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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8)]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2)주창자들 :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개핀, 고재수, 김재성, 박영돈, 서철원, 유태화 및 정이철, 조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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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13  19: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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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08]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2)

주창자들 :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개핀, 고재수, 김재성, 박영돈, 서철원, 유태화 및 정이철, 조믿음 등 –

 

   
 

들어가는 말

 

오순절 성령 강림 단회론은 명시적 성경 기록에 위배되는 비성경적 주장이라는 사실을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다.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순절에 임하시고 부어진 성령이 이후 사마리아, 고넬료 집안 및 에베소에도 계속 임하고 부어졌다.

 

둘째, 성령은 지금도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 오순절에 한 번 임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셋째,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말세(last days. 마지막 날들)에는 모든 육체 즉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계속 부어진다.

 

넷째, 하나님은 편재, 내주 및 임재이 방식의 존재하신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임재인데 이런 임재는 구약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나 기적중지론자는 은사주의자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들은 ‘무경험에 근거한 인간의 논리’로 성경의 명시적 기록을 부인하거나 축소해석하는 횡포를 번번히 연출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단회론자들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인 논리로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주장하는가를 살펴보자.

 

 

단회론의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937~1920)는 화란의 헤르만 바빙크 및 미국의 벤자민 워필드와 함께 3대 칼뱅주의 신학자로서 화란의 수상을 역임했고, 영역주권론 등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 정립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다.

(*영역주권론. 교회와 세상 권력은 각자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건설적으로 비판하고 견제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주장) 

 

그러나 이런 뛰어난 신학자들도 기적중지론에 대해서는, 마치 이전까지 잘 작동하던 두뇌가 갑자기 오작동을 하는 것처럼, 성경을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인간의 논리를 전개하여 성령을 소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 결과 카이퍼와 같은 기적중지론자의 주장을 나름대로 잘 났다는 신학자인 제임스 던, 존 스토트, 리차드 개핀 및 이들의 영향을 받는 박형룡(전 총신대 교수), 박윤선(전 총신대교수), 고재수(전 고신대 교수. 화란인. N.H. Gootjes), 서철원(전 총신대 교수), 김재성(국제신대 교수), 박영돈(고신대 교수), 박형용(합신대 교수), 유태화(백석대 교수), 이승구(합신대 교수) 및 정이철(「바른믿음」), 조믿음(「바른미디어」)등이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히려 나쁜 가지를 쳐서 기적중지론이나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더 정교하게 악화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의 주장 -아브라함 카이퍼

 

여기서는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개핀, 김재성, 박영돈 서철원 등의 단회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허황한 주장인가를 간단하게 밝히고자 한다. 이들의 주장은 상세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큰 줄거리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카이퍼는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카이퍼는 성령 하나님은 편재(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다”는 말씀도 성령의 이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편재성이 물질계에만 해당되고 영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계에서는 편재, 내주 및 특별한 임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카이퍼는 ‘저수지’ 비유로 설명한다.

구약 시대에는 각자가 성령이란 빗물을 받아 간직하여 사용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이 ‘공동 저수지’에 저장되어 있으므로 개인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이 수도꼭지만 틀어서 각자가 원하는 대로 물을 받아서 사용하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 이상 더 명백하게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자화자찬(?) 한다.

 

그러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지만(행 2장) 오순절 이후에도 사마리라(행 8:16-17), 고넬료 집(행 10:44-45) 및 에베소에 임한 성령(행 19:6)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카이퍼는 오순절 이후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은 ‘옛 저수지’와 ‘새 저수지’ 비유를 사용한다. 당시 화란의 로테르담 도시에는 옛 저수지와 새 저수지가 있었다. 한 수원지에서 옛 저수지에 먼저 물을 채운 후, 옛 저수지와 새 저수지로 연결된 수도관을 통해 옛 저수지의 물을 유출하여 새 저수지에 충만하게 채웠다.

 

이 비유를 사용하여, 카이퍼는 교회도 유대인 교회(옛 저수지)와 이방인 교회(새 저수지)로 나누어졌는데, 시초에는 옛 저수지에만 부어졌다가 이후에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성령의 흐름이 교회의 다른 부분-이방인의 새 저수지-에도 쏟아지면서 교회 전체가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도시대에 사도들을 통해 기적이 따르는 성령을 받는 ‘특별한 방법’과 교회 시대에 기적이 따르지 않는 성령을 받는 ‘보통의 방법’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당시에 체결된 언약 안에 들어와서 교회의 씨에 속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관을 신설될 필요가 없이, 이미 존재하는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카이퍼는 설명한다.

 

그러면서 카이퍼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이제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이것이 무모하고 정당치 않는가를 알 수 있다. 오순절에 교회와 더불어 또 성령의 강림이 우리 가운데 반복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알 수 있다.

누구든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면 이는 결국 오순절 이적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대개 이미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또 다시 우리에게 오실 수 없다”(차영배,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a. Kuyper의 견해와 문제점.” 『성령론』, 46에서 재인용).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는 카이퍼의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견해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카이퍼의 이런 황당한 주장은 당시 카이퍼의 추종자들로부터도 성경적 주장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 영향을 받은 인간의 논리라면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황당한 주장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자기들의 무경험을 변호해주는 ‘좋은(?) 신학’이기 때문이다.

 

카이퍼의 단회론의 오류가 무엇인가? 사실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비판한 자료는 드문 실정이다. 그러므로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의 비판을 기초로 필자의 비판을 가미하여 정리해 본다.

(자료 참조 :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A. Kuyper의 견해와 문제점,”  29-58;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관한 R. B. Gaffin교수의 견해와 문제점,” 59-102;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전제설 비평,” 129-170; “성령 강림을 위한 기도의 타당성을 부인한 A. Kuyper의 견해 비평,’ 283-92; “고재수 교수의 성령으로의 세례에 관하여,” pp. 407-44).

 

 

첫째, 카이퍼는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 말하면서 ‘신학 작업을 성경이 아니라 예증으로 대체했다’.

 

카이퍼는 처음에는 좀 성경적으로 하다가 정작 중요한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는 ‘저수지 예증’으로 일관했다. 카이퍼 주장의 오류도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고전 4:6 참조), 성경이 가지 않는 곳에 지나치게 많이 가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일은 신학화 작업을 하는 학자들에게 특히 심한 질병이다. 마치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처럼, 한두 가지 마음에 드는 구절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다른 구절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거나 마음이 들지 않는 구절은 축소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비성경적 주장을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적중지론,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 및 다음에 다룰 성령 세례 논쟁이 대표적인 프로쿠르테스의 침대 같은 주장들이다.

 

 

둘째, 카이퍼는 성령의 편재성(부소부재)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이동을 부인한다.

 

카이퍼는, 이미 만물에 편재하시는 성령의 공간 이동-위에서 부어지는 ‘수직 이동’-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이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저수지에서 다른 저수지로 유출하는 ‘수평 이동’은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카이퍼도 구약의 성령에 대해 잠시 언급했듯이, 편재 내주 및 임재에 대한 하나님의 3가지 존재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성령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재하시지만, 신자 안에 내주하시고 또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재로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카이퍼와 같은 단회론자들이 부인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부인하면 단회론자가 되기 마련이다.

 

 

또한, 성령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더 이상 강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말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예수님이 계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성경(행 2:33; 요 15:26)과 ‘필리오께 교리’ 및 삼위일체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통해 이미 위에서 밝혔다.

 

그런데 단회론자들은 이런 구체적 증거들은 외면하고 카이퍼 류의 잘못된 신학에 현혹되어 사이비 신학인 단회론을 주장하고 있다.

 

 

서철원은 성령강림 단회성에 대해 이렇게 잘못 주장한다.

 

성령은 한번 파송되어 온 후 교회와 함께 영구히 계시지 (요14:16), 하늘로 가셨다가 청구하면 또 오시는 것이 아니다. 또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도 한번 오시면 영구히 계시지 떠나가셨다가 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방신들의 세계에나 있는 것이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3천명에게로 거처를 확대하실 때(행 2:41) 하늘에서 다시 파송받아 오신 것이 아니다. 당일에 오셨던 성령이 많은 무리가 에수 믿어 성령을 받을 때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성령을 액체에 비유하는 오순절파의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고, 현대 신학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정신 혹은 감화력으로 말하는데서나 가능하다.

성령이 감화력있는 액체나 공기이면 그렇게 계속 하늘로부터 반복해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방식으로 인류에게 오시지 않는다.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시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

………………………….

처음 오순절시 성령강림은 그 뒤 성령의 오심과는 그 특성이 다르다. 그것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성령이 인류에게 처음 오시는 종말론적 사건이고, 그 다음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은 보충적 부어줌이나, 반복적 강림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주거를 확장하시기 때문이다. 오순절은 결코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나시지 않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서철원, 『성령신학』, 총신대학출판부,  1995, pp. 83-84).

 

서철원의 주장은 명시적 성경 기록과 다르다. 서철원은 이 짧은 글의 여러 군데서 성령은 하늘로부터 다시 올 수 없다고 거듭 반복한다.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성경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여러 군데서 성령이 ‘내려왔다’(행 8:16-17), ‘떨어졌다’ 또는 ‘부어졌다’(행 10:44-45)고 기록한다. 서철원의 주장대로 라면 성경 기록을 고쳐야 할 판이다.

 

서철원은 또한 “처음 오순절시 성령강림은 그 뒤 성령의 오심과는 그 특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베드로는 ‘같은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베드로와 더불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고넬료 집안 사람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우리는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당연히 인간의 논리를 내세우는 서철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의 말을 믿어야 한다. 즉 오순절에 임한 성령이나 이후에 임한 성령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차이가 있다는 말이 이상한 말이 된다.

 

서철원은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다음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은 '보충적 부어줌이나 반복적 강림이 아니라, 성령이 주거를 확장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는가?
주거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새롭게 내려오시고 새롭게 부어지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 10:44-45).

 

제발 좀 성경 대로 하자.

 

서철원의 행동대장인 정이철은 한 술 더 뜬다.

 

성령을 더 받아서 부흥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신자에게 오신 성령이 더욱 풍성하게 다스리시고 인격적으로 지배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부흥을 이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성령을 더 부어주심으로 부흥이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무력해진 장난감 로봇에게 더 강한 새 배터리 (battery)가 장착하여 활력을 주는 이치,즉 물질세계의 에너지 법칙과 같은 수준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격하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오순절 운동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식인데, 로이드 존스도 같은 방식으로 성령의 부흥을 설명하였다”(정이철,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GNP BOOKS, p. 214).

 

정이철은 성도들이 성령 재충만을 받는 것을 빈 양동이에 물을 다시 채우거나 장난감 로봇에 배터리를 갈아 끼우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인간적 상상에 의한 주장이고 예화 사용도 잘못되었다.

 

성도는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신분은 동일하지만 ‘성화의 정도,’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정도’ 및 ‘사역을 위한 능력을 받는 정도나 빈도’는 다르다. 그러므로 정이철 처럼 성령 재충만을 빈 양동이에 물을 채우거나 로봇에 배터리를 재충전하는 비인격적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웨인 그루뎀의 ‘풍선 비유’가 더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풍선에 공기가 적게 들어있어도 풍선이 공기로 ‘충만’할 수 있지만 공기를 더 주입해도 풍선은 더 늘어날 수 있으므로 ‘더 충만’해 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신앙이 성장해 감에 따라 ‘성숙’이나 ‘사역’을 위한 성령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온전하신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은 한량 없는 성령을 부어주셨다(요 3:34). 그러므로 신자는 신앙의 성숙도나 사역의 크기에 따라 성령을 더 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한다고 그루뎀은 주장한다 (Wayne Grudem, “Baptism in and Filling with the Holy Spirit,” Systematic Theology, p. 782).

 

 

서철원 류와 유사한 주장은 ‘인격체이신 성령을 모시는 신자는 성령을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성령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인데 어떻게 우리가 많이 가지기도 하고 적게 가지기도 하는가?

-성령 하나님을 우리 안에 이미 모시는데 어떻게 다시 받는다고 하는가?

 


성령론을 전공했다는 유태화(백석대 교수)는 ‘이미 성령을 받은 신자는 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면서 다음 같이 잘못 말한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너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오셨는데 그런데 교회생활을 경험하면서 성령 받으라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성령을 또 다시 받아야 되는 것인가 이런 오해가 생길 수 있겠지요. 그러면 성령은 다시 오실 수 있는가? 다시 오시기 위해서라면 나를 잠깐 버리고 나가셔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불편한 생각이 있을 수 있는데요.

사실은 우리가 ‘성령 받으라’는 이런 표현은 예수를 처음 소개 받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표현이 될 것 같아요…….그러나 이 경험과 함께 성령을 모신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쓰임새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성령을 모신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 성령님으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시고 당신의 영혼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런 의도를 담아서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함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이렇게권면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 믿고 성령을 모신 사람들에게는 다시 성령을 받으세요, 혹은 다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세요, 이렇게 권면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도 옳다 그런 생각이 들고요”(유태화, “성령 받으라는 표현이 문제가 될 수 있나요?” 『바른 미디어』동영상. 2017. 8.12. 시청).

 

그러면 베드로가 오순절 날(행 2:4), 제사장 들 앞에서(행 4:8), 합심 기도를 한 후에 받은 성령 충만(행 4:31)은 무엇인가? 베르도가 받은 성령 충만은 분명히 바울이 말하는 성령 충만(엡 5:18)과 다른 성격이다.

 

유태화가 말한 대로 ‘바울이 말하는 성령 충만’(헬라어. 플레로오)은 현재진행형으로 성령이 지속적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맺어지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와 관계된 성령 충만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을 하고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성령충만을 3번이나 받았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충만 동사(헬라어. 핌플레미)는 (부정)과거형으로  성령이 사람의 외부에서 잠시 임하여 사역을 하게 하다가 사라지는 성령 충만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성령 받는다’고 할 때의 성령은, 신자가 이미 내주하는 성령을 받았더라도 사역을 위한 성령을 다시 받으라는 말이다. 유태화 같은 단회론자들은 이 둘의 차이를 모르니까 이런 혼동을 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 “[신학검증(2)]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론 비판(1)” 글로리아타임스」,  2017.6.18.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97)

 

 

‘성령을 (다시) 받으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이처럼 비성경적이 되고 이단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한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삼위일체는 성경이 말한 그대로를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인간의 논리로 이해하여 어떻게 하나님이 삼위로 계실 수 있느냐, 이는 하나님이 집에서는 가장이고 직장에서는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장로라는 식으로 설명하면 양태론(樣態論) 이단이 된다.

 

마찬가지로 단회론자들은 이런 어려운 주제에 대해 성경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성경에 의한 교리를 세우지 않고, 건방지게 인간적 논리로 설명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차영배는 서철원 류의 단회론은 ‘이단적’이라면서 혹독하게 비판한다.

 

서(철원) 교수는 '성령께서 세상에 오심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오셨다'고 했는데 성경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밝혀야 한다. 더욱이 단번에 오셨다면 '신자들이 오신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된다'고 했는데 이미 오신 성령을 어떻게 모시는지 궁금하다.’

한번 오신 성령이 어디에 계시는가?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불신)은 받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막연한 자연 세계인가? 성령은 이미 어디든지 계신다(시 139편; 창 1:2).

120명 속에? 교회당에? 사도들 속에? 대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디 계신다는 말인가? 120명 위에 누구 위에 임하셨던가? 불의 혀같이 갈라져 각자(120명)위에 임한 것이고 그밖에 어디에, 누구 위에 임하셨단 말인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사도들 속에? 신자들 속에? 이들에게서 오늘날까지 성령이 나오신단 말인가? 이것은 이단사상이다. 도대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디 계시며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면 할수록 이단사상에 빠지는 것을 예외 없이 보아온 필자는 이렇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차영배, “’서철원의 성령 세례와 구원에 대한 논평-성령대토론회.” 『목회와 신학』).

 

 

셋째, 소수의 사람들이 성령을 대표로 받을 수가 있는가?

 

카이퍼는 성령이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모든 때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의 몸 교회에 임하였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대표의 원리를 적용하여, 성령의 강림이 고넬료 가정에 임할 때 이전까지 유대인 교회에만 임하던 것이 이방인에게도 임하여 이제는 전체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식으로 교회의 다른 부분에도 임함으로써 비로소 온 몸이 성령을 마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대표성 원리’에 의한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이 구속 사역을 모든 성도에게 적용하는 성령 체험에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카이퍼의 주장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과 이후의 고넬료 가정이나 에베소 교인들이 모든 이방인 성도들을 대표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이 되는데, 그렇다면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행 2:38)는 필요 없는 구절이 되어 버린다.

 

 물론 카이퍼는 오순절에 성령이 단회적으로 부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수도관을 통해 각 가정에 연결되는 비유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한다.

 

 

넷째, 성령이 저수지에 저장되어 있다면 다른 저수지로 흘러가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사도시대에는 사도들의 복음 전파나 안수기도로 가능했지만 오늘날에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다른 성도에게 어떻게 흘러가는가?

 

카이퍼는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오신 성령은 옛 도시에 쏟아 부어졌고 다음에 신 도시로 넘쳐 흘렀으며, 전에 있던 물이 단지 “유출”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이 성령과 관련되어 사용되면 어떤 곳으로 달리 퍼져가는 것을 말하므로,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과 똑 같은 뜻이 된다.

 

유출은 그 유출 과정에서 성령의 변질을 전제하는데, 성경 어디에도 성령이 변질된다는 말은 없다. 굳이 ‘저수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주(主) 저수지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고, 성도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보조 저수지라 할 수 있다.

 

고재수도 카이퍼와 유사한 ‘유출론’을 주장한다.

 

이 말씀(요 7:38,39)은 생수가 신자의 속에 있을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흘러나올 것을 강조한다. 오순절 이후로는 믿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된다”(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 p. 55).

 


차영배는 이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5. 오순절 이후에는 믿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될 수 있을까?

 

대체 누가 이렇게 가르치던가? 캄펀신학대학의 어느 교수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는가? 아니면 어떤 책에 있던가? 해방 후의 개혁신학자들이 쓴 「성령」(de Heilige Gees)이란 책을 보면,요한복음 7장 38,39절에 나오는 “생수의 강이 그의 속에서 흘러나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속에서 흘러나리라고 해석하였다. 나는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 교수와 같이 신자들의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신자의 속에 있을 것을 강조하지 않고,오히려 흘러나올 것을 강조한다’고 하여 놓고는,곧 덧붙이기를 ‘믿는 자가 다른 사람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생수인 성령이 믿는 자의 속에 계시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첫째 의문이고, 둘째로는 믿는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속에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흘러나오며, 또 다른 사람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이렇게 되면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 될 수밖에 없는데,과연 유출된단 말인가? ‘다른 사람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일이다” (차영배, “고재수 교수의 ‘성령으로의 세례’에 관하여,” 『성령론』, p. 441-42).

 

 

아이러니컬 한 것은 서철원이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을 다시 받는 것을 유출에 비유한다’는 사실이다.

 

당일에 오셨던 성령이 많은 무리가 예수 믿어 성령 받을 때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액체에 비유하는 오순절파의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고,현대 신학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정신 혹은 감화력으로 말하는데서나 가능하다. 성령이 감화력 있는 액체나 공기이면 그렇게 계속적으로 하늘로부터 반복해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방식으로 인류에게 오시지 않는다.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사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 (서철원, 성령신학, pp. 83-84).

 


정이철도 서철원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로이드 존스가 오순절 신학으로 무장하고서 성령운동을 벌이는 불건전한 자들에게 만만히 여겨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중생한 신자들에게 능력과 부흥을 주시는 성령의 세례가 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정이철, 『가짜 성령세례』, 210-11).

 

그러나 카이퍼 식으로 설명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들이 ‘유출론자’들이 된다. 이미 와서 저수지에 저장된 성령이 수도관을 통해 다른 곳으로 유출되기 때문이다.

 

 

차영배는 성령은 유출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저수지(?)인 예수님이 계속 성령의 기름을 부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라는 말씀도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름부음을 주시는 분이다(요1:33).

그는 언제나 항상 기름을 부으신다. 이것은 명령보다도 더 강한 말씀이다. 기름부으심 곧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무이다……… 보좌 우편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에 선성의 충만이 넘치고, 일곱 눈 곧 일곱 영이 그에게 있어, 이 영을 온 세계에 보내시며, 누구든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쏟아 부으셔서,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신다.

믿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값없이 생수를 마시면,그 배에서 기쁨의 강물이 넘쳐 흐른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곧 성령이 충만하게 넘친다.
 (차영배, 『성령론-성령론 부교재』, pp.  41-42).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충만은 예수님이 부어주실 수도 있고(행 2:4 등), 내주하는 성령을 활성화 할 수도 있다(엡 5:18 참조). 신자들이 ‘은혜의 방도들’(수단들)인 말씀, 기도, 찬양 및 안수기도 등을 부지런히 사용하면 위로부터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기도 하고 성도 안에 내주하는 성령이 활성화되기도 한다.

 

필자는 다양한 성령 경험을 통해, 부어주시는 은혜와 활성화되는 체험-흘러나오는 은혜-을 모두 경험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두부 자르듯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역을 위한 성령’은 분명히 나의 외부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은 인격적 변화나 감화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화적 성령은 내부에서 역사한다. 제대로 치유하고 회개했을 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데(요 7:38-39), 이는 외부에서 성령이 임하여 누리는 것과 비교하여 빈도나 지속성에 차이가 있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부어주시는 은혜에는 익숙하지만 흘러나오는 은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비은사주의자들도 말로는 내적 성령의 활성화라고 하지만 회개가 부족하여 깊은 영적 체험에는 잘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사적 사건이므로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는가?

 

이 주장의 대표적 주창자 리차드 개핀(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인데 그의 주장의 요지는 두 가지다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Perspective on Pentecost).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그리스도의 획기적, 절정적 사건들 특히 부활 및 승천과 직결된 단일복합체로 간주하여,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단회적이듯 성령 강림도 단회적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오순절 사건은 개인의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리차드 개핀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여러 주장에 더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후에 발흥한 구속사적 성경 해석을 가미한 ‘사이비 신학’이다. 개핀의 주장을  박윤선(전 총신대 교수), 박형용(합신대 교수), 김재성(국제신대 교수), 박영돈(고신대 교수) 및 총신대, 고신대 및 합신대의 많은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추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럴듯하고 현학적인 용어 사용에 미혹되어 이 주장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황당한 주장인가를 모르고, 마치 이런 구속사적 주장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비판해 보자.

 

첫째,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성령 강림은 단일복합체이기 때문에 ‘성령 강림은 단회적이라는 주장’의 허구는 무엇인가?

 

 물론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직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 및 승천이 있어야 성령이 강림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단회적이기 때문에 그와 직결된 성령강림도 단회적이라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필자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조직신학자들이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은 희한한 원리(?)를 도출하여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자기들의 무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희한한 주장과 논리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단회적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대신하고 반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모든 성도에게 계속 적용해 나가시는 분이다(엡 1:3-14). 그러므로, 성경은 말세에 예수님이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계속 부어주신다고 기록한다(행 2:17, 33; 요 15:26).

 

그리고,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이 오순절에 임한 것은 약속이나 예언 성취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예언 외의 성경의 많은 예언은 한 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성취’된다. 이것은 행 2:17에 기록된 ‘말세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고, 모든 육체는 오순절 이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까지 지속된다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고 교회사의 영적 부흥이 이를 증거한다.

 

영적 부흥이 성령의 재강림이 아니면 어떻게 달리 설명할 것인가? 이미 강림하신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부어졌는가, 아니면 단회론자들의 말대로 내주하던 성령이 갑자기 누구에 의해 왜 활성화 된 것인가?

 

 

둘째, 오순절 사건을 ‘개인의 경험’이나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의 오류가 무엇인가?

 

단회론자이자 중지론자들은 한때 이런 신학 저런 주장으로 기적중지론을 주장하다가, 물 만난 고기처럼 ‘구속사적 해석’을 맹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여러 군데서 밝혔지만, 구속사적 해석이 모범적 해석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학자들의 잔치에 불과하다.

 

구속사적 해석법은 생선의 뼈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생선 뼈를 위해 생선을 구입하는 사람이 없듯, 아무리 구속사적 해석의 뼈대가 중요하더라도 모범적인 살코기가 풍성해야 제대로 된 생선이다.

 

더군다나, 중지론자나 단회론자들은 기적행하는 은사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해서만 구속사적 해석을 들이민다. 그외 모든 다른 기록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자기들 필요에 따라 본보기로 삼는다.

 

더 나가아서 개핀은, 사도행전 1장8절의 약속이 일반 신자가 아니라 사도들에 대한 약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시대의 개막이고 사도와 동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사도행전 1장8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인 이방지역까지 복음이 전하여서 예언을  성취했으므로 사도행전의 역할을 그것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Richard B. Gaffin, Jr., “A Cessationist View,” in Wayne Grudem,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Kindle edition).

 

 

독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런 황당한 주장을 믿는가?

중지론자들과 단회론자들은 자기들의 무경험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구절들은 말 도 안 되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부인하는 데 개핀의 이런 주장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중지론자들이 이런 식으로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하니 유럽의 교회는 텅 비고 미국의 주류 교단들도 쇠퇴 일로에 있는 것이다. 비록 신학적으로 다소 흠이 있어도 사도행전의 성령 체험을 신자들의 본 보기로 삼은 은사적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회론자도 성경 기록을 패턴(본보기)으로 삼는다

 

개핀은 또한, 구속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회적으로 완성되었던 사도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한 사건들’이므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모범으로 삼으면 성령세례를 최초신앙과 동시에 받는 여부와 물세례 받은 후에 받는 여부가 모두 혼선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 경험한 사례가 너무 복잡하여 우리가 본 받기 어려워서 우리의 본으로 삼을 수 없다고 개핀은 주장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개핀의 이런 황당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필자는 유명한 신학자들이 이처럼 뒷머리가 없이 소심하고 좀팽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황당한 주장을 보라.

 

어떤 중지론자는, 만일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사역을 한 것이 우리의 본이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출애굽 백성들처럼 홍해의 물 벽을 통과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또 어떤 중지론자는 방언 받은 성경의 기록이 우리의 본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 같은 형태의 집에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다른 어떤 중지론자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 쫓은 것은 우리의 본이 아니고 평범한 우리는 잘못하면 스게와의 아들처럼 될 수 있으므로(행 19:14-16) 축사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중지론자나 단회론자들은 성경의 기적행하는 역사만 나타나면 자기들의 무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주장 저런 핑계를 대면서 우리의 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중지론자나 단회론자들이 기사체를 신앙의 본으로 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맹세도 하지 말고 서원도 하지 말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바울이 서원한 것을 지켰기 때문에(행 18:18), 신약의 신자도 서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2장).

 

성경에는 교단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단 한 군데 있다. 바로 예루살렘 공회이다(행 15:1-21).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단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 무교회주의자들이 교단 제도나 정치를 공격하면 성경에 있는 것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성경 도처에 무수히 많이 기록된 성령 능력 체험은 이런 신학, 저 논리를 대면서 부인한다. 방언에 대해서는, 방언이 그렇게 중요하다며 왜 고린도전서에만 기록되어 있느냐, 왜 아브라함, 요셉이나 예수님은 방언했다는 기록이 없는가 라며 반문한다. 사실 방언은 행 2장, 10장 및 19장, 고린도전서 12장, 13장 및 14장에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성경 주제 중에서 방언이란 한 주제에 대해 이만하면 많이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정이철의 무리들은 방언 갖고 생떼를 부리고 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외적 능력으로 사역한 기록이 도처에 널려있는데도 그것은 구속사적으로 ‘특수한 시점’에서 ‘특수한 사람들’이 행한 ‘특수한 사건’이므로 우리의 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것이 바로 그 잘 난 ‘구속사적 해석’이다.

 

이런 구속사적 해석이 교회 시대의 성도가 성경을 이해하고 신앙생활 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동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만 될 뿐이다.

 

 리차드 개핀의 제자인 박영돈도 당연히 이렇게 주장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의 종말론적 소망과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인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새 시대의 도래와 새로운 성전으로의 교회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특별한 구속사적 의의를 띤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단번(once-and-for-all)에 이루어진 결정적 사건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오순절 전의 구시대로 돌아가 성령의 오심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성령이 와계신 새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은 계속 우리를 인도하며 충만케 하신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를 충만케 하는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에 단회적 성격을 띤 성령충만의 사건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 94).

 


김재성도 리차드 개핀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주장한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이 단번에 완성하셨다(the once for all accomplishment). 오순절의 성령강렴도 단번에 세상에 임하셨다. 지금 우리 시대에 똑같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non-repeatable).

또한 모든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2장과 꼭 같은 내용의 오순절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성령을 사모하는 일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혹은 특수한 교회시대에 오순절이 반복되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연속적으로 흘러나가는 성령강림의 체험을 나눠가지면 된다.

우리는 오순절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되,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오순절이 있지만,사도행전 2장과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교회에서 모두 똑같이 오순절체험을 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은 반복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모든 부분들이 다시 반복될 수도 없는 것과 똑같다”(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p.117).

 

 

정이철도 앵무새처럼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특별계시가 진행되고 있었던 사도행전의 시대와 완성된 특별계시인 신구약 성경으로 신앙생활하는 지금 이 시대의 신앙 방식이 같을 수 있겠는가? 특별계시의 수납자였던 바울 사도와 다른 사도행전의 인물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특별한 방법이 어찌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대입될 수 있겠는가?” (정이철, 『가짜 성령세례』, 10-83).

 

한때, 고신대에서 강의했던 화란인 고재수(N.H. Gootjes)도 비슷한 주장을 하지만 구원의 서정과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 사건들의 계열에 속하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성령을 부어 주심이 중심이다. 물론 이 말은 성령을 부어 주심이 개별적 신자의 신앙과 생활에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모든 사건들이 다 개별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다시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바로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물론 되풀이될 필요는 없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심도 우리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오순절의 이 사건이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 pp. 45).

 

 

고재수는 그러나 신자가 사역을 위한 성령을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있는 성령을 활성화하여 성화에 전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단회론자와 동일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능력을 주는 성령을 제 2 차적 단계로 받들고 준비하라는 명령을 찾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살펴본 금지와 명령들은 회중이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

4. 요사이 한국에서 교회가 약화되었다는 불평이 많이 들리고 있다. 그 이유로서 성령님이 없거나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힘이 없다는 것들이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한국 교회가 잃어버련 성령님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자 개인으로서,그리고 신자 모두가 교회로서 성령을 다시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결과는 그 해결책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는 성령님을 받았고 성령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완전히 안 계신다면 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죽은 교회일 뿐이다”(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 pp. 60-61).

 

고재수의 이런 주장은 ‘구원적 성령’과 ‘사역적 성령’을 구분이 부족에서 오는 대표적 오류이다. 물론 사역을 위한 ‘성령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는 아직 다루지 않았으므로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러나 사역을 위한 성령을 다시 받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사도행전에서만 베드로는 성령을 3번 받아서 방언을 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행 2:4; 4:8, 31). 그런데 이런 기록이 명령형이 아닐 서술형이라서 우리의 본이 되지 못한다면 성경의 모든 서술형이 본이 되지 못하는가?

 

다른 ‘서술형’-교단(행 15장), 서원(행 18:18) 등-은 너무나 당연하게 교리나 본으로 삼으면서 초자연적 현상만 나타나면 우리의 본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은 무엇인가? 사도신경의 대부분의 내용이 서술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렇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기들의 무경험으로 성경 진리를 난도질하는 횡포가 아닌가?

 

사도들에게 나타난 기적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났고 교회 시대의 본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약방 감초처럼 애용하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자기들의 전통을 성경과 동격에 두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과 일부 극단론자들의 직통 계시를 부인하기 위한 신학-성경의 충분성, 계시 종료론-인데 요즈음에 와서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성경 완성과 기적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이 조작해 낸 신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목적이나 동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다양한 동기와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출 14:4; 요 11:4; 행 3:12-13 등).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요 3:2; 9:32-33 등).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고전 2:4; 고후 12:12; 히 2:4; 롬 15:18).

-복음 전하는 자에게 따른 표적으로(막 16:17-18).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마 12:28 등).

-불쌍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마 4:14; 15:32 등).

-믿게 하기 위해서(출 14:31; 왕상 18:39; 요 2;11; 7:31 등).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마 8;5-10; 9:1-2,22,27-29; 행 14:8-10).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왕상 17:1-16; 17-24; 18:41-46 등).

-기도의 응답으로(약 4:2하; 5:14-16)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목적이나 동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기적중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성경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서 사도들과 관련자들을 통해서만 특별히 기적을 행하셨다’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 주장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자신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기적의 은사를 구하지 않는 핑계나 변명에 불과하다.

 

 

차영배는 리차드 개핀 류의 대표성 이론과 구속사적 해석에 의한 단회성 주장을 이렇게 비판한다.

 

"성령은 교리에 진술된 그대로 항상 위로부터 하늘 곧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신다. 각자에게 오신다. 이것이 곧 신의 주권을 높이는 칼빈주의다.

누가 그렇지 않다 하는 자 있는가?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120명 모두에게 이들의 구원 서정상 필요했다. 사도들이나 우리들이나 다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도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행 1:4,5). 성령 세례는 구원 서정에 반드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미 목욕했지만 성령세례가 필요했다. 전적으로 바빙크의 말을 빌리면 전존재의 변혁이 필요했다.

구원의 서정이란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덕'을 말한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이야말로 사도들에게 주신 큰 은덕이었다.

선물이라는 말이 이미 은덕임을 보인다.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덕이요, 이 도덕들의 순서가 구원의 서정이다. 120명은 의롭다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순절에 영화롭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서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학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차영배, “서철원의 성령 세례와 구원에 대한 논평.” 『목회와 신학』).

 

 

 

샘 스톰즈(Sam Stormes. 세계복음주의협회 회장)도 오순절 성령강림을 ‘개인 경험의 본보기’나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개핀의 주장을 반박한다.

 

개핀은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 혜택이 지속적인 적용이나 계속적인 활용이 아니라 구속적으로 단회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날에 일어난 일은 이후 크리스천의 경험을 위한 영속적인 패러다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유례없이 부어진 사례는 단회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후의 크리스천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처럼,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나는 하늘로부터의 급하고 강한 바람이 아니라, 사도행전 2:5-21에 기록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 및 환상이나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단회적인가?’를 질문해 봐야 한다. 오순절은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사역의 시작이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오순절이 ‘독특’하지만 동시에 ‘시작’이니까 오순절을 언급하는 것이다.

개핀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메시야 사역이 정점에 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용어는 오순절이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메시야 사역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왜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셨는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에게 오순절 전망은 ‘구속사적 단회성’과 ‘미래의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Sam Stormes, “A Third Wave response to Richard B. Gaffin, Jr.,” in Grudem, Wayne.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Kindle edition).

 

 

김영재(전 합신대 교수)도 나름대로 두 견해를 절충하려 애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일어난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상호 관련된 사건이라고 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지칭할 때처럼 '단회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단회적'이라고 할 경우, 그러한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에 언제든지 임하시고 내주 하시며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령이여 강림하사…"하는 찬송을 주저하면서 부르게 만든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단회적인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행하심이 오늘날에도 나타날수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하는 일에 대체로 소극적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그러한 교회는 이신론자(理神論者)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 하심에 대한 신앙이 실제로 희박한 것을 본다.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18, 19세기에 있었던 부흥운동에 대하여 다른 교파에서와는 달리 소극적인 견해를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많아서 교회가 일시적인 분열(1741 ∼1758)을 경험하기도하였다. 미국 장로교회의 교세가 침례교나 감리교의 교세보다 훨씬 떨어지게 된 것이 우연한 사실이 아님을 고려해야 한다.

장로교회 내에서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교회의 수는 다른 교파 교회에 비하여 훨씬 적을 뿐 아니라 보수적인 장로교회 혹은 개혁파교회의 성장이 다른 복음주의적인 교회에 비하면 정체적이라는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김영재,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의 이해의 새지평’-성령세례론의 쟁점과 전망,” 『목회와 신학』, 1994년3월호).

 

 

 

나가는 말

 

이상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미 성령 체험을 한 사람에게 이 글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성령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학구적 욕구가 있거나 긴가민가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글이 있으면 단회론자들이 마구잡이로 반복론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만 해도 필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주여, 이미 성령 체험을 한 사람은 물론 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옵소서!
계속 반복적으로 부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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