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구요한칼럼
[구요한칼럼(12)]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2대 적폐기적중지론을 추방해야 양적성장이 일어나고‘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추방해야 내면변화가 일어난다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9.24  23:16:2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구요한칼럼 (12)]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2대 적폐
 

기적중지론을 추방해야 양적 성장이 일어나고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추방해야 내적 성숙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갔다. 다음은 문지기 천사와 그 사람과의 대화다.

 

"어디로 가는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요?"

"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믿는데요?"
"그건 귀신도 잘 믿어(약 2:19)."
 

"교회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도 했는데요?
"그건 바리새인이 더 잘해(마 23장 참조).

 

"예수 이름으로 성공하고 출세했는데요?"
"그건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해.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으로 네가 참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봐."

"............?"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옆의 강도는 신앙을 고백하여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죽어서 낙원에 갔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고백한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은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입술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하고 교회 다니면 참 신자인가? 가짜 신자도 충분히 이렇게 할 수 있다.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론’(이하 한번 구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참 신자라는 사실을 증거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2대 적폐는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론'이다.

 


기적중지론 추방은 필자가 오랫동안 주장해왔지만 ‘한번 구원론’의 추방에는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장로교 신학을 배웠기 때문에 한동안 '한번 구원론'을 주장해왔다. 그런데 여러 통로를 통해 이 주장에 대해 도전을 받았고 또한 성경을 볼 때마다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었다.
 


한번 구원론의 바탕은 하나님의 선택인데 그렇다면 선택된 이스라엘(유대인)은 모두 구원 받았는가?

거듭 불순종 하다가 버림 받은 출애굽 1세대와 사울 왕, 우상숭배를 장려한 여러 왕들, 불순종하다가 심판받고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다가 죽인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백성들, 달란트 숨겨놓고 게으름 피우다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 받고 어두운 데로 쫓겨난 자, 계시록 7교회에서 이기는 자만 누리는 구원의 축복 등. 선택과 예정,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론으로는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었다.

 

 


그러나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론이 어거스틴-(아퀴너스)-루터-칼뱅 라인의 치우친 신학에서 나온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주장에 의문점을 갖고 성경과 개혁주의 조직신학 책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하지만 루터는 칼뱅만큼 이신칭의를 영원한 것으로 강조하지 않았고 루터 사후 루터교는 루터의 동역자인 멜랑크톤의 주장을 따라 이신칭의 받은 신자도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적중지론’과 마찬가지로 ‘한번 구원론’은 몇 가지 성경 구절을 적당히 버무러서 만든 신학 천재들의 인위적 생산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성경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서신학적으로 성경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결론을 낸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유리하거나 선언적인 구절들 몇 개를 지나치게 확대해석 하여 성경의 여러 다른 구절들을 왜곡한 것이다.
 



그들 주장 대로 예정되고 선택된 자만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면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해석상의 암초를 만나고 구원을 잃는다는 구절은 실제가 아닌 '가상적 경고'나 '가상적 상황'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런 잘못된 신학 사상을 따르는 자들이 전세계적으로 교세가 추락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론의 본산인 유럽 교회는 텅 비었고 미국의 이런  교회들도 쇠퇴 일로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적을 인정하는 은사적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에서 장로교 교세는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성공회 및 장로교 순으로 꼴찌다. 한때 장로교의 체면을 유지했던 자유주의 교단인 미국장로교회(PCUSA)가 500만 명 정도의 교세를 유지했지만 몇 년 전 동성애 문제로 교단이 갈라지면서 이제는 교인 수가 200만 명 미만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미국 내 보수 장로교회의 교세는 어떠한가?

필자는 북미주-미국과 캐나다-내에서 칼뱅주의를 따르는 보수 장로교회의 교세를 살펴보았다. 결과는 실망이 아니라 절망 수준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내 보수 장로교단의 연합체인 「북미주 장로교 및 개혁교회 연합회」(NAPARC)에는 13개 교단이 가입해 있는데 전체 교회 수는 3009개, 교인 수는 52만 명에 불과하다.

 

개신교 신자가 8000만~9000만 명에 육박하는 북미주에서 보수 장로교인의 전체 숫자가 52만 명으로 한국의 중형 교단 수준에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중에서 가장 큰 교단은 미주 한국 목회자들도 많이 가입한 PCA교단이 36만 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수십 명에서 3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자료 출처 : “North America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교세 통계는 2010년 및 2012년 숫자.
https://en.wikipedia.org/wiki/North_American_Presbyterian_and_Reformed_Council

 

 

물론 숫자가 전부는 아니지만 왜 북미주에서 사람들이 장로교회에 몰리지 않는가를 고민해 봐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20~21세기는 영성 시대인데 아직도 장로교 신학은 영성사역이나 은사사역을 부인하고 예정론이란 무시무시한 굴레로 사람들의 자유 의지를 노예 의지 수준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라고 본다. 보수 장로교 신학은 이제 시대적 적절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서 교인의 70~80% 정도가 장로교인인가?

만일 한국의 장로교회가 미국의 장로교회처럼 전통적으로 설교나 하고 심방만 했다면 지금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교회는 순복음 장로교회다. 겉으로는 은사운동을 비판하지만 속으로는 장로교 신학에 매이지 않고 은사적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을 재빨리 수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중대형 교회를 보라.

대부분이 찬양과 경배, 중보기도와 철야기도, 각종 소그룹 모임 및 제자훈련 등을 열심히 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장로교회는 순복음 교회 보다 더 앞서서 은사운동의 여러 사역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무늬만 장로교지 속은 은사주의다.

 

이들은 선교단체에서 시작된 제자훈련을 제외하고는 모두 은사운동에서 생긴 사역들을 열심히 도입하고 있다. 만일 대형 장로교단에서 순수 장로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교단 내에서 은사운동들을 축출시킨다면 한국의 장로교단 또한 군소교단이나 영세교단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에 젖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교단도 있고 지조(?)를 발휘하여 지속적으로 이런 것들을 대적하는 교단도 있다. 후자는 자연히 중소교단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의에 차서 은사운동을 대적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장로교단들이 장로교 전통을 유지하면서 은사운동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성장할 것으로 예측한다. 장로교 신자들 중에 교단이나 교회는 옮기고 싶지 않지만 은사나 초자연적 체험을 갈구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구원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선택은 하셨지만 믿는 자만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면 성경 전체가 일관성 있고 매끄럽게 풀린다.

 

예정론자는, 그렇다면 구원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고 하나님은 도장만 찍는 분 즉 사후 추인하시는 바지 사장이냐고 반발할 것이다. 아니다. 사람이 구원 여부를 결정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사람은 기껏해야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껏해야 하나님이 제정하신 단 두 가지 즉 천국과 지옥 갈 결정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순종과 불순종의 결정권을 주셨지만 아담이 불순종하여 타락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켰는가? 전혀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도 마찬가지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죄값을 치르게 하시고, 성령과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 받을 자를 부르신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 아담에게 허용하신 순종과 불순종의 결정권을 사람에게 다시 주셔서 재시험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부르셔서 구원 받을 기회를 주시고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도구들-말씀 기도 등-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모든 도구를 부지런히 사용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다.

 

 

이처럼 한번 구원론자들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타락 이전에 아담이 가진 자유 의지와 연계시켜서 이해했다면 그처럼 기계적이고 절대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타락 이후 자유 의지가 완전히 박탈되었다는 가정 하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예정론을 전개하다 보니 무리한 성경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 의지가 허용되었는가?

 


하나님의 주권파나 사람의 자유의지파 모두 사람의 자유 의지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차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까지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는가 이다. 전자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주셨고 후자는 잃어버릴 수 있는 정도로 주셨다고 주장한다. 후자가 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런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적 구원을 이렇게 정의하면 신·구약 성경 전체가 쫙 풀린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제대로 끝까지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해져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타락한 사람이 어떤 사람은 선택되어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은 유기되어-또는 방치되어-지옥 간다는 예정론은 신학 천재들의 가설이지 성경적 견해가 아니다.


만일 선택론이나 예정론이 옳다면 선택 받은 유대인은 모두 구원 받는가? 예수님을 죽인 종교 지도자나 백성들도 구원 받는가? 그런데 오늘날 메시아닉 유대인(유대인 크리스천)이 이런 주장을 한다.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예정론자처럼 지나치게 확대해석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메시아닉 유대인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구원관과 '한번 구원관'이 붕어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들은 성경의 모든 기록을 거두절미하고 ‘선택’이란 단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다 보니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란 말 자체도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사람의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과는 별개로 작동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자유 의지는 하나님이 위임하신 자유 의지 즉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내의 자유 의지다다. 그러므로 성경적 자유 의지는 ‘재량권’(裁量權. discretionary power)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회사의 사장이 직원에게 특정 업무를 수행할 재량권을 준 경우 직원은 사장이 위임한 재량권 범위 내에서만 사장 업무를 대리한다. 직원 혼자 마음 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두 가지 재량권만 허용하셨다. 사람이 자유 의지로 천국이나 지옥 아닌 제 3세계에는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 상실 여부를 결정하는 재량권을 위임 받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이 두 가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담이 타락을 결정한 것처럼, 전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시대에 적절하지 않은 교리는 추방되어야 한다

 

 

교리도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때는 나름대로 적절성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어지면서 이전의 적절성이 지금은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도 많다.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2대 적폐인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론은 종교개혁가인 칼뱅의 산물이다. 2대 적폐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 나온 수많은 신학적 요구를 아무리 천재라도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이 모두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천주교와 싸우는데 천주교가 주장하는 기적계속론과 구원 상실론을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ABO(Anything but Obama. 오바마 것이 아니라면 다 좋다)는 식으로 전임 오바마 정부의 정책을 모두 뒤집고 있고, 지금 한국의 진보 정권은 지금 전전(前前) 보수 정권의 핵심 정책들을 적폐로 규정하고 흔적을 지우고 뒤집기에 한창이다.

 

 

종교개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ABR(Anything but Roman Catholic. 로마 가톨릭의 것이 아니라면~)이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이 중시하는 성물(聖物)을 우상으로 간주하여 파괴하고, 미국에 이주한 청교도들은 오늘날 찬송에서 당연하게 사용하는 멜로디 있는 노래를 ‘천주교의 찌꺼기’라고 부인했다. 칼뱅이 가르친 대로 시편을 단순히 ‘창’(唱. Chant)하는 것을 모범으로 여겼다.

 

 

로마 가톨릭이 반(反)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영성훈련과 세계선교를 강조하자, 선교와 전도조차 로마 가톨릭의 유산이라며 배척하고, 윌리암 케리(1761~1834)가 세계 선교를 시작할 때까지 선택자는 하나님이 알아서 구원하실 것이라면서 오히려 윌리암 케리를 책망했다.

 

 

다른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수정되고 보완되었지만 지금까지 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2대 적폐가 바로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론’이다. 이 두 가지가 종교개혁 당시에는 나름대로 천주교를 대적하는 무기가 되었지만 이후에는 부메랑이 되어 개신교가 급속하게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명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야 말로 ‘뒤집기의 명수’이시라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한때 쓰임 받았지만 지속적으로 갱신되지 않고 전통과 현상에 안주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들어쓰신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전통을 중시하는 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때 쓰임 받았으니까 영원히 쓰임 받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에서가 불순종하자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야곱을 들어쓰셨고, 사울이 불순종하자 다윗으로 대체하셨고,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자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방인을 들어쓰셨다.

 

 

로마 천주교가 부패하자 종교개혁가들을 들어쓰셨고,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죽은 정통에 빠지자 요한 웨슬리를 들어쓰셔서 영국과 미국의 부흥을 주도하셨고, 이들 또한 답보 상태에 빠지자 20세기 초에 오순절 성령운동을 주도하시면서 지금까지 각종 성령운동을 주도하신다.

 

 

하나님은 먼저 되었다고 교만해서 안주하면 철저하게 다루셔서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게 하시고, 장자가 차자가 되고 차자가 장자되게 하신다. 그런데 전통적 교회는 자기들이 장자니까 만사 형통하고 자기들이 할 일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고 착각하다 보니 차자들에게 밀리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하나님은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실 때는, 전통적이고 학문적인 바리새인들 제치고 무식하고 용감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처럼, 무식하고 용감한 자들을 앞세우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똑똑하고 잘나서 전통과 기득권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신다(고전 1:26-31).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를 알지만 기득권에 젖어있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나 운동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한때 쓰임 받은 칼뱅주의는 이제 하나님의 교회에서 영향력이나 존재감을 상실하고 있다.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 신자들을 나태와 방종으로 내몰고 있다

 

 

500년 전의 거대 담론이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이신칭의)라면 오늘날의 담론은 ‘칭의 받은 자의 삶’이다. 오늘날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은 신자에게 구원의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신자는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신종 면죄부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신자들의 삶이 방종과 불법에 이르러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이제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선교 100년 만에 개신교 신자가 인구의 20%에 육박하고, 선교사 파송수 2~3위를 다투고, 교단 별 세계 최대 교회는 모두 한국에 있다. 또한, 기독교인 중에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사람이 많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과 총리, 대법원장 여당 원내 대표가 장로이고, 야당 대표가 집사이며, 4성 장군의 55%, 180개 대학 학·총장의 70%, 국회의원 35%가 크리스천이었다.

 

 

구제나 봉사도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비해 제일 많이 한다.

장애시설의 66%, 아동보호시설 72%, 노인복지시설의 46%가 기독교이며, 10년간 북한 지원을 3천억 원이나 했다.

 

 

그런데 종교 선호도는 불교, 천주교에 이어 꼴찌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많이 성공하고 봉사와 구제는 많이 하지만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에 안주하여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잘못된 구원관으로 인해, 죄를 지속적으로 지으면 하나님이 경고와 징계를 하시다가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버리신다는 성경의 준엄한 가르침을 망각하고 자신의 정화와 성숙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성경이 말하는 예정과 선택, 이신칭의를 오해하여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고 선택되어 예수를 믿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는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쳐서, 신자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도 살지도 못하고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칼뱅만큼 성화를 강조한 사람도 드물다고 주장하는데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한 성화는 옵션이지 필수가 아닐 수 있다. 요즈음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죄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성화를 열심히 할까?

 

 

칼뱅 같은 독실한 신자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계선에서 왔다갔다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 정도 권면이나 말로는 끄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지 않은가?

 

 

*'영원한 보장', '성도의 견인' 교리는 비성경적이다

 
 

칼뱅주의 구원론은 신학자들이 예정과 선택, 이신칭의, 장로교는 성도의 견인 (침례교는 '영원한 보장')을 패키지로 묶어서 개발한 인간의 신학이다. 모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중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다 쉽게 무너저버린다.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비판하지 않더라도 이중에서 가장 취약한 주장 하나를 쓰러뜨리면 예정과 선택에 입각한 난공불락 같은 칼뱅주의 구원론은 속절없이 무너져 버린다.

 

가장 취약한 분야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다. 성도의 견인이란 신자는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비록 죄를 짓고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견인론과 반대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그중에서도 ‘신자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는 곳은 요한계시록의 7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와 심판이다(계 2~3장). 예수님은 각 교회의 잘한 것은 칭찬하시고 못한 것은 책망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 후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구원의 선물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이기지 못하는 자는 구원의 선물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는 것(계 2:7),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계 2:11), 감추었던 만나와 돌 위에 새겨진 새 이름(계 2:17), 새벽 별(계 2:28),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는 것(계 3:5),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계 3:12),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는 것(계 3:21; 엡 2:5-6)은 모두 상급이 아니라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칼뱅주의자들은, 이런 구절들은 비록 강하게 경고하지만 실제가 아니라 ‘가상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성경이 ‘엄포’는 놓지만 실제로는 ‘허풍’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해석인가? 하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으셔서 성경에 ‘허풍’에 불과한 ‘엄포’를 여기저기 기록하시는가? 예정론자들이 자기들 신학의 안경으로 해석하니까 그런 해석 밖에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외에도 성경에는 죄를 계속 짓는 자는 하나님이 버리시거나(마 7:15-23; 히 6:4-8), 죄인이 믿음에서 떠난다는 구절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딤전 1:19; 4:1; 5:12; 6:19, 21; 딤후 3:8 등). 그런데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론자들은 이 모든 구절들의 주인공은 애초에 참 믿음이 없는 자였거나 아니면 구원을 받았지만 상급을 잃어버리는 정도로 잘못 해석한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애초에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참 믿음으로 구원 받았는지를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도대체 구원을 얻는 참 믿음은 무엇인가? 예정론자의 주장처럼 각종 은혜를 체험하고(히 6:4-8) 기적을 행해도 애초에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면(마 7:15-23), 구원을 얻는 참 믿음은 어떤 것인가?

 

 

*구원을 얻는 참 믿음은 어떤 것인가?

 

서두의 예화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의 신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진짜인가를 성경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성경은, 신자는 매일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여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고후 13:5), 매일 죄의 유혹에 지지 않도록 조심하고(히 3:12-13), 전도나 봉사를 통해 남은 구원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전 9:27)고 기록한다.

 

성경은 신자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갈 5:22-23),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한다(벧후 1:4-11)고 기록한다. 이렇게 하는 자가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참 신자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얼마만큼의 신자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 교인 중에는 탐욕, 음란, 간음, 미움, 등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많은데 예정론자에 의할 때, 이런 죄를 상습적이고 지속적으로 짓는 자들은 애초에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고전 6:9-10; 엡 5:4-6).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고 영생이 그안에 없다고 하는데 교인 중에 배우자나 가족이나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일 3:15).

 

예정론자들은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구절들도 가상적 상황을 염두에 둔 허풍인가?

 

예수님이 신자가 상급 좀 더 받고 덜 받고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해서 그토록 과격하고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가? 상급 좀 덜 받는 자에게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고 어두운 데서 슬피 울고 이를 갈도록 쫓아내실까?(마 25:30). 상급 좀 덜 받는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지 않겠다(계 2:7),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계 2:11),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시는가?(계 3:5).

 

 

그런데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은 이런 구절들을 외면한 채, 신자들을 영적 온실 안에 가두어 놓고 적극적인 영적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 죄에 대한 경각심도 약하고 성화에 대한 적극성도 결여되어 있다. 적당하게 은혜 받고 적당하게 신앙생활하는 미지근한 신앙인, 자기는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니까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고 사는 동안 성공하고 출세나 하자는 세속적 교인(?)을 양산하고 있다.

 

 

필자는 신앙 초기에 성경을 몇 번 통독한 후에, 말씀대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웃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마 22:36-40). 그러기 위해서는 죄와 피나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히 12:4). 물론 지금도 원하는 만큼 하지는 못하지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신자에게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의 동기나 원인이 되는 마음의 동기, 세상이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 부족하지만 순종하려고 발버둥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일한 선행을 해도 하나님 영광 보다 자기 영광이나 세상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필자가 이전에 목회할 때 교회에 대조되는 두 집사가 있었다. 한 집사는 장로급 집사였고 다른 집사는 초임 집사였다. 장로급 집사는 새벽기도와 주일예배 참석, 십일조와 각종 헌금, 봉사와 선교를 잘 하는 집사였다.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은 엘리트 신자였다.

 

초임 집사는 십일조도 하다 말다 하고 거리가 먼 탓도 있지만 겨우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필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장로급 집사를 더 사랑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기도해 보았더니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하나님은 초임 집사를 더 사랑하고 계셨다.

 

왜 그런가 하고 기도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초임 집사는 부족하지만 적은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장로급 집사는 많은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나 사모함이 부족하고, 하나님을 위해 적당히 사용하고 남은 것은 자기를 위해 쓴다고 하셨다. 사람이 보기에는 일등 신자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이들이 겉으로는 일등 신자지만 마음 속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은 없고 탐욕과 시기와 방탕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혹시 어떤 신자인가?
당신의 마음이 늘 하나님 쪽으로 가있고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목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 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가?

천국 문지기 천사가 ‘왜 당신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당신 신앙의 진정성을 심각하게 점검해 보기 바란다. *

 

   

☞해외 후원 및 다른 후원계좌 바로가기

 

[관련기사]

구요한 발행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110 Nuuanu Ave, Honolulu, HI 96817 USA  |  대표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구요한
Mail to: gloriatimes77@gmail.com
Copyright © 2018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