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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1)-신학적 오류신학적 오류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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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23  20: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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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

-공격의 ‘근거’가 되는 신학이 문제-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성령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와 비례하여 대적 또한 거세어지고 있다.성령운동을 대적하는 자들이 괜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공격하는 이면에는 ‘전제’가 되는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제(前提, presupposition), 패러다임(paradigm)이 성령운동가와 다르기 때문이다. 전제, 패러다임, 주장의 근거, 고정관념이 다르면 동일한 성경 구절, 동일한 현상도 전혀 상반되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려면 주장의 ‘근거’를 지적하고 ‘근거’를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표면적인 주장만 공격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도 없고 한도 없이 팽행선만 달릴 따름이다.

“난 그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경험을 어떻게 믿느냐?"

이런 사람들도 맛 있는 음식과 맛 없는 음식,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구분은 잘 한다. 이게 교리인가, 경험인가?

사람은 하나님 앞의 죄인이며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사실과 같은 일차적, 원론적 교리는 복음주의자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구원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이차적인 교리, 부차적인 성경해석은 전제와 패러다임의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석이 가능하다. 전제에 따라 동일한 구절이나 현상을 놓고도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진화론자와 창조론자들, ‘전제’가 다르니까 동일한 증거도 달리 해석한다. 한쪽에서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도 다른 쪽은 오히려 더 의심을 한다. 성령사역 반대자들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물론 전제와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경우도 있다.

언제 고정관념이 깨어지는가?

첫째, 본인이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경우이다

한때 성령사역을 극렬하게 대적했던 예장 OO의 리더격인 K 목사. 외국의 성령 집회에 참석하여 평신도의 안수를 받고 쓰러진 후 성령 체험을 했다. 이후 그는 성령운동 지지자로 변했다. 필자는 지금의 공격자들이 성령을 체험을 제대로 하여 지지자로 변하기를 기도한다.

둘째, 본인이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는 경우이다(고전 14:1)

성령사역 공격자들은 ‘성령(의 외적)능력과 (초자연적)은사는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전제 아래 있으니 구하지 않고 구하지 않으니 체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반대하던 자들도 오지의 선교여행을 통해 전제가 바뀌어지는 경우가 많다.

문명 된 사회 보다 그런 지역에서는 능력과 은사가 쉽게 나타난다.

셋째, 다른 사람을 통해서다.

축사사역으로 유명한 쿠르트 코흐는 한때 방언을 심각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생각을 바꾸었다. 첫째, 자기가 아는 신실한 신앙인들 중에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둘째, 그들의 삶의 열매가 좋았다.

성령사역 대적자들은 그렇지 않다. 본인의 직접적인 체험도 없고, 주변의 신실한 주의 종들이 아무리 성령사역의 유익을 말하고 열매를 말해도 마이동풍이다. 자기들의 신학 체계와 다르다고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막무가내의 개혁주의 신학’은 정말 무서운 신학이다.

 

신학의 문제점

필자가 다닌 신학교 조직신학 첫 시간에 교수가 말했다.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

필자는 이때 이미 방언, 신유, 축사를 하고 음성도 어느 정도 들을 때였다.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무리를 지어 웅성거렸다.
“난 체험이 있다. 그런데 자기가 뭔데 없다고 하느냐?”(기적계속론자).
“교수의 말이 맞다. 성경적으로 잘 설명했다”(기적중지론자).

신학생들도 체험 유무에 따라 반응이 상반된 것이다. 로스쿨을 다니면서 논증법을 배운 필자는, 기적중지론 신학 정말 큰 일 낼 신학’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신학에서 조직신학,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거듭거듭 확인했다.

그때 필자는 신학교와는 전혀 다른 노선(?)의 교회를 다녔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로 집회에서 방언과 축사는 기본이고, 쓰러짐, 웃음, 환상 등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런 체험에 푹 젖은 신자들은 영적 목욕탕이나 영적 마사지 센터에 온 듯, 피곤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고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가벼워져서 새 힘을 얻는다. 축 늘어졌던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전통적인 교회 교인들은 고달픈 이민생활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게 힘들다. 목사가 예배를 한 시간 이상 끌면 불만을 토로한다.그러나 동일한 이민자들이 모이는 이 교회에서는 2~3시간 동안 지루하고 힘든 줄 모르고, 성령축제를 누리는 동안 오히려 몸과 마음에 새 힘을 얻고 돌아간다. 이렇게 은혜 받은 신자들은 교회 오는 것이 즐겁다.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잘 하고, 목사나 교역자 섬기기를 하나님처럼(?) 깍듯이 섬긴다. 모든 목회자들이 부러워할 신자들의 모습이다.

둘 중에 어느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인가?

그러나 이때만 해도 필자는 가방 끈이 짧아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적중지론 등을 논박할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에 부담을 갖고 이런 잘못된 신학들을 논박할 실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성령운동 대적자들의 잘못된 신학

현재 인터넷 상에서 신사도 운동이나 성령 운동을 지속적이고 극렬하게 대적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잘못된 신학을 성경 말씀인 양 받아들이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기적중지론, 은사중단론 (Cessationism)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잘못된 신학이다. 필자는 기적중지론의 허구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기적중지론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이 무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논리로 만들어낸 신학에 불과하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성인 취급하는 마리아 신학, 마리올로지(Mariology)가 있다.
기도할 때, 남자 예수 보다 엄마인 마리아에게 간구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느냐? 얼마나 그럴듯한 주장인가? 마리아 신학에 불과한 기적중지론을 체험 없는 자들은 성경 말씀인 양 받아들인다.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체험도 없고 구하지도 않는 자기들의 입장을 잘 변호해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말한다. 그런 책 읽고 비판하는 글을 쓰는 그 시간에 사모하고 기도해 보라.

성령은 은사를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지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 11).

그러나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신령한 것들’은 고전 12장에 기록된 방언, 예언을 포함하는 ‘기적 행하는 은사들’(miraculous gifts)이다. ‘사모하되’의 헬라어 젤로는 ‘열심히, 간절히 사모하다, 탐내다’(desire earnestly, covet)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안 받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구해서 받으라는 말이다.
 

성경의 충족성, 충분성 (Sufficiency of Scripture)과 •계시종료론 (Cessation of Revelation)

성경은 다른 보조 수단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천주교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에 두는 것과 대조된다.

성경 한 권으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데 왜 다른 은사나 ‘계시’가 필요한가?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종합적 전체적 지식’을 주는 것이지 ‘구체적 개인적 지식’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설교, 신앙서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 책망, 인도, 방향설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김 집사가 어떤 사업을 해야 하고, 누구와 결혼해야 하며, 박 선교사가 어느 지역에서 선교하고, 이 목사가 어느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이름은 무엇으로 하는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마음에 감동이 오고 확신이 오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의 ‘직통 계시’는 이런 문제를 다룬다.

성경이 헌법이라면 오늘날의 계시-음성, 예언-은 하위인 법률이나 시행령 수준이다. 헌법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물론 국회나 국민투표에 의해 개정되기 전까지), 기타 법률은 헌법의 권위에 종속된다.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직접 계시, 직통 계시는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이다. ’직통 계시’란 단어는 공격자들이 워낙 자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단어라 필자는 ‘직접 계시’란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반대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다른 계시'를 부정하는 것을 마치 성경처럼 귀하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당시 입법자들 중에서도 사적 계시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수결에 의해 그렇게 된 것 뿐이고, 또한 그것은 그 당시 참석자들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성령운동하는 사람 중에 자기의 음성이나 예언이 성경과 권위가 동등하다거나 성경 내용을 뛰어넘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대자들이 잘못된 전제 아래, ‘직통 계시-성경 계시→잘못된 것’이란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뿐이다.

필자는 말한다.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많은 사람이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데, 얼마나 사모하지 않고 얼마나 기도하지 않았으면 그 흔한 음성을 못 듣고 환상을 보지 못하는가? 조금만 훈련하면 어린아이도 쉽게 듣고 쉽게 본다. 매일 두세 시간씩 간절한 마음으로 한 달만 기도해 보라. 자신들이 비판하는 대부분의 영적 현상을 체험할 것이다.

이들의 두 가지 오류 :

 -오늘날의 직접 계시를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착각하는 오류
거듭 밝히지만 오늘날의 직통 계시는 성경 말씀에 종속된다. 문선명이나 모르몬에서 다른 성경을 주장하지만 성령운동하는 사람 중에 자기가 들은 음성이나 계시가 성경과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그렇게 말하더라도 표현의 미숙이나 듣는 사람이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고전 14:1이 말하는 ‘예언’을 성경 기록 그 자체인 ‘예언’과 동일시 하는 오류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고전 14:1은 모든 신자에게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하다.
계시 종료론에 경도된 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다음구절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한 것이요”(고전 14:29).

설교나 가르침은 두세 사람이 하고 다른 이들인 청중은 분별해야 한다?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30).

누가 설교나 가르침을 하다가 다른 이에게 더 좋은 계시-가르침?-가 오면 즉시 그만두고 잠잠해야 한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해석인가? 고전 14장이 말하는 예언은 말 그대로 예언 즉 특별 계시이다. 그러나 공적 예언, 공적 계시가 아니라 사적 예언, 사적 계시이다. 성경 권위에 종속되는 계시이다.

성경 내용이 공적 계시(official revelation)라면 오늘날의 음성이나 예언은 사적 계시(private revelation)이다. 공적 계시인 성경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사적 계시는 받은 사람으로 대상이 제한된다. 성경은 내용에 오류가 없지만(성령의 감동), 사적 계시는 내용에 오류가 있는 조명 수준이다. 이 때문에 사적 계시는 성경 내용에 비추어 분별해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구약의 선지자는 예언이 틀리면 돌 맞아 죽었지만신약의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별하라고 한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를 향한 사적 계시는 성령에 담긴 공적 계시에 비추어 분별되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 이론은과 '계시 종료론’은 서로 맞물리는 주장이다. 성경적 계시는 종료되었다. 기록된 66권의 성경 내용에 무엇을 더하거나 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러나 오늘날의 음성이나 예언은 성경 내용을 가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내용의 범위 내에서 개인이나 교회에 구체적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것들이다.

보다 깊은 내용에 관심있는 분은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의 『예언의 은사』를 보기 바란다. 이 책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평이한 문체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웨인 그루뎀은 사적 계시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인 리처드 개핀의 주장을 통쾌하게 반박한다. 잭 디어의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구속사적 성경해석 (Redemptive-Historical Interpretation or Hermeneutics)을 모범적 성경래석으로 보완
반대되는 해석법은 ‘모범적 성경해석’이다. 자유신학자들이 예수님을 우리 삶의 ‘도덕적 모범’으로 제시하자 개혁·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구속사적 성경해석법을 창안, 도입했다.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란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의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구속사적’이란 단어는 신학교 다니면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많이 들은 단어이다. 필자가 교수에게 질문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왜 구속사적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가?” 정확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대답을 들은 것 같다.

물론 구속사적 해석의 장점도 있다.
장점은 성경 전체를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의 인물, 사건 등은 모두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그림자-예표-이다. 구약의 내용이 오실 예수의 예표라면 신약의 내용-복음서를 제외하고-은 오신 예수의 예표이다. 성경의 각 구절보다는 전체의 숲을 조감하는 해석 방법이다. 구속사적 해석은 ‘삶의 도덕적 모범’인 예수님보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강조한다.

단점은, 성경 기록 전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다 보니 ‘모범적 연속성’을 부인한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나 ‘사건’은 구속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성경 기록을 위해  ‘독특한 시대’에 살다가 간 ‘독특한 사람이나 사건’이다. 구약의 선지자, 예수님, 사도들에 임하고 행한 특별 계시나 기사와 이적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 기록을 위한 것이지 우리의 모범이 아니다. 따라서 완성된 성경을 가진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음성이나 환상, 기사와 이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구속사적 해석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강조하다 보니 우리 삶의 ‘도덕적 모범’인 예수님의 인격이나 삶에는 무관하기 쉽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부족하다. 오히려 예수님을 ‘도덕적 모범’으로 내세운 자유주의자들의 삶이 더 나아 보인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자 동시 우리 ‘삶의 모범’이시다. 자유주의자들은 가장 중요한 구세주를 빼버렸고 보수주의자들은 구세주 예수를 강조하다 보니 삶의 모범을 빼버렸다.

여러분이 어떤 책을 읽을 때 ‘구속사적’이나 ‘독특한’(unique) 이란 단어에 유의하라.
저자가 기적중지론자일 공산이 크다.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가 이런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구속사적 해석은 한 마디로 ‘대야의 구정물을 버리려다가 애까지 버린 격’이다. 물론 구약의 선지자, 예수님, 사도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다른 ‘독특한 시대’에 살면서 ‘독특한 사역’을 감당한 ‘독특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불연속성 강조. 그러나 그들이나 우리나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다루시고 은혜 주시는 방법은 시대나 사람과 상관없이 동일하다-연속성 강조. 이 때문에 성경은 구속사적 틀 안에서 모범적으로도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지나치게 ‘이론화’에 빠지다 보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모방 본능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하는 좋은 것을 보면 나도 하고 싶고 나쁜 짓을 하면 피하려는 본성이 있다. 무학자(無學者)인 사도들도 성령의 능력을 받고 기적을 행했는데 그들보다 훨씬 높은 스펙을 가진 현대인들이 왜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가?

또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계시나 기적은 ‘사도적 계시’, ‘계시적 기적’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누가 음성을 듣거나 기적을 행하면 ‘네가 사도냐?’라고 반문한다. 조금 나은 사람은 오늘날의 계시나 기적은 ‘사도적 계시’, ‘사도적 기적’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라고 말한다. 글세 그 차이가 무엇인지? 차이가 있다고 한들 그게 어쨌다는 것인지?
 

필자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신학자들의 말 장난’에 질린 사람이다. 그중의 하나가, 성경 인물들은 ‘독특한 시대’에 살면서 ‘독특한 사역’을 행한 ‘독특한 사람’이란 주장이다. 그러면 우리는 ‘보통 시대’에 살면서 ‘보통 사역’을 하는 ‘보통 사람’인가? 그래서 그들과 달리 기사와 이적은 행할 수가 없다는 결론 아닌 결론을 도출해 낸다.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필자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경도되어 오늘날의 기사와 이적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도들 뒤에 숨은 '사도 숭배자들’이라 부르고 싶다. 사도들을 ‘독특한 인물(들)’이라고 치켜세워 놓아야 ‘보통 사람(들)’인 자기들에게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정당화 되기 때문이다.

반성령운동파들은 기사와 이적, 사적 게시 등으로 모두 성경 기록과 관련시키면서 완성된 성경이 있으니 기사와 이적, 사적 게시도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운동파는 성령 기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기사와 이적은 물론 사적 계시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성경만 가진 사람과 성경+기사와 이적+사적 계시를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 누가 하나님 나라 일을 더 잘할까? 당연히 후자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만 가진 반성령운동파 교회는 쇠퇴하는 반면 성령운동파의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독특한 시대’에 사는 ‘독특한 사람’이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만 독특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I praise you because I am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your works are
wonderful, I know that full well. NIV).
 

교회 시대의 교리는 바울의 서신서에서 나와야 한다
(Doctrine for the church is to be drawn from the epistles of Paul)

‘기사체인 복음서, 사도행전 보다는 논문체인 서신서가 교리 정립에 우선한다’는 잘못된 주장이다. 이 때문에 성령사역 반대자들은 성령사역의 당위성이나 성령 관련 단어와 의미를 서선서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이며 『무질서한 은사주의』(Charismatic Chaos)의 저자인 존 맥아더를 보자.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저서 : How to meet the Enemy).

“서신서를 보라. 귀신을 쫓아내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귀신을 대적하면 된다.”

귀신을 어떻게 대적하는데? 겸손하면 된다(약 4:7-8 참조)고 한다.
과연 그들이 겸손한가? 겸손하기는커녕 신학 공부 좀 했다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는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아닌가?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젖은 맥아더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을 쫓으면 ‘구속사적’, ‘계시 역사의 독특한 사건들’이란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신자가 귀신을 쫓으면 ‘기술’(technique)에 불과한 것이라고 폄하한다. 얼마나 웃기고 해괴한 주장들인가. 그렇게 해놓고도 자기가 성경을 제일 잘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이런 주장 보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1장 6절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론’(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이 성경에서 추론될 수 있다.
(VI. The whole counsel of God concerning all things necessary for His own glory, man's salvation, faith and life, is either expressly set down in Scripture, or by 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 may be deduced from Scripture).

필자가 보기에 성경 기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기사와 이적이 끝났고 다른 무엇이 끝났다는 주장은 가장 잘못되고 자의적인 결론(bad and unnecessary consequence)이다.

1장 9절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귀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 때에는(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귀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벧1:20-21, 행15:15-16).
(IX. The infallible rule of interpretation of Scripture is the Scripture itself: and therefore, when there is a question about the true and full sense of any Scripture (which is not manifold, but one), it must be searched and known by other places that speak more clearly.)

신앙고백이 천명하는 성경해석 원칙은 이렇다.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9절).
즉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한 주제에 대해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본 후 그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성서신학, 주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라고 한다 그런데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에 대해 자기들이 선호하는 일부 구절만 인용하거나 세상의 철학개념을 도입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보수신학에 이런 오류가 특히 심하다. 말로는 성경중심이다, 신앙고백을 준수한다 해놓고 실제로는 딴 짓을 하는 것이다.

“어떤 성경 귀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 때에는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귀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

이 원칙을 적용하여 “마귀를 대적하라’(약 4:7; 벧전 4:9)를 해석해 보자. 근접문맥에 의하면, 하나님께 복종하고(약 4:7) 영적으로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벧전 4:9). 이것은 신자의 품성[being]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의 품성을 강조한 맥아더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 진리이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금식하신 후 말씀으로 귀신의 유혹을 물리치셨다(마 4:1-11; 눅 4:1-13 등).
-예수님은 자체의 권세로 귀신을 많이 쫓으셨다.
-제자들은 예수 이름의 권세로 귀신을 쫓았다(행 16:18).
-믿는 자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막 16:17).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으셨다(마 12:28).

즉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품성도 중요하지만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통해 ‘대적하다’는 덜 분명한 귀절을 더 분명한 귀절(들)로 해석하는 것이 서신서 우선 결론보다 훨씬 성경적이다. 한 가지 단어의 의미를 성경을 통해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대적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나 귀신을 쫓았지 우리는 쫓을 수도 없고 쫓을 필요도 없다’고 한다. 사람의 원초적인 모방본능 무시, 기적중지론, 계시종료론, 치우친 구속사적 성경해석, 서신서 우선법칙 및 ‘잘못되고 자의적인 결론’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성품이 뛰어나는가? 노 코멘트(No comments!)

또한,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이다’는 구절도 왜곡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적자들은 자기들의 해석만이 참된 해석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성경에는 ‘분명한 기록’도 있지만 ‘모호한 기록’도 많다. 이런 경우 어느 한 해석이 유일한 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각 해석은 원문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찬에 관한 구절을 보자.

“이것은 내 몸이다…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예수님의 몸’에 대해 종교개혁의 3거두인 루터(공재설), 즈윙글리(기념설) 및 칼빈(영적 임재설)은 천주교의 화체설(육체적 임재설)을 부인했다. 특히 루터와 즈윙글리는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모임을 가졌지만 결국은 ‘동의하지 않기로 동의하여’( agree not to agree) 서로 마귀라고 부르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행하여 기념하라”는 해석도 다양하다. ‘행하다’에 중점을 두면 자주 하지만 ‘기념하다’에 중점을 두면 가끔 한다. 몸인 떡과 피인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방법’도 다양하다-필자가 경험한 방법

-수찬자는 좌석에 앉아있고 성찬 위원이 둥근 전병 한 개와 포도주 잔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수찬자들이 강대상 앞으로 나가서 각자가 전병을 먹고 포도주 잔을 마신다.
-루터교는 목사가 수찬자의 입에 전병을 넣어주고 포도주 잔을 마시게 한다.
-수찬자가 앞에 나가서 빵 덩어리의 한 조각을 떼어서 큰 그릇에 담긴 포도주에 적신 후 먹는다. (성찬 취지는 잘 살리는 것 같지만 위생상 좋지 않다).

어떤 비평가는 성찬 해석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이런 고집과 편견이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어서, 지나고 보면 하찮은 일로 걸핏하면 지도자들끼리 서로 물고 뜯는다고 비판한다.

성령운동에 대한 대적자들의 전방위적 비판이 이런 모습이다. 성령운동이 자기들에게 부족한 어떤 면을 보완한다고 생각하고 마음 문을 열면 수용하지 못할 것들이 없다. 어차피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모습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에 대한 수구골통적 집착, 편파적 성경해석으로 인해 도전과 기회를 재앙으로 여기는 것이다.

성령체험을 하고 영의 눈이 뜨이면 귀신의 세계가 보이고, 방언을 포함한 초자연적 은사가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수사역을 할 때 사람들이 쓰러지기는 것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건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다. 반대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은, 바울 이전의 사울 처럼 지식이 부족하고 자기 의에 차서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롬 10:3).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운 것은 수많은 면이 다양한 방향으로 빛을 내기 때문이다. 한 다이아몬드지만 다양한 면을 갖고 있다. 성경 단어나 구절의 의미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성경해석법을 다면적 (또는 다각도적) 성경해석법(Multi-perspectivalism)이라고 한다. 필자가 다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존 프레임(John Frame)과 번 포이트리스(Vern Poythress) 교수가 주창하는 성경해석법이다.
(참고서적 : 번 포이트리스. 『조화신학』; Symphonic Theology-The Validity of Multiple Perspectives in Theology. John Fram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이런 해석법을 도입하면 이성적 교리적 개혁신학, 감성적 체험적 성령신학, 웨슬레신학, 성결신학,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여성신학,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자유신학, 내면적 영성을 강조하는 영성신학은 서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 전통이 한 다이아몬드의 다양한 면이 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하면서 더불어 하나님 나라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라 한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법이다.

개인적 성령체험과 다면적 성경해석법을 많은 신학자·목회자들이 수용하면 교계의 수많은 문제가 풀릴 수 있는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론’(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이 성경에서 추론될 수 있다.
한 마디로 기적중지론, 계시종료론, 치우친 구속사적 성경해석법은 모두 이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다. 성경에서 추론된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론’이 아니라 ‘잘못되고 자의적인 결론(bad and unnecessary consequence)에서 도출된 신학이론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자세히 밝힐 예정이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자기들이 필요한 교리는 기사체의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물론 구약에서도 찾는다. 총신대학 신대원장을 역임한 차영배 교수는 이러한 주장은 “성경 안의 성경”을 인정하는 비성서적 태도라고 비판한다(차영배, 『성령론』). 성경은 모든 성경이 감동되었다고 기록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전 3:16).

잭 디어 또한 ‘무조건적 선택교리’(요 6:44; 행 13:48), ‘동정녀 탄생 교리’(복음서)나 ‘교단과 교회직분의 당위성’(행 15:1 이하; 20:17)처럼 자기들이 필요한 교리는 다른 책에서 가져오면서 왜 기사와 이적은 서신서에 한정하느냐?’고 반박한다 (Jack Deere, Surprised by The Power of The Spirit;『놀라운 성령의 능력』).
 

이성과 의지 중시, 감정과 체험 경시
(Reason and Will is superior to Feeling and Experience)

칼빈은 이성과 의지를 중시하고 감정이나 경험을 경시했다. 그는 감정을 정서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느낌이라 이해했다. 이후 후계자들도 이런 주장을 착실히 전수해왔다. 더군다다 이성주의, 계몽주의가 꽃을 피우던 당시 뛰어난 논증가인 튜레틴, B.B. 워필드, 찰스 핫지 등이 개혁신학의 뼈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부흥 보다는 교리’, ‘감정이나 체험보다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운다.

과연 그래야 하는가? 인간의 전적 타락설은 인간의 감정은 물론 이성, 의지 및 양심 모두 타락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감정이 이성과 의지보다 열등하다는 말인가? 언젠가 신학교 다닐 때 필자가 성령 체험 했다고 하니까 상대방이 “그건 감정적인 것이다. 감정적인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했다. 과연 그런가? 이성은 믿을만하고 감정은 믿을 만하지 못한가?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런 주장이 통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성을 한껏 치켜세우던 서구 철학은 몰락했다. 이성에 뛰어난 인간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이성에 대한 회의의 수준을 넘어 패닉(공포)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성령사역 대적자들은 아직도 수백 년 전 이성시대에 정립된 신학으로 현대의 성령운동을 난도질하고 있다. 시대착오라도 유분수지.

오늘날 발달된 뇌과학이나 심신의학에 의하면, 감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이성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정설이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한 책이 바로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쓴 데카르트의 오류: 감정, 이성 그리고 인간의 뇌이다. 이 책은 이성과 감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왜 이성까지도 파괴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한다.

30대의 비즈니스맨인 엘리엇은 어느 날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대수술이었지만 기억, 언어, 운동, 시각은 정상이었고 생활에도 큰 지장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엘리엇은 정상적으로 의사 결정을 못하고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반복해 결혼, 직업, 인간관계, 사업이 모두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감정이 풍부해야 이성도 제대로 작동한다는 말이다. 감정이 풍부하지 않으면 사람이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사회생활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만 보고 이론에만 밝은 전형적인 샌님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전통적 교회는 이성과 교리에 치중하고 감성과 정서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결과 머리와 귀는 크고, 가슴은 차고, 손과 발은 마비된 기형신자들을 속출하고 있다.

현대는 우뇌시대, 감성시대, 영성시대이다. 감성과 초자연적 체험이 풍부한 성령운동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요구를 잘 채워준다. 왜 현대인들이 불교, 명상, 뉴에이지, 요가에 탐닉하는가? 학력이 높은 그들에게 논리적이고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하다. 이런 것들은 책 몇 권만 보면 된다. 평신도들도 주석성경을 보고 원어로 성경을 보는 시대이다. 그들은 이제 느끼고 참여하고, 인간의 이성이 주지 못하는 초자연적 체험을 사모한다.

성령운동은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를 잘 채워준다. 이전의 성령 운동에는 못 배운 자, 못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요즈음에는 지식인들이나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든다.
당연한 현상이다.
 

전통적인 속죄론-형별대속론-의 결함
초대교회 시대엔 세례를 줄 때 축사를 하고 줄 정도로 축사를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예수님이 속죄사역은 죄값을 치르는 형벌대속론으로 굳어지고 마귀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면에 대해서는 수사적으로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눈으 감아버렸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2장과 계시록 21,22장을 제외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아들의 영적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도 죄로부터의 구속은 물론 마귀로부터의 구원이다. 사탄은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치명타를 입었지만 (요 12:31; 16:11; 골 2:15; 계 12:9), 여전히 이 세상의 신(고후 4:4),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1-3), 도적,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 이리(요 10:10,12), 하나님 나라를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원수(마 13:39), 시험하는 자(마 4:3)이고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고(요일 5:19),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에 대한 씨름이 아니라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다(엡 6:12). 여기서 말하는 '씨름'(헬라어 팔레)은 한국식 천하장사 씨름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로마식 레슬링을 말한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과연 이러한 영적 전쟁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현실에서 싸우고 있는가? 마귀나 귀신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하나님의 존재-편재(Omni-presence), 내주(Indwelling-presence)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현현'인 임재(Menifest-presence)는 부인 
성령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예수를 믿는 신자 속에 내주하시지만 동시에 사람이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도 나타내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현현' 또는 theophany라고 한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오순절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나타나시기도 했다. 하나님의 현현이 드러나면 연약한 인간은 두려워떨거나 심지어는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기도 한다(단 10:9-10; 마 28:4; 계 1:17 등).

오늘날 성령사역 집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렇게 이해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초자연적인 은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현현(顯現) 즉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학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도 경험하는데 무경험에 의해 하나님의 현현은 이제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조용한 회심과 극적 회심, 순간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
반성령운동파들은 조용한 회심은 알지만 사도 바울처럼 극적 회심을 할 때 동반되는 신체적 현상들, 점진적 성화는 알지만 성령체험 같은 순간적 성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하는 부흥기나 집회에서는 극적 회심과 성령 체험과 같은 순간적 성화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때 사람에 따라 은사를 받기도 하고, 감정적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궁금하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부흥』이나 조나선 에드워즈의 저서들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이 둘은 존경받는 깔뱅주의자이지만 이런 면에는 열려 있고 또한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사람들이다.
 

• 전도 대명령과 문화 명령
성경은 신자에게 불신자를 전도하여 제자 삼고(전도 대명령),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창 1:28; 9:1-문화 명령)을 주셨다. 피터 왜그너가 말하는 '정복'(Dominion)은 결국 문화 명령을 말한다. 또한 공관복음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님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신자가 할 일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계속 확장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개인적 영혼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후자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에서는 소홀히 취급해 온 분야이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이 영혼 구원은 등한시 하고 사회 복음, 사회 정의를 실천했다면 이제 신사도 운동가들은 영혼 구원에 더하여 사회 정의 실현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다만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7대 산'이란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니까 거부감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든 신자들이 행하든 하지 않든 생각하고 소원하던 것들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각 분야를 '7대 산'으로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 구약의 현세축복이 신약에서는 신령한 축복으로 승화되었다?
깔뱅이 기독교강요에서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재정(돈)은 신자와는 별 상관이 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고, 신약에서는 구원 받는 신령한 축복으로 만족해야 하고, 돈을 밝히면 육신적인 신앙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제로 신자들의 기도제목 1,2 순위는 돈과 건강이고 목회자들도 돈이 없어서 절쩔 매면서도 애써 초연한 체한다.

현장 목회자들에게 물어보자.
섬기는 교회의 교인들을 상담하거나 심방갈 때 이 두 주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상관하지 말고 영적 일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모두 책임져 주신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은 신경쓰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잘 하라고 하는가? 전자처럼 상담하면 중간은 가지만 후자처럼 상담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떠날 것이다. 떠나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주제를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성령운동하는 교회로 갈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운동 교회가 잘못되었는가? 아니다. 복 받아서 잘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누리면서 나누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고, 병 낫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병 낫는 그 자체를 중시하니까 잘못된 것이다. 물론 영혼 구원이 먼저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신적 축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성령운동파들은 지금까지 성경에는 있지만 반성령운동파들이 소홀히 취급했거나 무시한 분야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회복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결론적으로 반대파들이 잘못된 것이고 성령운동파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다소 절제하지 못하고 교리나 신학을 매끄럽게 다듬지 못하여서-이것도 장로교 입장에서 보니까 그런 것이다-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뿐이다.

필자는 확신한다. 아직은 생소하여 반대하지반 결국은 성령운동파들이 하는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가게 될 것이다. 왜? 이런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과거에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작금의 성령운동에 동참하면 한국 교회는 새로운 도약을 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계속 소방수 역할을 하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이상 필자는 성령사역 대적자들의 잘못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잘못된 신학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성령 대적자들은 더 이상 케케묵은 신학에 안주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을 대적하거나 핍박하지 말라. 자신들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심각하게 깨닫고 비판과 대적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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