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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2)-논리적 오류논리적 오류-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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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03  16: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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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2)

-논리적 오류 :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

   
▲ 한국의 성령운동 비판자들이 이런 논리적 오류만 시정해도 한국 교회가 획기적 도약을 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성령운동은 잘못된 것이다.”

반성령운동파들이 너무나 확신 있게 큰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운동들이 진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감한 주장의 힘(The power of bold assertion)이라는 논리적 오류지만 힘은 세다.

반성령운동파들은 성령운동을 대적하기 위해 막강한 인력과 한국과 해외의 다양한 매체에 글들을 올리고 퍼 나르면서 인터넷 사이트를 도배질하고 있다.

이런 단어들을 검색해 보라. 절대 다수가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반성령운동파들은 이 점을 노리는 것이다. 목회자나 신자들이 이런 단어가 나오는 집회나 모임에 아예 얼씬도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한편 성령사역을 대변하는 인터넷 매체는 이제 갓 태어난 『글로리아타임스』 외에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성령운동파들은 그 좋은 하나님의 선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단 언론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당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x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잠시 소나기를 피하자.”

그러나 이제 x이 더러우면 더럽다 해야 한다. 그래야 x을 더 싸지 않는다.
소낙비가 오면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소낙비가 심하게 내려서 농사를 망쳐버리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아는 어떤 성령사역자는 잘 나가던 초기에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해서 한 평생 고통을 당했다. 그는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피해자들은 비둘기같이 순수하여 하나님이 억울한 것 갚아주시겠지, 핍박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자, 원수를 사랑하자라는 식으로 억울해도 참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면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외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당당하게 알리고 변호해야 한다.

반성령운동파들이 한때 한국에서는 슈퍼 갑이지만 시대가 변했다. 세상은 이제 을의 반격으로 갑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다. 성령사역자들도 분연히 일어나서 정당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정당한 목소리를 내어서 반대파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변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비둘기같이 순수하라’고만 하지 않으셨다. ‘뱀같이 지혜로워라’고도 하셨다. 지혜롭지 않고 순수하기만 하면 포식자들의 밥이 된다. 성령사역이 옳고 정당한데 왜 당하기만 해야 하는가?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

이단 문제를 연구하는 밥 파산티노는 미국에서 반(反) 이단 운동에 수십 년간 종사해왔다. 그는 『마녀 사냥』(Witch Hunt)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이 생소하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주된 이유는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errors in thinking and the misuses of logic)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D. A. 카슨도 『성경해석의 오류』(Exegetical Fallacies)에서 잘못된 성경 해석, 잘못된 논리를 비판한다. 또한 미국 남가주 얼바인 소재 크리스천 연구소(CRI)의 연구원인 로버트 M. 보만도 『정통과 이단』(Orthodoxy & Heresy)에서 무분별한 이단 정죄를 비판한다.

이전 글에서는 잘못된 신학에 근거한 주장의 오류를 다루었고 이번 글에서는 잘못된 논거(論據, 논리적 근거)에 의한 주장의 오류 즉 논리적 오류(Logical fallacies)를 다룬다.

성령사역에 대한 반대파들의 글에는 신학적 오류는 물론 논리적 오류가 도배되어 있다. 필자는 한 동안 논리적 대응을 자제해왔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읽고, 분석하고, 대응하는 글을 쓰는 시간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은혜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사명감을 갖고 대응하려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기다리게 하셨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반대파들의 말도 안 되는 글도 읽어보고, 이전에 준비해 놓았던 자료에 더하여 논리학 책들을 다시 보면서 대응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반대파들이 자주 저지르는 사고의 오류와 논리의 오용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의 오류
(Misunderstanding on the benefits of the general revelation)

반대파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이다. 이런 오류만 시정되어도 한국 교계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일반은혜는 하나님이 신자나 불신자에게 골고루 베푸시는 은혜다.
언어, 문화, 전화기, 컴퓨터, 매스컴 같은 과학 기기는 물론 생각하고 추론하는 이성, 울고 웃고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감정, 뜻을 추진하는 의지, 어느 정도의 선악 분별력과 양심 등이 모두 일반은혜의 산물이다.

구원하시는 특별은혜는 일반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세상이나 사이비 종교에서 하는 일과 외양이 비슷하거나 동일한 것이 많게 마련이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생소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외양이 비슷한 사교의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형식이나 외양이 비슷하면 내용도 같을 거라고 단정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일반은혜 혜택의 오해에서 오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이다.

다음의 오류도 비슷한 논리적 오류이다.

유유상종의 회합 죄의 오류(Guilt by association).
이전의 연좌제 같은 것이다. 부모가 공산당이면 자녀도 공산당이고, 친구가 신사도 운동가이면 너도 신사도 운동가이고, 신사도 운동집회와 유사한 현상이 너의 집회에서 나타나면 너도 신사도 운동가이다.

유추의 오류(False analogies)
잘못된 유추로 인해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오류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Hasty generalization)
한두 가지 표본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일반화시키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 점쟁이는 예언한다. 그들은 예언한다-직통계시.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예언은 점치는 것이다.

• 그는 신사도 운동가들과 교제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사도 운동가이다.

• 그의 집회에서는 신사도 운동가들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는 신사도 운동가이다.
• 체면에 걸린 사람은 쓰러진다-쓰러지는 현상. 그러므로 쓰러지는 것은 체면에 의한 것이고 신사도 운동가이다.

교회사 기록을 보면 요한 웨슬레, 조지 휫필드, 조나선 에드워즈 등의 집회에서도 쓰러지는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반대파들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도 신사도 운동가들이다.

• 짐승이 독침에 맞으면 힘이 빠져 비틀거리디가 팽 돌면서 쓰러진다. 그들도 독침 맞은 듯 힘이 빠져 비틀거리다가 팽 돌면서 쓰러진다.

• 엄숙해야 할 교회에서 요망하게 웃는다-거룩한 웃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요망하다고 한다. 요즈음은 세상에서도 마음과 몸의 치유를 위해 웃음치유는 기본이다.

• 기름부음과 임파테이션 사역. 성경에 있는데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당 짓거리라고 정죄한다.

• ‘방출하다’(release)는 단어는 사교에서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짓은 사교행위나 다름없다. 누가 ‘Release’(방출하다)of the Power of the Spirit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 마귀가 주는 방언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방언은 마귀 방언이다.

• 불교, 힌두교, 뉴에이지가 명상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명상기도하거나 관상기도하는 사람은 사교 신도다.

• 그 집회의 찬양은 세속 악기를 사용하고 사탄 숭배에 사용하는 빠른 비트와 록 뮤직을 사용한다?
대답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악기는 술집에서 사용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악기 사용하는 자체를 금지했다. 칼빈은 찬양할 때 '시편만 부르라'고 했고-지금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그대로 남아있다-미국에 온 청교도는 멜로디 있는 노래는 '천주교의 찌꺼기'라면서 '창'(chanting)만 했다. 교회에서는 한때 오르간이 마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사용 금지를 했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 찰스 웨슬레의 찬양은 당시 술집에서 부르는 대중가요에 가사만 바꾼 것인데 한국의 찬송가 책에 그의 노래가 많이 실려있다.  결국,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요즈음 모든 교회가 이단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음악 종류, 악기 종류는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혜의 산물인데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이런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 모르몬교 집회에서는 찬양 강해 헌금을 한다. A교회도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A교회는 모르몬교다.
• 사이비 종교 지도자는 설교한다. B 목사도 설교한다. 그러므로 B 목사는 사교 지도자다.
• 문선명은 문서선교, TV선교, 인터넷 선교를 한다. C 교회도 그렇게 한다. C 교회는 통일교다.
• 통일교 신자가 은혜를 받고 울었다. D 신자는 은혜 받고 울었다. 그러므로 D는 통일교 신자이다.

정상적인 신자라면 이렇게 결론 내리지 않는다.
왜?
외양은 비슷하거나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의 예(例, examples)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왜?
그것들이 생소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익숙함과 생소함의 차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형식과 내용의 차이를 쉽게 구분하지만 생소한 것에 대해서는 형식과 내용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잘 아는 것-대부분이 세상이나 사교의 행위들-과 관련 지어서 마귀 짓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익숙해지면 오해가 풀린다.
내가 잘 알고 익숙하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잘 모르면 형식이 같거나 비슷하면 내용도 같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 그렇게 하는 모든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유추의 오류, 성급한 과대 일반화의 오류)

“쓰러지는 것은 체면이고 예언하는 것은 점치는 것이다.”

이전의 필자가 그랬다. 어떤 사람은 ‘쓰러뜨리는 것은 장풍’이라고 한다.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쓰러지고 예언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점쟁이나 무당은 북치고 춤추고 광란한다.
A 교회도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짓은 무당굿이자 광란이다.”

한때 북 치고 기타 치는 찬양과 경배에 대해서 교계가 이런 식으로 비판했다.

“그것은 무당굿이고 광란이다”(한국).
“그것은 사탄숭배자들이나 하는 록앤롤이다”(미국).

당시에 나름대로 예배학을 전공했다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형태의 찬양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일부 지역 교협에서는 신문에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무당굿하지 않는 교회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하지 않은 교회가 오히려 이상한 교회가 되어버렸다.

신학적으로 정리되어서 받아들였는가?
아닐 것이다.
장자 교단인 예장 OO 증경 총회장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즈음 청년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다.”
비난 여론이 다소 수그러들었을 때 보수 교단의 어떤 목사가 말했다.
“교인들이 그런 찬양을 좋아하더라.”
무당굿이라고 비판하더니 교인들이 좋아한다고 교회에서 무당굿을 받아들이는가?

그런데 받아들였다.
왜? 해 봤더니 무당 굿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무당굿이기는커녕 좋기만 하더라. 경험적인 앎이 중요하다.
“아, 외양은 무당굿과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른 거구나.”
알고 익숙해 지면 오해가 풀린다.
오해가 풀릴 뿐 아니라 너무 좋아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반대파들에게도 이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사탄이 문화를 지배, 크리스천은 빼앗긴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주신 지식이다’(All knowledge is God’s knowledge!).

그런데 성경을 보면, 문화는 하나님의 사람 셋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이 발전시켰다(창 4:20-22). 마귀는 창조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여 자기 것인 양 왜곡하고 오남용하여, 사이비 종교, 대중문화를 통해 사람들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예수님은 마귀가 도둑질한 영혼은 물론 문화도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신자는 전도명령에 순종하여 영혼을 빼앗아 와야 한다(전도). 문화명령에 순종하여 문화를 빼앗아 와서(생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시거나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실 때, 새로운 언어나 문화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기존의 언어, 관습, 형식을 사용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새로 만드실 필요가 어디 있는가? 비록 마귀 문화, 세속 문화가 먼저 존재했지만 기왕에 존재하는 것을 가져와서 하나님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마귀나 세상에서 사용하던 것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거룩해 진다. 사람조차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회심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한 사람-성도(聖徒)-이 되지 않는가!

크리스마스도 원래는 이방의 태양신 숭배일이었지만 로마가 기독교화 된 후,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제정했다. 날짜는 지키면서 알맹이는 바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리스마스 지키지 않는 신자가 있으면 나와보라!

(언어)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성경 기록 전에 이미 존재하던 언어들이다.
자연히 성경에는 세속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들어보자.

-엘로힘(히브리어)
영어 성경에서 하나님(God)은 단수 대문자로, 다른 ‘영들’(gods) 즉 귀신들은 복수 소문자로 번역한다.

-데오스(헬라어)
문맥에 따라 하나님(God) 또는 신들(gods)로 번역한다.

-로고스(헬라어)
원래 스토아 철학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이성적 원리란 의미로 사용했는데, 신약에서 말씀(로고스)이나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씀’(요 1:1)으로 사용했다.

-프뉴마(영, spirit), 쉬케(영혼, soul)
성경 기록 훨씬 이전부터 헬라 철학에서 사용하던 단어들이다.

이처럼 성경은, 반대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이나 사교적 단어’로 도배가 된 책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잘못되었는가?

또한 개혁신학 서적-특히 조직신학 책을 보면 성경에 없는 전문용어로 도배되어 있다.
성경의 정경성, 무오성, 완전성, 영감성, 계시종료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아담의 죄가 전가되는 방식에 따라 대표론과 실재론, 조직신학의 분류인 계시론, 신론, 인죄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 말세론, 성경에도 없는 칼빈주의, 개혁주의, 개혁신학, 개혁교회,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란 단어들~

반대파 자기들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런 전문 용어(technical term)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명료하게 해준다.

적어도 신학 전공자라면 이러 단어를 사용해야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성령사역자들이 반대파들이 보기게 생소한 단어 몇 가지를  사용하면-예를 들어, 내적치유, 솔타이 끊기 등- 을 사용하면 성경에 없는 말(단어)을 한다면서 비판한다.

또한, 성경에 있는 말(단어)-기름부음 사역, 임파테이션 등-을 사용해도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면서 *꽈배기를 꼰다(*전혀 다른 해석을 한다는 뜻). 성경에는 새벽기도나 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보다 쓰러지는 현상에 관한 구절이 훨씬 더 많다. 더 나아가서 기름부음, 임파테이션(나눔)은 성경에 있는 단어들이다. 그런데도 자기 식으로 꽈배기를 꼬아서 ‘그건 그런 뜻이 아니다’고 우겨댄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그들은 이단이다’로 성급하게 결론 내린다.

필자가 위에 예로 든 수많은 전문 술어들은 전통적인 목사·신자들에게는 익숙한 단어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단어, 없는 단어 가릴 것 없이 필요하면 사용한다. 그게 정상이다. 언어도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한글도 비신자인 세종대왕이 창제한 글이다. 초기에는 용비어천가 같은 임금 숭배 용도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제 그 한글로 성경도 번역하고 기독교 책도 쓰고 논문도 쓴다. 그런데 문선명이나 이단들도 한글을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인가?

그런데 왜 반대파들은 성령사역자들이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는 단어 몇 가지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렇게 신랄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호들갑을 떠는가? 자기들 해석만 맞고 다른 사람의 해석이 틀렸다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설령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고 해서 그게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할 정도가 되는가?

반대파들의 논리로 반대파들에게 익숙한 것들을 비판해 보자.
(이는 순전히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 예수님이나 베드로는 즉흥적으로 설교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왜 설교 ‘준비’를 하는가?
• 설교면 그냥 설교이지 강해설교, 본문설교, 주제설교, 원 포인트 설교, 이야기 설교란 단어가 성경 어디에 있는가?’
• 사도행전에 교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공회에는 사도들이 모였다. 그런데 왜 사도가 아닌 자들이 교단을 형성하는가?

성경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기록된 부분’(intentional ambiguity)이 많기 때문에 전문가도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자기 식으로 딱 한 가지 해석해 놓고는 자기들과 다른 성령사역자들의 해석은 잘못된 이단적 해석이라고 정죄한다. 사실 자기들의 해석이 틀린 경우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 잘못을 알면 회개라도 할 텐데 틀린 것을 옳다고 굳세게 믿고 있으니 말이다.

(습관, 형식, 문화)

-할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기 전에 이미 이교나 이방인들이 할례를 했다.

-인신 제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교 행위인 인신제물-이삭-을 바치게 하셨다. 미수로 끝났지만 아브라함을 실제로 죽이려고 칼까지 들었다.

-언약의  형식(forms)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 형식은 당시 강대국인 히타이트(헷 족속)가 약소국과 맺은 국제조약 형식을 차용했다. 양국의 조약에는 서문, 본문, 결론이 있고 이후 서판 두 개에 기록하여 각자의 신전에 보관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서판은 두 개 만들었지만 이스라엘이 둘 다 법궤에 보관했다.

이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성경 본문을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고대 근동지방의 언어, 역사, 문화, 역사를 연구한다. 성경 언어와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Grammatical-Historical Interpretation)은 개신교 성경해석학의 기본이다.

-쓰러지고, 웃고, 뛰는 행위, 방언 등
사이비 종교, 쿤달리니 요가, 심리 현상, 마귀의 현상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도 일어난다. 초자연적 힘, 심리현상 또는 성령의 능력이 사람에게 일어났을 떄 동일하거나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내용'이나 '열매'로 분별해야지 '현상' 자체로 분별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 보고 김정은 위원장님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고 정죄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성경도 이미 존재하던 세상이나 이교도의 언어, 습관, 형식을 사용하여 기록된 책이고 성경 해석을 위해서도 관련 언어, 문화, 역사를 연구한다. 이런 연구를 통해 성경 본문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자기들이 잘 모르는 생소한 단어나 현상에 접하면 그 모든 것을 마귀적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마귀에게 빼앗긴 것을 하나님이 탈환하시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논리적 오류의 원인

왜 그런가?

-첫째 마귀의 문화에 먼저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5000 년의 우상숭배로 찌든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이 그것밖에 없고 생소한 영적 현상에 관한 사이비 종교나 세상 책들은 많아도 기독교 책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수준에서, 예언하는 것은 점치는 것이다, 쓰러뜨리는 것은 체면술이다 장풍이다, 황홀 체험은 쿤달리니 체험이다, 관상기도나 명상기도는 뉴에지지 운동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좋은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성듣기와 예언을 예로 들어보자.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언한 기록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예언 관련 내용들이 많다. 구약에서는 예언하는 것이 선지자에게 제한되었지만 신약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조하라)

그래서 신약에서는 교회의 리더가 아니면서도 예언한 사람들이 많다.

• 성전에서 기도하던 여선지자 안나(눅 2:36).
•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행 13:1).
• 선지자 유다와 실라(행 15:32).
• 예언하는 빌립의 네 딸들(행 21:8-9).
• 바울의 예루살렘 결박을 예언한 선지자 아가보(행 21:10-14).

그런데 반대파들은 이런 구절들에는 관심이 없다. 기적중지론, 계시종료론, 편파적인 구속사적 성경해석 등의 상자 안에 갇혀있고 자기들에게 은사가 나타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 누가 예언한다고 하면 금방 점쟁이를 생각한다. 무체험으로 인한 전형적인 유추의 오류(False analogies)이다.

체험이 없으면 성경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는 『무질서한 은사주의』에서 기적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그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말하는 곳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 (‘끝난다’고 기록한 구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구하라’고 권면하는 곳도 없다.
신약 성경 모두를 살펴볼 때 신자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명령형으로 말하는 곳은 다섯 군데 밖에 없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으로 충만하라(엡 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20).”

필자는 맥아더가 어떤 성경을 보는지 궁금하다. 필자가 보는 성경은 맥아더의 성경과는 판이하다. 성령과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이 도처에 있다.

-구하라 . . . . 찾으라 . . . . 문을 두드리라 . . . .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 9, 13).
-너희는 더욱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신령한 것(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고전 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딤후 1:6)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왜 이런 오류가 생기는가?
맥아더는 기적중지론, 서신서 우선론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성경에서 '성령이나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필자가 제시한 구절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그가 선호하는 서선서에 있는 구절도 보지 못한다. 믿는 대로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논리적 오류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현상을 성경에서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루이스 벌콥은 성경의 충족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교리(성경 충족성)는 선지자, 예수님, 사도들이 말한 모든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신앙에 필요한 모든 조항들이 성경에 수록된 것도 아니다. 성경이 교리를 포함하는 것도 아니다; 교리는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성경으로부터 파생될 뿐이다.”
(Louis Berkhof, “Introductory Volume to Systematic Theology,” Systematic Theology-New Combined Edition, 168)

성경은 선택적 기록이다. 많고 많은 내용들 중에서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만 기록한 책이다. 벌콥이 말한 대로, 성경은 구약의 선지자, 신약의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 사건, 현상은 예증적이지 철저하지 않다(Illustrative, but not exhaustive).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사도 요한 또한 유쾌한 과장법으로 이렇게 기록한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4-25).

데이빗 시맨즈가 내적치유 사역을 할 때 많은 공격이 있었다.

“내적치유란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느냐?”
“당신들이 교회에서 마이크 사용, 앰프 사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그 구절에 있다.”

반대파들은 성령이 사람에게 임할 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성경에 질병 종류가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 의학이 발견한 질병 모두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의학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성경에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비슷한 자극에 대해 정도 차이가 있지만 사람은 비슷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라고 사교 신자나 비신자와 달리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은혜적 반응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슬프고 아프면 울고 기쁘고 즐거우면 웃는다→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도 이렇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심하게 슬프거나 억울하거나 후회할 일이 있으면 우는 정도가 아니라 앉거나 드러누워서 고성을 지르거나,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탄식하거나, 몸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통곡한다→성령의 능력이 회개의 영으로 임할 때 이렇게 반응한다. 능력이 임하는 정도에 따라 반응이 다양해 진다.

-수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뻐 날뛰거나, 뛰어다니거나, 손을 들거나 박장대소한다→성령의 능력이 기쁨의 영으로 임할 때 이렇게 반응한다.

-꿈을 꿀 때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REM, Rapid Eye Movements)→성령이 임하여 환상을 볼 때 이런 반응이 일어난다.

-극도의 공포감에 쌓일 때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캄캄한 밤에 오지에 혼자 있다고 생각해 보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몸이 마비되어 얼어붙은 것이다→하나님이 거룩의 영으로 임할 때 이런 반응을 한다. 천사를 보고도 무서워 벌벌 떤 경비병들, 성육신 전의 예수를 만난 다니엘,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을 때의 요한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장풍을 만나면 몸을 떨거나 몸이 날라간다→성령이 엄청난 능력으로 임할 때 연약한 육체는 날라가거나 떨릴 수 밖에 없다. 영(spirit. 히브리어 루악, 헬라어 프뉴마)의 원래 의미는 바람, 호흡, 기운이다). 성령 장풍의 능력은 인간 장풍의 능력과 비교가 안 된다.

-술에 취하면 비틀거리다가 아무데나 드러누워 버린다→성령의 술에 취해도 비틀거리거나 드러눕는다. 영의 운행에 예민한 여자들은 집회 근처만 가도 마취된 것처럼 성령의 새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거나 아예 드러누워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사울은 성령의 술에 취해 하루 종일 드러누워서 황홀경에 빠져서 중얼거렸다(삼상 19:24).

물론 이런 현상은 체면술이나 무술을 통해 또는 사교 집단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증거하는 교회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로 인해 맺는 성령의 열매로 분별해야 한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성경에 기록된 쓰러지는 '현상 자체'를 편파적으로 해석한다.

-성경 인물들은 자발적으로 엎드렸다?
왜 자발적으로 엎드리는가? 의식적으로 엎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서 있을 기운이 없어서 엎드리는 경우도 있다.

-쓰러져도 은혜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예수님 무덤 경비병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의 경우. 그러나 사울왕, 다니엘, 요한, 바울의 경우처럼 은혜 받은 기록이 더 많다. 반문해 보자. 설교 들었다고 모두 은혜 받는가? 은혜 받는 사람도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설교가 무의미한 것인가? 피장파장이다. 쓰러져서 은혜 받은 사람도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울왕, 다니엘, 사울(바울), 계시록의 요한처럼 쓰러지고 넘어지고 몸이 굳어져서 큰 은혜를 받은 기록이 많다.

-성경에는 안수로 쓰러졌다는 말이 없다.
요한 웨슬레, 조지 휫필드, 조나선 에드워즈 등의 집회에서는 설교할 때 사람들이 쓰러졌다. 물론 요즈음에도 설교, 찬양, 단체 기도할 때 쓰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안수를 통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이는 학습효과에 의한 것이다. 어떤 성령사역자가 눈을 감고 안수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보니까 쓰러져 있었다. 또는 평소처럼 안수기도하는데 사람들이 막 쓰러지기 시작했다.‘아, 안수하니까 쓰러지는구나.’

신학교에서 성경과 신학 지식을 전수하듯 은사도 전수된다. 지식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능력도 전수된다. 언젠가 필자가 한 교회의 부흥회 초청을 받았다. 그 교회는 예장 OO 소속 교회지만 안수사역을 공개적으로 하는 교회였다. 필자는 비디오를 통해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침 다른 일로 대동한 목회자 몇 명에게 안수훈련을 시켜서 설교 후 안수사역을 분담하기로 했다. 사전에 간단하게 안수전이 훈련을 한 후 서로에게 안수기도를 해보게 했더니 사람들이 쓰러졌다. 신기한 것은 성령사역에 입문한 지 몇 달도 되지 않는 초보자가  부흥회에서 안수기도를 하는데 손만 대면 사람들이 쓰러지니까 본인이 더 흥분했다. 안수기도를 통해 사람이 쓰러지는 것, 실제로 해보면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실제 경험이 없으니까 별 트집을 다 잡으면서 성경에 쓰러지는 현상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성경 기록은 오늘날의 쓰러지는 현상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반문해 보자.
성경에는, 말로만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TV 방송, 인터넷 방송, 오디오, 비디오 등을 통해 복음을 전파한다. 예화도 파워 포인트나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성경 어디에 이런 것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또한 사이비 종교들도 이렇게 한다.
그렇다고 이게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일반 은혜의 혜택들이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직접 성령을 임하게 하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은혜의 도구들-찬양, 기도, 말씀, 안수 등-을 통해 은혜를 주시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

-성경에는 앞으로만 넘어졌지 뒤로 넘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존 스토트가 이 말을 어느 잡지에서 한 마디 했더니 벌떼처럼 인용한다 존 스토트는 비록 뛰어난 성경학자이지만 성령사역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한 사람이다. 이런 것은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논리적 오류(Appeal to authority)다. 외과 의사에게 안과의 전문 분야를 상담하는 격이다. 외과 의사도 같은 의사지만 안과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수 있다.

반대파들이 주로 글을 발표하는 일부 기독교 언론들은,  성령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 후 신학자의 견해로 마무리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전문가란 사람들이 대부분 골수 기적중지론자들이다. 이런 인용 자체가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보도라는 언론의 기본 원칙에 위배된다. 성경은 형제를 재판할 때 분명히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라고 했다. 사람 수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세우라는 말이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이런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유명한 신학자가 그렇게 말했으니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체험 있는 사람들은 코웃음 친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만히 있으면 이등이나 하지.”

 

바울의 예를 들어보자.
과연 말에서 떨어진 사울(바울)이 자발적으로 엎드렸고, 또한 엎드려서 앞으로 떨어졌는가? 그리고 은혜를 못 받았는나? 바울이 말에서 땅에 떨어진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 넘어졌는지 뒤로 넘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큰 은혜를 받고 회심하여 즉각 예수 핍박자에서 전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단사냥꾼인 행크 해네그라프는 ‘바울은 쓰러진 후 소경이 되었는데 요즈음 쓰려져서 소경이 되었느냐?’고 반문한다. 과연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해야 동일한 체험이 되는가? 고아왕 조지 뮐러는 시편 68:5을 묵상하다가 감동을 받고 평생 고아를 돌보았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해너그라파의 주장대로라면, '조지 밀러는 왜 고아만 돌보느냐, 과부도 돌보아야 성경적이다'라고 비판하고, 노숙자 사역하는 사람에게 왜 노숙자만 돌보느냐, 이혼자, 고아, 탈북자는 왜 돌보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것과 같다.

그런 해너그라프에게 묻고 싶다. 성경 어디에 라디오나 TV로 성경공부 시키라는 구절이 있는가, 왜 그는 목회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그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 대답이 바로 자기가 비판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다.
 

반론의 의미에서 반대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역이나 제도에 대해 비판해 보자. 이는 반대파들의 논리나 해석 방식으로 비판해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홀로 새벽기도 하셨지 누구와 같이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새벽기도 한 적이 있는가?
-서신서에 새벽기도하라는 명령이 있는가?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를 하는가?

미국 교회는 새벽기도 하지 않아도 은혜만 잘 받는데. 어떤 신학자는 말한다.

“성경에 새벽기도하라는 분명한 구절은 없지만 열매가 좋다.”

마찬가지다. 쓰러지는 체험을 하면 열매가 좋다.

또 한 가지 더 보자.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회(총회) 회원들은 사도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도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왜 사도 총회를 교단 총회의 근거로 삼느냐?

그들은 사도직이 나중에는 목사직으로 '상황화' 되었다도 주장한다. 순전히 경험과 무경험에 의한 주장이다.

또한 성경에는 회의를 한 번 했고 다시 하라는 명령도 없는데 왜 매년 정기적으로 여러 번 하는가?  더 나아가서, 교단 총회장, 부총회장, 총무, 서기란 단어가 어디에 있고, 그들을 뽑으라는 기록이 어디 있는가?’ 모두 일반은혜의 혜택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임재와 생소한 영적 현상들

생소한 영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편재 omni presence.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내주 indwelling presence. 성령은 신자 속에 내주하신다.
임재 manifest presence. 사람이 오감으로 느끼고 체험할 정도로 존재를 드러내신다.하나님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도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현현인 임재에 기록이 많이 있다.

-떨기나무에 불로 임하신 하나님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
-오순절날 급하고 강한 바람이나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님
-사울(바울)에게 강한 빛으로 임하신 하나님~ 등

성경에는 이런 기록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편재와 내주는 인정하지만 임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존 칼빈(깔뱅)이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들이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by the secret working of the Spirit)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 한 것이 된다"고 말했을 때,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사역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이후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치러지는 성령사역은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다. 성경에는 비밀스런 사역도 있고(내주) 요란스런 사역(임재)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들은 이에 더하여 기적중지론, 계시종료론, 치우친 구속사적 성경해석 등을 통하여 성령사역을 완전히 상자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들은 교리라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자기들의 무체험을 변호하는 인간적인 잔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런 신학의 상자 안에 갇히고 인간의 잔꾀에 장단 맞추시는가? 아니다. 성경 시대는 물론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현현인 초자연적 현상은 일어난다. 반대파들의 신학에서 안 일어나고 반대파들이 직접적인 체험을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면 연약한 인간은 감당하기 힘들다. 이때 마치 고압 전기에 닿은 듯 연약한 인간의 영혼육이 각종 반응을 한다. 성령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시다. 그렇다고 성령님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세상 무술 고수의 어떤 장풍 보다 힘이 더 세신 분이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은 단독으로 임하기도 하지만 주로 사람을 통해서 임한다-기도, 안수 등.  이것을 안수사역, 기름부음 사역, 능력전이 사역이라고 한다. 이런 감정적, 신체적인 현상은 꼭 성령집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에서나 영력이 강한 사람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열매가 다르다.


열매로 분별하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마귀도 비슷한 모습, 비슷한 현상은 주지만 그 열매는 판이하다. 필자는 이런 집회를 워낙 오랫동안 수없이 보아왔고 또한 직접 이런 사역을 하기 때문에 각종 현상에는 오히려 담담하다. 그 보다는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 그들이 맺은 열매에 더 관심을 가진다.

“제가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어요”(I felt clean).
“은사가 임했어요.”

성령은 깨끗하게 하지만 마귀는 지저분한 기분을 준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었어요. 신앙생활 더 잘해야겠어요.”
“가슴에 통증이 없어졌어요.”
“XX 병이 나았어요.”
“미운 사람을 용서했어요.”

그런데 반대파들은 열매에는 관심이 없고 현상을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현상에 더 매달린다. 언젠가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김OO 목사는 외국의 이런 집회에 참석한 후 이렇게 소감을 정리했다.

“그 집회에는 현상만 있고 복음(?) 또는 말씀(?)은 없더라.”

자기가 현상만 봤기 때문에 그렇다. 관심을 갖고 체험자 몇 명과 간단한 대화만 해봤어도 그런 헛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 그런 현상 보려고 비싼 돈 들여서 외국에 갔는가? 필자는 반대파들의 수많은 글, 잡지, 책을 봐도 ‘열매로 분별하자’고 말하는 내용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다, 위험하다”는 식의 비판 일색이다.

말로는 은사나 체험보다는 열매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외양만을 보고 비판만 할 뿐 체험자의 간증이나 변화된 삶에는 관심이 없다. 몇 가지 교리 공식으로 성령의 사역을 마귀의 짓으로 돌리는 신학적이고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사실 체험자들은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별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수술실에 누운 환자가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상관하는가? 그들은 오직 의사에게 몸을 맡기고 병을 제대로 고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수술 과정을 참관한다고 하자. 환자가 수술을 통해 낫는 것보다는 때로는 생소하고 희한하며, 때로는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모습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반대파들이 꼭 참관자들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체험자들이 무슨 은혜를 받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겉으로 드러난 생소한 현상에 대해서만 평가하면서, ‘이래서 비성경적이고 저래서 비성경적이다’라고 성급하게 결론은 내린다.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 잘못된 신학에 경도되어 있고, 체험한 자의 간증을 들어본 적도 없고, 직접 체험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몰이해, 유유상종의 회합 죄의 오류, 유추의 오류, 성급한 일반화의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 오류의 안경을 벗고 성령운동을 다시 보면 새로운 차원의 영적 세계가 열린다. 북 치고 기타 치는 찬양과 경배를 잘못 비판했다가  ‘해 보니까 좋더라’고 한 것처럼, 생소한 영적 현상을 비판했다가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면 너무 좋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속았다!”

주저하거나 이상해 할 것 없다. 많은 사람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은혜의 강물로 뛰어들었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북 김정은 공산 정권처럼 지금 반대파들 중에는 이런 변절자들(?)이 많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더 막는지도 모른다. 이런 변절자들, 다다익선(多多益善, The more, the better)이다.

“모르면 비판하고 알면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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