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뉴스 > 영적현상
[쓰러지는현상③] 성경이 말하는 쓰러지는 현상새벽기도 보다 쓰러지는 현상 관련구절이 성경에 더 많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4.29  21:48: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성경이 말하는 쓰러지는 현상

   
▲ 성령 안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모습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가 하지 않는 새벽 기도를 통해 많은 은혜를 체험한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 남미나 다른 나라들 더 나아가서 한국의 많은 오순절 교회나 성령운동하는 교회에서는 안수사역의 결과 쓰러지는 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한다. 사실 성경에는 새벽에 기도하는 구절 보다는 성령의 임함으로 인해 쓰러진 기록들이 더 많이 있다. 그런데 왜, 새벽 기도는 당연한 것이고 쓰러지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필자가 기억하기에 쓰러지는 현상이 한국 교계에서 문제가 된 것은 20여년 전 예OO 목사의 집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쓰러지는 생소한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단 사이비가 시비 끊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빈야드 운동이 한국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자 한국 교계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장신대 이종성 박사 등 국내의 쟁쟁한 신학자나 목사들이 예 OO 목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그의 형인 예OO 박사의 활약으로 예장 통합측에서는, 쓰러지는 현상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결론 짓고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한국 성령사역자들의 집회에서도 쓰러지는 현상은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 한국 교계도 이 정도는 받아들이는구나'라면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2~3년 사이에 갑자기 영적으로 무지한 정이철 이인규 김재성 등이 갑자기 나타나서 쓰러지는 현상, 거룩한 웃음, 기름부음 사역 및 심지어는 수십 년 동안 한국 교계에서 상당히 수용된 것들에 대해 중보기도와 영적전쟁기도 사역까지 전방위적으로 시비를 걸고 이단시하는 무지와 만용을 드러내고 있다. 잘 모르는 추종자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좋지 않은 방향으로 멘트하고 있다.

“아, 영적으로 무식하면 이렇게 용감해지는구나!”

오늘날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예배 도중이나 안수를 통해 쓰러지는 (또는 넘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쓰러진 사람은 조용히 잠에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큰 소리로 울부짖거나, 웃음을 터뜨리거나, 이상한 몸놀림―떨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한다.

이런 현상은 너무나 생소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건 체면술이야!"
“안수자가 밀려고 하길래 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었지. 결국 나는 쓰러뜨리지 못하더군. 그런 걸 보면 쓰러지는 현상은 다분히 인위적이야.”
“왜  쓰러지나? 쓰러져서 무엇하나?”

이것은 점잖은 표현이다.
한국 M 교회의 김○○ 목사는 설교를 통해 특유의 사투리로 “자빠지기는 왜 자빠지나”라면서 비판한다. 그는 누가 자빠지고 싶어서 자빠지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이는 마치 은혜 받고 우는 사람에게 “질질 짜기는 왜 짜”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생소한 현상에 접하면 자기가 익숙한 경험이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게 마련이다. 쓰러지는 현상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임에서 쓰러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신앙경험으로 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짧은 상식과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을 오해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자주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나 영적 현상에 접할 때,

(1) 그것이 과연 성경적이냐, (성경)
(2) 교회사적으로 있어온 일이냐 (교회사-전통)
(3) 신실한 신앙인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인정하는가 (신앙인의 고백)
(4) 본인의 직접적인 체험이  증거하는가 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직접 체험)

비판자들은 쓰러지는 것에 대한 성경 기록을 나름대로 해석한 것과 자신들의 무 체험을 바탕으로 쓰러지는 현상을 신비적이니,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할 뿐 역사적인 근거나 그런 현상을 실제로 체험한 신실한 신자들의 간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들의 일방적인 해석과 관찰에만 의존할 뿐이다.

그러나 쓰러지는 현상은 일부의 주장과 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필자가 위에 제시한 4가지 근거를 모두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성경의 증거

종교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령 안에서 쓰러지는 것은 ‘사로잡힌 무아의 경지’(possession trance)의 분야에 속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오순절운동 및 은사운동가들 사이에서 독특한 체험으로 인정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나는 이외에 자시암시나 동료들의 강압으로 인한 단체행동 또는 그러한 현상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과 같은 순수한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쓰러진 사실을 기록한 곳이 생각 보다는 많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러진 사람은 아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이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이브를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 2:21).

쓰러졌다는 말은 없지만 상황적으로 보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아담을 눕게 하신 후 재워서 갈빗대를 취하는 영적 수술을 하신 것 같다.

그 다음, 성경에 사용된 ‘넘어지다’(fall) 또는 ‘드러눕다’(lie)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어 ‘나팔’과 신약의 헬라어 ‘핍토’이다. 이 단어들은 단순히 물건이 떨어지는 것에서부터 성이나 군대가 함락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또한 신약에서는 믿음에서 떠나거나 실족했을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전 10;12; 갈 5:4; 계 2:5).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단어들이 사람의 몸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을 경우이다. 이 단어가 사람의 몸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도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첫째는 본인이 의도적으로 복종이나 경배를 표시하거나(마 18:26; 마 4:9; 10:25), 또는 기도하기 위해(마 26:39)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기도 한다.

둘째는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쓰러지는 경우이다.

많은 경우 이 단어는 다른 단어와 함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fell face down 또는 fell on their faces)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나 영광이 임할 때 다니엘(단 8:17; 10:9), 에스겔이 그랬고(겔 1:28),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이 그랬다(마 17:6).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단 8:17).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단 10:9).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마 17:5-6).

이런 현상을 ‘신적인 두려움’(numinous fear)이라고 한다. 피조물이 창조주나 초능력적인 존재를 두려워 하는 그런 두려움을 말한다.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도 이런 두려움을 이겨낼 수는 없다. 존재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천사를 본 사람도 “죽은 자같이 되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천사를 본 무덤의 경비병들이 그랬고(마 28:4), 영광의 예수님을 본 사도 요한이 그랬다(계 1:17).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 28:2-4).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 18:6).
 

필자는 이러한 두려움을 실제로 목격하고 체험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미국독립기념일을 기념하여 미 8군단에서 기념 축포를 쏜다고 하여 집 뒤의 동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축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단지 기대감으로 구경갔다.

요즈음 같으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아니까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갑자가 “펑!” 하더니 내 바로 위의 공중에서 형형색색으로 터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있는 동산은 발포지점보다 지대가 훨씬 높았기 때문에 축포가 바로 내 머리 위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오금아 날 살려라’하면서 도망을 했지만 그것은 마음 뿐이고 그만 땅에 쓰러지고 말았는데, 마음으로는 일어나서 뛰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이 가지고 긴장이 풀어진 후에야 일어서서 축포의 아름다운 장관을 즐길 수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야산에서 훈련을 받을 때였다.
엎드려서 잠복하고 있는데 내 눈길이 가는 곳에 큰 개구리 한 마리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런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큰 꽃 뱀 한 마리가 개구리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뱀은 개구리의 천적(天敵)인데, 천적인 뱀이 먹이인 개구리를 공격 사정 권 앞에서 노려보니 도망가기는커녕 두려워서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은 극도의 공포나 두려움에 사로 잡히면 비록 의식은 있지만 아무런 동작도 하지 못하고 몸이 뻣뻣해져서 벌벌 떠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영광이 강하게 임할 때 연약한 피조물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뻣뻣해지거나 쓰러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무의식 중에 쓰러지는 경우도 있지만 의식은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나름대로 굳어져 버리는 것이다.

위에 구절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적 두려움을 체험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 피조물이 근접하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났을 때 연약한 인간은 통상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쓰러지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너무나 강하게 임하여 서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대하 5:13-14).

유대 지방에서 구름 즉 세키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제사장의 무리들이 은혜롭게 뜨겁게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 즉 성령의 권능이 너무나 강하게 임하여 제사장의 무리들이 도저히 서있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꼬꾸라지거나 주저 앉았을 것이다.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밀 듯이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광이라 단어의 히브리어 ‘카보드’는 주로 존귀, 풍성, 영광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무거움’이라는 뜻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무겁게 임할 때 연약한 인간은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기도 한다.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했을 때 사울은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기도 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삼상 19:23-24).

여기서 예언하다는 말으 황홀경에 빠져 중얼거리다는 뜻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나팔'은 ‘눕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할 때 하루 종일 드러눕는 경우는 자주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자매는 한 주일 동안 소위 말하는 ‘입신 상태’에 들어가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보고 온 적도 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을 방문하는 체험을 했을 때 과연 얼마 동안 누워 있었을까?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1-3).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말에서 떨어지는 체험을 한 사람이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3-5).

여기에 예를 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 성령의 권능,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회심했거나(사도 바울의 경우), 성령 체험, 은사 체험을 했거나(사울 왕이나 제사장들의 경우), 계시 체험을 했다(에스겔이나 사도 요한의 경우).

그러나 천사를 본 수직하던 병사들이나 예수를 잡으러 온 하속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혀 없다(마 28:2-4; 요 18:6). 이런 경우를 볼 때, 쓰러진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영적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귀신의 발작으로 쓰러지는 경우도 있다.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 9:17-18)

한국에서 축사를 강조하는 어느 목사는 귀신의 장난 때문에 쓰러지는 경우를 인정하면서 쓰러지는 것은 귀신의 장난이라고 했다. 이것도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고 자신의 제한된 체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음부터는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자. *

 

[관련기사]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110 Nuuanu Ave, Honolulu, HI 96817 USA  |  대표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구요한
Mail to: gloriatimes77@gmail.com
Copyright © 2019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