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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사]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오늘날의 예언은 분별해야 한다
구요한 목사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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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01  00: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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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사]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프로페테이아)을”(고전 12:10).

 

최근의 어느 기도회에서 한 자매님이 말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속에 성난 두 얼굴이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불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자매가 대답했다. "아마 한 얼굴은 저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 방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과 나쁜 소문을 퍼뜨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그림을 본 처음의 자매가 이렇게 말했다. "아마 다른 얼굴은 저였을 것입니다. 저도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으니까요."

 

위는 미국 전(前) 트리니티 복음주의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이자 현 피닉스신학교 교수인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박사가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하기 위해 꺼낸 서두이다.

 

기도회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개발, 훈련 및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직통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예언이나 직통 계시를 받는 사람들을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매도한다.

과연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존재하는가? 예언의 은사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예언의 은사

 

사도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29-31).

 

   
▲ 오늘날의 예언에 대해 성경적 신학적 경험적으로 잘 설명해 놓은 책이 바로 웨인 그루뎀의『예언의 은사』이다

 

웨인 그루뎀1)은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란 "우리 마음 (또는 생각) 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신 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안위와 권면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고전 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 (고전 14:25) 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성구에 의하면 ‘예언’과 ‘계시’는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언이나 계시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다. 그루뎀은 고전 14장의 자세한 주석을 통해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언이나 환상을 보는 자들을 무조건 신비주의자로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개혁·보수신학에 제동을 건다. 그루뎀 교수는 특히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존 맥아더2)의 견해를 강렬하게 반박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 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도 있으므로 분변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의 예언을 과신하는 자들에게도 따끔한 경고가 된다.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오늘날의 예언은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예언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웨인 그루뎀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라고 말하며 또한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21)고 말한다.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틀린 계시를 주시지 않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어려우며 (예, 행 10장에서 베드로가 받은 보자기 속의 동물 환상),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각 때문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계시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데서 생긴 오류이다.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계시와는 다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 예레미아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다고 기록한다(신 18:18-20; 렘 1:9; 겔 2:7).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예언은 절대적인 신적인 귄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권위를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예언이며 전 시대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다(딤후 3:16).

 

 

신약에서도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선자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다.

 

신약의 사도들 (및 일부 사도의 지도하의 제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했다(고전 2:13; 갈 1:8-12).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동격에 두고 있다. "곧 거룩하신 선지자의 예언하신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하노라"(벧후 3:2).

 

신약에는 사도나 사도의 위임을 받은 일부―마가, 누가―만이 완전히 영감된 성경을 기록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신자들은 예루살렘(행 11:27), 안디옥(행 13:1), 두로(행 21:4), 가이사라(행 21:8-9), 로마 (롬 12:6), 고린도(고전 14장), 에베소(엡 4:11) 및 데살로니가(살전 5:20) 등 전 교회에 골고루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약이 말하는 예언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격을 구분한 그루뎀은 절대적인 신적인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성경말씀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루뎀은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두 가지 통로를 통해 교회에 주신 적이 없다'는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3)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루뎀에 의할 때 개핀의 주장은 어떠한 성경 구절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독단적인 주장이다.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교수 출신인 잭 디어(Jack Deere)4)도, 기록된 말씀이나 직접적인 음성을 통해 지금, 이곳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보다 기록된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집착하는 성경 이신론자들(Bible deists)5)의 오류를 책망한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성경을 우상화하여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6)

 


예언의 은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 7)교수는 그루뎀과 개핀의 견해를 비교 평가하면서 사소한 오류를 지적한 후 전체적으로 그루뎀의 팔을 들어준다. 포이트레스에 의하면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계시'라는 말을 전문적인 용어로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특별 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개핀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고 비판한다.

 

성경에는 '계시 또는 계시하다'라는 말이 항상 정확무오한 성경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 1:18),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5),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것 (엡 1:17)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D. A. 카슨(Carson)도 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8)

 

 

더군다나 포이트레스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고전 14장1절과 살전 5장20절이 명확하게 인정하는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조직신학자들의 횡포를 나무라면서 성경 말씀에 충실할 것을 경고한다.

 

포이트레스는 또한 예언의 은사가 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므로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부정해야 한다면 개신교가 인정하는 66권의 성경을 말하는 정경(正經, Canon)이 완성되지 않은 초대 교회 당시의 예언이 더욱 위험했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거울을 삼을 정경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을 제대로 분변할 견제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사도들이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예언의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사도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 오지나 성경 반입이 허용되지 않은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도 똑같이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그는 반문한다.

 

포이트레스는 덧붙여 쟁쟁한 개혁신학자들이, 그루뎀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직접 체험한 사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그는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R. C. 스프롤(Sproul)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인용한다.

 

 

포이트레스는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예언을 권면적인 것(고전 14:3), 정보제공적인 것(고전 14:25), 즉흥적인 것(고전 14:26, 30), 명령적인 것(행 21:4) 등으로 구분한다.

 

수년 전,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가 부산에서 제일 큰 수영로교회의 담임목사인 정필도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 오디오 테이프에 실렸다. 정 목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장로교회의 목사이다. 그는 교회성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수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이 교회성장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단어

 

예언(prophecy), 예언하다(prophesy)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명사), 프로페튜오(동사)인데 프로페튜오는 프로(앞으로, 내다, 대신)와 페미(말하다)의 합성어에서 생겼다. 따라서 예언하다는 말은 "전하다, 미리 말하다, 대신 말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언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 대언(forth-telling)과 말 그대로 미래의 일을 말하는 예언(fore-telling)으로 구분한다.

 

대언.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자녀에 대한 하관심과 사랑을 전달한다. 대언을 통해 안위, 권면, 책망, 심판 및 인도의 말씀을 주신다.

예언.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고해 주시거나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즉 비전을 주신다.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몇 가지 정의를 살펴보자.

 

“우리 마음 (또는 생각)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시는 것을 사람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 –웨인 그루뎀.9)

“예언의 은사는, 모인 사람들이나 그들 중의 소그룹이나 또는 개인에게, 신적인 기름부음을 받은 언어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데이빗 파이치(David Pythes). 10)

“예언의 은사는 신적인 기름부음을 받은 언어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피터 왜그너(C. Peter Wagner). 11)

 

위의 두 사람의 정의는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예언의 은사는 신자들을 권면하고 건덕하고 안위하고,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예측적인 것은 물론 설명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로버트 클린턴(Robert Clinton). 12)

 


예언의 은사의 기능과 유익

 

예언은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것이다. 피조물이자 타락한 사람은 상황이나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아무리 신앙이 성숙하고 성경 지식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만큼 상황이나 사람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반드시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도 이런 것들을 나타내신다. 그런 점에서 예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예언의 말씀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 어떤 자매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삶을 꾸리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삶에 회의를 느끼고 살 의욕을 잃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봉사활동도 하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 밀려닥치는 고독감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주셨다. "순희야(가명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내가 너의 친구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그녀의 삶은 좌절과 낙심에서 벗어나 소망과 기대로 바뀌어졌다.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의 형편과 처지를 아실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심령이 치유 받는다.

 

 

-예언은 우리의 생각, 관점을 바꾼다

 

Y 자매는 평범한 가정 주부다. 자녀들도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후 각자 인생을 살기에 바쁘고 이제 집에는 자기와 남편만이 남아있다. 오십 대 초반에 접어든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데 단 한 가지 남편이 아직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했다.

 

비록 둘은 한 지붕 아래 살지만 공통적인 화제도 드물고 친밀감도 결여되어있었다. 남편의 회심을 위해 수년에 걸쳐 기도했지만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남편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Y 자매는 하나님의 음성듣기 세미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음성듣기 훈련을 받은 후 남편에 대해 주님께 물어보았다.

 

"주님, 주님은 제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런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아들이라뇨?"
"이제 곧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속히 좀 해주십시오. 주님,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제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나는 내 품을 떠난 너를 오랫동안 기다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느냐?
그런데 너는 왜 못 기다리느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불신자 남편, 술이나 담배에 찌들린 남편을 하나님이 심하게 책망이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주님은 그런 남편을 보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다니! Y 자매는 너무나 감격하여 남편을 하나님의 자녀처럼 잘 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자기도 이제 세상 죄악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알 때가 된 것 같다면서 순순히 교회를 따라나섰다. 그 남편이 일 년 후에는 집사까지 되었고 자기보다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불신자 남편에 대한 아내의 생각을 바꾸심으로써 남편을 변화시키신 것이다.

 

예언 사역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만난다.


언젠가 어떤 자매의 부탁을 받고 그의 십대 아들을 위해 내적치유를 하기로 했다. 약속된 날에 그 집을 향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해 가는 동안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미가 문제다"라는 생각을 주셨다. 혹시 잘못 듣지 않았나 해서 계속 기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집에 도착하여 그 아들과 마주 앉아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상담을 했지만 이 아들은 생각과 판단이 건전하고 믿음에 서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운전 중에 하나님이 주신 생각대로 어머니를 불러 상담을 했더니 그제야 그녀는 수십 년 동안 혼자만 마음속에 간직해 온 남편과의 갈등로 인한 여러 가지 상처를 토로했다. 그래서 아들 대신 어머니를 위해 몇 시간 동안 치유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시다. 만일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분변하지 못했다면 헛수고만 했을 것이다.

 

 

-예언은 우리를 책망하고 훈계한다

 

언젠가 상담 중에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습관적으로 어떤 죄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숨기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자백했다. "사실은 제가 그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지적해 주셨군요. 당장 고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그러나 남을 책망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영적 권위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이 책망, 훈계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므로 지혜를 구해야 한다.

 

 

-예언을 통해 기도 제목을 받는다

 

언젠가 기도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유창하게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내가 생각한 것들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성령이 주장하여 기도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기도를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엡 6:18; 유 20; 롬 8:26 이하 참조)라고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중보기도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기도 제목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이런 기도를 ‘예언적 기도’(prophetic prayer), 또는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intercession)라고 한다. 예언을 해주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 제목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예언적으로 받아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14)

 

평신도 사역자인 돈 블럭(Don Bluck)은 예언적 기도에 대해 "주님은 금방 일어날 일을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하나님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중보기도 장군들' 모임의 신디 제이콥스(Cindy Jacobs)는 예언적 중보기도란 "성령님이 일반적으로 사전 지식이 별로 없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위해 성령님의 강권에 의해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기도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위한 기도제목을 주신 경우는 예언적 기도이고 남을 위해 중보기도하라고 주신 기도는 예언적 중보기도라고 한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들에게 이런 기도 제목을 더러 주셨다(삼하 24:18-25; 욥 42:7-9; 사 7:10-25 등).

 

사실 예언적 기도란 말이 생소하여서 그렇지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도의 용사들은 '성경으로 기도'(praying the Scriptures)하기를 실천해왔다. 성경으로 기도하기란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약속, 책망, 인도하심 등을 기도하는 것이다. 조지 뮐러는 항상 성경책을 펴놓고 기도했고, 설교왕 찰스 스펄전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했고, 기도의 용사 E. M. 바운즈는 말씀으로 인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기도를 강조했고, 앤드류 머레이는 매일 말씀을 많이 보면서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결국 예언적 기도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이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본토로의 귀환을 약속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말씀이 성취되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겔 36:37).

 

하나님은 어떤 일을 단독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되어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5, 8). 이 말씀을 받은 그들을 어떻게 행동했는가? 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일심으로 간절히 기도한 결과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다(눅 24:53. 행 1:5. 8; 2:1-4).

 

이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이루어주기로 작정하시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첫째 반드시 응답이 오고 둘째 비록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도하더라도 항상 새로운 기분과 능력으로 기도할 수 있다.

 

 

언젠가 필자는 교회에 필요한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이런 은사 있는 사람, 저런 은사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기도 제목을 바꾸셨다. "은사있는 사람이 오면 행세나 하고 말썽만 부린다.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있기 마련이므로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너무나 고마운 말씀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당연히 그렇게 기도했다.

 

언젠가 자고 있는데 새벽 3시경에 갑자기 주님이 깨우셨다. 이런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서 피곤하기도 하여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누구를 위해 기도할까요?"라고 했더니 "N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N은 그 당시 마음 아픈 일이 많아서 상당히 힘든 중이었다.

 

 

-목회 상담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어떤 교인의 집을 심방하기 전에 새벽기도 때 받은 말씀을 전해주었다. 필자는 교우의 집에 심방 갈 때는 새벽기도 때 충분히 회개하여 마음 판이 깨끗해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위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적어서 전한다.

 

전할 때 미리 해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님을 위해 주시는 말씀을 적어보았습니다. 좋은 말씀은 '아멘'으로 받으시면 되고 혹시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채찍으로 생각하고 받으셔서 고치거나 회개하시면 됩니다. 받으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여 "예"라고 하면 전해준다.

 

그날 그 집사에게 주신 말씀은 "너는 성격이 강하고 고약하니 고치도록 하라. 너는 성격이 강하고 고약하니 고치도록 하라 . . ."였다. 나는 혹시나 언짢은 표정을 짓지 않을까 저으기 염려했는데 그 집사는 "맞아요, 저는 그 성격을 고쳐야 해요. 목사님 말씀 잘해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만일 이런 전달 과정이 없이 다짜고짜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십중팔구 그 집사는 기분 나뻐했거나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났을 것이다.

 

 

-예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준다

 

필자도 어떤 중대한 결정 사항에 관한 것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었다고 바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통로를 거쳐서 확인한다. 때로는 같은 말씀을 계속 주시는 것을 통해, 때로는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자세한 정보는 주지 않고 단지 "~에 대해 기도해 보라"고 요청하여 동일한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때로는 내 영이 증거하는 것을 통해 확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까지 25년에 걸쳐 무려 7~8회의 말씀을 주셨는데 대부분이 처음에 주신 말씀을 확인, 확대 및 구체화 하는 말씀들이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거나 어떤 기도 응답은 받았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으면 좌절하고 낙심할 때가 많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약속에 대해서는 회의와 낙심, 희망과 기대가 교차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런 때에 이전에 주신 말씀을 다시 확인하는 말씀을 주셔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신다.

 

또한 확인은 분별과도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언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아브라함이 100세 때 낳은 아들이 아는가? 요즈음 늦둥이가 유행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고 하는데, 100세에 얻은 (언약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 기가 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이삭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애지중지하는 이삭마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바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을 시험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100세에 얻은 독생자 이삭마저 바칠 만큼,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을 하트 테스트(heart test)라고 한다(대하 32:31 참조). "사람의 일이 제 눈에는 모두 잘돼 보여도 야훼께서는 속 생각을 헤아리신다"(잠 16:2; 한글 킹 제임스).

 

'속 생각'이란 마음의 동기(motives)를 말한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바칠 결단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하트 테스트에 합격하여(약 2:21), 다시 한 번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16-17절).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자신을 잘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 마음을 잘 모른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 영광, 내 축복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조금 잘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보다는 내 영광을 취하기가 쉽다.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유다의 히스기야왕에게 죽음을 선포했을 때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받는 축복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 징조로 일영표 위에 나타난 해 그림자가 십도나 물러가는 징조를 주셨다(왕하 20:1-11).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바벨론의 부로닥발라단 왕은 축하하기 위해 사자를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냈다.

 

하나님이 적국의 왕을 충동질하여 축하 사절을 보내게 하신 것은 히스기야의 마음이 어떤한가를 아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 32:31).

 

그런데 이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히스기야는 적국 왕의 사자들에게 왕궁에 쌓여있는 막대한 재물과 무기를 과시함으로써(왕하 20:12-13), 시험에 떨어졌다. 히스기야의 교만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 모든 재산이 바빌론에 옮김 바되고 그 몸에서 난 자식들은 사로잡혀 환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왕하 20:15-18).

 

 

하나님은 수시로 하트 테스트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순수하지 않은 것, 동기가 불순한 것을 하나하나 드러내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 것인가를 절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도 스스로 속아 자신의 영광을 취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이나 자신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예언의 말씀을 통해 한 번 물어보라. 뜻밖의 말씀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필자는 성령운동비판자들이 제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이라도 들어보기를 바란다.

 

 

-예언은 우리를 인도한다

 

예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사역, 새로운 사업, 새로운 방향 설정이나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필자가 전임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과정이 그렇다. 출석 교회의 담임목사가 거의 6개월 전에―나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을 때―나에게 목사로서의 소명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알았을 것이다. 또한 어느 집사도 기도 중에 나에게 소명이 있다고 아내에게 여러 번 말했고 아내도 금식기도 중에 나에게 소명이 있음을 확인하고 나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때 필자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런 공부가 아니고 신학을 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필자도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오히려 성경말씀 읽기에 더 치중한 것 같다. 말씀을 보면 글자가 살아서 꿈틀거리기도 하고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필자도 금식기도를 통해 주님이 나를 전임사역자로 부르셨다고 확신한 후 로스쿨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이때는 필자가 예언의 말씀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감동을 받고 그것을 평생의 사역으로 섬긴 사람도 있다.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는 어느 날 성경을 묵상 하던 중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이후 그는 영국에 고아원을 열어서 기도 하나만으로 평생에 걸쳐 수천 명의 고아를 먹여 살리는 사역을 감당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또는 환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 새로운 사역, 새로운 사업, 새로운 만남으로 인도하신다.

 

 

-예언은 강력한 영적 정찰 무기이다



예언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는 보통 같이 열리는데 마귀의 책략을 사전에 알 수 있는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이런 은사가 없으면 마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은사가 있으면 엘리사가 멀리서도 아람 왕의 대화를 알고, 영안이 열려 마귀의 책략을 알게 되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장소에 어떤 영이 역사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마귀의 발판이 되는 죄를 회개하고 방언이나 전투기도를 통해 영을 좇아낸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방식이다. 반대자들은 이런 초자연적 은사가 없으니까 영적 전쟁의 개념도 모르고 반대만 하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가 임하는 방법

 

예언의 은사가 어떻게 임하는가?


비판자들이 이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수준에서 점쟁이가 점치는 것처럼 이해한다.
맞다. 점쟁이든 하나님의 자녀든 초월적인 능력이나 음성이 임하는 방법은 비슷하다.

 

비록 점쟁이는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거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나 모습이 떠오르거나 육감이 작동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언의 은사도 이런 식으로 임한다. 성경 이해와 마찬가지로 훈련의 정도, 신앙 성숙도의 정도에 따라 정확도가 달라질 수가 있다.



은사가 임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은사가 있거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면 대화식도 가능하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


이렇게 오는 경우 해석이나 적용에 각별한 조심을 해야 한다.



-내적 음성


세미한 음성 또는 불쑥 들어오는 생각이나 단어를 통해.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적 음성 듣는 것이 훈련되면 대화도 가능해 진다. 엘리야가 들은 음성이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2).

 

이런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데 귀로 듣는 것 만큼 또렷하다.




-계속 이어지는 말을 통해



내적 음성이나 세미한 음성을 통해 말씀을 주실 경우 어떤 핵심적인 단어나 문장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말을 계속하거나 기록하면 예언의 말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예언하다의 히브리어는 나바(예언하다), 나비(선지자)인데 이 말은 "거품이 일듯 부글부글하다"(bubble up), "입에 거품을 내며 지껄이다"(boil forth)는 뜻이 있다.13)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어느 교수는 강의에 집중하면 입에 거품을 내며 열변을 토했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품을 내며 지껄이는 수도 있다. 구약 당시 선지자들이 아마 이런 모습으로 예언을 한 것같다.


물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신령한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나 문장을 전해주더라도 핵심을 찌르는 경우가 있고 수십 분을 말해도 변죽만 올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예언 사역자의 기름부음의 정도,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보다 말을 잘하니까 오랫 동안 전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자매는 한 시간 이상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알맹이를 보면 한 두 가지인데 이런 양념, 저런 치장을 하고, 같은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내용을 반복하다보니 한 시간도 금방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하면 듣는 사람의 집중력이 떨어지므로 반드시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시는 말씀의 기록이나 녹음을 통해
 

오늘날 예언 사역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예언해 줄 때 반드시 녹음할 것을 권장한다. 예언의 말씀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 바쁘다보면 잊어버리기 쉽고,나중에 예언의 신빙성이나 책임 문제도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해 놓거나 녹음해 놓고 계속 읽거나 들으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면 기도하면 상황이나 환경에 매이지 않고 믿음이 늘 새로워지는 것을 많이 체험한다.



어떤 경우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예언이 틀릴 수도 있고 받은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예언을 듣는 자는 중요한 내용이라면 반드시 여러 사람을 통해 확인을 받을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임이 확실하면 꼭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예언의 말씀에 믿음을 화합하여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가 있다(마 13:18-23 참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개인 예언은 대부분이 조건적인 것이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 일 세대가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불평과 불순종으로 인해 그 열매를 누리지 못했듯이, 예언의 말씀을 멸시하여 방치하거나, 잘 간직하다가 환란이 올 때 쉽게 넘어지거나, 세상 재미에 빠져 소홀히 하면 예언의 말씀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예언의 은사와 다른 은사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들) 고치는 은사(들)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들을)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예언의 은사와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예언은 과거의 일은 물론 미래의 일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내용을 전달하지만 ‘지혜의 말씀’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봉착했을 때 순간적인 지혜-바리새인의 올무를 지혜롭게 잘 피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말한다.

 

‘지식의 말씀’은 주로 과거의 일에 대한 '정보(information)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지금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여 그 여인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지식의 말씀을 전하셨지만(요 4:18), 아나니아는 사울 청년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행 9:15-16). 물론 사울이 직가에 있으며 지금 기도 중이라고 알려주신 것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행 9:11).

 

 

-예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통역된 방언은 예언의 효과를 가진다. 언젠가 어떤 자매가 방언하는 것을 통역한 적이 있는데 그 자매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통해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해석을 들은 자매는 큰 위로를 받았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물론 한 성령의 역사이지만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고(고전 14:2),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거의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무엇'(what)을 말해준다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떻게'(how)를 말해 준다. 즉 전자는 내용을 후자는 전달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니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이 어디에 있으며 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까지 알게 되었다(행 9:11-19). 선지자 나단도 다윗의 죄악을 고할 때 죄악의 내용은 물론 전하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삼하 12:2-14).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대처할 방법까지 제시해 주었다(창 41:25-36).

 

언젠가 어떤 자매를 상담할 때 그 자매가 상당히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매에게 확인하기 위해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반복해 물어보았더니 이 자매는 그제야 마지못해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시인했는데 나는 나중에 "아차"했다.

 

비록 지식의 말씀은 맞았지만 지혜롭게 전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자신의 아픈 부분을 드러내니 시인도 못하고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못해 고심했던 것이다. 이후 필자는 어떤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단어나 생각이 떠오르면, 먼저 이 말을 지금 당장 전해야 하는가(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른 방법으로 전할 수 있는가(보다 완곡한 표현이나 긍정적인 표현으로), 아니면 본인 자신이 직접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말씀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직접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경우 놀랍게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본인 스스로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통해 상담자는 내담자의 과거는 물론 미래의 일까지 알 수 있다. 이때 특히, 지식의 말씀을 전할 때와 마찬가지로, 예언의 말씀을 전할 때 지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예언의 말씀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구해야 한다.

 

특히 초보자나 영적 권위가 없는 평신도는 책망하거나 미래의 중대한 결단이나 방향 설정에 대한 예언은 삼가해야 한다. 말썽 많았던 미국 '캔사스시 예언자들'이 주로 이 분야에서 실수를 많이 한 것 같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과거나 미래에 대한 정보나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변해야 하고 또한 원천이 어떤 영인가를 분변해야 한다(고전 14:29; 살전 21: 요일 4:1).

 

그러나 실제로 사역할 때는,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벌이듯,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고,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영을 분별하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말씀을 지혜롭게 전달하고, 치유사역의 경우, 방언을 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불일듯하고, 믿음의 은사를 확신하고, 능력 행하는 은사나 신유의 은사를 사용하여 치유함으로써 여러 가지 은사가 한꺼번에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예언의 은사는 설교나 가르치는 은사가 아니다

 

칼뱅 이래로 많은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예언의 은사는 설교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라고 이해한다. 과연 이런 해석이 옳은 것일까? 성경에 보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한 책이며(벧후 1:20, 21; 3:2; 계 1:3),  성경 기록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로서의 예언을 사라졌다는 가정 아래 이런 해석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첫째 만일 이것이 바른 해석이라면 고전 14:1의 적용에 문제가 생긴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는 "특별히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라"는 의미가 된다. 이 구절은 전체적인 신자를 향한 명령인데, 만일 이들대로의 주장이라면 지금 현재 절대다수의 신자들이 설교하고 가르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결과가 된다. 하기야 직통 계시적인 예언을 구하지도 않으니 순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둘째 성경은 예언하다와 설교하다(전파하다) 또는 가르치다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은사의 종류를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선지자와 교사를 구분한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

 

 

마지막으로 만일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고전 14:29-30 적용에 문제가 생긴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자는 한 번에 둘이나 셋이 해야 하고 다른 이들은 그들이 설교나 가르침을 제대로 했는지를 분변해야 한다. 또한 곁에 앉은 다른 이가 설교하고 가르칠 일이 있으면 먼저 하던 사람은 금방 중지해야 한다. 과연 그런가? 결론적으로 예언의 은사는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언의 분별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만 마귀의 음성이나 자신의 음성도 듣는다.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본인이 오래 동안 어떤 생각이나 소원을 품으면 꿈이나 환상,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등으로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볍과 사용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니까 '캔사스시 예언자들'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동차가 위험하니까 운전면허와 교통규칙이 있듯 예언의 은사도 유익한 만큼 분별법과 사용법을 잘 배워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기초적인 분별법만 제시해 본다.

 

-예언은 하나님의 속성(성품)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예언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므로(신 13:1-3), 다른 것을 종합해서 분별해야 한다.
-예언은 성경 내용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증진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은 뒷 맛이 평안하고 기쁨이 온다. 비록 책망하는 것이라도 거룩한 통회는 있지만 염려, 불안은 없다.
-오늘날의 직접 듣는 하나님의 음성, 꿈, 환상을 통한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별되어야 한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최소 2~3명이 그 주제에 대해 분별해야 한다. 
-특히 결혼, 출산, 시험 합격, 사업 성공이나 휴거 날짜(이것은 비성경적이다) 및 전쟁 예언 등은 잘 맞지 않으므로 이런 예언을 하는 사람은 각별히 유의하거나 자제할 필요가 있고, 예언을 받는 당사자도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 틀리는가?

 

비판자들은 예언이 틀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은 왜 교단이나 사람마다 틀리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9절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한 가지’라고 말하는데, 왜 교단이나 사람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인가? 동일한 성경을 해석하면서 왜 어떤 사람은 기적이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해석하는가? 이런 경우 성경이 틀린 것인가, 해석이 틀린 것인가? 당연히 후자이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예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틀린다. 예언을 잘못 받을 수도 있고 해석을 잘못할 수도 있다.

 
 

첫째, 예언자가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도 신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춘 신학자나 목회자가 하는 것과 신앙의 초보자가 하는 것에는 차이가 많다. 또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예언도 마찬가지로 해석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예언자가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한 장로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환상 중에 그 장로가 보이고 옆에 금고 문이 열려 있고 돈 다발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예언자는 즉시 그 장로는 교회의 재정 장로이므로 교회의 공금을 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장로의 사무실에 도둑이 들어와서 금고문을 열고 돈을 훔쳐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는 자는 해석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런 일은 오늘날의 예언은 물론 성경의 예언에서도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2:2). 큰 민족을 이루려면 먼저 아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고 아브라함과 아내 사래는 나이가 들어 출산조차 불가능해졌다.
 

 

당시에 아들이나 상속자를 가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연적 출산, 입양 및 첩이나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다. 그래서 자연적 출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집의 청지기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상속자인가 하고 하나님께 문의했더니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라고 하셨다(창 15:2-4).

 

약속을 받은 지10여 년이 지나도 아내 사래가 출산하지 못하자 아브라함은 사래의 몸 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아니었다(창 16).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지 24년이 지났고 아들은 이스마엘 뿐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상속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제야 ‘사래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라고 하시면서 일년 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7:19).
 

아브라함이 몇 가지 실수를 한 것은 ‘하나님이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셨지 ‘너와 사라를 통해 날 자’라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예언도 비슷하다. 두루뭉실하게 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석이나 적용이 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예언을 제대로 듣고 보는 것은 물론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지혜도 구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 함께 분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한두 번 맞았다고 해서 자기의 예언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함부로 선포하고 행동하다가 틀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둘째, 예언은 신학 프레임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휴거날짜 예언’이나 ‘전쟁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절대 다수가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모든 것을 분명하게 주시기 않기 때문에 예언을 받거나 보는 사람이 자기의 신학 프레임으로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요즈음에는 숫자로 예언하거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여 예언 사역의 물을 흐리고 있다. 숫자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예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대인 신비주의인 카발리즘의 영향으로, 성경이 말하는 숫자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여 성경을 해석하거나 예언하고 있다.

 

휴거날짜 예측은 성경의 안식년(7년)과 희년(50년)에 유대인 달력으로 나팔절(휴거일)과 초막절(지상 재림일)을 계산하여 예측하는 것인데,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측했지만 당연히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해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성경 해석의 연장 선상에서 예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2017년에 대해 예언할 때, 17=10+7인데 10과 7은 완전수이므로 2017년은 ‘돌파의 해’, ‘특별한 은혜의 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2017년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부터 70년이 되는 해,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므로 이스라엘에 ‘전쟁’이나 ‘특별한 사건’이 생긴다면서 모여서 기도하자고 촉구하는 사람도 있다.

 

 

셋째, 소속 단체가 같으면 같은 예언을 하기 쉽다.

 

1990년대 초에 휴거 소동으로 한국을 시끄럽게 했던 다미회의 휴거날짜 예언 대표적이다. 수많은 학생이나 어른들이 동일한 예언을 하여 정통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들도 많이 동조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기름부음이 한 단체를 지배하는 대표적 사례이므로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더군다나 휴거날짜(예수님의 공중재림 날짜)는 성경에 분명히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마 24:36)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경의 분명한 내용과 위배되는 예언은 당연히 틀린 것인데 사람들은 혹시나 하고 잘못 기대하고 믿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메시아닉 쥬 운동(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운동)과 신종 유대주의인 ‘히브리 뿌리운동’에 심취된 자들 중에서, 성경은 ‘그 해를 모른다’고 했지만, ‘그 달’과 ‘그 날’은 히브리 달력의 계산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시대의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이다.

 


100% 무오류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성경의 해석이나 오늘날의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이므로(고전 2:13-14) 틀릴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틀리지 않지만 해석이나 적용 과정에서 틀리는 경우가 있고, 숫자나 절기를 통한 예언처럼 처음부터 틀리는 경우가 있고, 예언자의 신학 프레임이나 개인적 취향 및 소원이나 영적 수준에 따라 틀리게 듣거나 보는 경우도 있다.

 

필자도 초창기에 너무나 분명하게 들었는데 틀린 경우가 있어서, 내가 과연 예언을 믿어야 하고 예언 사역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왜 그런 경우가 생기느냐고 하나님께 물었더니 하나님은 “네 마음판이 깨끗하면 내(하나님) 음성을 듣고 네 마음판이 더러우면 네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중요한 음성을 들을 때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치유하고 회개한 후에 듣거나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몇 명의 동역자에게 반드시 내용을 ‘확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00%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예언이 좀 틀린다고 해서 무익한가?

 

예언의 기능은 위로하고 안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고,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이중에서 위로하고 안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은 즉석에서 본인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예언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 부담이 있고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의 ‘캔서스 예언자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맞은 확률이 30%도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비판자들은 '그런 예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비판자들은 모든 예언이 완벽하게 맞아야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100% 완벽한 것이 어디 있나?

문자로 분명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도 천차만별이라 수많은 교단이 있고, 한 교단 내에서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그중에서 틀린 것-대표적인 것이 기적중지론이다- 이 많은데 왜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 비판이 없는가?

 

어떤 유명한 의사가 임종 전에 제자들에게 고백했다.

 

“평생 동안 환자를 보면서 25%(15%라는 설도 있다) 정도의 오진을 했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랐고 나중에 소문을 들은 일반인들도 깜짝 놀랐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오진율은 스승의 두 배 정도 되는데 스승은 그것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일반인들은 당대 최고 의사의 오진율이 그 정도로 높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는 중병일수록 오진율이 높다고 한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위로와 책망의 예언은 잘 맞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은 잘 맞지 않으므로 각별한 분별이 필요하다.

 

2008년 미국의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최고의 경제학자들에게 질문했다.


“왜, 아무도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나?”
“위기를 예견했습니다만 언제 얼마나 심각하게 나타날지 몰랐습니다.”

 

‘경기 예측은 유명한 경제학자들 보다 동네 이발사가 더 잘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경제학자들의 경기 예측이 필요 없다고 하는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고 노력한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아간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도 30%가 정기적으로 점쟁이를 찾는다고 한다.

 

안정된 직장에서 봉급을 받는 사람들-신학자들도 포함-은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약하다. 그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므로 혼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언 사역자들을 많이 찾는다.

 

가정 주부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교육과 진로, 결혼과 출산, 남편의 사업이나 직장 등의 문제를 관장하고 돌보기 때문에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라 혼자 결정하기가 힘들어서, 목회자의 조언을 구하지만 상담자가 예언의 은사가 없는 경우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조언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평신도 예언 사역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

 

사업가든 가정주부든 많은 사람이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호기심 때문에 예언 사역자를 찾는다. 하나님이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런 걸 부인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경적이다. 성경에서 은사 중에 구체적을 구하라고 명령한 것은 신기하게도 예언의 은사이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다른 신령한 것들-기적행하는 은사들-은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지만 예언에 대해서는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왜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노력하고 구해 보라. 생각 보다 쉽게 받아진다. 요즈음은 어린 아이는 물론 조금만 사모하고 훈련하면 누구나 금방 쉽게 받는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의 방향 설정에 관한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예언 사역자는 지나친 약속을 자제하고 내담자는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안전 장치를 갖고 예언을 대하면, 의사의 오진율이 높아서 실패한 치유도 있지만 여전히 의사의 치유가 필요하고 경제학자의 경기 예측이 틀리지만 여전히 사업가나 투자자에게 그들의 예측이 중요하듯, 예언도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이 많다.

 

의사도 중요한 수술을 할 때는 실수의 가능성에 대한 면책에 대해 환자의 동의서를 받듯, 필자도 중요한 예언을 할 때는 반드시 내담자에게 위험성을 고지하면서 주요한 결정은 결국 본인의 인생 경험과 지혜를 통해 할 것을 권면한다. 예언 사역자의 예언은 자문에 불과한 것이지 강제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틀린 경우도 있지만 맞은 경우도 있고, 필자 자신의 인생에서도 틀린 경우도 있지만 맞은 경우가 더 많고 여러 면에서 예언의 은사가 유익하여 이런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사적 계시인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자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잘 사용하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혼란을 가중시키므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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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1. Wayne Grudem,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 Today (Crossway Books, 1988: rev. 2000).

2. John F. MacArthur, Jr., Charismatic Chaos (Zondervan Publishing, 1992);『은사 I & II』.

3. Richard Gaffin, Jr, Perspective on Pentecost.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1979);『오순절의 전망』.

4. Jack Deere,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

5. 이신론(deism)이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운행은 자연법칙에 맡겼다면서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성경 이신론자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말씀을 하신 후 더 이상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한다―필자 주.

6. Jack Deere,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251-69.

7. Vern Poythress, Miracles Class 강의 (Philadelphia, P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0, 1991).

8. 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4), 46.

9. Grudem, The Gift of Prophecy, 17

10. David Pytches, Spiritual Gifts in the Local Church (Bethany House, 1985), 79.

11. C. Peter Wagner, Your Spiritual Gifts Can Help Your Church Grow (Regal Books, 1979), 228.

12. Robert Clinton, Spiritual Gifts  (Horizon House), 52.

13.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Moody Press, 1980, 92), 544

14. C. Peter Wagner, Prayer Shield (Regal Books, 1992);『방패기도』, 168-169 ; Cindy Jacobs, Possessing the Gates of the Enemy (Chosen Books, 1991, 1994);『대적의 문을 취하라』, 145-55를 보라. 또한 책 전체가 이런 주제를 다룬 것으로는 Jim W. Goll, Kneeling on the Promises (Chosen Books, 1999) 및 Barbara Wentroble, Prophetic Intercession  (Renew, 1999)을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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