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목회 > 신학과 목회
[신학검증(2)]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론 비판(1)편파적인 그의 '성령충만'은 성령을 소멸한다
글로리아타임스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6.18  21:11:49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신학검증②]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론 비판(1)

-편파적인 그의 '성령충만'은  오히려 성령을 소멸한다-

 

   

▲ 박영돈은 성령충만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사역을 위해 중요한 누가의 성령충만은 무시한다.

들어가는 말

 

박영돈예장 고신측(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 교의학(조직신학)교수이다.


예장 고신은 한국의 대표적으로 수구적, 율법적이며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을 신봉하는 교단이다. 예장 고신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생활을 하다가 출옥한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이 세운 칼뱅주의적 개혁주의 신앙의 교단이다.

 

그들은 출옥 후 분열되기 전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의 다수의 목사들이 일제 시대에 신사 참배한 것을 공격한 결과 다수의 역공을 맞고 탈퇴하여,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적 성향의 고신 교단을 세웠다. 그들의 영적 순결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지나친 독선과 자기 의가 분열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예장 고신의 융통성이 없는 골수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 신학은 성장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예장 합동, 예장 통합 및 예장 대신(백석) 등이 융통성을 지니면서 기적중지론과 기적계속론의 혼재를 수용하는 동안, 예장 고신은 동생 뻘인 예장 합신과 함께 골수 기적중지론적 입장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수시로 은사 운동을 배척하거나 정죄하고 그런 목회자들을 제명시키다 보니 군소교단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장 고신은 영적 순결과 신학적 바름(?)은 강조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교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은 여자 청년 성폭행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장 고신 소속의 이동현 목사였다. 그는 18세 고등학생에게 4년 여간 수차례 성관계를 강요한 사실이 밝혀져 2016년 9월8일 노회에서 사임·면직당했다.

 

고신 계열 교파의 성추문과 금전남용의 대표적 케이스는 석원태 목사이다.
한국의 대표적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자’인 예장고려 총회 설립자이자 경향교회 설립 목사인 석원태는 입이 딱 벌어지는 엄청난 사례비와 상습적인 성추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석원태와 교회를 세습한 아들 석OO은 각종 명목으로 한 해에 각각 7억 원 가까운 사례비를 챙긴 대표적 삯꾼 목사들이다.

 

그뿐 만이 아니다. 석원태는 불륜 사실이 드러나서 총회에서 조사를 하려고 하자 교단 탈퇴로 맞대응을 했다.「개혁하라」사이트의 “석원태 목사 제명 청원에 대한 호소문”을 보면 석원태의 성범죄는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파렴치한 세상 성범죄자의 죄상을 능가한다.

(참조 : http://www.reformghpc.com/bbs/board.php?bo_table=free&wr_id=13)

 

물론 예장 고신 교단 소속의 모든 사람들이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 순결과 교리적 순결(?)을 내세우는 예장 고신 교단도 ‘용서 받은 죄인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흠결이 없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필자가 왜 이런 사실을 밝히는가?
말씀을 강조하고, 교리 바르고 전통 바르다는 예장 고신 계통 교단의 윤리적 실체가 이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박영돈 같은 자는 소속 교단의 낙타 같은 비리에는 침묵하고 은사적 교회의 각종 비리에는 지나치게 예민하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 교회 모든 비리의 책임이 은사적 교회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 범람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의 전형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은사적 교회의 열매를 논하기 전에 먼저 ‘교리 바르고(?) 전통 바르다(?)’는 자신들의 집안 단속부터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 윤리도덕적으로 순결하지도 않고, 교리적으로도 기적중지론이란 ‘사이비 신학을 수용하는 그들이 무엇이 잘났다고 걸핏하면 은사적 교회를 비판하고 은사 사역자들을 정죄하는지 그 이유를 서평자는 도무지 알지 모르겠다. 오래 되었다는 텃세 외에 잘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박영돈의 편파적이고 모순된 주장들

 

 

박영돈은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SFC, 초판 2008, 개정 2016)와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IVP, 2011)에서 자신의 성령론을 전개한다. 『성령충만~』이 원론적이라면 『일그러진~』은 각론적이므로 여기서는 전자부터 먼저 비판하고 다음에 후자를 비판하고자 한다.

 

박영돈의 『성령충만~』은 논점이 산만하고 지리멸렬하여 중심을 잡기 힘든 책이다. 신학 서적도 아니고 경건 서적도 아니면서 횡설수설하는 주장이 많은데, 그만큼 자기가 다루는 주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거나 심층적 연구가 부족하여 잡다한 자료를 일관성 없이 나열하다 보니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또한 나름대로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학자 특유의 조심성과 소심함 때문에 전체적 내용이 물에 물 탄 것처럼 밋밋하고, 교단이나 동료들의 기대를 생각하면서 글을 쓴 것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결론들이 여러 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박영돈은 신자들이 (생활) 성령충만(엡 5:18)하지 못한 이유는 사모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오순절주의자들이 (사역을 위한) 성령충만을 얻기 위해 사모하고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은 인위적인 ‘조건 이행’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박영돈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조건 이행’이 아니라 ‘부흥의 한 면’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그렇다면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 하는 것도 ‘조건 이행’이 아니라 성령충만의 '한 면'이 아닌가?
 

 

박영돈은 ‘사역을 위한 누가의 성령’과 ‘구원을 위한 바울의 성령’을 구분하는 듯하면서도, 둘은 선교적이고 교회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기능을 하는 것이므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사역적 특별 성령충만을 받고 사역했는데 오늘날의 우리가 무엇이 잘났다고 그런 능력 없이 하나님 나라 일을 하겠다고 거드름을 피우는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말씀도 있고 특별 성령충만 하여 사역했는데 오늘날의 우리가 뭐라고 말씀만 갖고 사역을 하겠다고 건방을 부리는가? 이것은 박영돈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자기들의 무경험이나 타인을 통한 나쁜 경험을 정당화하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박영돈은 과거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신비한 하나님의 임재 체험 한 것을 기록하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비성경적이고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것들이라고 폄하한다.

 

과연 그런 체험들이 비성경적인가?

요셉은 13년에 걸친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기 전에 아버지 야곱의 사랑도 듬뿍 받았고 부모와 형제들이 자기에 절하는 신령한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 사도 바울은 이방 사도로 말할 수 고난을 받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성령충만 받는 체험을 했다. 박영돈도 예를 들었듯이, 교회 시대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요한 웨슬리, 조나선 에드워즈, D.L. 무디 등이 특별한 성령충만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부부 간에 좋은 추억이 많으면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잘 이겨낸다. 그래서 부부 간에 여행이나 취미 공유 등을 통해 좋은 추억 만들기를 권장한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특별한 체험을 한 자들이 지루하고 고난 많은 신앙생활을 상대적으로 잘 이겨낸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성령충만을 경험하면서 고난과 환난의 가시밭길 같은 신앙의 순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박영돈은 이러한 성경적, 역사적, 현실 경험적 사례들을 부인하고 감정적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위험성과 모든 사람이 그런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앙의 하향평준화를 강조한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만 자본주의는 소수를 부자로 만든다'는 말이 있다. 박영돈의 주장은 이런 주장과 비슷하다. ‘모든 사람이 (영적) 부자가 될 수 없고 (영적) 부자는 교만하고 타락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차라리 모두 (영적으로) 가난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별 성령충만 체험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지만,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들이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별 성령충만한 자들의 미성숙으로 인해 꼴불견과 오남용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오남용 없는 것이 어디 있는가? 자동차나 가스도 위험하고 한번 사고 나면 수많은 사람이 다치지만 유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고 있다. 안전하다고 해서 자건거 타고 장작 불을 사용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자동차나 가스가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사용 방법을 잘 숙지시키고 강화하면 된다.

 

그러면 박영돈이 대표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은 위험하지 않은가?
 

기적중지론에 젖어 기적행하는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야 말로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행하는 은사(들)는 죄와 마귀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강력하게 무찌르는 첨단 영적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성령충만의 위험성을 말하기 전에 박영돈은 자신이 대표하는 기적중지론적 교회들의 냉랭하고 열매 없는 ‘죽은 정통’의 위험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정리하면, 박영돈은 고린도전서의 구원성령세례와 사도행전의 사역성령세례를 구분하지 않는 제임스 던(James Dunn) 류의 잘못된 성령세례(충만)관, 부흥기에 나타나는 성령의 비상하고 특별한 체험들-특별한 성령충만-을 부인하는 전통적인 일반 성령충만(엡 5:18)에 경도된 기적중지론자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영돈의 책은 ‘특별한 성령충만’을 구하지 않거나 받지 못한 사람들에 헛된 위로와 만족을 주면서, 일반 신자들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덜 한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희한한 책이다. 결국, 신령한 체험과 기적행하는 은사(들)를 적극적으로 사모하고 구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무시하고, 영적 부흥기나 성령사역 집회에 임하는 극적인 체험인 ‘특별한 성령충만’을 부인하고 ‘일반적 성령충만’만 강조하는 박영돈의 성령론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 신앙의 하향 평준화에 착실하게 기여할 뿐이다.

 

 

'특별 성령충만'과 '일반 성령충만'을 구분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는 박영돈 같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경험과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잘못되기쉬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위험은 성경을 넘어가거나 혹은 성경에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

두 번째 위험 역시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위험은 첫 번째와 정반대되는 것으로,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항상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이 두 번째 위험이란 성경에 제시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위험입니다. 곧 성경을 우리의 체험으로 해석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가 알고 체험하는 수준으로 격하하는 위험입니다. 그리고 저는 현시점에서 볼 때는 이 두 번째 위험이 첫 번째 위험보다도 더 큰 위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달리 말씀 드리면,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초자연적이고 비정상적이며 불규칙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질서를 두려워하고 너무 훈련과 예법과 절제에만 관심을 가져서,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D M 로이드 존스 지음·정원태 옮김. 『성령세례』, p. 18)

 

 

박영돈의 편파적이고 모순된 주장들을 하나씩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박영돈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어떤 성령충만인가?

 
 

-박영돈은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충만’은 부인하고 서신서가 말하는 ‘성화적 성령충만’만을 강조한다.

 

박영돈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령충만을 강조한 사실을 인용하면서 교회부흥의 열쇠는 성령충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제대로 된 신자치고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영돈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주로 에베소서나 서신서가 말하는 성화적  성령충만이지(엡 5:18),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충만(행 2:4; 4:8, 31등)은 아니다. 박영돈은 전자는 일반 성령충만, 후자는 특별 성령충만으로 부르는 것 같다.

 

박영돈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해놓고 부흥기에 나타나는 극적이고 특별한 체험들-큰 기쁨, 사랑, 황홀감, 초자연적 은사 임함 등-은 부인한다. 박영돈은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특별한 성령충만’(누가의 성령충만)과 통상적인 신앙생활인 ‘일반적 성령충만’(바울의 성령충만)의 구분을 부인한다. 이런 구분은 삶과 사역의 괴리를 부추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박영돈, 『성령충만』, p.164). 그렇다면 왜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가? ‘특별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곧 부흥이 아닌가?

 

그러면서 박영돈은 신자들이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보다 능력과 은사를 더 원하는데 이는 성령을 인격이 아니라 이용할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망발을 한다(같은 책, 151). 어떻게 해서 신자들이 사역을 더 잘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성령을 이용하는 것인가?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사역적 특별 성령충만을 받고 사역하지 않았는가?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은사적 교회와 비은사적 교회 간에 양적 성장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주된 이유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 성령’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박영돈은 애써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은 부인하고 서신서가 말하는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 즉 구원과 관련된 성령충만만을 강조한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이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성령충만을 받아서 사역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기적중지론자들은 ‘아, 그것은 구속사적으로 독특한 계시적 사건이야. 신자들의 사역이나 경험의 본을 위해 기록된 것은 아니야’라고 주장하거나, ‘성경 기록을 위해 그런 일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완성된 성경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 없어’라는 망발을 한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사역적 특별 성령충만을 받고 사역했는데 오늘날의 우리가 무엇이 잘났다고 그런 능력 없이 하나님 나라 일을 하겠다고 거드름을 피우는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말씀도 있고 특별 성령충만도 받아서 사역하셨는데 오늘날의 우리가 뭐라고 말씀만 갖고 사역을 하겠다고 건방을 부리는가?
 

 

물론 기적중지론자들이 말하는 구속사적 면이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그들의 사역은 교회 시대 신자의 사역의 본이 된다. 성경에는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 본 받을 수 없는 비반복적인 부분도 있지만 본 받을 수 있는 반복적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마리아에 내린 성령(행 8:4-25)은 원수지간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하나로 만드는 독특한 구속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교회 시대의 본이 아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교회 시대에 특별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인종간의 갈등을 해소하면 안 되는가? 1907년 한국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을 통해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 목회자간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웬만하면 백인과 흑인이 다른 교회를 섬긴다. 대부분의 전통적 교회가 그렇다. 그러나 은사적 교회는 다르다. 백인과 흑인은 물론 소수 민족이 인종 차별 없이 하나가 되어 예배를 드린다. 인간의 교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의 능력이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의 교회사적 적용이 아닌가? ‘한 가지 의미, 다양한 적용’(One meaning many applications)의 원칙에 의하면 아무리 구속사적으로 독특한 사건이라도 교회 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으로 설교할 거리가 없어진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고 저것은 바울의 이야기로서, 모두 구속사적으로 독특한 인물이고 비반복적인 계시적 사건이므로 우리의 모범이 아니다'는데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누가가 말하는 사역적 특별 성령충만을 무시하는 박영돈은 제발 정신 좀 차리기 바란다.

 

 

 (자세한 내용 : “[성경해석] 구속사적 해석과 기적중지론.” 『글로리아타임스』[2016.04.23]0.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21

 

 

 -박영돈은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박영돈은 개인적 성령충만에 대해 말하다가 이후 “4. 부흥케 하는 성령의 사역”(같은 책, p. 78)으로 건너뛰어 부흥에 대해 말한다. 성령충만은 개인적으로 받기도 하고 집단적으로 받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집단적으로 받는 성령충만을 부흥이라고 한다.

 

박영돈도 이에 동의하면서 이안 머레이가 “부흥은 더욱 충만한 성령의 부어주심”이란 정의를 제시하고,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부흥은 곧 성령의 충만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충만은 부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적절한 성경적인 범주라고 할 수 있다”(같은 책, p.80)고 말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에 대한 박영돈의 이해가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박영돈은 “어떤 이는 성령충만하면 신령한 체험을 하고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감정적인 면으로 치우치는 신자는 얼마나 뜨겁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며 설교하느냐에 따라 성령충만의 정도를 진단하려 할 것이다. 반면에 성령충만의 증거를 우선적으로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면에서 찾으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같은 책, p.81)고 말하여서 혼란이 많으므로, 성령충만의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박영돈의 성령충만에 대한 편파적 정의가 더 많은 혼란을 초래한다. 박영돈은 초자연적 은사를 동반하는 누가의 성령충만이나 부흥기에 임하는 특별하고 감정적인 성령충만은 무시하고 에베소서가 말하는 성화적이고 윤리적인 성령충만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박영돈은 성령충만에 대한 ‘누가의 관점’과 ‘바울의 관점’을 잠시 구분하는 듯 하면서 금방 ‘바울의 관점’으로 방향을 돌린다. 서평자가 알기에, 일반적으로 누가가 말하는 성령충만은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충만’이고 바울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중생케하고 성화시키는 성령충만이다. 박영돈도 이 차이를 ‘인지’는 하지만 ‘인정’은 하지 않는다.

 

신약이 말하는 핌플레미와 플레로오(동사) 및 플레레스(형용사)는 바울 서신서나 누가의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금방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영돈은 각 동사가 서신서와 사도행전에 사용된 문맥도 제시하기도 않고, ‘시제’가 다르다는 사실도 얼버무린다. 구분을 하는듯 하다가 둘 다 선교적이고 교회적인 차원애서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결론 내린다.

 

그러나 각 단어는 아래 표와 단어들이 사용된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다르다.

 <표 : 단어 연구-성령세례와 성령충만>

(PC버전으로 보면 그림을 크게 볼 수 있음)

   
출처 : 구요한 저, 『누구십니까 성령님』, p. 174.

 

서신서가 말하는 성령충만은 성화(생활) 성령충만이다. 박영돈은 ‘일반 성령충만’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플레로오. 현재, 명령형, 수동태)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

 

 

여기서 말하는 ‘충만하다’(플레로오)는 현재형으로 습관적 지속적 의미를 지닌다. 이런 성령충만이 지속된 결과 참된 예배의 영이 임하고 인간 관계가 화목해 지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사역을 위한 성령충만이다. 박영돈은 ‘특별 성령충만’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과거, 수동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행 4: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 13:9).

 

여기에 제시된 성령충만은 모두 과거형으로 ‘일시적으로 성령의 사역적 능력’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말씀도 담대하게 전하고 예언도 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한편, 누가는 사람의 인격과 관련된 ‘성령충만’을 사용하는데 이는 형용사형이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행 6:3,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위의 3구절은 어떤 사람의 성품의 일부로서 성령충만한 상태를 말하는 형용사가 사용되었다.

 

누가는 사역적 성령을 받는 것을 ‘성령충만’이란 한 가지 단어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부어주심(행 2;17-18,33; 10:45), 성령이 임함(행 1:8; 2:3; 11:15;19:6), 성령이 내려오심(행 10:44), 성령을 받음(행 8:15) 등의 다양한 용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은사주의에서는 사도행전적 (사역)성령세례는 ‘성령의 사역적 능력을 최초로 받는 것’에 대해 사용하고, 이후는 (사역)성령충만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성경에서 ‘성령충만’과 관련되어 사용된 3가지 헬라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박영돈은 이 3가지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박영돈은 ‘누가의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증거를 위한 사역적인 성령이고 ‘바울의 성령’은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된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듯하면서 얼렁뚱땅 얼버무리면서, 누가의 성령이나 바울의 성령 모두 선교론적이고 교회론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하는 대범함(?)을 보인다(같은 책, p. 81-86).

 

“성령충만에 대한 누가의 증거와 바울의 가르침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 합하여 성령충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통전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따라서 성령충만을 누가(사도행전)와 바울(에베소서) 중 누구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적절한 질문이라고 할 수 없다”(같은 책, p. 87-88).

 

서평자는 박영돈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당연히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은 서로 보완적이지만 기능에 차이가 있다.

지금 은사주의와 비은사주의가 첨예한 갈등을 빚는 것은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을 제대로 분별하지 않고, 박영돈처럼 비은사주의자들이 누가와 바울이 말하는 성령을 하나로 두루뭉실하게 잘못 이해한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도 인격적인 성령을 말하지만, 바울의 성령과 구분되는 누가의 성령의 특징은 사역을 위한 성령이다.

 

박영돈의 이런 애매한 태도로 인한 폐해가 성령충만의 원론적인 책인『성령충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일그러진~』 에서는 ‘예언의 은사’와 부흥기나 성령 집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신비적 영적 현상들’-쓰러짐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전형적 기적중지론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박영돈의 성령론은 망해가는 교회의 성령론이다

 

개혁주의의 강점은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세분화하여 교리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영돈은 왜 이렇게 중요한 성령의 사역을 구분하지 않는가? 이렇게 중요한 ‘누가의 성령’을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나 하는가? 500년 동안 개신 교회를 지배해 온 ‘사이비 신학’인 기적중지론에 젖어, 박영돈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도행전을 선교나 전도의 ‘모범’이나 ‘교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신서를 연구하는 ‘역사서’로만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령론’이란 과목이 있길래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가르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학년초부터 「계시론」에서 기적중지론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마지막 학년에 배우는「성령론」시간에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하는 구원론’이었다.

 

 

『미국 캐나다 교회 연감』(1990-96)은 지난 30여 년간 여러 교단의 교세 증감을 기록한 책이다. 이 연감에 보면 주의를 끄는 한 가지 통계가 있다.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며,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이것을 실제화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주류 교단—침례교, 감리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의 교세는 감소했다.

 

그러나 두 가지 성령 세례를 구분하여, 비록 신자가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구원성령세례’를 받았더라도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역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해석한 교회들은 급성장했다.

 

일반적으로 기적중지론자들은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고 성령 세례는 이것을 실제화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던이나 박영돈 등이 이런 주장을 따른다. 그러나 D.A. 카슨이나 차영배(전 총신대 신대원장)는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회개-구원-를 동반하는 세례라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 참조 :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 『글로리아타임스』[2014. 04.23])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4

 

 

이처럼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적 성령을 무시하는 반쪽 성령론을 배운 신학생들이 목회 현장에 나와서, 성령의 사역적 능력이 나타나기만 하면 신학교에서 잘못 배운 대로 비판만하고 변증만 해대니 교회가 능력이 있겠는가?

 

성령의 기적행하는 은사(들)(고전 12:8-10)는 영적 전쟁의 탁월한 무기들이다.

말씀과 설교도 성령충만을 받으면 훨씬 더 강력한 능력의 말씀이 된다(행 4:8, 31 참조). 방언·신유·예언 및 축사와 같은 기적행하는 은사(들)(고전 12:8-10)가 없으면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 오늘날 은사적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반면 비은사적 교회들이 쇠락하는 주요 이유는 이들의 영적 무기가 시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 좋다는(?) 신학과 유명한 신학자들(?)이 많은 유럽의 교회가 왜 망했고 미국의 주류교단 교회들이 왜 쇠락하는가? 죄와 마귀의 세력을 쳐부수는 강력한 무기인 기적행하는 은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망해가는 나라, 망해가는 교단의 신학을 배운 박영돈 같은 자들이 성장하는 교회가 잘 사용하는 사도행전적 성령충만이나 기적행하는 은사들을 부인하는가? 이런 것이 바로 적반하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수지에 담긴 물을 순간적으로 방출하면 발전기를 돌려서 전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 물이 논으로 들어가서 곡식의 열매를 맺게 한다. 동일한 물이지만 ‘기능’이 다르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기능’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누가의 복음’은 사역과 관련된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을 강조하고 서신서는 구원과 성화를 가능케 하는 ‘인격체이신 성령’(Holy Spirit as person)을 강조한다.

 

은사주의자들은 ‘누가의 성령’을 강조한 반면 ‘바울의 성령’을 소홀히 하여 성화를 소홀히 한 반면이 있다. 그러나 기적중지론자들은 ‘바울의 성령’은 강조하고 ‘누가의 성령’은 무시하여 전반적으로 교회의 양적 쇠락을 가져오고 있다. 실제로 기적중지론자들은 서신서의 전반부인 ‘교리적 부분’은 강조하지만 후반부인 ‘실천적 부분’은 무시하여 인격의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교리에만 치중하여 누가의 성령이 말하는 초자연적 능력도 없고, 서신서의 ‘실천적 부분’을 무시하여 인격적 열매도 제대로 못 맺지 않는가? 그저 교조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만 강조하여 교회를 무미건조한 ‘죽은 정통’으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박영돈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누가의 성령’과 서신서의 실천적 부분을 재발견해야 하고, 은사주의자들은 ‘바울의 성령’ 즉 교리적 부분과 실천적 부분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사주의 교회는 ‘성장’은 하지만 ‘성숙’은 요원하고, 기적중지론적 교회는 교리(?)는 강조하지만 성령의 ‘사역적 능력’은 부인하니까 양적 성장이 없고, 성품의 열매도 부족하여 양적으로 쇠퇴하고 영적으로도 침체해 가는 것이 아닌가?

(계속)

[관련기사]

글로리아타임스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5610> 서울시 송파구 백제고분로39길 21-19, 201호  |  대표전화 : 0707-554-0585  |  팩스 : 0504-037-0050  |  Mail to : gloriatimes@naver.com
발행인·편집인 :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 구요한 발행인  |  후원계좌 : 국민은행 529401-01-218720 예금주 임마누엘선교회  |  사업자등록번호 : 123-89-06414
Copyright © 2017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