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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09] 성령 세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서철원, 박영돈, 정이철의 성령 세례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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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0  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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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검증09]

 

성령 세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서철원, 박영돈, 정이철의 성령 세례관 비판-

 

   
 

 

들어가는 말

 

성령 세례 논쟁은 가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저마다의 견해가 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핵심적 주제만 살펴보기로 한다.

 

성령 세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은 20세기초 방언운동으로 시작된 오순절 파의 주장 때문이다. 오순절파는 ‘신자는 중생한 이후에 성령 세례를 받으며, 성령 세례의 유력한 외적 표적은 방언’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960년 대에 성령운동이 주류교단으로 확장된 은사운동에서는 ‘성령 세례’ 대신에 ‘성령 충만’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성령 체험은 중생과 동시에 또는 이후에 하며, 방언은 성령 체험의 여러 가지 표적 중 한 가지라고 균형있게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 오순절파들은 여전히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기적중지론자(중지론자)와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단회론자) 역시 여전히 오순절파의 주장을 집중 공격한다. 단회론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 세례를 고린도전서의 의미로 해석하여 중생 또는 회심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중생 =성령 세례이므로 중생이후 다시 받는 성령 세례는 잘못된 것이다.

-둘째,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사건들은 구속사적 사건들이므로 개인의 구원의 서정(순서)이나 개인 경험의 패턴(본보기)이 아니다.

-셋째, 사도행전에서 성령 받는 사건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구원성령 받음-중생·(교회 가입)-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따라서 중생 이후에 성령을 다시 받는 ‘제2의 축복’은 없다.

-마지막으로 성령 세례의 유력한 외적 표적은 방언이 아니다.

 

과연 그런가?

오순절파가 성경해석상에 다소 무리가 있지만 단회론자는 오순절파를 비판하려다가 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순절파는 성령 체험 순서 상이 오류, 방언만이 성령 체험의 유력한 증거라는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단회론자는 복음 전파이 유력한 영적 무기인 사역적 성령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그 잘난 신학을 가진 유럽 교회가 텅 비고 미국의 주류 교단들도 쇠토일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외적 능력을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이 전세계적으로 교회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미국의 존 맥아더(그레이스 교회. 매스터즈신대원)나 정이철(「바른믿음」)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성령운동이나 은사운동을 마귀운동이라고 폄하한다. 그런데 어떤 마귀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는지 모르겠다.

 

 

성령 세례 : 중생 또는 회심인가, 회심 이후의 또 다른 성령 체험인가?

 

오순절파는, 신자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이미 중생한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순절파가 말하는 ‘성령 세례는 중생·회심 이후에 오는 또 다른 성령 받음’이다.

 

그러나 단회론자는, ‘신자는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고전 12:13)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 세례-성령 받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리는가?

성경에는 ‘성령 세례’라는 단어가 7 군데 나온다.
복음서에 4번(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사도행전에 2번(행 1:5; 11:16), 고린도전서에 1번(고전 12:13) 나온다. 성령 세례란 말은 7번 모두 동사로 표현되었다.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be baptized into the Spirit. 헬라어. ‘밥티죠 엔 프뉴마’)이다.

 

여기서 ‘성령으로~’란 말은 도구적 표현이 아니라 ‘성령으로의’란 뜻이다. 즉 원어 대로 풀이하면 ‘(예수님에 의해) 성령으로 또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다’는 수동형 표현이다. 명사형으로 표현하면 ‘성령으로의 세례’다.

 

‘세례하다’(밥티조)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씻다, 잠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라는 말은 ‘성령으로 씻음을 받다’, ‘성령 안에 잠기다’는 뜻이다. 전자는 중생의 의미를 나타내지만 후자는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복음서에 등장하는 성령 세례란 단어만 갖고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사용된 성령 세례의 의미를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고린도전서를 살펴보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여기서 말하는 성령 세례는 신자가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는 분명히 구원과 관련된 성령 세례다.

 

그리고 에베소서에는 성화와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기록한다. 그외에도 서신서에는 성령과 관련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롬 8:14)는 구절들을 볼 때 서신서는 주로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고 서신서에 사역적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은 ‘사역적 성령’ 즉 성령의 은사에 대해 기록한다.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성령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행 10:44-48).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임)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6).

 

사도행전 1장5절만 보면 분명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1장8절, 2장, 10장 및 11장을 같이 보면 내용이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베드로는 자신과 제자들이 오순절에 받은 성령을 ‘처음 우리에게 임한 것’(행 11:15), ‘성령 세례를 받았다’(행 11:16)고 표현하는데,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행 1:8)고 하셨고, 사도행전 2장은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표현하고(행 2:4), 성령 충만을 받는 베드로와 무리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2:17-41; 31).

 

 

그렇다면 사도행전만 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행 1:8; 11:15)이 곧 ‘성령 세례’(행 1:5)이자 ‘성령 충만’(행 1:8)이다. 성령이 임하여 그들은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영적 현상을 경험했고, 성령 충만의 결과 베드로를 포함한 120문도들은 모두 방언을 말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다(행 2:14-41). 즉,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구원과 관련된 성령이라기 보다는는 ‘경험적이고 사역적인 성령’(Experiential and Ministerial Holy spirit)을 말한다.

 

 

물론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연관하여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의 요엘의 예언(행 2:17-19)은 물론 에스겔(겔 36:27; 39:29)과 이사야(사 32:5; 44:3) 및 세례 요한(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과 예수님의 약속(요 7:38-39; 14:16; 행 1:5))의 성취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단지 요엘의 예언의 성취로만 기록한다. 요엘의 예언의 내용은 ‘말세에’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기간 중에는 성령이 ‘모든 육체’ 즉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부어지는데 특별히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꿈과 환상을 통해 예언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고넬료 집안 사람들이 받은 성령도 베드로는 자기들의 오순절에 받은 ‘성령과 동일한 선물’이라고 말한다(행 11:17).

 

 

고넬료 집에 임한 성령에 대해 성경은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방언을 말했다’ (행 10:45-46)고 기록한다. 그런데 11장에서는 베드로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 말함으로써 ‘구원적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행 11:18). 그러므로 고넬료 집에 임한 성령으로 고네료 집안 사람들은 구원도 받고 방언 같은 은사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파는 방언 받은 것만 강조하고 단회론자는 구원 받은 것만 강조한다.

 

 

정리하면, 사도행전은 성령 세례란 단어를 ‘구원적 성령’을 전제하면서도 구체적으로는 ‘경험적이고 사역적인 성령’에 대해 더 자세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를 한 단어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 짧은 예시에서도 ‘성령 세례를 받다’, ‘성령 충만을 받다’, ‘성령이 부어지다’, ‘성령이 임하다’, ‘성령이 내려오다’와 같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간단히 아래와 같은 표로 정리할 수 있다.

 

 <표 : 단어 연구-성령세례와 성령충만>

(PC버전으로 보면 그림을 크게 볼 수 있음)

   
출처 : 구요한 저, 『누구십니까 성령님』, p. 174.

 

구원(행 2:8) 및 성화(성품)(행 6:3,5;7:55; 11:24)와 관련된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절대 다수의 경우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은 ‘사역적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고린도전서의 성령 세례는 구원성령세례이고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사역성령세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이란 단어에도 2가지 의미가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행 4:8; 4:31; 9:17; 13:9).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17-18, 20).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21).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을 받으며 방언을 하고 말씀을 담대히 전파한다. 그러나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을 받으면 예배를 잘 드리고 인간 관계가 좋아진다. 전자는 사역성령충만이고 후자는 성화성령충만이다.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은 한 성령이시지만 서로 다른 기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의 성령은 일시적으로 외부에서 역사하여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가 임하게 하거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는 사역적 성령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성령은 중생이나 성화와 관련된 성령이다. 그런데 오순절파는 주로 사도행전의 ‘사역적 의미’로만 성령을 이해하고 단회론자들은 서신서의 ‘구원적 의미’로만 성령을 이해하여 서로가 동문서답하고 있는 것이다.

 

 

저수지에 담긴 물을 순간적으로 방출하여 전력(‘사역적 은사’)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 물이 논밭으로 관개되며 열매(‘성품의 열매’)를 맺는다. 동일한 물이지만 기능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한 성령이지만 기능이 다르다. 그러므로 한 성령의 두 가지 기능을 분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오순절파는 서신서가 말하는 ‘구원적 성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단회론자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오순절파는 사역적 성령을 강조하지만 신자의 점진적 성화도 언급하므로 구원적 성령도 어느 정도 다루고 있다. 그들의 구원의 서정(순서)은 ‘중생 성결 성령 세례 재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회론자들은 ‘구원적 성령’은 강조하지만 ‘사역적, 경험적 성령’은 부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회론자들이 말씀 전파, 기도 및 전도에서 성령의 사역을 부인한다는 말이 아니다. 기적행하는 은사나 초자연적 성령 체험을 부인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는 사역적 성령은 이런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단회론자들의 신학적 오류

 

왜 단회론자들이 ‘구원적 성령’과 ‘사역적 성령’을 분별하지 못하고 ‘구원적 성령’만 인정하는가?
몇 가지 신학적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첫째, 무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매운~’ 이란 단어가 발달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매운 음식을 별로 먹지 않으므로 hot이란 단어로 매운 맛을 표현한다. ‘더운~(덥다)’ 또는 ‘뜨거운~’ hot과 매운 hot이 비슷하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당연히 ‘매운~’과 ‘뜨거운~’이란 별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성령 세례란 단어 해석도 마찬가지다.
단회론자들이 성령 세례를 구원적 의미로만 사용하는 이유는 사역적 성령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는 똑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고린도전서의 구원적 의미로 해석한 후 사도행전의 사역적 성령에 무비판적으로 대입시키는 것이다.

 

건전한 성령 체험이 없으면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단회론자들은 자신들이 ‘무경험의 안경’을 끼고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빨간 안경을 끼고 그림 책을 보면 빨간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단회론자들은 기적중지론이란 빨간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니까 사역적 성령에 대한 기록이 구약의 모세, 요셉, 수많은 사사들, 사울과 다윗 및 수많은 선지자들에게 임한 기록은 물론 신약의 예수님이나 사도들에게 임한 사역적 성령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기들에게 경험이 없으니까 자기들과는 상관 없는 먼 나라 사람들 이야기로만 이해한다. 중지론자들은 이것을 구속사적으로 반복 불가능한 특수한 사건이라는 현란한 용어로 치장한다.

 

그러나 자기가 성령 체험을 해보면 관심이 달라진다.
자기 체험의 성경적 근거를 찾기 위해 성경을 뒤지다 보면 절대 다수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사역적 능력으로 사역했다는 사실이 성경 도처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왜 이 사실을 몰랐을까?”

 

경험이 없으면 있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더라도 관심 없이 지나쳐 버리거나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둘째, 단어를 문맥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한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 있지만 문맥적 의미는 한 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라는 말의 의미를 혼동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한 가지 뜻으로만 사용된 것(univocally)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범한다고 하워드 어빈은 지적한다(Howard Ervine, Spirit Baptism, pp. 28-29; 하워드 어빈, 『성령 세례』).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단어는 사전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될 때는 ‘여러 가지 의미’(equivocally)를 가진다. 그러나 그 단어가 문맥에서 사용될 때는 ‘단어의 뜻이 한 가지’로 결정된다고 어빈은 말한다.

 

“저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정신병에 걸려 미친 사람인지 사업이나 예술이나 학문에 미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말을 한 사람이나 대상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그 뜻을 분명히 가릴 수 있다. 성경에 사용된 단어의 뜻도 마찬가지다. 어떤 한 단어의 뜻이 성경의 문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단회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2장13절의 성령 세례를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고 성령을 받는 구원적 의미’로 해석한 후 사도행전의 사역적 성령 세례나  사역적 성령 받음에 무차별적으로 대입한다.

 

당연히 틀린 해석이 나오기 마련인데 자기들이 옳다고 빡빡 우긴다. 그처럼 문맥적 성경 해석을 강조하는 단회론자들도 초자연적 성령 말만 나오면 건전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기본적 성경 해석 원칙을 무시해 버린다. 건전한 성령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단어를 부당축의 한다

 

부당축의(不當蓄意)는 문맥을 무시한 해석과 유사하다.
부당축의란 '한 단어에 위법적으로 전체적 의미를 전이시키는 것’(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이라고 부른다 (Moises Silva, Biblical Words & Their Meaning, p. 25, 61).  쉽게 말하면 어떤 단어를 한 가지 의미로 해석한 후 동일한 단어만 보면 문맥과는 상관 없이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는 해석상의 오류를 말한다.

 

권성수(전 총신대 교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구원하다’(헬라어 ‘소조’)에는 영혼을 구원하다는 의미는 물론 어려움에서 건져내다 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 때, "나를 구원하소서" (마 14:30)하는 말에서 '구원'을 설명한다면 부당축의하게 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엡 1:17)에서, ‘계시’라는 말을 잡고 설(교)자가 "일반 계시가 어떠하며, 특별계시가 어떠하다"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부당축의이다.  여기서 계시는 ‘조명’에 대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권성수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부당축의할 수 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공부 많이 할 사람일 수록 그렇다.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부당축의한다”고 말한다(권성수, 『성경해석학 특강』. http://www.imr.co.kr/Aftp_data/web_board/%EC%84%B1%EA%B2%BD%20%ED%95%B4%EC%84%9D%ED%95%99%EA%B0%95%EC%9D%98(%EA%B6%8C%EC%84%B1%EC%88%98).hwp).

 

 

단회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2장13절의 의미로 성령 세례를 해석한 후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에 부당축의 하고, 성령 충만도 에베소서 5장 18절의 의미로 해석해 놓고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에 부당축의 해놓고 오히려 오순절파를 책망한다. 동일한 성령 세례란 단어라도 구원성령세례와 사역성령세례, 성화성령충만과 사역성령충만을 구분하지 않으니 서로가 동문서답을 하는 격이다.

 

박영돈(고신대 교수)이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하다.
박영돈은 한국 교회에 성령 충만의 구체적 의미와 내용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아 많은 혼란을 초래한다고 해놓고 정작 자신이 더 헷갈리게 용어를 정의한다. 박영돈은 누가와 바울의 성령 충만을 구분해 놓고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얼버무린 후 서신서의 ‘성화성령충만’을 부당축의하여 사도행전의 사역성령충만의 의미에 덮어 씌운 후, 성령충만의 결과는 열매라고 주장한다(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 81-87).

 

누가는 사역적인 성령 충만과 인격적인 성령 충만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인격적인 성령 충만은 형용사형으로 그 사람의 성품의 일부로서의 성령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행 6:3, 5; 7:55 등).

 

그런데 박영돈은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을 이런 의미로만 연결시키고 사도나 성도들이 방언을 하고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성령 충만(행 2:4; 4:8, 31; 9:17; 13:9)은 무시해 버린 후, “성령 충만을 누가(사도행전)와 바울(에베소서) 중 누구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적절한 질문이라고 할 수 없다” (박영돈, 같은 책, pp. 87-88)고 잘못 결론지어 버린다.

 

박영돈의 책들을 보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신학적, 논리적 꼼수를 다 사용하여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을 부인하려고 안깐힘을 다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넷째,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

 

성경 각 권은 나름대로 기록 목적이 있다.
사도행전은 행 1:8의 말씀처럼, 성령을 받은 사도와 동역자들이 반대자들의 핍박과 저항을 무릅쓰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이 What(목적)이라면 사도와 동역자들이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아서 전파하는 것은 How(방법)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방법이 시원찮으면 목적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단회론자들은 '목적'은 인정하지만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누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도하고 사도행전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은 야전전투교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신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서 회심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교리적, 관계적, 윤리적 문제를 다룬 책이다. 따라서 서신서는 내무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 전쟁을 잘 하려면 전투규범을 잘 숙지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질서와 규율을 잘 지키지 않으면 유능한 군인이라고 할 수 없다. 도한 아무리 생활규범을 잘 지켜도 전투를 잘 하지 못하면 유능한 군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순절파는 전투는 강조하지만 생활을 강조하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삶에 문제가 많다.

 

그러나 단회론자들은 생활은 좀 건전할지 모르지만 전투를 잘 하지 못하여 영적 출산율이 낮다. 아무리 생활 잘 해도 영적 출산율이 낮으니까 교세가 쇠퇴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도행전과 서신서는 상호보완적이지 흑백논리가 아니다.

 

 

단회론자들은,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시대에 사도와 동역자들이 예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땅끝인 이방인 고넬료 집안과 에베소까지 복음을 전하여서 구속사적으로-그들에게 ‘구속사적~’이란 말은 약방 감초다-‘약속’을 ‘성취’했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터 위에 상부구조만 세워가면 되므로 기적은 더 이상 필요 없고, 서신서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된다’고 잘못 가르친다.

 

이들에게 사도행전은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나 선교 지침서가 아니라 서신서를 연구하는 역사서에 불과하다.

 

바울은 선교지에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갇히면서 서신서를 기록했다. 성경 해석에서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중요하다는 학자들이 왜 사도 바울처럼 선교 여행을 통해 서신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가.

 

“삶의 정황”을 중시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당시의” 삶의 정황보다는 “자신들의” 삶의 정황—이성적이고 문명화된 현대 사회의 삶-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 같다. 편안한 상아탑에 안주하면서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해석하니 성경 기록의 의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관념적, 추상적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잘 난 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잘못 가르쳐서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인하니까 유럽 교회가 텅 비고 미국의 주류교단들이 쇠퇴 일로에 있는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마틴 로이도 존스는, 신약의 교회들은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체험한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라고 한다. 이는 사도행전을, 서신서를 해석하기 위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전통적 견해를 일축하는 것이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사도들도 기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우리가 기적 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우리가 사도들 보다 더 잘났다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Martin Lloyd-Jones, The Sovereign Spirit, pp. 32-33).

 

번 포이트레스(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는 사도들이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기적이 필요했다면 오늘날 교회가 없는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도 기적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Vern Poythress, Miracles Class 강의,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다섯째, 성령 세례라는 단어는 전문 술어가 아니다

 

성령 세례라는 말은 어느 한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전문 술어(technical term)가 아니다. 단어를 전문 술어로만 해석하는 오류는 앞에서 말한 문맥적 해석이나 부당축의와 비슷한 오류지만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어떤 단어를 ‘전문적인 술어’로 간주하여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경우 신학자들의 편견 때문에 발생한다고 D. A. 카슨은 지적한다(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pp. 45-48; 『성경 해석의 오류』).

 

전문 술어란, 신학자들 자신이 주장하는 성경의 어떤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성경의 몇몇 구절이나 신학자 개인의 조직신학으로부터 연유된 용어를 말한다. 전문 술어는 성경의 진리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교육을 위해 상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 하나님이지만 세 분의 다른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을 말하는 삼위일체(Trinity),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이신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등이다.

 

그러나 성경이 다양한 의미로 말하거나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보편적인 술어를 좁고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는 전문 술어로만 해석할 때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개혁·보수신학자들은 ‘계시’라는 말을 전문 술어로 간주한다. 이들에 의하면 ‘계시는 곧 기록된 성경’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마치 성경 기록에 무엇을 더하고,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서슴지 않고 이단이라고 정죄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계시’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계시하다(동사. 아포칼립토), 또는 명사형인 계시(아포칼립시스)라는 말은 분명히 전문 술어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계시하다’, ‘계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웨인 그루뎀(미국 피닉스 신대원 교수)은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Wayne Grudem, The Gift of Prophecy, pp. 81-83).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롬 1: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제대로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하나님께서 실수하는 자들의 실수를 나타내시는 것(빌 3:15), 진노를 나타내시는 것(롬 1:18),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아가는 것(엡 1:17),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마 11:27) 모두를 성경은 ‘계시’라는 말로 표현한다. 여기에 사용된 계시라는 말이 ‘기록된 특별 계시인 성경’을 의미하는 전문 술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카슨은 ‘기록된 특별 계시인 성경’과 ‘성경이 말하는 계시’를 동일시 하는 것은 개신교의 조직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성경 저자가 말하는 용어를 혼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D. A. Carson, 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 Baker, 1987, p. 163).

 

 

성령 세례라는 용어 사용에 혼란도 이러한 오류 때문이라고 카슨은 지적한다.

 

“성령 세례”라는 말은 어떤가? 은사주의자들은 경험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회심 후 일어나는 성령의 넘쳐흐름(effusion of Spirit)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부 반(反)은사주의자들은 고전 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을 묵상한 후에는, 은사주의자들과 동일한 잘못을 저질러서, 이 말을 신약성경에서 모든 신자들이 회심 당시에 받는 성령의 넘쳐 흐름으로 간주한다.

………………………………………….

재미있는 사실은 청교도들은 어떠한 극단적인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라는 구(phrase)를 일관성 있는 전문용어로 택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며, 그들은 그 말이 “성령이 넘쳐흐름(effusion in Spirit”, 또는 “성령에 잠김 (inundation in Spirit)”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부흥을 위해서, “오, 우리에게 새롭게 성령 세례를 주옵소서!”라는 의미로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D.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pp. 46-47).

 

 

김명혁(전 합신대 교수)도 한 번 채워진 성령은 계속 오셔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오순절적 성령운동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보수주의 또는 개혁주의적 성령론이 함께 존재해왔는데,이와 같은 성령론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현재적인 체험적 요소를 지나치게 위험시해왔다. 그러나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이 절대적 표준으로 말씀을 강조한 것은 크게 공헌한 일이다. 물론 거기에도 문제점이 내포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개혁주의 성령론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강조했는데,단회성 보다는 오히려 독특성을 강조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그리스도 오심의 단회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한 번 오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더 충만히 오신 것처럼,한번 오신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더 충만히 오신다.

 

우리는 성령의 존재와 사역이 어떠한 하나의 신학적 체계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체험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바울은 평생 그리스도를 더 충만히 알기를 소원하며 기도했다. 성령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충만히 채우시옵소서!”(김명혁, “한국교회의 성령론,”『한국교회 쟁점 진단』, p. 104).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신자는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지만(신분적 회개), 계속 회개해야 한다(성화의 자녀). 후자를 부인하면 구원파 이단이 된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구원성령세례를 받았지만 사역성령세례를 계속 받을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성령 세례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말한 문맥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을 무시하고, 성령 세례라는 단어를 부당축의 하여 지나치게 전문 술어로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단회론자들은 성령 세례를 고전 12:13의 중생의 의미로 해석한 후, ‘예수를 믿고 거듭난 신자는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시 구하거나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거듭난 사람이 다시 거듭나게 해달라고 구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므로 고전 12:13의 의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은사주의자들이 거듭난 사람도 성령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니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날드 메크레오드 같은 단회론자가 보기에는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메크레오드는 자기가 잘못 이해하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잘못 주장한다.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에 할례를 더했으며 중세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에 결백한 완전주의를 더했다.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에 성령 세례를 더했다”(도날드 메크레오드 지음, 지상우 옮김, 『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여수룬, 1988, p. 91).

 

 

J. I. 패커도 성령의 은사적인 측면을 말하지만 성령 세례라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12:13의 의미로, 성령 충만은 에베소서 5:18의 의미로 이해한다(J. I. Packer,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pp. 90-91).

 

패커는, 12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두 단계—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의미--가 필요했지만, 오순절 이후의 사람들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구원을 통해 성령 세례를 한 번만 받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패커 또한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성령세례와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구원성령세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오순절파들은 자기들의 경험이 뒷받침하고 사도행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단회론자들이 ‘신자는 모두가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을 반박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말조차 부정하는 단회론자들의 신학을 의심하기도 한다.

 

헨드리쿠스 벨콥이 말한 것과 같이, 오순절파는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라는 의미로 고전 12:13의 성령 세례를 해석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고전 12:13의 의미로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라는 말을 해석했기 때문에 서로 오해의 골만 깊어진 것이다(헨드리쿠스 벨콥 지음, 『성령론』, 성광문화사, 1985, pp. 134-39).

 

 

그 외에도 성령 세례에 대한 마틴 로이드 존스(마틴 로이드 존스, 『성령 세례』), R.A. 토레이(R.A. 토레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와 그의 후손인 대천덕(대천덕,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 등이 한국 신자들에게 꽤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구분 또한 다소 매끄럽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견해를 소개하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므로 이곳에서는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여섯째, 서신서를 사도행전 보다 해석상의 우위에 두는 잘못을 저지른다

 

단회론자들은 ‘교리를 확립시키는 데 있어서 성경의 교훈적인 부분이 역사적인 부분에 비해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교리와 경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역사서(주로 이야기 체로 기록된 사도행전, 복음서 등)가 아니라 교훈서(특히 바울의 서신서)를 주요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책의 서두에서 노골적으로 이런 주장을 한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난 이 계시는 우선 교훈적인 (didactic) 면에서 추구되어야지 묘사적인 (descriptive)것에서 추구되어서는 안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사도들의 설교들 그리고 그 글들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순전히 이야기체의 부분 속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나는 지금 묘사적인 것은 교훈적인 것에 의해 해석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들 중에 사건을 묘사하는 어떤 것은 자기 해석적인 것도 있다. 그 까닭은 그것이 설명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은 독립적으로는 해석될 수 없고 단지 다른 곳에 주어진 교리적인 가르침과 윤리적 가르침에 비추어서만 해석될 수 있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p. 14)

 

 

그러나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는 이러한 접근방법은 “성경 안에 성경”(Canon within the Canon)을 인정하는 비성서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

 

성경은 역사적인 부분이나 교리적인 부분이나 똑같이 우리의 신학작업에 중요하다. 경중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성경이 다 일곱번 풀무에 연단된 금보다도 귀하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계시는 서로 연결되지 아니하는 낱말이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그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역사적인 유기체이며, 하나님의 여러 증거들과 하시는 일들에 관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인 체계이다.’

 

윤리적인 교훈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교를 윤리적인 것에만 집착하여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칸트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역사서나 시편이나 선지서나 다 신학의 원리요 근원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표준으로 삼고 다른 것을 격하시킬 수 없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오히려 계시의 역사에 착근하고 있을 정도로 구원의 역사는 중요하다”(차영배, “J. Stott의 문제점,” 『성령론, pp. 205-206』).

 

 

존 스토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서 방언하고 능력 행한 것은 우리의 본이 아니고 성도들이 회개하여 성령을 받는 것이(행 2:38). 우리의 본이라고 주장한다.

 

 차영배는 이러한 주장은 자가당착이라고 비판한다.

 

“그(스토트)는 오순절에 3,000명이 단번에 회개한 사실과 120명이 성령의 약속을 기다린 후에 받은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3.000명이 하루에 회개한 사실은 이례적(異例的)이라고 하면서도, 죄사함과 성령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것은 그후의 교인들의 구원 서정에 적용해야 할 표준(norm)이 된다고 하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성령에 관한 교리는 사도행전에 있는 서술적인 부분으로부터 구성되어서는 안된다고 해놓고는,왜 3,000명이 하루에 단번에 죄사함과 성령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서술적인 부분을 표준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하루에 단번에 세례도 받고 동시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지 조차도 확실치 않은 일을 가지고 교리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가? 여기에 기록된 서술적인 부분은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0-41)라고 되어 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말씀도 없고 다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기도에 힘쓰나라”(행 2:42)라고 함을 보아,이것은 120명이 오순절 이전에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4)라고 함과 비슷하다. 물론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선물을 받은 흔적이 보이지 않고,비록 받았다 할지라도 3.000명이 다 받았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서술적인 부분이 Stott자신의 원리대로 한다면 “표준”이 될 수 없다. 만약 이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자가당착이다”(차영배, 같은 책, pp. 204-205).

 

 

잭 디어(전 미국 달라스 신대원 교수)도 “성경 안의 성경”을 인정하는 듯한 주장을 몇 가지로 나누어 비판한다(Jack Deere, Surprised by The Power of The Spirit, pp. 111-15).

 

첫째, 신학자들은 교리 정립을 위해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꾸준히 이용해왔다. 칼뱅 이래로 개혁신학자들은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요 6:44와 행 13:48을 인용했다.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은 선교와 전도학을 가르치기 위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의 정치 제도를 결정한다(행 20:17이하). 모든 사람들이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사용하여 교리를 만든다.

둘째,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그 자체가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신학서이다.

셋째, 서신서를 역사서보다 우선시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서신서는 물론 모든 다른 성경이 교훈하기에 유익하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주된 교리도 역사서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정리하면, 단회론자들은 자기들의 교리 정립에 필요하면 구약은 물론 신약의 기사체에서 인용하면서, 유독 은사주의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사역적 성령과 성령을 다시 받는 사실에 대한 교리를 채택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비성경적이다’, ‘우리의 본보기가 아니다’, ‘누가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구절은 구속사적으로 비반복적이다’는 등 온갖 신학적, 논리적 이론을  동원하여 반대한다.

 

그러다가 정작 자신이 성령 체험을 하면 이런 신학과 논리가 얼마나 허황한가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은사운동 교회 성장의 80% 가까이가 전통적 교회 교인들의 ‘전입을 통한 성장’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웅변적으로 증거해주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신학적 편견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단회론자들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 신학적 편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신학인 기적종지론의 영향.

 

서신서의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사와 이적은 사도 시대에 끝났다는 기적종식론자들이다. 이들에게 사도 행전에서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의 결과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초대 교회 시대의 특수한 현상으로만 ‘설명해 버린다’(explain away).

 

이런 일은 특수한 시대에 살은 특수한 사도나 동역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보통 시대에 사는 보통 신자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자기들이 초자연적 은사를 구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것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 참조 : “기적중지론(우측 배너)”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5&view_type=sm)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이해에 대한 오류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편재나 성령의 내주는 인정한지만 성령의 임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이나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Theophany) 즉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고, 불의 혀같이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함께 끝났다고 믿는다.

 

그 결과 모든 신자는 성령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신자가 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미 받은 구원을 더 받거나, 빈 양동이에 물을 채우는 것처럼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한다.

 

 비록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시지만(indwelling presence), 그들 자신의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성령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에게 오감으로 느낄 정도로 체험적이고 관계적으로 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것을 하나님의 임재 또는 현재(manifest presence)라고 한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자료 참조 : “’4.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바른 이해-[신학검증(7)]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1)” 『글로리아타임스』, 2017. 8.7.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04)

 

 

구속사적 성경 해석의 오남용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증거하는 책이다(요 5;39; 눅 24:27, 44).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라고 한다.

 

이것까지는 좋은데 대부분의 전통적인 학자들은 이것을 오남용하여, 성경에 기록된 표적과 기사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특수한 시대”에 산 “특수한 사람”들인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성경 기록을 위해 행한 “특수한 계시적 사건들”인데 성경의 기록은 완성되었으므로, 표적과 기사는 더 이상   오늘날의 신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다.

 

(자료 참조 : “[성경해석] 구속사적 해석과 기적중지론,” 『글로리아타임스』, 2016.4.23.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21)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석과 체험적이고 감성적인 해석

 

오늘날 위세를 떨치는 개혁 신학이나 서구 신학은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더 나아가서 이보다 더 질이 나쁜 법정변론적 논증 방식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법정변론적 논증 방식이란 이해 당사자가 법정에서 공방하듯, 자기는 다 잘했고 상대방은 다 잘못했다는 가정 하에 논증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의 결점은 대부분이 “A가 아니라 B”(Not A, but B)라는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즉 ‘내가 옳으므로 너는 틀렸다’는 식의 논증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A는 물론 B”(both A & B)라는 주장도 상당히 많다. 피조물을 초월하지만 피조물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사람의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사람이신 하나님 등등.

 

법정변론적 논증에 의한 서구 신학의 한계가 요즈음 활발하게 거론되고 있다. 지식을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하는 서구 신학 방법은 이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의 본산인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들의 모습을 보라. 초라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한편 오늘날 교회가 급성장하는 미국의 독립 교회들, 아프리카의 독립 교회들, 남미의 풀뿌리 교회들, 중국의 가정교회들은 모두 성경에 기록된 대로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이다.

 

 (자료 참조 : “’4.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신학검증(7)]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1)” 『글로리아타임스』, 2017.8.7.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04)

 

 

 

성령 세례’의 바른 해석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고전 12:13과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를 각각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전 12:13의 성령 세례는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구원성령세례를 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는 외적인 능력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사역성령세례를 말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증인이 되는 외적인 성령의 능력을 받는 일을 성령 세례라는 한 단어에 국한하지 않는다. 성령 충만, 성령을 부어주심, 성령이 임함, 성령이 내려오심 등의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구약(특히 사사기)에서, 성령이 임함, 성령에 감동됨이라는 말은 사도행전의 용어와 같이 외적 능력을 입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능력 또는 권능’이란 말도 서신서에서는 구원과 관련되는 중생 성화 등 내적으로 역사하는 능력이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외적인 능력으로 사용되었다.

 

 

성경에 의하면, 이미 거듭나서 고전 12:13의 성령 세례를 받은 (거듭난) 신자도 사역을 위한 능력을 입는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행 2장). 이 성령 세례는 거듭남과 동시에 받을 수도 있고(행 10장), 이후에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받을 수도 있다(행 8장, 19장).

 

또한 이미 받은 성령도 하나님의 주권적 부어주심을 통해(행 4:8; 13:9), 간구 기도를 통해(행 4:31; 눅 11:13; 고전 12:31; 14:1), 안수를 통해(행 8:19; 9:17; 19:6), 말씀을 들을 때(행 10:44), 찬양이나 예배 중에(눅 24:53; 왕하 3;15) 등 다양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기록한다. 은혜의 도구들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성령재충만을 받는다는 말이다.

 

조지 휫필드나 조나선 에드워즈가 주도한 영적 부흥기에는 설교를 통해 성령이 강하게 임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개인의 간구기도나 찬양이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임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이런 식으로 성령 재충만 받는 것을 서철원(전 총신대 교수)이나 박영돈(고신대 교수)처럼 ‘조건 이행을 통해 성령을 받는다’고 폄하하면 신앙 생활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 생활 자체가 말씀, 기도, 찬양과 같은 은혜의 도구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 재충만은 또한 한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받아야 한다. 안토니 훼케마 D.A. 카슨은 신자는 ‘제2의 축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축복, 제4의 축복, 제5의 축복 또는 그 이상의 체험도 가능하다고 말한다(Anthony Hoekema, Saved By Grace;『개혁주의 구원론』; D. A. Carson, 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 p. 163)).

 

필자도 이 주장에 동의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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