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목회 > 신학과 목회
[신학검증(3)]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론 비판(2)
글로리아타임스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7.02  22:38:3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신학검증③]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론’ 비판(2)

예언 사역자는 ‘점쟁이’고 쓰러뜨리는 일은 ‘능력의 마귀화’라 하는
박영돈은 성령 모독자이자 성령 소멸자이다

 

 

여러 종류의 기적중지론자들

 

   

▲ 박영돈의 저서 캡처

사람들은 자기의 영적 수준을 성경적 기준이라고 착각한다
방언, 신유 축사 및 예언과 같은 기적행하는 초자연적 은사(들)가 사도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는 주장을 기적중지론(은사중단론)이라 하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기적중지론자(은사중단론자)라고 한다. 그러나 기적중지론자도 자기 경험 수준, 이해 수준에 따라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극단적 기적중지론자

 

신유는 인정하지만 방언을 포함한 모든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한다. 신유도 은사가 아니라 기도 응답(약 5:14)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리차드 개핀, 존 맥아더, 행크 해너그라프, 서철원 정이철 같은 자들이 대표적인 극단적인 기적중지론자들이다.

 

 

-신유와 방언은 인정하면서 예언이나 신비적 현상 등을 부인하는 자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상당히 많이 포진되어 있는 기적중지론자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방언·신유·예언은 인정하면서 쓰러지는 신비적 현상은 부인하는 사람, 방언·신유·축사와 영적전쟁 및 쓰러지는 현상은 인정하면서 예언은 부인하는 사람, 방언·신유·예언 및 쓰러지는 현상은 적극 활용하면서 영적 전쟁은 부인하는 사람 등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자기의 영적 수준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착각한다.

 

 

예언자가 ‘점쟁이’고 쓰러뜨리는 것이 ‘능력의 마귀화’라고?

 

-박영돈은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자

 

박영돈은 방언과 신유는 어느 정도 인정한다(『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p. 85-188). 박영돈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영의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신유도 인정하는 것을 볼 때, 이 두 가지에 대한 그의 모든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수용할 만하다.

 

그러나 신유에 대해서 손기철 장로의 신유 방법론을 비판하면서, 예배 중에 조용히 말씀 선포와 기도만으로 치유한 것은 건전한 방법이고, 손 장로의 방법은 건전한 방법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

 

누구 기준에 의해, 어떤 방법은 건전하고 다른 방법은 불건전한가?

박영돈의 말처럼, 예배 중에 말씀 선포와 일반적 기도로 치유 사역하는 것이 위험 부담은 적다. 병자가 나으면 다행이고 낫지 않아도 치유 사역자에게 책임이 없고 낫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의 섭리, 치유 사역자의 능력 부족 및 자신의 믿음 부족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 장로 식의 치유 사역은 위험 부담이 크다. 소위 말하는 *지식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누구의 이런 병을 낫게 해주셨다’고 선포하는데 이런 경우 맞지 않을 확률도 높다. 맞으면 청중들은 환호하고 사역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확신에 차지만 맞지 않으면 사역자는 물론 청중들도 어리둥절해지는 경우가 많다.

 

 (*지식의 말씀[고전 12:8].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 가 여인의 과거 남성 편력을 알아맞히신 것처럼, 사람이 정상적으로 알 수 없는 과거의 숨겨진 사실이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를 은사주의자들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고 한다. 이런 은사가 있으면 상담이나 치유 기도 및 영적 중보기도에 상당히 효과적이다).

 

현대 교회의 은사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처럼 100% 순도 있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역자는 나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는 낮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초자연적 사역을 본 받아야 하지만 그들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의 정도가 높은 것은 아니므로 치유 사역자나 능력 사역자들은 이 점을 감안하여 스스로  올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도 단언적으로 ‘치유 된다고 말씀하셨다’라고 단언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치유해 주실 것 같다’는 완곡한 표현이 사역자에게도 위험 부담이 덜 가고 듣는 청중도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요약하면, 방언이나 치유 사역에 대한 박영돈의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예언이나 쓰러지는 현상 및 임파테이션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문제가 심각하다.

 

-박영돈은 성령 모독자이자 성령 소멸자이다

 

박영돈은 자기는 신유와 방언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적중지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예언 은사자를 ‘점쟁이’(『일그러진』, p. 27)에 비유하고, 쓰러지는 것과 같은 신비적 현상을 ‘능력의 마귀화’(『일그러진』, p. 95)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박영돈은 도저히 기적중지론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서평자가 보기에, 박영돈은 자신이 우려했던 바와 같이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언을 멸시하고 성령에 의해 말하는 예언자를 점쟁이로 폄하하고 성령의 사역을 능력의 마귀화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8-30).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예언 은사자가 ‘점쟁이’라고?

 

박영돈의 주장대로 라면, 말썽을 부리는 일부 예언 사역자들을 차치하더라도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인정하는 잭 디어(Jack Deere), 고든 피(Gordon Fee),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존 파이퍼(John Piper), 샘 스톰즈(Sam Stormes), 번 포이트리스(Vern Poythress), 로드만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 같은 쟁쟁한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점쟁이 훈련자가 되어 버린다. 과연 그런가?

 

최근에 우연히 박영돈의 페이스북을 방문해 보았더니, 박영돈도 드디어 무당 대별에 합류한 흔적이 보인다. 박영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PC화면으로 보면 아래 그림을 크게 볼 수 있음)

   

▲박영돈의 페이스북 캡처

박영돈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박영돈은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처음에는 주님의 음성이 이런 식으로, 짧은 단어나 문장으로 육신의 귀가 아니라 마음에 들린다. 그러다가 깊어지면 환상이 열리기도 하고 긴 문장으로 들리고 대화도 가능해 진다.

 

‘겸손하라’는 내용을 보아하니 오지랖 넓게 천방지축으로 이것저것 비판하지 말고 ‘겸손하고 자중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부드럽게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 항상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거듭 경고한다’는 의미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자신의 행적을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음성 들은 것은 축하한다.

 

“박영돈 교수님,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군요. 점쟁이 대열에 합류한 것을 환영합니다.”

 

 

박영돈은 고린도전서 12-14장을 설명하면서 바른 견해를 제시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전 14:1)는 일부 기적중지론자들이 잘못 주장하는 것같이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문이라 주장하고, 그러면서 더욱 큰 은사는 예언을 포함한 언어적 은사라고 바르게 주장한다.

 

또한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구하고 사용하는 더 탁월한 길이며 방식이라고 바르게 해석한다(『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p. 288-93).

 

 

-예언의 은사는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가 아니다

 

그러나 박영돈의 이 주장을 액면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박영돈은 여러 주제에 대해 많은 책을 섭렵하여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식의 희한한 기적중지론으로 결론을 몰고 가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예언의 은사에 대한 그의 잘못된 견해이다.

박영돈이 말하는 ‘예언’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이 아니다. 박영돈은 다른 책에서는 예언을 직통 계시로 폄하하고 예언자를 점쟁이로 비난하기 때문이다(『일그러진』, pp. 27-28).

 

박영돈이 말하는 예언은 무엇일까?

박영돈은 명시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칼뱅 이래로 수많은 기적중지론자들이 답습해 온 주장 즉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롬 12:6; 고전 12:10, 14:1)를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아주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첫째, 만일 예언의 은사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라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는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다. 고전 14장1절은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설교나 가르침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설교나 가르침은 한 번에 두서 명이 순서에 따라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한다?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29-30).

 

또한, 한 사람이 설교나 가르침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먼저 하던 사람은 그만 두어야 한다. 과연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하는가?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언자(선지자)와 교사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9).

 

물론 한 사람이 선지자이자 교사가 될 수는 있지만 둘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박영돈도 언급한 것처럼, 결과적으로 예언의 은사나 설교의 열매는 같을 수 있다. 예언의 은사도 기록된 성경 말씀의 범위 내에서 위로하거나 책망하고 설교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말씀의 선포이고 예언은 개인적으로 맞춤화된 말씀의 선포이다. 또한 예언은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의 방향 설정을 알려주기도 한다.

 

 

-’실천상의 오류’와 ‘전체적 오류’의 차이

 

신자라고 앞 날이 궁금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신자 중에서 정기적으로 점 치는 사람이 30%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신앙이 제대로 있는 사람은 점쟁이를 찾지 않고 예언 은사자를 찾는다. 이들의 관심은 주로 가정사업 및 사역의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이나 가족의 앞 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언 은사자가 내담자에게 군림하고 조정하려는 실천상의 오류나 자신의 예언의 은사를 과신하는 성취의 오류 및 윤리도덕적 비리가 드러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예언의 순기능이 엄청 많은데도 비판자들에게는 역기능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다.

 

만일 예언 은사자가 위험하다면, “왜 10억 총회장이 위험하다고 하는가?” “왜 성 추행한 신학교수가 위험하다고 하는가?’라는 비판은 없는가? 빈도나 영향력으로 보면 후자가 더 많고 클 텐데 말이다. 이런 류의 비판은 세상 사람들이 매스컴을 통해 목회자나 중직자들의 비리를 접하면 교회 전체를 비리 집단으로 보는 것과 같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박영돈도 그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돈은 본인의 말 대로 수많은 은사집회에 은혜 받으러 참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참석하면서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비판하는 바리새인처럼,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과 무경험을 바탕으로 영적 현상들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니 여러 가지 오류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다.

 

 

박영돈은 걸핏하면 ‘그게 성령의 역사인가, 인격의 열매를 맺어야 성령의 역사가 아닌가?’하고 말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나 고신 교단 교인들이 그 좋다는 개혁신학 전통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설교 말씀 좀 듣고 나면 금방 그대로 실천하고 변화 받아서 인격의 열매를 맺는가?

 

개혁신학을 강조하는 그들이 그렇게 신앙 인격의 열매를 잘 맺어서 성 폭행 목사들이 고신 교단에서 탄생하는가? 그들은 목회자가 되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교했을 텐데 어떻게 해서 자기 안에 있는 음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수억 대의 교회 사례비를 챙기는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는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신령하고 강력한 체험을 하고 강한 은사를 받아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 신자가 가짜 신자인가? 박영돈은 자기 교인들의 신앙의 진정성을 어떻게 분별하는가? 보이는 행동이나 말로 분별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들의 속까지 들어가 보았는가? 사람은 믿음도 충분히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가 보기에 그래도 은사적 교인들은 일부가 다소 미성숙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나 헌신은 있다. 그런데 전통적 교인들은 대부분이 열정도 없고 헌신도 별로 없다. 그리고 은사적 교회나 전통적 교회나 신앙 인격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은 피장파장이다.

 

그런데 왜 은사적 교회만 그런 것처럼 과장하는가? 자기들이 하면 개인적 일이고 은사적 교회가 하면 왜 도매금으로 비판하는가? 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을 반복하고 있는가?

 

 

-쓰러지는 것이 ‘능력의 마귀화’라고?

 

박영돈은 쓰러지는 현상을 ‘빈야드 현상’이라고 부르면서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단언하는데(『일그러진』, pp. 67-73). 이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고 교회사도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할 깨, 육신을 가진 연약한 인간은 쓰러지거나 두려움에 질려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자발적으로 엎드리거나 힘에 겨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쓰러지기도 한다. 쓰러진 후 여러 가지 신체적, 감정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임하자 찬양하던 제사장들이 서서 섬길 수가 없었다(대하 5:13-14). 앉거나 쓰러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울은 하루 종일 드러누워서 예언도 했다(삼상 19:23-24).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바울)은 말에서 떨어진 후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행 9:3-5).

-다니엘, 에스겔 및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단 8:17; 10:9; 겔 1:28; 마 17:6).

-천사를 본 경비병들이 무서워서 떨며 죽은 사람 같이 되었다(마 28:2-4).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군병들은 뒤로 물러가다가 넘어졌다(요 18:6).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 같이 되었다(계 1:17).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 즉 성령이 권능으로 임할 때 사람들이 자발적이나 비자발적으로 쓰러진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떤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뒤로 물러섰다가 넘어진 자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이 없다’면서 쓰러짐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서 그 수많은 설교를 듣고 즉석에서 은혜 받고 변화 받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나? 전 세계적으로 한국 교회 만큼 설교 많이 하고 많이 듣는 신자나 교회도 드문데 왜 세상의 소금과 빛 역할을 하는 신자가 그렇게 드문가? 그렇다고 설교가 잘못된 것인가?

 

또한, 교회사적으로 기록된 자료가 존재하는 최초의 현상은 요한 웨슬리에서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 조나선 에드워드, 찰스 피니 20세기 오순절 성령운동 및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반복되어온 현상이다.

 

그런데 박영돈은 이를 ‘빈야드 현상’, 정이철 같은 자는 ‘신사도현상’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이 빈야드 운동이나 신사도운동가들인가? 제발 좀 영적 무지로 인해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가만히 있으면 이등이라도 할 텐데 괜히 잘난 체 설치니까 꼴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박영돈의 페이스북을 보니, 몇 명의 신학자들이 조나선 에드워즈 학술 대회를 한다는 광고가 있다. 박영돈도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조나선 에드워즈의 어떤 면을 강조하는지 궁금하다. 강사의 대부분이 기적중지론자들인 것을 보면 무엇을 강의할 지 대충 감이 잡히기도 한다.

 

서평자도 신학교에서 Th.M·PH.D 과정의 『조나선 에드워즈』강의를 두 번이나 청강한 적이 있다. 한 교수는 에드워즈가 말한 부흥기에 나타나는 현상과 영적 체험 중심으로 수업을 인도했고 다른 교수는 에드워즈의 교리 중심으로 수업을 인도했다. 이후, 조나선 에드워즈 전공자들의 글들을 보니 대부분이 교리 중심으로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조나선 에드워즈에 대해 말할 때,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종교적 감정’(Religious Affections)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말하지만 에드워즈가 분석하고 변호한 쓰러지는 현상과 같은 영적 체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기야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는 성령의 외적 사역에 대해 문외한인 경우도 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박영돈은 쓰러지는 현상을 인정도 하지 않으면서, 이전의 부흥기에는 설교 말씀을 듣고 쓰러졌는데 요즈음에는 안수 기도로 쓰러뜨린다고 비판한다(『일그러진』, pp. 68-69). 물론 성경에는 안수하여 넘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요한 웨슬리나 조나선 에드워즈 등의 집회에서는 설교 중에 쓰러지는 일이 많았다. 또한 오순절 집회에서는 찬양 중에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 은사적 교회에서는 안수를 통해 쓰러지는 경우가 보편화 되었다.

 

안수를 통한 기도 사역은 박영돈도 언급한 것처럼 ‘학습효과’에 의한 것이다. 치유 사역자 헌트가 어떤 사람을 세워놓고 눈을 감고 안수기도를 했는데, 눈을 떠보니 사람이 보이지 않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안수기도 사역이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성령이 임할 때 쓰러지는 것도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하시기도 하지만-박영돈도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서 이런 사실을 목격했다(『일그러진』, p. 91)- ‘은혜의 방도들’(means of grace)인 말씀, 기도, 찬양 및 안수 등을 사용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앉혀 놓고 기도하면 쓰러지지 않는다고?

 

박영돈은 또한 앉힌 채로만 기도해도 사람들이 결코 쓰러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인데 왜 굳이 앉아있는 사람을 일으켜서 쓰러뜨리느냐고 비난한다(『일그러진』, p. 71).

 

과연 앉혀 놓고 기도하면 쓰러지지 않는가?

앉혀 놓고 기도해도 쓰러진다. 예배 중에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면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기저기서 '풀썩,' '턱' 하면서 쓰러진다.

 

서평자는 수많은 집회에서 이런 일을 목격하고 사역한 지가 30년 가까이 된다. 그런데 박영돈은 실제로 사역을 해보지도 않고 몇 번 이런 저런 집회에 참석-그것도 은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 참석-해놓고, 자기 마음이나 취향에 맞지 않다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과 깊은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고 몇 개의 간접적 기록만 갖고 쓰러지는 현상을 비판해 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기도해야 할 때, 기도원처럼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으면 사역자는 일일이 허리를 꾸부려서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부담이 가서 세워 놓고 기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언젠가 필자는 이런 식으로 앉아 있는 많은 사람에게 기도 사역한 적이 있다. 초청한 교회 목사가 박영돈의 이런 글을 보고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세워 놓고 안수하면 뒤에서 받아주는 사람[캐처. catcher]이 필요한데 이것도 힘든 노동이다-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앉혀 놓은 채 기도 사역을 한 적이 있다. 앉혀놓고 기도한다고 해서 쓰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잘 넘어가는 사람은 사역자의 눈 빛만 보고 손짓만 해도 쓰러지거나 인근 장소에 있기만 해도 쓰러진다. 서평자가 아는 어떤 목사의 사모와 어떤 여자 목사들은 이런 집회 장소의 입구에 발을 딛자 말자 쓰러져서 몇 시간의 예배 내내 누워있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남편 목사가 등에 업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남미의 어떤 집회에서는 성령의 권능이 얼마나 강하게 임했는지 주변을 지나가던 버스 탑승객들이 쓰러지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신비적이고 미신적이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날 양자역학(Quantum physics)을 이해하면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거려 질 것이다. 즉 사람이나 물질은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그 에너지가 직접적 접촉이나 영향권 하에 있으면 접촉한 사람이나 물질에게 전이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이 가졌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바울이란 통로를 통해 그것들에게 전이되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행19:12 참조).

 

비판자들은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만 이해하는 데, 성령 하나님이야 말로 영(Spirit)시이고 인격체-원래는 신격체이다-이신 동시에 모든 에너지나 기운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하면 기쁨, 감사, 회개가 넘치지만 악령의 영향권 아래 있으면 두려움, 분노, 짜증 등이 임한다.

 

그러므로 집회에서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면 직접적으로 또는  집회 인도자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말씀, 기도, 찬양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도들인 것처럼 안수 사역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도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앉히든 서게 하든 이런 것들은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박영돈은 잘 모르면서 어설픈 지식으로 영적 사역을 폄하하지 말기 바란다. 만일 이런 식으로 사역 방법을 매도하면 신학교에 설교학을 개설하고 박사 학위자가 신학교 교수되는 것도 비성경적이다. 성경 어디에 설교학을 가르치고 사전에 준비하여 원고로 설교하라는 구절이나 사례가 있는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언제 설교 원고 준비하여 설교했는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하지 않았는가?

 

성경 어디에 세상 방법의 박사 학위자가 신학교 교수가 되라는 구절이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4년제나 3년제 신학교 졸업하고 사역자가 되었는가? 그렇다고 서평자는 이런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박영돈 같은 자들이 자기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성경적으로 재조명 해보라는 것이다.

 

- 성령사역자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의존한다고?

 

박영돈은 또한 교인들이 이런 현상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의존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일그러진』, pp. 69-70). 과연 그런가?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면서 모든 신자가 성경을 해석할 권한과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수많은 신학생들이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하지 않고 박영돈 같은 박사에게 배우는가? 왜 성도들 스스로 성경이나 신학을 연구하게 하지 않고 학자들이 학술 대회를 하여 신자들이 이런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의존하게 하는가? 박영돈은 이런 질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다.

먼저 많이 배운 신학자가 후진들에게 신학 지식을 전수하듯, 영적으로 많이 체험하고 은사를 많이 받은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은사나 능력을 전수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박영돈이 우려하는 것처럼 모든 성도가 항상 이런 식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 과정이 3년이듯, 3년 정도 안수 사역 등을 통해 열심히 은사를 추구하고 배우면, 일반적으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홀로 서기가 가능해 진다. 그러나 그런 집회가 지속되는 이유는, 신학교에 새로운 학생이 충원되듯, 새로운 사람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영돈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 안수 사역이 ’능력의 마귀화’하는 범죄의 위험성이 있다고?(『일그러진』, p.  70)

 

안수하여 쓰러뜨리는 일은 위험성이 크며 능력의 마귀화라는 범죄에 빠지기 쉬우므로 안수하여 쓰러뜨리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박영돈은 주장한다.

 

박영돈의 주장은 자동차나 가스 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죽으니 자동차나 가스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자동차와 가스가 위험하지만 왜 잘 사용하고 있는가?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고의 대안은 안전을 강조하고 사용자의 자격 요건을 제한하는 것이지 사용 금지가 아니다.

 

오지나 기독교 적대국 선교는 얼마나 위험한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는다. 사업은 얼마나 위험한가? 잘못하면 망하고 빚도 지고 패가망신하는데 왜 위험한 사업을 하는가?

 

학자들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위험하다고 성경이 허용하는 사역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대표적인 것이 박영돈 류의 기적중지론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유럽 교회가 텅 비고 미국의 주류 교단이 쇠퇴 일로에 있고 한국 교회도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기적중지론은, 저돌적이고 적극적인 현장 사역자들이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의심 많고 샌님 같은 학자들이 인간의 논리로 만들어 낸 인본주의 신학이자 사이비 신학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잘못된 신학을 따라야 하는가?

 

자료 참조 : “쓰러지는 현상 변호.” 『글로리아타임스』우측 배너 참조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22&view_type=sm

 

 

-‘경험’이나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끼치는 영향

 

박영돈은 방언에 대해 무경험자가 성경을 더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과신하면서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일그러진』, p. 173)고 주장하는데 박영돈이야 말로 누구 보다 먼저 무경험의 횡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사람은 무식하면 용감해 진다. 한 주제의 책만 많이 보면 *확증 편향의 오류가 있어서 더 용감해 진다.

(*확증 편향의 오류.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쉬운 말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을 확증편향이라고 하며 이런 논증을 ‘확증편향의 오류’라고 한다)

 

 박영돈의 주장 대로 라면 사과를 먹어보지 않고 사과에 대한 설명한 들은 사람이 사과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앤드류 머레이는 두 가지 지식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생각이나 이념으로 아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을 통해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똑똑한 소경 과학자는 책을 통해 과학이 빛에 대해서 말하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일지라도 그는 똑똑한 소경보다 빛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소경 과학자는 생각을 통해 빛에 대해서 알지만 어린 아이는 실제로 빛을 보고 즐김으로써 빛을 알기 때문이다.”

 

 

박영돈은 자신의 무경험과 나쁜 경험이 그의 기적중지론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한쪽으로 치우친 ‘일그러진 성령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사람은 누구라도 경험과 무경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예수님 같은 사람이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미 300여년 전에, 박영돈 같은 비판자들-특히 반(反) 부흥파인 찰스 촌시-에게 항변하기 위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고, 이를 계승한 로이드 존스도 『부흥』에서 쓰러지는 현상을 잘 변호해 놓았다.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등의 일기나 전기에 보면 그들의 집회 중에 일어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도처에 깔려있다.

 

그런데 박영돈은 성경적 사례나 교회사의 증거에 문외한이 되어,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적 관점과 자기의 좁은 무경험과 상대방에 의한 나쁜 경험의 범위 내에서 이런 사역을 ‘능력의 마귀화’라는 극단적 주장도 서슴지 않는 무지와 만용을 보이는 것이다. 하기야 초자연적 은사를 무시하는 칼뱅의 반쪽 성령론을 전공한 박영돈 같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랴.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 ”와 “임파테이션”

 

 

빅영돈은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 ”와 “임파테이션”이 인위적으로 성령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폄하한다.

 

-‘성령님, 임하소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기도이다

 

박영돈은, 온누리교회의 손기철 장로가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 터치”라는 명령조로 하늘에서 성령을 불러내어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면서, 좀 더 냉철하게 자신의 사역을 성경적으로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 말한다 (『일그러진』, p. 94). 손 장로가 마치 성령을 마음대로 부리고 명령할 수 있는 하수인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한때는 손 장로 식의 사역을 성령복덕방이라 폄하하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다.

 

서평자는 박영돈이야 말로 이런 사역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점검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박영돈은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다. 박영돈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교만해 있거나 착각하는 것 같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요청했다.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놓고 하나님께 응답을 요청하자 하나님이 불을 내리셔서 제단과 제단 주변을 불태우셨다(왕상 18:37).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 18;37-38).

 

-제자들은 간구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120문도가 간절히 기도한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다(행 1:14; 2:4). 이후 또 다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성령충만으로 응답하셨다(행 4:24-31).

 

-누가복음은  신자들에게 ‘성령을 간절히 구하라’(눅 11:13)고 말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눅 11:13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누가복음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사건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는가?

 

물론 복음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체류 중이던 A.D. 61~63이다. 이때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지 30여 년이 지난 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강조하는 누가가 누가 복음을 읽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성령을 구하라’고 권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WBC의 누가복음 주석가인 존 놀란드(John Nolland)도 서평자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Nolland,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5: Luke, Dallas, TX: Word Books, Publisher, 1998. CD 버전).

 

-고린도전서는 초자연적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기록한다(고전 12;31; 14;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2:3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초자연적 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이런 성경 구절들을 살펴 볼 때, 신자가 개인적이든 단체적이든 성령을 구하는 것은 하등 잘못된 일이 아니다. 서평자는 기도원에서 “성령 주시옵소서!”라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하다가 갑자기 “다다다~”하면서 방언 하는 사람도 보았고, 혼자 기도하다가 성령이 너무 강하게 임하여 앉아있지 못하고 한 동안 누워있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면 집회 인도자가 참석자를 위해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라고 간구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하게 보는 자가 이상한 것이다.

 

그러면 기적중지론자들은 “네가 엘리야냐, 네가 사도냐? 그들은 특수한 시대에 살다간 특수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보통 시대에 사는 보통사람이므로 그런 것은 우리의 본보기나 경험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고 변명한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니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고(약 5:17), 제자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일반 신자 보다 스펙이 훨씬 못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교회 시대 신자들이 본 받지 못할 특수한 경험과 사역을 했지만 우리가 본 받을 것들이 더 많다.

 

그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무학자인 제자들도 크게 들어쓰셨는데 하물며 스펙이 훨씬 더 좋은 우리일까 보냐! 다만 그들만큼 믿음이 따르지 못하고 간절함이 없으니까 그들만큼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파테이션은 ‘은혜의 한 가지 방도’(One mean of grace)이다

 

“최근 성령운동에서 임파테이션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 준다는 말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그 기름을 다른 이에게 흘러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고 그분을 하나의 도구나 인간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반면에 인간을 신격화하는 말이 될 수 있다………

 

물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의 사역을 통해 은헤가 풍성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성령의 도구이며 통로일 뿐이다.

 

이는 성령의 은혜를 전수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전수하는 것은 내 것이 된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은사와 권능은 내 소유가 아니며 내가 그것을 마음대로 전수할 권한은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인간이 안수한다고 이 선물이 하사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통해 성령 충만과 은사가 전수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며 성령을 자신의 원대로 움직이는 시녀로 취급하는 성령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할지라도 성령을 마구 끌어당겨 사용하거나 남에게 자유롭게 전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하는 이는 실제적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는 이위론자, 즉 이단자이다” (『일그러진』, pp. 73-74).

 

 

박영돈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자신은 성경적 성령론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이런 중대한 발언을 하면서도 관련된 성경 구절 하나 인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신학 박사라서 모두 안다고 교만해서 그런가, 착각해서 그런가? 성령론에서 제일 위험한 것 중의 하나가, 박영돈처럼 하나님의 주권이나 성령의 인격성이란 말을 내세우면서, 전혀 성경과는 다른 ‘개괄적이고 모호한 주장’(sweeping assertion)을 하는 자들이다.

 

만일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말씀 한 마디로 하시면 될 일을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사람의 노력을 사용하시고, 죄를 없애기 위해 성령을 주셔서 당사자가 회개하게 하시는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시는가? 이러한 내용에 대한 구체적 성경 구절 제시 없이 '개괄적 주장'을 하는 것처럼 위험한 주장은 없는데 박영돈은 수시로 이런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성경은 임파테이션에 대해 박영돈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한다.

 

 “(사마리아에서)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7-18).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내(사도 바울)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를 impart로 번역한다. 이 단어에서 명사형 impartation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다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로마서가 말하는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 카리스마 프뉴마티코스)는 무엇을 말하는가?

 

‘카리스마’는 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의 선물로서의) 은사(롬5:15-16), 축복(롬 15:29) 및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란 의미의) 은사(롬 11:29)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곳에서는 (성령의) 은사(들)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12:6; 고전 1:7; 7:7; 12:4, 9; 28, 30, 31; 딤전 4:14; 딤후 1:6; 벧전 4:10).

 

 

한국 목회자들이 많이 보는 보수적 성향의 『그랜드 주석』은 롬 1:11의 ‘카리스마’를 (1)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전해 주는 은혜 즉 즉 구원(Harrison)과 (2) 사도의 안수로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행 8:17, 18, Bengel)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기적중지론자인 제임스 던은 “바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 표현-어떤 구체적 표현?”이라 하고 존 스토트는 초자연적 은사가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이나 권면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당연히 초자연적 은사라고 해석한다. 바울이 실제로 사마리아와 에베소에서 신령한 은사인 방언과 예언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전체적으로 설명하면 제임스 던, 존 스토트의 견해는 물론 초자연적 은사 모두를 포함한다는 해석이 좋을 것 같다. 어떻든 바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를 나누어주었다.

 

그렇다면 박영돈에 의하면, 바울은 “성령을 마구 끌어당겨 사용하거나 남에게 자유롭게 전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하는 이는 실제적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는 이위론자, 즉 이단자이자 성령 모독자인가?”  제발 그런 무식한 단언을 좀 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다면 기적중지론자들은 ‘바울은 특수한 사명을 받은 특수한 시대에 살다간 사람이고 우리는 보통 시대에 사는 보통 사람이므로 우리 사역의 본이 아니다’고 설명할 것이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초자연적인 것과 관계된 것이면 모두 이런 식으로 설명하여 자기들이 구하지도 않고 받지 않은 것을 정당화 한다.

 

 

물론 신학적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성령 하나님이 안수자를 도구나 매체로 하여 피안수자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흘러가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용어로 기록된 경우가 많다.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해가 진다’, ‘해가 뜬다’는 말이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과학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일몰, 일출 현상은 태양은 고정되어 있지만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상대 같은 과학적인 기관에서도 통상적인 용어인 일몰, 일출이란 말을 사용한다.

 

성령사역자가 임파테이션 사역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 보기에 안수자가 피안수자에게 성령을 받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그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인가, 비판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인가?

 

임파테이션 사역이 성경에는 있지만 아직 생소하고 로마 가톨릭에서 신부들이 성도들에게 안수를 통해 은혜를 베푸는 사역을 하다 보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목회자나 사역자는 일반적으로 안수 기도에 익숙하다. 오순절 교회나 전통적 교회에서도 병자나 축복 기도를 위해 안수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도 하나님의 축복이나 능력의 통로로 사용하는 것이다. 안수 기도하면서 안수자 자신이 병을 낫게 하고 축복을 준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이단자이다. 그러나 제 정신 가진 사람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가?

 

임파테이션 기도도 마찬가지다. 임파테이션 기도는 치유와 축복 기도라기 보다는 능력을 전이하고 전수하는 기도이다.  차이는 그것 뿐이다.

 

서평자의 안수기도를 통해서도 수많은 사람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시므온이 탐낸 것처럼(행 8:18-19) 성령을 나누어 주는 은사도 받았다.

 

언젠가 지방의 한 큰 교회의 주중 집회 요청을 받았다.

그 집회에는 적어도 수백 명이 참석하였고 강사들이 나중에 일일이 안수 기도해주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떤 강사는 동행한 목사들과 같이 안수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서평자도 그때 마침 동행한 목사들이 몇 분 있었다. 그리서 서평자는 동행한 목사들을 잠시 훈련시켰다. 서평자가 먼저 안수 기도해 준 후 각자가 서로 기도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참석한 5~6명 모두가 성공적으로(?) 안수 기도를 하였다.

 

며칠 후, 그 교회 집회에서 서평자가 설교를 마친 후 안수 기도사역이 시작되었다. 필자는 강대상에서 기도하고 다른 목사들은 본당에서 한 줄로 서서 기도했다. 안수 기도를 원하는 참석자들이 각 목사 앞에 한 줄로 서서 안수 기도를 받았다. 대부분이 성공적으로 안수 기도 사역을 마쳤다. 이들 대부분은 성령사역에 입문한 지 이제 겨우 몇 개월 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의 한 목사는 자신의 안수 기도로 사람들이 너무 잘 쓰러지니까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렇다고 서평자나 이 목사들이 ‘성령을 부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며 성령을 자신의 원대로 움직이는 시녀로 취급하는 성령 모독죄를 범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서평자는 나 같은 죄인을 통로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성령을 체험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임파테이션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고찰도 하지 않고 본인이  실제로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상상하여 위험하다며 이단시 하는 박영돈은 제발 정신 좀 차리기 바란다.

 

오히려 박영돈 같은 영적 이단아들이 잘못된 신학으로 신자들이 기도 중에 성령을 초청하고, 안수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성령 체험하는 것을 가로 막아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성령의 사역적 능력과 초자연적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명령하고, 안수를 통해 나누어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사마리아에서)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초자연적 은사들)을 (간절히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7-18).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내(사도 바울)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관련기사]

글로리아타임스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5610> 서울시 송파구 백제고분로39길 21-19, 201호  |  대표전화 : 0707-554-0585  |  팩스 : 0504-037-0050  |  Mail to : gloriatimes@naver.com
발행인·편집인 :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 구요한 발행인  |  후원계좌 : 국민은행 529401-01-218720 예금주 임마누엘선교회  |  사업자등록번호 : 123-89-06414
Copyright © 2017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