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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대해부⑧] 다니엘의 '70 번째 이레’는 언제인가?마지막 ‘70번째 이레’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교회 시대’다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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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9  22: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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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대해부⑧]
 

다니엘의 ’70 번째 이레’는 언제인가?

-마지막 ‘70번째 이레’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교회 시대’다-
 

   
 


본문 : 단 9:24-27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리고, 또한)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들어가는 말

 

세대주의 신학의 강점은 종말론인데 그것이 이제는 약점이 되고 있다.

19세기에 영국의 넬슨 다비로부터 시작된 세대주의 신학은 20세기에 미국에 소개되면서 나이아가라 성경 컨퍼런스와 『스코필드의 주석성경』을 통해 근본주의 신학을 견지하면서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의 대항마로서 각광을 받았고, 휴거를 강조하는 특성 때문에 전도를 강조하는 전도자 D.L. 무디의 전폭적 지지 아래 미국의 대표적인 종말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편, 20세기 초에 발흥하기 시작한 오순절 성령 운동가들은 세대주의 신학의 기적중지론은 버렸지만 종말론과 대부분의 신학 체계를 수용하여 오늘날에도 미국의 대부분의 성령 운동가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수용하고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출간된 핼 린지의 『대유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이 공전의 히트를 치는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미국은 물론 한국을 휩쓸게 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이런 신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의 장로교는 물론 감리교 성결교 및 오순절 교단이 세대주의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보수 장로교 교단에 박형룡, 박윤선 박사를 통해 역사적 천년설이 소개되고 그 다음에 소장파 신학자들을 통해 무천년설이 소개되었지만, 보수 장로교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아직도 세대주의 종말론의 영향 권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의 전성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1970년 이후의 중동 전쟁, EU의 결성 및 바코드나 베리칩의 등장으로 인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 했었다. 그러나 잦은 휴거 날짜 예측의 오류로 인해 신빙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세대주의 종말론의 토대를 제공했던 국제 정세도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영국의 EU탈퇴로 인해 EU의 진퇴가 불투명해 지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극으로 인해 오바마 정부가 시도했던 세계 정부의 꿈은 사라지고 다극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더군다나 석유 가격 하락과 테러 지원으로 인한 경제 봉쇄로 인해 돈줄이 끊어지면서 테러의 종주국이었던 이란은 이미 백기를 들었고 사우디아라비아도 재정 적자로 인해 안 살림 챙기기도 힘들어졌다. 한때 위세를 떨치던 IS(이슬람국가)은 궤멸 직전에 놓여있고, 세대주의 종말론의 단골인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과의 전쟁’도 이제는 과거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

 

 

-메시아닉 쥬 종말론의 대두

 

그런데 한국 교회, 특히 성령 운동계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광풍이 휩쓸고 간 빈 자리를 메시아닉 쥬로 메우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1970년에 태동한 유대인 크리스천 중심의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s) 운동이 소개되면서 한국의 상당수의 성령 운동가들이 메시아닉 쥬 주도의 종말론과 그들이 주장하는 히브리 뿌리운동(Hebrew Roots Movement)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메시아닉 쥬는 ‘혈통적 유대인 중심의 이스라엘과 이방인 중심의 교회의 구원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히브리 뿌리운동을 통해 자기들의 신앙적이고 문화적 전통인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이 운동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은 메시아닉 쥬가 주장하는 회복 운동을 ‘초대 교회의 좋은 전통을 회복하자’는 주장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회복 운동은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그토록 비판한 ‘장로들의 전통’(막 7:5)이나 ‘유대주의’(갈라디아서 참조)의 변형인 바리새 유대교 즉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를 개신교에 접목하자는 운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메시아닉 쥬는 그들의 신앙 전통이 ‘랍비 유대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에는 ‘랍비 유대교’가 아니라 마치 ‘성경의 진리’를 회복하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교인들도 유대인들이 교육과 경제 등의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그들은 구약의 천재들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미국의 상당수 유명 성령 운동 단체들이 지지하기 때문에 이런 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같다.

 

 

메시아닉 쥬가 누구인가?

이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1800년 동안 ‘장로들의 전통’인 랍비 유대교(바리새 유대교)의 ‘탈무드’를 ‘구약 성경’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온 민족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1800년간 지켜온 버팀목이 바로 탈무드이다.

 

메시아닉 쥬도 비록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지만 이전에는 신·구약 보다는 ‘랍비 유대교’의 정수인 탈무드의 가르침대로 신앙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이다.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메시아닉 쥬는 모두 구약에 정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구약을 바리새인의 관점에 해석한 ‘랍비 유대교’에 정통한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메시아닉 쥬의 핵심 강조 사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유대인을 배제하는 대체 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이고 이방인은 들러리이며, 토라의 계명을 준수하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히브리 뿌리운동 즉 역(逆) 예루살렘 공회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행 15:12-21; 참조. 행 21:17-26; 고전 7:17-24). 신약 성경조차 모두 유대인 중심으로 해석하기 위해 현재 상당수의 메시아닉 쥬 신학자들이나 사역자들은 이 분야 연구와 전파에 몰두하고 있다.

 

 

한 때 로마 천주교와 이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대체되었다면서 유대인을 배제하는 대체 신학(Replacement theology)을 견지해왔지만,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1970년대 이후 메시아닉 쥬의 등장을 목격한 개신교 지도자들 중에서 대체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로마 천주교도 대체 신학을 공식적으로 취소했고 대부분의 개신교 단체에서도 유대인의 구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강성 메시아닉 쥬 중에서는, 유대인의 구원은 인정하지만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원 방식’을 별개로 인정하지 않고 토라 준수를 부인하는 개신교 신학조차 대체 신학으로 간주하고 비난의 포문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신학은 대체 신학이 아니라 성취 신학, 통일 신학, 확장 신학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신약의 신자들도 토라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아닉 쥬 신학은 '예표 신학'이자 '그림자 신학'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개혁신학은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예표한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의 율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그림자나 예수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이자 초등 학문에 불과하다(갈 3장). 실체이신 예수님의 초림과 구속사역으로 인해 그림자의 기능은 폐기되거나(제사 의식법), 대체되거나(시민법 즉 민·형사법은 정부로 이양), 흡수통합 또는 강화되었다(도덕법).

 

그런데 메시아닉 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은 자신들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천년 왕국에서 완성시키기 위한 ‘예비적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성경의 주인공은 유대인 자신들이고 예수님은 자신들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켜주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나 다름 없다.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주의는 다니엘 9:24-27의 해석을 통해 휴거와 적그리스도의 출현 및 7년 대환난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 시대(세대) 전체를 인위적으로 7세대로 구분한 후 짜맞추기 식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특히 교회 시대와 왕국 시대를 구분하여 교회 시대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시대이고, 두 시대의 중간 시기인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유대인이 단체적으로 대거 구원을 받은 후 천년 왕국에서 메시야를 왕으로 모시고 유대인이 이방인을 다스리는 이상적 메시야 왕국이 건설된다는 주장은 코미디(Comedy) 중의 코미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 원 가지인 유대인이 버린 복음을 받아들인 곁 가지인 이방인 신자는 7년 대환난이라는 지옥 같은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모두 휴거되어 부활한 영체로 변하고, 원 가지이자 ‘하나님의 눈동자’(슥 2:8)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생지옥 같은 7년 환난 기간 중에 힘들게 단체적으로 구원을 받는가?

 

 

그리고 이방 신자들은 부활한 몸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었는데 유대인들은 7년 환난을 통과한 후 현세와 내세의 중간 지대인 천년 왕국에서 천국보다 훨씬 못한 삶을 영위한 후에야 영체로 변하는가? 하나님의 특권을 부여 받은 유대인이라서 그처럼 혹독한 고난과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이처럼 세대주의 종말론은 모순 투성이다.

 

 

-이스라엘이 ‘종말의 시간표’?

 

더군다나 메시아닉 쥬는 자신들이 종말의 시간표(timetable)이며 유대인의 향방이 이방인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배타적 선민의식을 아직도 내세우고 있다. 과연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과 1970년대 이후 메시아닉 쥬의 등장이 종말의 시간표인가? 세대주의 종말론이 이런 주장의 기초를 제공하고 메시아닉 쥬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한국의 많은 신자들도 동조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과 무화과 나무의 비유 및 로마서 11장 특히 11장 25-26절의 해석을 통해 이런 주장을 내세운다. 과연 그런가?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세대주의와 메시아닉 쥬는 ‘그렇다’고 하고 언약신학의 개혁주의는 ‘아니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구약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 후 신약을 짜맞춘다. 그러나 후자는 예수님의 구속사적 성취의 관점에서 신·구약을 해석한다(눅 24:27, 44; 요 5:39).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예언의 복합 성취’라는 관점에서 볼 때 최종말에 대한 예언은 아직도 성취되어야 할 미래적 부분이다 (종합 해석법). 그러나 세대주의나 대부분의 메시아닉 쥬는 구약의 예언을 최종말의 미래에 성취되는 것으로만 해석하고 역사적으로 성취된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미래 해석법).

 

(*’예언의 복합 성취’에 대해서는 ☞[종말론대해부②]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참조하라.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48

 

종합해석법, 미래해석법에 대해서는 ☞[종말론대해부③] 종말의 예언은 언제 성취되는가?를 참조하라.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50).

 

 

바벨론 포로가 끝나고 유대인들이 고토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는 시점부터 유대인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인한 고토 회복과 성 및 성전 중건(BC 538/539)
-바벨론
-헬라(BC 336~323)
-헬라 이후의 분열 왕국인 프톨레미 왕조 시대(BC301~201)
-셀류크스 왕조 시대(BC 198~167)
-유대인 마카비 혁명(BC 166~143)
-유대인 하스몬 왕조 시대-독립국가 시대(BC 142~67)
-로마의 속국(BC 63~ )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마 23:37-39 등)(AD 30~33)
-예수님 처형( AD 33)
-예루살렘 성 및 성전 파괴-예수님 예언의 성취(AD 66~70)
-‘메시야’인 바르 코크바의 난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예수님 예언의 성취(AD 132~135)
-(심판의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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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건국(AD 1948)
-메시아닉 쥬의 본격적 등장(AD 1970)-현재.
 

(*'굵은 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벗어나 고토에서 독립국가를 이루었거나 식민지였지만 고토에 모여살던 시기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을 통한 유대인의 고토로의 귀환과 이후의 메시아닉 쥬의 등장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나 메시아닉 쥬는 이런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성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최종말의 시점인 천년 왕국에서 성취될 것으로 해석한다. 구약 예언 중에, 유대인이 B.C. 538년 이후에 고토로 귀환하고 성과 성전을 건축하고 나라를 건설한 후, 또 다시 유대인이 심판을 받고 흩어진 후(A.D. 70년 성전 파괴와 A.D. 135년의 흩어짐), 다시 고토로 귀환하고 성과 성전(제3성전)을 재건한다는 말이 어디 있는가? 이런 예언이 구약에 없는데 어떻게 해서 원인도 없이 대종말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유대인을 1948년 이후 다시 불러모으는 결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 23:39)고 하여 유대인이 심판을 받은 후 다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 흩어졌던 유대인의 고토(古土)-이스라엘 땅-로의 귀환과 제3 성전 건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마 24장의 감람산 강화에서, 예루살렘 성과 제2성전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 성과 성전 회복에 대해 말씀하신 적은 없다(마 24:2).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성전 자체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로마서 9~11장도 '유대인의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지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고토로의 귀환과 제3성전 건축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그러므로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무화과 나무의 비유, 메시아닉 쥬의 등장이 종말의 시간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무화과 나무 비유는 나무의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듯, '종말의 징조가 있으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는 병행적 비유이지, 무화과 나무 자체를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마 24:32-33). 누가복음은 무화과 나무는 물론 '다른 모든 나무도 싹을 내면 사람들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눅 21:29 참조).

 

 

그러면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1970년대의 메시아닉 쥬의 등장은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 악을 저지른 것에 대한 심판의 기간은 70년이지만 유대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심판의 기간은 무려 1800~1900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자칭·타칭 ‘메시야’였던 바르 코크바(B.C. 132~35의 대 로마 제국 항거 지도자)와 유대인이 한탄한 것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에게 무력으로 패배한 것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에 항거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으로 확신(?)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미 심판을 작정하셨기 때문에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다.

 

그러다가 심판의 기간이 찬 후인 1948년에, 하나님이 그들을 한 장소-이스라엘 땅-로 불러모으신 것은 같은 민족끼리 모여서 예수를 잘 믿으라고 해주신 일반 은총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로마 제국 당시에 유대인의 대(對) 로마 제국 전쟁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중에 있었으므로 승리를 허용하시지 않았지만, 1948년 건국 이후 아랍 연합군과의 전쟁들에 대해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는 의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섭리적 배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강성 메시아닉 쥬는 누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 돌이라도 던질 듯이 극렬하게 비판한다. 오랫 동안 짓밟혀 온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콘스탄틴 대제 이후 ‘을’의 처지가 되기 이전까지 자신들이 ‘갑’의 처지일 때, 예수님과 사도들은 물론 기독교 신자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대적한 죄를 기억하고 회개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성경에서 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했을까?(계 2:9, 24; 3:9)

 

또한, 1970년대의 메시아닉 쥬의 등장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미 18세기부터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히브리 크리스천들이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메시아닉쥬 운동을 벌인 단체도 많았다. 그때까지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 크리스천은 40만 명 정도가 되며 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 대부분이 이방인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시아닉 쥬가 가시적 단체로 성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독립과 1970년 대 이후 메시아닉 쥬의 등장이 마치 '종말론의 이정표'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전에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크리스천으로 회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전에는 메시아닉 쥬 운동을 허용하시지 않다가 1970년대 이후에 허용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귀환한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게 하기 위한 섭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모든 ‘히브리 크리스천’이나 ‘메시아닉 쥬’가 제의법 준수를 강조하는 메시아닉 쥬의 히브리 뿌리 운동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20세기 초기의 저명한 히브리 크리스천 지도자였던 데이비 배런(David Baron)은 당시에 유대인 정체성과 제의법 준수를 강조하는 메시아닉 쥬 운동은 '분열적이고 미성숙하며 이단'이라고 정죄했었다.

 

요즈음에도 ‘메시아닉 쥬는 분열하지 말고 교회로 돌아가라’고 주장하는 메시아닉 쥬도 있다.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 같은 메시아닉 쥬 학자들은 ‘메시아닉 쥬가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탈무드가 아니라 구약 자체로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한국에서는 초기에 메시아닉 쥬인 아셀 인트레이터(Asher Intrater)가 온누리교회를 통해 메시아닉 쥬 운동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후 미국의 수많은 성령운동가들과 기타 단체들을 통해 한국의 성령운동계에도 급속하게 퍼져가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무엇에 한 번 필이 꽂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탓인지 강성 메시아닉 쥬의 주장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메시아닉 쥬 중에서도 강성파가 있고 온건파가 있다.

이것은 이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떤 유대인파에 속했는가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유대교에는 대표적인 3대 종파가 있다.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s)은 ‘613개 계명’의 철저한 준수를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파 유대인(Reform Jews)은 계명들을 신약에 비추어서 적절한 것만 준수할 것을 주장한다. 가장 많은 유대인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한다. 보수파 유대인(Conservative Jews)은 개혁파에 대한 반발로 생겨서 철저한 계명 준수를 강조하지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에 알려진 히브리 뿌리운동 주창자들은 아마 정통파 유대인 출신이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메시아닉 쥬 중에서도 온건파는 히브리 뿌리운동 보다는 유대인의 구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국에 거주할 때 메시아닉 쥬인 키스(아셀) 인트레이터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1990년대 초인데, 그는 필자가 부교역자로 섬기는 교회에 부흥 강사로 왔다. 그의 종말론이 한국 신자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라서 강의 도중 몇몇 교인이 항의하자 강의가 잠시 멈추어졌었고, 강의 후에는 필자가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지면서 개인적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한 기억이 있다.

 

그중에서, ‘유대인이 흩어져서 핍박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이 아닌가?’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자 그는 ‘그렇기는 하지만 정도 이상으로 핍박했다’면서 ‘이스라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갈대아인이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더 크게 받은 사례(?)’(합 1-2장)를 언급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그가 한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특히 온누리교회와 연계되어 많은 강의를 하는 것을 알았지만, 필자는 당시만 해도 ‘예수를 믿는 유대인 단체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였지 그처럼 많은 한국 교인들이 메시아닉 쥬 운동에 동참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기적중지론 비판에 박차를 가하면서 성령운동가들을 변호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그런데 상당수의 한국 성령운동가들이 메시아닉 쥬에 심취해 있는 것을 보고 ‘내(필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뒤져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메시아닉 쥬 운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해서 신학적이고 신앙적 알맹이가 별로 없는 이런 운동에 그토록 많은 신자들이 동참할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 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자도 유대인이 전 세계적으로 교육과 재정 등의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성경 내용의 주인공이므로 성경 지식이 한 단계 앞서 있을 것이고, ‘유대인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유대인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선입견에 젖어있어서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을 ‘이건 아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필자는 하나님께 수없이 간절하게 기도했다. 혹시 필자가 잘못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것은 아닌가, 수많은 한국 성령운동가들의 적(敵)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유대인들이 구약을 바탕으로 한 탈무드의 가르침에 철저했기 때문에 세상적이고 물질적 성공인 ‘지상적 축복’은 누리지만, 아직 신약 지식은 부족하기 때문에 내면의 변화와 성숙, 겉사람 보다는 속사람, 행위 보다는 중심(中心),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됨과 같은 ‘신령한 축복’은 아직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필자에게 분명한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 번 자비를 베푸셔서 나라도 주시고 회심도 하게 하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섬김의 기회’로 삼지 않고 ‘드디어 우리의 때가 왔다’는 교만에 사로잡혀서 다시 한 번 고질적이고 ‘배타적 선민의식’을 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히브리 뿌리운동의 근저가 되는 신학은 이미 수차 밝혔듯이 성경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하신 ‘장로들의 전통들’(막 7:5), 사도 바울이 그토록 비판한 ‘유대주의’(갈라디아서, 특히 3장 참조)를 바탕으로 한 랍비 유대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메시아닉 쥬 운동이 한때 번성하다가 지금 다소 주춤해진 이유는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면서, ‘그들을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게 인도하라’는 사명을 필자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후 필자는 가능한 한 관련 자료를 많이 찾아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필자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다. 자세한 내용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요점만 정리해 본다.

 

-유대인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 것은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심판의 기간’이 끝났기 때문이지 구약의 예언과는 상관이 없다. 고토의 회복과 고토로의 귀환도 한 장소에 모여서 동족을 전도하고 끼리끼리 신앙생활 잘 하라는 일반 은혜적 배려이지 구약 예언의 성취와는 상관이 없다. 이처럼 유대인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므로 유대인의 구원이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민족이나 남녀 및 배경에 따른 모든 구분은 없어졌다(갈 3:28-29). 누구든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고 그렇지 않으면-유대인이라도-구원을 받지 못한다.

 

-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은 하나님의 은헤로 선택되었으로 국가적, 단체적으로 구원을 받으며 율법 준수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라는 바리새적 구원관, 그리고 오늘날 상당수의 메시아닉 쥬가 추종하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는 잘못된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각자가 예수를 영접할 때 구원을 받는 것이지 혈통적 유대인이라고 해서 국가적, 단체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지 ‘유대인 따로, 이방인 따로’가 아니다. 다만 유대인 전도를 위해 선교적 차원과 교회의 교육적 차원에서 그들의 율법-절기나 안식일 준수 등-을 교육하거나 지키는 것은 무방하지만 교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메시아닉 쥬가 유대인에게 반(反) 유대주의(Anti-Semitism)를 연상시키는 ‘크리스천’이란 명칭 대신에 ‘메시아닉’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자체는 문제가 없겠지만 모든 신자가 유대인처럼 신앙생활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문화에 우열은 없다. 히브리 언어와 히브리 문화가 특별하게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먼저 들어쓰시다 보니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사용하신 것일 뿐이다. 히브리 문화든, 헬라 문화든, 한국 문화든 모두 하나님이 주신 문화이며 모든 문화는 사탄의 도구가 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른 성경관을 가지는 것이고 문화는 각 민족의 독특성을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 다음 구절의 해석이 중요하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

 

여기서 ‘그리하여’를 ‘시간적 순서’로 해석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유대인의 구원이 종말의 이정표라고 주장하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부터 1970년 메시아닉 쥬의 등장 이전까지 예수를 믿은 (메시아닉 쥬가 아닌)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대한 모욕이다.  오히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당연히 유대인 회심이 앞섰고 사도 바울처럼 유대인이 이방인 전도에 앞섰다.  그러므로 ‘그리하여’는 유대인도 이방인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사람이 초대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온 이스라엘’을 ‘모든 육신적, 혈통적, 민족적 이스라엘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롬 9:6, 27; 10:5)는 주장과 상반된다.

아셀 인트레이터는 '유대인의 남은 자'를 통해  '문자적으로 모든 육신적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한다. 이런 주장은 혈통적 유대인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바리새적 구원관과 결과적으로 같은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유대인 자체가 ‘혈통적 유대인’ 보다는 ‘개종한 유대인’이 더 많은 실정이다. 그런데 이들의 논리대로 하면 아무라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그렇다면 ‘온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1) ‘마지막 때 지구 상에 사는 유대인 집단(Hendriksen), (2) 영적 의미로 본 모든 신자들 즉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Calvin, Barth, Leeuwen & Jacobs), (3) 선택된 이스라엘 전체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Murray, Robertson, Bruce, Hoekema, )등이 있는데, 로마서 9~11장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3)의 해석이 다수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행위 보다는 중심(中心)-내면-이 더 중요하다

 

메시아닉 쥬가 강조하는 토라의 계명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中心)-속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오늘날의 메시아닉 쥬 보다 훨씬 더 율법의 계명을 잘 지켰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라는 책망을 받았다(마 23장).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하게 하시고(마 5:17) 율법의 마침이자 목표(롬 10:4)라는 말은 율법의 자세한 규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지향하는 더 높은 가치인 마음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고 마음의 상태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내적 변화 없는 행동만의 준수야 말로 위선이고 외식적인 바리새인의 표본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은 것은 율법의 제의법(제사의식법)을 잘 지키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여 도덕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1-15).

 

아무리 절기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드리더라도 악을 행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6.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애 2:6).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와 우상 숭배 및 도덕적 죄악과 불법 때문에 비록 ‘여호와의 절기’지만 준수가 불가능해지고 성전이 파괴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음식 정결법도 마찬가지다.

돼지 고기나 오징어를 먹지 않는 유대인이 이방인 보다 더 정결한 것은 아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죄악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므로 이런 죄악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19-23).

 


외적인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율법의 목적인 정의, 긍휼 및 믿음을 무시하고 내면을 정화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막 23:23, 25).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목적은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롬 8:29)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서는 것이지(엡 1:4), 세대주의자나 메시아닉쥬가 기대하는 것처럼 내면의 변화 없이 그저 천년 왕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내면의 변화나 영적 성숙 보다 외적인 행위에 몰입하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퇴행적 신앙'에 불과하다.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한국처럼 많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나 교인도 드물지만 변화는 좀처럼 되지 않는다. 내면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유대인 절기 준수를 추가하는 것은 이미 많이 드리는 예배에 횟수만 더할 뿐이다. 메시아닉 쥬와 동조자들은 ‘그림자’에 불과한 절기 준수나 유대식 예배를 강조하는 그 시간에, 자신의 내면을 다스려서 ‘육체의 일’을 제거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단장’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에 있는 메시아닉 쥬는 세대주의가 말하는 ‘마지막 이레’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그러나 메시아닉 쥬도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여 ‘이스라엘 구원 따로 교회 구원 따로’를 주장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문자적 7년 환난’은 아니지만 ‘상징적 7년 환난’은 수용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 이레인 70번째 이레는 언제인가?

 

 

 ‘70번째 이레’는 언제인가?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27절)
 

세대주의자들은, 26절까지의 69이레와 27절이 말하는 70이레 사이에는 ‘교회 시대’라는 긴 시간적 공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성령이 강림한 이후190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공백 기간이다. 교회가 아직도 휴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B.C. 4년으로 계산하는 이유는 헤롯 왕이 그 해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연대 기록을 1500년대 이후부터 누군가가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잡으면 헤롯 왕 사망 년도와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B.C. 1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A.D. 29/30년에 시작되었고 사망 연도는 A.D. 33년이다)

 

-‘야곱의 환난의 때’는 언제인가?

 

이들이 말하는 ‘한 이레’는 교회가 휴거 된 후에 적그리스도의 핍박으로 일어날 문자적인 ‘7년 대환난 기간’이다. 이들은 7년 대환난 기간이 ‘야곱의 환난기’(렘 30:7)라고 주장한다

 

 

“7.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9.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렘 20:7-9).

 


여기서 말하는 야곱의 환난의 때는 언제인가?
 
세대주의자나 메시아닉 쥬는, 이전 글들에서 밝힌 것처럼, 구약의 모든 예언을 7년 대환난과 천년 왕국과 연관시키는 미래 해석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야곱의 환난의 때를 재림 직전의 7년 대환난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레미야서는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책이다(B.C. 627~586년 사이에 기록).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침공에 의한 남유다의 유린과 멸망 및 포로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멸망, 환난과 회복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야곱의 환난의 때’는 상식적으로 앗수르에 의한 북 이스라엘 사람들과 바벨론에 의한 남유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나 메시아닉 쥬는 이런 일차적 적용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모두 대종말의 7년 환난 중에 당하는 환난으로 잘못 이해한다. 물론 성경의 예언은 한 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에 걸쳐 복합적으로 성취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는 복합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자들은, B.C. 6세기 경의 예레미야의 예언이 중간 과정이 없이 서기 2016년인 지금도 임하지 않은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성취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일부 메시아닉 쥬의 주장대로 이 예언이 여러 시대에 걸쳐 성취되는 것이라면, 한국 못지 않게 파란만장한 침공과 피지배의 역사를 당해온 유대인들의 경우에 대비해 볼 때, 앗수르나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물론 B.C. 3~4세기 경의 헬라의 지배, B.C. 63부터 시작된 로마의 압제, 로마에 대한 반항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A.D. 70), 바르 코크바 반란(A.D. 135)과 그로 인한 약 1800년의 디아스포라에서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까지의 모든 기간이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나 일부 세대주의 종말론을 따르는 메시아닉 쥬-특히 조엘 리차드슨 등-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얼마 후 교회가 휴거 되고 나면 전무후무한 7년 대환난이 또 다시 이스라엘에게 닥친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는 아니라고 하는데 왜 세대주의나 세대주의 종말론을 수용하는 일부 메시아닉 쥬는 대종말의 대환난을 그렇게도 강조하는가? 환난이 그렇게도 좋은가? 교회 시대 자체가 각종 대환난의 연속 시대가 아닌가?
 

총칼의 권력을 쥔 북한이나 이슬람 같은 기독교 박해 국가들은 지금도 기독교 신자의 기본권을 박탈하여 죽이거나 고문하고 민주 국가에서는 각종 제도로 동성 결혼 허용, 노방 전도 금지와 같은 차별 금지법을 통해 크리스천의 발을 묶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외에 얼마나 더 큰 핍박과 환난을 기대하는가?

 

 

‘70번째 이레’는 언제인가?

 

개혁주의는 다르게 해석한다.

‘27절 상’에 의하면, 위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70번째 이레의 반 기간 동안 즉 예수님의 공생애인 3년 반의 마지막에 십자가 사역으로 제사 제도를 폐기하시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신다. 마지막 한 이레의 ‘전 3년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구속 사역까지다.

 

“그(메시야)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단 27 상).

 


그러면 ‘후 3년 반’은 언제인가?

 

 (1) 어떤 사람은 마지막 한 이레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모두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주로 철저한 과거주의자들이 하는 주장이다.

(2) 또 어떤 사람은 전 3년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이고, 후 3년 반은 성령 강림부터 스데반의 순교까지의 기간으로 해석한다.

 

   

▲ 3번 견해

(3) 또 어떤 사람은 전 3년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부터 제사 제도가 완벽하게 폐기되는 A.D. 70년의 성전 파괴까지로 해석한다. 그리고 나머지 후 3년 반은 A.D. 70년부터 지금까지의 ‘교회 시대’라고 해석한다(Sam Storms, Vern Poythress, Meredith Kline). 종합 해석법이라고 할 수 있다.

 

   

▲ 4번 견해

(4) 마지막으로, 또 어떤 사람은 전 3년 반은 공생애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 강림한 3년 반의 기간으로 본다. 그리고 ‘후 3년 반’은 ‘교회 시대’라고 해석한다(William Hendricksen, G. K Beale, Kim Riddlebarger 등). (3)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상당수의 무천년주의자들이 이런 해석을 지지한다. 필자도 조심스럽게 (4)의 입장을 지지한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의 전환기이다

 

그렇다면, 왜 ‘69이레’와 ‘전 3년 반’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후 3년 반’은 ‘상징적으로 해석’하는가?

문자적이고 단어 중심으로 해석하는 세대주의자들은 걸핏하면 개혁주의자들이게 ‘왜 상징적으로 해석하느냐?’고 반문한다. 여기서 후 3년 반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다른 주제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세대주의자들이나 메시아닉 쥬는 봄 절기인 유월절, 초실절 및 오순절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가을 절기인 나팔절, 속죄일 및 초막절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팔절은 휴거와 관련이 있고 초막적은 재림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유대 달력으로 나팔절을 계산하고 휴거는 안식년(슈미트) 첫해에 일어난다고 계산하여, 작년 2015년 나팔절과 블러드 문을 연관시켜 경제적 대재앙이 온다고 했는데 실제으로는 휴거 날짜를 예측한 것이다. 세대주의는 늘 이런 식으로 휴거 날짜를 계산하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 놓고 아직도 이런 해석의 오류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런데 왜 이들은 계속 날짜를 예측하는가?

 

이들은 예수님이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고 하셨지만 신자는 그 시기는 알 수 있고 예수님이 도둑 같이 임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면서(살전 5:1-4), 은근 슬쩍 날짜를 자꾸만 계산한다.

 

이런 편법은 예수님의 말씀 보다는 자기들의 신학을 더 의지하기 때문이다. ‘봄 절기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니 가을 절기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니 앞으로도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다?’는 그럴 듯 한 주장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광범위한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시기까지 예언과 절기는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및 성령 강림을 통해 구속 사역이 완성된 이후에는 더 이상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이 문자적 효력을 상실한다.

 

왜?

예수님의 구속 사역 이전의 모든 것은 예표이자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구약의 모든 절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 이후 유대인들이 문화적 차원에서 절기를 지키고 이방인들이 선교나 교육 차원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무방하지만 절기를 교리로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무효로 하는 엄청난 죄악이다.
 

신약에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율법 중의 도덕법을 신약에서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제사, 음식정결법 및 절기와 같은 제의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속에 녹아져서 정신은 살아있지만 형식은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시민법(민·형사법)은 민주 국가에서 국가가 담당하므로 교회는 더 이상 관할권이 없다.

 

그런데 세대주의자와 메시아닉 쥬는 성경을 거꾸로 해석한다.

교회가 휴거 된 후에는 교회와 함께 성령도 거두어지는 역(逆) 오순절 현상이 일어나서 세상이 구약 시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율법을 온전케 하고 마침(롬 10:4)이 되신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왜 필요한가? 믿고 신분적으로 영혼 구원 받는 것에 그치는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이 없다. 그림자인 구약의 율법은 본체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몽학선생-안내자-역할을 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매일이 유월절이고 초실절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절이고, 나팔절이고, 속죄일이고, 초막절이다. 우리는 이제 예수 안에서 7절기 모두를 영적으로 누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 뿐이다. 신자는 그 동안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주어진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며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신부로 단장해 가야 한다.

 

-후 3년 반은 사역의 기간, 준비의 기간, 핍박의 기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후 3년반을 굳이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성경에서 3년 반은 ‘사역의 기간’, ‘준비의 기간’, ‘환난의 기간’, ‘핍박의 기간’이다.

‘한 때 두 때 반 때는 단 7:25에 처음 등장한다. 이미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났다(요일 4:3). 따라서 교회 시대인 ‘후 3년 반’은 이미 출현한 적그리스도의 시기이자, 복음 전파의 시기이자 핍박과 환난의 시기이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1260)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42)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

 

성경은 ‘3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 ‘42개월’, 1260일에 대해 여러 군데서 기록한다.

 

-단 7:25; 12:7; 11-12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계 13:5는 엘리야의 사역 기간을 3년 반으로 계산하여 교회의 사역 기간으로 이해한다(눅 4:25; 약 5:17; 11:6).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은 2년+40년=42년간인데, 천막을 치고 거두는 것을 42번 했고(민 33:5-49).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가서 42년간 연단을 받는다. 계 12:6, 14의 여자(메시야 공동체)는 광야에서 1260일 (42개월) 동안 핍박, 연단과 훈련 받는 것을 강조한다.

 

-계 12:5-6는 '3년 반'을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사역 기간으로 묘사한다.  메시야 사역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성된다(계 12:5-6; cf 14:14-20)).

 

 

-왜 ‘3년 반’이 이렇게 긴 시간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재림 시기를 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1)고 말씀하신다. 재림의 시간은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지 인간의 달력의 시간은 아니다. 그러므로 양력이든 유대력이든 달력에 의해 계산하면 항상 틀린다.

 

개혁주의의 후 3년 반이 엿가락처럼 긴 기간인 것처럼 세대주의가 말하는 교회 시대도 엿 가락처럼 길다. 전자는 ‘긴 기간’이고 후자는 교회 시대와 천년 왕국 시대 사이의 ‘긴 공백’으로 설명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긴 기간이 긴 공백 보다 다른 구절들을 감안할 때 더 성경적이다.

 

 

나가는 말

 

이상 다니엘이 9장이 말하는 ‘70이레’에 대해 살펴보았다.

더불어 메시아닉 쥬의 종말론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다니엘의 예언이 어려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주신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회복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메시야 공동체인 교회의 고난과 회복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원 방식을 별개로 보는 세대주의나 메시아닉 쥬 신학에 의하면 ‘70이레’는 혈통적 유대인의 고난과 회복에 관한 예언이므로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메시야 공동체로 이해하면, 70이레의 예언은 교회를 통해 성취, 확장 또는 통일되는 것에 대한 예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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