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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구원론 02] 하나님은 원맨 쇼 하는 분이신가?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우선권이나 기회이지 운명이 아니다
구요한 목사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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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5  17: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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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적구원론 02]

 

하나님은 '원맨 쇼'(One Man Show)하는 분이신가?

-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우선권이나 기회이지 운명이 아니다-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은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Once Saved Always Saved(OSAS).’
A believer should work out his/her salvation to the end through faith by God’s grace.
   
▲사람의 행위에 따라 진노하시거나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임신 될 아이가 택함을 받았다면 임신되게 해주시고,
택함을 받지 않았다면 임신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정론을 믿는 부모라면 임신하기 전에 이렇게라도 기도해야 할 것 같다. 택함 받지 못한 자녀가 태어나면 그 자녀는 지상에서 잠시 살다가 영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영원한 선택에 의해, 구원 받을 선택자와 구원 받지 못할 유기자-버림받을 자-를 미리 정하신 후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의 타락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선택자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셨기 때문에 유기의 일차적 원인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죄는 이차적 원인이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 마르틴 부처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이것을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한다. 이후 화란에서는 칼뱅의 무조건적 선택에 반발하여 조건적 선택을 들고 나온 자가 있었는데 그는 칼뱅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의 제자인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이다. 이후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면 칼뱅주의자로 분류되고 구원 상실을 주장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되어 이 두 주장이 현재 개신교 구원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자에는 칼뱅의 무조건적 선택과 예정을 인정하면서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고전적 칼뱅주의’,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예정은 부인하고 조건적 선택과 예정을 주장하면서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온건한 칼뱅주의’가 있다. 후자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중도적 입장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 ‘웨슬리안 아르미니우스주의’ 등이 있는데 이들은 신자의 구원 상실을 인정한다.

 

이들 모두가 복음주의자들이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 의지를 허용하셨는가에 대한 견해 차이에 따라 구원 상실 여부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Stanley N. Gundry, series editor, Four Views on Eternal Security(스탠리 건드리 편집, 『한번 받은 구원 영원한가』,부흥과개혁사, 2011)는 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나 ‘성도의 견인’에 대한 다양한 견해에 관심 있는 분은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칼뱅의 이중예정론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후계자들은 후택설 즉 ‘타락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을 주장했다. 후택설은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구원 받을 자는 선택하여 구원을 받도록 예정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그냥 방치 또는 유기하였다고 주장한다. 아담 이후 모두가 죄인인데 이중에서 하나님이 몇 명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죄값을 치르도록 유기하셨다, 방치하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하여 칼뱅의 이중예정론은 타락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 즉 전택설에 해당된다.

 
 

칼뱅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회심 후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바꾸었다. 어거스틴은 전기(前期)에는 이단적 기적 주창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기적중지론을 주창했지만 후기(後期)에는 친구의 불치의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것을 목격한 후 기적계속론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또한 전기에는 조건적 예정론자였으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후기에는 무조건적 예정론자로 변신했다.

 

칼뱅은 기적중지론은 전기 어거스틴을 계승하면서 무조건적 예정론은 후기 어거스틴을 계승했다. 칼뱅의 이러한 결단은 당시 주적인 천주교를 대적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는 기적을 인정하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칼뱅주의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고전적 칼뱅주의를 따르는 보수 장로교회는 한국 장로교의 친정 격인 북미주-미국과 캐나다-에서 군소교단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북미주 개신교 교인 수 8000~9000만 명에 비하면, 고전적 칼뱅주의를 고수하는 보수 장로교단의 교세는 겨우 52만 명에 불과하다.

(참고 자료 :

https://en.wikipedia.org/wiki/North_American_Presbyterian_and_Reformed_Council

 

 

칼뱅의 기적중지론을 고수하는 교단들도 전 세계적으로 쇠퇴 일로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칼뱅주의가 비판하는 은사적 교회들은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전 세계 교회의 상황이 이런 데도 칼뱅주의 예정론과 기적중지론을 고수해야 하는가?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추어 장로교 대국인 한국에서는 신학적으로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기적계속론 입장에서 다양한 은사사역을 받아들인 보수 장로교단들이 대형 교단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일부 수구적 군소 장로교단이 아직도 하나님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 눈을 감은 채 꼬장꼬장하게 기적계속론을 대적하고 있다.

 

칼뱅의 예정론도 김세윤 박사(총신대 교수 역임. 풀러신학교 교수)나 최갑종 박사(예장 백석대 총장)의 ‘유보적 칭의론’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 총신대 교수를 역임한 신성종 박사도 「내가 본 지옥과 천국」에서 신자의 구원 상실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예정론은 신자의 구원 상실을 부인하지만 유보적 칭의론은 신자의 구원 상실을 인정한다. 이처럼 한국의 장로교회도 순수한 칼뱅주의가 아니라 혼합적 신학체계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신학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다. 신학은 시대적 요청에 의해 생겨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에 변하는 시대에 따라 성경에 의해 계속 재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수와 수구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보수는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고 수구는 진리 여부 보다는 옛것을 고수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신학이 변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처럼, 이전의 하나님의 사역으로 현재의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꼴이 된다. 보수를 자처하는 수구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요약하면, 고전적 칼뱅주의 구원관은 무조건적 선택과 무조건적 구원이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후 선택 받은 자는 모두 구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 의지나 믿음은 필요하지만 구원 전체는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주도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주장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한다.

 

 

사람의 행동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

 

 

만일 이중예정론이나 타락후 선택설이 주장이 옳다면, 왜 하나님이 사람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실까? 창세 전에 구원 받을 자와 못 받을 자를 선택하고 미리 정하셔서 누가 구원 받고 누가 버림 받을까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는가?

 

사람은 누가 선택되었는지의 여부를 모르니까 누구에게나 전도해야 한다고 치더라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민한 감정적 반응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다. 예정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혼자 ‘원맨 쇼’(one man show)를 하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경을 보자.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후회)하셨다.

 

창세기 6:5-7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후회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후회함)이니라 하시니라



‘한탄하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함’은 ‘한탄하다’, ‘취소하다,’ ‘후회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선택자와 유기자를 예정하신 하나님이 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고 후회하시는가? 어차피 유기자는 죄를 짓다가 멸망될 자들 아닌가?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 없는 분이므로 이 말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탄식과 실망과 안타까움을 표시한다고 한다(신인동형동성론).

 

그래도 그렇지, 예정론자의 주장이 옳다면 모든 것을 다 정해놓으신 하나님이 인간이 죄 지을 걸 뻔히 아시면서 실제로 죄를 지으니까 한탄하시고 후회하셨다는 것이 앞뒤가 맞는 소리인가?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서는 조금 후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후회’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유지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출애굽기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신명기 7:7-11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예정론자들은 신명기 7:7-8만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고 주장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선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9~11절에 ‘순종’이란 조건이 첨가되어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출애굽기 19:5에도 분명히 ‘순종’이란 조건이 첨부되어 있다. 그런데 예정론자들은 이런 조건적 구절들은 무시하고 ‘무조건적 선택’과 ‘무조건적 구원 보장’만 강조한다.

 

그러면서 일부 예정론자들은 조건은 구원 탈락 여부가 아니라 축복과 상급에 관한 구절이라고 해명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1세대가 말씀에 불순종하여 심판을 받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다가 죽어간 것이 축복과 상급만을 상실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전멸하려고 하셨다.

 

출 32:7-10, 14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13. (모세의 중보기도)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히브리어 ‘나함’)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10대 재앙을 경험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홍해의 기적과 엘림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십계명과 성막을 통해 지켜야 할 법도와 하나님 예배 방법을 부여받은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자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탄생시키려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의 중보기도로 뜻을 돌이키셨다(후회하셨다). 여기에 히브리어 ‘나함’이 사용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비록 선택된 백성이지만 불순종하면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진노’의 표시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로 진멸의 뜻을 돌이키셨다. 예정론자들은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죄인들이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요 17:12, 15, 20; 요한일서 2:1).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으시는 데도 한계가 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가나안 정복 소명을 거절한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셨다. 이때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내려고 하셨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로 출애굽 1세대만 멸망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며불며 회개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민수기 14:11-12, 36-38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

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으로 인도할 자를 미리 정하셨는데 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시느냐는 것이다. 예정론이 옳다면 ‘이 놈들, 때가 되니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라면서 심판하시면 되지 왜 진노하시면서 모욕감을 드러내시고(11-12절), 왜 모세의 중보기도에 따라 생각을 바꾸시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죄 짓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는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었다면, 왜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시로 진노하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는가? 누가 선택자이고 누가 유기자인 것을 선택하여 예정하신 하나님이 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수시로 진노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시는가?

 

왜 신약에서는 신자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것에 대해 그토록 강하게 경고하는가?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전 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6:4-6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서 10:26-29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예정론자나 영원한 보장론자들은 이런 구절들은 애초에 구원 얻는 믿음이 없는 ‘가짜 신자’이거나, 지상 축복이나 하늘 상급을 잃어버린다는 것에 관한 구절이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구절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가상적 경고’나 ‘가상적 상황’에 대한 것이지 실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특히 신약의 서신서는 신자에게 보낸 편지다. 불신자나 가짜 신앙인은 어차피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전도가 필요한 것이지 이런 경고가 필요 없다. 어차피 지옥 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신서의 이런 경고는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에게 하는 경고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이 왜 신자들에게 구원 상실 가능성에 대해 이처럼 여러 군데서 엄하게 경고하는가? 만일 그들이 불신자라면 경고가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지옥 가기로 예정된 자들인데 경고가 왜 필요한가? 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성경에 쓸데 없는 것을 기록하시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도 구원 받았는가?

 

위에서 밝힌 것처럼 예정론자들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무조건적 선택의 증거 구절로 제시하면서 유지에 따르는 순종의 조건에는 침묵한다(출 19:5 및 19:6;  신 7:6-8 및 9-11). 이게 무슨 제대로 된 성경 해석인가? 성경 해석이 무슨 곶감 빼먹듯 유리한 것만 인용하고 불리한 것은 버리는 것인가?

 

필자도 예정론에 의한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론’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늘 갈등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이다. 그렇다면 심판 받고 죽어간 출애굽 1세도 축복이나 상급은 잃어버렸지만 구원은 받은 것인가?

-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았지만 거듭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고 자살한 사울 왕도 구원은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은?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및 백성들은?

 

많은 예정론자들은 광야의 출애굽 1세대도 구원을 받았고 사울 왕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악한 왕들은 이 땅에서 받는 축복과 저주(징계)의 사례로 제시하지만 그들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잘 언급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이 축복이나 상급 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그토록 진노하시는가? 그것이 왜 그토록 하나님께 중요한가? 그것은 축복이나 상급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영벌이 되기 때문에 진노하신 것 아닌가?

 

 

덧붙여서, 예정론자들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을 선택하시고(12~13절), 모세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바로는 완악하게 만드신 것을 무조건적 선택의 증거구절로 삼는다(15~18절).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구절들은 ‘구원’이 아니라 ‘소명’에 관한 구절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르심에는 구원으로의 부르심과 소명으로의 부르심이 있다. 하나님은 구원으로 부르시는 자에게 동시에 소명을 주신다(엡 2:8-10). 이 둘은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관련 구절을 찬찬히 읽지 않으면 금방 헷갈려버린다. 그리고 때로는 성경이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한꺼번에 기록한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이나 바울의 회심과 소명이 대표적이다(창 12:1-3; 행 9:3-5, 17-20; 22:6-11, 14-16; 26:13-18).

 

그런데 로마서 9:21은 하나님이 쓰실 ‘그릇’에 대해 기록한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 모세와 바로에 대한 기록은 ‘구원’이 아니라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으로 보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은, 이 구절들은 에서나 야곱 ‘개인’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선택이라는 주장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은 나중에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에 관한 구절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설령, 에서와 야곱의 선택이 개인의 구원에 해당되는 구절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을 수도 있다. 그들이 뱃속에 있으면서 어떤 행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생각과 앞날을 하나님이 모두 아시기 때문이다(시 139:1-16 참조).

 

결국 예정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 여부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결정한다는 그 가정 하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순종과 불순종 여부의 결정권을 허용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런 자유 의지를 허용하셨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를,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자기들의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성경 전체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렇게 기뻐하시는가?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어느 나라의 부자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눅 15:11-32).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이방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 돈이 떨어지고 고생이 심하자 스스로 돌이켜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 나간 아들이 귀가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본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해서 체통도 무시하고 달려가서 포옹하고 키스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최고의 잔치를 베풀어서 함께 즐거워했다.

 

이 앞 절에서 성경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 잃어버린 드라크마(동전)를 찾은 여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죄인 하나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 10).

 

예정론자에 의하면 이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행동이 아닌가?
구원 받은 자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행동이 아닌가? 비록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선택자는 어차피 때가 되어서 회개하고 돌아온 것뿐인데, 왜 하나님은 이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반가이 맞이 하시는가?

 

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가? 어차피 그들은 선택된 백성이므로 때가 되면 당연히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로 모아지지 않는 것에 대해 그토록 안타까워 하시는가?

 

마태복음 23: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바깥 어두운 곳이 상급 좀 덜 받는 곳인가?

 

마태복음 8:10-12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태복음 22:12-13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5:29-20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한번 구원론자들은 이 구절들을 신자가 상급 좀 덜 받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바깥 어두운 곳이 천국의 변두리인가? 아니다. 천국은 밤이 없는 곳이다(계 21:25). 그러므로 이곳은 지옥이다. 이들은 지옥에서 괴로운 고통과 격앙된 분노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가는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마 8:12), 하나님의 구원 초청을 받았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즉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마 22:12-13),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숨겨놓고 게으름 핀 악한 종이 간다(마 25:30).

 

어차피 지옥 가기로 선택되고 예정되었다면 왜 마지막에 가서야 예수님은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고 이를 갈리라’고 책망하시는가? 창세 전에 그곳에 가도록 예정된 자들이 아닌가?

 

 

-한번 선택하시면 후회하심(취소하심)이 없으신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후회(변개, 취소)가 없으신 분이라고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후회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그런데 또 다른 구절들은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기록한다.

 

창 6:5-7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후회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후회함)이니라 하시니라

 

삼상 15:11, 35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여기에 사용된 ‘한탄하다, 후회하다, 탄식하다’(창 6:6, 7 참조)는 말은 히브리어 ‘나함’이고 헬라어 ‘아메타멜레토’이다. 히브리어 ‘나함’을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은 ‘아메타멜레토’라는 단어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가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아메타멜레토)이 없다’(롬 11:29)에 사용되었다.

 

우리는 상반되는 두 종류의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후회하심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이 후회하신 행동은 사람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신 하나님의 반응이다. 사람이 순종하면 복과 영생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징계와 영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속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변개하심(후회하심, 취소하심)이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에 의한 뜻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한탄하시거나 후회하셔서 뜻을 바꾸시거나 취소하기도 하신다.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이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서 사람의 타락이나 배반 또는 불순종 등에 대해 가지시는 감정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화한 표현(신인동성동형론)으로 해석한다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후회’라는 말을 해석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인가 하나님의 반응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거듭 불순종하자 그들을 제치시고 이방인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그 악한 자들(유대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이방인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 21:41; 막 12:9; 눅 20:16 참조).

 

하나님은 비록 유대인들이 선택 받았지만 불순종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마저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례 없이 진노하셔서 구원의 기회를 이방인에게 주시고 이스라엘에게는 오랫동안 구원받을 기회마저 닫아놓으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유대인을 온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의 분량이나 기간이 차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그들에게 다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롬 11;25-26). 요즈음 메시아닉 유대인들(유대인 크리스천)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과 1970년에 유대인이 대거 회심한 것이 바로 이 때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다’(롬 11:26)고 주장한다. 이들이 선호하는 구절은 로마서 11:29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취소하심)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만 구원하신다.

 

희한한 것은 메시아닉 유대인이나 예정론자들이 로마서 11:29을 인용하면서, 한번 선택이나 예정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잘못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로마서 9장~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거듭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자’ 즉 믿음으로 따라올 자만 구원한다고 주장한다(롬 9:24, 29; 10:11-12).

 

선택은 기회나 우선권이지 운명이 아니다.
그런데 메시아닉 유대인은 이 한 구절에 집착하여 성경의 모든 다른 구절들이나 사례들은 무시하고 ‘문자적으로 모든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국가적으로 선택 받았기 때문에 ‘모두’ 단체적으로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잘못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70년 대 이후에 ‘모든 유대인’이 구원을 받았는가? 그리고 19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생활을 할 때 ‘모든 유대인’이 구원을 받았는가? 아니다. 비록 유대인이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는 자만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예정론자는 메시아닉 유대인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 선택되고 예정된 사람은 모두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렇게 둘 다 선택과 예정이란 단어에 집착하여 붕어빵 같은 주장을 하는지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동일한 주장을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유지하는 데는 조건이 따른다는 구절들은 아예 내팽개쳐버리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들은 선택과 예정이란 단어를 엿가락처럼 주~욱 늘려서 선택된 모든 사람은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른 성경책들은 왜 있는가? 메시아닉 유대인에게는 ‘선택’ 구절이 있는 출애굽기나 신명기, 예정론자에게는 로마서와 에베소서 및 자기들 주장을 지지해주는 요한복음의 특정 구절들이나 기타 몇 개만 성경인가? 다른 성경들은 들러리인가?

 

메시아닉 유대인이나 예정론자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덜 분명한 구절은 더 분명한 구절로 해석’하는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선호하는 몇 구절들을 상반되거나 의미를 제한하는 다른 구절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고, 그 구절들만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성급하게 다른 구절들에게 무리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론자들’도 특별히 선호하는 구절이 있다.

 

딤후 2:11-13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영원한 보장론자는 13절을 무리하게 확대해석하여, 한번 믿은 사람은 살인하고 간음하거나 심지어는 예수를 부인하는 배교를 저질러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록 신자가 하나님을 부인해도 ‘자기를 부인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부인하시지 않는다’고 왜곡한다.

 

그러나 바로 앞의 구절에서는 “우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13절에서 ‘주님이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는 말은 주님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주를 부인하는 자는 주도 부인하시고 주를 시인하는 자는 주도 그를 시인하신다’는 속성을 하나님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해석에 의한 영원한 보장론이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유명한 설교가인 존 맥아더  찰스 스탠리 데이빗 윌커슨, 변증가인 데이브 헌트노만 가이슬러, 기적중지론자인 행크 해너그라프 등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기적중지론을 변호하는 이단 감별사 3인방-맥아더, 헌트 및 해너그라프-이 모두 영원한 보장론자들이다.

 

물론 그들도 열매 맺지 못하는 자는 애초에 구원 받지 않은 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들 치고 교회생활 하면서 자기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도 이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지라도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론’이 신자들에게 신종 면죄부가 되고 있다. 교인들에게 간음과 음란, 거짓과 불법, 탐욕과 교만은 보편화 되어 있고, 종교 재벌과 학교 재벌이 호의호식을 누리면서 교계나 교단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비난 깜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물론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고 정하신 것에 후회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끝까지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메시아닉 유대인과 예정론자들 및 영원한 보장론자들은 이것을 오해하여 사람이 아무리 불순종해도 후회 없으신 하나님이 끝까지 강제로라도 구원하신다고 잘못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보더라도 그런 사례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불순종하면 경고, 책망, 징계를 통해 심판의 수위를 높이신다. 레위기 26장은 징계의 수위를 7배씩 4번 높이시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도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으면 버리시거나(계 2~3장의 7교회), 스스로 믿음에서 떠나도록 유기하신다(살전 4:8; 딤전 1:19; 3:8; 4:1; 5:12등).

 

 

결론

 

만일 예정론자가 옳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하나님의 극한 감정적 반응은 ‘원맨 쇼’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예정하신 하나님이 불순종하거나 순종하는 자들에 대해 그토록 감정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실 필요가 어디 있는가? 당연한 듯 쿨(cool)하게 반응하셔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감정적 반응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무조건적 선택과 예정으로 인해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실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선택되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 및 순종이라는 조건이 따른다. 또한, 하나님은 노아와 고넬료의 경우에는 선행을 보고 선택하셨다(창 6:8-9; 행 10:1-22). 조건적 선택이다.

 

하나님이 비록 창세 전에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고 예정하셨더라도, 사람의 타락 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타락한 사람이 구원 받을 기초를 마련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끝까지 믿음을 유지하는 자는 구원하시고 비록 믿었더라도 중도에 탈락하거나 구원을 잃어버릴 만큼의 죄를 지은 자는 버리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선택과 예정은 사람에게 제공되는 구원의 기회이자 우선권이지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순종과 불순종의 자유 의지를 허용하신 것처럼, 신자에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 의지를 허용하셨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의 행동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죄를 지으면 안타까워 하시다가 정도를 넘으면 진노하셔서 징계하시고,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하시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적인 반응만을 살펴보더라도 ‘무조건 선택과 예정에 의한 무조건 구원’은 성경적 주장이 아니라 천재(?) 신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에서 생긴 비성경적인 주장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비성경적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예정론자들은, 신자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되고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겸손한 마음으로 기쁨과 감사와 확신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변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택 받았다는 교만과 방자함, 나태와 방종으로 흐르고 있다. 종교 개혁이 100년쯤 지났을 때 유럽 교회는 이미 고백은 바르지만 삶이 따르지 못하는 죽은 정통이 팽배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나는 선택되고 예정 받았으니 죄를 좀 지어도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헛된 확신으로 거룩과 변화 보다는 세상 성공과 육신적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더 많다. 신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세상 속에 섞여 살면서 오히려 세상의 지탄과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럽 교회는 이미 한 물 갔고 미국 교회나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나의 소중한 구원을 성경이 아닌 신학자들의 인간적인 논리에 맡겨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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