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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10)] 사도행전의 성령,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1)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서철원, 박영돈, 정이철의 성령세례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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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4  22: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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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10]

 

사도행전의 성령,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1)

-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서철원, 박영돈, 정이철의 성령세례관 비판-

 

   
 

 

 들어가는 말

 

오늘날 서구 교회가 텅 비고 미국의 주류 교단들이 쇠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주의의 기적중지론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기적을 부인하고, 예수를 석가나 공자 같은 도덕 군자로 이해한다. 그들은 약자 보호와 인권을 중시하여 동성 결혼이나 차별금지법을 지지한다. 그 결과 유럽 교회에서 보수 기독교는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기적중지론적 보수주의자들(개혁주의와 세대주의 포함)은 자유주의자들이 ‘그것은 전설이다’, ‘그것은 심리적 현상이다’ 등의 이유로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면 온갖 주장과 논리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다가도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한 그 논리를 사용하여 이런 논리와 저 런 신학으로 기적을 부인한다.

 

더군다나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의 기적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기적중지론자들의 반론이 오히려 더 비성경적이고 편파적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글들을 통해 계속 밝히고 있다

 

이번 글에서도 밝히겠지만, 은사주의자들은 ‘사역적 성령’을 받는 시기에 대해 다소 오류가 있지만 기적중지론자(“중지론자”)나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단회론자”)들은 기적행하는 ‘사역적 성령’의 지속 자체를 부인하여 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종교 개혁 이래 그 잘 난 신학자들이 부인하고 버린 기적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나마 한국 교회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핍박과 반대를 무릅쓰고 기적을 인정하는 교회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일부 꼴뚜기들이 은사를 오남용하여 어물전을 망신시키기도 하지만 건전한 은사운동을 통해 교회를 잘 키워가는 교회들도 많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오남용하면 제대로 사용하게 하고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지 부인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말썽부리는 교단 총회장, 목사나 교회 중직을 모두 부인해야 하는가?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

 

 

또 다시 인용하지만,『미국 캐나다 교회 연감』(1990-96)은 지난 30년간 여러 교단의 교세 증감을 기록한 책이다.

 

이 연감에 보면 주의를 끄는 한 가지 통계가 있다.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며,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이것을 실제화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주류 교단—침례교, 감리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의 교세는 감소했다.

 

그러나 두 가지 성령 세례를 구분하여, 비록 신자가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구원 받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이 말하는 ‘능력 받는 성령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해석한 교회들은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중지론자나 단회론자는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는 이것을 실제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적계속론자(“계속론자”)나 오순절 성령강림 반복론자(“반복론자”)는 당연히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을 얻는 세례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다룰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에 대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평행구절 마 3:11; 막 1:8; 요 1:33).

 

 

전통적으로 요한의 물 세례는 눈에 보이는 씻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상징적인 물 세례를 실제화 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요한의 물 세례는 회개를 위한 예비적, 상징적, 예표적인 것이요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물 세례의 성취이자 실체요 완성이다.

 

따라서 물 세례가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내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므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의 물 세례만 받은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며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받아야 구원이 실질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의 세례(행 2, 8, 9, 10, 19)는 상징적으로 행해진 요한의 세례를 성령의 세례를 통해 실질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장 칼뱅, 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박영돈 및 많은 단회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D. A. 카슨은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회개(구원)를 동반하는 세례라고 주장한다(D. A. Carson, “Matthew,”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pp. 104-105).

 

그 이유는, 첫째 막 1:4 및 눅 3:3이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둘째 예수님도 회개를 촉구하셨다(마 4:17). 다만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인 메시아인 예수의 도래를 예비(신약 시대의 도래)한다는 점에서는 예비적이지만 그것이 예비적이라고 해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의 세례가 실질적 구원이 아니며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 명시되어 있는 기록과 상반된다. 예수님의 12제자는 물로 칠십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이미 구원 받았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이미) 기록되었다”(눅 10:20). 삭개오도 구원을 받았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 19:9).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는 물론(마 16:16) 다른 제자들도 모두 구원을 받았다(요 15:3). 더군다나 구약의 의인들도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모두 구원을 받았다(히 11장).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도 요한의 세례가 상징이라는 주장을 일축한다(차영배, “요한의 세례와 중생 및 성령의 세례,” 『성령론』, pp. 146-68).

 

그는 요한의 세례, 요한의 이름으로의 세례 및 예수님의 이름으로의 세례 모두 회개를 위한 세례라고 말한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케 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였다.” 그래서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행 2:38에서 베드로도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했으며 예수님도 제자들이나 요한의 세례의 차이를 인정하시지 않으셨다(요 3:22, 23; 4:1, 2). 그러면서 차 교수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구분한다.

 

 

차영배에 의하면 예수님의 이름의 세례는 오순절의 성령 세례가 아니다. 차 영배는 구원을 받게 하는 요한의 세례와 충만하게 은사를 받는 성령 세례는 다른 것이라는 헤르만 바빙크(H. Barvinck)의 견해를 지지한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이 내리신다”는 말은 오순절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말하며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도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에 성령을 받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및 승귀에 이르는 구속사가 완성되는 특수한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그들의 구원의 실질성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있기 전의 사람들(따라서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의 결과, 요한의 세례를 상징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실질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고전 12:13의 구원성령세례를 사도행전의 사역성령 세례와 동일시하여 사도행전의 역동적이고 활발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와 불세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과 불 세례”에 대한 논쟁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에 대한 논쟁과 비교하면 부차적인 문제이다. 일부에서는 성령과 불을 분리하여서 성령 세례는 신자(알곡)들을 축복하는 세례이며 불 세례는 불신자(쭉정이)들을 심판하는 세례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과 불이 “~으로”(헬라어 ‘엔’)를 의미하는 하나의 전치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과 불 세례는 각각 다른 세례가 아니라 하나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불’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불은 죄인을 깨끗하게 하고 정화시키고(사 4:4-5; 32;15; 44;3; 겔 36:25-26; 말 3:2하-3),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출 3:2; 14:24; 19:18; 왕상 19:12; 행 2:3). 따라서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성령과 불 세례’는 신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로 볼 수 있다. 불은 신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인정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는 신자들에게는 축복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이중적인 요소가 있다(출 14:24 참조). 복음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한 없는 축복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이미 심판이 임했으며(요 3:18) 잠정적인 이 축복과 심판은 종말론적인 축복과 마지막 심판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서신서의 성령과 사도행전의 성령

 

 

필자는 지난 글에서 누가의 성령은 주로 ‘경험적 사역적 성령’(Experiential and Ministerial Holy spirit)이고 바울의 성령은 주로 구원적 성령 즉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단회론자들은 성령의 이 두 가지 기능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여 ‘구원적 성령’인 고린도전서의 구원성령세례의를 ‘사역적 성령’인 사도행전의 성령에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단회론자들은 요한의 물 세례는 예표이자 상징이고 성령 세례는 그것의 성취이자 실제화라는 잘못된 전제 하에, 회심·가입·성령세례 (Conversion·Initiation·Baptism in the Holy Sprit)(제임스 던. James Dunn), 또는 믿음(회개와 세례)·성령 받음(박영돈)은 동시적 사건이며 이를 신자의 규범적 패턴으로 보고, 이 공식을 사도행전의 성령 받음에 무차별적으로 대입한다.

(*’가입’은 사람이 성령을 받고 거듭나서 교회의 구성원으로 가입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주창자는 제임스 던, 안토니 훼케마,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서철원, 박영돈, 박형용 같은 단회론자들이다. 그러나 하워드 어빈, 윌리암 아트킨, 로저 스트론스타드차영배 및 대부분의 반복론자들은 이런 주장에 반대한다.

 

 

또 한 가지 미리 밝혀둘 것이 있다.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싱클레어 퍼거슨, 김재성, 박영돈 같은 단회론자들은 사도행전에 임한 부흥은 ‘중생 후 성령을 받느냐’와 같은 개인 체험의 본보기나 ‘구원의 서정’의 문제에 있지 않고 사도행전 1장8절의 말씀을 따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복음이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저자 누가의 의도라고 말한다.

 

 

즉 사도행전의 부흥은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지 개인의 경험의 본보기나 구원의 서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pp. 28-31; 리차드 개핀,『성령은사론』, pp. 26-44; 싱클레어 퍼거슨, 『성령』, p. 95; 김재성,『개혁주의 성령론』, pp. 129-42; 박영돈,『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p. 96-97 등)

 

 

과연 그런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 임함의 사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도행전 2:1-4: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속사적으로 특별한 사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부활, 승천 및 성령 강림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전에 활동했던 제자들은 비록 영혼 구원은 받았지만 성령은 오순절 날에 받을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시대에 거주한 신자들이다.

 

 

리차드 개핀은, 오순절 날의 성령은 사역을 위한 능력을 입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 아니라 성령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Richard 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 pp. 21, 27). 그러므로 120문도들의 사례를 오순절파가 말하는 ‘중생 후 성령 체험’의 본보기로 삼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내주하는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임재하는 성령 즉 경험적이고 사역적 성령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포함한 120 문도들이 모두 방언을 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20문도들이 방언 받은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본이 될 수는 없는가? 단회론자들은 당연히 구속사적 특별한 사건이므로 우리의 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초자연적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산발적으로 외국어 방언을 한 기록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영언(靈言)이다.

 

(자료 참조 : “[방언특집①] 방언이란 무엇인가,” 글로리아타임스. 2014. 7.2.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7)

 

 

오순절 성령운동을 촉발한 방언운동은 성령 1901년 1월1일에 찰스 파함이 신학생들에게 성령 세례의 외적 표적이 무엇인가라는 숙제를 냈는데 모두가 방언이라고 대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오순절 교단은 ‘성령 세례는 중생 이후의 체험이며 성령 세례의 유력한 외적 표적은 방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자 전통적 주류 교단에서는 일제히 공격의 포문을 퍼부었다.

 

신자는 모두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므로 성령을 다시 받을 필요가 없이 내주하는 성령을 활성화 하면 되는 것이고(고전 12:13 참조), ‘성령 세례’와 같은 ‘제2의 축복’을 받는다는 주장은 감리교나 성결교의 잘못된(?) 가르침이며, 사도행전의 성령 받는 사례는 구속사적 사건이므로 오늘날 신자의 패턴(본보기)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위에서 밝힌 것처럼, 사도행전의 성령 받은 사례는 ‘개인의 경험’의 반복이나 ‘구원의 서정(순서)’의 본보기가 아닌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해놓고, 리차드 개핀, 존 스토트 박영돈 등은 회심·가입·성령 세례나 믿음·성령 받음 공식을 증거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성령 받음 사례를 증거로 제시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영돈(고신대 교수)은 이렇게 말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제자들뿐 아니라 오순절 후에 사마리아인들(행8장)과 고넬료(행 10장), 그리고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행 19장_도 중생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도 누가의 일차적 관심은 중생 후 성령을 받느냐의 문제에 있지 않고 사도행전 1장8절의 말씀을 따라 어떻게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어 가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의 의도에 착안하지 않고 이 구절들은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본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박영돈,『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pp. 96-97).

 

 

그런데 박영돈은 다른 책에서는 ‘믿음과 세례와 성령 받음’은 하나로 엮어져 있다면서 자기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사례들을 증거로 제시한다 (박영돈, 『성령 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p. 199-206).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오순절파가 사도행전의 성령 받는 사례들을 구원의 서정이나 경험의 본보기로 삼는 것은 “본문의 의도에 착안하지 않고 이 구절들은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본문으로 삼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해 놓고 정작 자신은 자신의 교리적 입장을 뒷받침 하는 증거 본문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단회론자들은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파를 비판하려는 성급한 마음에 자기들도 모르게 비성경적 주장을 함부로 해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거듭 말하지반 단회론자들은 반복론자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들이 ‘무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점진적 계시와 점진적 조명

 

그렇다며 왜 하필이면 20세기부터 방언 현상이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통한 이신칭의 교리는 왜 16세기에 생겼는가? 성경은 점진적 계시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성경의 진리도 한꺼번에 모두 드러난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점진적으로 드러났다(점진적 조명). 그러므로 새로운 가르침이나 영적 현상이 늦게 나타났다고 해서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 성경의 중요한 교리 모두 부인되어야 한다. 중요한 교리 모두가 성경 기록이 완성되고 나서 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사역적 성령’을 받는다.

 

그렇다면 ‘사역적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

 

단회론자는 믿음으로 모든 신자가 성령을 받기 때문에(갈 3:5),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고 내주하는 성령을 활성화하여 성령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주장한다. 서철원(전 총신대교수)과 박영돈이 이런 주장을 강하게 개진하면서 은사주의자들이 성령을 구하는 것은 ‘조건 이행’을 통해 성령을 받으려는 유대교 율법주의(서철원) 또는 성령론적 율법주의(박영돈)이라고 비판한다 (서철원, 『성령 신학』, pp. 41-43; 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p. 41-42, 44-60, 73, 98, 100-106).

 

이들이 말하는 조건 이행을 통해 성령 세례 받는 것을 제일 먼전 제시한 사람은 대천덕 신부의 조부인 R. A. 토레이(토리)다. R.A 토레이(토리)는 사도행전 2장38절을 중심으로 성령 세례 받는 7단계를 제시한다.

(R.A 토레이, 『성령 세례: 그 충만한 영력을 얻는 비결』, pp. 35-51)

 

첫째, 우리 모두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 한다.
둘째, 죄를 폐기하는 것이다. 성령은 죄와 함께 갈 수 없으므로 죄를 버려야만 한다.
셋째, 죄 회개와 예수 영접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다섯째, 성령 세례에 대한 열렬한 욕망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 성령 세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일곱째, 믿음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예수 믿음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기어이 받고 말겠다는 믿음이다.

 

 

토레이(토리)의 영향을 받아 다른 오순절파도 유사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 조건 이행이라기 보다는 성경에 제시된 약속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받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서철원이나 박영돈은 이런 것을 인간적 ‘조건 이행’으로 이해할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주어진 조건들을 제대로 이행하면 영적 부흥이 반드시 온다’고 주장한 찰스 피니(미국 제2차 영적대각성 운동 지도자)의 주장이 있다.

 

찰스 피니의 이런 주장은, 비록 청교도가 시작했지만 요한 웨슬리가 적극 차용한 ‘중생 이후의 제2의 축복’ 개념과 함께,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미국 교계를 휩쓸었다. 웨슬리나 성결운동은 ‘제2의 축복’을 ‘성결’(purity) 개념으로 사용했지만 D.L. 무디와 동역자인 R.A. 토레이는 능력(power) 개념으로 이해했고 토레이는 이를 바탕으로 ‘성령 세례를 받는 7단계’를 주장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성결 운동의 한 부류인 케직사경회는 제2의 축복(성결)에 더하여 제3의 축복(능력)도 강조했는데 20세기 초 오순절 운동을 시작한 찰스 파함은 원래 케직사경회 출신이다. 그래서 찰스 파함과 그후의 윌리암 시모어는 방언운동의 초기에 제2축복과 제3의 축복을 강조했지만, 이후 이들의 은혜를 받은는 윌리암 더햄(William Durham)은 이들을 축출하고 제2의 축복인 능력만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회 교단을 설립했다.

 

(자료 참조 : “[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2)] 기적중지론과 성령세례 논쟁(2),” 『글로리아타임스』, 2015.9.20.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82)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는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을 인위적 부흥과 제2축복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 계통으로 간주하고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포문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안 머레이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의 부흥은 이미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아브라함 카이퍼 류 비판), 찰스 피니처럼 조건을 이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니다. 영적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오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성경적 견해다(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참조).

 

 

더 나아가서, 이안 머레이가 말하는 영적 부흥과 개인이 성령 체험을 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영적 부흥’은 정말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다고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인의 성령 체험은 성경에 기록되고 R.A 토레이가 제시한 대로 순종하여 받는 경우도 많다. 필자를 통해서도 기도하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많다.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당사자의 간증과 이후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러나 R.A. 토레이의 주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이런 식으로 구하는 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특별한 감정이나 경험이 없어도 실제로 받았다고 믿고 행동하면 된다고 한다(p. 51-53).

 

토레이는 자기 주장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처럼(요 3:16),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을 구한 후 성령을 받았다고 믿고 행동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사람이 믿겠다고 작정하면 되는 믿음인가? 아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주셔야 믿어지는 믿음이다. 마찬가지 원리다. ‘사역적 성령’은 당사자가 경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온다. 그러므로 감정이나 경험이 없어도 제대로 구한 후 받았다고 믿고 행동하라는 것은 성경적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정리하면, 다소 오류는 있지만 토레이나 다른 오순절파들이 제시하는 방법은 ‘조건 이행’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철원이나 박영돈이 조건 이행으로 폄하하는 것은 찰스 피니 류의 ‘조건 이행부 부흥’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중대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들은 ‘구원적 성령’과 ‘사역적 성령’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적 성령은 내주하는 성령이고 사역적 성령은 임재하는 성령이다. 그러므로 내주하는 성령은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박영돈이 그토록 주장하듯 회개와 믿음을 통해 활성화 시키는 것이지만, 임하는 성령은 예수님이 위에서 부어주시는 성령이다. 그러므로 임하시는 성령은 제2의 축복처럼 두 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3, 제4, 제5는 물론 제N까지 받을 수 있다.

 

한 성령이지만 그렇게 역사하신다.

이것을 인간의 논리로 ‘이미 받은 성령을 왜 또 받아야 하느냐?’라는 의문을 제시해 본 들 비성경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은 ‘구원 얻는 믿음’과 ‘신뢰하는 믿음’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믿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는 ‘구원 얻는 믿음’(saving faith)이다(요 3:16; 갈 3:5 등). 그러나 ‘믿음’에는 그외에도 하나님의 약속이나 기적적 능력을 믿는 ‘신뢰하는 믿음’(trusting faith)(마 6:30; 8:26; 9:22 등),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믿는 ‘은사로서의 믿음’(고전 12:9), ‘열매로서의 믿음(충성)’(갈 5:22) 등이 있다. 또한,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어도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다(롬 14:1-2).

 

구원 얻는 믿음을 통해 받은 ‘구원적 성령’-내주하는 성령, 구원성령세례-을 통해 성화성령충만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사역성령세례나 사역성령충만을 받아서 담대하게 사역을 펼쳐나간다. 그런데 서철원이나 박영돈을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박영돈은 성화성령충만을 위해 믿음을 갖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사람의 책임이라 해놓고, 사역성령충만을 위해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은 ‘성령론적 율법주의’이라고 비판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더 나아가서 박영돈은 성화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하라고 해놓고, 사역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면, 그것을 위해 얼마나 기도해야 할지 모르며 사람에 따라 평생 기도해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사모하고 기도해도 받지 못한 J.I. 패커의 사례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박영돈이 제시한 방법으로 성화성령충만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박영돈은 뭐라고 할 것인가?

 

 

정리하면, 서철원이나 박영돈의 주장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모르는 영적 무지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신자의 패턴이 되는가?

 

성경적 규범(規範. Norm)은 모든 신자가 따라야 할 성경의 ‘명령’이다. ‘말씀을 사모하라’,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전도하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패턴(pattern. 모범, 본보기, 귀감, 예증, 견본 등)은 규범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본 받을 만한 것들이다. 성경에서 패턴은 명령형이 아니라 서술형으로 기록된다. 이 때문에 단회론자들은 사도행전의 사례들이 오늘날 신자들의 패턴이 되지 못한다고 공격할 빌미를 갖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무엇을 오늘날 신자의 패턴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리차드 개핀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나 사도행전의 성령 받는 사건은 구속사적 사건이므로 오늘날 신자의 패턴이 아니다 라고 해놓고, 만일 패턴으로 삼는다고 해도 성령 받는 사례들이 너무 복잡하므로 무엇을 패턴으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한다.

 

“사도행천 2 장과 기타 그밖의 본문에서 성령은 이렇게 받아야 한다는 식의 영원한 표본을 찾는다면 대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최초 신앙과 동시에 받는가,아니면 그 후에 받는가? 동시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10장과 (아마도 다소 논란의 대상은 되겠지만) 19장이고,그 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과 8장이다.

또 “성령세례”는 물세례 받기 전에 받는가,아니면 물세례 받은 후에 받는가? 물세례 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10장이고,그 후에 밭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8 장파 1 9장인데 2장은 그 전후 표시가 없다.

또 “성령세례”는 안수와 함께 받는가,아니면 안수 없이 받는가? 안수와 함께 받는 것으로 된 곳은 8 장과 19장이고,안수 없이 받는 것으로 된 곳은 2 장과 10장이다. 이와같이 사도행전 2,8,10,19장 사건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볼 때에,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성령 세례의 표본으로 보는 것은 누가의 의도 속에 없는 것을 억지로 접어넣어 해석하는 것이 됨을 알 수 있다”(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p. 29).

 

 

개핀은 사도행전의 성령 받는 사례들이 너무 복잡하여 오늘날 신자의 표본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데, 사실은 개핀의 질문 안에 해답이 내포되어 있다. 즉 누가는 사람들이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니라 개핀이 말한 것과 같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예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행 4:8; 13:9
-기도를 통해 받는다(행 1:14; 4:31; 눅 11:13; 고전 12;31; 14;1)
-찬양할 때 받는다(눅 24:53; 왕하 3:15).
-말씀을 들을 때 받는다(행 10:44).
-안수를 통해 받는다(행 8:17; 9:17; 19:6).
-회심과 동시에 받는다(행 10:47-48).
-회심 후에 받는다(행 8:17; 19:6).-물세례 전에 받는가(행 10:47-48), 후에 받는가?(행 8:17; 19:6).

 

 
 

오늘날에도 누가가 말한 것처럼, 그리고 R.A. 토레이가 제시한 것처럼, 신자들은 ‘은혜의 도구들’(means of grace)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사역적 성령을 받는다. 미국의 제1,2차 영적 대각성 운동 기간이나 요한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의 부흥 기간 중에는 설교 말씀을 통해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하여 사람들이 회심하거나 신체적, 감정적 현상을 나타낸 사례가 많다.

 

오순절 성령 운동의 초기에는 회개와 간구기도를 통해 받은 사례가 많다. 그러나 은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요즈음에는 찬양과 경배 및 안수기도를 통해 사역적 성령을 받은 경우가 많다. 이처럼 성경과 교회사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성령 받는 패턴은 한 가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통로를 통해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세례 문답 교육을 한 후에 세례를 주므로 물세례와 동시에 구원적 성령은 물론 사역적 성령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진정한 믿음과 동시에 구원성령세례를 받지만, 현실적으로 물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진정한 신자인지의 여부는 모르기 때문이다.

 

 

고넬료 집안에서와 같이 회심과 동시에 사역적 성령 받는 경우는 드문 경우지만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실례로, 은사적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이 집회 중에 성령을 받아서 방언도 하는 예언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담당 목사가 그 자리에서 바로 세례(침례)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례가 복잡하기 때문에 교회 시대의 패턴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정리하면, 단회론자들은 성령-주로 구원적 성령-을 받아서 신앙생활 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규범이라고 하면서도 초자연적 사역적 성령을 받아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규범도 아니고 패턴도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사역적 성령’을 받아서 신앙 생활 하고 사역하는 것을 거의 규범의 수준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신학적, 실천적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패턴으로 삼을 것인가?

 

 

패턴으로 삼더라도 ‘무엇을 얼마만큼 삼아야 하는가?’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이단감별사이자 단회론자인 행크 해너그라프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우리의 경험의 본보기가 된다면 왜 방언만 본보기로 삼느냐, 왜 강한 바람과 불의 혀 같은 체험은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가?

고아의 아버지인 조지 뮐러는 시편 68편5절인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를 묵상하던 중 고아를 돌보아야 되겠다는 감동이 와서 평생 고아 사역을 감당했다. 해너그라프의 주장대로 라면, “왜 고아만 돌보았느냐, 과부는 왜 돌보지 않았냐?”고 책망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많은 교단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를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다.

해너그라프의 논리 대로 하면, 오늘날의 교단에 대해 “왜 목사와 장로들이 모이느냐, 성경에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이지 않았느냐,” “왜, 자주 모이느냐, 성경에는 단 한 번 밖에 모이지 않지 않았느냐?” “왜 교단 총회장, 부회장, 총무 같은 임원이 있느냐? 성경 어디에 그런 임원을 두라고 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해너그라프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성경 기록은 ‘예증적 적용’이고 ‘원리적인 적용’이지 ‘문자적 적용’이 아니다. 성경 기록의 핵심 원리는 받아들이되 구체적 적용이나 상세는 상황에 따라 무한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사역성령세례나 사역성령충만을 받으면 방언을 받는다’는 패턴은 교회 시대의 모든 신자에게 적용가능하다. 그러나 나타나는 현상은 시간, 장소 및 사람에게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정리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특별한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을 하고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는 것이 오늘날 신자의 패턴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단회론자들이 자기들의 무경험을 변호하는 인간의 논리에 불과하다.

 

성경 기록은 구속사적 의미도 있지만 개인 경험의 패턴이나 구원의 서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행전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책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 2:38-41 : 3,000명의 회심과 성령 받음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

 

 

단회론자인 존 스토트는 이 구절에 등장하는 3,000명이 오늘날 신자들의 규범이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3,000명이 120명과 똑같이 신비한 현상(급하고 강한 바람,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 방언으로 말함)을 체험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보증 때문에 그들은 똑 같은 약속을 얻었고 똑같은 선물을 받았다 (33절~39 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이러한 차이 점이 있다. 120명 은 이미 중생한 자들로서 10 일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후에야 바로소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3000은 비신자들로서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받자마자 지체 없이 일어났다.

 

이 두 무리,120명과 3000 명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준은 분명히 두번째 그룹 인 3000명이어야지 첫번째 그룹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종종 기대하기는 하지만). 120명의 체험이 뚜렷하게 두 단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단지 역사적인 상황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오순절 전에는 오순철과 같은 선물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은 오래 전에 끝났다. 우리는 3000 명과 같이 오순절 사건 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과 같이 우리도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 곧 ‘세례’를 한꺼번에 받는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세례·충만·열매·은사』, p. 29).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역적 성령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고 해서 3,000명 모두가 ‘사역적, 경험적, 은사적 성령’을 받지 않았을까? 만일 3,000명이 구원의 성령만 받았다면 이들이 어떻게 다음과 같은 성령 충만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이 사람들은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예수 믿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 생활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날 정도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나눠 가지고, 날마다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있다. 단회론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성령’만 받고 이렇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성령 세례를 받은 초대 교인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했고,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기쁨과 활기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했는데 오늘의 신자들은 과연 그런가? 오히려 초대교회보다 ‘더 완전한 성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분이 분명히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인가?

 

 

존 스토트의 표현 대로 3,000명의 모습이 오늘날 신자들의 기준이라면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들 보다 한참 낮은 수준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차이를 존 스토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존 스토트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는 단회론자들이 말하는 성령 세례란 말의 오해로 인한 실천적인 결함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만약 성령의 세례를 중생(좁은 의미)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되면 겉 잡을 수 없는 불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 교인들은 순진하여 성령의 세례를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아직 중생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차영배, “중생과 성령의 세례 및 성령의 충만,” 『성령론』, p. 225).

 

 

이와 관련하여, F. F. 브루스도 누가가 말하는 '성령의 선물'이 구원 사역과 관계된다는 칼뱅의 견해를 인용하면서도 ‘능력을 행하는 은사적인 면’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이 선물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을 포함하지만, 으뜸 가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혜택들이 성령에 의해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혜택들과 우리들에게도 허용이 된 그리스도의 일 사이와의 관계가 누가에 의해 분명히 정립되지 않지만, 여기(행 2:38)에 암시되어 있고 그의 다른 기록에는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F.F. Bruce, The Book of the Acts , Rev., Ed. , NICNT, p. 71).

 

 

윌리암 닐은, 누가의 성령을 구원과 관련된 성령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선물은 베드로의 청중들이 사도들과 그의 동료들이 오순절날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본 새로운 능력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William Neil, The Acts of the Apostles, NVBC, p. 79).

 

 

헨리 B. 스위트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성자(聖子)의 사명은 양자 되는 권리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명은 그들을 사용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전자(성자의 사명)가 성육신 때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진 것과 같이, 후자(성령의 사명)는 역사적으로 오순절날의 성령 강림과 연결된다”(Henry B.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p. 204).

 

정리하면, 사도행전 2장 38절의 성령은 일차적으로 '구원적 성령'을 말하지만 '사역적 성령'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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