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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14)]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말씀 사기꾼 정이철의 엉터리 성령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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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1  22: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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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14)]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
How to Receive the Holy Spirit?

- '말씀 사기꾼' 정이철의 엉터리 성령관 비판-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지만 권위와 영광은 동등하다. 창조사역이나 구원사역에 모두 함께 하신다. 그러나 경륜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의 기반을 완성하셨고, 성령 하나님이 성자가 완성하신 구원사역을 적용하신다(엡 1:3-14).

 

성령 하나님은 당연히 인격체이시지만 사역을 하실 때는 능력으로 임하셔서 사역자들에게 사역할 능력을 주신다. 한 성령이시지만 성령 하나님이 사람들의 구원에 관련된 사역을 하실 때는 ‘인격체’로 역사하시지만 사람들에게 사역을 하실 때는 ‘능력’으로 임하신다. 통상적으로 전자를 ‘인격체이신 성령’(Holy spirit as Person), 후자를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이라고 부른다. 또는 구분의 편의상 전자는 ‘구원적 성령’ 후자는 ‘사역적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 참조 :

“[신학검증(2)]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론 비판(1)” 「글로리아타임스」. 2017.6.18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7 

“[BOOK·인물] 정이철의『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비판.” 「글로리아타임스」. 2016.1.31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07

“[신학검증09] 성령 세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1). 「글로리아타임스」. 2017.8.20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06

 

 

구원적 성령 :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

 

‘구원적 성령’은 내주하시는 성령이다(고전 12:13; 롬 8:11 등).
신자 안에 거주하시면 구원과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이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받는다(갈 3:2; 고전 12:3).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신자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과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여 부부 관계, 부모 자녀 관계 및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좋아진다(엡 5:18-33; 6:1-9).

 

신자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갈 5:18-26). 그러나 신자가 죄를 지으면 내주하시는 성령은 근심하시고(엡 4:30), 세상을 사랑하면 내주하시는 성령이 시기하신다(약 4:5).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마침내 부활한다(롬 8:11).

 

 

사역적 성령 : 경험적이고 사역적인 성령

 

구원적 성령은 모든 신자가 받는다. 그러나 사역적 성령은 모든 신자가 받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 많은 오해와 갈등이 일어난다.

 

“한 성령이 나누어지셨는가?”

“성령이 물건인가? 받았는데 왜 또 받아야 하는가?”

“그게 어떻게 성령의 역사인가, 인간의 심리현상이나 마귀현상이 아닌가?”

“특수한 몇 사람이 체험하는 성령 체험을 왜 지나치게 강조하는가?”

 

한 성령이 나누어지신 것이 아니라 한 성령이시지만 역사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성경 기록대로 해야 한다. 인격체이신 성령은 신자의 중생, 성화 및 부활에 관련되어 일하시지만 사역적 성령은 신자가 하나님 나라 일을 하는 것-전도, 치유, 축사 등-에 관련되어 일하신다. 즉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 사역적 성령이다.

 

성경에 보면, 구약에서는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출한 지도자, 선지자 및 사사들에게 사역적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시작으로 모든 육체-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셔서(행 2:17-18), 하나님 나라 일을 능력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게 하신다.

 

신약에서 사역적 성령은 성령 하나님이 나누어주시지만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너희는 더욱 큰 (초자연적) 은사(들)를 사모하라”(고전 12:31).

“사랑을 추구하며 (초자연적) 신령한 것들을 (간절히,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사역적 성령은 비록 성령 하나님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지만 주로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나누어주신다. 성경은 어는 한 구절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관련된 구절을 모두 살펴본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 6:32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자의 간구를 통해 주신다. 다른 다음 장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마 7:7)고 하시지 않는가? 더군다나 이 단어들은 ‘한번 구하고 말라는 말이 아니라 응답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구하라’는 말이다.

 

누가복음은 끈질긴 간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기록한다.

누가복음 11장에 서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떡 세 덩이를 얻으러 온 친구 비유를 통해, 자신이 구하는 것을 간절하고 끈질기게 구하라는 교훈을 주신다. 그러시면서 13절에서 사역적 성령도 이런 마음으로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면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사역적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가를 보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

 

구약의 사사들에게는 대부분이 경우 성령이 주권적으로 임하셨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삿 2:1).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삿 6:34).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삿 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삿 14:19).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삿 15:1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행 4:8).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여기서성령이 주권적으로 사사들에게 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하게 하셨다. 삼손에게는 성령이 여러 번 임하였고, 때로는 강하게 임하기도 했다. 베드로와 바울에게도 성령이 여러 번 임하여 충만하게 했다. 오늘날에도 사역적 성령이 이렇게 임하신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임하시고 임하실 때 마다 강도가 다르게 임하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은혜의 도구들’ 즉 말씀, 기도, 찬양이나 사람 및 매체를 통해 임하신다.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는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성령은 예수님의 약속이지만 제자들은 입만 벌리고 멀뚱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사도 시대 이후에 표적과 기사가 중지되었다는 사이비신학을 신봉하는 기적중지론자(은사중단론자)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고만 하면 성경적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지만 사람이나 매체를 통해 하신다고 기록한다.

 

오늘날에도 사역적 성령을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는 자가 많다. 물론 기도 안에는 간구기도, 회개기도 및 금식기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구할 마음이 없는 걸 보니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가 보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기적중지론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에는 내가 기분이 나든 나지 않든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2;31; 고전 14:1; 눅 11:13).

 

그런데 다음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나는 아무리 사모하고 구해도 못 받았다. 그러므로 그런 성령은 오늘날 교회에는 주시지 않는 것인가 보다. 기적중지론이 맞나 보다.”

 

필자는 이런 사람들 심정을 이해한다.

이웃 김 집사나 박 집사도 쉽게 받는데 나는 아무리 간절하게 사모하고 구하여도 받지 못하면, 나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사람처럼 비참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필자도 초기에 방언과 신유 및 출사 은사는 쉽게 받았지만 안수사역 은사는 쉽게 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에 거주하면서 10년 이상을 은사사역 현장을 쫓아다녔다. 좋다는 책을 다 읽어보았다.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 같은 적막한 기분만 들었다.

 

그래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시지 않았다. 어떤 책은 ‘당신 마음에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표시다’는 말이 너무나 위로되어 좌절하지 않고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받았다.

 

물론 쉽게 받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처럼 쉽게 받지 못하는 분야도 있다. 요즈음은 은사사역이 대중화 되어 이런 성령을 상대적으로 쉽게 받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듣기나 환상은 구하지도 않았는데 철저하게 회개하는 동안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아직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간절히 사모하고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 마다 받는 시기가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붙잡고 실망하지 말하고 떡 세 덩이 얻으러 온 친구처럼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를 해 볼 것을 권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한 사람 편에 서서 인간적으로 위로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위로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받은 사람이 별난 사람이고 못 받은 사람이 정사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 문제다.

 

“받았으면 너 혼자 누리지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거나 강요하지 말라(?)”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세계적인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비판 속에는 어느 정도의 분노와 앙심이 서려있다. 그들의 주장 속에는 못 받은 것에 대한 자괴감과 받은 자에 대한 시기도 있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잘 한 사람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가? “내가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받았다. 너도 해봐라. 성경에 있지 않느냐?”는 말도 못하는가? 그러면 왜 성경에 있는가?

 

사람들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가 가졌으면 객관적으로 말하는 그 자체도 시험 거리’가 된다. 이런 경우, ‘아 나도 저런 좋은 것 가져야겠구나. 나라고 해서 못 가질 것 뭐 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그런데 여우와 신포도 비유처럼, ‘내가 갖지 못한 걸 보니 저것 잘못된 거야’라면서 대적하고 폄하하는 것은 잠방이처럼 속이 좁은 사람이다.

 

또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 가치를 몰라서 버린 후 은사 대적자로 돌아 선 자들도 더러 있다. 이런 자들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물론 우리는 형제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잘난 것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해서 받았으니 너도 이렇게 해서 받아보라’는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98년에 박세리가 권위있는 US오픈 여자 골프대회에서 역전승 했을 때 많은 소녀들이 미래의 박세리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다. 지금 수많은 한국 여자들이 세계 여자 골프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은사 비판자의 논리대로 한다면, “박세리는 잘못된 본보기다. 왜 혼자 저렇게 잘 쳐서 못 치는 수많은 사람 주눅 들게 만드는가?”

 

하나님이 사역적 은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 일을 하기 위한 것이지 개인의 자랑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누구 보다 강조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구한다고 다 주시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는 주시고 누구에게는 안 주시는 것은 하나님 마음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사람을 비판하는가?

받은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기쁘신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을 비판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인간적으로 측은한 마음에서 못 받은 사람 편 드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요즈음 사드 배치 문제로 인해 심통이 난 중국이 힘 센 미국은 건드리지 못하고 힘 약한 한국만 건드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경은 분명히 사역적 은사를 구하라고 하셨다(고전 12:31; 14:1; 눅 11:13). 이것은 특정한 신자가 아니라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자 명령이다. 그러므로 구해서 받은 사람은 교만해서도 안되지만, 구했지만 받지 못했다고 해서 사역적 은사 자체를 비판하거나 받은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을 소멸하거나 모독하는 중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비판자들은 자중하기를 촉구한다.

 

특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와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서 성령 체험을 폄하하고 성령 사역을 마귀 사역이라 정죄하는 예장 고신의 고신대 교수인 박영돈은 이점에 주의하기 바란다.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을 받는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교회사를 보면 영국의 부흥을 주도한 요한 웨슬리,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조지 휫필드나 조나선 에드워즈의 설교 중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통곡하고, 떼굴떼굴 구르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요한 웨슬레, 가까이로는 로이드 존스 목사 등 모두가 어노인팅을 받은 설교자들이다. 로이드 존스의 자서전인 『첫 사십년 에 보면 존스 목사가 처음으로 큰 은혜를 받고 웨이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방송 설교를 하자 사람들이 그 설교를 전파로 듣고는 회개하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는 또한 평범한 존 리빙스턴 목사에 대해 기록한다.

리빙스턴 목사는 커크 지방에서 주말 내내 부흥회를 인도한 후 상당히 지쳐서 월요일의 설교를 부탁 받고 들에서 묵상하던 중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께서 도망가지 말고 가서 설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는 에스겔서 36장을 본문으로 하여 1시간 반 가량 설교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1시간 더 설교했다. 그랬더니 500명이나 회개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Martin Lloyd –Jones, Revival, 115-16).

 

우리 모두가 휫필드가 아니고 스펄전이 아니고 로이드 존스가 아니지만 말씀 사역이나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신학교나 설교 세미나에서 설교학을 통해, 설교의 논리성, 설교의 구성, 또 더 나아가서 발성법과 발표술과 같은 설교술(homiletics)은 자세히 가르치지만, 성경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신학적으로는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성령의 역사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 결과 성도들 또한 성령에 대해 말하면 ‘말씀’이 아니라 ‘체험’을 강조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찬양을 통해 성령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3, 14).

 

“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왕하 3:15-16).

 

요즈음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찬양은 설교를 잘 듣기 위해 마음밭을 경작하는 ‘준비 찬송’ 정도로 이해한다. 아직도 많은 전통적 교회는 예배라고 하면 설교를 연상한다. 물론 예배에서 설교는 중요하다. 그러나 찬양도 중요하다.

 

전통적 교회에서는 청년들이나 찬양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반영하여 정기 예배 때는 찬양과 경배를 먼저 한 후, ‘본 예배’(?) 순서로 들어간다. 그러나 은사적 교회에서는 설교 못지 않게 찬양도 중요하다. 찬양 중에 하나님의 성령애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찬양은 또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고 질병과 심령을 치유한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니라”(삼하 16:23).

 

기름부음 있는 찬양을 제대로 부르면 마음과 몸이 치유되고,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의 감미로운 임재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예언의 영, 치유의 영 강하게 임한다.  찬양을 통해 누구나 쉽게 기름부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기도는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지만 찬양은 ‘용사이신 하나님’이 적과 싸우시게 한다(사 42:12-13; 시 149:6-9; 출 15; 수 6:16; 삿 5; 계 19:1-8).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7-18).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요즈음은 안수사역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한 경우가 많다. 오순절 운동의 초기만 해도 안수사역을 드물었다. 그 당시는 구하기만 해도 방언이나 은사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안수를 통한 성령 나눔(임파테이션)(롬 1:11) 사역이 은사사역자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참고 자료 :

“[성경Q&A]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 「글로리아타임스」. 2014.6.3.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3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역적 성령을 나누어주신다.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가지 방법에 매여서 다른 방법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적 태도가 아니다.

 

 

정이철의 엉터리 성령관

 

그런데 정이철은 “기도, 금식, 회개, 정성으로 성령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라고 주장한다.

 

자료 참조 : 정이철, 「바른 믿음」. 2017.10.3.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972)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배우는 것 외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게하는 안수기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성령을 받게하는 안수기도가 존재한다면 기독교의 성령은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고수들의 장풍으로 전락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상고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는 방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

첫째, 성령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순간 성령이 그 사람들 속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끌어오는 찬양, 조명, 안수기도, 회개, 특히 성령을 향하여 집중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기법 등으로 성령이 인간에게 내리게 한다는 발상은 기독교에서 벗어나는 잡설입니다.

…………………………

이 시간 이후로 성령을 받게하는 안수, 기도, 금식, 특별수련회, 회개, 성화로 인간이 성령을 오게하는 방법이 없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정이철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아직도 ‘구원적 성령’ ‘사역적 성령’을 구분하지 못한다.

 

정이철은 사역적 성령을 받는 다양한 방법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사도행전 10장의 구절-말씀 듣는 중에 성령 받음-만 곶감 빼듯이 쏙 빼어서 자기 주장만을 증거하는 ‘말씀 사기꾼’이다.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만 해도 기도를 해서 세 번(눅 11;13; 행 1;14; 4:31), 안수 통해 성령 받은 경우는 세 번이고(행 8:17; 9:17; 19:6), 말씀 통해 받는 경우는 한 번인데(행 10:44), 한 번만 받는 것은 성경적이고 다른 세 번은 비성경적인가? 그렇다면 다른 성경 구절들은 성경이 아닌가?

 

이렇게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면서도 어떻게 자기가 말씀 사역자라고 큰 소리치는가?

정이철과 뒤에서 사주하는 서철원은 더 이상 수많은 성도들을 미혹하지 말고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자숙하고 교계에서 퇴장하라. 더 이상 성령 소멸죄와 성령 모독죄(가능성)를 짓지 말고 퇴장하라. 그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요 한국 교계를 살리는 길이다.

 

그리고 한국의 일부 교단들은 더 이상 미치광이 같은 정이철의 농단에 휘둘리지 말기를 권면한다. 교단이 무오류하고 무소불위한 것은 아니다. 교단도 사람의 모임이다. 성령 소멸이나 성령 모독(가능성)을 주도하는 자들은 사람 앞에서는 잘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이철만의 잘못은 아니다.

교회사를 통해 크리소스톰-전기(前期) 어거스틴-장 칼뱅-3대 개혁신학자(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벤자민 워필드)-루이스 벌콥-안토니 후크마-에드윈 H. 팔머- 리차드 개핀-제임스 던-O. 팔머 로벗슨-싱클레어 퍼거슨-존 맥아더-행크 해너그라프-서철원-이승구-김재성-박영돈 등과 같은 쟁쟁한(?) 기적중지론적 개혁신학자들이 500년 동안 공들여서 다듬어 온 헛된 주장의 희생자일 뿐이다.

 

자료 참조 : “[신학검증(1)] 기적중지론은 사이비 신학이다.” 「글로리아타임스」. 2017. 5.27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2

 

 

어떤 사람은 칼뱅만큼 성령을 강조한 사람은 드물고 칼뱅이야 말로 ‘성령 신학자’라고 극찬(?)하지만 칼뱅은 성령의 두 축인 ‘구원적 성령’과 ‘사역적 성령’ 중에서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는 무시했기 때문에, 성령 신학자라기 보다는 반(反) 성령 신학자라로 불려야 마땅할 것 같다. 칼뱅이야 말로 당시 로마 천주교를 대적하기 위해 반(反) 성령은사론을 체계화 하고 대중화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칼뱅의 기적중지론을 신봉한 유럽 교회는 거의 망했고 미국의 칼뱅주의 교단들은 극소수의 영세 교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서철원 같은 골수 기적중지론자에게 줄을 잘못 선 정이철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아직도 망하게 하는 신학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있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하루 빨리 회개하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길 촉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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