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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간증②] 하나님을 즐거워하라(1)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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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15  22: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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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간증②]

“하나님을 즐거워하라”(1)
(Enjoy God)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소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공부할 때 제일 큰 문제가 생활비였다. 한 달에 기본 생활비의 10~15퍼센트 정도가 모자랐다. 저축해 놓은 것도 없고 여타 수입원도 없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나깨나 ‘모자라는 돈’에 대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하나님을 믿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면서도 돈 걱정을 할 정도로 약한 나의 믿음을 스스로 탓해 보기도 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고난에 대해 하신 말씀을 종이에 적고 계속 큰 소리로 읽기도 하고 암송도 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여러 다른 말씀들도 보았지만 시험과 고통이 올 때 괴로워하거나 걱정하라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고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뿐이었다. 말씀을 읽고 말씀에 의지하여 고난 자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도 해보고 의지력도 발동해 보았지만 별로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째.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시험’에 관한 말씀을 크게 읽거나 암송했다. 그런데 갑자기,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봄볕처럼 따스하고, 산골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상쾌하고, 꿀맛처럼 달콤하고, 장미꽃처럼 향기로운 은혜가 물밀듯이 나를 엄습했다.

나도 모르게 전신이 붕~ 뜨는 기분과 함께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내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흠모하고 간구하는 애틋한 사랑과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찼다. 모자라는 돈에 대한 염려와 걱정은 태양 앞의 안개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엇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사로 잡혀있는데 피조된 그 무엇이 부럽단 말인가? 세상 말로 ‘헬렐레~’하고 즐거울 따름이었다. 거리를 걸어도 입에는 찬송이 절로 흘러나오고 세상 천지가 갑자기 나를 반기며 웃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것 같았고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도무지 들 것 같지 않았다. 이전에는 무관심했던 주변의 자연과 피조물들도 이전과는 달리 새롭고 아름답게 보였다(자연의 경이로운 체험).

세상 것에 대한 욕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베드로가 말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가 실감이 났다. 조나선 에드워즈가 말하는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 착란”에 사로잡힌 것이다. 영성가들이 추구하는 그리스도와의 합일, 임재기도의 극치, 성령의 황홀하고 달콤한 체험, 피조된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종말론적인 기쁨!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상태가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자 봄 눈 녹듯 기쁨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물밀듯이 밀려오기를 기대했지만 처음과 같은 강도(强度)로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체험 이후 기도 시간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구하거나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사모하면서 그분이 나와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하고 그분의 온유하고 자비롭고 덕스러운 성품과 남을 위해 희생하고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신 일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눈다. 그러노라면 나도 모르게 영적인 평안함에 잠긴다. 신랑 예수와의 교제를 즐긴다. 이후 금전 문제는 신기하게 해결되었다. 분명히 사람의 계산으로는 모자라는데 실제로는 모자라지 않게 하나님이 채워주셨다.

사람마다 이런 체험을 여러 가지 다른 단어로 표현한다. 요한 웨슬리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러한 체험을 ‘제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적인 '성령 세례 또는 성령 체험’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정상 체험(peak experience) 또는 위기 체험(crisis experience)이라고 부른다. 이런 체험은 제2의 축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명한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나 D.A. 카슨이 인정하듯, 제3, 제4는, 제5 물론 제N의 체험까지 가능하다.

장미가 어떤 이름으로 불려져도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듯 조나선 에드워즈가 말하는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 착란”에 사로잡히는 것은 분명히 사모하고 구해야 할 유익한 체험이다. 이런 체험이 신비적 열광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면 금방 태도가 달라진다.

이전에 이런 체험을 비판하다가 자신이 체험한 후에는, “아, 나도 드디어 이런 체험을 했구나.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도 사랑하셔서 이런 체험을 주시는구나”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많이 목격한다. 이후 필자는 이런 경험이 너무나 사모되어서 재경험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다. 작정기도, 금식기도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겨우 근처에 갈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이런 경험은 일생에 어쩌다 한두 번 해보는 것이구나!”

그러다가 한참 후,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새마음 회개훈련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임재기도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기쁨체험, 황홀체험을 보다 강력하게 재경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는 어쩌다 한두 번 하는 정상체험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정상 체험을 자주 하는 고원 체험(plateau experience)도 자주 누리게 되었다.

정상 체험은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감미롭고 강렬한 황홀감을 동반한다.
새벽기도 시간에 방언을 체험하고, 주일 예배시간에 갑자기 ‘회개의 영’이 임하여 예배시간 내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회개를 한 체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필자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강한 기쁨과 황홀감을 주시기도 한다.
 

전통적 교회 신관(神觀)의 결함-하나님의 ‘거룩’은 강조하고 ‘사랑’은 소홀히 함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는 회개와 고난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강한 기쁨과 황홀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해왔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이 하나님의 ‘거룩’은 강조해왔지만 ‘사랑’은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자인 도날드 맥크레오드도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한 개혁신학의 결함을 지적한다.

"첫째 문제는 신론을 형성하는데 사용된 언어의 사용에 있다. 그것은 대부분이 비성서적이며 주로 라틴어를 사용한다. 단순함,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aseity), 광대무변(immensity), 단일성(unity), 불변성(immutability), 무한(infinity), 전능(omnipotence), 전지(omniscience), 무소부재(omnipresence), 공의(justice) 등이다. 문제는 이러한 단어들이 성경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생긴 말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뛰어난 성경적인 개념 (사랑)이 스콜라주의의 교리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헵의 저서를 읽으면서,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라는 생각을 결코 할 수가 없다. 부른너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개신교 스콜라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선 지나치게 결핍되어 있다’는 지적은 절대적으로 옳다. 불행하게도 이후의 개혁주의 교의학(조직신학)도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지는 못했다.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속성의 목록 중에 사랑을 언급하지도 않으며(답4) (개혁신학자인) 카녹이나 바빙크의 저서에는 사랑에 대한 장(chapter)이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하심’의 부제(副題)로 취급한다.

이러한 일은 신약이 강조하는 것을 정당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에서, 사랑(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언어이다)은 십자가의 지상 메시지이며, 선택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속성의 핵심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교의학은 이단적이고 불균형적인 가르침에 대한 책임이 있다"
(Donald Macleod, Behold Your God, Christian Focus Pub., 1990, 13).
 

이런 결함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일차적으로 예배에서 드러난다. 개혁주의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는 엄숙하고 거룩하게 드려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그래서 아직도 일부 장로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아멘’하거나 웃으면 경망스럽다고 책망한다. 또한, 얼마 전 유명한 신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요즈음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면 대부분이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 또한 이전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내면에서 솟구치는 답답함과 영적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기타 치고 북 치면서 한 시간 가량 찐하게 찬양하고 나면 마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과 담대함이 넘친다.

나중에야 전통적인 장로교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전에 나올 때는 회개를 통해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회개한 후에는 마치 친구나 연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겁게 뛰놀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1:11).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시편 32:11,68:3 등에 사용된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는 말은 조용하고 점잖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둥실둥실 춤을 추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죄인인 우리는 감히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께 근접할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는 용서 받은 죄인이자 자녀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를 중시하고 감정과 경험을 경시한 전통주의자들은 ‘종교적 감정’에 대해 말은 하지만 ‘조용하고 점잖은 것’만 강조한다. 이것은 종교개혁가인 장 칼뱅의 영향이 크다. 칼뱅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은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에 의해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요란스럽고 경망스러운 종교적 감정의 표출은 모두 열광주의나 광신주의로 정죄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운동 경기나 뮤직 컨서트에서는 열광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열광하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인간이 골을 하나 넣어도 열광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구원 사역에 대해서는 멀뚱하고 점잖게 반응해야 하는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뛰어 놀 수 있어야 한다.
 

'두렵고 떨리게 하시는 하나님'과 '매혹되어 이끌리게 하시는 하나님'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The Idea of Holy. Das Heilige)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 체험은 ‘두렵고 떨리게 하시는 하나님’‘매혹되어 이끌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지닌다.

오토에 의하면 참다운 하나님 체험은 거룩 체험의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가지는 ‘두렵고 떨리는 체험’, 피조물을 태워 버리고 멸절시켜 버리는 권능 체험, 인간의 허무, 무기력, 죄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체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한낱 한 줌의 흙이요 재에 불과하다는 체험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철저한 존재론적인 거룩 체험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도덕적이고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행사로 전락하고 만다.

다른 한 가지 체험은 ‘매혹되어 이끌리는 체험’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고 압도당하는 체험, 한없는 매혹과 영광으로 이끌리는 체험,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안식하고 뛰어 놀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체험을 말한다.
 

루돌프 오토는 참다운 하나님 체험은 이 두 가지를 통해 회개하고 변화 받는 체험이라고 말했다.

두렵고 떨리게 하시는 거룩의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이사야(사 6:5).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왕상 18:39).
-두려워서 엎드린 다니엘(단 8:17).
-두려워서 엎드린 제자들과 요한(마 17:6; 계 1:17).

매혹되어 이끌리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소고 치며 춤추는 미리암과 찬양대(출 15:20-21).
-바지가 내려갈 정도로 좋아서 춤 춘 다윗(삼하 6:14).
-우리를 보고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시는 하나님(습 3:17).
-성령 안에서 크게 기뻐하신 예수님(눅 10:21).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바울(고후 12:2).

기타 반응

-성령의 능력으로 하루 종일 드러누워서 중얼거린 사울(삼상 19:24).
-영광에 겨워 서있지 못한 제사장들(대하 5:14).

‘하나님을 즐거워 하라’

하나님은 신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면서 소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나는 장로교의 소요리 문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요리 문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The chief aim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많은 신자들이 실제로 하든 안 하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에는 금시초문인 신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왜? 그런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 목사는 『여호와를 기뻐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기쁨이야 말로 기독교인의 참된 징표라고 역설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외부의 세상은 교회의 조직적인 노력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관심을 가질 단 한 가지는 사람들이 기쁨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고대 세계를 이런 식으로 정복했다. 이 사람들의 놀랄만한 기쁨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거나, 죽이더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들은 즐거워하고 환란에서도 즐거워했다"(로이드 존스, Joy Unspeakable).

찬송가 작가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1704년 10월 22일에 성령이 주시는 가장 즐겁고 위로가 되는 영향을 받았다 . . . 이것은 1689년에 처음으로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 . .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단어로 표현한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즐거움으로 녹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너무나 풍성하게 부어져서 기쁨의 눈물이 내 눈에서 한없이 솟아났다(롬 5:5). 내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완전히 압도당했다.”

신랑과 같이 있는 신부가 즐겁고, 기쁘고, 황홀한 무드에 잠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마 9:15). 신부와 신랑은 어떤 사이인가?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부부라면 둘만이 아는 깨알 쏟아지는 감미로움이 있지 않은가? 그저 둘이 있기만 해도 좋은 사이, 애정과 흠모로 가득한 눈길, 잠시만 보지 않아도 보고 싶어지는 사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한 이불 속에서 잠은 자지만 애정이 없는 부부,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고 아내는 열심히 자녀를 기르고 가사에 충실하지만 불꽃 튀는 애정이 없고 서로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부부를 과연 진정한 부부라고 할 수 있는가?

지상에서의 부부의 관계는 신자인 신부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예표한다(엡 5:30-33). 육체적인 부부 관계가 불꽃 튀는 첫사랑의 감격과 뜨거움을 회복해야 하듯, 우리의 영적 신랑이신 예수와의 관계도 첫사랑의 감격과 뜨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신자는 정상 체험을 통해 영적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불꽃 튀는 친밀한 교제를 실제로 누릴 수 있다. 교회사를 통해 영성가들은 신랑 예수와의 친밀감이 주는 황홀한 체험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장로교 신앙의 원조가 되는 근엄한 청교도들은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였다. 청교도들은 칼뱅주의자들인데 칼뱅은,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시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는 자들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임재기도(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 체험이 주는 ‘황홀감’을 누렸다고 주장한다.

저자인 탐 쉬안다는, 황홀 체험이 주는 혜택을 하나님 경험이 주는 지식에 대한 감각 또는 새로운 깨달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나 축복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감,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추구하려는 욕망 및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의 4가지로 분류했다(탐 쉬안다,『영혼의 재창조: 청교도주의의 관상적 신비적 경건』; Tom Schwanda, Soul Recreation: The Contemplative-Mystical Piety of Puritanism).

그런데 이런 것들을 잘 모르는 전통주의자들은, 이런 황홀 체험을 하기만 하면 ‘뉴에이지 현상이다’, ‘쿤달리니 요가 현상이다’, ‘심리적 의식 변형 상태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건전한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마귀가 하나님의 좋은 것을 도적질하여 오남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귀의 것을 흉내 낸다고 잘못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외양은 비슷하다. 하나님의 특별은혜는 일반은혜의 장(場)에서 일반은혜의 ‘모습’과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예배도 사이비 종교나 이교도와 비슷하다. 모두 경전을 읽거나 강해하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을 분별할 때는 ‘외양’이나 ‘그릇’이 아니라 ‘내용’과 ‘의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비판자들은 세상적, 사이비 종교적 체험과 성경적 체험의 ‘형식’이나 ‘외양’이 다르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개신교회의 예배나 신앙생활도 지탄 받아야 한다. 모르몬교, 통일교나 개신교의 예배나 신앙생활의 ‘방법’이나 ‘외양’은 비슷하기 대문이다. 필자는 이런 논리적 오류를 누차 지적해왔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아직도 무경험으로 인한 ‘논리적 오류’에 빠져서 ‘외양’과 ‘방법’만 비슷하면, ‘세상적이다, 사교적이다, 뉴에이지적이다’면서 잘못 비판한다.

(자세한 내용은 ☞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2)-논리적 오류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60

뉴에이지 현상, 쿤달리니 요가, 심리적 의식변형 상태는 물론 심지어는 마약이나 술을 통해서도 황홀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후유증 또한 좋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수십 년을 누려오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황홀 체험은 후유증이 전혀 없다. 오히려 때로는 너무나 강렬하게 와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봐 자제할 정도이다.
 

구원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엡 2:8; 롬 1:17; 갈 2;20).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며(요 17:3), 신자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야 하고 (엡 1:17),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기록한다(벧후 3:18). 사도 바울은 너무나 고상한 이 지식을 더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배설물로 여겼다(빌 3:8-9).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교리적이고 학문적 지식 보다는 경험적이고 관계적 지식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 지식이고 후자는 직접적 지식이다. 직접적 지식은 성경 말씀과 바른 교리의 틀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경험하는 지식'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판자들은 신앙은 '경험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잘못 주장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건전한 영적 경험 없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건전한 경험이 결핍된 사람들은 '영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져서 냉랭하고 무기력한 신앙인을 양산한다. 이성과 교리를 강조하는 전통주의 교회의 치명적 결함이 여기에 있다.

건전한 하나님 경험은 영혼을 살지우고 영적으로 부요하게 하며 열정과 담력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영적 경험은 바른 교리의 틀 안에서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저명한 보수신학자인 J. I.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 에 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구분한다.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다. 신학, 신앙고백, 하나님에 대한 주제들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많은 설교를 듣고,책을 읽고,친교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경건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외적인 경건의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말씀 묵상과 정상 체험 

이런 체험은 말씀묵상에서 오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필자는 말씀묵상 중에는 주로 ‘조용하고 그윽한 기쁨과 평안’을 체험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좋았다. 그런데 정상 체험의 경우에는 나의 모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갑작스럽고 강렬한 기쁨과 평안’이 임한다.

말씀묵상에서 오는 체험이 촛불을 켜놓고 어두운 길을 보는 것이라면 정상 체험은 조명탄을 켜놓고 보는 격이다. 정상 체험을 하면 마음의 모든 염려, 불안, 좌절, 의심 등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이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이 임하면서, 하나님과 영적 실상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 지고, 세상 것과 하나님 것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좌우되지 않게 된다. 이런 현상을 신비 체험이라고 부른다.

보수복음주의자인 윈프리드 코르두안은 성경적 신비 체험의 특징에 대해 말한다(Winfried Corduan, Mysticism,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1).

“신비주의자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며 초월적인 체험을 통하여 절대자와 직접적인 교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신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한다. (성부 신비주의, 성자  신비주의, 성령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러면서 코르두안은 신비 체험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첫째 신비 체험은 하나님과의 연합(unity) 체험이다.
물론 모든 신자는 믿는 순간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신분적으로 연합된다(롬 6:5). 그러나 이것은 신분적인 연합이며 실제로 연합을 누리는 것은 평생의 과정이다. 신자가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남녀의 결혼에 비유할 수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혼인신고를 하면 둘은 법적으로 연합된 일심동체이다. 그러나 법적, 신분적으로 하나가 된 것과 실제로 사랑과 신뢰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별개이다. 꾸준한 노력, 희생, 사랑, 헌신을 통해 법적, 신분적 하나됨을 누리고 이루어가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비록 법적, 신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해서 그로 인한 모든 혜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말씀보기, 기도, 헌신, 충성, 사모함을 통해 혜택을 실제화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법적, 신분적 개념이 아니라 체험적, 관계적 개념이다.

둘째 신비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은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다.
좋은 경치나 풍광을 볼 때, 너무나 좋아서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보면 실망한다. 기계인 카메라를 통해 들어온 사진은 닮은 꼴이지만 자연과 풍광의 웅장함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비 체험도 마찬가지다. 그 체험은 너무나 강렬하고 전인격적이기 때문에 필설로 감당이 안 된다[beyond description]. 전문가들은 이런 체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ineffable) 체험'이라고 한다.

신앙에서 신비 체험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칼뱅의 잘못된 성령 이해와 18세기의 서구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에 젖은 정통 신학은 성경의 모든 신비 체험은 성경 인물에 국한시키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교리 정립에만 에너지를 쏟아왔다.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그래도 이런 것이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21세기에 즈음하여 감성시대, 영상시대에 접어들자 이성 중심, 교리 중심의 신학은 신자들의 실제 신앙생활과 괴리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파고 들어온 것이 바로 동양 신비주의이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산업사회와 기계문명의 단조로움, 차가운 이성주의에 식상한 현대인들에게 직관적, 신비적, 초월적 체험과 지식을 제공한다. 은사주의 운동은 현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신자들이 성경적인 신비 체험을 하는 것조차 ‘외양’과 ‘방법’이 비슷하다고 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몰고 가는 논리적 오류를 서슴지 않고 범하고 있다.

성경은 논리나 교리 서적이 아니다. 이제 전통주의자들은 성경을 좌뇌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우뇌로 보는 훈련도 해야 한다. 성경을 좌뇌로 보면 교리만 보이고 교리로만 보면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나 우뇌로 보면 비유, 직관, 이미징, 상상, 초월적 체험에의 동참 등의 역동성을 통해 신앙에 생기가 돌고 열정이 쏟아난다.

사람이라면 좌놔와 우뇌는 같이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전통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좌뇌중심적이다. 서구 신학의 단점인 ‘중산층 백인 남성신학’의 나쁜 부산물이다. 반대로 은사주의자들 중에는 지나치게 우뇌중심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교리와 체험, 부흥과 개혁은 같이 가야 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이 모든 면에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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