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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구원론 03]하나님은 허풍쟁이신가?구원 상실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라 ‘실제’다
구요한 목사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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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7  18: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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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적구원론 03]

 

하나님은 ‘허풍쟁이’신가?

-구원 상실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라 ‘실제’다-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은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Once Saved Always Saved(OSAS).’
A believer should work out his/her salvation to the end through faith by God’s grace.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요즈음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특히 전통적 교회의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에 대해 찬반 양론이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뜨겁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E. P. 샌더스가 시작한 바울 신학의 ‘새 관점’(New perspective)이 저명한 신학자인 제임스 D.G. 던 및 N.T. 라이트가 발전시키면서 바울 신학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고 한국의 김세윤 박사와 최갑종 박사가 이를 수용하면서 전통적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새 관점 학파는, 믿음으로 칭의-의롭다 칭함-를 받은 신자도 믿음의 행위 여부에 따라 구원 여부가 종말에 가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새 관점 학파가 아니라도 ‘개혁주의적 알미니우스주의’ 입장에서 신자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Stanley N. Gundry, series editor, Four Views on Eternal Security;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참조),

 

이신칭의 교리를 최초로 주창하여 칼뱅에게 영향을 끼친 마르틴 루터를 따르는 루터교는 일찌감치 신자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칼뱅이 천주교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척했듯, 칼뱅주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척하여 ‘신자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00년쯤 되는 시기였는데 유럽 교회는 이미 교리만 있고 삶이 없는 ‘죽은 정통’의 늪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은 아직도 ‘한번 구원 받은 신자는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만일 참된 신자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면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한번 제대로 구원 받은 신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기 마련이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애초부터 구원을 받지 않은 ‘가짜 신자’, ‘가짜 회심자’라고 주장한다.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지키고 싶은 주장은 구원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사람의 믿음 여부에 따라 구원 상실 여부가 결정된다면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수용하지 못한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담에게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권을 허용하셔서 아담이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셨는가? 그렇다고 해서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주권에 손상을 입혔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결정만을 할 수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은 ‘구원 상실 주장자들’이 신자도 구원을 상실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사람이 어느 정도 죄를 지어야 구원을 상실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 글에서 신자가 어느 정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가를 성경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한편,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은 ‘구원 상실 주장자들’을 비판하려면, 자신들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도 제시해야 한다. 그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고만 주장할 뿐 ‘구원 받는 믿음’(saving faith)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논쟁적으로 자기들은 은혜구원론자이고 반대자는 행위구원론자라고 편을 갈라서 진영 논리로 비판만 할 뿐이다.

 

 

필자의 이런 주장은 수백 년 동안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해 온 감리교 계통의 신자들에게는 별 것이 아닌지 모르지만 칼뱅주의 영향으로 ‘신자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믿어 온 장로교 계통의 신자들에게는 충격적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만나 본 장로교 목회자들 중에서도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런 주장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몇 년 전부터 전통적 이신칭의론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면서 칼뱅주의 학자들 중에서도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개진하면서 전통적 칼뱅주의 구원관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은 당연히 거세게 반발하면서 많은 반박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들은 수백 년 전에 확립된 이신칭의론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만 할 뿐 자기들의 주장에 무슨 오류가 있는지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진정한 믿음의 열매들

 

필자가 이전에 사용한 예화를 다시 한번 사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 앞에 갔다. 다음은 문지기 천사와 그 사람과의 대화다.

 

"어디로 가는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요?"

"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믿는데요?"
"그건 귀신도 잘 믿어(약 2:19)."
 

"교회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도 했는데요?
"그건 바리새인이 더 잘해(마 23장 참조).

 

"예수 이름으로 성공하고 출세했는데요?"
"그건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해.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으로 네가 참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봐."

"............?"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옆의 강도는 신앙을 고백하여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죽어서 낙원에 갔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고백한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은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입술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하고 교회 다니면 참 신자인가? 가짜 신자도 충분히 이렇게 할 수 있다.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참 신자라는 사실을 증거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믿음의 열매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짜 믿음’이고 ‘가짜 회심’이다. 만일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믿음의 열매로 오늘날 한국 교계를 분별해 보면 대부분이 ‘가짜 신자들’이 될 것이다.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믿음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와 거룩한 성품이다.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벧후 1:4-11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런데 과연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나 지도자들 중에 이런 열매들을 제대로 맺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다음의 죄들을 대수롭지 않게 짓는 자들이 더 많지 않을까?

 

고전 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엡 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골 3:5-6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성경은 이런 죄들은 모두 불신자가 짓는 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은 애초에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신자 보다는 불신자들이 더 많은 곳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상에게 지탄 받는 주된 이유가 탐욕, 음란, 거짓, 불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 받은 신자도 용서 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어쩌다 한두 번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성도들 사이에 이런 죄가 만연하고 공개적으로 노출될 정도로 상습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구원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을 상실할 정도로 경계선 상에 있는 사람들인가?

 

물론 그들의 범법 행위가 노출되어 실정법이나 교회법에 의해 징계를 받은 후에라도, 성폭행하고 살인 교사했던 다윗처럼, 철저히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원을 잃어버릴 정도의 죄라는 인식이 없이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에 안주하여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그만이지’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계속 쌓다가 갑자기 멸망에 이르는 것은 아닌가?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하는 성령 모독죄

 

 

또한, 다음의 죄를 짓는 자들은 영원히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

 

막 3:28-30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마 12:31-32; 눅 12:10 참조)

 

그런데, 오늘날 존 맥아더, 박영돈, 정이철 이창모 같은 반(反)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귀신 장난’으로 몰고 가고 있다.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귀산 장난이라 매도하는 자는 성령 모독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한다.

 

특히 정이철이란 자는 ‘은사사역’을 ‘귀신 장난’, ‘독을 퍼뜨리는 쥐약 같은 행사’라는 저질스럽고 더럽고 참람한 말을 거침 없이 내뱉고 있다. 이런 자가 과연 제대로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의 일부 장로 교단은 이런 미치광이 놀이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이런 교단들이 과연 제대로 된 기독교 단체들일까?

 

 

그러나 반(反)은사주의자들의 비판과는 달리,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은 『기독교백과사전, 2001』의 편찬자인 데이빗 배렛에 의하면 2007년 현재, 오순절 운동 100년 만에 약 6억5000만 명에 이르고 성장 일로에 있지만, 500년이 된 전통적 개신교는 3억8000만 명에 불과하며 계속 하락세에 있다.

 

그리고 신앙의 열매에 있어서도 은사주의 성도들이 비은사주의 성도들 보다 월등하다. 퓨 포럼’(Pew Forum)이 2006년에 출판한『성령과 능력』(Spirit and Power)이란 제목의 보고서에 의하면, 은사운동 성도들의 정통성, 도덕성, 경건, 전도에 대한 열정 및 사회적 참여에 대한 폭넓은 기여는 비은사주의 성도들을 앞지른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비은사주의자들은 은사주의가 마치 비성경적이고 비윤리적 집단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겁도 없이 저지르고 있다.

 

존 맥아더 같은 반(反)은사주의자는 성령 모독죄(훼방죄)는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만 적용되는 죄이지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인 그루뎀은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 죄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pp. 506-509).

 

필자도 그루뎀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은사사역을 ‘귀신 장난’이라고 폄하하는 자들은 금세와 내세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틀린 교리’ 때문에 쇠퇴하는 고전적 칼뱅주의

 

 

위에서 밝힌 것처럼 고전적 칼뱅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심각하게 쇠퇴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바른 교리’를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의 ‘틀린 교리’ 때문에 그들이 양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필자는 진단한다.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그들의 양적 성장은 물론 질적 성장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적반하장격으로 틀린 교리를 고수하면서 오히려 바른 교리를 비판한다.

 

왜 그들의 교리가 잘못되어 갔는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교리나 운동을 지나치게 비판하다가 오히려 자기들이 비성경적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전에도 잠시 밝혔지만 고전적 칼뱅주의는 천주교가 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반대하여 전도나 선교도 반대했었고, 멜로디 있는 찬송도 반대하여 칼뱅이 가르친 대로 단조로운 창(唱)이나 했던 것이다. 영적 경험에 지나치게 알레르기적 반응을 하면서 건전한 영적 경험조차 배척하다 보니 삶이나 영적 알맹이는 없는 사변 신학에 빠져버린 것이다.

 

가장 치명적 실수는, 칼뱅이 로마 천주교의 기적을 부인하기 위해 정교한 기적중지론을 개발했고, 로마 천주교의 행위구원론을 비판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예정론이신칭의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사람의 자유의지를 축소하고 성화에 소홀하여 오히려 비성경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속사적 해석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설교를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와 역사성을 무시하는 신정통주의를 대적하기 위해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을 모두 교회 시대의 성도와 상관 없는 ‘독특하고 비반복적인 계시적(?) 사건’으로 해석해 버렸다.

 

예수님을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강조한 것은 좋았지만,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인격이나 사역이 교회 시대 신자의 도덕적 본보기나 사역의 본이라는 사실은 무시하거나 축소하여 스스로 초자연적 능력 열매의 개발에 족쇄를 채워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고전적 칼뱅주의는 수많은 학자들을 양산하여 사변적 학문으로만 성행할 뿐 이를 따르는 교파나 신자는 전세계적으로 현저하게 쇠퇴해 간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한국 장로교의 친정인 미국 내 보수 장로교의 교세가 영세교단 수준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자료 참조 : “[구요한칼럼(12)]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2대 적폐.” 글로리아타임스. 2017.9.24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16

 

그나마 고전적 칼뱅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OPC교단(3만 명 정도), 칼빈신학교와 CRC교단(25만 명 정도), 커버넌트신학교와 PCA 교단(37만 4000명) 및 리폼드신학교 정도이다. 북미주 전체 개신교 신자 8000~9000만 명에 비하면 존재감도 없는 숫자이다.

 

CRC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면서 더 이상 NAPARC(북미주보수장로교 및 개혁교단 협의회) 회원 교단이 아니다. NARPARC에 잔류하는 소수 장로교·개혁교단들은 고전적 칼뱅주의 마지막 전사들(?)로서 칼뱅주의 기적중지론, 예정론 및 이신칭의론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에는 대부분 이런 신학교 출신들이 교단 신학교 교수직이나 총회나 노회의 요직을 장악하면서 쇠퇴 로에 있는 고전적 칼뱅주의 신학 수구(守舊)(?)에 전념하고 있다.

 

고전적 칼뱅주의자나 구원의 영원한 보장론자들-이하 ‘한번 구원론자’로 통일하여 표기-은 성경에서 구원을 잃어버릴 것 같이 기록한 구절들은 축복이나 상급을 덜 누리는 것으로,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구절은 ‘가상적 경고’나 ‘가상적 상황’을 말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을 허풍쟁이로 만들고 있다.

 

 

하나님이 허풍쟁이신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시고 무서운 분이신가를 절감한다.

물론 하나님은 기쁘신 뜻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신 7:7-11). 그런데 예정론자들은 이것만 강조한다. 하나님이 언약 체결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엄하게 다루셨고 심지어는 그들을 버리신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 동안 연단시키신 후 출애굽의 사명을 부여하셨지만 모세가 아들들을 할례 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죽이려고 하셨다(출 4:24-26). 하나님은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 일부를 훔친 아간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전쟁에서 지는 재앙을 당하게 하셨다(수 7장).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순종하면 복을 주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26:3-45 및 신명기 28장을 보라.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신명기적 역사’이다. 가나안 땅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하여 경고, 징계를 거치다가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여 바벨론에서 70년의 포로 생활을 거쳤다. 불순종하는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이다.

 

이후 예수님이 오셔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번 구원의 기회를 먼저 주셨지만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자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죽인 대가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져서 1800년 동안 떠돌이가 되어 온갖 서러움과 핍박을 당하다가 1945년에 겨우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기 때문에 모두 구원 받았는가?

 

-불순종하여 40년 동안 죽어간 출애굽 제1세대가 모두 구원 받았는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이스라엘이 초대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이 거듭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버리셨다. 그렇다면 사울은 왕위나 버림 받은 것이고 구원은 받았는가?

-우상숭배하고 악을 저리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은 이 땅의 축복과 상급만 잃고 모두 구원은 받았는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인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선택된 백성이므로 모두 구원을 받았는가?

 

선택과 예정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자들은 이들은 모두 구원 받았다고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그것은 구약의 기록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전통적 교회는 신약만이 성경이고 구약은 성경이 아닌 것처럼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니다. 구약도 엄연히 성경이다. 다만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하라는 것이지 구약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약은 구약의 사례를 많이 인용한다.

 

고전 10:6-11
“6. 이러한 일(들)(구약에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일들)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야고보서는 행함 있는 믿음의 사례로 구약의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제시한다(약 2:14-26). 그러므로 오히려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을 통해 새언약 백성인 신약의 성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구속사적 해석에 젖어있는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은 성경에 분명히 있는 ‘본보기’란 단어도 ‘거울’이라고 해석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우리의 ‘도덕적 본보기’(moral example)로 표현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헬라어 튀포스는 ‘거울’, ‘본보기’ ‘사례’ ‘패턴’이란 뜻이다. ‘거울’이나 ‘본보기’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는가? 구약의 신자들이 신약의 신자들에게 반면교사가 되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만 동시에 우리 인격이나 사역의 본보기이시다. 그런데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은 ‘구세주’는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본보기’는 약화한다. 그러니 신자들이 굳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으려고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구원의 목적이 신자들이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아들의 형상을 본 받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는 것인데도 말이다(롬 8:29; 갈 4:19; 엡 4:22-24).

 

하나님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보다 신약 시대의 사람들을 더 엄하게 다루신다.

 

히 10:28-29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계시가 희미한 구약 시대의 율법 즉 장차 올 완전한 계시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도 죽임을 당했는데, 온전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구속 사역으로 완성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자는 더 큰 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다만 구약에서는 즉각적 심판과 보응이 임했지만, 신약에서는 오래 참으시다가 결국에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모두 지옥에 보내신다.

 

그런데 한번 구원론자들은 무슨 근거로 선택되고 예정 받는 자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가?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는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은 신학 패러다임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 가능하고 저렇게도 해석 가능한 구절들이다(요 6:39; 10:27-29; 롬 8:1; 31-39; 빌 1:5-7 등).

 

요약하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거룩하시고 철저하게 사랑이신 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절묘하게 만나는 곳이다. 죄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죄값을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치르게 하셨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여서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죄 사함을 받게 하셨다.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 대신에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죄값을 치르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주시지만 믿다가 중도에 하차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한번 구원론자들은 예수를 한번 믿으면 이후에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거나(‘영원한 보장’), 하나님이 믿음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성도의 견인’).

 

이런 주장들은 자기들의 신학,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성경의 몇 구절을 엿가락처럼 늘이거나 구원 상실 구절들을 ‘가상적 경고’ ‘가상적 상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을 허풍쟁이로 만든 해석에 불과하다.

 

구약에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보면 그런 주장이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은 비록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선택하셨지만 언약에 따라 순종하면 지상적 복과 영생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지상적 재앙과 영벌을 내리신다. 이러한 원칙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또한, 아담의 타락을 허용하신 하나님이 갑자기 전략을 바꾸셔서 타락 후 구원 받을 선택자와 지옥 갈 유기자를 미리 정하셨다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무수한 경고와 징계와 마지막 통첩은 하나님의 허풍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교회에 대한 경고-‘행위’ 대로 갚으시겠다는 예수님

 

 

요한계시록의 7교회는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한 보편 교회의 모델이므로 오늘날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들이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잘한 점은 칭찬하시고 못한 점은 회개를 촉구하신다. 제대로 회개했을 때의 보상과 징계에 대해 기록하신다.

 

한번 구원론자는 7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는 ‘가상적 상황’에 대한 경고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엄포’가 결국은 ‘허풍’에 불과하다는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각 구절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허풍일 수가 없다. ‘이기는 자’가 받는 선물은 모두 구원이지 상급이나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시록 7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믿음’은 2회, ‘회개’는 6회, ‘행위’는 13회 사용되었다. ‘행위’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는 10회 등장하지만, 헬라어 원어인 에르곤(work)을 ‘수고’(계 2:9), ‘사업’(계 2:19), 일(계 2:26)로 번역한다. 단어 사용 회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계시록의 7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에서 나온 행위(들)를 근거로 칭찬과 책망을 하시고 최종적 구원 여부도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 번역본에는 계 2:9에 ‘에르곤’이 없음. 영어 KJV에만 있음).

 

예수님이 언급하신 ‘행위(들)’가 무엇인가?

 

내(예수님)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계 2:2).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내가 네 행위들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들이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일부 원어에 의한 번역).

만일 그의 (간음)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계 2:22).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15).

 

계시록 7교회를 칭찬하시고 책망하시고 심판하시고 최종적 구원을 주시는 근거는 그들의 ‘행위’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회개와 믿음에서 나온 행위일 것이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은혜구원론자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도 행위구원론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은혜구원론자들은 누가 ‘행위’라는 말만 언급해도 행위구원론자로 매도하는 만행을 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는 ‘이기는 자’는 참 신자이고 ‘지는 자’는 가짜 신자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가짜 신자를 예수님이 칭찬하실 수가 없다. ‘믿음’이란 단어도 두 번(계 2:13, 19)이나 등장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참 믿음을 가졌더라도 영적 전쟁을 끝까지 싸워서 이기는 자가 구원의 선물을 누린다고 강조하시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은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계시록의 7교회는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영적으로 미지근하고 행위의 열매가 별로 없는 교회 즉 ‘죽은 정통’의 교회(에베소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열심과 믿음은 있지만 교리적 오류와 윤리적 방탕에 빠져있는 교회(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작지만 환난과 핍박 중에도 믿음을 지킨 교회다(서머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오늘날 한국 교회도 계시록 7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실적 교회는 계시록 7교회의 여러 가지 특징을 모두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각 교회와 신자는 자신이 어떤 모습의 교회에 소속된 자인가를 깨닫고 해당되는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 끝까지 싸워 믿음에서 이기는 자가 될 때 최종적 구원을 받게될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록의 7 교회에 주신 칭찬은 이해하기 쉬우므로 책망과 경고 및 마지막 약속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경고는 지상적 축복이나 하늘 상급 여부에 대한 것이겠지만 마지막 약속은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에베소 교회(계 2:1-7)

(책망)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는 은사와 능력을 체험한 교회지만(행 19장; 20:17-38 참조), 주변의 핍박과 여러 가지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다. 예수님은 그들이 처음 사랑의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신다.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씀은 ‘교회를 없애겠다’는 말씀이과, 개인적으로는 은혜의 빛을 거두시겠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냉랭한 교회가 된 에베소교회는 사라져버렸고, 오늘날에도 처음 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린 서구나 미국의 교회들은 쇠퇴 일로에 있다. 부족하나마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회복하는 은사적 교회들이 전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마지막 약속)

7절.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가 먹는 생명나무의 열매(창 3:22; 계 21:2)는 구원이지 상급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는 자는 못 먹는다는 말인데 그것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서머나 교회(계 2:8-11)

(책망) : 없음

(마지막 약속)

11절.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한다(계 20:14-15). 그러므로 이기는 자는 지옥에 가지 않지만 지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버가모 교회(계 2:12-17)

(책망)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 교회는 신앙적으로 성실한 면을 갖고 있었지만, 사업상의 편의와 조합원의 친목이란 명목 아래 세상적으로 타협하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을 저지른 교회였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 직접 진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싸우지 않는 자들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겔 3:18; 33:6).

 

(마지막 약속)
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가 받는 ‘감추었던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요 6:31-35),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은 상급일 수도 있지만 구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책망)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두아디라 교회는 선한 행위들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지만(19절), 이들은 특히 음행의 죄를 심하게 저질렀다. 예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셔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행위 대로 갚으셔서 질병의 재앙으로 침상에 던져져서 눕게 하고, 자녀를 죽이는 끔직한 징계를 내린다고 경고하신다.

 

(마지막 약속)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예수님은 끝까지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새벽 별’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또한 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축복이자 상급이다(계 3:21; 마 19:28 참조). ‘새벽 별’은 예수님을 상징하므로(계 22:16) 구원의 선물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물론 구원의 선물도 받지 못한다.

 

사데 교회(계 3:1-6)

(책망)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사데 교회는 바른 교리는 가졌지만 바른 행위는 갖지 못한 죽은 정통의 교회이다(1절). 오늘날 정통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면 영적으로 준비 되지 않은 채 도둑같이 임하시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비극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마지막 약속)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책은 분명히 구원 받을 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곳이고(시 69:8; 빌 4:3; 계 3:5; 13:8; 17:8; 20:12,15,17), ‘그 사람의 이름을 시인하겠다’는 말씀은 구원 받을 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겠다는 말씀이다(마 10:32; 눅 12:8; 요일 2:23). 그렇다면 지는 자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는 말씀은 최종적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어떤 ‘한번 구원론자’는 예수님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다른 경우에는 지우겠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궤변이다. 만일 그 반대의 뜻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지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우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죄와 마귀와 싸우는 영적 전쟁을 힘들게 하여 이길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덧붙이신다.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이중 약속은 이기는 자에게는 최종적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말씀이다. 지는 자에게는 당연히 최종적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한번 구원론자들은 칼뱅의 이중예정론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그의 후예들은 후택설-타락후 선택설-을 주장하면서 타락 후 구원 받을 자는 선택하고 예정하셨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기들 죄 대로 심판 받도록 단순히 유기했다고 주장한다. 이중 예정이든 일방 예정이든 결과는 마찬가지 아닌가?

예수님이 ‘이기는 자’에게는 구원을 약속하시고 지는 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는 것은 지는 자는 어떻게 될 것인지가 뻔하기 때문이 아닌가?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3)

(책망) : 없음
(마지막 약속)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만큼 구원의 확실성이 보장되고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신자에게 새겨진다는 말은 신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계 7:3-4; 9:4).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그 성도가 천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것이다(계 21:1-2 참조).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

(책망)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7 교회 중 유일하게 책망만 받은 교회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 대부분의 대형교회의 모습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화려하기 때문이다(17절). 그러나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소경이고 벌거벗은 교회다(17절). 신앙적으로 미지근하면서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15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시고,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여 친밀한 교제를 누리라고 권면하신다(20절).

 

(마지막 약속)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이 지상에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후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이기는 자를 자신의 보좌에 앉혀서 함께 만국을 다스리겠다고 약속하신다(계 2:26; 마 19:28 참조). ‘성도가 하나님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구원과 함께 상급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을 한다는 말이다(딤후 2:12; 계 11:15, 17; 2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엡 2:6 참조).

 
 

나가는 말

 

구원 상실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고 ‘실제’다.
계시록 7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과 경고 및 마지막 약속은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들이다. 계시록 7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만 살펴보아도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 끝까지 믿음의 행위로 보이지 않는 신자가 구원 받는다는 주장은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한번 구원 받았다고 안일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믿음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 마지막 때까지 보인 믿음의 행위(들)-즉 열매들-로 결판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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