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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20] 예언을 하려고 하라(3)오늘날의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분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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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5  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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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20)]

예언을 하려고 하라(3)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분별되어야 한다-
 

   
 


 

고전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29-31.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헬. 디아크리노)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어떤 성도는 환상 중에, 출석하는 교회의 장로와 사무실의 금고가 열려 있고 돈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로는 교회의 재정장로였다. 그래서 이 성도는 이 장로가 교회의 공금을 횡령했거나 유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로가 운영하는 회사에 도적이 들어서 금고를 열고 돈을 훔쳐간 것으로 드러났다.

 

예언의 말이나 환상은 바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전달하기 마련이다. 특히 초보자들이 성경 지식도 부족하고 사역 경험도 부족하여 자기 수준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개인 예언은 분별하여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라고 한다.

 

비판자들은 예언의 말이나 환상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예언을 받거나 환상을 보면 해석이나 적용이 쉬운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 말씀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하듯 예언의 말이나 환상도 마찬가지다.

 

 

고전 14:29이 말하는 ‘분별하다’는 ‘무엇’을 분별하는 것인가?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    )을 분별할 것이요.

살전 5:19-22.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기서 분별의 대상인 목적어가 원어에는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고전 14장의 문맥이나 살전 5:21-22에 기록에 의하면 목적어는 ‘예언의 내용’이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다르게 해석한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의 무경험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성경에는 차등 예언이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려고 이 구절들도 무리하게 해석한다.

 

 

*분별의 대상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기적중지론자들은 고전 14:29가 말하는 분별의 대상이 ‘예언의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예언하는 사람이 ‘참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라고 주장한다(마이컬 비슬리, 브루스 콤톤 및 데이빗 파넬 등).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나 상상으로서 문맥에도 어긋나고 성경의 가르침과도 어긋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언 내용의 진위 여부로 참 선지자 여부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거짓 선지자들도 발람(민 23장)이나 대제사장 가야바(요 18:14)처럼 가끔 성경에 부합되는 예언, 맞는 예언을 하기 때문이다(신 13:1-2; 마 7:22).

 

더 나아가서, 기적중지론자들은 분별의 대상이 예언의 ‘내용’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분별하기 위해서도 먼저 예언 ‘내용’의 진위를 분별한 후에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또한, 만일 예언의 진위 여부만으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한다면 틀린 내용을 설교하고 가르친 목사와 교사도 모두 거짓 목자나 거짓 교사가 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런 기준이라면 기적중지론자들 모두가 거짓 교사로 정죄되어 교계에서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기적중지론이야 말로 성경 내용과 전혀 상관 없는 잘못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둘째, 성경은 삶의 열매나 가르침의 내용으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여부를 분별하라고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5-16).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 유 1:11; 계 2:14).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셋째, 살전 5:21장의 헤아림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중성)’이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중성)을 취하고 '악'(중성)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이 구절도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것이라-살후 2:3이하를 제시하면서-고 주장하는데 본문은 분명히 ‘사람’(남성이나 여성형)이 아니라 예언의 ‘좋은 것’(중성)과 ‘나쁜 모든 것’(중성)로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신약의 예언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교회에 주신 수많은 은사 중의 하나이다.

 

은사 사용에는 오류나 미숙함 있기 마련이다.
만일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신학자는 물론 목사나 교회의 교사가 틀리게 가르치면 그 사람을 모두 정죄하고 징계해야 하는가?
 

물론 일차적 교리에 심각한 결함이나 오류가 있으며 그렇게 해야겠지만 누구나 일반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해석과 적용의 오류 때문에 징계한다면 모두 거짓 교사가 되어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약의 예언도 마찬가지다.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분별하여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라고 했지 그것을 빌미로 정죄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골수 기적종지론자인 존 맥아더는 틀린 에언을 한 자를 모두 거짓 선지자라고 정죄한다. 맥아더는 거짓 선자자의 분별법으로, 첫째 잘못된 교리로 인도하는 자, 둘째 정욕과 무절제로 죄 가운데 사는 자, 마지막으로 가짜로 판명 난 계시를 받은 자로 정의하면서, 틀린 예언을 한 오랄 로버츠나 베니 힌 등을 거론한다. 맥아더는 거짓 선지자나 귀신도 가끔 알아맞히므로 거짓 선지자의 여부는 얼마나 많이 맞추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얼마나 틀렸느냐로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맥아더의 논리대로 하면 맥아더는 거짓 교사이다. 그는 비록 뛰어난 강해 설교가와 성경 교사로 알려졌지만 기적중지론 같은 틀린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아무리 잘 가르쳐도 기적중지론이 틀렸기 때문에 그는 거짓 교사이다?

 

정리하면, 고전 14장이 말하는 분별의 대상은 거짓 선지자나 참 선지자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 예언의 내용을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의 대상은 ‘예언하는 순서’를 정하는 것인가?

 

골수 기적중지론자이자 정이철이 가장 선호하는 팔머 로버트슨은 분별의 대상은 ‘예언의 내용’이 아니라 ‘예언하는 순서’생뚱맞은 주장을 한다. 정이철은 이 한 가지 주장으로 웨인 그루뎀이나 다른 수많은 기적계속론자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물론 진리라면 숫자와 상관 없겠지만 비진리이고 지지자도 없는 생뚱맞은 해석을 정이철 혼자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정이철은 한글로 번역된 로버트슨의 주장마저 왜곡한다. 로버트슨은 분별하다의 목적어-말한 것을-가 원어에는 생략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정이철은 '로버트슨이 '분별하다'는 말이 원어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잘못 주장한다.
 

   

▲정이철의 잘못된 주장. 정이철, "예언에 대해 독자의 신앙을 오도하는 치명적인 위험성
-박영돈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1." 『바른믿음』. 2018. 1.17

 

   
▲ 팔머 로버트슨, 『오늘날의 에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pp. 135-36

 

팔머 로버트슨은, ‘분별하다’는 단어의 목적어가 원어에서 생략되어 있으므로 ‘(웨인 그루뎀은) ‘말해진 것’(What is said) 즉 예언의 내용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자기는 ‘예언의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분별’은 ‘누가’(사람) 어떤 순서에 따라 예언을 하게 할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이라는 아주 독특하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로버트슨의 주장은 신약에 사용된 ‘디아크리노’ 전체의 용법으로 볼 때 아주 편파적인 주장이다.

 

‘디아크리노’는 신약에서 18회 사용된다.

 

-“의심하다.”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마 21:21; 막 11:23; 행 10:20; 롬 4:20 등). 8회
-사람을 “분별하다”(행 15:9; 고전 4:7; 6:5; 11:31; 약 2:4).
-“다투다”(행 11:2; 유 1:9).
-사물을 “분별하다.” “천기를 분별하다”(마 16:3). “주의 몸을 분별하다”(고전 11:29). “우리를 살폈으면~”(고전 11:31).

그리고 고전 14:29의 ‘분별하다’의 용법이 남았다.

 

로버트슨은 ‘디아크리노’가 사람을 ‘분별하다’에만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에는 이미 2군데서 “천기”와 “주의 몸”을 ‘분별하다’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고전 14:29의 ‘분별하다’를 사람이 아닌 예언의 내용-사물-을 분별하는데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웨인 그루뎀은, 저서에서 분별의 대상이 왜 ‘사람’ 아니라 예언의 ‘내용’인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디다케』라고 불리는 초대 교회 문서에는 회중들이 새로 온 선지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하라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마태도 가짜 선지자에 대해 경고한다(마 7:15)………요한일서 4:1-6도 거짓 선지자에 대해 경고하고 분별하는 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고전 14:29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런 구절들과 상황이 다르다. 다른 구절들은 외부에서 교회에 오는 낯선 사람(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들이며(마 7:15; 요일 4:1,3; 디다케 11:5,6), 이들을 분별하는 법-열매로 분별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이미 교회의 친교 모임에서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의 모임(“너희가 모일 때에”-26절, “예언을 간절히 사모하라”-39절, RSV)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할 때에, 바울은 매 예배 때마다 고린도교회에 새로운 선지자가 두세 명 정도 참가하여 회중의 분별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습은 회중에게 이미 알려진 예언의 은사자들이 순서대로 예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경우에, 그들이 분별되어서 그들이 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로 분별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의 신학자들도 분별의 대상이 ‘예언의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D.A. 카슨.  “더군다나, 기독교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분별하는 것과~”(D.A. Carson, Showing the Spirit, 120).

고든 피. “선지자[예언 은사자]가 이상한 영에 의해 말하는가가 아니라 예언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에 진짜로 합치되는가의 여부를 (시험하는 것이다).”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252).

로드만 윌리암스는 “말해진 것을 분별하다”에서 ‘말해진 것’은 괄호 안에 있다는F.F. Bruce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언을) 분별하는 기초적인 목적은 공동체 내에서 주어진 예언의 중요성과 합당성을 분별하는 것이다” (J. Rodman Williams, Renewal Theology II, 385).

 

또한, 웨인 그루뎀은 팔머 로버트슨의 비판에 대한 반론에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말해진 것’(what is said)이란 의미로 목적어를 보충하여 해석한다고 제시한다.

 

“~ what is said” (RSV, NRSV, ESV, NIV, TNIV, NLT, NET).

 

다른 세 개의 영어 성경(NASB, NKJV; KJV)도 “말해진 것”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지는 않았지만 ‘예언의 내용을 분별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고 그루뎀은 주장한다.

 

정리하면, ‘분별하다’의 대상이 예언자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라는 로버트슨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반대를 위한 반론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로버트슨의 주장과는 달리 예언자는 계시가 임하는 순서에 따라 예언하라고 한다.

 

고전 14:29-30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그러므로 ‘분별하다’의 대상이 예언자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라는 로버트슨의 주장은 바로 다음의 30절에,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32절)는 말씀 자체와도 다른 틀린 주장이다.

 

고전 14:29-33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린도교회에는 예언 은사자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어떤 주제를 놓고 기도하거나 무작위로 기도할 때, 예언의 영이 한꺼번에 밀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모두 한꺼번에 말하면 얼마나 무질서하고 소란스럽겠는가? 아마 바울의 지시 이전에는 그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최대한 두세 사람 정도만 예언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분별하라고 한다. 그리고 예언도 한 사람씩 하고, 예언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계시’ 즉 예언이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중지하고 다음 사람에게 순서를 넘기라고 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말은, 비록 예언이 임하더라도 예언하는 자가 적절히 통제하여 질서와 순서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예언을 어떻게 분별하는가?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만 마귀의 음성이나 자신의 음성도 듣는다.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본인이 오래 동안 어떤 생각이나 소원을 품으면 꿈이나 환상,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등으로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는 쉽게 받지만 분별볍과 사용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동차가 위험하니까 운전면허와 교통규칙이 있듯 예언의 은사도 유익한 만큼 분별법과 사용법을 잘 배워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기초적인 분별법만 제시한다.

 

-예언은 하나님의 속성(성품)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예언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므로(신 13:1-3), 다른 것을 종합해서 분별해야 한다.
-예언은 성경 내용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증진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은 뒷 맛이 평안하고 기쁨이 온다. 비록 책망하는 것이라도 거룩한 통회는 있지만 염려, 불안은 없다.
-오늘날의 직접 듣는 하나님의 음성, 꿈, 환상을 통한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별되어야 한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최소 2~3명이 그 주제에 대해 분별해야 한다.
-특히 결혼, 출산, 시험 합격, 사업 성공이나 휴거 날짜(이것은 비성경적이다) 및 전쟁 예언 등은 잘 맞지 않으므로 이런 예언을 하는 사람은 각별히 유의하거나 자제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 가지 예언만으로 중요한 결정을 성급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중요한 일은 여러 예언이나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확인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 왜 틀리는가?

 

 

비판자들은 예언이 틀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은 왜 교단이나 사람마다 틀리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9절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한 가지’라고 말하는데, 왜 교단이나 사람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인가?

 

동일한 성경을 해석하면서 왜 어떤 사람은 기적이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해석하는가? 이런 경우 성경이 틀린 것인가, 해석이 틀린 것인가? 당연히 후자이다.

 

*예언이 틀리는 이유

 

예언도 마찬가지다. 예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틀린다.

 

첫째, 예언자가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도 신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춘 신학자나 목회자가 하는 것과 신앙의 초보자가 하는 것에는 차이가 많다. 또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라는 온전한 계시도 부족한 인간을 통해 해석되기 때문에 각자의 성경이나 신학 지식, 영적 경험 및 성향에 따라 다른 해석과 적용이 나온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계시이지만 예언하는 자의 성경이나 신학 지식 여부, 영적 경험 및 성향에 따라 다른 해석과 적용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의 예언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예언에서도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2:2). 큰 민족을 이루려면 먼저 아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고 아브라함과 아내 사래는 나이가 들어 출산조차 불가능해졌다.

 

당시에 아들이나 상속자를 가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연적 출산, 입양 및 첩이나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다. 그래서 자연적 출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집의 청지기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상속자인가 하고 하나님께 문의했더니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라고 하셨다(창 15:2-4).

 

약속을 받은 지10여 년이 지나도 아내 사래가 출산하지 못하자 아브라함은 사래의 몸 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아니었다(창 16).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지 24년이 지났고 아들은 이스마엘 뿐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상속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제야 ‘사래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라고 하시면서 일년 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7:19). 아브라함이 몇 가지 실수를 한 것은 ‘하나님이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셨지 ‘너와 사라를 통해 날 자’라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예언도 비슷하다.

임신한 아이가 아들인가 딸인가, 어떤 시험에 합격할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는 시간이 지나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적 예언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예언 자체가 두루뭉실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석’이나 ‘적용’에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예언을 제대로 듣고 보는 것은 물론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지혜도 구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 함께 분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한두 번 맞았다고 해서 자기의 예언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함부로 선포하고 행동하다가 틀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둘째, 예언은 예언자의 신학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휴거 날짜 예언’이나 ‘전쟁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절대 다수가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모든 것을 분명하게 주시기 않기 때문에 예언을 받거나 보는 사람이 자기의 신학의 프레임으로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휴거 날짜 예측은 성경의 안식년(7년)과 희년(50년)에 유대인 달력으로 나팔절(휴거일)과 초막절(지상 재림일)을 계산하여 예측하는 것인데,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측했지만 당연히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해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요즈음에는 숫자로 예언하거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여 예언 사역의 물을 흐리고 있다. 숫자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예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대인 신비주의인 카발리즘의 영향으로, 성경이 말하는 숫자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여 성경을 해석하거나 예언하고 있다.

 

이런 성경 해석의 연장 선상에서 예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2017년에 대해 예언할 때, 17=10+7인데 10과 7은 완전수이므로 2017년은 ‘돌파의 해’, ‘특별한 은혜의 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2017년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부터 70년(바벨론의 포로기간이나 7X10=70의 완전 수)이 되는 해,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므로 이스라엘에 ‘전쟁’이나 ‘특별한 사건’이 생긴다면서 모여서 기도하자고 촉구하는 사람도 있다. 올해는 70년이 지난 첫 해이므로 또한 뭔가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도 있다.

 

 

셋째, 소속 단체가 같으면 같은 예언을 하기 쉽다.

 

1990년대 초에 휴거 소동으로 한국을 시끄럽게 했던 다미회의 휴거날짜 예언 대표적이다. 수많은 학생이나 어른들이 동일한 예언을 하여 정통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들도 많이 동조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동일한 단체에서는 서로가 영적 영향권 아래 있으므로 중요한 예언의 경우 다른 단체의 예언을 통해 점검하거나 확인하는 것이 좋다.

 

더군다나 휴거 날짜(예수님의 공중재림 날짜)는 성경에 분명히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마 24:36)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경의 분명한 내용과 위배되는 예언은 당연히 틀린 것인데 사람들은 혹시나 하고 잘못 기대하고 믿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특히 요즈음에는 메시아닉 쥬 운동(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운동)과 신종 유대주의인 ‘히브리 뿌리운동’에 심취된 자들 중에서, 성경은 ‘그 해를 모른다’고 했지만, ‘그 달’과 ‘그 날’은 히브리 달력의 계산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시대의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이다.

 

100% 무오류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성경의 해석이나 오늘날의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이므로(고전 2:13-14) 틀릴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틀리지 않지만 해석이나 적용 과정에서 틀리는 경우가 있고, 숫자나 절기를 통한 예언처럼 처음부터 틀리는 경우가 있고, 예언자의 신학 프레임이나 개인적 취향 및 소원이나 영적 수준에 따라 틀리게 듣거나 보는 경우도 있다.

 

 

필자도 초창기에 너무나 분명하게 들었는데 틀린 경우가 있어서, 내가 과연 예언을 믿어야 하고 예언 사역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왜 그런 경우가 생기느냐고 하나님께 물었더니, 하나님은 “네 마음판이 깨끗하면 내(하나님) 음성을 듣고 네 마음판이 더러우면 네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중요한 음성을 들을 때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치유하고 회개한 후에 듣거나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몇 명의 동역자에게 반드시 내용을 ‘확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00%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샘 스톰즈는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 틀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해서 무오하신 하나님이 오류가 있는 계시를 주실까?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도 없고 하시지도 않는다.

핵심은 모든 예언에는 다음의 네 가지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인데 물론 그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계시 그 자체이다; 신자가 계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드러난 것에 대한 해석이나 그것의 의미를 확신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해석한 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계시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에 주신 것은 무엇이든 오류가 없다. 하나님 자신처럼 무오류하다. 그것에는 거짓이 없다. 모든 진정한 예언적 발성의 뿌리인 계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성경)처럼 잘못이 없고 무오류하다. 그러므로 게시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약이나 구약의 예언의 은사에는 차이가 없다.

계시를 수용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할 때 오류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사람이 완벽하게 듣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한 것을 오류가 없이 해석하고 적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임했다고 해서 해석과 적용도 완벽하리란 보증은 없다.”

 

 

 

예언이 좀 틀린다고 해서 무익한가?

 

 

존 파이퍼는 “왜 무오한 성경에 뿌리를 두고 성령이 주신 예언이 틀리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가르침의 은사는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교회의 덕을 위해 성경적 진리를 설명하는 행동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이 교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사가 성령의 의해 가르침의 은사를 사용한다고 해서 무오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단지 부차적인 의미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가르침의 원천인 성경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오류한 계시인 성경에 뿌리를 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은사에 왜 오류가 있는가? 성경에 대한 교사의 이해에 오류가 있고, 성경 진리를 설명하는 데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가르침의 은사가 무오류한 가르침은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예언의 은사에 적용해 보자……하나님은 실수를 하시지 않으시므로 계시가 진짜라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해서 계시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계시를 불완전하게 받을 수도 있고, 계시를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도 있고, 계시를 불완전하게 전달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바울은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고전 13:12).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 오류가 있는 가르침을 하듯, 예언의 은사도 오류가 있는 예언을 한다.
 

그래서 나는 질문한다. ‘만일 가르침이 교회의 덕을 위해 유익하다면, 둘 다 사람의 부족함으로 혼합되어 분별의 필요성은 있지만, 예언도 바울이 고전 14:3, 12, 26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덕을 위해 유익하지 않을까?’”

 

 

예언의 기능은 위로하고 안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고,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이중에서 위로하고 안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은 즉석에서 본인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예언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 부담이 있고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의 ‘캔서스 예언자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맞은 확률이 30%도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비판자들은 '그런 예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비판자들은 모든 예언이 완벽하게 맞아야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100% 완벽한 것이 어디 있나?

문자로 분명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도 천차만별이라 수많은 교단이 있고, 한 교단 내에서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그중에서 틀린 것-대표적인 것이 기적중지론이다- 이 많은데 왜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 비판이 없는가?

 

 

어떤 유명한 의사가 임종 전에 제자들에게 고백했다.

 

“평생 동안 환자를 보면서 25%(15%라는 설도 있다) 정도의 오진을 했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랐고 나중에 소문을 들은 일반인들도 깜짝 놀랐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오진율은 스승의 두 배 정도 되는데 스승은 그것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일반인들은 당대 최고 의사의 오진율이 그 정도로 높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는 중병일수록 오진율이 높다고 한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위로와 책망의 예언은 잘 맞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은 잘 맞지 않으므로 각별한 분별이 필요하다.

 

2008년 미국의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최고의 경제학자들에게 질문했다.

 

“왜, 아무도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나?”
“위기를 예견했습니다만 언제 얼마나 심각하게 나타날지 몰랐습니다.”

 

‘경기 예측은 유명한 경제학자들 보다 동네 이발사가 더 잘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경제학자들의 경기 예측이 필요 없다고 하는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고 노력한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아간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도 30%가 정기적으로 점쟁이를 찾는다고 한다.

 

안정된 직장에서 봉급을 받는 사람들-신학자들도 포함-은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약하다. 그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므로 혼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언 사역자들을 많이 찾는다.

 

 

가정 주부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교육과 진로, 결혼과 출산, 남편의 사업이나 직장 등의 문제를 관장하고 돌보기 때문에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라 혼자 결정하기가 힘들어서, 목회자의 조언을 구하지만 상담자가 예언의 은사가 없는 경우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조언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평신도 예언 사역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

 

 

사업가든 가정주부든 목회자든 많은 사람이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호기심 때문에 예언 사역자를 찾는다. 하나님이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런 걸 부인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경적이다. 성경에서 은사 중에 구체적을 구하라고 명령한 것은 신기하게도 예언의 은사이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다른 신령한 것들-기적행하는 은사들-은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지만 예언에 대해서는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왜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노력하고 구해 보라. 생각 보다 쉽게 받아진다. 요즈음은 어린 아이는 물론 조금만 사모하고 훈련하면 누구나 금방 쉽게 받는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의 방향 설정에 관한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예언 사역자는 지나친 약속을 자제하고 내담자는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안전 장치를 갖고 예언을 대하면, 의사의 오진율이 높아서 실패한 치유도 있지만 여전히 의사의 치유가 필요하고 경제학자의 경기 예측이 틀리지만 여전히 사업가나 투자자에게 그들의 예측이 중요하듯, 예언도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이 많다.

 

 

의사도 중요한 수술을 할 때는 실수의 가능성에 대한 면책에 대해 환자의 동의서를 받듯, 필자도 중요한 예언을 할 때는 반드시 내담자에게 위험성을 고지하면서 주요한 결정은 결국 본인의 인생 경험과 지혜를 통해 할 것을 권면한다. 예언 사역자의 예언은 자문에 불과한 것이지 강제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틀린 경우도 있지만 맞은 경우도 많고, 필자 자신의 인생에서도 틀린 경우도 있지만 맞은 경우가 더 많고 여러 면에서 예언의 은사가 유익하여 이런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다.

 

 

물론 아직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경험이 없거나 예언의 은사가 없는 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이런 것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만으로 충분하다. 오늘날에도 예언이 있다면 기록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 아닌가?’라는 극단적 주장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힌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기록된 성경에 종속되는 열등한 예언이지만 개인이나 단체의 시시콜콜한 사안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은사냐 열매냐?

 
 

최근에는 희한한 이유로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부인하는 글을 쓴 사람이 있다.
김요한 (목사)의 『지렁이의 기도』의 추천사를 거절한 김영봉 (목사)은 그 이유가 신학적, 성경적 문제가 아니라 ‘자기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김영봉. “지렁이의 기도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 「뉴스앤조이」. 2017.12.09).


 

스스로를 은사지속론자라고 주장하는 김영봉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방언, 통역, 축사, 신유, 입신 같은 모습을 일상사처럼 보고 자랐다고 하면서도 김요한이 전기 차단기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전기가 들어와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의심쩍어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므로 ‘사실 관계’가 의심쩍다면 저자나 주변 사람에게 확인해 보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왜 자신의 ‘경험 수준’이 들어가는가? 자신의 경험 수준이 신앙의 잣대인가?

 

 

물론 대중적 도서인 『지렁이의 기도』는 김요한이 예언하여 맞은 것만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일전에 예언에 관한 다른 베스트 셀러 저자도 모든 예언이 맞은 것처럼 기록하여 필자를 좀 불편하게 한 적이 있는데,『지렁이의 기도』에도 그런 요소가 다분히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모든 예언은 맞아야 한다는 헛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예언은 물론 신유나 다른 기적도 마찬가지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기적적으로 맞춘 일이나 치유된 사례를 강조하기 쉽다. 그러나 틀리거나 낫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그러므로 맞지 않거나 틀린 경우도 솔직하게 고백하여 자신의 예언이나 치유 사역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기적이나 예언에 대한 김영봉의 견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영봉은, 박재봉 (목사)가 은사를 받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는데 이후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가를 보았더니 대다수가 신앙 생활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자신의 은사를 거두어 주시기를 간청했다는 사례를 제시한다.

 

박영돈(고신대 교수)이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의 기적을 폄하하기 위해 동일한 사례를 들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로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기적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믿음에서 떨어진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김영봉은 7080년대에 은사운동의 주역들의 말년이 추레하게 늙어갔다면서 은사무용론을 제기하는데 이는 성경도 모르고 기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적 생각에 불과하다.

 

애굽에서 10대 재앙의 기적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와 물이 없자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고 나중에는 가나안 정복을 거절하여 출애굽 1세대가 멸망 당했다. 하나님의 기적이 열매(?)를 맺지 못한 대표적 사례인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후에도 사사들을 통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그런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또한 금방 타락했다. 실패한 기적들의 또 다른 사례인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그토록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다. 사도들도 수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오히려 은사를 경험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더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

 

김영봉이나 박영돈의 주장대로 라면 ‘왜 제대로 열매도 맺지 못할 기적을 하나님은 그토록 많이 행하셨을까?’ 기적을 체험한 자 중에서 믿음에서 떨어진 자도 많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믿음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12제자로 시작된 크리스천이 2000년 후에는 천주교를 제외하고도 10억 명에 이르고 있다. 이중에는 은사주의 자들이 삼분지 이(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기적을 체험한 후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전통적 교회에서 전입한 사람들이 7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통계나 사례는 전체를 봐야지 특정한 사례 한두 개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반화하는 것은 아즈 잘못된 논증 방법이다.

 

 

사도 바울은 기적에 대해 김영봉이나 박영돈과는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은사로 말썽 부린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은사를 거두어가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들에게 더 많은 은사를 주시기를 기도하고(고전 1:7), 은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은사를 구하고 사용하라’고 권면한다(고전 12, 13, 14장).

 

 

그런데 기적중지론자(은사중단론자)나 자칭 기적계속론자(은사지속론자) 중에서도 김영봉처럼 선비형이고 다소 소심한 성격을 가진 자들은 은사자들이 말썽을 일으키므로 사용을 절제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만일 김영봉이 김요한의 체험 무용론을 주장하려면 김요한의 기적이나 예언을 받은 자들의 삶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사업과 목회는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선비형 목회자는 은사를 받아도 디모데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하거나 사장시킨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 처럼 돌격형 목회자는 은사을 받으면 다소 실수를 무릅쓰더라도 과감하게 사용한다. 누가 더 효율적일까? 당연히 후자다. 그러므로 학자형은 은사 보다는 열매를 주장하지만 돌격형은 은사 사역이 너무 신나서 하다가 다소 실수도 저지르지만 과감하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사업이나 사역은 소심한 자들이 아니라 저돌적인 자들을 통해서 확장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은사와 열매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해야 한다’는 양자병행의 문제이다. 은사는 하나님 나라의 양적 확장을 위한 수단이고 열매는 내적 성숙의 결과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전통적 교회는 쇠락하는 반면 은사적 교회는 성장 일로에 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오늘날 전통적 교회는 은사를 경시하고 열매를 강조한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전통적 교회는 양적 성장도 못하고 그렇다고 은사적 교회에 비해 신앙 인격의 열매를 더 잘 맺는 것도 아니다. 은사운동은 양적 성장이라도 하고 있지만 전통적 교회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하는 엉거주춤하여 양적 답보 상태에 있거나 쇠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답은 ‘은사 보다는 열매가 아니라 은사도 행하고 열매도 맺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사적 계시인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자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잘 사용하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혼란을 가중시키므로 진위를 분별하고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나가는 말

 

이상 고린도전서 14장이 말하는 예언은 설교나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이 즉흥적으로 주시는 은사이며, 이 은사는 ‘사도적 예언’인 성경 보다는 격이 낮은 성령의 조명의 수준의 ‘회중적 예언’이므로, 예언의 내용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진위 여부를 분별하여 사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필자가 이렇게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언의 은사야 말로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의 계략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초고성능 영적 정찰 무기이기 때문이다. 정보를 가진 자가 권력자인 것처럼 예언의 은사를 통해 신앙의 주적인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의 계략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예언의 은사가 없으면 신앙은 과거의 전통에 의지하고 현상 만족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통해 사람이나 시대를 따라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보조를 맞추면서, 처음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위로와 소망을 갖고 힘찬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음성을 듣거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모하고 구하여서 은사의 수준에 이르면 필요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무한한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모든 초자연적 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되 그중에서도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고전 14:1
사랑을 따라 구하며, 기적행하는 초자연적 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원어에 의한 개인 번역)

 

…………………………

참고 도서 및 자료 :

Deere, Jack.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잭 디어.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
Gaffin, Richard, Jr. Perspective on Pentecost; 리차드 개핀, 권성수 번역『성령은사론』.
Grudem, Wayne.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 Today; 웨인 그루뎀, 김동수 번역,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
Fee, Gordon D. God’s Empowering Presence; 고든 피. 『성령: 하나님의 능력 주시는 임재(상)(하)』.
MacArthur, John. Strange Fire; 존 맥아더.『다른 불』.
Robertson, O. Palmer. The Final Word; 팔머 로버트슨, 이심주 번역,『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Storms, Sam.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Four Views;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Williams, J. Rodman. Renewal Theology II.
구요한.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
김동수. 『방언과 예언』.
김재성.『개혁주의 성령론』.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인터넷 자료 :

Beasley, Michael John.  The Fallible Prophets of New Calvinism (The Armoury Ministries, 2013); (“신칼뱅주의의 오류가 있는 예언가들”).

Compton, R. Bruce. “The Continuation of New Testament Prophecy and a Closed Canon: A Critique of Wayne Grudem’s Two Levels of New Testament Prophecy.”
(“신약 예언의 지속과 완성된 정경: 웨인 그루뎀의 신약 예언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
http://www.dbts.edu/pdf/macp/2011/compton%20b,%20critique%20wayne%20grudem%20two%20levels%20prophecy.pdf
 

Farnell, F. David. “FALLIBLE NEW TESTAMENT PROPHECY/PROPHETS?
A CRITIQUE OF WAYNE GRUDEM'S HYPOTHESIS.”
(“오류가 있는 신약의 예언/에언자?-웨인 그루뎀의 가정에 대한 비판”) http://www.tms.edu/m/tmsj2h.pdf
 

Grudem, Wayne. “A Response to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Edinburgh, Scotland and Carlisle, Pennsylvania: Banner of Truth, 1993).
(“O. 팔머 로버트슨의『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 대한 반론”)


Poythress, Vern.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 to Apostolic Gifts: Affirming Extraordinary Works of the Spirit within Cessationist Theology.”
(“현대 성령의 은사는 사도적 은사에 유비적인 것이다-기적중지론 신학 내에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확인한다.”
https://frame-poythress.org/modern-spiritual-gifts-as-analogous-to-apostolic-gifts-affirming-extraordinary-works-of-the-spirit-within-cessationist-theology/


Stormes, Sam. “Why NT Prophecy does NOT result in ‘Scripture-quality’ revelatory words- a response to the most frequently cited cessationist argument against the contemporary validity of spiritual gifts.”
(“왜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등한 계시적 언어가 아닌가?-오늘날 성령의 은사의 정당성을 비판하는 기적중지론자의 통상적 반론에 대한 응답.”
http://samstorms.com/enjoying-god-blog/post/why-nt-prophecy-does-not-result-in--scripture-quality--revelatory-words--a-response-to-the-most-frequently-cited-cessationist-argument-against-the-contemporary-validity-of-spiritual-gifts).


White, R. Fowler. “Does God Speak Today apart from the Bible?”
(“하나님이 성경과 상관 없이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가?”)
http://www.the-highway.com/God_Spea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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