동, 제3의 물결 등의 본질은 비슷하나 강조점은 다른 새로운 운동으로 전개되어갔다. 한편 1980년대에  제3의 물결 을 주도한 빈야드 교회는 1994년  자기 교파 내의  토론토공항교회 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자기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자 우여곡절 끝에 그 교회를 제명해 버렸다.

그러나 현재, 제명 당한 토론토 교회는 여전히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과 교회를 살리고 있는 반면 빈야드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축소되어 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신사도 운동에 대한 찬반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기독교 학술원(www.acdch.com)이 2014년 2월11일 개최한 제35차 월례회의 “신사도운동의 영성과 한국교회”를 통 신사도 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신학적 깊이나 지식에서 격이 떨어지는 일부 교계 언론에서 신사도 운동을 이단종합백화점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도하시는 부흥이 오면 비판하고 반대하는가?
전통에 젖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 그곳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불변의 진리인 양 착각하여 그 잣대로 현재, 이곳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지만 사역의 양상이나 강조점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해할 일이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 전통에 이렇게 역사하셨어. 하나님은 앞으로도 이렇게 역사하실거야’라는 가정 하에 성경을 해석하고 전통을 세우고 목회 방침을 정하다 보니 이런 것과 전혀 다른 생소한 가르침과 실천을 주장하는 새로운 운동을 오해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결국 부흥을 체험한 마지막 기존 세력이 언제나 새로운 운동을 핍박하는 기현상이 반복됨을 교회사는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한국 교계의 과제

오늘날 한국교계는 21세기를 담당하는 교회로서 자리 잡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한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교계 전체에 파급되어, 각 교파마다 이름이나 모습은 다소 다르지만  xx교단발전위원회 ,  21세기 교회의 사명 ,  xx갱신협의회 라는 주제를 내걸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신심(信心)을 잡기 위해 절치부심한 적이 있는데 최근에는 이런 노력 마저 포기한 상태인 것 같다.

성경과 상황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누구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회학적,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변하지 않는 성경의 진리를 유연하게 적용하셨다.

 

역사를 보라.
하나님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고조해 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믿음과 공로의 혼합으로 인해 교회가 배금주의, 물량주의로 부패해 있을 때 개혁가들을 통해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의 구원을 주도하셨다.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교권과 교리 논쟁의 죽은 정통으로 치 닫았을 때, 하나님은 웨슬레를 통해 비록 결함은 있지만 삶과 변화의 성화를 강조하는 ‘완전 성화’를 주도하셨다.

이신칭의가 죽은정통으로 흐르고 완전성화가 율법주의와 교육주의로 전락했을 때 하나님은 오순절 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동성과 증인 되는 능력을 통해 교회에 활력을 불러 일으키셨다.

이처럼 부흥(revival)은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부흥은 사람들이 계획하여 개최하는 전도대회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하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부흥이란?

20세기의 뛰어난 설교자이자 청교도인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을 이렇게 정의한다.

"부흥을 정의하느라고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 부흥이다. 일차적으로 성령께서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 속에서 그러한 역사를 한다. 그러므로 부흥은 신자들의 부흥이다. 생명이 없던 것을 부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흥이란 정의상 무엇보다 먼저 나른해지고 잠들어 거의 죽어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활기 있게 하고 깨워 소생하게 하는 것이다. 갑자기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한다.

그들은 이전에 그저 머리로만 믿던 진리를 새롭고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아마 그 깨달음의 차원도 더 깊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겸손해지고 죄를 깨달으며 자신들의 상태를 보고 무서워 하게 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모든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이 위대한 구원을 알게 되고 그 구원의 능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소생하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게 된 결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능력이 목사들의 설교 속에 들어간다.

그 결과 전에 교회 밖에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회심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따라서 부흥의 주요한 두 특징은 첫째 교회 지체들이 이처럼 특이하게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고, 둘째 이제까지 교회 밖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이다.

(그밖에 내가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더 큰 교회당 건축, 새로운 사업착수, 많은 사람의 목회 헌신과, 그 훈련시작 등이다). 우리가 부흥이라는 말을 쓸   뜻하는 것은 본질상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그 역사적 신학적 연구,” 『청교도 신앙』, 13-14).

이처럼 부흥은 통상적으로 기존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난다.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몇 가지 부흥의 실례를 살펴보자.

 
-부흥의 제 양상

(케이스 1)

H 씨는 대도시인 C시에 소재하는 부흥하는 교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H씨는 이후에 목사가 된 후 C 국의 선교사로 나갔다.  H 목사는 자기의 선교지역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구 반대편에 거주하는 친지가 보내온 조그만 책자 하나가 H 목사에게 배달되어 왔다. 그 책은 지구 반대편에서 성령이 어떻게 신자들에게 불로써 역사하셨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큰 감명을 받은 H 목사 부부는 베네수엘라, 노르웨이, 인도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성령에 관한 체험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1909년, 마침내 H 목사의 기도는 응답을 받기 시작했다. 주일학교 출석이 7월에는 363명에 이르렀고, 8월에는 425명, 9월에는 527명에 이르렀다. 10월에는 예배 참석 인원이 팔, 구백 명에 이르렀다.

이런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H 목사는 기성 교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H 목사는 이에 아랑곳 없이 독립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P 교단을 설립하였다. 교인은 해마다 굉장한 성장을 이룩해 갔다. 오늘날 P 목사가 세운 교단의 총 교인 수는 약 65만 명이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H 목사를 쫓아낸 교단은 교인수가 현재 약 2만 명에 불과하다.
 

(케이스 2)

1906년, S 목사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다는 P 목사를 만난 후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L 시의 A가에 소재하는 이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에서 유명해졌다.

기자인 B 씨는 S 목사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 . .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치료 받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과 능력으로 회복되고 세례를 받는 축복을 얻었다. 주안에서 크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약한 자들이 강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밝은 촛불에 의한 것처럼 살펴지기 시작했다.

실로 사람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내면의 비밀스러운 동기까지 면밀히 검증되는 엄청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의 이름이 더 높여지고, '그 피'가 칭송되고, 성령이 다시 한번 더 높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 운동을 반대하는 L시의 유력 일간지는 "별난 혓바닥들의 중얼거림--신종 광신파들의 활거, 어젯밤 A가에서 일어난 꼴불견의 현상 이라는 제목 하에 이 운동을 사정없이 매도했다.

오늘날 A가에서 시작된 부흥으로 인하여 이 운동에 동참한 교인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1990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교인 수가 3억 6천만 명으로 추정되며, 천주교 다음으로 가는 제일 큰 기독교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케이스 3)

1906년, 이곳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은 성경공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십여 년 전부터 전국의 주요 시와 읍에 성경공부의 열기가 더해갔다. 1904년에는 교인들의 60% 이상이 한두 개의 이상의 성경공부에 참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북부 지방의 한 선교회에서는 800여개의 성경공부반이 개최되어 정규 신자의 두 배가 넘는 약 5만명 이상의 인원이 참가하였다.

1906년 P 시의 K 목사는 인도와 웰쉬 지방의 대부흥의 소식을 듣고 새벽기도를 통하여 자기들에게도 대부흥의 물결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마침내 1907년 P 시에서 개최된 성경공부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였다.

통성기도하는 소리가 많은 물소리 같았으며. . . 주에 대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통분과 근심이 일어나서. . .물건을 훔친 도적과 서방질한 아내가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 . B 선교사를 미워한 K 목사는 땅바닥을 치며 통분하며 회개하였고. . . 선교사와 현지인 간에 응어리진 심령들이 사랑으로 녹아졌고. . . 이 광경을 목격한 외국 선교사들은 마침내 이곳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심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소문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고 그 후 몇달에 걸쳐 선교사들이 전국 유명 도시에 초청되어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신학교가 속속 설립되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양적인 성장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1907년의 부흥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된 양적인 성장의 중앙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07년의 부흥으로 인해 교회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선교사와 현지인 간에 이해와 교제의 폭이 더욱 넓어졌으며, 신자들의 도덕이나 윤리관이 개선되고, 종교적인 습관이 확립되었다.

이 부흥은 불신자의 회심을 위한 부흥이라기 보다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새로워졌다. 현재 K 목사가 주도한 부흥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교단은 국내 최대의 신자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케이스 1은 남미 칠레의 부흥운동이다(C. 피터 와그너 저, 이재범 역, 『성령의 능력과 교회성장』, 임마누엘, 1987, pp. 23-37).

오늘날 칠레를 위시한 남미 개신교 신자의 약 80%가 후버(Hoover) 목사 등이 설립한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다.

케이스 2는 미국 로스 엔젤레스시의 아주사(Azusa)가에서 윌리엄 세이무어(William J. Seymour) 목사를 선두로 하여 불이 붙은 미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의 부흥운동이다 (Vinson Synan, In the Latter Days, Servant Books, 1984, pp. 48, 74.).

케이스 3은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의 주도로 일어난 한국의 부흥운동이다 (Roy E. Shearer,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 Grands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Co.,1966, pp. 49-59).

이 세 가지의 부흥운동의 공통점은 19세기 중엽 영국의 웰쉬(Welsh) 지방에서 시작되어 20세기 전후 미국의 D.L.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해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한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이 사실을 환기시키는 이유는 오늘날 개혁파와 부흥파가 양단에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이유는 동일한 성령의 부어주심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개혁파 또는 개혁주의자는 영성 회복보다는 바른 교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며 주로 장로교인과 일부 침례교인이 여기에 속한다. 부흥파 또는 부흥주의자는 교리보다는 심령의 부흥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주로 오순절이나 은사주의 교인이 여기에 속한다--필자 주).

한 하나님이시지만 역사(役事)는 다양한데 어느 한 역사만 강조하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다 보면 다른 형태의 역사는 부인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는 부흥 이전에 개혁을 주창하고 부흥파는 개혁 이전에 부흥을 주창하여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면 문제의 해결은커녕 오해의 골만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흥이 먼저냐 개혁이 먼저냐?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란처럼 어느 한가지 정답을 내기가 곤란하다. 두 가지 모두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볼 때 우리는 부흥이 개혁에 선행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소수에 불과하던 신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의 지역에 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괄목할만한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부흥).

양적인 성장과 함께 개교회에서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이고 윤리적이고 관계적인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 하나님은 사도들을 들어 쓰셔서 서신서를 통해 혼란과 갈등 속에 쌓여 있는 교회들에게 기독교의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개혁).

교회사를 통해 볼 때 개혁과 부흥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루터, 즈윙글리 및 칼빈으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 교리를 통해 교회는 구 천주교의 온갖 악습과 형식에서 벗어나 영적인 대각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의 운동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부흥이 개혁을 선행했다. 웨슬레의 부흥운동, 죠지 윗필드와 죠나단 에드워즈가 주도한 제1차 대각성 운동, 챨스 피니의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 20세기의 오순절 성령운동 등을 살펴볼 때 부흥이 앞섰으며 개혁이 미쳐 이를 따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많은 경우 종교개혁을 규범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개혁이 따르지 않는 부흥 운동을 비판해 왔다. 그래서 개혁 신학은 교리적인 정교함은 가졌을지 몰라도 부흥에 대해 자주 부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운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개혁 신학의 좁은 틀 안에 묶어 버리는 오류를 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보다는 먼저 개혁을 중시하기 때문에 많은 개혁파들이 부흥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먼저 개혁이 필요하므로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부흥을 위해 기도할 자격을 갖추려면 먼저 바른 교리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혁과 부흥은 극히 어려운 문제이며 그 선은 분명하지 않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참된 영적인 부흥이었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역사이다. 교리 교육의 변화만으로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외의 부흥운동을 보면 대부분이 먼저 부흥이 있었고 개혁이 따랐다(예, 휫필드, 웨일즈의 하웰 해리스 등)” (같은 책, P. 25).

 

이어서 로이드 존스는 부흥과 교리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이 논증을 사용하자. 만일 개혁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한다면 알미니안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먼저 어떤 일을 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이다. 또한 알미니안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고, 개혁파의 근본적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실로 믿는다면 교회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내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같은 책, p. 26).

 

개혁파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이유

로이드 존스는 이어서 유독 개혁보수파가 부흥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 두 가지를 더 제시한다 (같은 책, p. 24.).

첫째,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보편적인 이유는 '부흥의 현상'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부흥과 함께 가끔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생소하고 이상한 현상들에 대하여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부흥  전체를 기각시켜 버린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도 한국 교계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이단이나 사이비 시비의 많은 부분은 기독교의 일차적이고 원론적인 교리적인 문제보다는 부수적인 가르침이나 그들의 집회 형태나 그들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생소하고 이상한 영적 현상에 대한 문제들이 주류를 이룬다.

조용하고 점잖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규범으로 생각해온 사람들이 보기에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고, 죄로 인한 회개로 통곡하고, 찬양할 때 박수치고 손을 들고 심지어는 몸이 쓰러지거나 웃음이 터지는 현상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고 꼭 이렇게 믿어야 하는가 하고 회의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약성경 어디서도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는 신약 교회는 부흥 중에 있었기 때문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신약 교회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받은 교회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영적 상태는 과연 신약 교회와 같은가? 바른 교리를 전한다 해도 교회가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정통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고 완전히 정통이면서도 아무 쓸모 없는 교회일 수도 있다.

사실 필자는 많은 신학자들이 서신서울 해석할 때 사도행전의 기록을 역사적인 배경이나 자료로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사도 바울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식으로 사동행전을 참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영적 배경이다. 사도 바울은 아카데믹한 상아탑의 깊은 곳에서 서신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서신서에 등장하는 교회의 대부분은 사도 바울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서 세운 교회들이란 사실이다.

 

부흥에 관심을 잃은 이유

이어서 로이드 존스는 유독 개혁파에 속한 사람들이 부흥 문제에 대해 관심을 잃은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한다(같은 책, pp. 21-23).
 

첫째, 이론적이고 지적인 접근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의 위험성은 무미한 전통과 이지주의에 빠져 자신의 영적 삶과 교회의 삶에 대해 갈수록 태만해질 위험이 있다. 진실로 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귀가 그들에게 와서 관심을 멀리까지 끌고가 그들이 순수한 신학자들이 되어 지적으로만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둘째, 그 뚜렷한 증거의 하나는 지난 19세기에 현대주의를 대적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버렸다.

그래서 적극적인 메시지보다 변증이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변증학이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라 변증학적인 관심에 의해 지배 받는 교회는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마귀가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는 소극적으로 되어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합리주의나 이신론(deism)을 대적한 보일 강좌나 버틀러 (Butler ) 감독의  유추 (Analogy)를 통한 변증학이 아니라 휫필드나 웨슬레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그의 일을 이루셨다.

사실 필자도 신학교에 다닐 때 학생들의 많은 불평이, 교수들이 강의 시간에 자유주의를 대적하는 변증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 학생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진을 빼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통찰력을 피력한다.
 

셋째, 너무 지나친 감정을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감정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이상한 방법으로 감정에 대한혐오감을 발전시켜 불건전하고 그릇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또한 균형을 잃고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들은 오순절주의와 그 과도한 탈선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한다. 그러한 극단 즉 어떤 것에 대해 지나친 반응을 보임으로써 성경이 제시하는 평형을 잃어버린다.
 

넷째, 파당과 레벨링이다.

그들은 웨슬레의 부흥운동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틀린 요한 웨슬레나 챨스 피니 및 알미니안 주의의 부흥운동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청교도 자신이 부흥에 대하여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시대에 부딪친 일들과 싸워야 했다. 그들은 로마 교회와 국교도(High Church)들의 교리와 대항하여 싸워야 했다. 그들은 또한 퀘이커교도들 같은 신비주의 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침에 대하여 두려워했다. 그 결과 성령에 대한 그들의 저작 중 대부분이 논쟁적 관심을 위한 것들이었고 접근방식도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청교도들이 부흥을 다루지 않은 일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또한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특정한 전통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질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도 너무 지나칠 정도였다. 그들은 모든 일을 "적당하고 질서있게  해야한다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령을 소멸한 환경이 많았다.

(3)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인종학적으로 성령을 소멸하기 쉬운 기질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영국) 내에서는 부흥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도 학자적인 조용한 성품이나 점잖은 예배의 형식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이나 그러한 예배 형식 자체를 성경의 유일한 가르침으로 믿고 소란스러운 부흥의 현상들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균형 잡힌 견해

이어서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즉 부흥같이 항상 예외적이고 비상한 것에만 관심을 가져 "작은 것들의 날들 을 멸시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는 부캐넌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어떤 사람들은 부당한 편벽성과 확신을 가지고 보편적이고 획기적인 부흥이 성령의 은혜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며 모든 것이 믿음의 기도에 대한 약속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보다 갑작스럽고 획기적인 은혜의 역사를 배제하거나 거부할 정도로 복음사역의 조용하고 점진적인 성공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성령의 주권을 지나치게 간과해 버린다. (여러분은 오늘날 이 두 그룹을 알지 못하는가?)

전자는 특이하고 두드러진 것만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후자는 정반대의 오류에 떨어져 보다 통상적이고 조용한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회심의 두 양식을 모두 인정하고 성령의 주권적인 지혜와 은혜에 그 양식을 맡기는 것이 좋다. . . 두 방식--점진적 회심과 돌발적 회심--은 모두 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 . .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있어서 보다 느리고 고요하고 점진적인 방법을 찾는데 매우 익슥한 나머지하나님의 성령께서 갑작스럽고 전반적으로 역사하신 일을 들을 때 놀라며 심지어는 어느 정도 회의적인 마음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 .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같은 책, p. 28).

 

개혁과 부흥의 조화를 위한 실질적인 제언

필자는 개혁과 부흥의 소용돌이 속에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개혁 신학의 정수를 가르치는 신학교에 다녔고 동시에 부흥의 현장을 많이 접했다. 학교에서는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신학 공부를 좋아했고 현장에서는 신령하고 뜨거운 영적 체험을 즐겼다. 그러면서 필자의 관심은 항상 ‘이 둘을 어떻게 하면 조화시킬 수 있을까?’였다.

한쪽에서는 교리를 강조하고 다른 쪽에서는 체험을 강조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업신여기면서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톰 네틀즈과 말한 것과 같이, 개혁 신학은 열광적인 부흥을 불신하고 부흥의 주창자들은 까다롭게 따지기 좋아하는 개혁 신학을 두려워하고 피하기 때문이다.
 

개혁과 부흥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역의 두 측면이다. 어떻게 하면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혁파는 부흥파를 불신하고 부흥파를 개혁파를 회피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흥파들은 체험 없고 (외적) 역동성이 결여된 개혁파들을 메마른 정통으로 간주한다. 말로만 바른 교리, 바른 전통을 내세우지만 생각이나 삶에서 개혁파의 최대 본질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실제로 드리는 사람이 드물다.

개혁파들은 바른 교리 없고 바른 신앙 고백 없는 부흥파들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인인가 의심한다. 개혁파들은 부흥파들이 자기들처럼 신앙고백서가 있고 교리 체계가 확실하기를 원한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앙은 곁길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서로의 의심과 우려는 정당하다.
필자는 중간의 입장에서 서로의 우려가 실제로 일어남을 목격했고 또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부정만 할 것인가?

권면하건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개혁파는 현상만 보고 부흥파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실제로 그런 현장을 트집잡고 비판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이해하고 은혜 받으려는 자세로 현장을 답사해 보기를 권유한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하지만 이해심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얼마 가지 않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알기에 본인이 직접 영적 역동성을 체험을 한 후에, “이제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껍데기였다.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실제로 체험해 보니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이렇게 좋은 것을 여태까지 몰랐구나”하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흥파도 개혁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가 알기에 부흥파치고 개혁신학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무엇보다 먼저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기적중지론’과 체험을 비하하는 개혁 신학이 부흥파의 마음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모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한국의 00파에 소속되었다가 공부한 신학생이 있었다. 그는 신앙 생활하면서 장로교인은 이론과 전통만 내세우는 껍데기 신앙인인 줄 알았는데 신학을 공부해 보니 장로교 신학이 너무나 좋다는 것이다.

자기가 소속했던 00파는 초신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기에는 좋았는데 지나고 보니 깊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부흥파는 초신자는 물론 실족한 사람들, 메마른 정통에 지쳐 있는 사람들의 심령을 소생시키고 갱신시키는 능력이 있다. 한편 개혁파는 깊은 성경 연구로 인해 성화의 장거리 경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다. 필자는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른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지성과 감성과 체험이 조화를 이룰 때 바른 삶이 영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가 부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

로이드 존스는 어째서 개혁파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부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같은 책, 29-31).

첫째, 부흥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잘 입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부흥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아무리 놀라운 변증가요 굳센 정통의 명수가 기도하고 글을 쓰고 전도대회를 개최해도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이다.

특히 개혁파들은 교리를 바르게 정의해 놓으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말을 듣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았다. 듣고 행하는 자가 의로운 자라고 하셨다.

개혁파가 아무리 교리를 미끈하게 잘 정의해 놓았어도 그 교리대로 살게 할 수 있는 역동성이 없으면 오히려 머리가 커져서 반대자들은 비판하고 정죄할 뿐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바로 개혁 신학의 최대의 맹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당대 최고의 기술로 건조된 어선에서 고기잡이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적, 이론적으로 어떻게 고기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세미나를 연일 개최하고 있었다. 이론에 이론을 더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의 중고 똑닥 배가 수시로 나가서 많은 고기를 잡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들은 그렇게 엉성한 똑닥 배가 잡은 고기는 ‘어쩌다가 재수 없게 걸려든 고기.’ ‘멍청한 고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매일 고기잡이를 나가서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러자 세미나 참석자들은 우리도 한 번 나가서 실제로 고기를 잡아 보자고 했다. 여태까지의 기술을 동원하여 실제로 어느 정도 고기를 잡았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해서 고기가 잡혔느냐를 분석하기 위한 세미나를 또 개최했다. 그들은 지금도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실질적인 전도나 삶보다는 정교한 신학을 다듬기 위해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는 개혁 신학을 풍자하기 위해 어느 개혁 신학자가 만들어낸 우화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최고의 기술로 생산되고 여러 가지 최첨단 장비를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휘발유의 옥탄가가 낮으면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기본적인 기능만 갖추었더라도 최고의 옥탄가를 가진 휘발유를 사용하는 자동차가 훨씬 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더라도 그것이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는 성령의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고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학이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동성이 죄인을 변화시킨다.

셋째,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이지 단순한 도덕적인 설득이나 재무장이 아님을 부흥보다 잘 입증하는 것이 없다.

넷째, 부흥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잘 나타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부흥에는 항상 돌발성과 의외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부흥처럼 은혜의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없다. 모든 참된 회심을 통해서 이것이 드러난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부흥을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강조한다. 그러면서 부흥에 대해 이와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청교도의 설교의 본을 따라 충만하고 온전한 복음을 설교하는 정규적인 일을 계속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을 선전하고 변호하기 위해 성경적이고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하자. 우리의 변증학을 바르게 사용하자. 모든 것을 하자. 우리가 관여하는 개혁의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가자.

그러나 동시에. . . 균형을 유지하자. 다른 어느 것으로도 우리가 싸우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으므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자 . . . 우리는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서약하자. . .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을 바라고'기도해야 할 긴박한 의무에 대한 사도들의 말을 많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같은 책, 3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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