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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7)]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1)주창자들 :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개핀, 서철원, 고재수, 김재성, 박영돈, 정이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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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07  00: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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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07]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1)

- 주창자들 :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개핀, 서철원, 김재성, 고재수, 박영돈, 정이철 등 –

 

   
 

 

- 글 순서 -

들어가는 말

단회론자와 반복론자들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의 성경적 오류들

1. 단회론은 성경의 ‘명시적 기록’에 위배된다.
2. 성령은 지금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계속 나오신다’.
-필리오케(아들로부터)

3. 말세에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지금도 계속 부으신다.’

4.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편재, 내주 및 임재

5. 경험적 해석이냐 무경험적 해석이냐?
-점진적 계시와 점진적 조명
-제2의 축복 교리는 칼뱅주의 청교도가 원조
-경험을 통해 견해를 바꾼 신앙의 선배들
-성경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한 학자들

결론 :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

 

 

들어가는 말

 

방언·예언·신유 및 축사가 사도 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는 ‘사이비 신학’이 곧 기적중지론(은사중단론. 이하 ‘중지론’)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런 기적행하는 은사들이 교회 시대에도 계속된다는 주장을 기적계속론(은사지속론. 이하 ‘계속론’)이라고 하는데 요즈음 은사운동이 채택하고 있는 성경적 주장이다.

 

중지론과 맞물려서 오늘날의 은사사역을 대적하는 또 하나의 ‘사이비 신학’은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설 또는 단회론(이하 ‘단회론’)이다. 단회론은 오순절에 성령이 한 번 강림하였으로 이제 더 이상 성령은 다시 강림하지 않는다는 ‘사이비 신학’이다.

 

단회론자들은, 성령 강림이 오순절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주장(‘반복론’, 또는 ‘지속론.’ 이하 기적계속론의 ‘계속’이란 단어와 구별하기 위해 ‘반복론’이라 부른다)은 경험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하는데, 단회론이야 말로 무경험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대표적 오류이다.

 

초기의 반복론자의 주장에 다소 흠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 시대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성령 강림을 부인한 단회론의 폐해가 교회에 끼친 악영향이 훨씬 더 크다.

 

반복론은 다소 신학적 오류는 있지만 성령 강림을 계속 사모하고 구하고 받아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단회론은 아예 성령 재강림의 가능성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 유럽 교회가 텅 비고 미국의 주류교단이 쇠퇴하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대표적인 악성 사이비 신학이다.

 

 

단회론자와 반복론자들

 

대표적인 단회론자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아브라함 카이퍼, 제임스 던, 리차드 개핀, 존 스토트, 존 맥아더박형룡(전 총신대 교수), 박윤선(전 합신대 교수), 고재수(화란인. N.H. Gootjes. 전 고신대 교수), 김재성(국제신대 교수), 박영돈(고신대 교수), 박형용(합신대 교수), 서철원(전 총신대 교수), 이승구(합신대 교수) 및 정이철(「바른믿음」)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정이철은 대표적 단회론자인 서철원의 행동 대장이 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복론자들을 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반복론자는 외국의 마틴 로이드-존스, D.A. 카슨, 하워드 어빈, 샘 스톰즈 및 대부분의 기적계속론 신학자나 은사 사역자들 및 김명혁(전 합신대 교수), 안영복(전 고신대 교수), 이한수(총신대 교수), 정원태(전 개신대 교수),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 최갑종(백석대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의 성경적 오류들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성경적, 신학적 및 경험적 오류가 많은 잘못된 주장이다.

 

 

1. 단회론은 성경의 ‘명시적 기록’에 위배된다.

 

단회론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한 번 강림한 것으로 끝이 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명시적 기록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성경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성령이 내려오셨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사마리아에서 ‘성령이 내리셨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행 8:15-16).

 

-고넬료의 집에서도 ‘성령이 내려오셨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 10:44-45)

 

“15. 내(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5-16).

 

내리다’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핍토’로서 영어의 fall upon(떨어지다, 낙하하다)이란 뜻이다. 단회론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후 다시 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마리아나 고넬료 집의 성령은 어디서 떨어진 것인가? 이미 임한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떨어졌는가? 오순절 이래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계속 부어주신 것이다.

 

고넬료 집에 성령이 내려오셨고, 임하셨고, 부어지셨는데 베드로는 이것을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성령 세례’라고 표현했다.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자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나의 스승이셨던 박윤선 박사께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를 따르시다가 1978년 경에는 철회하셨다. 오순절 성령은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강림하신다. 이에 관한 약속을 성경이 확약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외쳤다(행 2:38-39).

 

오순절 성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시면,우리는 결코 칼빈주의자가 될 수 없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중에 ‘전적 무능’(total inability)한 인간이 성령을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오순절 성령을 받음으로 가능하다” (차영배, 『성령론』, 재판, 2007, pp. 6-7).

 

 

정리하면, ‘성령이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강림하셨다’는 주장은 명백한 성경 위반이다.

 

 

2. 성령은 지금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계속 나오신다’.

 

웨스트민스터 2장3절은 삼위일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성부는 누구에게 속하시지도 않고, 어디에서나 나신 바 되지도 않고, 나오시지도 않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현재형) (The Father is of none, neither begotten nor proceeding; the Son is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예수)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이처럼 성령은 성부에서 나오셔서 성자이신 예수가 계속-현재진행형- 부어주신다.

 

*필리오케
 

필리오케(라틴어: Filióque)란 '아들에게서(아들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를 경계할 의도로 서방교회가 라틴어로 번역한 신경(信經 )에 처음으로 첨가하였다.

 

헬라어 신경 원문 중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라는 구절은 라틴어 신경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게 되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갈라지는 요인이 되었고, 개신교는 서방 교회의 전통을 따라 필리오케를 주요 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필리오케 교리에 의할 때, 성령은 지금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계속 나오신다. 계속 나오시는 성령이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섭리적으로 다스리시고, 성도와 교회에 오셔서 성부가 계획하시고 성자가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성도와 교회를 통해 계속 적용해 가신다.

 

 

3. 말세에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계속 부으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행 2:17).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소수의 특별한 사람-모세, 요셉, 여호수아, 사사, 선지자 등-에게 임하여 사역을 하다가 금방 떠났다. 이때는 ‘하나님의 영이 (~위에) 임했다’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민 11:25; 삿 3:10, 11:29, 14:6, 삼상 10:10 등). 복음서는 물론 사도행전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된다(눅 1:41-42; 2:27; 마 3:16; 눅 4:18-19; 행 1:8; 10:38 등).

 

여기에 사용된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의 감동으로’(In the Spirit), ‘성령의 충만’은 모두가 사역을 위해 잠시 임했다가 떠나는 성령을 묘사한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보다 더 다양한 단어들, 즉 ‘성령 세례를 받다’, ‘성령 충만을 받다’, ‘성령이 부어지다’, ‘성령이 임하시다’, ‘성령이 오시다’, ‘성령이 내려오시다’, ‘성령을 받다’ 등을 사용한다.

 

즉, 구약 시대와 예수님의 공생애 시대에도 사역을 위한 성령이 임했지만 ‘모든 육체’ 즉 모든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임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여기서 말세 (last days)는 복수이다. 말세는 한 날(one day)이 아니라 ‘마지막 날들’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하루에 성령이 강림하고 더 이상 강림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마지막 날들에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의 예언은 복합적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 및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은 물론 구속사적으로 한 묶음으로 중요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사역은 성령을 통해 이후의 모든 신자에게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행 2:17은 직접적으로는 요엘 2:28-32의 성취이기도 하지만, 다른 예언과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이기도 하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26절의 새 영은 새롭게 된 사람의 영혼을 27절의 내 영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해석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이 구절들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임하시는 성령(사역적 성령)에 대한 약속이자 동시에 내주하시는 성령(구원적 성령)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을 ‘사역적 성령’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만 이해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내주를 통한 ‘구원적 성령’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만 이해한다.

 

 

헨드리쿠스 벨콥이 지적한 것처럼, 은사주의자들은 누가의 사도행전적 관점에서만 성령을 이해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바울의 시신서적 관점에서만 성령을 이해하니 오해의 골만 깊어지는 것이다 (헨드리쿠스 벨콥, 『성령론』, pp. 134-39).

 

최갑종(백석대 교수)도 비은사주의자들이 성령에 대해 주경신학적(성경신학적. biblical theologically)으로 접근하지 않고 지나치게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여 이해의 폭이 좁아졌다고 지적한다(최갑종,『예수·교회·성령-누가와 바울의 성령론에 관한 연구』, pp. 13-14).

 

정리하면, 은사주의자들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비은사주의자들이 제시한 잘못된 대안이 교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사역적 성령’의 지속성도 강조하고 나름대로 ‘구원적 성령’도 말하지만, 비은사주의자들은 ‘구원적 성령’만 강조하고 ‘사역적 성령’의 지속성을 부인하니 전세계적으로 교세가 쪼그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4.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피조물은 동일한 시간에 한 장소에 밖에 존재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곧 하나님의 편재(무소부재), 내주 및 임재이다.

 

- 편재 또는 무소부재(Omni presence)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렘 23:24; 시 139편 등). 이 때문에 신자는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

 

- 내주(Indwelling presence)

믿는 자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 부드럽고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이다. 기도를 도우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찬양할 때 마음을 적시고 따스한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11, 15; 고전 6:19; 요 14:20; 요일 3:24; 4:3). 이런 성령은 신자 안에 영원히 거주하시면서 신자의 구원을 도우신다(요 14:16-17, 26; 고전 6:19; 갈 4:6; 약 4:5 등).

 

대부분의 전통적 교인들은 하나님의 편재와 내주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또 다른 양식인 하나님의 임재 또는 현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성경에는 있지만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지도 않고 경험도 드물기 때문이다.

 

- 임재 또는 현재(顯在. Manifest presence)

경험적이고 현상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고전 2:4; 12:7).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처럼 나타나시기도 하고(출 3:2),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지만(출 3:2; 수 5:13-15), 많은 경우 지진, 뇌우, 번개, 폭풍과 같은 현상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한다(출 13:21). 오순절 성령강림 때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행 2:2-3).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현재’(顯在) 또는 현현(顯現)(manifestation of God 즉 theophany)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 체험, 은사 체험은 하나님의 현재 체험 또는 임재 체험이기도 하다.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하여 하나님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육체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내주는 모든 신자에게, 임재는 소수의 신자에게

 

성령의 내주는 모든 신자가 경험하지만 성령의 임재는 소수의 신자들만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은사주의자들과 경험하지 못한 비은사주의자들이 갈라진다.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의 인물들이 경험해왔고, ‘사모하고 구하라’(눅 11;13; 고전 12:31, 14:1 등)는 성경 말씀대로 사모하고 구하여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은사주의자들은, 사모하고 구하지 않아서 경험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나 오랫동안 사모하고 구했지만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그런 경험은 성경 인물들에게나 해당되는 ‘특수한 경험’이지 모든 신자가 가져야 할 ‘보편적 경험’은 아니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누가 옳은가?

둘 다 옳을 수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첫째, 이런 경험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

 

어떤 사람은 원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어떤 집회에 한 번 참석했다가 모든 초자연적 은사를 받고 신령한 경험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오랫동안 방언이나 다른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둘째,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성경에서 바울(사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초자연적 은사나 임재 체험을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행 9:3-9),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는 경우도 많다(고전 12:31; 14:1, 13, 39; 눅 11:13 등).

 

 

*은사와 능력을 사모하고 구하는 것이 잘못된 ‘조건 이행’인가?

 

서철원(전 총신대 교수)이나 박영돈(고신대 교수) 같은 비(非)·반(反)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행위를 ‘조건 이행’으로 폄하한다(서철원, 『성령신학』, pp. 41-47; 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 98).

 

박영돈은 은사주의자들이 성경 대로 ‘성령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조건을 요구하는 율법적 오류를 드러낸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성령충만하기 위해 신자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 ‘성령의 생수를 맛보아야 한다’, ‘성령과 겸손히 동행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이 신앙생활 하는 모든 것이 ‘조건 이행’이 된다. 왜 신자들이 주일이나 주중에 교회 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가?

 

첫째,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고, 둘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수단들'(means of grace)을 제대로 부지런히 사용할 때 은혜를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비은사주의자들도 그렇게 한다. 그게 조건 이행인가? 물론 조건 이행이다. 그러나 ‘성경적 조건 이행’이다.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은혜의 수단들을 제대로 열심히 하는 성도들이 은혜도 더 많고 신앙도 더 성숙한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신령한 은사와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는 경우가 많다(눅 11;13; 고전 12;31; 14:1 등). 그런데 비은사주의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은사를 부인하는 책들이나 글들만 잔뜩 보면서 쓸데 없이 비판의 칼만 예리하게 갈고 있다.

 

그게 당사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성경 대로 사모하여 구하고, 필요하면 은사자의 안수기도도 받아보라. 생각 보다 은사나 체험이 쉽게 임한다. 그런데 전통적 교인들 중에는, 워낙 기적중지론자들이나 단회론자들이 은사가 위험하고 잘못하면 마귀에게 잡힌다고 겁을 주어서 초자연적 은사나 능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하면 마치 하나님이 귀신이라도 붙여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풍성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구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주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좋은 선물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성령’이라고 누가는 말한다. 이 선물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그런데 대충 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도를 갖고 강청하는 기도를 하는 자에게 주신다(눅 11:5-13).

 

 

위에서 밝힌 것처럼 어떤 사람은 쉽게 받고 또 다른 사람은 어렵게 받는다. 그런데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에 대해 비판하면서 10년 동안 성령 세례 즉 방언 체험하지 못하는 사례를 제시한다(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 p. 78). 그런데 필자는 14년 만에 방언 받은 사람도 목격했다.

 

물론, 사모하고 구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경험한 자와 경험하지 못한 자의 갈등이 생긴다. 경험한 자는 마치 자기가 잘나서 경험한 것처럼 잘 난 체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내면적으로는 시기와 심통이 나지만, 표면적으로는 잘난 체하는 사람의 성경적, 신학적 지식의 무지함이나 인격적 미성숙을 트집 잡아 신령한 경험 자체를 부인하려는 성향이 농후하다.

 

가난한 자에게는 부자가 ‘돈으로 무엇을 사거나 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시험거리이듯, 은사 경험자가 ‘나는 이런 경험했다. 너도 해보라’고 좋은 의도로 권면하는 것조차 비 경험자에게는 심통거리가 된다.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 사람이 많다.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인격적으로 온전히 성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난 사람들이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더군다나 학력도 낮은 그들에게 교인들이 몰려가니 미운털이 박혀도 한참 깊게 박혀서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되는 것이 아닌가?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8).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 5:17-18).

 

그러다가, 어쩌다가 자기들도 경험하면 이전의 비난은 금방 사라지고 은사 받은 것을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도 필자는 많이 보았다.

 

결국은 표면적으로는 신학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경험 여부에 따라 신학이 갈라지는 것이다. 물론 방언이나 신유를 하더라도 기적중지론적이고 단회론적 책을 보거나 그런 교회에 다니면서 세뇌 되면 은사를 금방 부인하는 초짜들-이창모나 옥성호처럼 방언을 받았지만 유익을 몰라 대적자로 돌변하기도 한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경험에 확신이 붙으면 주변에서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꺼덕도 하지 않는다.

 

 

 5. 경험적 해석이냐 무경험적 해석이냐?

 

비은사주의자들은 은사주의자들이 기적계속론이나 오순절성령강림 반복론을 주장하면, “왜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고 반문한다.

 

과연 경험 없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기록이고, 성경의 기적은 전설이나 신화이며, 예수는 ‘구세주’가 아니라 공자나 석가와 같은 ‘도덕적 모범’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기적중지론적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인정하고 예수는 구세주라고 인정하지만 교회 시대의 기적은 부인한다. 자기들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분명히 있는 내주와 임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요란하고 눈에 보이게 역사’하는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누가의 성령’과 ‘비밀스럽고 조용하게 역사’하는 ‘중생시키고 성화케 하는 바울의 성령’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 결과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구절도 왜곡하거나 무시하여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적중지론과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주장하면서 자기들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빨간 색안경을 끼고 그림책을 보면 빨간색이 보이지 않고 파란색 안경을 끼고 보면 파란색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는 ‘나는 죄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D.A. 카슨(미국 트리니티신대원 교수)은 성경 해석은 ‘성경 해석자의 영향을 받는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해석학은--신학이 관계되는 한--상당 부분이 성경 해석의 기술이나 과학으로 이해되어 왔었다. 해석자가 주체이고, 성경은 객체이며, 목표는 주체 (해석자) 가 기술과 직감(feel)을 개발하여 객체 (성경) 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에는 칭찬할만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해석자 자신이 바로 성경해석이라는 과업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다. 새로운 해석학은 바로 이러한 결함을 지적한다.

새로운 해석학은 이전의 해석학의 특징인 주체(해석자)와 객체(성경)의 완전한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해석자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의 문화적, 언어적, 및 윤리적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접근한다는 것이다” (D.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pp. 126-27; D.A. 카슨, 『성경해석의 오류』).

 

 

특히 성령 체험에 관한 성경의 해석은 ‘해석자의 경험 유무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이나 단회론자들은 ‘성경적 경험’이 없어도 성경만 보고 해석만 하면 바른 성경 해석이 나온다고 착각한다.

 

 

대표적 중지론자인 안토니 훼케마(전 미국 칼빈신대원 교수)는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방언이 역사적으로 드문 현상이었다는 사례를 제시한 후)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방언이 과거에는 때때로 일어 났었다는 사실과 방언이 역사적 기독교회에서 흔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집단들 중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역사적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의 한 분야가 아니라 특별한 상황 아래서 드물게 일어난 고립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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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믿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주된 관심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머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들은 경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안토니 훼케마, 『방언연구』, 68)

 

안토니 훼케마는, 오순절주의자들이 경험을 통해 방언이 성경적이라고 하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정작 본인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방언이 ‘보편적 현상’이 아니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역사적 경험’으로 ‘현대적 경험’을 부인하는 대표적인 신학 방법의 오류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부인하는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은 역사적으로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존 위클리프나 윌리암 틴데일 같은 소수의 이단적 사람들뿐이었다’고 주장하면 훼케마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에 대한 훼케마의 대답이 곧 방언 수용자들의 대답이다.

(*위클리프나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다가 이단으로 몰렸고, 틴데일은 화형 당했다)

 

훼케마의 이 책은 1982년 즉 지금부터 약 35년 전에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 책이다. 당시는 방언에 대한 시비가 아주 심할 때였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 교회 교인들은 70~80퍼센트가 방언 한다는 비공식적 주장도 있다. 그만큼 방언은 이제 한국 교회의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안토니 훼케마 같은 사람이 경험 운운하고, 정이철(「바른믿음」 발행인)이나 이창모(「바른믿음」기고자)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방언하는 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런 주장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무경험에 의해 방언을 부인하는 안토니 훼케마의 성경 해석이 이상한 해석이 된 것이다.

 

대표적 중지론자이자 단회론자인 서철원도  ‘경험’을 이렇게 폄하한다.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 교리의 융합이므로 체험과 인간 주도성이 강조되므로 교리 보다는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 믿음과 교리 보다 경험에 의해 확증될 때만 정당성을 얻는다 (서철원, 『성령신학』, 51).

 

은사주의자들은 경험으로 새로운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성경 가르침을 확증하는 것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성령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나오시고, 말세에는 모든 육체에게 계속 부어진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사역했다. 그런데 단회론자들은 자기들의 무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의 명시적 기록을 부인하고 있다. 누가 더 성경적인가? 무경험으로 성경의 명시적 기록을 부인하는 자들이 성경적인가, 경험으로 성경의 기록을 확증하는 자들이 성경적인가?

 

 

박영돈은 스스로가 기적중지론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처럼 방언 ‘경험’ 없는 자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 있다고 자찬한다.

 

그는 옥성호가 은사중지론(기적중지론)의 영향을 받아서 방언을 무지막지하게 폄하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주장하고, 누가가 말하는 사도행전적 성령을 부인하고, 영적 부흥기에 임하는 ‘특별한 사역’도 부인하고, ‘예언’을 ‘점치는 것’, ‘쓰러지는 현상’을 ‘능력의 마귀화’라는 극단적 기적중지론자들의 용어를 서슴없이 사용하면서 자신이 기적중지론자가 아니라고?

 

이런 주장이야 말로 상식을 뒤엎는 언어 파괴 행위다. 언어란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소통의 도구인데 통상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실제 내용은 반대되는 것이라면 누가 그런 자의 주장을 신뢰할까.

 

박영돈은 차라리 자신이 기적중지론자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라. 자신은 중지론자가 아니라고 천명해 놓고, 실제로 방언 외에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사람이 어떻게 중지론자가 아닌가? 박영돈은 건전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망발을 마구잡이로 해대면서도 자신이 ‘무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참조).

 

중지론자나 단회론자들은, 자기 구미에 맞는 성경 구절이나 신학은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전 성경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나 신학은 이런 이유 저런 논리로 물타기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다. 상대방의 견해를 꽈배기 꼬듯 배배 꼬아서 결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내어버린다. 박영돈은 그중에서도 특히 정도가 심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지론자인 존 맥아더(미국 그레이스 교회)도 당연히 ‘경험’을 폄하한다.

 

 “객관적, 역사적 신학은 개혁신학이다. 그것은 역사적 복음주의적이다. 그것은 역사적 정통신학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생각, 사상 또는 경험은 말씀에 비추어 유효화되거나 무효화 된다.

한편, 주관적 견해는 역사적 로마 가톨릭의 방법이다. 직관, 경험 및 신비주의가 항상 가톨릭 신학의 중추 역할을 했다. 주관적 견해는 항상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진리는 직관과 느낌에 의해 결정된다. 진리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무엇이다. 주관적 견해는 또한 20세기에 시작한 역사적 오순절주의자들의 방법이다”(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pp. 236-37; Strange Fire, p. 17).

 

맥아더는 기적중지론은 개혁주의 신학을 택하면서도 종말론은 전형적인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신봉한다.

 

 

존 스토트(영국의 성공회 신학자)도 ‘사도행전적 초자연적 경험’에 비판적이다.

 

“신자는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며, 성령 세례의 결과 성령 충만을 받으면 예배와 교제의 열매를 맺는 것이지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존 스토트 저,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세례·충만·열매』, p. 67; John Stott, Baptism and Fullness-The Work of the Holy Spirit Today).

 

물론 경험이 성경을 넘어서면 문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에 없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세, 다윗, 사사들은 물론 수많은 선지자들 및 신약의 사도들이나 동역자들은 물론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경험하는 성령 체험이나 환상과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비성경적이라면 무엇이 성경적이며 성경이 왜 있는가?

 

그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의 본이 되지 못한다면 왜 성경에 그렇게 많이 기록하고 있는가? 중지론자들은 ‘우리는 기적을 경험한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을 갖고 있으니 더 이상 기적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사도들은 말씀도 있고 기적도 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우리는 그들보다 더 잘나서 말씀만 갖고 복음을 전하고 신앙생활 해야 하나? 우리가 사도들 보다 훨씬 더 선하고 잘났는가? 아니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그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착한가? 모두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들처럼 말씀도 갖고 기적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훨씬 더 성경적인 주장이 아닌가?

 

차라리 오늘날에도 성령 체험 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라. 이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고 하나님 앞에 죄도 덜 짓는다.

 

 

-점진적 계시와 점진적 조명

 

그러면, 많은 중지론자들은 ‘왜 성령 체험이나 방언 현상이 교회사적으로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20세기에 일어나는가? 교회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데 이것 또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종교개혁이 16세기에 일어났는가? 그 동안의 교회 전통에 의하면 이것도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이런 방언이나 성령 체험이 교회사를 통해 나타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과거에도 나타났지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인 20세기에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종교개혁도 그런 것이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위클리프와 같은 자들이 종교개혁의 씨앗을 심었지만, 구속사적 여건과 세속사적 여건이 무르익었을 때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 기록은 ‘점진적 계시’에 의해 기록되었다. 구약의 씨앗 같이 희미한 계시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구속사역을 통해 밝히 드러나고 만개했다. 기록된 성경의 진리도 한꺼번에 모두 드러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이런 것을 ‘점진적 조명’이라 부를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성경의 정경화, 삼위일체 교리,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가 확립되었다. 중세 암흑기를 지나 종교개혁을 통한 ‘5개의 오직~’ 슬로건을 통해 성경 중심의 신앙과 ‘이신칭의 교리’가 확립되었다. 이후 요한 웨슬리와 성결운동의 완전성화와 성결운동이 주창되면서, 성화나 성령체험 같은 ‘제2의 축복’ 교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에 미국의 제2차 영적대각성 운동의 주창자인 찰스 피니가 사람의 노력으로 부흥을 오게 할 수 있다는 부흥주의(Rivalism)를 주창하여 전 미국을 휩쓸었고, 이의 영향을 받은 D.L. 무디나 르우벤 토레이가 20세기 초에 ‘제2의 축복인 성령 세례’를 강조했다.

 

 이어서20세기 초에 발흥하기 시작한 오순절 성령운동이 방언을 동반하는 제2의 축복인 성령세례를 강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자, 위기 의식을 느낀 칼뱅주의는 오순절 성령운동 및 은사운동이 하나님의 주권 보다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더 강조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부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찰스 피니의 부흥주의를 답습하고, 성경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제2축복 같은 성령 세례를 주창한다면서 공격의 포문을 퍼붓기 시작한 것 같다.

 

칼뱅주의의 장로교 대국인 한국 교계도 성령운동을 통해 교인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자, 교인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오순절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은 인위적으로 부흥을 주도하고 경험에 의해 제2의 축복을 주장한다는 교리적 트집을 잡으면서 은사운동을 극렬하게 대적하고 비판해 왔던 것이다.

 

물론 요즈음은 비판의 수위가 다소 수그러졌지만 아직도 중지론과 단회론에 젖은 다수의 신학자들이 신학교에서 이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고, 이미 이전에 이런 잘못된 신학에 물든 목회자들이 요소요소에 침투해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결정적 도약을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제2의 축복' 교리는 칼뱅주의 청교도가 원조(元祖)

 

아이러니컬한 것은 칼뱅주의 단회론자들이나 중지론자들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오순절 성령운동가들이 ‘경험에 의해 제2의 축복 교리’를 주창한다고 비판하는데, 이 교리는 원래 칼뱅주의 청교도들이 주장한 것을 요한 웨슬리가 전용(轉用)한 것이다.

 

칼뱅주의를 싫어한 요한 웨슬리(1703~91)는, 청교도가 중생 이후의 ‘구원의 확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제2의 축복’ 교리를 자신의 중생 이후의 ‘완전성화’ 체험에 적용시킨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인인 토머스 굳윈(Thomas Goodwin, 1600~80)은 ‘구원의 확신’ 경험을 ‘성령세례’ 및 에베소서의 ‘성령의 인침’(엡 1:13)과 동일시 했다.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 1608~80)는 “약속된 두 번째 축복에 대하여 알아 보기 전에 나는 다음과 같은 힌트를 주어야겠다. 곧, 기쁨과 평화와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품삯보다 일에 더욱 몰두 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로버트 헐데인(Robert Haldane, 1764~1842)은 “신자의 영에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언과 위로를 주심은 그의 첫번째 사역이 아니다. 오히려 중생케 하시는 사역 다음에 나오는 것이다. 그는 먼저 믿음을 주시고 그런 다음에 인친다”(엡 1:13) (D.M.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Martin Lloyd-Jones, Joy Unspeakable).

 

중지론자들도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을 목회 현장에서 가장 큰 기도 제목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은 강한 성령 체험을 통해 가지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고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차영배(전 총신대 교수)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중생 후 성령 세례' 또는 '중생 후 성령 받음'도식이 마치 오순절 계통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청교도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성령 세례가 아니고, 성령의 인침 이었다. '중생 후 인침' 또는 '중생 즉 인침 '이었다. 중생을 좁은 의미로 보면 전자가 맞고, 넓은 의미로 보면 후자가 맞다.

우리가 '오순절 계통'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쓰게 되면 마치 장로교 안에는 그러한 사상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기 쉬운데 이것은 사리를 바로 잡는데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차영배, "서철원의 '성령 세례와 구원에 대한 논평," 『목회와 신학』).

 

한때 고신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고재수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오순철파의 견해쪽으로 차츰 기울어져 왔는지률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는 얼이다. 그틀의 입장의 배경에는 청교도적 사상이 깔려 있다. 곧 구원을 두 단계로 체험하게 된다는 사상이다. 첫째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단계이고 후에 두 번해 단계가 따라오는데, 이는 보통 확신의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토마스 굳윈 (Thomas Goodwin)은 이같은 확신을 받는 것을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과 일치시켰다"(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pp. 14-15).

 

이처럼 칼뱅주의 청교도들은 중생 이후 ‘성령의 인침’ 즉 ‘성령세례’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기적중지론자들이 ‘중생 이후의 제2축복’ 개념을 비성경적으로 간주하여 비판 일변도로 나가는 것은 자기들의 얼굴에 침 뱉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칼뱅주의자들이 ‘제2의 축복 교리’를 지속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의 맏형을 자부하며 사사 기드온과 입다의 사역에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린 에브라임 족속처럼(삿 8:1; 12:1),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잘난(?) 자기들은 들어쓰시지 않고 교리도 엉성한 후발 주자들을 들어쓰시는 것에 대한 심술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칼뱅주의 단회론자들은 제2의 축복 교리의 원조가 자기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오히려 감리교, 성결교 및 오순절 성령운동이 강조하는 제2의 축복 교리를 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자기들에도 유익할 것이다.

 

 

필자는 관상기도의 기원이 뉴에이지나 범신론이라고 공격하는 일부 개혁주의자들에게도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청교도들- 리차드 십스(Richard Sibbs),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 토머스 굳윈(Thomas Goodwin),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오웬(John Owen), 카튼 매더 등-이 관상기도를 즐겼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자료 : “관상기도를 즐긴 청교도 신비주의자들,”『글로리아타임스』, 2015년5월22일.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53).

 

그러므로 개혁주의 기적중지론자들은 남들이 하는 좋은 것을 비판 일변도로 대적하기 전에, ‘우리의 전통에서 그런 것이 없었을까?’하고 먼저 연구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장로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오순절교인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죄로 인해 은혜로 구원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결국 오순절 성령강림이나 기적행하는 은사에 대한 교리는 당사자의 체험 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경험이 있는 자는 계속론자나 반복론자가 되고 없는 자는 중지론자나 단회론자가 되기 마련이다.

 

 

-경험을 통해 견해를 바꾼 신앙의 선배들

 

사람은 똑똑한 것 같아도 자기 경험 이상을 초월하기가 쉽지 않다. 기적중지론에 매여있다가 자신이나 사역의 현장에서 기적을 직접 체험한 후 생각을 바꾼 사람이 상당히 많다. 신학 지식이 별로 없는 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많다.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은 초기에는 기적을 부인했다. 그러나 친구가 불치의 병에서 치유되는 것을 보고 기적계속론자로 돌아섰다. 한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박윤선(전 합신대 교수), 박형룡(전 총신대 교수) 및 김의환(전 총신대 교수)도 자기들이 직접 기적을 체험하거나 목격한 후 견해를 바꾸었다.

 

한국 선교사였던 간하배(하비 콘. 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도 필자와의 대화에서, ‘내가 축사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축사를 믿는다’고 말했다. 한때 쓰러지는 현상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예장 개혁의 김 모 목사도 자신이 외국의 집회에 참석하여 평신도의 안수를 받고 쓰러진 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후에는, 사울에서 변신한 바울처럼, 안수 사역의 적극적 변호자가 되었다.

 

 

이전에는 사도행전을 볼 때 ‘성령’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도 성령 체험을 한 후 사도행전을 보니 ‘성령’이란 말이 도처 널려있더라’고 고백하는 사람도 많다. ‘성령’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었는가? 아니다. 늘려 있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심을 끌지 못하여 성경을 보더라도 대충 넘어가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렇다. 방언을 받고 방언 시비가 한창일 때는 사도행전에 ‘성령 받은 사람이 방언하는 것’에 대한 구절에만 관심이 갔다. 그런데 나중에 예언의 은사를 받고 보니, 말세에 모든 육체가 성령을 받아서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성령을 받아서 예언했다는 구절(행 2:17; 19:6 등), 고전 14장에서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는 구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사주의자들이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에 있고 본인들도 경험했기 때문에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인하는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이것도 결국은 ‘경험 즉 무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중지론자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현상이나 기적 현상이 나타난 기록이 별로 없으며, 이런 현상은 주로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 받는 소수의 무리들에게서 일어났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타인의 나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10억 총회장, 말썽부리는 목사나 장로가 많으니 이런 것을 없애자’는 하는 사람은 왜 없는가?

 

 

새로운 주창이나 운동이 초기에는 종교 기득권자들에 의해 배척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나 바울, 종교 개혁가인 루터나 칼뱅 등 모두 초기에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방언이나 에언 및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교인들도 성령 체험, 방언 또는 예언을 하고 정통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서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도 결국은 ‘경험’에 의해 간과하고 있던 ‘성경의 진리를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성경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한 학자들

 

유명한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성경 해석의 경험적 측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이 성경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유명한 신학자도 많다.

 

D.A. 카슨은 ‘성경과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일부 단체에서 계시 보다는 경험에 호소하거나, 복음과는 다른 영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여 모든 경험을 의심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런 과민 반응은 중지되어야 한다. 성경 자체가 경험에 더 많은 자리를 할당하기를 요구한다”(D.A. Carson, A Call to Spiritual Reformation, p. 191).

 

존 프레임(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교수)은 ‘경험이 성경해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또한 감각(경험)과 상관이 없이 단순히 추론(reasoning)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사실을 증거한다. (경험의 한 측면인) 감식력(perception)도 바로 이해되면 하나님을 아는 합법적인 수단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감각 기관들을 주셨고(출 4:11; 시 94:9; 잠 20;12), 말씀을 통하여 비록 감식력에는 (이성과 마찬가지로) 오류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수단(마 5:16; 6:26이하; 9:36; 15:10; 눅 1:2; 24:36-43; 요 20:7; 롬 1:20; 10:14;-17; 벧후 1:16-18; 요일 4;14)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신다. . . .

예를 들어 시편에는 시편 기자들이 말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해 보기 전까지는 잘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으며 자신들의 체험과 시편 기자의 체험과의 유추를 통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험을 가진 교사들은 복음에 대해 단지 이론화된 지식만을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큰 신뢰감을 줄 수 있다”(John Frame,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pp. 334-35).

 

 

톰 네틀즈(전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 신대원 교수)는 ‘교리를 중시하는 개혁과 경험을 중시하는 부흥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혁주의자들과 부흥을 강조하는 자들 사이의 틈이 더욱 넓어짐에 따라,  전자는 자주 경험을 두려워 하고 후자는 자주 신학 특히 개혁 신학을 두려워 한다. 우리는 열심과 지혜, 사랑과 진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개혁과 부흥을 연합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장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개혁을 손상시키거나 진정한 부흥을 오염시키는 모든 것들이 제어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Tom Nettles, “A Better Way: Church Growth through Revival and Reformation,” in Power Religion, edited by Michael Scott Horton, pp. 161, 174-75).

 

 

릴랜드 라이킨(미국 휘튼대학 영문학 교수)은 ‘성경의 문학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는 명제적이고 문학적인 기록이 많이 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성경을 문학 작품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경험적인 측면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신학적인 명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같이 성경구절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억제하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한 가지는--거듭 반복하지만--성경은 몇 가지 증거 구절을 가진 신학적인 개요가 아니라는 것이다”(Reland Ryken, How to Read the Bible as Literature, pp. 17-19).

 

정리하면, 성경은 교리와 경험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어떤 구절이나 주제는 경험이 없으면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다. 특히 성령 체험과 관련된 구절이나 주제들이 더욱 그렇다.

 

 

필자가 보기에, 은사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성경 해석 오류보다 이를 반박하는 비은사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오류가 더 심각하다. 전자는 전체적 가르침은 성경적이면서 상세 부분에서 다소 오류가 있지만 후자는 성경이 말하는 은사적 체험 자체를 송두리째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주시는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스스로 부인하여 유럽의 교회가 텅텅 비고 미국의 주류 교단의 교회들이 쇠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결론 :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사이비 신학’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은 성경의 명시적 기록을 전혀 무시하고 신학자들이 상아탑에 갇혀서 인간의 논리로 개발한 ‘사이비 신학’에 불과하다. 모든 신학적 편견을 버리고 성령에 관한 구절을 조금만 연구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오류들이다.

 

그런데 유명하다는 신학자들 중에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성경은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유명한 신학자의 권위’에 편승하여 말로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성경적 주장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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