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목회 > 신학과 목회
[신학검증 (19)] 예언을 하려고 하라(2)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죄와 마귀의 계략을 알려주는 강력한 영적 무기다
글로리아타임스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12.29  22:27:5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신학검증 (19)]

예언을 하려고 하라(2)

-예언은 하나님의 뜻은 물론 죄와 마귀의 계략을 알려주는 강력한 영적 무기다-
 

   
 

고전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29-31.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헬. 디아크리노)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들어가는 말

 

한국의 유수 예장 교단에서 임원을 역임한 목사 한 분이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본인 표현에 의하면, 처음에는 TV를 켜도 화면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듯 자기 마음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먹통’이었다. 그러나 6개월에서 일년 정도 필자가 개최하는 세미나에서 훈련한 후 음성듣기와 대화는 물론 이제는 환상도 자유자재로 보게 되었다.

 

이 목사가 세미나에서 배운 대로 교회에서 교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결과는 놀라웠다. 그때 교회의 리모덜링(remodeling)이 필요하여 교인들의 참여가 필요했는데,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음성듣기를 통해 리모덜링에 참여하게 했다. 그랬더니 90 퍼센트 이상의 교인들이 음성듣기를 통해, 누구는 바닥을, 누구는 천정을, 누구는 어느 쪽 벽을 담당하라는 음성을 들어서 리모덜링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고 한다.

 

음성듣기 세미나를 통해 훈련을 받은 어느 목사는 요즈음 목회하는 맛이 난다고 한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교인들의 사정을 알려주셔서 적절한 상담을 하니 교인들이 너무나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목사님, 요즈음 많이 신령해지셨네.”

 

필자가 음성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9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 교계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희귀했다. 필자는 전도사 시절에 은사를 사모하면서 방언은 상대적으로 쉽게 받았지만 다른 은사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았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은사를 주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껏 나누어주겠습니다.”

 

하나님이 필자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필자가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여기 오면 은사가 너무 쉽게 열린다고’들 했다. 지방에 사는 어떤 사모는 5년 동안 방언 통변 은사를 사모했는데 기도를 통해 5분만에 통변의 은사를 받고는 너무나 좋아했다.

 

언젠가 성령사역 세미나를 할 때이다. 아는 목사 한 분이 친구 목사를 데리고 참석했다. 안수기도 시간에 그 친구 목사의 순서가 되었다.

 

“저는 신학도 다르고, 교단이나 교회에서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저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기도는 받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는 통상 하듯이 그에게 손을 얹고 ‘은사가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잊었다. 얼마 후, 아는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친구 목사가 수지 맞았다는 것이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때 안수 기도 받은 후 방언이 터지고 음성을 듣고 환상도 보게 되어 너무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많은 평신도들도 훈련을 통해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개인은 물론 가정, 직장 및 사업체에서 많은 영적 유익을 얻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의 훈련으로 받느냐고 비판하지만 이는 성경도 모르고 일반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다. 성경 어디에도 ‘설교를 배워서 하라’는 구절은 없지만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설교학 박사 과정도 있다.

 

초자연적 은사도 마찬가지다.
은사를 먼저 받은 사람이 안수나 재생산 교육을 통해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다(롬 1:11; 행 8:17; 9:17-18; 19:6 등). 구약에서는 선지자 학교가 있어서 제자들을 양성했다(왕하 2:3, 5,7,15; 4:1,38; 5;22; 9:1).

 

자료 : 
“[성경Q&A]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성령을 나누어 주시는 사역이다.” 「글로리아타임스」. 2014.6.3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3

 

 

필자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방언·신유·축사 및 예언이 사도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을 추종하는 신자는 북미주 내에서 52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런 것들이 교회 시대에도 지속된다고 주장하는 오순절교회나 은사주의는 교인 수가 3,000만 명에 이르고, 전세계적으로는 7억 명을 능가한다. 이런 것을 볼 때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은 이제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물론 예언의 은사를 오남용하는 사람도 많지만 제대로 활용하면 예언의 은사처럼 유익한 은사도 드물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도 모든 은사 중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했을까?

 

고전 14:1
사랑을 추구하며 성령의 기적행하는 신령한 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
(원어와 문맥에 의한 해설 번역)

 

 

고린도전서 14장의 몇 가지 쟁점들

 

고린도전서 14장이 말하는 예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석은 기적중지론자(은사중단론자)와 기적계속론자(은사지속론자)가 당연히 서로 다르다. 양 진영이 쟁점으로 삼는 것은 다음 3가지다.

 

첫째, 고전 14:1이 말하는 ‘예언’은 무엇인가?

기적중지론자는 예언을 설교나 가르침이라고 해석하고, 기적계속론자들은 방언처럼 하나님의 즉흥적으로 주시는 예언의 은사라고 해석한다.

 

둘째, 차등 예언이 존재하는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개인 예언은 서로 등급이 다른가? 기적중지론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계속론자는 두 종류의 차등을 인정한다. 사적 계시(개인 예언)는 공적 계시(성경)에 종속되는 열등한 계시이므로 공적 계시인 성경에 비추어 진위 여부가 분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고전 14:29이 말하는 ‘분별하다’는 ‘무엇’을 분별하는 것인가?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분별하다’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목적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기적중지론자는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기적계속론자는 ‘예언 내용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기적중지론자는 ‘예언하는 순서’를 분별하는 것이라는 생뚱맞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정이철이 이런 생뚱맞은 해석을 선호한다.

 

 

고전 14:1이 말하는 ‘예언’은 무슨 뜻인가?

 
 

바인즈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예언하다’는 헬라어 ‘프로페튜오’(명사형은 프로페테이아)에는 ‘대언하다’(forth-tell)와 ‘예언하다’(fore-tell)의 두 가지 뜻이 있다.

 

대언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의미다(마 7:22; 26:68; 고전 11:4,5; 13:9; 14:1,3-5,24,31,39; 계 11:3 등). 예언하다는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마 15:7; 요 11:51; 벧전 1:10; 유 14등).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대언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미래에 될 일을 포함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 둘의 구분이 두부 자르듯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언.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언을 통해 자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전달한다. 대언을 통해 안위, 권면, 책망, 심판 및 인도의 말씀을 주신다.

예언.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고해 주시거나 개인이나 단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성경도 예언의 기록이다.

 

벧후 1:20-21.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그런데 고린도전서 14:1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예언하려고 하라’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성경을 기록하려고 하라’고 명령하는 것인가? 이 때문에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상반되는 견해가 생긴다.

 

어떤 기적중지론자는 고전 14:1이 말하는 예언은 성경급 예언이라고 주장한다(리차드 개핀. 팔머 로버트슨 등). 이에 대해서는 두 번째 쟁점인  “차등 예언이 존재하는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전 14장이 말하는 예언은 설교나 가르침인가?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설교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장 칼뱅 이래로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물론 로마서 12:6, 살전 5:20 및 행 2:17-18의 예언도 성경 말씀을 잘 풀이하여 하는 설교나 가르침이라고 해석한다. 특히 골수 기적중지론자이자 강해설교가인 존 맥아더가 이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첫째,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명령형’이다.

명령형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모든 성도를 향한 명령이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 설교나 가르침이라면,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성도는 모두 불순종하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 구문을 고전 12:31와 함께 ‘명령형’이 아니라 ‘직설법’으로 해석한다. 구문상으로는 고전 12:31과 고전 14:1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구나(직설법)→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명령형)

고전 14:1.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는구나(직설법)→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명령형).

고전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명령형).

 

그러나 고전 14:39은 이 두 구절과 동일한 구조를 갖지만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이 두 구절들도 명령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희가 더 큰 은사를 사모하고 있구나’, ‘너희가 예언을 하려고 하구나’라고 해석되어, 바울이 은사와 예언을 사모하는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고 비하하는 ‘디아트리베’ 표현이 된다.

 

디아트리베(diatribe)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는 대화 형식의 논법이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수신 교회 교인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이런 식으로 인용한 후 바울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들이 디아트리베라는 주장은 고린도전서 12장이나 14장에서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하고,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7절)면서 그들이 은사를 사모하는 것을 칭찬한 것과 모순되는 주장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들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형으로 해석해야 한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명령은 고린도교인들은 물론 모든 성도들을 향한 명령이다. 그런데 만일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 설교나 가르침이라면 모든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하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성도들의 이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둘째,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 말해야 한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이들의 주장대로 라면 설교나 가르치는 사람은 한번에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한다. 학술 대회라면 이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발제하고 다른 사람이 논평하면 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은 학술 대회가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이 일상적 예배하러 모였을 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이 예언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멈추고 순서를 양보해야 한다.

 

고전 14: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즉흥적으로 임하는 것이지 사전에 준비하는 설교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 설교나 가르침이라면, 다른 사람이 설교나 가르침을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즉흥적 말씀이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멈추고 순서를 양보해야 한다. 오늘날 이렇게 하는 교회가 존재하는가?

 

 

셋째, 예언은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한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한 사람이 설교나 가르침을 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이 말한 것의 내용을 분별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물론 요즈음 이렇게 하는 교회가 과연 존재하는가?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언자와 교사를 분명히 구분한다.

 

고전 12: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결론적으로,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이 즉흥적으로 주시는 예언이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은 즉흥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록이지 성경 본문을 바탕으로 사람이 사전에 준비하는 설교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설교·가르침과  예언의 차이점

 

일반적으로 설교•가르침은 사전에 미리 준비하지만 예언은 즉흥적이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설교•가르침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것이지만 예언은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할 수가 있다.

 

설교•가르침이나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듣는 자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거나(고전 14:4), 숨은 일을 드러내어 회개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4:24-25). 이런 유사성 때문에 기적중지론자들은 신약이 말하는 예언을 설교•가르침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사전 준비성이냐 불시의 즉흥성이냐에 따라 설교•가르침와 예언은 차이가 있다.

 

 

차등 예언이 존재하는가?

 

기적중지론자들은 차등 예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리차드 개핀, 팔머 로버트슨 등). 그래서 고전 14장이 말하는 예언도 성경과 동격의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도 시대는 정경(正經. 66권의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예언이 주요한 계시적인 말씀 은사였다. 또한 당시는 교회 창설기이므로 예언의 은사와 같은 특수한 은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 창설이 완료되었으므로 특수한 은사인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14장), 데살로니가전서(5장) 및 사도행전 등에 기록된 아가보나(행 11:28; 21:10), 예언하는 빌립의 네 딸들의 예언(행 21:9)도 정경 완성이나 교회 창설의 과정 중 일시적으로 필요한 은사였다고 주장한다.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만일 오늘날 예언의 은사가 지속된다면 새로운 계시가 말해질 때마다 그것들을 수집하여 성경을 재편집해야 하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린다.

 

김재성(국제신대 교수)도, “만일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를 오늘도 내려 주신다면 우리는 열심히 수집해서 모아야 하고 열심히 공부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쓴 찬송시, 계시의 기록들을 모아야 하는가? 계시의 종결이 아니라면,성경과 차이점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면서 맥아더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된다.
맥아더는 하나님이 남종과 여종은 물론(행 2:17-18), 빌립의 네 딸들도 성경급 예언을 했다(행 21:8-9)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왜 누가나 바울은 각 교회의 예언을 수집하여 성경에 추가하지 않았을까? 성경에는 그들의 예언이 성경 기록에 추가되었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예외적으로 아가보의 예언 2개가 성경 기록에 추가되었을 뿐이다(행 11:28; 21:10 참조).
 

 

그러나 기적계속론자들은 차등 예언을 인정한다(웨인 그루뎀, 샘 스톰즈, 번 포이트레스 등).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구약의 선지자에 상응하는 신약의 상대자는 선지자가 아니라 사도였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계시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계시와는 다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 예레미아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다고 기록한다(신 18:18-20; 렘 1:9; 겔 2:7).

 

신약에서도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선자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다. 신약의 사도들 (및 일부 사도의 지도 하의 제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했다(고전 2:13; 갈 1:8-12).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동격에 두고 있다. "곧 거룩하신 선지자의 예언하신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하노라"(벧후 3:2).

 

 

둘째, 예언서인 성경은 ‘사도적 예언’을 기록한 것이지만 예언의 은사는 ‘회중적 예언’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도적 예언과 회중적 예언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로마교회(롬 12:6), 고린도교회(고전 14장), 데살로니가교회(살전 5:20) 및 아가보나 빌립의 4딸들의 예언은 회중적 수준의 예언이었다. 이들은 교회 창설이나 성경 기록과는 무관하게 지역 교회나 주변 사람들에게 개별적 수준으로 예언하던 사람들이었다.

 

 

셋째, 회중적 예언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별되어야 한다.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내용에 오류가 없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딤후 3:16; 벧후 1:20-21). 그러나 회중적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성경에 비추어 분별되어야 한다.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살전 5:19-22.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개인 예언이나 회중적 예언은 완전한 영감을 받는 성경 계시 보다 열등한 수준의 계시이므로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한다.

 

비판자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예언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설교나 가르침에는 오류가 없는가?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들이라도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동일한 본문을 바탕으로 한 설교도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가르침이나 설교가 무익한가?

 

특히 미래에 될 일이나 주요한 결정에 대한 예언이 틀리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의 예언에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예언은 발표하기 전에 예언의 은사가 있는 여러 사람을 통해 확인한 후 발표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때로는 자신의 예언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틀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주요한 결정이나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예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예언 및 기타 상황이나 여러 가지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성경 말씀 대로 분별과 확인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일방적 견해를 따르다가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예언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개인적 예언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예언의 은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언하는 자나 받는 자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설령 예언이 맞더라도 만사가 일사천리로 형통하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통해 쟁취했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때문에 나중에는 여러 민족에 의해 고통을 당했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고 도처에 흩어지는 수모도 당했다. 예언은 약속이지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예언자들에게 내린 명령을 보면 사도의 권위가 예언자 보다 우선 순위에 있다.

 

고전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세로 주의 명령을 예언자들에게 직접 전달하고 있다.

 

 

샘 스톰즈(Sam Storms)도 웨인 그루뎀의 견해를 전반적으로 지지하면서 리차드 개핀의 주장을 이렇게 반박한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성경이 완성된 시대인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성경과 다른 예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대답은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1세기의 신자들이 했던 대로 성경에 비추어 분별하면 된다.

 

더군다나,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1세기 신자들 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명령에 따라 고전 14:29이후나 살전 5:19-22에서처럼 예언을 분별할 수 있었다면, 완성된 성경을 가진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초대교회 당시에 성경과 다른 예언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았다면 완성된 성경을 가진 21세기에 어떻게 해서 성경과 다른 예언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고 생각하는가? 1세기 신자들이 성경과 다른 예언에 순종할 수 있었다면 왜 오늘날의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개핀은 ‘오늘날의 예언은 그 구체성 때문에 성경에 비추어 분별하기가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1세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들은 바울의 지시대로 예언을 분별했기 때문이다. 완성된 성경을 가진 우리가 그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은가?”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는 은사를 제1등급인 메시야급(그리스도), 제2등급인 사도급(사도와 동역자들), 제3등급인 특별급(목사,교사,장로,집사들) 및 일반급인 제4등급(일반 성도들)로 분류하면서 등급에 따라 성령 충만함의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시대의 설교가 메시야급과 사도급인 성경 말씀에 ‘유비적’(analogous)이듯 예언도 메시야급과 사도급에 ‘유비적’이므로 오류가 있으므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만일 초대 교회 시대에 기적이 교회 창설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지역에서 기적을 통해 교회를 창설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오지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은사가 있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교회 개척에 더욱 적극적이다. 이것이 은사운동의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성경 반입이나 복음 전파가 금지된 무슬림(이슬람 신자)이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셔서 복음을 전한 간증이 유튜브(Youtube에 상당히 많이 올려져 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 사도들에 의해 교회가 창설되었으므로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교회 창설 은사가 중지되었다는 주장은 비경험자들의 말 장난에 불과하다.

 

정리하면, 신약이 말하는 개인 예언 또는 회중적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열등한 예언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어 교회 창설과 유지에 많은 유익을 제공하고 있다.

 

 

*성령의 조명과 예언의 은사

 

기적중지론자들이라고 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이 그대로 신앙생활에 적용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성경 말씀이 ‘성령의 조명’(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을 통해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은 “흔히 예언이라 하는 것은 실상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발적으로 성경을 적용시키는 것이며 어느 특별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성경 교훈을 다소 갑작스레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런 성령의 자발적(spontaneous)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파울러 화이트(Fowler White)도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은 비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에 의한 격려· 고무(promptings)나 인상들을 통한 인도를 방언이나 예언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조명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하여서, 오히려 자기가 비판하는 잭 디어의 비판을 받는다.

 

화이트는 “하나님의 실질적 인도는 예언, 방언, 비전, 꿈 및 들리는 음성과는 조심스럽게 구별된다”고 말하는데 화이트는 이 주장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 대신 화이트는 존 머레이(John Murray)이 주장하는 느낌들, 인상들, 금지들, 인상들, 부담들, 결단들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런 주장 자체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 또한 전혀 없고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화이트는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구별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없는 주장을 한다고 잭 디어는 비판한다.

 

 

한편, 번 포이트레스리차드 개핀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나 웨인 그루뎀이 말하는 ‘예언’은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둘의 기능은 상당 부분 겹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경우가 많다. 필자도 음성듣기나 예언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인 줄 알았지 음성듣기나 예언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에 대해 제대로 열리고 난 후에 생각해 보니 그때에도 예언의 은사가 미약하게 임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나 목회자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개발해 주지 않으면 그 수준에서 머물지만 교육과 훈련을 통해 활성화되면 예언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예언의 영이 강하게 임해서 그런지 어린 아이들도 쉽게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며, 신학적 편견을 버리고 사모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생각보다 쉽게 듣고 볼 수 있다.

 

기적중지론자들은 말로는 성경이 신자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종합적 전체적 지식’을 주는 것이지 ‘구체적 개인적 지식’을 모두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설교, 신앙서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 책망, 인도, 방향 설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김 집사가 어떤 사업을 해야 하고, 누구와 결혼해야 하며, 박 선교사가 어느 지역에서 선교하고, 이 목사가 어느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이름은 무엇으로 하는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마음에 감동이 오고 확신이 오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의 예언은 이런 문제를 다룬다.

 

성경이 헌법이라면 오늘날의 계시-음성, 예언-은 하위인 법률이나 시행령 수준이다. 헌법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물론 국회나 국민투표에 의해 개정되기 전까지), 기타 법률은 헌법의 권위에 종속된다.

 

(계속)

 

참고 도서 및 자료 :

Deere, Jack.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잭 디어.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
Gaffin, Richard, Jr. Perspective on Pentecost; 리차드 개핀, 권성수 번역『성령은사론』.
Grudem, Wayne.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 Today; 웨인 그루뎀, 김동수 번역,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
Fee, Gordon D. God’s Empowering Presence; 고든 피. 『성령: 하나님의 능력 주시는 임재(상)(하)』.
MacArthur, John. Strange Fire; 존 맥아더.『다른 불』.
Robertson, O. Palmer. The Final Word; 팔머 로버트슨, 이심주 번역,『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Storms, Sam.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Four Views;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Williams, J. Rodman. Renewal Theology II.
구요한.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
김동수. 『방언과 예언』.
김재성.『개혁주의 성령론』.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인터넷 자료 :

Beasley, Michael John.  The Fallible Prophets of New Calvinism (The Armoury Ministries, 2013); (“신칼뱅주의의 오류가 있는 예언가들”).

Compton, R. Bruce. “The Continuation of New Testament Prophecy and a Closed Canon: A Critique of Wayne Grudem’s Two Levels of New Testament Prophecy.”
(“신약 예언의 지속과 완성된 정경: 웨인 그루뎀의 신약 예언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
http://www.dbts.edu/pdf/macp/2011/compton%20b,%20critique%20wayne%20grudem%20two%20levels%20prophecy.pdf
 

Farnell, F. David. “FALLIBLE NEW TESTAMENT PROPHECY/PROPHETS?
A CRITIQUE OF WAYNE GRUDEM'S HYPOTHESIS.”
(“오류가 있는 신약의 예언/에언자?-웨인 그루뎀의 가정에 대한 비판”) http://www.tms.edu/m/tmsj2h.pdf
 

Grudem, Wayne. “A Response to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Edinburgh, Scotland and Carlisle, Pennsylvania: Banner of Truth, 1993).
(“O. 팔머 로버트슨의『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 대한 반론”)


Poythress, Vern.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 to Apostolic Gifts: Affirming Extraordinary Works of the Spirit within Cessationist Theology.”
(“현대 성령의 은사는 사도적 은사에 유비적인 것이다-기적중지론 신학 내에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확인한다.”
https://frame-poythress.org/modern-spiritual-gifts-as-analogous-to-apostolic-gifts-affirming-extraordinary-works-of-the-spirit-within-cessationist-theology/


Stormes, Sam. “Why NT Prophecy does NOT result in ‘Scripture-quality’ revelatory words- a response to the most frequently cited cessationist argument against the contemporary validity of spiritual gifts.”
(“왜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등한 계시적 언어가 아닌가?-오늘날 성령의 은사의 정당성을 비판하는 기적중지론자의 통상적 반론에 대한 응답.”
http://samstorms.com/enjoying-god-blog/post/why-nt-prophecy-does-not-result-in--scripture-quality--revelatory-words--a-response-to-the-most-frequently-cited-cessationist-argument-against-the-contemporary-validity-of-spiritual-gifts).


White, R. Fowler. “Does God Speak Today apart from the Bible?”
(“하나님이 성경과 상관 없이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가?”)
http://www.the-highway.com/God_Speak.html.
 

 

[관련기사]

글로리아타임스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110 Nuuanu Ave, Honolulu, HI 96817 USA  |  대표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구요한
Mail to: gloriatimes77@gmail.com
Copyright © 2018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