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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구원05] 당신의 구원은 안전한가?(2)
구요한 목사  |  jk054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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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08  21: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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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구원05]

당신의 구원은 안전한가?(2)

-신자라도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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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한번 구원 받은 이후에는 어떻게 살든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한국 교회에 팽배해 있다.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으므로 천국 가는 티켓은 따 놓았으므로 사는 동안에는 지상적 축복이나 풍성하게 받거나, 아니면 초자연적 체험을 많이 하고 기적행하는 은사를 행하는 것이 신앙 생활 잘 하는 것이라는 생각들이 만연해 있다.

 

필자는, ‘나는 예정 되고 선택 받았으므로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서 성직을 노골적으로 매매하는 목회자도 목격했다. ‘나는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으므로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목격했다.

 

과연 그런가? 성경을 다시 보자.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1).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2-14).

 

몇 구절만 살펴봐도 하나님은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을  ‘거룩하고 흠이 없이 하시려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신다(이신칭의). 타락한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므로(사 64:6) 인간의 어떠한 선행도 하나님의 의-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올림픽 수영 선수라도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지면 혼자 힘으로 헤엄쳐서 육지로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에 힘입어 죄인은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구원 받은 신자는 이제 성령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요, 성화의 삶이요, 구원의 목적이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목회자나 평신도는 애초에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인가, 구원은 받았지만 탈락선(線) 근처에서 위험한 불장난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선행이 하나님께 무슨 영향을 끼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부모에게 열 자식이 있으면, 부모는 잘 되는 자식 보다 못 되는 자식에게 마음이 더 간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하나님은 전능하고 전지하시기 때문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식같이 관심을 갖고 대하신다.

 

하나님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친밀하신 분

 

하나님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는 분이다.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1-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미물 같은 한 사람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라면 왜 하나님은 늙은 욥을 따라다니면서 연단하시고 시험하실까?(욥 7:17-21) 필자도 욥 정도는 아니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시험과 연단을 당하면서 욥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다 보면, 성령 하나님은 내 마음의 생각, 말, 행동 하나하나가 말씀에서 벗어나면 성령의 근심과 시기와 책망으로 인도하시고(엡 4:30; 약 4:4; 요 16:8-9),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추구하면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주신다(빌 4:6-7; 살전 5:6; 벧전 1:8-9).

 

만일 하나님 앞의 이런 영적 민감성을 자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는 상관 없는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앙에서 아주 멀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연인이나 동료처럼 한 개인과 늘 친밀하게 동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영생 및 칭의는 구원의 여러 국면을 말하는 것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을 영혼 구원이라 하지만 복음서는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은 영생이나 생명,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칭의로 표현한다. 이런 주장은 김세윤이 『칭의와 성화』에서 최초로 강조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신약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현세는 여전히 죄와 마귀가 성령의 능력을 입은 신자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는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영생 또는 생명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서 신적 생명을 누린다(요 5:24-29). 그러나 완전한 영생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 자는 칭의된 자이고 칭의가 주는 양자됨과 성화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린다. 그러나 이 칭의도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한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전통적 구원론자들은 고전 9:27을 상급 받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사도 바울이 상급 좀 못 받는다고 해서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할까? 바울은 열심을 내어 많은 사람을 구원했지만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는 자기도 구원에서 떨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영생 또는 생명 및 칭의는 구원을 표현하는 비유 또는 그림 언어다. 그러므로 칭의 하나만 쏙 빼서 단회적이고 영원하다고 하는 주장은 구원을 말하는 성경의 다른 그림 언어와 상충된다.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이미’(already) 와서(가져서) 현재 누리지만 ‘아직은 아니고’(not yet), 미래에 완성될 것들이기 때문이다.

 

칭의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 의할 때, 신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현재), 현재 구원을 받아가고 있고(현재),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의 완성을 받을 것이다(미래).

 

그런데 이 구원은 과거에 한번 받은 것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되어야 한다. 미래의 완성은 현재의 삶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지 말라는 권면과 경고가 많다. 진정한 신자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다. 이것은 공로적 행위(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다.

 

 

성화를 강조하면 행위 구원론자?

 

예수님의 옆의 강도는 신앙 고백 한번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행함(행위)이 있어야 구원 받는 주장을 행위 구원론이라 비판하는 전통적 구원론자들이 많다. 그러면서 비판자들은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은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믿음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들이 비판하는 행위 구원론자가 말하는 믿음의 열매와 별 다른 것이 없다.

 

전통적 구원론자들은 신자가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은 애초에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 교회 안에는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 보다 더 많다고도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 받은 사람의 표징(signs)와 거리가 먼 ‘신자’ 아닌 ‘교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옆의 구원 받은 강도

 

전통적 구원론자들은 ‘한 번 구원 받은 사람도 행위의 열매가 없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신 구원론의 주장에 반발한다.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는 사람도 강도처럼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생전에 구원의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천국 상급도 없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 강도가 세상 죄에서 사면되어 오래 동안 지상에서 살다가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실한 신자로 살다가 죽었을까, 대도 조세형처럼 은혜를 간증하다가 나중에 도둑으로 돌아와서 죄 짓다가 죽었을까? 후자일 공산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강도는 지상에서 오랜 산 것이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 옆 강도의 믿음은 예수님이 인정해주셨다. 행함은 없었지만 진정한 믿음을 통해 내면에 속사람이 탄생한 사실을 예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은 누가 인정해 줄 것인가?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진짜라고 누가 증거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진짜 신자라면 다음의 표징들(signs)을 보이면서 열매들을 맺어가야 한다.

 

-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신다(롬 8:16).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마 22:37-40).

-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즐거워한다(예배, 말씀, 기도, 찬양 등)(롬 7:16-23).

- 세상 풍조가 아니라 하나님 뜻 행하기를 좋아하고(순종)(롬 12:2), 육체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갈 5:17-23),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간다(엡 4:22-24).

-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다(히 2:14-16).

- 목회자나 주변 동료들이 그의 언행을 통해 그가 ‘진짜 신자’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외에 하나님 나라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기적행하는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일(고전 14:1), 가족 및 이웃과 관계천국을 누리는 일(롬 14:17; 엡 5:21-6:4),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충성스럽게 섬기는 일, 불신자를 전도하고 약자를 돌 보는 일, 건전한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불의한 사회 문제 개선에 적극 동참하는 일 등이 믿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사람 믿음 좋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시험과 환난과 풍파와 연단을 통과할 때 드러나는 그의 언행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성경 지식 많고 믿음 좋다고 하다가도 이런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언행을 보고 ‘그 사람이 아는 것은 많은 데 믿음은 없다(작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런 언행에 의해 믿음을 분별하는 것이 행위 구원인가?

 

 

믿음이 있다고 하여 교회생활은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