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뉴스 > 이슈
죽은정통이냐 살아있는 정통이냐고백은 바르지만 바른행위가 없는 죽은정통교회가 문제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5.04  16:28: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죽은 정통이냐 살아있는 정통이냐 

- 한국 교회 최대의 문제는 성령운동 교회가 아니라
다수의 죽은정통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

   
▲ 죽은 정통이냐 살아있는 정통이냐

우리는 교회의 문제점을 말할 때 ‘신비주의적~’, ‘불건전한 신비주의’ 또는 극단적 신비주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교회가 건전한 성경 진리의 바탕 위에 서지 못하고 특정 개인의 제한적이고 몰 현세적이고 비 성경적인 체험을 강조할 때, “신비주의자,”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소위 말하는 정통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나 교회의 전통, 예배 방법에 벗어나서 영적으로 앞서가는 일부 교회나 지도자들에게 여지없이 붙이는 명칭이 바로 신비주의다. 물론 신비주의란 말은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인 체험이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역사 하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보수 복음주의자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른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아직도 성령 체험하고 방언 하는 사람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방언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여러 가지 체험을 한 사람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그것은 신비주의’라고 말한다. 정말,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다고 하지만, 성경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체험 수준이 신비주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계의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정통주의자들은 한국 교계의 제일의 문제는 교회를 혼란 시키는 ‘불건전한 신비주의, ’불건전한 성령운동’ 또는 ‘신사도 운동’이라고 한다. 한국의 유수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모 목사도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교회를 제일 어지럽게 하는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극단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이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서도 (불건전한) 신비주의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죽은 정통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건전한 신비주의든 불건전한 신비주의든 이런 운동이나 성향을 제일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득권을 가지고 바른 교리(?)와 바른 전통(?)을 가졌다고 뽐내는 정통주의자들 중에 무수한  죽은 정통주의자 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득권과 다수라는 이점을 사용하여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자기들이 마치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대표하며, 그렇지 못한 교회를 치리하고 판단할 자격조차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7 교회에 대해 책망하실 때, 그중 3 교회인 에베소교회,사데교회 및 라오디게아교회가 바로 '죽은 정통'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오늘날 한국 교계의 최대의 문제는 성령운동하는 교회가 아니라 다수의 죽은 정통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정통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최대의 사명은 기존의 진리를 방어하는 것이란 착각 속에서 현상에 만족하여, 결국은 서서히 온도가 올라 마침내 죽고 마는 솥 안의 개구리 신세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정통신학교를 나오고 정통교단에 소속된 어느 목사는 좀 심하지만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통 좋아하네.정통이 깡통이 되고 x통이 되었다."


죽은 정통의 기원

죽은 정통 (dead orthodoxy)이란 말은 원래 17세기에 생긴 말이다. 1517년 이래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의 루터교도 창시자인 루터가 죽은 후인 17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바야흐로 교리 논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맘때쯤이면 유럽은 이제 로마 가톨릭과 칼빈주의자들과 루터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이들의 서로의 입지를 주장하기 위해, 이전에 버린 인본주의적인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수사학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증거 하는 명제적이고 신학적인 작업을 할 시기였다.

이들은 이런 수사학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의 창시자들의 주장을 변호, 재해석 및 때로는 맹종하는 신학체계를 확립하였다. 성경 구절은 단지 그들의 주장을 증거 하는 증거구절로 인용될 뿐이었다. 그 결과 자신들과 다른 파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강조하는 소위 말하는 법정 변론적인 논증법이 활기를 띤 시기였다. 법정 변론적인 논증법 즉 변호사 논증법이란 자신의 장점은 최대화 하고 약점은 최소화 하거나 언급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모기만한 단점은 약대같이 부풀리는 방법이다.

그 결과, 말씀의 주인이 되어야 할 성령은 말씀과 신학 속에 가두어지고 사변적이고 논쟁적인 변론으로 교회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말았다. 자연히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피폐하였다.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다. 이들은 교주주의와 논증주의로 인해 시들어 버린 죽은 정통의 루터 교회에서 벗어나 삶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 중심의 경건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생활 위주의 기독교는 얼마 되지 않아 교리적으로 이질화 하여 죽은 정통 못지 않은 폐해를 끼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바른 교리의 바탕이 없는 평신도 운동은 위험성이 있다.

아무튼 이후부터 정통 교회는 수시로 죽은 정통의 늪에 빠지게 되었고, 죽은 정통에 빠진 교회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영적대각성, 영적부흥 또는 성령운동이란 수단을 통해, 교회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미 논리적,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죽은 정통 신학을 착실하게 계승해 온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 그 때, 그 곳에서 확립된 신학의 잣대로 오늘 이 곳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외면하고 대적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결함 있는 정통과 죽은 정통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교리는 바르면서도 감정을 무시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결함 있는 정통(Defective Orthodoxy)과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의 특징을 이렇게 진단한다
(Martin Lloyd-Jones, Revival,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7, 55-91; 『부흥』).

결함 있는 정통이란 바른 교리는 가졌는데 생명력이 없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바른 교리에 그치는 교회다
교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인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하여서 그를 알고 그와 교제를 나누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와 그 정의(definitions)에만 치중하는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이므로 쓸모가 없다.

둘째 이러한 교회에는 균형이 결핍되어 있다
바른 교리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하게 만드는 경우이다(고전 8:1). 그래서 메마르고 건조하고 무용지물이 된다. 이러한 결함들이 실질적인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먼저, 교만이다
생활에서의 교만이 생기고 지적인 교만이 생긴다. 나는 이러 이러한 책을 모두 보았다, 나는 이러 이러한 교육을 받았다는 교만이 생긴다. 또한 이해(understanding)의 교만이 생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안다고 한다. 또한 비판적이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대하게 된다.

-둘째, 논쟁을 좋아한다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교리가 아니라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교리 때문에 서로 분쟁하고 나누어져서 성령을 소멸시킨다. 이에 덧붙이는 말은 우리는 교리에는 완벽하면서도 삶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일어나는 교리적인 논쟁을 보면 ‘내로라 하는 정통교회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라고 할 정도로 유치한 것이 많다. 이런 유치한 논쟁으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영적인 체험이 있는 신자들이 보기에도 유치한 주장을 하는 석·박사(후보생)님들이 많다.
 

그 다음은 죽은 정통이다

죽은 정통은 우리 모두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다. 죽은 정통이란 교리는 바른데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것을 말한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의 죽은 정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금세기(20세기) 말 한국 교회에 찾아 들고 있는 커다란 문제 중에 하나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의 화석화 현상이다. 죽은 정통이라고 불려지게 되는 이같은 병적인 현상은 아직 뚜렷한 해결책 없이 부심하는 보수교회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20세기 한국교회의 에이즈(AIDS)라고 할 수 있는 이 화석화 현상은 교회의 생명력의 퇴조와 교회의 공동화 현상, 교인 수의 감소, 신앙이 형식화, 생명이 없는 울법주의 , 구령에 대한 열정이 상실, 회심의 급격한 감소, 형식적인 예배, 이에 따른 윤리적 타락, 현실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가지는 교회 생활에 대한 회의 등을 주요한 증상으로 하는 이 기독교적인 병폐는 전염병처럼 만연해 가고 있다.

정통적인 교리를 따르고 있는 보수주의 교회들은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노선을 따른 교회들의 화석화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교리에 대한 자유스럽고 인본주의적인 태도가 교회를 그처럼 무기력화 시켰다고 흔히들 생각해 왔다.

그러나 금세기 말에는 이 같은 교회의 화석화 현상이 합리주의적인 입장에 선 자유주의 교회를 비판하며 개혁신학의 교리를 고수하던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일반화되었다. 교리적으로 진리에서 이탈할 때 교회의 화석화 현상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러한 기독교회의 전염병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교리란 무엇인가? 교리는 교회의 생명을 어디까지 보장해 주는가? 기독교에 있어서 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믿는 교리는 회중이 믿는 신앙의 내용들을 구성하고 그 신앙의 내용에 따라서 공동체가 성경의 토대 위에 서있는 여부가 결정되고 심하면 이단 여부에 대한 판단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공들여 만든 훌륭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교리라는 다리를 통해서 죄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생명의 역사가 없다면 화려하고 크긴 하지만 인적이 끊긴 채 버려진 다리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교회가 정통 교리를 붙들고 있다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부흥이나 말씀에 의한 대각성이 저절로 오게 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김OO, "사도들의 설교와 성령, 그 교훈,"『그말씀』, 두란노서원, 1994년 8월호).
 

죽은 정통의 문제점

로이드 존스는 죽은 정통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지적한다.

첫째, 편안한 만족감이다
교리에 확실하고 신앙고백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것들에 만족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모든 것에 만족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에 나타난 것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눅 19:8-14).

하나님은 자기 의에 찬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로 인해 얼굴도 쳐들지 못하고 회개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다. 그래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들은 모든 면에 옳으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것을 방어하는 것뿐이라는 자세이다. 그래서 변증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방어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는 단지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죽은 정통의 일부분이다.

둘째 시온에서 안일한 자(암 6:1)가 가지는 태도이다
수많은 종교 행사를 가짐으로써 편안하고 안일한 마음을 가지려는 것을 말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일반적인 메시지를 좋아한다. 일반적인 활기를 제공하는 메시지를 좋아하며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예배에 활기가 없다. 그들은 활력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있고 예측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편안한 안도감이 있다. 하나님이 갑자기 임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셋째, 죽은 정통은 첫 번째의 당연한 결과로서, 열정(enthusiasm)을 싫어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열정을 싫어하는 것은 곧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교회사를 볼 때 부흥기 때마다 영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진 비난이 바로 ‘지나친 열정이’다.

특히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위험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냉랭하고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한 가지 중요한 법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는 것이다(고전 14:40).
그러나 또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라는 명령도 있다.

-먼저,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는 것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전 14의 문맥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할 때 한꺼번에 시끄럽고 무질서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질서대로 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예언이 임했으니 나는 주체할 수 없다(고전 14:32)는 행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기쁨이나 흥분을 제어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육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상주의(emotionalism)를 조심해야 한다. 감상주의는 감정이 지나쳐서 미친 듯이 흥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 시에 특히 인위적인 감상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것에 너무나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까 이것을 소홀히 한다. 혼란을 두려워 하다 보니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부흥기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거룩한 무질서와 혼란을 혼동한다.

그러나 부흥기에는 항상 신약에 기록된 대로 단순하게 된다. 말하자면, 성전에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호숫가의 배에 타고 앉으신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차이이다. 으시댐, 예전적인 형식, 순서, 가운이나 정장이 필요 없이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이 있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기에 있지 않을 때에는 성가대 특히 유급 성가대나 독창자를 강조하여 회중들은 앉아서 그들을 감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이 더 필요 있을까?

특히 프로그램을 중시하다가 보면 성령을 소멸하기 쉽다. 또한 인위적인 흥분 상태를 지나치게 두려워 할 때 성령을 소멸하기 쉽다. 물론 지나친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정통교회이면서도 죽어 있는 이유는 가짜 흥분과 감정의 표현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감상주의자도 되지 말고 감정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가짜 지성주의 때문에 생긴 현상들이다. 위대한 지성인 바울은 동시에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  (살전 5:19-22).
 

죽은 정통의 결과

이러한 죽은 정통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첫째,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데 실패한다
말씀을 듣고 읽고 깨우치기는 하지만 실 생활에 적용은 하지 않는 것이다. 예배 때에 받은 은혜는 교회밖에 나가자 마자 잊어버린다. 그 다음에는 너무나 바쁘다는 핑계로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활동에 더욱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묵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깊이 살펴볼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살피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둘째, 죽은 정통의 결과 실제 생활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우리들의 마음속에 와 있다, 그러므로 내세의 능력과 기쁨과 평강을 체험해야 한다(롬 14:17). 이러한 천국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부요해 보이나 영적으로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다(계 3:17).

그 결과 셋째,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 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 결과,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긴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오늘날 정통교회는 편안한 안락감에 빠져 있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갈증이 더하여 져서, 그의 영광과 능력과 존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할 때 일어난다.


죽은 정통의 기타 특징들

그 외의 죽은 정통의 특징으로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핍박하고 대적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이전 것’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
이들은 이런 신학, 저런 전통의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한다. 그래서 자기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신자들을 대적하고 핍박한다. 자기 의가 지나쳐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것이다(롬 10:2-3).

1990년대 초만 해도, 교회에서 기타 치고 북 치면서 뜨겁게 찬양 예배 드리는 것을 정통을 표방하는 일부 교포 기독교 언론에서는 ‘무당굿 ‘을 한다고 정죄했다. 그리고 많은 정통주의자들이 그런 주장에 동조했다. 그런데 그간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그런 찬양 예배를 무당굿 한다고 정죄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제는 그런 방식의 찬양 예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입하고 있다.

왜 무당굿을 스스로 도입하고 있는가? 갑자기 신학적인 전환기를 맞이했는가? 아니다. 대부분의 이유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청년들이 모이지 않더라’, ‘그런 예배를 교인들이 좋아하더라 ‘이다. 과연 청년들이 모이고 교인들이 좋아한다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이 정통주의의 태도인가? 북 치고 기타 치고 활발하게 드리는 찬양예배는 이때, 이곳에서 역사 하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이다.

또한, 1980년 중반 경에는 앞서간다는 미국에서도, 상한 감정과 나쁜 기억을 치유하는 내적 치유(inner healing)에 대해 일부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기독교적인 사술’(Christian witchcraft)이라고 공격했다. 심리학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여 천하보다 귀중한 영혼의 치유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내적 치유는 보수를 표방하는 유수 신학교나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상담의 한 방법으로 인정 받고 있다.

또한, 오늘날 성령의 새로운 사역으로 인해 교회와 신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음성듣기, 방언, 중보기도 및 영적 전쟁―개인 축귀나 지역 악령과의 전쟁―에 대해, 일부에서는 샤머니즘이니 무속주의니 하면서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때 그곳에서 유익했던 ‘장로들의 유전’으로 오늘 이곳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는 둔감한, 죽은 정통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더군다나, 말세에는 하나님께서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셔서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하신다(행 2: 17, 18). 그런데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이것 또한 신비주의나 무속신앙에 연결시킨다.

필자(편집자)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씀사역자인 이들이, 베뢰아의 교인들처럼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아니라(행 17:11), 오히려 무속신앙이나 불건전한 신비주의 서적을 상고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성경은 분명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고전 14:1, 39),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는데(살전 5:2), 이들은 사도 시대에 기사와 이적이 끝났다는 거짓 가르침을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 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 누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왜 그런가?

영적 전쟁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가 마귀의 거짓 가르침에 속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이 하시는 좋은 씨앗에 항상 가라지를 뿌리는 거짓의 아비다(마 13:27; 요 8:44).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의 어떤 좋은 일을 의도하시면 반드시 그 낌새를 차리고 비슷한 가라지를 심어 실상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위에 든, 찬양 예배(마귀는 열광적인 록 앤 롤의 가라지를 뿌렸다), 내적 치유(마귀는 정신분석학, 최면술, 초월명상의 가라지를 뿌렸다), 가계 치유와 영적 전쟁(마귀는 샤머니즘과 무속신앙의 원조이다), 예언 사역(마귀는 사이킥과 점성술의 가라지를 뿌렸다).

둘째,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보다는 개 교회의 확장, 교세의 확장, 교권주의에 집착한다.
서기관들은 서로 경쟁적인 단체이면서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을 핍박할 때에는 서로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교세에 도전을 주는 공적에 대해서는 공동 보조를 취했지만, 서로의 이익이 상치될 때는 대적했다(행 23:6-9).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예정을 중시하는 칼빈주의 주장을 따르는 장로교와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의 주장을 따르는 감리교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요소가 너무나 드물다.

신학의 곳곳에서 두 주장을 부딪친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국의 교단은 장·감 이라고 할 정도로 잘 융화되고 있다. 바른 교리와 신학을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는 이들이 어떻게 이런 이율 배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한국 선교의 초창기에 장  감 이 같이 선교했다는 역사적인―경험적인―이유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동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교리를 중시한다는 일부 죽은 정통주의자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영적인 운동가들이, 구원의 사활이 걸린 교리가 아닌, 성경이 불분명하게 기록한 것들에 대한 부차적인 교리가 조금이라도 자기들의 기존 신학에 부합되지 않으면 일단 이단이나 사이비니 하여 정죄해 버리고 만다. 표면적으로는 교리의 순수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면적으로는 교인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잘못된 동기에서 시작된 것들이 많다.

셋째,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교권이나 단체의 힘을 남용하여 신자들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대표적인 예는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소경과 바리새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소경에 눈에 진흙을 발라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보다는 안식일에 치유사역 한 것을 트집 잡았다.

이미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 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소경의 아버지는 병 고친 자가 누구인가를 알면서도 출교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의 고쳤다고 말하지를 못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눈치를 본다. 사람들 또한 바리새인들 같은 죽은 정통주의자를 두려워 한다.

“그 교회 가니 너무 은혜가 되는데 잘못되었다고 하니 가지를 못하겠더라,”
“교인들이 이단 소리 듣기를 얼마나 두려워 줄 아십니까?”

사람을 두려워하여 은혜 되는 교회 가지 못하는 교인들도 문제가 있지만 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과 반 협박으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 죽은 정통주의자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이들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변명하려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예수님의 양 무리를 웅덩이로 인도하는가?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새로운 운동을 지지하는 수많은 보수 신학자들이나 삶을 통해 검증된 신실한 신자들의 고백은 무시한 채,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넷째,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한다
새로운 영적인 사역에는 필수적으로 감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논리와 신학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자기 학파가 인정하는 유명한 신학자들의 말을 때로는 성경 말씀을 아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속에는 탐심, 시기, 분노, 용서 못함, 과격의 쓴 뿌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인격적인 미성숙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남보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비판할 줄은 알지만 정작 자신들이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이들은 성경 진리를 논리적으로 진술한 명제신학(proposition theology)에는 강할지 모르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신학(experiential theology)이나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는 관계신학(relational theology)에는 유치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현대는 감성시대, 관계시대, 경험시대, 직관시대이다. 경험 없는 사변적인 신학, 관계성이 결핍된 명제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경험신학이나 관계신학은 상아탑의 온실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만나는 경건의 시간의 질과 삶의 과정에서 영글어가는 것이다.
 

육신적 전통주의와 창조적 전통주의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로마 교회는 전통과 성경을 같은 위치에 놓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성경에 의해 시험되고 성경의 권위에 종속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한계가 선명하지 않을 때도 있다.

J. I. 패커는 전통의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단점을 교정하는 처방까지 제시한다. (J .I. Packer, “The Comfort of Conservatism,”  Michael Scott Horton. ed. Power Religion, Moody Press, 1992, 283-99).

패커는 먼저 보수주의(Conservatism) 또는 전통주의(Traditionalism)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한 종류의 전통주의는 자신의 유산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끝까지 유지하려는 영웅적인 결단이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자신의 지력과 비판적인 판단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과, 옳고 귀중한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문화적인 격류를 거슬려 헤엄쳐 가는 용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창조적 보수주의(Creative conservatism)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보수주의는 그것이 오래되고 전통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을 맹목적이고 고집불통으로 고수하는 전통주의이다. 이런 전통주의는 익숙한 것에 의해 위로 받고 안도감을 받고 싶어서 미래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과거적인 것에만 집착하려는 전통주의다. 이런 전통주의는 육신적 전통주의(Carnal conservatism)이다.

교회 내에는 두 종류의 전통주의가 존재한다
첫 번째 전통주의는 칭찬할 만하지만 두 번째 전통주의는 병적인 것이다. 첫 번째 전통주의는 가끔 두 번째 전통주의로 착각 되고, 두 번째 전통주의는 종종 그 자체가 진정 첫 번째 전통주의라고 속게 된다.

지역 교회나 교파에는 이와 같이 좋은 전통과 나쁜 전통이 공존한다. 그러면 전통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전통과 무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전통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항상 기대했던 것과 같은 로마 교황의 짓거리나 비성서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위험한 전통주의는 자신의 이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역사와 공동체의 긍정적인 역할을 무시하는 데서 생긴다. 즉 전통을 전통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판단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대신에 그들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시 할 때 파국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전통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이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인 성경과 충돌이 생기느냐(?)의 문제다. 기독교의 전통은 성경에 의해 테스트되고 성경의 권위에 종속된다. 비록 전통을 통해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상고한 좋은 유산을 따르기도 하지만, 그 해석들(전통들)은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져야 한다.

요즈음 성령운동을 대해 마치 사탄의 장난처럼 취급하는 자들이야 말로 바로 육신적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전통을 전통이라 부르기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전통, 자기들의 신학만이 바른 전통, 바른 신학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정통이냐 살아있는 정통이냐, 개혁이냐 부흥이냐

교회사학자인 리차드 러브레이스는 살아있는 정통(Live Orthodoxy)을 위해 말씀과 성령, 교리와 체험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이 제시한 살아있는 정통의 관건은 말씀과 성령에 합당한 관심을 가지고 말씀과 성령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도 말씀과 성령 사이의 균형을 불완전하게 이해하였다. 복음주의의 어떤 부분은 그 이전의 정통 교리들이 세습적으로 앓아온 질병들을 유전해 왔다. . . .즉 고백주의, 논증적인 자기방어, 비이성적인 열정을 반대하고 크리스천의 경험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 영적으로나 사회적인 적절성을 잃어버린 설교, 성화의 방치, 현재 상태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교리적인 충성이 영적인 실상보다 우선권을 가져서 잘못된 신학체계나 잘못된 영감 이론을 가진 사람들은 거짓되고 비성서적인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하여 버린다. 이런 짓은 (개혁신학자인 )핫지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자인) 메이첸 같은 초기의 개혁 신학자들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오류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적인 갱신을 강조하는 다른 복음주의 운동들은 말하기를,  교리는 분리시키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로 연합한다'라고 가르치면서 주관적인 극단으로 치 닫으며, 실상의 날카로운 칼날보다는 따뜻하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목표로 하여서, 부흥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성서적인 생각이라는 관점으로 정의한다
(Richard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279-281).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역사신학 교수인 톰 네틀즈는 개혁과 부흥은 같이 가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물론 사랑 없는 결혼, 결혼 없는 사랑은 가능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같이 가야 한다. 개혁과 부흥도 마찬가지다. 개인들이 어는 한쪽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관심 없이 다른 한쪽을 추구하면 그 결과는 매우 추악한 것이 된다. . . .

개혁은 진리이고 부흥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억누르고, 조롱하고, 비웃으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무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과정 중에 그것(사랑 없는 진리)은 개혁 자체가 두렵고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의사 소통의 통로인 상황 자체를 제거해 버린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는 권면을 받으며 시편 기자는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4)라고 가르친다. . . .

사랑 없는 진리는 모든 도덕적 온전함을 그 자체로부터 잃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아무런 형태가 없이 녹아버린다. 그것은 목적이 없는 의욕이며 의무 없는 감상이다. . . .마찬가지로 교회가 개혁(진리)과 부흥(사랑)에 대한 사려 깊은 관심 없이 확장하기를 추구하면, 그것은 텅 빈 껍질이나 회 칠한 무덤이 될 것이다. . . .

개혁주의자들과 부흥을 강조하는 자들 사이의 틈이 더욱 넓어짐에 따라, 전자는 자주 경험을 두려워하고 후자는 자주 신학 특히 개혁신학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열심과 지혜, 사랑과 진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개혁과 부흥을 연합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장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개혁을 손상시키거나 진정한 부흥을 오염시키는 모든 것들이 제어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아마,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하지만 잘못 인도된 사람들의 점잖은 설득일 것이다
(Tom Nettles, “A Better Way: Church Growth through Revival and Reformation,” Michael Scott Horton, ed. Power Religion, Moody Press, 1992, 161, 174-75).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이트레스 교수는 개혁신학의 영향이 없이도 개신교 신자의 80%에 육박하는 남미의 부흥운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개혁과 부흥의 조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혁주의자들은 풍요하고 심오한 신학적 전통을 이어 받아 왔으며 이러한 전통을 방어할 필요성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보수주의와 교리적인 교육을 강조한다(예를 들어, 미국의 개척 시대의 침례교와 장로교의 차이 등). 한편, 성령의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s)은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을 장려한다.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은 특히 잃을 것이 없는 남미의 저소득층에게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신학 이론에 자신이 있는 개혁신학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신비성을 모두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재간이 없으며, 또한 사회적인 역동성을 너무 두려워 해서도 안 된다.

개혁전통은 과도기에 처한 선교 현장보다는 안정된 사회 체제를 가지고 있고 신학적인 교육 전통이 있는 교회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가진 남미에 왜 개혁전통이 반복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개혁전통은 초창기인 16세기에는 인문주의 및 교부들의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의 전통을 이어 받은 당시 최고의 지성과 학문을 대표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나 전 세계의 대부분의 대학을 자연주의적인 세속주의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성경마저 세속주의자들은 역사적 비판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말하면, 개혁전통의 학문이 더 이상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개혁전통은 기존의 교회와 관련된 임의적이고 정체적인 사회 및 정치적 법칙들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부상하는 중산층의  절박한 욕구'(felt needs)를 잘 만족시킨다.    그러나 남미에는 중산층이 별로 없다. 왜 하나님은 저소득층으로부터,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로부터도 개혁을 시작하지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객관적인 교리를 중시하는 개혁 전통과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은사 운동은 서로 하나가 되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성서 신학과 상징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개혁전통은 성경의 깊이와 수용자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엮어 준다. 개혁신학자 반 틸은 이성을 중시하고 극심한 감정이 저급하다는 극기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은사 운동은 하나님에 대한 친밀감을 더해 준다.

개혁전통을 따르는 목사 한 분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웨스트민스터에 다니기 전에 그는 은사운동 계통의 교회를 다녔다. 그는 방언을 말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에 다니면서 방언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자기 교회에서 방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이해력의 지성과, 축제를 드리고, 울부짖고, 동정하고, 동일시하는 감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시편은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들보다 더욱 통제불능의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편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다. 한편 시편은 은사 운동가들이 부르는 노래들보다 신학적으로 심오하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된다.

그러면 개혁신학은 상대화 되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렇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전 13:12).  ‘그렇다', 왜냐하면 아직도 신학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실제의 생활에 소화되고 형성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학적으로는 바르지만 졸리는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와 감정이 풍부하게 부르는 ‘복음 성가'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실까? 누가복음 18:9-1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은 형식적인 올바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배를 통제적으로 드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전복시키려고 위협하는 것 같다.

나는 생각하기를 학문적인 신학전통이 정도 이상으로 비대하고 깊어지면 구체화의 문제가 어려워 지며 이전에는 당연하게 무의식적으로 여겨지던 모든 일들을 취급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된다.

나 혼자 생각해 볼 때 개혁전통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에 불과하며, 전통주의자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성령은, (남미 오순절의 부흥과 같이) 영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역사적인 전통(특히 개혁전통)과는 무관한 통로를 창조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인제사장설은 개혁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강조한 것보다는, (비록 왜곡되고 과장된 면은 있지만) 오히려 은사운동주의자들이 더 잘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전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 하에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는 취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이점에서 얼마나 자긍하려는 유혹을 받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긍심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이 우리의 이해를 부패시키는지를 알고 있는가?) (Vern Poythress, NT 853 Miracles Class 강의 Note에서).
 

결론적으로, 그때 그곳에서 역사 하신 성령의 사역에만 익숙한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오늘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눈을 떠야 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6,13,22 등)

그래야 죽은정통 교회가 첫 사랑을 회복하고(계 2:1-7), 고백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고(계 3:1-6), 뜨겁게 예수님을 섬기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영적인 부요를 더 귀하게 여기는 교회(계 3;14-22) 즉  살아있는 정통 교회(live orthodox church)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110 Nuuanu Ave, Honolulu, HI 96817 USA  |  대표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구요한
Mail to: gloriatimes77@gmail.com
Copyright © 2018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