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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간증③] 하나님을 즐거워하라(2)즐거움은 삶과 신앙생활의 원동력이다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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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2  22: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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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간증③]

하나님을 즐거워하라(2)

-즐거움은 삶과 신앙생활의 원동력이다-

   
 

정상 체험을 자주하고 마음 훈련을 하면서 필자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육신의 본능적인 일이든, 정신적인 일이든, 영적인 일이든-즐거움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먹는 것, 자는 것, 배설 하는 것 모두에 즐거움과 쾌감이 따른다. 뇌과학자들은 즐겁게 하는 일이 성과도 좋다고 한다.

즐거움을 추구하려면 뭔가에 ‘몰입’해야 한다. 몰입(Flow)이란 개념의 창시자인 칙센트미하이에 의하면, 몰입이란 어떤 행위에 깊게 몰두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몰입은 스키를 탈 때나, 악기를 연주할 때나, 글을 쓸 때나, TV를 재미있게 볼 때와 같이 여러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다. 몰입할 때 지고의 행복감을 누리고, 집중력 및 창의력이 고도로 개발된다. 몰입 활동의 최우선 기능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연극, 미술, 가장 행렬, 종교의식, 운동 등이 좋은 예이다.

어느 외과의사의 말. “너무나 즐거운 일이어서 내가 꼭 해야 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계속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체스(서양 장기) 선수는 말했다. “행복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나의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한 무용수는 말한다. “마음은 이완되고 편안함이 나에게 다가옵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어찌나 강렬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인지! 세계를 품기 위해 내 정신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요.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한 힘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몰입 체험을 할 때 집중력이 강해진다.

유명한 해양 항해가의 말. “항해를 할 때면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잊는다. 넘실거리는 바다와 보트의 움직임만이 중요할 뿐이며 다른 모든 것은 제쳐두게 된다.”

어느 등산가의 말. “당신이 원하는 것은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음이 모아지면 자아는 없어지고 일이 저절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집중은 더 잘 된다.”

몰입 체험을 할 때 지혜와 창조가 일어난다. 서울대 황농문 교수는 몰입 체험을 통한 지혜를 통해 재료 공학계의 50년 동안의 난제를 풀기도 했다.

몰입을 통해 최적 경험을 누리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어떤 것이 좋아서 몰입할 때 심리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보다 훨씬 짧아서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지만 지겹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할 때는 심리적 시간이 물리적 시간 보다 길어서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몰입의 특징은 그것이 지속하는 동안 인생의 불쾌한 모습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일에 열중하면 다른 일을 처리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몰입 상태를 경험할 때의 집중은-명확한 목표와 즉각적인 피드백과 함께-의식에 질서를 제공하여 즐거운 마음 상태를 제공한다. 몰입을 제대로 하면 처음에는 자아감을 잃어버리지만 경험한 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이 모순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몰입 체험은 양날의 칼

그러나 몰입 체험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다. 몰입에는 좋은 몰입과 나쁜 몰입이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깨우지 않고 보석을 들고 나오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당장 그것을 하겠다.”

대부분의 청소년 비행들-자동차 절도, 파괴행위, 일상의 난폭한 행동 등-은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몰입 경험을 하고자 하는 필요에 의해 행해진다. 사회에서 의미 있는 도전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또한 그런 도전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폭력과 범죄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을 예상해야 한다.

몰입 활동들이 마음의 질서를 가져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만 잘못 이용되면 악의 도구가 되어 그런 몰입 행위에 중독되면 인생을 망치고 사회를 망치는 흉기가 될 수 있으므로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 경험은 나와 대상이 혼연일체가 될 때 즐거움이 가중되고 집중력이 향상되고 섬광 같은 지혜가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름대로 즐거움을 누리면서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대상을 찾는 존재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런 환경에 처하더라도 심령의 낙이 있고 마음을 쏟아놓고 의지할 대상이 있는 한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어주신 놀라운 본성이자 축복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과 보람과 의미를 누리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이 달라진다.
 

몰입의 종류
 

필자는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몰입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았다.

나와 그것 :

-도박, 마약, 폭력, 도벽, 음주, 흡연 등.
-먹기, 섹스, 수면, 배설, 명예, 쇼핑, 돈(재산)
- TV시청, (인터넷) 게임, 예술 및 스포츠 관람, 일,
-공부, 학문, 연구, 예술 행위, 스포츠 행위 등.

나와 사람 :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교제. 가족, 연인, 친구 등.

나와 신(神) :
불교, 마음수련, 명상훈련, 쿤달리니 요가, 참선, 뉴에이지 운동 등

나와 하나님 :
지고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새로운 영적 깨달음과 지혜가 수시로 임한다.

이러한 분류에 의하면, 도박, 마약과 같은 부정적인 것 외에 다른 것들은 나름대로 인생에서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그러나 위로 갈수록 몰입의 정도가 본능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으로 좀 더 고상해 짐을 알 수 있다.

어떤 목회자는 요즈음은 세상에는 재미 거리가 워낙 많아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를 않는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왜 교회가 세상 보다 재미 거리를 주지 못하는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재미인 하나님을 만나는 재미와 즐거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재미를 오히려 천박하고 신비주의자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필자도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보았고 누릴 만큼 누려 보았지만 피조물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은 한계가 있다.

언젠가 꼬마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둘째 꼬마가 모터로 날아가는 비행기-값이 꽤 나가는 것이었다-에 한 번 필이 꽂히더니 관광하는 내내 사달라고 징징대었다. 달래고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여행 기분을 잡치지 않으려고 큰 맘 먹고 사주었다. 꼬마는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넣자 말자 희열에 넘쳤다. 이렇게 만져보고 저렇게 만져보고 날려도 보면서 바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보니 비행기를 거덜 떠 보지도 않았다.

필자가 물었다.

“야, 너 그것 없으면 죽을 것 같더니 왜 이제는 갖고 놀지 않아?”
“몇 번 갖고 놀고 났더니 재미가 없어졌어요."

어른 들이라고 다를까? 원하는 집, 원하는 자동차, 원하는 세상 성공, 원하는 보석을 가져보았자 기쁨과 즐거움은 잠시이고 그 다음에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더 큰 자극을 위해 일을 저지른다. 도박과 마약과 이성과의 주지육림에 빠지고 마침내는? 이런 것을 미리 깨달은 자들은 명상이나 득도(得道)의 길로 들어선다. 세상의 많은 심리학자나 명상가들은 나와 대상이 하나되어 누리는 지고의 즐거움을 사람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필자는 위기 체험을 자주 하고 나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득도와 명상의 목표가 바로 우주나 자연과 하나가 되어-몰입에 빠져서-말할 수 없는 기쁨과 무아지경을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에 비하면 신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이야 말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유익하고 값진 바람직한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통적 교회에서는 이런 체험을 신비주의라고 터부시 하지만 은사주의 교회들은 신자들에게 이런 체험을 자주 하게 해주니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조나선 에드워즈의 '종교적 감정'

미국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일찌기 이런 체험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에드워즈는 특별한 시기에 성령이 베푼 독특하고 경이로운 체험을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 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마치 자신이 하늘에까지 올라가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경우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는데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들이 광신적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에드워즈)는 내 뇌가 그런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것이 정신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러한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으로 다 사로잡힐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저· 서문강 역,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 『청교도 신앙』, 생명의 말씀사, 1992, 376-77).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에 대한 논문』 (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에서, 감정 또는 정서(Affections)와 열광 또는 흥분(passion)을 구분한다. 감정은 사람의 의지의 생동력 있고 활발한 활동들을 말하는 반면, 열광은 갑작스러우며 생각이 마비되는 폭력적인 동물적인 활력을 말한다.

칼뱅을 위시한 개혁주의자들은 이성과 의지는 중시하고 감정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해 왔다. 이런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 전통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대의 뇌과학과 심신의학은 이성 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속속 밝히고 있다.

에드워즈는 일찌감치 감정의 중요성을 간파한 위대한 신학자이다. 에드워즈는 "진정한 종교는 상당부분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인 감정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이 없는 사람은 종교라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같은 책, 238).

에드워즈는 영적 지식을 ‘맛보는 감각’(sensation of tasting)에 자주 비유했다.

마음의 지각은 거룩한 맛(holy taste) 또는 마음의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탁월하고 신적인 것을 영적으로 맛보고 즐기는 것이다(it is a spiritual taste and relish of what is excellent and divine).

이런 지식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며 “~에 관한 지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꿀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의 지식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지식이다.

이런 점에서 마음의 지식은 생각하고 파악할 뿐만 아니라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맛보기 비유에서 인간의 기분, 느낌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믿음이란 지성과 감성과 의지적 행동과의 친밀한 연합이다. 마음의 지식의 본질은 살아서 행동하는 지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은 사랑과 사모의 태도에 의해 어떤 대상과 친밀하게 맺어진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믿음의 행동은 믿음의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에 종속되며, 성화된 순종의 행위가 믿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모든 체험을 다 믿지 말고 다음 5가지로 분별하라고 말한다.

1.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2. 그것이 죄악적이고 세상적이고 사탄적인 것을 대적하는가?
3.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귀중하게 여기게 하는가?
4. 그것이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확신하게 하는가?
5.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진시키는가?

필자의 황홀 체험은 에드워즈가 말한 5가지를 정확하게 충족시킨다. 이에 더하여 보통 체험이 주지 못하는 영적 유익도 많이 준다.
 

정상 체험이 주는 유익 

정상 체험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첫째, 정상 체험은 또 다른 회심 체험이다

이 사실은, 안토니 후크마가 잘 지적했듯, 진정한 신자라도 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듭나는 급격한 회심 체험에 버금가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Anthony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smans Publishing Co., 1989; 『개혁주의 구원론』).

성경의 다윗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윗은 비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삼상 13:14),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다. 너무나 끔찍한 죄로 인해 그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처절하게 회개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9, 10, 17).

불신자나 신자의 급격한 회심 체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 자주 일어나는 현이다.
 

둘째, 정상 체험을 통해 신앙이 급성장 한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이루어 가는 성화의 과정을 손전등을 들고 어두운 밤에 길을 걸어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정상 체험은 고성능 조명탄이 대낮같이 환하게 밝힌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정상 체험을 통해 희미하고 어렴풋하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 실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진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밑바닥이 없는 죄의 깊이를 바라보며 통곡하고 동시에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감격으로 인해 회개와 기쁨의 눈물이 뒤범벅이 된다.

정상 체험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 재미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고 열심을 낸다. 필자는 보통 사람이 10년 걸려서 이룰 신앙을 이런 체험을 통해 1년 내에 이루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또 어떤 신자는 신앙 생활을 한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복음의 핵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하나님과 영적인 실상에 대한 이해, 말씀에 대한 이해, 헌신과 열심을 볼 때 십여 년 신앙 생활을 한 사람 못지 않았다. 
 

셋째, 정상 체험을 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한다. 모이면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신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간증하기에 바쁘다.

정상 체험을 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예배를 사모한다.
이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즐겁다. 보통의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가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지만 이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일주일에 여러 번의 모임마다 빠지지 않는다. 이들은 예배를 통해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배를 즐기기 때문이다. 예배가 순서와 순서의 연속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기 때문이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래간만에 만났을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담을 즐기는 것처럼 이들은 예배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즐긴다. 이러한 체험의 연속을 통해 신자들은 영적인 삶을 즐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필자는 왜 좋지 않은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여가와 노동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일만 하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은 바보가 되기 쉽다’는 서양 속담도 있다.

일만 하고 여가를 갖지 않으면 마침내 탈진하여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교회의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심방하는 일들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신앙 생활을 하면 금방 지쳐 버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일상 생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원 등을 찾아 영적으로 새롭게 충전 받기도 한다.

정상 체험이야 말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영적 충전이다.
정상 체험을 통해 우리는 잠시 지상의 것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하늘의 신령한 것을 강도 높게 체험하고 새로운 영적 충전을 받는다. 정상의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골짜기에 내려 왔을 때 우리는 더욱 기쁘고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서 며칠간 휴양지에 여행 갔다 온 사람과 같다. 물론 일에 피해가 갈 정도로 무리하게 장기간 휴식을 떠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적당한 휴식은 일에 새로운 활력을 더해 준다.

정상 체험은 하나님의 것을 간절하게 사모하게 만든다.
이때 주의해야 할 사실은 정상 체험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말씀 공부에 소홀히 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물론 정상 체험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성경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고 나무를 사르는 불처럼 강하게 체험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정상 체험을 강조하다 보면 말씀에 소홀히 하기 쉽다.

이런 경우, 정상 체험은 약이 되기도 하고 병이 되기도 한다. 정상 체험 자체가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신기한 체험만을 추구하다가 일반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변화와 성숙을 위한 말씀 훈련에 소홀히 하다 보면 나중에는 건데기 없는 국물만 남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의 연륜이 짧거나 신앙의 대(代)가 짧은 사람일수록 이런 체험에 몰두하다가 결국은 열매 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특히 은사나 정상 체험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은 이런 체험을 많이 한 신자들의 마음 밭은 잘 경작되어 있으므로 적절한 때에 ‘말씀의 씨앗’-성경공부, 제자훈련, 내적치유, 회개훈련 등-을 제대로 뿌려서 신앙 성숙의 열매도 동시에 맺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이런 체험만 강조하면 교인들이 일정한 시기를 주기로 물갈이 되거나 성장이 답보상태에 머물기도 한다. 정상 체험이 아무리 좋아도 성숙이 없으면 본인들 자신도 정상 체험 자체의 효용성을 회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넷째, 정상 체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 

신앙 생활에 지쳐 있고 하나님 의 사역에 회의를 느낄 때 하나님께서는 가끔 정상 체험을 통해 강한 확신과 위로와 평강을 주신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죄 지은 자를 책망하고 회개케 하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자녀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체험을 통해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너무나 달콤하고 황홀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사도들이 대제사장 무리들의 핍박으로 두려움에 떨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체험으로 그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담대함을 주셨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 . . . 주여 이제도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 . . .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3, 24, 29, 31).

더군다나 세상살이에 지치고 피곤해 있을 때 우리 신랑 예수는 성령을 통해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강과 사랑을 주십니다.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6).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롬 14:17).

거듭나서 예수를 믿는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지만 정상 체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체험은 보다 직접적이고 강렬하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하).

이전의 사막의 수도승들이나 영성가들도 하나님을 만나는 뜨거운 체험이 활력이 되어 힘든 금욕의 삶을 이겨냈다고 한다. 인간의 노력을 ‘구원’-여기서는 성화-을 이루려는 금욕적 시도는 잘못되었지만 어떻든 하나님을 만나는 뜨거움을 통해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었던 것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오늘날 오지나 험지에서 선교를 하면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는 기독교 그룹이 바로 은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체험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다.
 

다섯째, 정상 체험을 통해 사역을 위한 능력을 받는다.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폭발적인 증인이 된다(행 1:8; 4:31 등).

-오랜 세월 동안 목사였지만 구원의 확신조차 없었던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 street)에서 성령으로 인해 ‘가슴이 따뜻해지는 회심 체험’을 하고,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 가진 애찬식에서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한 후, 영국을 흔드는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다.

-청교도인인 존 플라벨은 어느 날, 예수를 환상으로 본 한 날의 체험을 통해 그가 이전에 읽었던 모든 책을 통해서 안 것보다도 천국의 생활을 더 잘 이해했다고 고백했다.

-미국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을 거닐다가 말에서 내려 걷던 중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임재에 잠겨서 그분의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수하고 달콤한 은혜와 사랑을 한 시간 동안 즐기다가 너무나 큰 은혜에 겨워 큰 소리로 울면서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복음 전도자인 D.L. 무디가 뉴욕 시에서 보낸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이 너무나 강력하게 임하여 거두어 가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미국을 흔드는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다.

이처럼 정상 체험은 제2의 회심 체험, 제2의 축복 체험, 황홀한 신비 체험, 영적 충전을 받는 체험이자 사역을 위한 외적 능력과 은사를 받는 능력 체험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정상 체험은 처음 사랑을 유지해 준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며 핍박과 고난, 좌절과 낙심으로 인해 주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식어가기 쉽다. 교리 바르고 인내는 잘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계 2:1-7), 전통은 바르지만 행위가 따르지 못하는 사데 교회(계 3:1-6), 눈에 보이는 것은 풍성하지만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는 주님의 책망을 받은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의 교회들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죽은 정통의 교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마르고 냉랭한 죽은 정통의 신앙에 불을 지피는 최고의 대안은 정상 체험을 자주, 많이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전인격적으로 알고 교제하면 영적 메마름과 냉랭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가지 오해 

요즈음 유튜브(YouTube)에 보면, 천국 체험, 천사 체험 및 신기한 체험을 한 내용들이 많이 올라온다. 이슬람, 유대인 등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회심한 간증도 많다. 집회 중에 하늘에서 금가루가 내리거나 보석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새 치아가 생기는 것은 물론 팔이 생기고, 다리가 생기고, 내장이 생기고, 눈알이 생기고. 하나님의 영광(쉐키나 구름)이 임하는 기적도 많이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신앙생활에 열심인 경우가 많다. 이런 강렬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예수를 담대하게 전하면서 전도를 잘 한다. 이 때문에 은사운동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 보다 지속적으로 성장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바로 위에서 필자가 제시한 것과 같은 신비 체험의 순 기능들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사실은 이런 체험을 자주, 많이 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때문에 자신은 ‘다 되었다’(영적으로 성숙했다)고 착각하여 회개생활을 등한 시 하기 쉽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다. 필자는 누구보다 이런 체험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이런 체험 자체가 신앙적 성숙이나 성령의 열매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은사주의자들 내에서도 요즈음에는 회개와 열매 맺는 생활 없이 신비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과 신비 체험은 물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행 9:3-7), 삼층천에 올라가서 천국의 비밀을 체험했지만(고후 (고후 12:1-5),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여기고(딤전 1:15), 열심히 사역하지만 버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고전 9:27), 매일 죽은 훈련을 하는 사도 바울을 본 받아야 한다(고전 15:31).
 

한편, 전통주의자들은 이런 체험을 자주하는 은사주의자들이 기대했던 신앙 인격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한다고 해서 이런 체험 자체를 부인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체험은 감성적 충만함과 사역을 위한 능력을 주는 것이지 신앙인격의 성숙과는 항상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체험을 부인한다면 전통주의자들의 교리나 전통도 부인되어야 한다. 바른 교리와 바른 전통의 고백이 신앙 인격과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강렬한 체험이 없으면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약하고 세상의 지식과 학문, 인본주의 사상에 쉽게 삼켜버린다.

표적과 기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은 대부분이 이런 신비 체험을 무시하고 학문을 중시하는 학자이거나 학자형들이다. 이들이 신비 체험이 주는 강렬한 황홀감과 현세에서 누리는 내세의 능력-각종 신비 체험들-을 무시하고 신학과 교회를 지배하는 동안 교회는 서서히 죽어간 것이다.

이는 마치 결혼한 남녀가 부부관계를 통한 강렬한 사랑 체험이 없이 각자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맡은 기능에만 충실하지만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청교도들도 합일 체험의 최고의 형태는 신자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되면서 누리는 기쁨과 황홀 체험이고 부부 관계는 그러한 관계의 지상적 예표라고 생각했다.
 

탐 쉬안다는 청교도들의 관상적 삶을 연구한 『영혼의 재창조: 청교도주의의 관상적 신비적 경건』에서 연구 대상 청교도인 앰브로즈 만큼 아가서의 성애적(性愛的) 표현을 황홀(ravishment)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황홀’이란 단어는 청교도들이 성령 안에서 신자와 하나님이 하나 되는 ‘영적 결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주된 단어였다. 하나님 안의 기쁨과 즐거움은 천국의 것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필자도 신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강렬한 체험의 지상적 표현은 부부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통해 경험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정상 체험의 시기 

언제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는가?

정상 체험은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지만(행 10:44-48), 회심 체험 이후에 오는 경우가 많다(행 2:4; 4:31 등). 요한 웨슬리, D. L. 무디, R. A. 토레이 등도 회심 이후에 정상 체험과 같은 성령 체험을 하였다.

정상 체험은 또한 즉각적이고 돌발적이고 순간적이고 간헐적이다(예를 들어, 행 2:1-4; 4:8, 31; 10:44 등). 여기서 성령 체험을 말하는 동사는 모두 부정 과거형이다. 헬라어의 부정 과거형은 어떤 사건이 순간적이고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체험은 사람이 기대하거나 예측한 것이라기 보다는 갑자기 돌발적으로 일어나서-물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지만-잠시 지속되다가 곧 사라지지만 반복이 가능한 간헐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필자는 개인의 경건 시간은 물론 공중 예배 시에도 돌발적이고 갑작스러운 성령 체험을 사모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필자를 가장 낭패스럽게 만드는 경우는 고속도로에서 운전할 때이다. 주위에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큰 소리로 녹음 설교나 찬송 테이프를 틀어 놓고 듣기도 하고, 혼자 큰 소리로 통성 기도나 방언 기도를 하거나 방언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갑자기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회개와 기쁨의 눈물이 솟아나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워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은혜를 실컷 즐긴다. 비록 목적지에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은가?
 

맺는 말 

이런 체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특히 현대사회는 치열한 생존 경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과 좌절, 세속적 재미와 각종 중독의 범람으로 인해 교회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비례하여 각종 사이비 종교들이 제 목소리를 더 강하게 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져버리고 우상숭배에 몰두할 때 주변의 나라들이 득세하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과 똑 같은 모습이다. 이런 때에 모든 신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전파하면 이 모든 문제들을 한 방에 날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 즉 모든 남녀노소, 신분,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믿고 사모하고 구하는 자는 모두 성령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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