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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⑥] 예언을 멸시하는 성령 소멸자들(3)김재성, 박영돈, 오명옥, 이승구, 정대운, 정윤석, 정이철, 조믿음, 최병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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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1  22: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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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⑥]

 

예언을 멸시하는 성령 소멸자들(3)

-김재성, 박영돈, 오명옥, 이승구, 정대운, 정윤석, 정이철, 조믿음, 최병규 등-

   
 

 

<글 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
-폴리캅, 터툴리안, 콘스탄틴 황제, 어거스틴,
존 낙스, 사무엘 러더포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입법자들,

스펄전, 록펠러, 한경직, R.C. 스프롤, 척 리프카, 정필도, 김하중 등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에 대한 태도 
-기적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를 ‘부인’하는 사람들
-기적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를 ‘인정’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을 부인하는 잘못된 주장들

1. 기적중지론
2. 성경의 충족성,충분성 및 계시종료론
3. 구속사적 성경 해석
4. ‘예언의 은사’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인가? 
5. 히브리서 1장1-2절이 예언 은사의 종료를 증거하는가? 

(2)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사적 계시’인 ‘개인 예언’을 부인하는가?

7. 기타 잡설들 : 

- 고전 13장의 온전한 것이 ‘완성된 성경’인가?(오명옥)
- 구약 시대에 사는 정이철은’ 사적 계시’를 부인한다(정이철)
-원고 없는 즉흥 설교가 비성경적이라고?(오명옥, 정이철) 
-바울은 행동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정대운)

(3)

- 하나님의 음성듣기 훈련을 하면 왜 안 되는가?(정대운) 
-정윤석의 “김미진의「왕의 음성」비판적 읽기”를 비판하다(정윤석)
-음성을 듣고 미래를 알면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되는가?(박영돈)
*바울형과 디모데형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교회 가기 싫은 이유 77 가지』란 책이 있다. 교회 가기 싫은 이유가 어찌 이 뿐이랴. 더 되지만 77이라는 기억하기 쉬운 숫자로 정리한 것 같다.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를 부인하는 이유도 수도 없이 많다. 조금만 그럴듯한 이유만 제시해도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필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성경 해석과 인위적 신학, 이런 논리와 저런 잡설로 예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하는 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그들의 글을 읽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이 너무나 싫고 시간도 아깝다. 은사 사역자들은 이런 글을 읽는 것 자체도 골치 아파할 것이다.

 

 

그러나 힘들고 싫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비판자들이 독버섯처럼 솟아나서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소멸해 온 것이다.

 

많은 은사 사역자들이 이런 일로 핍박 받고 사역이 위축되었다고 하면서도 겉으로 나서기는커녕 관심도 갖지 않고 있다. 오히려 드러날까 봐 더 꽁꽁 숨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기적중지론자들은 끊임 없이 여기저기서 독버섯처럼 솟아나서 은사 사역을 지속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경기도 X시에서 은사 사역도 하고 선교회도 하는 한 중형 교회는 이름 있는 모 기독교 언론에서 집적거리자 무마하기 위해 후원금을 주었다는데, 그렇게 해보았지만 결국은 다른 언론의 표적이 되어 하나님의 음성듣기 사역을 하는 이단(?)으로 찍혀있다.

 

지금 은사 사역자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기적중지론적 언론들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감을 찾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은사 사역자들이 정정 당당하게 대적하지 않고 비굴하게 숨거나 타협하면 그들은 기세를 몰아서 오히려 더 세게 나올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보편화 된 현대는 홍보전이 승패를 가늠한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갖고 있어도 홍보에서 지면 실전에서 이기기 어렵다. 은사 운동은 이미 홍보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SNS를 보면 90% 정도가 은사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기적중지론자들은 비판자나 동조자들 가릴 것 없이 징그러울 정도로 열심히 비판하고 열심히 글을 퍼나르는 데 은사 사역자들은 반론 글을 쓰거나 퍼나르기는커녕 골치 아프다고 이런 글을 읽기조차 싫어하는 것 같다.

 

 

기적중지론적 언론들이 어떻게 해서 지속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가?
배후에 수많은 교단이나 중대형 교회 및 개미 후원자들이 재정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 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자기 사역, 자기 이름 내는 데는 큰 돈을 들이고 열심을 내지만 은사 운동 변호에는 관심도 없다.

 

 

필자가 이제야 밝히지만 3년 전쯤부터 『글로리아타임스』를 통해 은사 운동 변호에 나섰을 때, 필자가 다수의 은사 사역자들과 접촉하면서 공동 전선을 펴자고 수차 직·간접적으로 제의했지만 누구 한 사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너무나 답답하고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핍박으로 인해 사역이 위축되고 심적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당당하게 나서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 눈치 보며 성령 사역하는 자들에게서 (은사적, 사역적) 성령은 떠난다."

 

필자가 들은 음성이 틀리기를 바랬다. 그러나 현실화 되어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이왕 필자가 나섰으므로 마무리 한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은사 사역자들이 자기 이름 내고, 자기 사역 챙기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성령 모독자들과 성령 소멸자들을 소탕하는 데도 힘을 좀 합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에서 진보 좌파가 우세를 점유하는 것도 진보 논객이 보수 논객에 비해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논거(論據)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수 우파는 논객도 부족할 뿐 아니라 논거도 빈약하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에 입각한 국가 설립,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반공 정신과 경제 성장 치적에만 몰두하는 한 변하는 시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는 이에 더하여, 가진 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의무) 실천과 못 가진 자에 대한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지 않는 한 보수 우파의 회복은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보수 우파는 아직도 네 탓 공방만을 하면서 미래를 위한 거대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 좌파가 정권을 탈취한 것은 보수파의 분열에도 있지만, 친북과 종북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부로 절감하는 이 분야를 강조하여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은사 사역자들도 이제는 은사 사역 자체를 변호함은 물론 이를 확장하는 거대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요즈음 상당수의 은사 사역자들이 새로운 돌파를 찾기 위해 영적 알맹이도 없는 ‘시한부 세대주의 종말론’, ‘극단적 메시아닉 유대인 운동’, ‘히브리 뿌리 운동’ 및 ‘기독교 극우 운동’에 몰두하는 한 한국 은사 운동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은사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이 마음만 먹으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내면서, 은사 사역을 변호하는 논객들을 양성하고, 기독교 언론 3~4개 정도만 설립하여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변호하면, 한국 교계의 대(對) 은사 운동관이 확 바뀔 수 있을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은사 사역 전체를 확장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에는 은사와 은사 사역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워낙 여기저기서 반대 목소리가 높다 보니 ‘샤이(shy) 은사 사모자’로 숨어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해 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잠기지 말기를 바란다. 교회사를 볼 때, 하나님의 부흥이 단명한 주된 이유는 부흥파들이 기득권층의 반대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사 운동가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은 반대하고 핍박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당당하게 논쟁하고 심지어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하게 대면하면서 성령 사역을 해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7.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을 부인하는 잘못된 주장들

 

이전 글에 이어서 기적중지론자들이 예언의 은사를 부인하는 몇 가지 잡설들을 더 살펴보자.

 
 

-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훈련하면 왜 안 되는가?(정대운)

 

지난 글에서는 정대운이 ‘침묵에 의한 논쟁’으로 하나님 음성듣기를 비판하는 것을 비판했다.

 

(자료 :  정대운. “예수전도단의 하나님 음성듣기는 비성경적인 이단현상.” 「바른믿음」, 2017.06.29)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892)

 

정대운은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훈련 등은 성경 어디에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위의 자료 참조). 과연 그런가?

 

비판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인데 사람이 훈련으로 듣게 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것이고, 신자에게는 모두 내주하시는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데, 왜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목사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가? 성경에는 교사도 있지만 선지자(예언자)도 있다.

 

교사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필요하다면 예언자를 양성하는 자나 학교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오히려, 정대운이 그토록 강조하는 성경을 보면, 선지자를 양성하는 학교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왕하 2,4,5,6,9 장), 교사나 설교자를 양성하는 학교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어디 있는가?

 

신학교 마다 설교학 과목이 있고 설교학 박사 과정까지 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구약의 선지자들이 설교학 강의 듣고 설교했다는 구절이 있는가?

 

 

더 나아가서, 성경 어디에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세우라는 구절이 있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도제(徒弟)로 훈련시키셨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는 왜 중세에 시작된 강의 식으로, 그것도 사역 경험이 별로 없는 세상 방식의 박사 학위 취득자가 사역자를 훈련하는가?

 

이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비판자들은 정작 자기들이 보편적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대지 못한다.

 

신학교는 목회자를 훈련시키는 곳이다.

그런데 이름 있는 대부분의 신학대학원(Seminary)은 ‘성경’ 보다는 ‘신학’을 가르친다. 그 결과 수많은 신학자와 예비 신학자는 양성했지만 목회자는 제대로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도 신학교에 다니면서 정규 과목 외에도 수많은 다른 과목을 청강했지만, 정작 목회에 필요한 실천 과목들은 독학하거나 외부 세미나를 통해 배운 것들이다.

 

*세미너리(신학대학원) 교육의 문제점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는 세미너리(Seminary)가 아니라 세미터리(Cemetery. 공동묘지)라는 별칭을 얻는다.

 

목회자 후보생들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뜨거운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다가 3년이나 그 이상 동안,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는 자유신학이나 교회 시대의 기적을 부인하는 보수신학을 전공하고 졸업하면, 불길은 다 사그라지고 연기만 폴폴 나면서, 입만 살고 비판적 정신만 살아서 하나님이 시대를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사역을 대적하는 일에 헛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대학원의 교과 과정[커리큘럼]은 중세의 교육방식이 유럽과 미국을 통해 한국에 수입된 것인데, 이런 과목들은 현장 사역자가 아니라 상아탑의 학자들이 고안해 낸 것들이다.

 

‘자연적 교회성장’ 주창자인 크리스천 슈바르츠에 조사에 의하면, 전세계 32개국의 1,000여개 교회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 정규 신학대학원(세미너리) 졸업생이 목회하는 교회는 양적이나 질적으로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교회가 양적이고 질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교회 목회자의 58%는 정규 신학대학원 졸업생이 아니며, 양적 질적으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교회 목회자의 85%가 신학대학원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Christian A. Schwartz, Natural Church Development, Carol Stream, IL: ChurchSmart Resources, 1996, p. 23)

 

미국 크리스천 여론 조사가인 조지 바나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신학대학원에서 지역 교회를 섬기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Barna Research Group, “Only Half of Protestant Pastors Have a Biblical Worldview,” Barna Research Online, January 12, 2004. http://barna.org/cgibn/PagePressRelease.asp?PressReleaseID=156&Reference=F).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절대 다수의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대학원들은 수백 년 전에 형성된 교과 과목에다 루이스 벌콥이나 박형룡 류의 조직신학만이 절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방언이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배웠지만 사역 현장에서 방언하고 예언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늘어나는데, 이런 것에 대해 설명해주는 개혁주의 관련 자료가 별로 없다 보니, 목회자나 성도들은 주로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는 미국의 은사 사역자들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고, 아시다시피 미국 은사 사역자들의 신학적 배경이 대부분 세대주의자들이다 보니, 개혁주의 강국인 한국의 주류 장로교단들과 여기저기서 부딪치는 것이다.

 

그나마 기적계속론의 입장에 있는 웨인 그루뎀이나 J. 로드맨 윌리암스 정도가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령 은사론을 가르치고 있어 다행이지만 이런 책들은 원론적으로 유익하기는 하지만 현장 사역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이다.

 

 

이처럼,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의 장로교 계통 정규 신학교의 제일 치명적인 약점은 성령 은사론 마귀론 부흥의 역사(歷史)나 현상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가르치기는커녕 비판하고 대적만 하고 있으니 교회가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도행전은 물론 이후의 교회의 성장이나 세계 선교도 주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영적 부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인데, 기적중지론자들은 이런 부흥들의 장점은 말하지 않고 부차적 교리나 현상들만 따지면서 비판하다 보니 김재성, 박영돈, 이승구, 최병규 같은 변증가나 정이철, 이창모, 림훤원, 정윤석, 오명옥, 이인규, 조믿음 같은 성령 대적자들만 양산하여 교회는 생동력을 잃어버리고 망하거나 쇠퇴해 버리는 것이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전통적이고 이론적인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비판하고 대적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본인에게 이런 은사가 없으니 사역 현장에서 나타나는 현실에는 무관심한 것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절대로 강의 식으로 사역자들을 양육하지 않았다. 성경을 보라.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셔서 항상 행동을 같이 하시면서, 가르치시고 사역의 본을 보이셨다. 사도들도 팀웍으로 동역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했다.

 

 

물론 성경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제도적 학교를 통해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고 설교하는 설교자를 양성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마찬가지다. 성경은 예언하려고 하라(고전 14:1)하고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먼저 은사를 받은 사람이 후진에게 가르치고 은사를 전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롬 1:11).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방식을 사사건건 비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적중지론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는 모른 체, 자기들이 하는 것은 검증도 해보지 않고 모두 ‘전통’이란 명분 아래 당연하게 해오면서 은사적 교회에서 무엇을 자기들과 조금만 다르게 하면 ‘비성경적이다, 성경에 없다’면서 호들갑을 떤다.

 

‘우리는 틀릴 수 없고 우리와 다르게 하는 것은 모두 틀린 것’이라는 바리새적 오만과 독단이 몸에 배여 있어서 그런 것이다. 제발 정신들 차리세요!

 

 

*하나님의 음성듣기나 은사 전이는 훈련으로 가능하다

 

필자가 2000대 초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 세미나를 했을 때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그 자체를 사모하여 참석했다. 여러 번의 음성듣기 세미나를 통해 90% 이상의 사람들이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 어떤 사모는 칼라 환상을 보기 위해 먼 지방에서도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한 여자 목사는 훈련 받은 후 자기 교회에서 실시해보았더니 90% 이상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오래된 교회 건물 리모덜링을 위해 헌금이 필요했는데 신자들 각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니, 어떤 사람은 천정을, 어떤 사람은 바닥을, 어떤 사람을 무엇을 하겠다고 모두들 자발적으로 서원하는 바람에 교회 리모덜링이 너무나 쉽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몇 년 후 다시 음성 듣기 세미나를 해보았더니 참석자들의 성향이 달라졌다.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고, ‘지금 듣기는 하는데 더 잘 듣고 싶다’, ‘들은 음성이나 예언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때 방언에 대한 시비가 일다가 방언이 은사적 교회는 물론 전통적 교회에도 퍼지게 되자 요즈음 정이철이나 이창모 같은 극단적 기적중지론자들 외에 심지어는 꼴보수 예장 고신의 박영돈도 방언을 인정하듯, 하나님의 음성듣기나 예언의 은사도 지금 전통적 교회에도 많이 전파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듣기나 예언의 은사가 전통적 교회에서 수용될 날도 멀지 않다고 본다.

 

 

-정윤석의 “김미진의「왕의 음성」비판적 읽기”를 비판하다(정윤석)

 

정윤석은 다음과 같이 삐딱한 질문으로 비판 글을 시작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나타나 제 자식을 남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쳐보자 그리고 “미쳤냐?”고 사람들이 말리자, 그가 창세기 22장을 근거로 들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내게도 나타나 말씀하셨는데 뭐가 문제냐?”며 반박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이어서 그는 이사야에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 동안을 걷게 하시고,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인 고멜과 결혼하게 하신 것을 예를 들면서, 오늘날의 음성듣기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조성한다.

 

정윤석의 이런 수법은, ‘누가 자동차를 타고 여행 간다?고 하면 ‘트럭과 추돌 사고가 나서 죽으면 어떻게 하지?’, 누가 배로 여행한다고 하면 ‘배 타고 가다가 바다 한 가운데서 배가 뒤집어지면 어떻게 하지?’라고 질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론적으로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드문 사례를 ‘일반화 하는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이사야 및 호세야 선지자에게 내린 명령은, 아무 신자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신앙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나 하시는 명령이다. 개인에게 주신 이런 명령을 오늘날의 신자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문자적 적용’ 보다는 ‘원리화(principlizing) 적용’이 옳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명령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지 인신 제물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 마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돈, 명예 또는 가족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그런 취지의 음성을 들려주신다면, ‘네가 지금 가진 돈 전부를 누구에게 주라,’ ‘너의 어린 자녀의 미래를 나에게 바치겠느냐?’는 식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므로 정윤석 식의 트집은 성경 해석이나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의 기본도 모르고 하는 무지의 소치다.

 

 

이어지는 정윤석의 신학과 논리는, 필자가 이미 앞의 두 글에서 비판한 계시종료론, 히브리서 1:1-2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1절을 근거로, ‘사이비 신학’인 기적종지론을 답습하는 김재성(국제신대 교수), 박영돈(고신대 교수), 이승구(합신대 교수) 및  장운철(전 「교회와 신앙」 기자, 현 만나교회 담임)의 등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외에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비판하는 정윤석의 주장 몇 가지를 비판해 보자.

 

먼저, 정윤석은 김미진이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뜻, 성령의 감동하심, 내적 감화, 성령의 인도하심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 자체를 한국 교회가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정윤석이 말하는 한국 교회는 어떤 한국 교회인가? 필자가 보아하니 주로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박영돈이승구 및 이론적으로는 기적계속론자이지만 실천적 기적중지론자라고 할 수 있는 김영한(기독교학술원)과 배본철(성결대 교수)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7 등).

 

양은 문지기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교회는 성령의 말씀을 들으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인 신자들이 성경 대로 ‘주님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데 비판자들은 왜 이런 표현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이단들이 마귀의 음성을 듣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면, 성도들은 이단 때문에 성경에 있는 표현도 사용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먼저 온 도적인 마귀가 훔쳐간 것을 탈환해야 하지 않는가?(요 10:8). 예수님은 강한 자인 마귀를 결박하고 그의 세간들을 강탈하신다고 하지 않았는가?(마 12:29)

 

 

성경 표현 대로 ‘하나님의 음성’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통하는 방법을 말한다. 전통적 교회는 기록된 성경 말씀, 은혜의 도구(방도)(means of grace)인 찬송이나 기도,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전통적 교회는 성경에서 가장 보편적인 하나님의 소통의 방편인 내적 음성(세미한 음성), 꿈이나 환상의 방법은 기록된 성경의 완성 이후에 사라졌다고 잘못 주장한다. 기적중지론자들은 거창하고 다양한 신학과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이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윤석은, 김미진의 ‘성경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라’는 표현을 비판하면서 한국 교회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큐티(QT. 말씀묵상)도 싸잡아서 비판한다.

 

정윤석은, 권연경(숭실대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여, 김미진이 성경을 큐티(QT)하면서 내 마음을 콕 찌르는 구절과 단어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성경의 본의와 맥락은 무시한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으며 그것은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입히는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발언을 하고 있다.

 

권연경은 큐티의 장점을 말하면서도 단점을 이처럼 무서운 단어로 표현하는데, 그렇다면 학자들이 하는 ‘본문 중심의 신학적 해석’은 문제가 없는가? 본문의 객관적 의미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적용을 소홀히 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다.

성경 통독을 하거나, 주제별 조직신학적으로 보거나, 주요 성구들을 단어나 문법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석하거나, 개인의 영혼의 양식을 위해 큐티를 할 수 있다. 어느 한 가지 방법도 완벽하고 않고 모두가 상호보완적이다.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흐를 수 있는 큐티를 보완하기 위해 객관적 교리 공부나 성경 공부로 보완하면 되는 것이지, 큐티를 ‘해석학적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표현하여 폄하하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이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의 표적과 기사가 교회 시대의 본이 될 수 없다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은 해석학적 강도질’이다. ‘구속사적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이 성경의 인물들과 소통하는 방식인 직접적 음성, 꿈, 환상은 부인하는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지 알기나 하는가?

 

 

정윤석도 문법적·역사적 해석과 구속사적 성경 해석의 올무에 빠진 것 같다. 이런 방법이 중요하지만 이것 자체만 강조하면 성경은 교회 시대의 신자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역사책이 되고 만다.

 

정윤석의 주장 대로,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이 먼 옛날에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의 폭정에서 건져낸 구속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면, 그 사건은 오늘날의 성도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 출애굽 사건이 오늘날의 신자와는 관련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구속사의 주인이시고, 신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과거 사건’도 예수님을 통해 ‘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정윤석은, 김미진이 홍콩에 선교 여행을 갈 때, 여권 발급 담당자가 여권 발급을 거부한 사례와 출애굽 당시 ‘내 백성을 보내라’는 모세의 요청을 거부한 바로와 비유한 사례가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고 비판한다. 만일 정윤석이 출애굽 8~10장을 본문으로 성도들에게 설교한 경험이 있다면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윤석은 성경의 객관적 해석과 삶에의 주관적 적용의 상관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 물론 성경은 문법적·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참되고 온전한 의미는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미는 다양하게 적용된다’(One meaning, many applications). 본문의 일차적 의미는, 바로가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모세의 거듭된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만일 설교자라면, 문법적·역사적 방법에 의해 이렇게 본문을 해석해 놓고, 성도들의 실제 삶에 이 의미를 ‘어떻게 적용할까?’를 고심했을 것이다. 의미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모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한 ‘바로’가 거듭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미진의 경우, ‘모세’가 김미진이고 여권 발급 담당자가 ‘바로’가 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설교자라면 이렇게 적용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도 이렇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출애굽기 8~10장을 묵상 중에 있었다. 갑자기 ‘너는 애굽의 바로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사람은 당황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에 자주 하나님이 감동 주시는 어떤 일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는 것이 생각나서 회개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응답해 주시지 않아서 원망과 불평이 많았다. 어느 날도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기도한 후 잠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 갑자기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다!”



깜짝 놀란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한 것을 회개하고 감사의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경과 정윤석은 이런 것을 ‘해석학적 우상숭배’라고 한다.

신앙생활을 이렇게만 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식 있는 신자라면 이렇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김미진도 이런 방법은 여러 방법 중의 하나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정윤석은 김미진이 여러 방법을 제시했음에도 이런 직접적 음성듣기만을 ‘콕 집어서’, ‘그렇더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달라지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사람이 왜 듣는 사람을 비판하나?

 

왜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음성듣기와 같은 좋은 선물을 정윤석처럼 사모함도 없고 구하지 않아서 받지도 않아서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예언을 사모하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고전 14:39).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1).

 

‘성경적, 성경적’이라고 입에 달고 사는 비판자들이 왜 이런 분명한 성경 구절은 인용하지 않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하기야 여기서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로 잘못 해석하고 있으니 이런 자들과 무엇을 더 논쟁하라?

 

자료 : 정윤석, “왕의 음성’ 비판적 읽기[1]-‘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말하며 사적 계시 추구”외 (2)(3).「기독교포털뉴스」. 2017.05.03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858

 

 

- 음성을 듣고 미래를 알면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되는가?

 

박영돈(고신대 교수)은 음성듣기와 예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필자(박영돈)는 그(예언 사역자)를 보면서 요즘 한국 교회에서 활개치고 있는 자칭 예언자들이 점술가와 얼마나 흡사한지를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예언자라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쓴 점쟁이와 다름없다.

……………………

성경에서 이런 유의 예언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지 앉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내일 일과 염려는 다 주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내일 일은 잘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찬양 가사처럼 말이다.

……………

미래를 미리 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불가능해 진다. 그뿐 아니라 믿음의 삶속에서 누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여 그 선택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훤히 내려다본다면 우리는 정해져 어찌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p. 27-28).

 



박영돈의 주장에 의하면, 필자가 서두에 제시한 신앙의 선배들의 간증은 모두 자신의 미래를 점친 점쟁이들이고, 미래를 미리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고,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여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를 박탈당하였고, 정해져 어찌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이다?

 

필자는 박영돈의 이러한 주장을 대하면서, 신학 박사란 자가 성경을 얼마나 보지 않았으면 이런 망령된 주장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영돈의 주장대로 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겠다’고 미래를 미리 알려주어 아브라함의 자유 의지를 박탈했고, 요셉에게 부모와 형들이 절하는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하여 요셉의 자유 의지를 박탈했고, 싫다는 모세에게 억지로 이스라엘 해방을 지시하여 모세의 자유 의지를 박탈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말씀과 환상으로 임하여 우상숭배하는 악한 왕들에게 바른 말을 전하라고 하여 그들의 자유 의지를 박탈했고, 생업에 열중하는 12제자에 그들의 자유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고, 바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강제로 이방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로 만드신 것이 된다.

 

박영돈의 주장대로 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요나만이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누린 사람이다? 실제로 요나는 육신적인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려다 오히려 불순종하여 고래 배에 처박힌 사람이 아닌가? 박영돈은 오늘날의 신자도 요나처럼 되기를 원하는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의 응답을 기록하고 있는데, 박영돈은 무슨 성경을 보는지 “성경에서 이런 유의 예언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지 앉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주장하는가?

 

물론 박영돈은 소명의 부르심 보다는 인생의 대소사에 대한 결정 여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박영돈은 앞날에 대한 주요 결정에 대해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바울형이냐, 디모데형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바울형와 디모데형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급진전 회심을 했고 이후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역을 위한 성령충만을 받았다. 바울은 회심 초기부터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남들이 하지 않는 개척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디모데는 정반대다. 디모데는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 받은 모태신앙인이다(딤후 1:5). 저돌적이고 모험적인 바울과는 달리 성격도 유순하고 다소 수동적인 사람인 것 같다(딤후 1:6-7).

 

일반적으로 은사주의자들은 바울형이 많고 기적중지론자들은 디모데형이 많다.

디모데형에게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대부분 갖추어져 있고 안정되어 있다. 교회도 부모나 조상들이 다니는 교단 소속 교회에 다니므로 선택의 고민이 적고, 소명을 받고 신학교를 가더라도 같은 신학 전통 내의 신학교에 진학하고, 학위를 받아도 같은 교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사역도 교단 소속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기 보다는 기존의 시골 교회-중형 교회-대형 교회로 승진(?)한다.

 

결혼 상대도 이런 계통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대부분의 것들이 주어져서 환경적 인도함만 따르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택의 고민이 드물다.

 

그러나 바울형은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늦은 나이에 성령을 체험하고 교회를 다니다가 소명을 받고 신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필자가 다닌 신학교는 성령 체험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교이므로 입학 여부를 고심했지만, 한국 주류인 장로교 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성령 신학을 제대로 변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그곳에 진학했다.

 

더욱 힘든 것은 섬길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성령 체험을 인정하는 교회가 주변에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성령 운동하는 미국 교회에 다녔지만 한계가 있어서 엄청나게 고민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한 교회로 인도하셨다. 당시로서는 가지 않아야 할 영 순위의 교회였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인도하셔서 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꿈으로 그 교회로 인도해주셨고 사람을 통해서도 확인해주셨다.

 

그러므로 주요한 결정을 할 때는, 초자연적 꿈이나 환상에 더하여 환경 및 여러 다른 요인을 감안하여 그것들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한 번 만이 아니라 거듭하여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잘 모르고 음성 한 번 듣고 꿈이나 환상 한 번 보고 중요한 결정을 하여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박영돈의 주장대로 라면, 필자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섬길 교회로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무한한 선택의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도 박탈당하고 정해져 있는 어찌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 셈이다.

 

그러나 필자의 자유 의지란 관점에서 보면 내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교회로 인도해주셔서 믿음도 더 자라고 당시로는 드물게 온갖 성령의 역사도 체험했기 때문에, 필자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되기는커녕 필자 자신보다도 필자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미리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한다.

 

이것은 필자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후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필자의 자유 의지에 간섭하셔서 하기 싫고 힘든 일을 억지로 시키신 경우가 많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순종하여 따라 온 것을 감사한다. 만일 필자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기이한 일을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맡기신 일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사람들의 사례가 성경은 물론 주변에도 널려 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송한다(히 11장 믿음장을 보라).

 

그러므로 박영돈은 매월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고 정년이 보장된 편안한 상아탑 안의 삶과, 매일 주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한 인도하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업가나 기타 사람들의 삶을 비교하지 말라. 스스로의 안일함과 영적 무지만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자유?

 

자신의 자유 선택권을 활용하여 음성이나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거듭되는 인도에도 불순종하면 어떻게 되는가?

 

한 전도사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충성하여 교회의 담임목사나 교우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부터인가 ‘은사사역을 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홀 사모로 두 자녀를 길러야 할 그는 경제적 두려움 때문에 선뜻 독립 사역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미 잘하는 사역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봐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녀들을 치기 시작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한 자기의 자녀들을 치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필자는 이 즈음에 그를 만난 상담했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소통이 없었다.

 

어떤 사모는 하나님이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기도하고 안수하면 병 낫는 사람이 많았지만 남편 목사가 그런 사역을 하면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하는 바람에 사역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사모에게 불치의 병이 걸려서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낫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사모를 기도원에 데리고 온 사람은 남편 목사였다. 남편 목사는 자기가 사모에게 신유사역 못하게 하여 그렇게 되었다면서 통곡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들이 복중에 있을 때 사명자로 서원했다. 한 아들은 어머니의 서원을 순순히 받아들여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는데 다른 아들은 자기와 상의하지 않고 멋대로(?) 서원한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제멋대로 살았다. 어머니가 아무리 서원했다고 해도 자기와 상관이 없다면서 막무가내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교통 사고가 나서 이가 여러 개가 부러지는 참상을 당한 후, 두 말 않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된 후 지금은 목회를 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박영돈 식으로 말하면, 이 사람들은 모두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면서 정해져 어찌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사람들인데,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박영돈은 자신의 제한된 견해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자유분방하신 선택권(?)을 제한하지 말기 바란다. 인간의 자유 선택권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의 양자택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처음에는 힘들고 내키지 않아도 순종하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형통하지만, 불순종하면 징계와 재앙이 따를 뿐이다. 하나님의 음성-물론 분별이 필요하지만-은 신자들이 일반적인 신앙 생활을 통해 알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부 극단주의자처럼 상식으로 할 수 있는 삶의 다반사 모두를 하나님의 음성에 의지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일 및 하나님의 구속적인 일과 관련된 일들은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신령하다고 해도 자유 선택권에는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주어진 환경이나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유 선택권’(?)에 자신을 맡기면 하나님이 음성이나 꿈이나 환상이나 환경을 통해 주권적이고 강권적으로 간섭하셔서, 인간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

 

그러므로 디모데형에 젖어있는 박영돈은 자신의 좁은 자유 선택권으로 바울형의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택권을 박탈하지 말기 바란다.

 

 

나가는 말

 

아직도 비판자들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이번 글은 일단 이것으로 끝내기로 한다. 사과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사과의 맛에 대해 설명한들 그 맛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음성듣기의 경험이 없는 자들에게 아무리 음성듣기나 예언이 지속된다고 한들 소 귀에 경 읽는 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으면 마치 자기들이 옳은 것처럼 계속 거드름을 피울 것이다.

 

“주여, 그들의 마음 문을 열고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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