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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인물] 김영한의 영적 분별, 제대로 된 분별인가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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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9  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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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인물]

 

김영한의 『영적 분별』, 제대로 된 분별인가?

-김영한의 ‘영적 분별’은 오히려 ‘영적 혼란’을 주고 있다-
 

 

   

▲기적계속론 입장인지 기적중지론 입장인지
   모를 정도로 헷갈리게 하는 책이다

기독교 학술원(이사장 이영엽 목사·대표 차영배·원장 김영한) 원장인 김영한 박사(이하 김영한)가 오늘날 성령 운동을 바로 이해하고 잘못된 관행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해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성령과 사탄에 의한 영적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의 『영적 분별』을 저술했다.

김영한은 기적을 행하는 오늘날의 성령 운동에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성경적, 신학적, 실천적 및 비교 종교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영한은 성령의 현상과 미혹의 영의 현상 사이의 차이점을 10가지로 제시한다(p. 299 이하).

 

1. 성령의 역사는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권세를 깨뜨림.
2. 사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해 열등하며 종속적이다.
3.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인 감동의 역사이나 사탄은 영적 폭력을 저지름.
4. 성령은 내면을 변화시키지만 미혹의 영은 외면을 조작.
5. 성령은 십자가의 메시야를 선포하나 미혹의 영은 만능의 메시야를 선포.
6.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결한 삶과 비도덕적이고 패륜적인 포악의 삶
7. 해방, 존엄의 역사와 억눌림과 저주의 역사
8. 진리, 정결의 역사와 허위, 궤계, 불륜의 역사
9. 온유와 인자의 역사와 공갈과 협박의 역사
10. 겸손한 인격과 축복의 언행과 폭언과 저주의 언행
 

 

김영한은 또한 영을 판별하는 기준 10가지를 제시한다(p. 329 이하).

 

1. 영의 사역자의 가르침이 성경 말씀과 정통 교리에 일치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증거하는지 여부(與否)
3. 교회와 신자 그리고 공동체를 세우는지 여부
4. 하나님의 영광이냐 이기적 목적이냐
5. 성경을 정경적 계시로 인정하는지 여부
6. 위로와 소망을 주는가? 저주와 절망을 주는가?
7. 새 사람을 만드느냐? 불법의 증오를 만드느냐?
8. 영적 열매
9. 겸손한가? 교만한가?
10. 삶의 결과
11. 정직하고 성결한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
12.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체계 소유 여부
13. 영적 사실에 대한 진지성 여부: 영적 대각성운동과 토론토블레싱 운동의 차이
14. 불신자, 지옥에 대한 메시지 여부
 

 

이어서 김영한은 영적 사역들이 탈선하는 이유를 몇 가지 제시했다(p. 371 이하).

 

1. 은사를 개인적 욕망과 권력추구로 오용(誤用)
2. 성령의 역사를 초자연적 현상(쓰러뜨리기, 방언, 능력받기 등)으로 오용
    (1) 안수하여 쓰러뜨리는 행위는 말씀에 입각한 은혜 전달 방식이 아니다.
    (2) 신비로운 체험주의 신앙으로 이교도 영성을 흉내냄
    (3) 성령의 사역 보다는 사역자의 영광이 드러나는 위험성
    (4) 성령의 나타나심은 예수를 드러내기 위함임

 

결론적으로, 사역자의 바른 길: 영적 분별에 대한 신학적 성찰6가지로 제시한다(p. 396 이하).

 

1. 성령의 기사와 표적에 치우치지 말고 열매, 덕을 맺는데 매진
2. 성령 안의 기도는 신자와 교회에 유익하고 좋은 결실을 갖도록 함
3. 김하중의 하나님 마음을 아는 지식에 대한 신학적 성찰
    (1) 하나님 마음을 아는 지식이란 직통 계시 아닌 지식의 말씀의 은사
    (2)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계시 체험 그리고 어느 저명한 개신교 목회자의 계시 체험
    (3) 끊임없는 자기 속의 죄 죽임의 필요성과 보편화 위험성
4.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너를 진정한 이웃으로 경험
5. 성령 안의 기도자는 매사에 사랑의 실천자
6. 오늘날의 치유사역은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징표
    (1)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
    (2) 선지자들은 병을 고쳤으나 이에 대한 예물을 받지 아니함
    (3) 예수의 치유사역: 새 창조의 징표로서의 치유
    (4) 신약과 초대교회의 치유와 오늘날의 치유의 차이점: 연속성과 불연속성

 

5(V)장에서는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p. 423 이하), 토론토 블레싱 운동의 위험성과 신사도 운동의 주요 주장과 문제점(p. 462 이하)를 다루고 있다. 손기철 장로의 사역에 대한 평가는 국내 여러 신학자들의 찬반 양론을 취합한 후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토론토 블레싱 운동과 신사도운동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김영한은 6(VI)장에서 총 결론으로 핵심 기준(그리스도 시인)과 9가지를 포함한 10가지 기준을  제시한다(p. 533 이하).

 

1. 그리스도의 시인(是認) 영: 그리스도에 대해 구주로서 인격적 관계를 시인하는 영
2. 삼위일체 시인 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고백을 하는 영
3. 성경 시인 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영
4. 공교회 시인 영: 역사적 공교회를 시인하는 영
5. 사도신경 시인 영: 사도신경 신앙고백하는 영
6. 성결의 영: 거룩한 삶을 열매로 맺는 영
7. 인격적 믿음의 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일으키는 영
8. 인격적 삶의 영: 교회와 개인의 삶에 강렬한 임재와 세미한 인도의 균형 잡는 인격적 영
9. 헌신의 영: 자기 유익과 영광 아닌 이웃의 고난과 희생과 헌신에 참여하는 영
10. 사회적 선한 삶의 영: 사회적 삶을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영.

 

사실 김영한이 제시한 핵심 10가지 기준은 방만하고 기준이 모호하여 이단 분별법인지 성령 사역 분별법인지 신앙 생활 분별법인지 이 모두인지 분별이 잘 되지 않는다. 분별법이란 제목 아래 ‘성령의 현상과 미혹의 영의 현상 사이의 차이점 10가지’(p. 329 이하), 영적 사역자들이 탈선하는 이유(p. 371), 사역자의 바른 길: 영적 분별에 대한 신학적 성찰(p. 396), 사역자의 바른 길: 영적 분별에 대한 신학적 성찰(p. 533)은 내용이 중첩되어 지루하고 산만한 감이 든다. 또한 5번의 사도신경은 주로 장로교의 신앙고백이므로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침례교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영한의 『영적 분별』, 과연 제대로 된 분별인가? 

 

김영한의 『영적 분별』은 영적 현상에 대한 전반적인 영적 분별에 대한 지침은 제공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김영한의 신학적 성찰 및 영적 체험의 제한으로 인해 ‘건전한 영적 분별’을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편파적이고 잘못된 영적 혼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1. 용어의 정의 정립 

 

구체적 사안에 대한 평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용어의 정의를 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첫째, 김영한 자신은 “정경의 완성과 교회 설립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은사중지설(cessationism)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오셔서 성경의 증언을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지속적으로 설립하도록 도우신다는 은사지속설(continuationism)을 믿는다”(p. 7)고 말한다.

 

서평자(Book Reviewer)는 그러나 은사중지설은사지속설이란 표현 보다는 기적중지론기적계속론이란 표현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기적중지론자들도 기적행하는 은사(들)(고전 12장)외의 일반 은사, 생활 은사(롬 12:6-8; 벧전 4:10-11등)는 당연히 지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김영한은 “성령의 역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런 표현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원 사역을 신자에게 적용시키는 ‘내적 역사’와 은사를 통해 나타나는 ‘외적 역사’의 두 종류를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란 표현 보다는 성령의 외적 역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2. 조나선 에드워즈, D.L. 무디 등이 기적계속론자인가?

 

- 기적중지론자와 기적계속론자의 분류

 

기적중지론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의는 성경에 기록된 표적과 기사, 특히 방언, 방언 통변, 예언, 신유 및 축사가 사도들과 함께 중지되었다, 사도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는 신학적 주장을 말한다. 그런데 김영한은 기적중지론에 대해 말하면서 조나선(단) 에드워즈와 마틴 로이드 존스가 기적계속론자라는 주장을 한다(p. 7).

 

김영한은 다른 곳에서도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D.L. 무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등을 기적계속론자로 분류했다.1) 서평자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기적중지론자들이고 로이드 존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한 사람이다.

 

서평자는 누구보다 이들을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사역을 위한 성령의 외적인 능력’(Power of the Holy Spirit for service)은 강조했지만 방언, 예언, 신유 및 축사가 교회 시대에도 지속된다는 기적계속론의 정의에 의할 때, 이들이 기적계속론자라는 감영한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 제1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기적행하는 은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방언, 기적, 예언의 은사 등과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특별한 것’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섭리에서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자녀들을 다루시는 통상적인 섭리가 아니라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사도나 선지자 및 초대교회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 주어져서 세상에 교회를 창설하고 설립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성경 기록이 완성되고 기독교 교회가 완전히 창설되고 설립된 이후에 이 특별한 은사들은 중지되었다.”2)

 

어떤 사람은 은사의 오남용을 경계하기 위해 조나선 에드워즈가 기적중지론자가 되었다고 변호하는데 이런 논리라면, 교단, 목사,장로 등의 모든 것도 부인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오남용하고 말썽부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위대한 부흥운동가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도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더 큰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매일 목격하고 있는데 병든 몸이 치유되고 소경이 다시 보는 기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3)

 

존 스토트(John Stott)는 “‘나는 오늘날 기적들을 일상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을 주시므로 입증한 특별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하나님은 자유, 자주하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꺼이 기적들을 행하시는 특별한 상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솔직하게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4)고 말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도 존 스토트처럼 애매한 입장이다. 부흥의 현장에서 예언의 영이 임한 것은 인정했지만5), 은사를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를 직접 구하지 말고 간접적으로 구하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며 수세기를 통해 온 사도들의 방식이었다. 그를 구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구하시오. 그의 영광을 구하시오. 그에 대한 지식을 구하시오. 그를 입증하고 증거하기 위한 권능을 구하시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은사를 얻을 것이다.’”6)

 

과연 그런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구하면 은사를 얻는가? 이것은 그럴듯한 소리지만 성경적 주장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구하면 은사가 임한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은사는 성령이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지만 간절히 구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번역본에 따라 다르지만 원문의 의미는 ‘사랑에 따라-사랑의 동기로-신령한 은사들을 간절히, 시기할 정도로 구하라. 그리고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이다. 성경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지 사랑을 구하면 은사가 자동적으로 임한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은근히 은사를 경시하면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는 비은사주의자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은사만 사랑을 따라 구하고 사랑을 따라 사용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나 학문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따라 구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초자연적 은사를 비하하듯 주장하거나 가르치는 것도 잘못된 태도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김영한은 ‘사역을 위한 능력’(power for service)을 강조한 오순절 운동 이전의 성령 사역자들도 기적계속론자로 분류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분류 방법이 아니다. 만일 그들을 기적계속론자로 분류하고 싶다면 먼저 기적중지론과 기적계속론의 용어 정의부터 먼저 한 후 그렇게 주장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명백하게 방언과 예언과 같은 기적행하는 은사를 부인한 사람들을 기적계속론자(은사지속론자)로 분류하여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신학적으로는 기적계속론자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기적중지론자가 많다. (기적행하는) ‘은사가 지속은 되지만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사용하라’는 식이다. 이는 마치 한국 ‘정부의 규제’와 같다.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한 선한 규제 보다는 위험성이나 오남용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각종 악성 규제로 얽어 매어 놓고 조금이라도 오남용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더욱 심한 규제로 옥죄는 것과 같다. 김영한이 그런 부류에 속하는 기적계속론자라고 할 수 있다.
 

 

3. 기적중지론의 대부인 칼뱅이 기적계속론자라고?

 

물론 김영한의 책은 기적중지론에 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김영한이 루터나 칼뱅(칼빈) 등을 기적계속론자로 분류하는 것은 재량권을 넘어서는 신학적 오류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은사지속론(continuationism)의 입장을
가졌다. 그런데 20세기 미국 구(舊)프린스턴 장로교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오늘날 성령의 (기적행하는) 은사가 그쳤으며 오늘날 일어나는 기적 은 ‘가짜 기적’(counterfeit miracles)이라고 하였다”(p. 44).

 

김영한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서평자가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루터는 물론 특히 칼뱅은 기적중지론의 대부로서 오늘날 기적중지론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고 대중화한 대표적 기적중지론자이다. 벤자민 워필드, 존 맥아더, 행크 해너그라프 등 강성 기적중지론자들의 신학적 뿌리는 곧 칼뱅이다.

 

오늘날 제대로 된 학자들 중에서 루터나 칼뱅을 기적계속론자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루터는 나중에는 신유와 축사를 어느 정도 인정했고, 칼뱅도 ‘기적이 일어난다, 중지되었다’고 횡설수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기적계속론자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김영한의 이런 주장은 ‘신학적 주장’이라기 보다는 관련된 교단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외교적 주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기적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성령이 가시적인 형태로 임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비둘기 형태로(마 3:16), 사도와 신자들에게 불의 모습으로 강림하셨다(행 2:3). 보이는 형태의 성령 강림은, 성령의 선물에 동반되는 기적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2에서 이런 기적행하는 은사의 목적을 설명했다. 방언은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를 위한 표적이다.’ 일단 교회가 설립되고 기적에 의해 적절하게 알려진 이상 보이는 성령의 모습은 중지되었다.”7)

 

루터는 오늘날에는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마귀를 쫓아내고, 소경이 다시 보는 기적이 눈에 보이게 일어나지 않지만, 요 14:12의 말씀처럼 더 큰 기적이 영혼에서는 일어난다고 말했다. 루터는 비록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기적은 ‘과거’의 일이라고 주장했다.8)

 

장 칼뱅(John Calvin. 1509~64)은 신학적, 성경적으로 성경의 기적을 비기적화한 대표적인 기적중지론자이다. 칼뱅은, 로마 천주교가 칼뱅에게 ‘너의 주장이 그렇게 옳다면 기적으로 너의 주장을 입증해 보라. 너희 말에 기적이 따르지 않은 것을 보니 개혁운동은 사도적이 아니다’고 역공했다. 그러자 칼뱅은 역사적으로 전기(前期)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 그레고리 4세 및 토머스 아퀴나스 등의 기적중지론 신학을 집대성하여 천주교에 맞섰다.

 

신학으로 무장한 칼뱅은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가톨릭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칼뱅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하는 그들은 부정직하게 행동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미 기적으로 입증한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거짓으로 고안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이런 목적을 이미 달성했으므로 우리가 전하는 말을 더 이상 기적으로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가톨릭에 기적이 지금도 지속된다고 하니 그런 기적은 사탄이나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기적임에 틀림없다’고 공격했다.

 

즉 칼뱅은 기적의 주요 기능은 사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사도들이 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아퀴너스의 증거주의를 채택했고, 성경 기록과 함께 기적은 끝났으므로 오늘날 교리가 바르지 못한 로마 천주교나 윤리도덕적 본을 보이지 못하는 극단적 열광주의자들이 행했다고 주장하는 기적은 마귀의 짓이다라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채택했다.

 

동시에 칼뱅은 성경의 주석 군데군데에서 자신의 당시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배은망덕한 탓’이다(막 16:17), 사도, 선지자 및 전도자는 종교가 쇠퇴한 곳에, 특별한 방법으로 전도자를 일으켜서 상실된 순수한 교리를 회복하실 수 있다(엡 4:11)는 모순된 주장을 했다. 김영한을 포함한 일부 신학자들은 칼뱅이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해서 칼뱅이 기적중지론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칼뱅의 기적중지론 신학과 성경 주석 전반을 감안하면 칼뱅이야 말로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9)
 

칼뱅은 기적과 관련된 신약의 성경 구절을 비기적화하는 작업을 철저하게 시도하여 후대의 기적중지론자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비기적화’ (Demiraclization)란 서평자가 만든 단어인데, 성경의 기적을 부인한 자유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처럼, 칼뱅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 말하는 은사, 예언을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은사, 신유는 그리스도가 신자의 연약함을 짊어지는 것과 같이 이런 은사들에서 기적적인 요소를 거세시킨 것을 말한다. 그런데 김영한은 무슨 근거로 이런 칼뱅을 기적계속론자라고 부르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4. 신유에 대한 김영한의 편견

 

하나님의 신유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 무당도 병을 고친다.”

 

지난 2월20일, 서평자도 참석한  HTM(대표 손기철 장로)가 주최한 『성령과 성령사역 심포지엄』에서, 김영한은 신유에 대한 질문에 대해, “무당도 병을 고칠 수 있다”면서 신유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손기철 장로 면전에서, 신유 사역을 비판하고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여 질문자는 물론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김영한의 이런 견해는 그의 저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신유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전형적인 강성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노만 가이슬러, 이들의 주장을 인용한 박영돈의 주장과 유사하다. 맥아더는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권세와 은사를 부여 받은 사도들의 치유의 특징 6가지를 제시하면서 요즈음 치유는 이것들과 질적으로 다르므로 ‘기적’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10)

 

맥아더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다 고쳤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질병’(器質病, organic disease) 즉 절름발이, 마른 손 환자, 소경, 중풍병 등 기질병을 모두 기적적으로 고치셨고 사도들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치유사역자들은 주로 허리 아래 통증, 심인성 질병이나 내적치유를 한다고 비판한다.

 

김영한은, 변승우 목사(이하 변승우)가 치유 사역을 매스컴에 광고하고, 성형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율이 70-90%에 달한다는 변승우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pp. 284-86).

첫째, 성형적 치유란 실용주의적 복음 설교처렴 성경적 치유가 실용주의적으로 왜곡된 것 같다. 성경에 기록된 치유기적이란 선천적 내지 후천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소경 불구자, 벙어리, 앉은뱅이 등에 대한 치유였다. 그러나 성형적인 기적(튀어 나온 광대뼈, 높은 콧대, 작은 코,삐뚫어진 코,쌍거풀 없는 눈,목이나 얼굴의 잔주름,턱살,뱃살,팔자걸음, 오다리, 굽은 등, 흰머리 교정 등) 이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이러한 성형적 치유란 너무 실용적인 교정으로서 성경에 상응하는 치유로 보기 어렵다.

둘째, 치유사실을 일간신문에 광고까지 하는 것은 복음 전파 목적보다는 치유를 상업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치유는 널리 광고해서 모집된 사람들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고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을 조용히 치유한 것이 대부분이다.

셋째, 변승우의 치유사역에서 나타나는 치유율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는 70-80%가 치료된다고 하나 이것은 일반적인 치유사역에 비하면 너무 과장된 수치다. 치유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치유 사역자도 보통 20% 정도 치유된다고 하는데 그 수치를 부풀린 것이 아닌가?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빈야드연합회 치유사역자 존윔버 (John Wimber)에 의하면, 자신이 기도해 준 사람들 중에 정말로 완치된 사람은 25% 정도에 불과함을 인정하였다. 그것도 신경성 질병이거나 소화기 계통의 병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영한은 “예수의 치유사역은 완벽했고,실패한 적 이 없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었고,병자를 고치셨고, 때로는 진흙을 발라 치료하셨다. 예수의 치유사역과 오늘날의 치유사역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오늘날 교회의 치유사역의 기준은 예수의 치유사역이다. 오늘날 치유 사역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사역을 능가할 수 없다”(p. 419)고 주장한다.
 

김영한 식으로 오늘날의 모든 사역을 비판하고 분석한다면 제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은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무오한 말씀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교는 영감도 부족뿐만 아니라 결함투성이다. 그렇지만 영감이 부족한 결함 투성의 설교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이 은혜 받고 변화 받는다. 마찬가지로 정도가 약하지만 현대의 신유사역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서로 무엇이 다른가?

 

둘째, 오늘날 복음 전파를 위해 문서는 물론 TV나 인터넷 등 모든 문명의 이기가 총 동원되고 있다. 그런데 신유 사역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영한은 평생 건강한 탓인지 아픈 자의 고통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아픈 자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신유 집회를 찾는다. 광고를 하지 않으면 어디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셋째, 김영한은 존 맥아더의 주장처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고친 병과 요즈음 신유집회에서 고치는 병이 다르다고 비판한다. 물론 오늘날의 신유 사역자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처럼 즉각적이고 완벽한 치유를 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또한 성경에서 치유한 병 명은 ‘예증적인’(illustrative) 것이지 성령이 꼭 그런 병만 고치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특히 외모에 신경 쓰는 한국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성형 치유를 하실 수도 있다.

 

또한 금이빨이나 이빨 치유사역은 원래 식수가 좋지 않은 남미에서 시작된 사역이다. 남미에서는 물이 좋지 않아서 상당수의 사람들의 이빨이 썩었는데, 칼로스 아나콘디아의 집회에서는3개 이상 낫지 않은 사람은 간증할 기회가 없을 정도로 이빨 치유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치유의 기름부음이 미국을 거쳐 한국에도 도입된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김영한이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성령 사역을 비판한다면 그가 받은 박사 학위도 비성경적이다.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세상적 방법인 박사 학위를 받으라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오히려 학문적 배경이 열악한 제자들을 택하셔서 3년 반 동안 제자훈련을 하신 후 마지막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하신 후 사역에 임하게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는 왜 예수님의 제자훈련 기간인 3년은 강조하면서, 성경과 전혀 다른 방법인 박사 교수 위주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는가? 신학 이론은 무성하지만 영적 경험도 제대로 없는 세상적 박사들이 스승이 되어 제자들을 양성하니 교회가 능력도 없고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여서 전통적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오히려 김영한이 비판하는 방식으로 성령 사역을 하고 이런 식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에 더 적극적으로 이바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통계에 의하면, 정규 신학교 과정이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보다 성공한 교회의 목회자를 통해 훈련 받은 목회자가 목회를 더 잘 한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급성장하는 건강한 교회 중 58%는 담임 목사가 신학대학원 출신이 아니고, 건강도가 낮고 쇠퇴하는 교회 중 85%는 담임 목사가 신학대학원 출신이라고 한다.11) 신학 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자들은 이 통계가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 것이 모두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교회에 머무는 것도 모두 잘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그릇이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큰 교회도 맡기시고 작은 교회도 맡기시지만 복음 전파는 일차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성경적으로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은 하등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영한은 자기들이 하는 것은 모두 성경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들에게 생소한 것은 비판하고 배척하는 지적 오만과 현상 (status quo)만족편안하고 익숙한 지대(comfort zone)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이런 시비는 계속될 것이다.
 

 

서평자도 개혁신학을 전공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개혁신학이 성행하는 곳에 교회가 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역 현장 경험도 없는 너무나 많은 학자들이 현장의 역동성 보다는 신학적 정의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영적 생동력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그나마 이 정도 수준이라도 유지하는 것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개혁신학을 표방하지만 수많은 현장 사역자들이 비난과 핍박을 무릅쓰면서도 성령 사역을 꾸준히 사역 현장에 접목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중시하고 숫자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유럽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생명을 낳지 못하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개혁신학도 환골탈태 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보장하기 힘들 것이다.


 

5. 토론토 블레싱 운동, 과연 잘못된 운동인가?(p. 462 이하 )

 

김영한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김영한 자신은 기적계속론자라고 말하지만 일부 성경 구절 해석이나 성령 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기적중지론자들의 견해를 더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영한은 신학적으로는 기적계속론자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기적중지론자의 성향을 더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기적중지론자 외에 제대로 된 기적계속론자 치고 토론토 블레싱을 잘못된 운동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김영한은 토론토 블레싱 운동은 잘못된 운동으로 평가한다.

 

왜 그런가?


본인이나 사역 현장 경험이 없으면 자신의 경험(또는 무경험)의 수준 안에서 영적 현상들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서평자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한때 방언을 부인하다가 방언 받고, 신유하고, 축사사역을 좀 하게 되자 서평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완전히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안수하면 쓰러지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러다가 그런 사역의 현장에 자주 참석하고, 경험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신앙의 열매를 관찰하고, 본인도 실제로 체험하면서 편견이나 오해가 하나하나 벗겨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통적 예배와 은사적 예배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서로 무엇이 다른가?

첫째, 전통적인 예배는 전반적으로 설교 중심으로 예배 순서가 짜여지기 때문에 예배 중에 성도들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은사적 교회는 찬양, 기도, 설교 및 기도사역이 모두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목사가 중심이고 회중은 관람객이지만 후자는 목자가 중심이 되어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예배를 드린다.

 

전통적 교회에서는 아직도 이성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아멘’이나 다른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교회도 있지만 은사적 교회는 감성을 최대한의 데시빌로 끌어올리는 찬양과 기도를 통해 회중들의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모두 쏟아놓게 한다.

 

오늘날 선진국은 물론 한국에도 각종 스트레스와 상처로 인해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이런 식의 찬양과 기도는 울분과 스트레스를 푸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찬양의 주 기능이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찬양을 통해, 다윗의 시편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의 아픔을 쏟아놓은 후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누리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쏟아놓을 기회가 없으니까 목사나 교회에 대한 불만이 많고 교회가 분열에 이르는 곳이 많다. 그러나 은사적 교회에서는 찬양과 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아픔과 상처를 마음껏 쏟아놓게 하니까 전통적 교회에 비해 내분과 갈등이 적다고 할 수 있다.
 

필자도 은사적 예배에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쓰러지는 현상을 최면술이라고 할 정도로 무지했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부정적 인식을 가졌다. 혹시 짜고 하는 행동들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했지만, 필자 자신이 경험하고 이런 경험을 한 신자들의 열매를 보고, 동시에 요한 웨슬레, 조지 휫필드, 조나선 에드워즈나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기록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영적 부흥 집회에서는 쓰러지는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났으며, 쓰러지는 현상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도구’의 한 가지 방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미국에 거주하면서1980년대 말부터 당시 미국에서 불기 시작한 각종 성령 운동 집회에 참석하면서 성령 운동의 집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설교 위주의 예배가 아니라 찬양, 간증 및 기도사역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물론 그런 예배가 이성적이고 설교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일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 예배는 문자 세대, 이성 세대, 논리 세대에 적합한 예배 스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는 영상 세대, 감성 세대 및 경험 세대이다. 그러므로 은사적 예배와 전통적 예배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자 시대에 맞게 역사하시는 하님의 주권적 인도에 의한 상황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교회는 쇠퇴하고 은사적 교회는 성장하는 이유

 

그런데 오늘날 전통적 교회는 쇠퇴하지만 은사적 교회는 지속적이고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방언, 예언, 신유 및 축사와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이 살아나고 문제가 해결 받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은 예수가 메시야이시고 사도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특별한 사람들이고, 기적은 종말론적 회복의 표적이라는 거창한 주장을 하면서 기적중지론을 천명하고, 구원이 중요하지 기적이나 경험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위험한 것이라면서 은근히 기적을 폄하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초자연적 은사 체험을 통해 전통적 교회가 주지 못하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사모하고 있다.

 

이런 체험은 교리나 설교나 성경 공부가 주지 못하는 강렬한 체험이다 (물론 설교나 성경 공부 중에 이런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요즈음은 평신도들도 인터넷을 통해 어지간한 신학적 주제는 해결 받으므로 평신도들의 신학 수준도 목회자 못지 않게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즈음에는 오히려 지성인이나 고학력자들이 은사 운동에 더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장례식인지 예배인지 분간이 힘든 전통적 예배에 식상한 성도들이 은사적 예배를 통해 살아있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은 물론 감정적 욕구를 채우고 있다. 전통 신학은 이성과 의지를 중시하고 감성을 경시했지만, 현대 뇌과학은 오히려 이성과 의지가 감성의 노예이며, 사람의 감성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이성과 의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은사적 예배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얼마나 감성을 경시하는 지나닌 이성주의의 늪에 빠져있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앙 인격이나 성령의 열매는 전통적 교인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은사주의자는 물론 전통주의자들도 성령의 열매와 신앙 인격 함양에 대해 모두 겸허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전통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교리가 바르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잘 맺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은사주의자들이 경험과 감정을 중시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바른 전통과 바른 교리가 바른 행위를 낳는가?

 

그러나 바른 전통을 중시하고 바른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앙 인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한국 교계에서 3가지 G인 돈 문제(Gold), 이성 문제(Girl) 및 자기 영광, 세상 영광(Glory)의 분야에서 말썽을 부리는 것은 은사주의자들보다 전통적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더 많다. 그러므로 전통주의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의 신앙 인격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x묻은 뭐가 o은 뭐를 나무라는 격’이다. 자기 편이 하면 로맨스고 반대편이 하면 불륜인가?

 

한국의 간판 교단인 예장OO 의 윤리도덕적인 측면은 어떠한가? 낯 간지러워서 열거조차 하기 민망할 정도이다. 은사주의자들이 배운 것이 없어서 비윤리적인 추태를 벌렸다고 김재성 교수는 비판하는데,12) 그렇다면 잘 배운 장로교 목사들은 왜 이렇게 논문 표절 문제, 여자 문제, 돈 문제로 추태를 벌이는가?

 

그것 뿐인가? 해마다 가을 총회가 되면 돈 선거, 10억 총회장 불법선거, 불법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구약의 제비뽑기를 했다가 다시 총대 선거로 회기하고, 아이티 구제금 수억 원 증발 사건, 노회 임원의 소속 교회 강탈하기 등, 추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2000년에 출간된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보고서에 다르면, 김재성 교수의 비판과는 달리, 은사운동이 비(非)은사운동에 비해 정통성, 도덕성, 경건, 전도에 대한 열정 및 사회적 참여에 대한 기여도가 전반적으로 더 높다고 한다.13)

 

정통성. “은사주의자들 즉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운동가들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실천사항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은사주의자들 대부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데, 이러한 견해는 비은사주의자들보다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확고하다.”

도덕성. “오순절주의자들은 동성애, 혼외 정사 및 음주와 같은 사회적, 도덕적 주제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한다.”

경건. “은사주의자들은 또한 교회 출석, 개인 기도 및 성경 읽기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실천행위 참여율이 비은사주의자들 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다.”

전도에 대한 열정. “10개국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의무감에 있어서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 보다 더 열심이란 사실이다.” 왜?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만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오순절파의 믿음은 특별하다”고 기록한다.

사회적 참여.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운동가들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충분하면 사회적 병폐들이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한 은사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여긴다.”

서평자가 위에서 언급한 3가지 관점에서 볼 때, 김영한의 ‘영적 분별’은 기적계속론자의 영적 분별이 아니라 자신이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기적중지론자의 잘못된 ‘영적 분별’에 불과하다. 그 구체적인 예는, 김영한이 토론토 블레싱 운동을 평가할 때 기적계속론자의 견해 보다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와 함께 기적중지론의 쌍벽을 이루는 행크 해너그라프(Hank Hanegraaff)의 견해에 많이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성 기적중지론자인 '행크 해너그라프'의 견해를 잘못 수용한 김영한

 

행크 해너그라프는 존 맥아더 못지 않은 강성 기적중지론자이며 표면적으로 개혁주의를 내세우고 토론토 블레싱 운동과 같이 경험이나 현상 보다는 성화를 강조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사람이다.

 

행크 해너그라프는 어떤 인물인가?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설립자인 월터 마틴이 죽자 해너그라프는 그의 가족으로부터 CRI 대표직을 불법적으로 강탈했고,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과 번영 복음자들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성도들의 후원금으로 번영 복음자 못지 않은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회사의 공금 유용과 횡령 혐의로 감사 기관의 시정 명령을 받았고, 몇 건의 표절 시비에 연루된 자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불분명한 학력으로 성령 운동에 가담한 존경 받는 신학 박사들을 ‘가짜 부흥 지도자’(Counterfeit Revival leader)라고 서슴없이 정죄하는 자이다.14)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인 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한은 고졸 학력의 해너그라프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고 그의 견해가 자기 입맛에 맞다고 해서 해너그라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김영한은 기적계속론자라고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적 기적중지론자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영적 분별’은 영적 분별이라기 보다는 ‘영적 혼란’이라 할 수 있다.

 

고졸 학력의 행크 해너그라프 보다는 제대로 신학적 소양을 갖춘 석학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필자는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단 정죄나 영적 현상에 대한 주장은 고도의 신학적 실력과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해너그라파의 학력을 언급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학 박사 모두가 기적계속론자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본인 개개인의 영적 경험 및 신앙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신학적 소양을 갖춘 신학자들은 토론토 블레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물론 비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캐나다의 제임스 비벌리(James Beverly) 박사는 초기에는 “토론토 부흥은 기껏해야 극단적이고 괴상한 영적 현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표적, 기사 및 예언을 과장하는 성향이 있는 ‘혼합된 축복’”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에는, 아직도 영적 현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지만, “약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부흥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엄청난 만남을 경험하여, 내적 치유를 받고, 새롭게 된 보상들이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15).

 

고든 콘월 신학교 교수인 리차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 박사도, 조나선 에드워즈라면 쓰러짐이나 웃음의 현상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러브레이스는 에드워즈가 어쩌면 토론토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영적인 자만심과 엘리트 의식을 갖는 유혹에 빠질 것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16) 
 

 

-토론토 블레싱을 축출한 빈야드 교회는 쇠퇴하고 토론토 블레싱 교회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토론토공항교회(당시의 교회 이름)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짐승 소리가 났을 때, 무리하게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변증하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현상이라고 설명했으면 사태가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도 짐승 소리를 성경 구절로 변호하는 것은 억지로 성경을 갖다 붙이는 무리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빈야드의 존 윔버는 그런 현상을 중지하라고 지시했고 토론토교회의 존 아놋 목사가 따르지 않으니까, 존 아놋을 강제로 축출한 것이다. 서평자는 당시에 사태에 익숙했던 빈야드 교회 목사 한 명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질문했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왜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가? 불복하면 조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내보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대 입장에서는 존 윔버가 존 아놋을 시기해서 잘랐다는 주장도 있다.

 

존 윔버 생전에 여러 선지자들이 영적 부흥이 온다고 예언했지만 무위로 돌아간 사건이 더러 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하나님이 영적 부흥을 주시는데 ‘존과 캐롤’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주신다고 예언했다. 공교롭게도 존 윔버(John Wimber)의 아내 이름도 캐롤 윔버(Carol Wimber)였고 존 아놋(John Arnot)의 아내 이름도 캐롤 아놋(Carol Arnot)이었다. 그런데 예언은 맞았는데 존 & 캐롤 ‘윔버’가 아니라 존 & 캐롤 ‘아놋’에게 부흥이 임했다. 그래서 존 윔버가 시기해서 트집을 잡으면서 존 아놋을 쫓아냈는데 ‘이는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다’는 말도 무성했다.

 

그 이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존 윔버 당시 일만 교회에 육박하던 빈야드 교회 연합은 윔버 사후에 교세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지금은 존재감도 없을 정도이지만, 축출 당한 토론토공항교회는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소한 스캔들 하나 없이 좋은 열매를 맺으면서 양적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보수적인 『크리스채니티 투데이』(Chrischanity Today) 잡지도 토론토 블레싱 20 주년 기념 기고에서 토론토 블레싱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때 신랄하게 비판하고 반대했던 캐나다의 제임스 비벌리(James Beverly)교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7)
 

 

-쓰러지는 현상

 

물론 김영한도 은사적 예배의 특징의 상당 부분을 수용한다. 그러나 토론토 블레싱에서와 같이 쓰러지고 광란하는 현상은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다. 필자가 알기에 서양의 기적계속론적 신학자들 중에 쓰러지는 현상을 비판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기적계속론자를 표방하는 김영한은 유독 이런 현상에 대해 거부 반응이 강하다.

 

집회 때 쓰러지고 신체적 감정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토론토 블레싱 운동' 물론 한때 비판자들이 쓰러지는 현상은 ‘빈야드 현상’이라 부를 정도로 빈야드의 집회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난 현상들이다. 그런데 김영한은 “존 윔버가 토론토 블레싱 운동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감각적 현상을 인정하지 않고 관계를 단절한 것은 올바른 결단이었다고 본다”(p. 464)고 말하는데 이런 주장은 앞뒤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주요 쟁점(issue)이 된 것은 쓰러짐과 이에 동반된 신체적, 감정적 현상들이 아니라 짐승 소리에 대한 견해 차이였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쓰러지는 현상을 한때는 '빈야드 현상'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신사도 현상'이라고 싸잡아 비판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요한 웨슬리 현상', '조지 휫필드 현상', '조나선 에드워즈 현상' 및 '마틴 로이드 존스 현상'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주도하거나 목격한 집회에서 이런 현상들은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한은 조나선 에드워즈나 마틴 로이드 존스를 수시로 인용하면서도 이 두 사람이 독특하게도 쓰러지는 현상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각종 영적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좋은 것 보다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은 현상만 부각시키는 행크 해너그라프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김영한의 ‘영적 분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런 것은 영적 분별이 아니라 영적 무분별이다.18)
 

 

6. 능력 전수가 잘못된 것인가?(p. 444 이하)

 

필자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인 정이철이나 이인규의 주장을 비판한 적이 있다. 필자가 알기에 요즈음 제대로 된 기적계속론자들은 능력 전수, 능력 전이를 장려하고 있다. 그런데 기적계속론자라고 자처하는 김영한은 능력 전수에 대해 정이철이나 여타 기적중지론자들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주제에 대해 『글로리아타임스』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다.19) 자세한 내용은 그곳을 참조하고, 여기서는 핵심 주제만 간단히 소개한다.

 

김영한의 오류가 무엇인가?

 

첫째, 김영한은 “그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을 하나의 도구나 사역자의 시종(侍從)으로 전락시키며,전수자를 신격화시키는 위험성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와 권능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권능과 은사는 성령님이 주권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충만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p. 444)라고 경고한다.

 

김영한의 주장대로라면, 다음의 구절에 의해,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도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을 하나의 도구나 사역자의 시종으로 전락시킨 자들인가?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4).
“이에 두 사도(베드로와 요한)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그러면 김영한은 그런 것은 사도들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라고 할 것인가?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도들을 한껏 치켜세워놓고 자기들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초자연적 은사를 구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평자가보기에 사도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대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

 

서평자도 능력 전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사와 능력을 전이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서평자 자신이 신격화되고 성령을 도구로 전락시켰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비천한 자를 능력의 도구로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부족한 인간이란 통로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오남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남용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역자를 한 통속으로 모든 것은 ‘성급하고 지나친 일반화’이다.
 

 

필자가 보기에 은사자들의 교만과 위험성과 오남용 못지 않게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교만과 위험성과 오남용을 많이 목격한다. 김영한도 제발 이런 교만과 위험성과 오남용에서 좀 벗어나기를 바란다. 아무데나 개혁주의 간판만 내건다고 해서 무사 통과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김영한과 같은 비판자들은 걸핏하면 ‘이래서 위험하다, 저래서 위험하다’고 말한다. 기적중지론자의 대표적인 변명이다. 이런 주장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요 상아탑에 안주한 학자들의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김영한의 주장 대로 라면 자동차가 위험하니 자건거를 타야 하고, 개스도 위험하니 연탄을 써야 하고, 오지의 선교도 위험하니 사람이 많은 곳에서나 선교해야 하는가?

 

서평자가 보기에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유럽 교회를 보라. 기적중지론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이제는 건물과 신학과 역사만 남았을 뿐 교회가 공동화된 지가 오래다. 이 얼마나 위험한 신학들인가? 마귀들이 아주 선호하는 신학들이 아닌가? 김영한 같은 신학자들이 초자연적 은사의 순기능은 소홀히 하고 위험성을 부각시키는 만큼 마귀의 무리들은 신이 나서 축제를 벌릴 것이다.
 

 

둘째, 김영한은 “성령의 은사와 권능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권능과 은사는 성령님이 주권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충만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김영한과 같은 비판자들은 왜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사람의 자유의지는 말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간절히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라)12:3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간절히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되)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은 은사를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시지만 많은 경우, 간절히 구하거나 안수를 통해 나누어주시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성령이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는 구절은 강조하면서 사람이 간절히 사모하여 구하거나 안수를 통해 나누어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비판자들은 걸핏하면 말씀 중심, 성경 중심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성경 중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학 중심, 경험 중심이 아니라 무경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이처럼 자기들은 논리적 신학 중심, 무경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은사주의자들 경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은사주의자들이 더 잘 나서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모하여 구하고 안수도 받고 하니 잘 받는 것이다. 누가 더 성경적인가?
 

 

마지막으로, 김영한은 “성령은 사역자가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유출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역자가 자기 마음대로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얼른 들으면 옳은 주장 같지만 성경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신학이 만든 주장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정관사+프뉴마(성령)무관사+프뉴마를 구분한다. 전자는 인격적 성령(Holy Spirit as a Person)을 후자는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을 가리킬 때 표현하는 방식이다.

 

고든 피(Goredon D. Fee)는 성령의 사역 형태를 3가지로 분류한다.20)인격적 성령(The Holy Spirit as Person),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 as God’s Presence) 및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 God’s Empowering Presence)이다. 인격적인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임재로서의 성령은 ‘내주하시는 성령’이고, 성령의 임재로서의 능력은 ‘일하시는 성령’이다.

 

불린거(E.W.Bullinger)는, 신약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모든 단어를 분석하였다. 특히 그는 정관사+프뉴마(호 프뉴마)무관사 프뉴마(프뉴마)로 구분하는데 후자의 경우 ‘일하시는 성령’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도행전(행 1:5; 2:4 등)이나 고린도전서(고전 12:7-11; 14:12)에서는 ‘무관사 프뉴마’가 ‘일하시는 성령’으로 사용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1)

 

그러므로 성령의 인격성만 강조하고 성령의 사역적인 면은 무시하는 자들은 건전한 경험도 없고 성경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7. 중세의 영성과 관상기도에 대한 김영한의 견해(pp. 143-45, 158이하)

 

관상기도를, 예장 통합은 인정하지만 아직도 예장 합동이나 예장 합신 등은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김영한은 어떤 개혁주의 신학을 전공했는지 신학의 족보도 없이 이런 것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만 실천적인 측면인 수동적 관상능동적 관상의 차이점에 대해서만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pp. 161-65), 개혁주의 관상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수동적 관상을 인정하지만 기도자가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능동적 관상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처럼 몰고 간다(p. 164). 김영한의 이런 주장은 관상기도에 대한 핵심적인 신학 쟁점을 피해가는 주장이다.

 

필자가 알기에, 관상기도의 신학적 주요 쟁점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범신론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합일과 성령 안에서 하나됨, 신화(神化. Deification)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존재론적 변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금욕주의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성화 등인데 김영한은 반대자들이 내세우는 이런 중요한 신학적 쟁점 사항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물론 서평자는 관상기도를 수용하지만 필자가 위에서 지적한 신학적 내용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김영한은 기껏 신학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이 '수동적 성찰'은 수용하고 '능동적 성찰'은 비판하는 입장이다. 관상 기도 비판자들은 오히려 수동적 관상을 더 비판한다.

 

서평자는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수동적 관상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능동적 관상을 통해, 김영한이 상상만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죄를 회개한 후 상상을 통해 오히려 쉽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수동적 관상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내용은 신사도 운동에 대한 김영한의 평가인데 다루어야 할 신학적 주제가 너무 많으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결론

 

결론적으로, 김영한의 『영적 분별』은 오히려 영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책이다.

 

첫째, 김영한은 기적중지론의 대부인 칼뱅(칼빈), 마르틴 루터, 조나선 에드워즈 및 존 스토트 등을 기적계속론자로 잘못 분류한다.

그런 식으로 분류하면 대표적인 기적중지론자인 리차드 개핀이나 존 맥아더도 기적계속론자이다. 왜냐하면 이들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기적을 행하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기적계속론자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현재 은사운동에서 일어나는 방언, 예언, 신유 및 축사 등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존 맥아더는 모두가 마귀 짓이라고 규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칼뱅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배은망덕 때문이고 필요하면 기적을 행하는 전도자를 일으켜서 교회 개혁을 하실 수 있다고 말은 했지만 기적은 사도들의 죽음과 성경의 완성으로 인해 중지되었고, 방언, 예언 신유 및 축사를 ‘비기적화’로 해석하여 성경 해석조차 비기적적으로 해석하게 하고,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하나님(God)이 아니라 이방신(god)에게 하는 의미없는 지껄임’(고전 으로 해석하여 존 맥아더와 한국의 이창모가 현대의 방언 ‘가짜 방언’, ‘마귀 방언’이라고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둘째, 김영한은 표면적으로 자신은 기적계속론자라고 천명하지만 구체적 사역에 있어서는 강성 기적중지론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존 맥아더(신유, 쓰러지는 현상), 행크 해너그라프(토론토 블레싱 운동과 쓰러지는 현상) 및 정이철(토론토 블레싱 운동, 능력 전수와 쓰러지는 현상)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영한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분야에서 존 맥아더, 행크 해너그라프 및 정이철의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으로, 김영한은 물론 대다수 기적중지론자들은 ‘은사와 열매’를 대조시키지만 '교리와 열매'도 대조시켜야 한다.

장로교인이 70%를 점유하는 장로교 대국 한국에서 열매 부족으로 인해 말썽을 부리는 것은 비은사적 장로교 목사나 교인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도 기적중지론자들은 ‘교리와 열매’는 대조시키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은사와 열매’를 대조시킨다. 비은사적 신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개인 잘못’으로 치부하면서 은사적 신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은사운동과 결부시키는 것은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인간적이고 정실적([情實的)인 판단에 불과하다. 사람은 누구나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때문이다.

 

결국 김영한의 『영적 분별』은 영적 분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혼란을 조장한다. 특별한 신학적 성찰도 없고 인터넷만 검색하면 대부분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수록하여 새로운 정보도 별로 없는 책이다. 기적계속론자라고 믿고 기대하여 이 책을 구입하여 읽었다가는 오히려 실망만 하게 될 책이다.  *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후주(Endnotes) :

1. 김영한, “오늘날 영적 현상에 대한 분별 기준” 『리포르만다』.  http://reformanda.co.kr/xe/index.php?mid=Archive&page=8&document_srl=40404 (2016년5월27일).

2. Jonathan Edwards, “Love more excellent than the extraordinary gifts of the Spirit.”  http://www.biblebb.com/files/edwards/charity2.htm; 구요한,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 p. 89.

3. Arnold Dallimore, George Whitefield: The life and times of the great evangelist of the eighteent-century revival, vol 1,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0, p. 348; 구요한, 같은 책.

4.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p. 117.

5. D. M. Llyod-Jones , Revival. 『부흥』,p. 180.

6. 김영한, “성령과 성령사.” 『제1회 HTM <성령과 하나님 나라> 심포지엄』. 2016, p. 20; D. M. Lloyd-Jones, Prove All Things; 『성령의 주권적 사역』, p. 170.

7. Martin Luther, Commentary on Galatians 4, Trans. by Theodore Graebner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1949), 150-172; Nathan Busenit, “What Cessationism Is Not.”; 구요한, 같은 책, p. 69.

8. J. Rodman Williams, "Excursus: On the Cessation of Miracles", Renewal Theology Vol. I. p. 159; 구요한, 같은 책, p. 70.

9. 자세한 내용은 구요한, 같은 책, pp. 59-82, 특히 pp. 70-82를 보라.

10. 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pp. 257-60, 62-63; Norman Geisler, Signs and Wonders, Tyndale House, 1984; Edward N. Gross, Miracles, Demons & Spiritual Warfare, Baker, 1990;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 128에서 재인용; 구요한, 같은 책, pp. 98-102를 대조하라.

11. Christian A. Schwartz, Natural Church Development, Carol Stream, IL: Church Smart Resourcez, 1996, p. 23; C. Peter Wagner, This Changes Everything. 2001. Ventura, CA: Regal, p. 44.

12. 김재성, 『교회를 허무는 두 대적』, 킹덤북스, 2013.

13. Pew Research Center, “Spirit and Power: A 10-Country Survey of Pentecostals” (Washington DC: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2006). http://www.pewforum.org/2006/10/05/spirit-and-power/

14. 자세한 내용은 『글로리아타임스』의 “행크 해너그라프의 빈야드와 가짜 부흥운동 비판”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6 및 관련 기사, 구요한, 같은 책, pp. 342-49를 참조하라.

15. “토론토 블레싱’의 불길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글로리아타임스』 (2015.3.20).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32; orna Dueck, “The Enduring Revival,” Christianity Today (March. 7, 2014).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14/march-web-only/enduring-revival.html; 윌리엄 데알테가,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 pp. 417-18; James Beverly, Holy Laughter and the Toronto Blessing, Zondervan, 1995.

16. 윌리엄 데알테가,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 pp. 418-19; Richard F. Lovelace, “The Surprising Works of God,”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1, 1995).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1995/september1/5ta028.html.

17. “토론토 블레싱의 불길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글로리아 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32

18. 쓰러지는 현상과 거룩한 웃음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글로리아타임스』(thegloriatimes.org) 우측 배너 중 [쓰러지는 현상 변호]와 [거룩한 웃음 변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19. “[성경 Q & A]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3

20.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Hendrickon Publishers, 1994, pp. 5-9.

21. E.W. Bullinger, Word Studies on the Holy Spirit, 8th ed.: Kregel Academic & Professional, 1979;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구요한, 같은 책, pp. 156-57 참조.

22. 관상기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 우측 배너 중 “관상기도 변호”를 보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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