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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22)] 양복 입은 무당이 교회에서 예언할 수 있을까?정이철, 고광종을 포함한 기적중지론자들의 ‘은사운동관’ 비판
글로리아타임스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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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3  14: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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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22]
 

양복 입은 무당이 교회에서 예언할 수 있을까?

-정이철, 고광종을 포함한 기적중지론자들의 ‘은사운동관’ 비판-
 

   
 

 

연초부터 정이철(「바른믿음」대표) 무리들의 함량 미달 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고 있다. 야단법석을 떨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방언, 신유, 축사 및 예언은 사도 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는 골수 기적중지론(은사중단론)을 전파하면서 방언은 사탄의 옹알거림, 예언은 점치는 것, 현대의 성령운동은 마귀운동이라고 폄하하는 글들이다.

 

그리고 ‘영성’, ‘중보’란 단어 갖고 수시로 시비를 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해 단 한번 사용된 ‘개혁’(히 9:10)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자기들 편한 대로 ‘개혁신학’, ‘개혁주의’, ‘개혁전통’이라면서 입에 달고 사는 자들이다. 필자가 ‘개혁’이란 단어 사용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단어란 누가 어떤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가 중요하지 단어 자체에 신성불가침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이철의 철딱서니 없는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외에 정이철은 구원론으로도 시비를 걸고 있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의 동역자이자 후계자인 멜랑히톤을 따르는 루터교와 감리교는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칼뱅을 따르는 장로교와 침례교는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나 장로교와 침례교 내에서도 ‘신자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개혁주의 내에서는 ‘새관점학파’에 의해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주장이 E.P. 샌더스를 시작으로 제임스 던, 톰 라이트 등에 의해 주장되고, 한국의 김세윤(풀러신학교 교수)이나 최갑종(예장 대신·백석대 교수) 등이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골수 칼뱅주의자인 정이철은 이런 자들도 이단(?)이나 이단성(?)으로 밀어붙이는 횡포와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정이철 무리들을 보면 마치 '영적 나치주의자'나 '영적 백호주의자'와 같은 광신자들을 보는 것 같다. 정이철 무리들 눈에는 칼뱅주의 예정론과 기적중지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모두 이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렇게 잘 난 그들이 왜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유럽이나 개신교 종주국인 미국에서 망해갔는지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한다. 정이철 무리들 주장을 따라서 영적 자연사를 할 것인가 은사주의를 따라서 성장할 것인가? 자연사하려면 자기들만 할 것이지 왜 물귀신 처럼 다른 사람들도 끌고가려고 하는가?

 

성령 모독죄(훼방죄)로 돌아가자.

성경에서 예수님은 성령사역을 귀신사역으로 매도하는 자는 성령 모독죄를 짓는 자로서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 기적을 행하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는다고 폄하했기 때문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8-30).

 

존 맥아더 같은 기적중지론자는 성령 모독죄(훼방죄)는 예수님 당시에만 해당된다고 주장하지만 기적계속론자(은사지속론자)인 웨인 그루뎀은 현대에도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존 맥아더는 성령 모독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무질서한 은사주의』(Charismtic Chaos)의 속편인 『다른 불』(Strange Fire)에서, ‘마귀운동(?)인 은사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경고하면서 모든 신자들이 은사운동을 대항하는 총력전을 벌릴 것’을 촉구한다.

 

정이철은 존 맥아더의 이런 주장과 서철원(전 총신대 교수)이 ‘현대의 성령운동을 접신운동’이라 폄하한 주장에 미혹되어 전세계의 신자 9/10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자신이 목숨을 걸고 나머지 1/10은 제대로 인도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 자기가 무슨 기드온의 300용사인 줄 착각하고 있다. 정이철 무리는 기드온의 300용사이기는커녕 예수님과 성령님을 가장 대적하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일 뿐이다.

 

 

고광종의 주장에 대한 비판

 

최근에 정이철 못지 않게 은사운동을 이단운동으로 정죄하는 자가 또 나타났다. 고광종(예장 합동 목사. 한국 세이연 소속)이란 자는 한국 교회의 모든 성령운동을 신사도운동으로 묶어서 비판하는데 실제로는 신사도운동 보다는 성령운동을 비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HIM과 WLI외에는 ‘사도나 선지자 직분 회복’을 강조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자료 :

고광종 목사 “신사도운동, 성도를 목회자의 노예로 만들어-표적과 기적 추구… 신천지 보다 무서워.” 「교회와 신앙」. 2018.2.9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38

 
고광종. “박수무당을 양복 입혀 강단에 세운다면?-세이연 둘째날 첫강의 고광종 목사 ‘100% 통한다.’”「기독교포털뉴스」. 2018.2.9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01

 

 

고광종의 주장이 성령 모독죄에 해당되는가?

 

고광종은 성령운동을 신천지 보다 더 위험한 이단운동으로 정죄하고 있는데 주장의 대부분이 정이철 주장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고광종도 존 맥아더, 서철원 및 정이철을 따라 성령운동을 마귀운동이나 이단운동으로 정죄하니 성령 모독죄에 해당되는 것은 당연하다.

 

성령운동을 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도 많은데 이런 성령운동을 이단운동 운운하여 귀신장난으로 돌리고 있으니 성령 모독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장 합동은 참 대단한 교단이다.

한쪽에서는 두날개선교회(대표 김성곤)처럼 교단 차원의 지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성령운동을 하는 단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 운동을 귀신운동이나 이단운동으로 정죄하는 자들이 공존하고 있으니 말하다.

 

만일 고광종의 주장이 맞는다면 예장 합동 교단 내에서 성령운동하는 두날개선교회와 이에 협조하는 교회나 목회자들, 기적계속론을 주창하는 차영배 교수 이한수 교수, 중견 목회자인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나 송태근 목사(삼일교회)는 예장 합동 내에서 이단운동하는 사람들이 된다. 과연 그런가?

 

 

양복 입은 박수 무당이 교회에서 예언할 수 있을까?

 

고광종은 다음과 같은 희한한 예화로 강의를 시작했다.

 

“박수 무당 한 명을 부른다. 그 사람에게 최고급 양복을 입힌다. 좀 불경하지만, ‘나는 목사다’라고 말하라 고 시켜본다. 그에게 강단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라고 예언을 하도록 하고, 기도를 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흉내내고, 저지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받지 못할 것이야! 라고 하면 과연 교회에서 통할까, 안 통할까?”

 

고광종은 결론 짓기를 “박수무당에게 양복을 입혀서 예언을 시켜도 많은 교회에서 통할 것”이라며 “그만큼 한국교회는 ‘이적·표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으로 상당 부분 변질됐다”고 호들갑을 떤다.

 

과연 양복 입은 박수 무당이 교회에서 예언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절대로 못한다!”이다. 왜 양복 입은 박수 무당이 교회에서 예언을 못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높으신 이름과 보혈과 십자가가 제대로 선포되고 성령이 제대로 운행하는 교회에서 사탄의 무리는 활동을 못하기 때문이다.

 

고광종은 이 차이를 모르는 것 같다.

양복 입은 무당이 외면으로 볼 때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령 하나님은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첫째, 양복 입은 무당은 교회 근처에 얼씬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와 이름이 높여지고 성령이 운행하시는 교회 근처만 가도 귀신은 발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은 모두 자기 정체가 드러나자 괴로워했다(막 1:23-27).

 

필자가 전통적 교회에 다닐 때는 경험한 적이 없지만 은사적 교회에 다닐 때는 예배 중에 귀신이 발작하여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은사적 교회 보다는 오히려 은사를 무시하는 고광종이 섬기는 교회들이 양복 입은 무당에게 속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심지어는 방언만 제대로 해도 귀신이 발작한다.
언젠가 심하게 귀신 들린 신학생을 위해 기도하던 중 방언을 하다 보니 귀신이 발작하여 치유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은 귀신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귀신을 쫓아낸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설령 양복 입은 무당이 강단에 섰더라도 성령의 능력이 무당의 예언을 가로 막는다. 발락의 사주를 받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을 하려 했지만 하나님이 가로막으신 것처럼 성령께서 무당의 예언을 가로막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제대로 된 신자에게는 무당의 신기(神氣)가 나타나지 않는다

 

무당도 제대로 된 신자는 알아본다. 그래서 점괘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점을 통해 예언을 하더라도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어린 아이가 칼 춤을 추는 무당 구경을 갔다가 예수 이름으로 칼 춤을 중지하라고 조용히 명령했더니 유명한 칼춤 무당이 칼 춤을 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광종 같은 자가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이런 허황한 예화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광종은 영의 세계에 대한 이런 이해가 없다. 수많은 기적중지론자들의 오류처럼, 가짜가 있다고 해서 진짜를 부인하고 있다. 마귀는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자다.

 

외양이 동일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마귀 탓으로 돌린다면 개신교의 설교나 찬송도 마귀 짓인가? 모르몬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모두의 예배에서도 설교하고 찬송하지 않는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한 종류의 책만 본 사람들의 위험성

 

누가 그랬던가,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책 한 권만 본 사람이라고? 필자가 보기에는 한 권이 아니라 한 종류의 책을 많이 본 사람이 더 위험하다. 정이철이나 고광종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이 대표적이다.

 

고광종은 기적중지론자인 존 스토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 존 스토트는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 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병 주고 약 주나?
존 스토트는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많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이런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리차드 개핀도,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기적을 못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실 필요가 없어서 행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이런 자들을 ‘실천적 기적중지론자들’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다면 존 스토트가 말하는 특수한 상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특수한 상황에 대한 사례가 있는가?

 

존 스토트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공교롭게도 고광종이 소속된 예장 합동의 차영배 교수가 철저하게 잘 해놓았다. 차영배,『성령론-구원론 부교재』의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관한 J. Stott견해와 문제점 비판,” pp. 201-22을 보라. 존 스토트 주장의 오류를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차영배 교수의 견해를 따른다. 방언도 부인하고 서신서의 ‘구원적 성령’과 사도행전의 ‘사역적 성령’도 구분하지 못하는 존 스토트에게 배울 게 뭐가 있는가?

 

이제는 교단이나 단체의 힘을 배경으로 일방적으로 기적중지론을 밀어붙이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다른 교단은 물론 장로교 내에서 기적계속론을 주창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및 성도들이 점점 늘고 있다. 오히려 기적계속론자들의 숫자가 기적중지론자들의 숫자를 앞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를 망하게 한 기적중지론을 바탕으로 교회를 흥하게 하는 기적계속론을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하는 것은 용맹이 아니라 무지와 만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적중지론자들과 기적계속론자들의 충돌

 

기적중지론자는 주로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을 고수하는 자들이다. 외국 신학자로는 장 칼뱅을 위시하여,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벤자민 워필드, 루이스 벌콥, 에드원 팔머, 팔머 로버트슨, 안토니 훼케마(후크마), 리차드 개핀, 싱클레어 퍼거슨, J.I. 패커, 존 스토트와 같은 쟁쟁한 개혁주의 신학자 및 존 맥아더, 행크 해너그라프 등이 있다.

 

한국 신학자로는 김재성(국제신대 교수), 박영돈(예장 고신대 교수), 서철원(예장 합동 총신대 교수 역임), 심창섭(예장 합동 총신대 교수), 양현표(예장 합동 총신대 교수), 이성호(예장 고신대 교수), 이승구(예장 합신대 교수), 유태화(예장 대신-백석대 교수), 조병수(예장 합신대 교수), 최병규(예장 고신대 교수), 최윤배(예장 통합 장신대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목회자로는 대표적으로 고 옥한음 (예장 합동), 박종순(예장 통합)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고광종의 극단적 주장과는 달리 존경 받는 신학자나 목회자 중에서도 기적계속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많다.

 

웨인 그루뎀, 잭 디어, 존 루스벤, 하워드 어빈, J. 로드만 윌리암스, 존 파이퍼, 고든 피, 크레이그 키너, 막스 터너, 잭 훼이포드와 같은 쟁쟁한 신학자들이 있다. 한국 신학자로는 김동수(평택대 교수), 김영한(예장 통합 숭실대 교수 역임), 박봉배(서울신대 교수 역임), 배덕만(서울신대 교수 역임), 배본철(성결대 교수), 성기호(성결대 교수 역임), 안영복(예장 고신대 교수 역임), 이한수(예장 합동 총신대 교수), 차영배(예장 합동 총신대 교수 역임), 황덕형(서울신대 교수), 홍용표(서울신대 교수 역임) 등이 있다.

 

대표적 목회자로는 김성곤(예장 합동 두날개선교회), 나겸일(예장 통합 주안장로교회 원로), 송태근(예장 합동 삼일교회), 양결(예장 고신 생명수교회), 윤성진(예장 대신-백석 부산영락교회), 이신웅(예성 신길교회), 이찬수(예장 합동 분당우리교회), 정필도(예장 합동 수영로교회 원로),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고 하용조(예장 통합 온누리교회),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외국 특히 미국은 물론 한국 교계에도 기적중지론자와 기적계속론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고광종은 기적계속론자들의 책을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이들 간에는 아직도 첨예한 신학적 갈등이 있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을 고수하면서 특히 은사주의자들의 지나침과 비윤리성을 비판한다. 그러나 기적계속론자들은 기적중지론자들의 영적 메마름과 교회의 양적 쇠퇴를 비판한다.

 

특히 기적중지론자들은 계시 종료론 구속사적 성경해석으로 기적중지론을 주창한다. 즉 성경 기록이 완성되었으므로 특별 계시의 진정성을 증거하는 ‘기적’과 성경 계시 이외의 ‘사적 계시’는 없다는 계시종료론, 성경의 사건은 특수한 시대의 계시적 사건이므로 교회 시대의 본보기가 아니라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으로 교회 시대의 기적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사변적 주장에 불과하다. 기적계속론자들은 교회 시대에도 성경 기록에 종속되는 사적 계시-예언의 은사-는 지속되며(고전 14:1), 기적도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기적의 기능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선포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할 뿐 아니라 오늘날 신자들이 선포하는 말씀도 증거하기 때문이다(막 16:20 참조).

 

 

사역 현장은 어느 손을 들어주는가? 당연히 기적계속론이다

 

신학은 허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은 분명히 개신교의 영적 장자였다. 450년 전에 마르틴 루터의 바통을 이어받은 칼뱅주의는 유럽은 물론 미국 개신교계의 선두주자였고 한국에는 20세기 초엽에 대대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 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보수 칼뱅주의의 처참한 몰락과 은사주의 교회의 급성장

 

그러나 북미주 내 보수 장로교회의 교세나 영향력을 처참한 정도로 몰락해버렸다. 한때 쟁쟁했던 미주 동부의 아이비 리그 신학교들인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프린스턴 등은 차례로 자유주의 신학으로 넘어가 버렸다. 자유신학으로 넘어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갈라져서 1929년에 설립된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대원(WTS), 칼뱅신대원(CTS) 등이 보수 칼뱅주의를 주창하면서 한국 보수 장로교의 많은 신학자들도 이런 곳에서 공부하여 한국 장로교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오늘날 이런 신학교의 교세나 영향력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북미주(미국과 캐나다)내 개신교인을 1억 명으로 산정할 때, 보수 칼뱅주의를 주창하는 교단협의회인 NAPARC의 교세는 52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몰락했다. NAPARC(북미주 보수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협의회)은, 한국의 예장 합동, 예장 고신이나 예장 합신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 및 도르트 신조를 준수하고, 여성의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 협의회이다. 그런데 북미주 내 NAPARC의 회원 교인 총 숫자가 52만 명에 불과하다. 이것은 거의 전멸 수준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고 신학적으로 기세 등등했던 칼뱅주의 교단의 교세 치고는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자료 출처 : “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https://en.wikipedia.org/wiki/North_American_Presbyterian_and_Reformed_Council

 

 

그나마 PCA 교단이 36만4,000명 수준으로 중규모 교단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4만 명~100명 정도의 교인을 가진 군소교단들이다. 벤자민 위필드, 찰스 핫지, 존 머리나 리차드 개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재직하고 한국 보수 장로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웨스트민스터신대원(WTS)이 소속된 OPC 교단의 교세는 3만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정이철 같은 시대 착오자들은 교회를 망하게 한 벤자민 워필드나 리차드 개핀의 기적중지론으로 교회를 흥하게 하는 은사주의를 비판하느라고 여념이 없다.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훼케마와 같은 쟁쟁한 개혁신학자들이 강의했던 칼뱅신대원이 소속한 CRC교단은 2001년 여성의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북미주 보수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협의회(NAPARC)에게 제명되었다. CRC교단은 신학적으로 좌경화 되어 한국의 예장 통합처럼 천주교의 영세를 기독교의 세례와 같은 예식으로 상호인정 한다는 합의문에 서명하기도 했다(2012년). 한때 교인 수 500만 명으로 장로교의 체면을 유지해왔던 자유주의 계통의 PCUSA 교단(프린스턴 신대원 교단)은 동성애자도 목사 안수를 받게 하자 교단이 갈라지면서 교세가 200만 명 이하로 급추락했다.

 

400년 동안 개신교의 ‘영적 장자’ 역할을 해왔고 한국 교회의 친정이자 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북미주에서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자들은 개신교 점유율이 0.5%라는 비참한 수준으로 몰락한 것이다.

 

그러나 보수 칼뱅주의가 지식 수준도 낮고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해 온 오순절교회나 은사주의교회의 북미주 내 점유율을 30%에 육박한다. 오순절주의 교인이 1,400만 명 정도이고, 기존 교단 내의 은사운동 교인들이 1600만 명 정로 합계 3,000만 명 정도이다.  이들 교회는 방언, 신유, 축사 및 예언은 신자가 보편적으로 행하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통계를 전세계의 기독교인으로 확대하면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교인들은 불과 100년 사이에 약 7억 명으로 추산되어 천주교 다음으로 큰 기독교 집단이 되었다. 한편 4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전통적 개신교인 수는 이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전통적 교회와 은사주의 교회의 숫자가 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은 전통적 교회의 기적중지론이 틀렸고 기적계속론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한국 교계라고 다를까?

만일 한국 개신교에서 은사주의 색채를 띄는 교회나 교인 수를 통계에서 제외하면 순수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적 교회가 얼마나 될까? 어떤 교회에서 찬양과 경배송을 부르고 구역예배나 셀교회를 실시하면 이런 교회는 이미 전통적 교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은사주의에서 생긴 프로그램이나 사역들이기 때문이다.

 

순복음 교단은 방언, 신유 및 축사가 기본사역이다. 그런데 이 정도는 이미 많은 장로교단에서도 기본적으로 하고 있고 이에 더하여 음성듣기나 예언사역도 이미 많이 퍼진 상태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 음성듣기나 예언사역은 순복음교단은 물론 장로교단, 감리교단 및 성결교단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예언 사역을 공개한 김요한의 『지렁이의 기도』에 추천서를 쓴 사람들 중에 김동수(평택대 교수), 류호준(백석대 교수), 박영호(한일 장신대 교수), 배덕만(느헤미야 전임연구원), 조재천(횃불트리니티 신대원 교수)와 같은 정통 신학자들은 물론 예장 합동의 이찬수(분당우리교회 목사)나 송태근(예장 합동 삼일교회 목사)등의 중견 목회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한국 교회에서 이런 사역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한때는 쉬쉬했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이런 은사 사역을 드러내고 지지할 만큼 보편화 되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비판 글을 쓴 장운철(「기독교포털뉴스」), 정이철(「바른믿음」), 이창모(「바른믿음」), 김영봉(「뉴스앤조이」) 및 정정조(「기독교포털뉴스」) 라는 자들의 글들은 성경적, 신학적 및 경험적으로도 오류투성이고 조잡하기 짝이 없다. 한국 교인들이 이제 그런 조잡한 글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상대방을 비판하려면 좀 더 철저한 성경적, 신학적 연구가 필요할 때인데 아직도 구태의연한 기적중지론과 성경 내용의 일부만 인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일반적으로 신학은 현장 사역 보다 10~15년 정도 늦다고 한다. 그런데 기적계속론적 신학자들 대부분이 음성듣기나 예언사역을 인정한다. 그리고 한국 교계에서 금기 시 되어있는 신사도 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 보다는 긍정적 견해를 표명하는 학자들도 많다.

 

소장파 신학자 40여명이 가입해 있는 국제성령신학연구원(국성연)(대표 김동수 박사)나 국내 원로 신학자들의 모임인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는 모두 방언, 신유, 축사, 예언을 인정함은 물론 신사도운동의 부정적 측면 보다 긍정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

 

반(反) 은사주의자들이 이들보다 신학 수준이 더 높고 영적 경험이 더 많은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적, 신학적 이해도 조잡하고 영적 경험도 없는 반대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덤비는 것에 불과하다.

 

 

정리하면, 한국 교계에 방언, 신유, 축사 및 예언은 많은 신학자는 물론 교단을 초월하여 현장 목회자들 및 교인들에게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필자는 이러한 추세가 한국 교회에 앞으로도 계속 번져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므로 고광종이나 정이철 무리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이고 조직을 만들어서 세미나를 해도 이제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성령 모독죄만 쌓아갈 뿐이다.

 

 

은사냐 열매냐?

 

전통주의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성품의 열매’다. 그러나 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해서 열매가 더 좋은 것도 아니다. 지금 한국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예장 통합의 명성교회, 설교 및 신학 자료가 ‘표절’ 수준이 아니라 ‘복사’ 수준인 예장 통합의 이OOO 목사, 상습 성추행범인 예장 합동의 전 OOO목사는 모두 은사주의자들이 아닌 개혁주의자들이다.

 

물론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초자연적 능력으로 조정하고 통제하는 성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은사는 권력이 아니라 선물이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주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은사자의 인격이 덜 되어서 그런 것이지 은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비록 은사가 없더라도 대형 교회의 목회자나 유명 인사가 되면 추종자들에게 갑질하고 추종자들은 노예처럼 섬기려는 한국인 특유의 사대주의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이 은사주의에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축소하는 것은 자기들의 단점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한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열매라고 할 때 몇 가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신앙의 열매에는 양적 성장의 열매, 열정의 열매 및 성품(신앙 인격)의 열매가 있다.

 

첫째, ‘양적 성장의 열매’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양적 성장을 이루어 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내가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칼뱅주의 기적중지론 교회는 양적으로 계속 축소되고 은사주의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어느 편이 더 성경적인가?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이 시작된 유럽 교회는 망했고 미국에서도 쇠퇴하고 말았다. 오직 한국만이 전세계적으로 예외적으로 보수 칼뱅주의 교세가 강세인 나라다.

 

왜 그럴까?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필자는 생각해 본 몇 가지는 첫째,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초기의 선교를 선점했고, 둘째 개혁주의 교리가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적 한국인의 성향에 부합했고, 셋째 한국 개혁주의자들은 서양의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말씀 선포와 기도에 열심이었고, 마지막으로 ‘순복음 장로교회’라고 불릴 정도로 교단 차원에서 겉으로는 은사운동을 비판하지만 현장 사역자들은 은사사역들을 재빨리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보수 장로교회가 이제 은사사역을 보다 전향적으로 수용하면 성장의 동력을 갖겠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면 성장이 답보 상태에 빠지거나 언제 다른 교단이나 단체에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유럽이나 미국의 사례가 이를 웅변적으로 증거하지 않는가?

 

 

둘째, 하나님에 대한 ‘열정의 열매’다

 

예수님이 교리 바르고 인내도 잘하는 에베소교회를 심각하게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계 2:1-7). 필자는 전통적 장로교회도 다녀보았고 은사적 교회도 다녀보았다.

 

일반적으로 전통적 장로교회의 예배 시간은 한 시간을 넘지 않는다. 만일 한 시간이 넘으면 교인들이 시계를 보기 시작하고 예배 시간이 너무 길다고 항의가 들어간다. 그러나 은사적 교회는 예배 시간 자체가 길다. 최소한 2시간에서 3시간은 물론 더 이상까지도 간다. 그러나 긴 예배 시간에 대해 불평은커녕 그 시간들을 즐긴다.

 

비판자들은 ‘감정적으로 충만한 예배가 진정한 예배냐?’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장례식처럼 냉랭하게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가?” 전통적 예배는 설교가 예배의 꽃이고 찬송은 준비 찬송에 불과하다. 그러나 은사적 예배는 찬양 자체가 예배다.

 

전통적 예배는 이성주의와 계몽주의가 번성하던 시대의 예배 형태이고 은사적 예배는 감성과 영성이 강조되는 현대의 예배 형태다. 어느 형태의 예배에 사람들이 몰릴 것 같은가? 당연히 감성적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론이나 교리 보다는 체험과 감성 터치에 목말라 있다.

 

그런데 전통주의자들은 이런 예배가 경박하다고 비판한다.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뱅주의는 이성은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했다. 청교도 중에는 의지를 중시한 사람도 있었지만 감성은 경시했다. 그러나 조나선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론'에서 신앙에서 감성의 중요성을 일찍이 갈파했다.

 

집회 중 사람들의 감정이 고양되고 극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희한한 영적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열광적이다’, ‘사탄적이다’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한편, 이런 체험들을 많이 하고 신앙적 열심을 내면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미 종교적 감정 분야의 ‘고전’(classic)이 된 『종교적 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양쪽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전자의 경우, 그런 현상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은혜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감정이나 현상만으로 영적 분별을 하려는 이성주의적 반(反) 부흥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짜 은혜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자체가 진정한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신앙적 열심과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부흥파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은혜의 진정한 표지들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진정한 신앙은 상당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앙 감정(정서)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정서)이 없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현대의 뇌과학은 인간에게 이성 보다는 감성이 중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아무리 이성이 뛰어나도 감성이 풍부하지 못하면 적극성이나 사교성이 결여되어 사회생활도 잘 하지 못하고 중요한 의사결정도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교회는 바른 교리는 강조하지만 교리를 실천화하는 행동력이 약하다. 이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 탓으로 돌리고 행동을 꺼리는 이면에는 감성과 정서가 부족하여 실패와 행동을 두려워하는 선비적 소심성이 자리고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성이 풍부한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정서가 풍부해지면 목숨과 열정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열심을 낸다. 전통적 교회가 쇠퇴하고 은사적 교회가 성장하는 또 다른 이유다. 신자들의 감성이 풍부하여 하나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하나님 나라 일에 열심을 내는 것도 신앙의 중요한 열매 중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신앙 인격의 열매’다

 

필자가 보기에 전통적 교회는 물론 은사적 교회 모두가 제일 약한 분야이다.

반(反)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체험한 자들이 왜 신앙 인격이 그 모양이냐?’고 비판하는데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과 바른 교리를 강조하는 자기들은 왜 그 모양인가?’

 

신앙 인격의 열매는 바른 교리 고백하고 바른 신학 연구하거나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고 많은 은사를 받는다고 해서 금방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교회가 은사적 교회의 신앙 인격 부재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신앙 인격의 열매는 부단한 회개와 자기 비움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씩 여물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열매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있는가?

 

미국의 정평있는 여론 조사기관인 퓨 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2006년에『성령과 능력』(Spirit and Power)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신앙인의 공적 삶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분야는 은사운동의 신앙의 정통성, 도덕성, 경건, 전도에 대한 열정 및 사회적 참여에 대한 것이다. 이 모든 분야에서 오순절 교인들이 전통적 교인들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은사운동가들이 열매가 부족하다는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은사주의자들이 신앙의 전반적 열매가 더 풍성하지 않은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에 젖어있는 자기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자료 참조 :

“존 맥아더의『다른 불』비판(2)-건설적 비판이 못 되는 맥아더의 다른 불 비판. 조지 우드.” 글로리아타임스. 2014.4.29.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4

 Pew Research Center. “Spirit and Power-A 10 Country Survey of Pentecostals.”
http://www.pewforum.org/2006/10/05/spirit-and-power/

 

 
나가는 말

 

‘영적 장자’라고 자부했던 칼뱅주의의 몰락을 대하는 한국 장로교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개혁신학을 공부한 필자도 칼뱅주의의 쇠퇴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개신교 강대국인 미국 내에서 이처럼 처참하게 몰락한 줄은 몰랐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다. 칼뱅주의자들은 영적 장자라는 교만으로 비성경적인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에 경도되어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고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영적부흥과 은사운동의 비판에만 몰두해왔기 때문이다. 전통적 장로교회는 이제 은사운동을 비판할 때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염려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환골탈태가 필요한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극단적 칼뱅주의자들이 겸손과 성찰의 시간을 갖기는커녕 여전히 반(反) 은사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대 말기에 ‘공안 정국’을 조성하여 민주 운동을 억압했던 수법과 다를 바 없다. 자기들이 무슨 ‘종교 검찰’인가?

 

아무리 교단이나 단체의 힘을 동원하여 반(反) 은사운동을 벌이더라도 도도하게 흐르는 성령운동의 거센 물결을 이제는 막을 수가 없다. 이미 여러 교단이나 수많은 개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성령운동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거나 모독하는 죄를 지을 수 있다.

 

한편, 성령운동가들은 이제 더 이상 정이철이나 고광종 같은 골수 기적중지론자는 물론 기존 교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성령으로 따라 난 자를 핍박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가는 성령 운동가들이 영적으로 뒤따라 오는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더 이상 뒷걸음질 칠 필요는 없다.

 

어느 사회나 선도파, 중도파 및 수구파가 있기 마련이다. 선도파인 성령운동가들은 더 이상 수구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당당하게 수구파를 대적하고 중도파를 흡수하면서 한국 교계의 방향 전환을 선도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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