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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11)] 사도행전의 성령,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2)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서철원, 박영돈, 정이철의 성령세례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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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7  20: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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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11]
 

사도행전의 성령,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2)
 

- 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서철원, 박영돈, 정이철의 성령세례관 비판 -

 

   
 

 

들어가는 말

 

요즈음 선진국들은 출산율이 낮고 장수로 인한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난리다.

OECD국가 중에서도 출산율이 낮고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한국은 지방 40%는 이미 붕괴되었고 이런 추세로 가면 경제 성장과 둔화와 복지 비용 증가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언젠가는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 없어질지도 모르는 비관론이 대두되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이래로 성장이 답보 상태에 머문 한국 교회도 이런 추세로 가다 보면  2060년대에는 순수한 기독교 인구가 300만명 대로 하락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다.

 

필자가 이미 누차에 걸쳐 강조한 바와 같이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기적중지론을 주장하는 보수신학이 득세하는 유럽 교회가 텅 빈 지는 미 오래고 이러한 미국의 교회들도 쇠퇴일로에 있다. 그러나 은사운동 하는 교회는 전세계적으로 전반적으로 상승세 있고, 전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이슬람 인구를 유일하게 추월하고 유일한 기독교 집단이다.

 

그런데 미국의 존 맥아더나 한국의 일부 골통 기적중지론자들은 은사운동을 마귀운동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어떤 마귀가 사람들이 에수 믿는 도와주는지 궁금하다. 비판자들은 자기들이 현장에서 경험한 일부 꼴뚜기를 보고 전체 어물전을 판단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객관적 평가가 아니다.

 

 

필자도 일부 은사사역자들의 꼴불견스러운 행태를 누구 보다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은사운동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미국의 권위있는 퓨포럼(Pew Forum)의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한, 정통성, 도덕성, 경건, 전도에 대한 열정 및 사회 참여 등의 10개 항목에 대한 조사에서 오순절 교회가 전통적 교회 보다 훨씬 높은 점수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Spirit and Power: A 10-Country Survey of Pentecostals,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2006.”. http://www.pewforum.org/2006/10/05/spirit-and-power).

 

 

그러므로 비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대들보 같은 비리는 보지 못하고 은사주의자들의 티끌 같은 비리는 이 잡듯이 잡아내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적폐에 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전 글에 이어서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에 대해 계속 알아보자.

 

 

-사도행전 4:8 및 4:31 : 베드로와 무리의 성령 재충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행 4: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베드로와 무리는 모두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인데 또 받았다고 기록한다. 베드로는 행 2:4에 이어 행 4:8 및 4:31의 기록처럼 3번이나 성령 충만을 받았다.

 

사도 바울도 성령 충만을 두 번 받은 기록이 나온다(행 9:17; 13:9).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7-18).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 13:9-11).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에베소서 5장18절이 말하는 성화성령충만이 아니라 사역성령충만이다.

사역성령충만은 부정과거형으로서 누가가 말하는 ‘사역적 성령’이지 바울이 말하는 ‘구원적 성령’이 아니다. 사역성령충만이 단회론자들의 주장처럼 내주하는 성령을 활성화하는 것인지 위에서 다시 부어지는 성령인지 이 구절에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사역적 성령과 일치하므로 위에서 부어진 성령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즉 베드로나 무리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이어 지속적으로 성령의 부어주심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 또한 오늘날 신자들의 본보기가 된다.

 

 

정이철(「바른믿음」)은 그러나 이런 사실을 부인한다.

 

“대부분의 오순절 성령운동 추종자들은 오순절 신학 개념에 대해 잘 모르고, 무조건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고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토레이 등을 비롯한 오순절 신학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 성령을 받는 사건을 ‘성령세례’라고 부르고, 그 이후 성령이 또 임하시는 현상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4:31절이 초대교회 제자들의 영적상태를 ‘성령이 충만’이라고 표현하였을지라도 이날 성령이 또 임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이미 오신 성령의 인격적이 다스림으로 이해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이 더 오시어 성령의 힘이 흘러 넘치게 됨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

“사도행전 4장의 땅이 진동하는 특이한 현상은 심한 위급에 처한 제자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며 응답하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가 계속 존재하느냐? 유대교의 핍박으로 사라지느냐? 의 위급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이 더욱 강하게 제자들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신 것이지(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것이지), 성령을 추가적으로 더 부어주신 것은 아니었다”(정이철, “로이드 존스도 행4장에서 성령이 또 강림했다고 하였다,” 『바른믿음』, 2017.8.20.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918)

 

 

박영돈(고신대 교수)도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을 구분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박영돈도 베드로나 바울이 계속적으로 되풀이하여 하여 성령 받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박영돈은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는 성령의 충만은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잠시 임했다가 떠나는 성령 충만은 상실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영돈은 내주하는 성화성령충만은 “중생 후에 받는 이차적인 은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을 때부터 누릴 수 있는 은혜”라고 말하면서, 후주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자들이 자동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불신앙과 죄악으로 성령충만함을 상실할 수 있으며 그 때에는 회개로 이 은혜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p. 98-99, 359. n. 25).그러면서 사역성령충만은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박영돈은 베드로와 바울이 성령 재충만을 받은 것은 “성령 충만을 상실했기에 다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으로 충만해진 이가 새롭게 충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잘못 주장한다(같은 책, p. 360).

 

 

박영돈은 무슨 근거로 성화성령충만은 상실할 수 있고 사역성령충만은 상실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가? 성화성령충만은 박영돈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이고 사역성령충만은 자신이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신자들이 죄를 지으면 성화성령충만을 상실할 수 있듯 사역성령충만도 상실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나(다윗)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성령의 내주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신자들에게 온 것이므로 구약 시대에는 당연히 ‘사역적, 경험적 성령’만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사울에게서는 여호와의 영(성령)이 떠났고 다윗은 우리아 사건을 회개하면서 제발 주의 성령을 자기에게서 거두지 말라고 탄원한다.

 

즉 ‘구원적 성화적 성령’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사역적 성령’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험적, 사역적 성령’은 죄로 인해서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소임을 완수하면 잠시 떠났다가 그 다음에 필요하면 예수님이 다시 부어주신다.

 

 

필자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인 '구원적 성령'을 강조하는 서신서는 ‘인격적 성령’(Holy Spirit as Person)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역적 성령'을 강조하는 사도행전은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을 강조한다. 성령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시지만 성경에서 실제로 사용될 때는 ‘인격적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으로 구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고든 피는 성령을 인격이나 사역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pp. 5-9 ;  고든 피, 『성령-하나님의 능력주시는 임재』).즉 인격적 성령(The Holy Spirit as Person),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 as God’s Presence) 및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 God’s Empowering Presence)이다. 인격적인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임재로서의 성령은 ‘내주하시는 성령’이고, 성령의 임재로서의 능력은 ‘일하시는 성령’이다.

 

E.W. 불린거는, 신약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모든 단어를 분석했다(E.W. Bullinger, Word Studies on the Holy Spirit,  8th ed., 1979). 특히 그는 신약 성경에 헬라어 프뉴마(성령)가 ‘정관사+프뉴마’(호 프뉴마)와 ‘무관사 프뉴마’(프뉴마)로 사용된 경우를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전자는 인격적 성령, 후자는 일하시는 성령,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도행전(행 1:5; 2:4 등)이나 고린도전서(고전 12:7-11; 14:12)에서는 ‘무관사 프뉴마’가 ‘일하시는 성령’으로 사용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리하면, 성경도 ‘인격적인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 즉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인격적인 성령’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인간적이고 신학적인 편견이지 성경의 기록이 아니다.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은 주로 일하시는 성령이고 서신서에서 말하는 성령은 주로 ‘구원을 위한 인격적인 성령’이다. 전자는 사람의 외부에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으로 임하여 소기의 사역을 한 후 떠나는 성령이지만 후자는 신자 안에 내주하면서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령을 말한다.

그런데 박영돈이나 정이철과 같은 단회론자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니까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모든 ‘인격적 성령’으로 간주하여 오히려 성경의 기록과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은사주의자들이 생활성령충만을 소홀히 한 점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적중지론자들이나 단회론자들이 성화성령충만을 더 많이 받아서 신앙생활에서 더 나은 본을 보이고 있는가? 그들은 사역성령충만은 아예 받지도 못하고  성화성령충만도 입으로는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도행전 8:12-17 : 사마리아인의 회심과 성령 받음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회심·가입·성령세례를 주장한 제임스 던은 사마리아인들이 구원을 받지 않았다가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p. 55-78).

 

제임스 던에 의하면, 첫째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이 말한 것에 동의한 것이지("빌립이. . .하는 것을 믿고"[1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베드로에 의해 '악독이 가득한 자'로 저주(23절)를 받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13절). 그러므로, 사마리아 인들은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성령을 받았다고 그는 주장한다(17절).

 

에 의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지간이며(요 4:9), 유대인들은 혼혈족이고 이방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사마리아인들을 개같이 취급하였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도들의 권위로 안수할 때, 눈에 보이는 성령이 내리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도 교회의 일원이 되게 증거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마리아에 내리신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의 구속사적인 성취("사마리아와. . ."[행 1:8])이며, 그들은 성령을 받을 때 중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반복적인 사건이므로 오늘날의 우리의 본이 될 수가 없다고 던은 주장한다.

 

 

안토니 훼케마도 비슷한 이유로 사도들의 안수를 받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이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Anthony A. Hoekema, Holy Spirit Baptism, p. 36).

 

 

존 스토트는 제임스 던의 주장과는 달리, 사마리아인들은 사도들이 오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말씀을 받았다"(14절)는 기록을 살펴볼 때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령을 나중에 받은 것은 ‘중생 후 받는 성령 세례의 공식’ 때문이 아니고 구속사적 과정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생긴 일이라고 주장한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세례·충만·열매·은사』, pp. 32-36).

 

이 사건이 비정상적인 이유는 회심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않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에(요 4:9), 오래된 분열이 교회 안에 남아 있어서 두 종족 간에 무서운 분쟁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여 두 명의 사도가 내려가서 안수함으로써 그들의 회심의 순수함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시지 않았다고 스토트는 설명한다.

 

그러면서 스토트는 이 사건이 이처럼 명백한 비정상적인데도 오순절파들이 이 사건을 오늘날의 영적 경험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박영돈(고신대 교수)도 사마리아 부흥은 믿음과 성령받는 것이 분리된 유일한 사례로서 “성령의 특수하면서도 예외적인 사역”이라면서 존 스토트의 주장에 동조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 203-206).

 

한편, 서철원(전 총신대 교수)은 제임스 던의 견해를 지지하면서도 존 스토트의 견해도 수용한다(서철원, “’성령세례와 구원’, 성령대토론회,” 『목회와 신학』, 1991년1월호).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는 존 스토트 류의 견해와 서철원의 견해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차영배는 물 세례를 받고 난 후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 어떻게 해서 비정상적이냐고 비판한다.

 

“그(존 스토트)는 또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를 완전히 비정상적이라고 단정한다. 사도들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서로 맞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거듭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를 “abnormal"(비정상적)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족속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서술적인 부분을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하는 자체가 사도행전 안에 정상적인 서술이 있는 셈이 되고 보니 이것은 자신이 세운 원리와는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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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3,000명이 하루에 단번에 성령의 세례와 물세례를 동시에 받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표준적인 교리가 될 수 있고,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와 같이 먼저 예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은 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확실한 사실을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차영배,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관한 J. Stott의 견해와 문제점," 『성령론』, pp. 207-208).

 

 

차영배서철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순절계통의 '중생 후 세례'도식이나, 일부 개혁신학자들의 '중생 즉 세례(좁은 의미의 중생)' 도식이나 모두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굳어지거나 획일하게 선을 긋는 것은 조직신학일 수 있으나 교의신학은 아니다. '교의'란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 위하여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기록된 말씀에 맡겨야 한다. 따라서 경험위주도 안되거니와 무경험 위주도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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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요한과 베드로를 보냈다. 빌립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다. 단순히 빌립을 믿은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의 경우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고 따라서 120명의 경우와 구원 서정에 관한 한 같다고 볼 수 있다.

……………………………………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의 주장 곧 오순절 성령 받음과 동시에 믿음이 시작됐다고 한 것은 그 이전에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되므로 그의 신학이 오늘날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한동안 (약 10여 년간) 보수신학계를 석권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서 교수도 이러한 오류에 빠질까 염려가 된다. 예컨대 '예수를 믿는 그 시간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성령세례 받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예수 믿으면 중생하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옳은 주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차영배, "’(서철원의” 성령 세례와 구원"에 대한 논평,’ 성령대토론회,” 『목회와 신학』, 1991년 1월호).

 

 

사마리아인의 경우 유대인과의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두 종족을 화해시키기 위해 성령의 보이는 증거가 필요할 정도로 ‘비정상적이고 특수한 경우’라고 하는데 오늘날이라고 해서 이런 경우가 없을까? 오늘날이라고 해서 종족간의 갈등, 개인 간의 갈등이 없을까?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장대현 부흥 운동을 통해 미국 선교사와 현지 한국인 목회자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미국에서는 흑백간의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이 아직도 심하여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가 상존한다. 대부분의 전통적 교회는 인종 별로 서로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재미 한국인 교포들이 한국인만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교회가 아무리 교리가 바르고 전통이 바르다고 자부하지만 인종의 벽은 잘 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 운동하는 교회는 다르다.

20세기 초에 ‘아주사 거리 부흥’이 일어났을 때, 이미 100년 전에 흑백 인종이 구별 없이 예배를 드리는 바람에, 그 당시만 해도 흑백 차별이 심할 때라 백인 매스컴들은 혼혈 예배를 드린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필자가 미국에 거주했을 때, 은사운동 하는 교회들에 가보면 인종 차별이 별로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사마리아의 부흥처럼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이런 일이 사도 시대의 사마리아 지역에서만 일어난 ‘비정상적이고 특수한 사역’이라고? 제발 정신들 좀 차리세요!

 

 

*안수 사역

 

사도행전에 보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다는 기록이 더러 있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5-17).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7-18).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6-7).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은 초기의 오순절파에게도 다소 생소한 경험이었다. 초기의 오순절파가 사역성령세례를 받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지만 안수를 통해 받는 것은 언급한 적이 없었다. 안수를 통한 임파테이션(impartation. 나눔) 사역(롬 1:11)은 은사운동이 상당히 전개된 1980년대 이후부터 성행하는 사역이 되었다. 그래서 오순절파 중에서는 안수를 통한 임파테이션 사역이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그만큼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단회론자들은 당연히 안수를 통한 임파테이션 사역을 비판한다.

 

존 스토트는 안수가 성경적인 축복의 표시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지만 성령을 받는 표준적인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주장한다(존 스토트,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p. 35).

 

물론 표준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성령을 받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한 가지 방법이다. 특히 요즈음은 혼자서 기도해도 성령을 잘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표준이 아니라서 안수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옳은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자료 참조: “(안수를 통한)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 『글로리아타임스』, 2014.6.3.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3

 

 

 

-사도행전 9:3-5; 17-20:  바울(사울)의 회심과 성령 충만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3-6, 17:20).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6-11; 14-16).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3-18).

 

 

바울은 언제 회심했을까?

오순절파는, 바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 때 중생했고(5절), 3일 후에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았으므로(17-18절), ‘중생 이후 성령 받음’의 공식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뢰론자인 서철원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보고 그 자리에서 즉각 중생하였다고 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만나 세례 받기까지를  그가 변화되고 중생되는 기간으로 보아야 옳다”고 주장한다(서철원, “’성령세례와 구원’, 성령대토론회,” 『목회와 신학』, 1991년1월호).

 

박영돈도 유사한 주장을 한다. 박영돈은 “대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여 믿음을 갖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회심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꼭 찰나적으로 완성되는 사건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이 아나니아의 요청에 의해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성령 충만을 받았다”(행 22:16)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도 믿음·성령 받음 공식에 부합되는 아주 정상적인 패턴에 속한 성령 체험이지 ‘믿음(회심) 후 성령충만’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후주 4번, p. 253).

 

 

그러나, F.F. 브루스, 존 스토트 사이몬 키스트메이커는 바울(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F.F. 브루스의 주장을 살펴보자 (F.F. Bruce, The Book of Acts, NICNT, Revised, pp. 183, 417).

 

브루스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해 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음성을 듣는 체험을 통해 의지, 지성 및 감정이 변하는 회심 체험을 했고 동시에 소명도 받았다고 주장한다(고전 9:1; 15:8; 갈 1:1, 11-20; 행 26:16 참조), 나중에 아나니아가 한 말은 바울이 직접 받은 소명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행 22:13-16 참조)고 주장한다 나중에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들은 것이 자신의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다(갈1:12, 16; 고전 9:1; 15:8).

 

 

사이몬 키스트메이커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 했다고 주장한다.

(Simon Kistemaker, Exposi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Testament Commentaries, p. 183, 332-33).

 

크리스천을 핍박한 바울(사울)은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었고(고후 5:16), 스데반의 설교도 잘 알고 있었다(행 7:2-53, 56). 그런데 이런 예수가 부활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바울이 ‘크리스천을 핍박하는 것은 자신(예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자 바울(사울)은 즉각 예수에 대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나중에도 이 사실을 반복해서 간증했다(고전 15:9; 갈 1:13, 23; 빌 3:6).

 

 

바울이 예수에게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예수는 바울에게 소명을 주셨다.

행 9장에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 기록되지만( 행 26장에서는 바울이 직접 받은 것으로 기록되고(16절), 다른 성경 구절에 비추어 볼 때(갈 1:1, 12), 직접 받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나중에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소명을 재확인해 주고, 안수하여 성령 충만을 받게 하고, 바울이 회개하게 하고 세례를 준 것은 이미 중생한 바울을 공식적으로 세례 받는 과정을 통해 다메섹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키스트메이커는 설명한다

 

 

존 스토트는 회심과 기도 및 성령 충만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John R.W. Stott, The Message of Acts, The New Testament Series, pp. 170-74, 379-81).

 

스토트는, 사도행전 9장 주석 서문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가진 사울(바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사울이 회심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갑작스런 회심은 아니고, 키스트메이커의 주장처럼, 예수에 대한 소문이나 순교자 스데반에 의한 사전 지식이 회심에 도움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경으로 지낸 3일 금식 기간 동안 사울은 무엇을 했을까?

사울은 이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받은 사울은 이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울은 3일 동안 무엇을 기도했을까?

 

스토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사울)의 기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가 그의 모든 죄들 특히 자기 의와 크리스천들을 잔인하게 핍박한 죄 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무슨 소명이 주어지든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구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사울)의 기도에는, 찬양 가운데서 자기의 영혼을 쏟아 놓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동안 예배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살기를 띠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던’(행 9:1) 그 입술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포효하던 사자가 이제는 구슬픈 소리를 내는 새끼 양이 된 것이다”(같은 책, p. 175).

 

 

나중에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사울이 성령 충만을 받자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눈이 밝아졌으며, 사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가시적이고 공개적으로 예수 공동체로 가입되는 과정이었다(행 9:17-20)(p. 716)고 스토트는 설명한다.

 

바울의 회심에 대한 3종류의 기록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은, 첫째는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고, 둘째와 셋째는 간증의 대상이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상대로(행 22:13-16), 셋째는 아그립바 왕을 상대로 한 간증(행 26;13-18)이기 때문에 상세에서 조금 차이가 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고 스토트는 정리한다(pp. 379-81).

 

이상 3명의 주장을 정리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했고, 3일 금식 중 회개하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 기도를 했으며, 이후 아나니아를 통해 소명을 재확인하고, 안수를 통해 성령 충만을 받아서 눈이 밝아졌고, 크리스천인 아나니아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서 정식으로 크리스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당연히 먼저 회심한 후 성령을 받든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3일에 걸쳐 회심했고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은 사도행전의 석의나 사도 바울이 고백한 성경의 다른 구절들의 증거에 의하면 설득력이 약한 주장이다.

 

 

정리하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옆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는 단 한 마디로 구원을 얻었다(눅 23:43). 그런데 바울(사울)은 빛으로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음성으로 대화까지 하고 소명까지 받았는데, 바울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때까지 3일이란 시간이 걸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단회론자들은 ‘중생 이후 성령 받음’ 보다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믿음과 동시적 성령받음’ 공식을 적용하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행 10:44-48; 11:15-18 : 고넬료 집안에 임한 성령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행 10:44-48).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5-18).

 

 

오순절파는 한때 오순절파는 고넬료 집 사람들도 중생 후 성령 체험을 하고 방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고넬료 집 사람들은 중생과 성령 체험을 동시에 했다고 주장한다. 고넬료는 비록 유대인으로 귀화하지는 않은 ‘경건한 사람’(God fearer)이었지만(행 10:2) 아직 크리스천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회론자들도 당연히 중생·회심과 동시에 성령 받음의 공식이 옳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성령 받은 후 나타난 증거에 대해서는 해석을 달리한다. 오순절파는 성령 받고 방언 받은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단회론자들은 그들이 구원 받은 사실은 강조하면서(행 11:18), 방언 받은 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박영돈은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당시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사종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의 지독한 배타 의식을 변화화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치였다는 식으로 설명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 202).

 

싱클레어 퍼거슨(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고넬료 집안이 이방인을 대표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3) 복음이 가이사랴 즉 이방 세계를 대표하는 곳에 도래한다(‘세상의 끝’, 행 1:8; 참고. 특별히 11:18). 누가가 부여한 바 그 사건의 결정적인 게획상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즉 모든 시대를 위한 전형으로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도행전 1:8의 전체 선교 계획에서 특수하고도 전략적인 발전인 것이다”(싱클레어 퍼거슨, 성령, pp. 95-96).

 

퍼거슨의 이런 주장은 아브라함 카이퍼리차드 개핀로 이어지는 ‘대표성 원리’의 착각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이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모든 때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의 몸 교회에 임하였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대표의 원리를 적용하여, 성령의 강림이 고넬료 가정에 임할 때 이전까지 유대인 교회에만 임하던 것이 이방인에게도 임하여 이제는 전체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식으로 교회의 다른 부분에도 임함으로써 비로소 온 몸이 성령을 마셨다고 주장한다.

 

리차드 개핀(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은 ‘파생의 원리’로 설명한다.

사도행전 1장8절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며,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땅끝까지(로마는 지중에 세계의 저편 끝이었음)의 패턴에 맞추어 사도들이 복음 전파와 창설 사역을 완성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자는 사도들의 토대 위에 기초하고 사도들의 복음 전파의 기초사역을 사수하고 있으므로 사도행전 1장8절은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단지 파생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26-27).

 

 

차영배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대표의 원리’를 비판한다.

 

"A. Kuyper는 또 성령이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모든 때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의 몸 곧 교회에 임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러한 대표의 원리를 연상케 하는 성령의 강림이 고넬료 가정에 임할 때 여태껏 유대인 교회에만 임하던 것이 이방인에게도 임하여 전체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교회의 다른 부분에도 임함으로써 비로소 온 몸이 성령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카이퍼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곧 그의 죽음과 부활의 단회성에 입각한 대표의 원리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사도적 교회(예루살렘 교회)와 고넬료 교회가 장차 나타날 모든 교회에 임할 성령을 대표적으로 받은 셈이 되어 한 마디로 비성경적이다. 신학사장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대표의 원리라고 한 적이 없다.

 

예루살렘 교회가 대표적으로 받았다면 고넬료 가정이 받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고넬료 가정을 모든 이방인 교회의 대표격이라고한 말씀이 성경에 없다. 더욱이 성령은 대표의 원리에 입각하여 단번에 주어지는 일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각각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룹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행 2:38) 라고 한 말씀을 해석할 도리가 없다.

…………………………………………

물론 카이퍼는 오순절에 성령이 단회적으로 부어졌기 때분에 그 이후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저수지에서 수도관을 통하여 각 가정에 연결 된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로써 카이퍼는 점점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차영배, “A. Kuyper의 견해와 그 문제점,”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pp. 50-51).

 

 

차영배는 “고신대신대원 교수들의 연구논문에 대한 평가”에서도 ‘대표의 원리’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신학적인 오류가 너무 크기 때문인데, 화란에서 파송된 고재수 교수가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

………………………………

둘째, 예루살렘교회는 그 후의 모든 교회나 교인들의 대표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

넷째,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자동적으로 참여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렇게 되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대표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셈인데, 이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증거가 없다. 성경에 의하면, 대표의 원리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경우뿐이다(롬5:12∼21, 고전 15:21∼22)”

(차영배,“고신대신대원 교수들의 연구 논문에 대한 평가,” 『목회와 신학』).

 

이런 신학은 종교개혁이래로 답습되어 온 것 같다. 당시인들은 스페인이 땅끝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전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주교에서 반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전도에 박차를 가하자 개신교인들은 전도 자체를 천주교의 부산물이라고 조롱하면서 전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후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도 선교사 윌리암 케리(1761~1834)가 선교하겠다고 했을 때, 한 원로 성직자가 뭐라고 말했는가?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 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

 

물론 요즈음에는 단회론적 교회도 전도나 선교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효과적인 면에서는 반복론을 지지하는 은사적 교회들이 압도적으로 우수하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말씀 전파와 함께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수많은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헤쳐나가면서 복음을 전파했듯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도 말씀 전파와 표적과 기사를 병행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록된 성경이 있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가 필요 없다는 기적중지론자나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에 대해 포이트레스(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는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를 위해 기적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Vern Poythress, Miracles 강의에서,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적이 필요했는데 기적도 없이 말씀만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도들보다 더 잘났다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Martin Lloyd-Jones, The Sovereign Spirit,  pp. 32-33).

 

오늘날 예수님이 꿈이나 환상 중에 직접 나타나셔서 유대인이나 무슬림(이슬람 교인)들을 초자연적으로 회심시킨 간증이 유튜브 동영상에 숟고 없이 많다. 그러므로 얄팍한 신학 이론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을 부인하는 기적중지론자이자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들은 심각하게 회개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9장 1절~6절: 에베소인들에게 임한 성령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오순절파들은 당연히 에베소 교인들은 구원을 받은 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제자들’(1절)이었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도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절)를 살펴볼 때 이미 예수를 믿고 중생한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떻든 그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의 안수로 성령을 받고 방언도 하고 에언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중생 후 성령 세례 및 ‘성령 세례의 외적 표적은 방언’이란 공식을 잘 증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회론자들은 당연히 이런 해석을 반대한다.
단회론자들은 에베소 사람들도 모두 진정한 구원을 받자말자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에베소 사람들이 비록 ‘제자들’(1절)이라고 불렸지만 그들이 진정한 신자인지는 의심스럽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바울이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가타부타로 대답하지 않고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 바울이 세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3절)고 대답했다. 그것은 아마 에베소를 방문한 아볼로의 불완전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다(행 18:24-26). 따라서 바울은 요한이 말하는 예수를 통한 구원의 완전한 복음을 전한 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5절),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했다. 그러므로 중생 이후의 성령 세레 공식은 통하지 않고 ‘중생과 동시의 성령 받음’이란 공식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pp. 36-38).

 

 

물론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에베소인들은 바울이 오기 전에 이미 거듭난 신자들이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의 세례도 죄사함을 얻는 회개의 세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누가는 '제자들'이란 말을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 사용하였다(행 6:1; 9:10; 11:26).

 

또한 헬라어 과거 분사인 "믿을 때"는 주문의 동사인 "받았느냐"(과거)의 이전이나('믿은 후에'[Since you believed, KJV]), 또는 동시적인 시제('믿을 때'[When you believed, NIV, RSV])의 두 가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 분사인 "믿을 때"가 어떻게 번역되든, 에베소인들은 '믿을 때'나  '믿은 후'에도 ‘사역적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믿을 때”(행 19:2)라는 말은 "받았느냐"라는 말과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므로 그들은 이미 거듭난 신자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아직도 성령의 부어주심이 오순절날에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완전한 복음, 나아가서 성령의 폭포수 같은 부어주심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완전한 복음을 배운 것과 같이(행 18:25-26), 이들도 아볼로 정도로만-그들의 선생-복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교리를 불충분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선생인 요한으로부터 듣고 기대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눅 3:16).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 25년 전의 오순절 날 이후로 이미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예언이 성취된 사실-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이 있음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식으로 대답한 것이다(2절). 바울이 그들의 교리를 수정해주고 안수를 했을 때 그들에게 능력 성령이 임했다(6절).

 

성령이 "임했다"(행 19:6)는 말은, "성령이 내려 온다," "성령에 감동되다," "크게 감동되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고 그 결과 "성령에 의해 완전히 통제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바울이 안수했을 때 성령이 능력으로 강하게 임하여서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여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6절).

 

 

물론 에베소교인들이 중생 후 성령을 받았느냐의 여부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울의 안수로 사역적 성령을 받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사실이다.

 

 

단회론자들은 복음이 에베소에까지 전파된 사실은 중요하고 안수를 통해 방언하고 예언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구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니 은사를 못 받는 것이다. 잘못된 성경 해석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어 보겠다.

필자는 ‘사역적 성령’을 받기 전 십 여 년간 교회를 다녔지만 ‘성령’(이후 사역적 성령)에 대해서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은혜를 받은 표인지 찬송가를 부르면 눈물이 나고, 주님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데도 성령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순절 계통의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비로소 사도행전적 의미의 ‘성령’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자가 방언은 아직 하지 못하던 때이므로 주변에서 누가 필자에게 방언 받으라고 권면하면 괜히 심통이 나고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때는 막 큐티(QT), 말씀 암송 및 제자 훈련을 끝내고 말씀의 깊이에 은혜를 받고 말씀 연구에 재미를 들일 때였기 때문이다.

 

“나는 방언은 못해도 성경은 너희보다 더 잘 안다”

그리고 방언을 권면하는 자들의 행동을 하나같이 못 마땅하게 여길 때였다.

“나는 방언은 못해도 행동거지는 너희 보다 낫다.”

 

그러던 어느 날 ‘방언이나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책을 읽자 방언을 구할 마음이 생겼고 이후 구하여서 방언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사도행전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성령이란 말이 도처에서 나의 시선을 끌었다. 사도행전에 그렇게도 성령에 대하여 많이 기록되어 있는 데도 그 이전까지는 도대체 성령이란 단어를 보지 못한 것이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관심 갖고 보도록 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을 보지 않도록 필자도 모르게 '프로그램'된 것이다. 교회에서는 말씀만 강조했지 성령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에베소의 교인들과 같이 ‘사역적 성령’이 있음을 들어보기는커녕 김재성, 박영돈, 이승구, 서철원 및 정이철, 이창모 같은 기적중지론이나 단회론자들이 사역적 성령을 모두 귀신 장난이나 사이비로 혹평하여 아예 이런 것에 관심도 갖지 않거나, 설령 이전에 방언을 하고 은사 체험을 해도 잘못된 것인 줄 알고 포기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경이 수많은 소경을 잘못 인도하는 격이 아닌가?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의 정리

 

이상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리하면,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은 오순절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역 성령세례는 중생 이후’에 하는 것이며 ‘사역성령세례의 유력한 외적 표적이 방언’이라는 주장에는 예외가 많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 강림 이전과 이후라는 말 그대로 특별한 시기에 살다 간 120문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사건이다. 이후의 사마리아인들과(행 8장) 에베소교인들은 ‘중생 후(또는 중생과 동시에) 사역적 성령’을 받았고, 고넬료 집안의 부흥 때는 ‘중생과 동시에 성령을 받고 방언’도 했다. 사도 바울도 중생 후 사역성령충만을 받았지만 방언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사도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이지만(고전 14장) 언제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에베소 교인들은 방언을 받았지만 사마리아 교인들은 방언을 받았다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 그러나 ‘성령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동반할 정도로 임했다’(행 8:17-18)는 것을 확실하다.

 

물론 방언이 포함될 수도 있지만,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독자들이 개방적 자세를 가지기를 바라면서 구체적 기록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성령이 임할 때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기록한다.

 

사도행전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주어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성전 기물을 만드는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셨다(출 31:3).

-사사들에게 임하여 육체적인 완력(physical strength)을 주셨다(특히 삼손)(삿 3:10; 6:34; 11:29; 13:25; 14:6, 19 등).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여 사울 왕이 예언을 하고 벌거 벗은 채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었다 (삼상 19:23-24).

-여호와의 신으로 인해 다윗이 시를 짓고 노래했다(삼하 23:2).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셨다(겔 2:2; 3:12, 14, 24; 8:3; 11:1; 행 8:39 참조―빌립을 이끌어 다른 장소로 옮김).

-꿈을 해석했다(창 41:38; 단 4:18).

-성가대가 일제히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구름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 섬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대하 5:13-14).

-귀신을 쫓는다(마 12:28).

 

 

그러나 사역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할 확률은 높다. 성령 임함에 관한 행 2장, 행 8장, 행 9장, 행 10장 및 19장 중 세번이나 방언 받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험도 이를 증거한다. 초기 성령 체험을 하면서 방언 받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 자체를 부인하는 단회론자들의 성경 해석 오류는 더 심각하다. 아예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그 잘난 기적중지론과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가진 유럽 교회는 텅 비어있고 미국의 주류 교단도 쇠퇴 일로에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출산 없는 성장(성숙)이 유의미한가?

요즈음 한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는 출산율 저하로 인한 심각한 문제가 예측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통적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회심 숫자의 저하로 심각한 쇠퇴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그나마 전세계적으로 교회 성장을 이끌어가는 것이 은사운동하는 교회들이다. 존 맥아더나 정이철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이것을 마귀적 현상이라고 하는데, 어느 마귀가 예수 믿는 사람을 증가시키는 운동과 함께 하는가?

 

 

그러므로 단회론자들은 전체적 숲을 봐야 한다.

주변의 미성숙한 은사자들의 다소 서투른 성경 해석과 비윤리적 행동을 기화로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인하는 것은 단회론자들이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은사주의자들의 나쁜 경험의 대안은 폄하나 부인이 아니라 제대로 된 통제이자 바른 교육이다.

 

한편, 은사주의자들은 누가의 ‘사역적 성령’에서 발전하여 바울의 ‘구원적 성령’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도행전 다음에 오는 것이 서신서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 사도행전적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외적으로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교리적, 관계적,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란 걸출한 성경 교사를 통해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다.

 

 

사도행전이 야전전투교범이라면 서신서는 내무생활규범이다.

은사적 교회는 전자에는 강하지만 후자에 약하고, 전통적 교회는 후자에는 강하지만 전자에는 약한 것 같다. 그 결과 은사적 교회는 (외적) 영적 전쟁은 잘하지만 내면 성숙과 변화에 소홀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한편, 전통적 교회는 말씀과 성숙은 강조하지만 ‘사역적 성령’의 결여로 외적 영적 전쟁을 통한 전도나 선교가 약하고, 극적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고백과 전통은 바르지만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계 2:1-7), 고백은 바르지만 행동은 따르지 못하는 사데교회(계 3:1-6), 겉은 화려하지만 영적 실속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와 같은 ‘죽은 정통’의 교회를 양산하고 있다.

 

 

결국 교회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서로가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버리거나, 저것은 행하고 이것을 버리기 때문’에 은사적 교회나 전통적 교회 모두 절름발이가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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