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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사적 계시’ 인정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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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27  22: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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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사적 계시’ 인정

-‘설교·가르침’과 ‘예언’을 구별 못하는 장 칼뱅, 존 맥아더-

<많은 경우, 기적중지론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직통 계시’라고 폄하하면서 사도 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는 근거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인용한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성경의 완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사적 계시’인 개인 예언의 가능성은 열어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편집자 주>


“당신은 이전에는 주님을 위한, 그레인지 가문의 용기 있고 신실한 증인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나(존 낙스)는 이제 당신이 나의 청원을 거절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에게 가서 내 이름으로 말하시오. 만일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고 말하시오. 그가 불쌍하게도 의지하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바위 덩어리-성(城), 반신반인으로 섬기고 의지하는 그 사람-레딩톤-의 세속적인 지혜, 그가 거짓되게 자랑하는 외국인의 도움도 그를 건져내지 못할 것이오. 만일 그가 재빨리 삶을 수정하여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그는 처벌 받기 위해 불명예스럽게 그의 둥지에서 끌려 내려와서, 밝은 태양 아래서 교수대에 매달릴 것이요. 그 사람의 영혼은 나에게 귀중하므로 내가 그를 건져낼 수 있다면 그가 멸망 당하지 않게 하고 싶소.”1)

이 말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John Knox. 1514-1572)가 친구 2명에게 말한 그레인지 지방의 윌리암 커컬디(William Kirkaldy of Grange)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었다. 존 낙스의 자서전 작가인 재스퍼 리들리는 이 예언이 얼마 후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8월3일에, 그레인지와 그의 동생 제임스는……교수형에 처해졌다. 레딩톤은 성이 함락된 직후 갑자기 죽었다. 아마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2)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이자,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위원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후 ‘신앙고백’)3)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학자이다. 러더포드는 웨스트민스터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예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3의 계시’에 대해 기록했다.4)

그외에도, 웨스트민스터 의회 위원인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웨스트민스터 의회 위원인 윌리암 브릿지(William Bridge. 1600-1670), 저명한 청교도 목회자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등은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사적 계시(private revelation)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저명한 장로교, 청교도 목회자이자 신학자들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사적 계시’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자들은 ‘신앙고백’을 인용하면서 정경의 완성과 함께 사적 계시도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신앙고백’ 제1장1절과 10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1. 성경의 필요성과 종결성

1. 본성의 빛과 또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어 사람이 핑계할 수 없게 하나(1),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주지는 못한다.(2)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때에 여러 방식으로 자기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자기의 뜻을 여러 방식으로 자기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 하시며 자기의 뜻을 선언하시는 것을(3), 그리고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또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시고 위안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전부 기록에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4).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한 것으로 만드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신 이전의 방법은 지금 정지 되었다.5)

10. 그에 의하여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이 결정되며, 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의견들, 사람들의 교리들, 개인의 정신(private spirits)이 검토 되어야 하는 또는, 그의 선고에 우리가 희망을 거는 최고의 심판주는 다른 이가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

‘신앙고백’ 1장1절은 분명히 성경 66권인 정경(canon)이 완성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중지되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전의 방식들’은 꿈이나 환상과 같은 직접 계시를 말한다. 따라서 1장1절에 의하면, 신앙고백은 분명히 기적중지론적 입장이다.

그러나 1장10절의 private spirits이 무슨 뜻인가에 따라 ‘신앙고백’이 오늘날의 개인 예언과 같은 사적 계시의 존속을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한국의 장로교는 private spirits을 ‘개인의 정신,’ ‘개인의 정신 문제’로 번역하여 그 뜻이 불분명하다.6) 그러나 private spirits은 private revelation(사적 계시)를 의미한다는 주장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바이런 커티스는, 이전의 ‘신앙고백’ 해설자들인 A.A. 핫지나 G.I. 윌리암스는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는데 적어도 5가지 점에서 볼 때 private spirit은 private revelation(사적 계시)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7)

첫째, 1600대 당시 영국 『옥스포드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spirit은 revelation(계시)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둘째, 1646년과 1652년 동안, 영국 왕 찰스 1세(1600-1609)와 워스터의 후작인 헨리 소머셋과의 종교 관련 분쟁 서신에 의하면, private spirit이 private revelation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영국의 개혁신학자인 윌리암 휘태커(William Whitaker(1547/48-1595)가 가톨릭 예수회의 로버트 벨라민 추기경과 논쟁한 서신 내용에 의하면, private spirit은 private revelation을 의미한다. ‘신앙고백’도 휘태커의 의견을 반영하여 4가지-‘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의견들’, ‘사람들의 교리들’, ‘사적 계시들’(private spirits)-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통해 분별되어야 한다고 기록한다.

넷째. 이 해석은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의 신학과 일치한다. 골수 기적중지론자인 벤자민 워필드조차 ‘신앙고백’의 내용은 주로 어셔의 신학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인정한다. 어셔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경이 규칙이고 선이고 척도이므로 성경을 통해 모든 판결과 사람과 천사의 말들이 점검되고 시험되어야 한다……모든 전통, 계시들, 모든 회의의 작정들, 박사들의 의견들 등은 신적인 성경에 의해 증명된 것들만 수용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정황적 증거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의회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3그룹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그룹은 ‘모든 기적은 중지되었다’는 엄격한 기적중지론자들이다. 에드워즈 레이놀즈(Edward Reynolds(1593-1676),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인 존 라잇푸트(John Lightfoot. 1602?-1675) 등이다.

둘째 그룹은, 윌리암 브릿지(William Bridge(1600?-1670)처럼, 성경 이외의 계시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인정하는 독립파들이다.

셋째 그룹은 둘째 그룹의 동맹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개인 예언과 같은 사적 계시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활용하는 존 낙스와 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회자·신학자들이었다. 특히 뛰어난 토론가이자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조지 길레스페(George Gillespe. 1613-1648)는 존 낙스,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와 같은 사람들을 ‘진정한 선지자’(True prophets)라고 불렀다.

‘신앙고백’은 이처럼 다양한 견해를 가진 3부류의 절충안으로 탄생된 것이다. 이들은 정경은 완성되었으며, 사적 계시(private spirits)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에 의해 분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8)도 커티스의 주장을 지지하고(The Gift of Prophecy),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9)도 간접적으로 커티스의 주장을 지지한다. 번 포이트레스는 신앙고백 입법 위원이었던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가 성경 계시성령의 내적 증거에 더하여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제3의 계시’를 인정한 기록을 지적한다. 러더포드는 존 후스, 위클리프와 루터는 물론 당대의 조지 위샤트가 비튼 추기경의 죽음을 예언한 것, 존 낙스가 그레인지 공의 죽음을 예언한 것을 예시했다.

한편, 이후에 private spirit은 사적인 의견(private opinion), 거짓 영(false spirits), 성경의 사적 해석(private interpretation)이란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10)

 

신앙고백조차도 “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의견들, 사람들의 교리들”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 자체도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 “모든 회의들의 작정들, 고대 저자들의 의견들, 사람들의 교리들(all decrees of councils, opinions of ancient writers, doctrines of men) 불과하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의해 분별되어야 한다. 특히 신앙고백 1장1절 마지막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신 이전의 방법은 지금 정지 되었다”(those former ways of God's revealing His will unto His people being now ceased)는 진술이 과연 성경적으로 타당한가를 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2이 기적중지론을 증거하는가?

기적중지론자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은 히 1:1-2이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얼른 읽으면 이 구절들은 옛적의 방식인 꿈과 환상과 같은 계시의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해 중지된 것처럼 이해된다. 대부분의 유명한 히브리서 주석이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성경 해석은 아주 성급하고 무성의한 성경해석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탄생 하신 이후에도 직접 또는 천사를 통하여 꿈에 요셉과 동방박사들에게도 나타나셨고(마 2:12, 13, 19),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환상을 통해 아나니아, 고넬료, 베드로 및 바울에게도 나타나셨고(행 9:10; 10:3, 10-11; 16:9), 여러 사람들에게 예언도 주셨기 때문이다(행 19:6; 21:9).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이런 기록은 전혀 살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히 1:1-2이 마치 중지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필자는 평소에도 느끼지만, 많은 중지론자들은 자기들이 성경 수호의 최첨병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몇 개 구절만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신학화·이론화 한다는 사실이다.  칼뱅 이래로 이들은 성경 전체를 보지 않고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듯한 성경 구절 한두 개를 인용하여 확대, 과장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히브리서 1장1-2절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서는 계시의 점진성,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완성이란 관점에서, 옛 언약과 비교한 새 언약의 우월성, 율법과 대조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그래서 서두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계시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우월하기 때문에 계시의 초기의 방식인 꿈과 환상이 사라졌다고 하는 주장은 본문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꿈과 환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언’에 대한 칼뱅의 잘못된 해석 

더군다나 고전 14:1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칼뱅은,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사람들이 은사를 오남용했다고 해서 무용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여 내던지지 말고 열심히 구하라고 주장한다’고 주석한다.  칼뱅이 다른 곳에서 열광주의자들이 기적을 오남용하므로 그것은 무용하고 가짜라고 한 주장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칼뱅은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것들’-은사들- 중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방언(외국어), 통역(외국어 통역) 및 예언의 은사(설교와 가르침)의 대부분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켜 버렸고 이후 칼뱅의 후예들은 이 해석을 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의 신학에 의하면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이 났으므로 교회 시대 모든 신자를 위한 이 구절이 부담이 되니까 자기 편한 대로 영해(spiritual interpretation)를 해버린 것이다.

왜 이런 해석이 틀렸는가?

첫째, 칼뱅이 말한 대로 만일 예언의 은사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라면, 모든 신자가 설교나 가르침을 위해 예언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은 고린도 교회는 물론 교회시대 전체의 신자를 위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본인에게 나타나지 않는 예언의 의미를 본인에게 그럴듯한 의미로 정의하기 위해 관심을 갖다 보니 이 점은 간파하지 못한 듯, 그의 주석에는 이 구절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둘째,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3절)에 대해. 칼뱅은 ‘그것 봐라, 예언의 기능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고려할 때 예언은 예측의 은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forthtelling) 설교와 가르침의 은사’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칼뱅은 예언과 설교·가르침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예언이든 설교·가르침이든 모두가 한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에는 설교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건덕, 권면, 위로의 기능은 물론 책망과 훈계의 기능이 있다(고전 14:24-25 참조). 그래서 둘의 차이를 혼동했을 것이다.

물론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언과 가르침의 구분이 불분명하여 둘을 혼동하기 쉽다. 완성된 성경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구약 성경을 가르쳤거나 구약에 없는 내용은 하나님의 예언을 받아서 가르쳤다(행 2:42; 4:33 등).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직접 받는 사도이자 선포하고(설교하고) 가르치는 교사라고 불렀다(딤후 1:11). 그러나 디모데에게는 바울 자신이 가르친 교훈에 근거하여 가르치라고 권면한다(딤전 1:11, 18; 4:6, 13; 5:17; 6:3, 20; 딤후 1:14; 딤후 2:2, 24; 4:2).

또한, 초대 교회 당시에도 겸직을 하는 사도 외에는 ‘신약의 선지자’와 ‘교사’의 구분이 분명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 4:11).

물론 사도 외의 다른 사람들도 선지자와 교사를 겸할 수 있겠지만(행 13:1), 성경은 ‘가르치다’와 ‘예언하다,’ ‘선지자’와 ‘교사’를 분명히 구분한다. 가르침은 칼뱅이 말한대로 성경 말씀을 잘 풀어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신약의 ‘예언하다’(prophecy. 헬, 프로페튜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forh-tell)과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자연히 과거·현재·미래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는데 미래에 관한 말씀을 예언 또는 예측(fore-tell)의 두 가지11)12)13)가 있다. 그런데 칼뱅은 예언을 비기적화하여 예언의 기능은 부인하고 대언의 기능만 인정한다.

칼뱅처럼 예언을 이해하면 예언은 곧 설교나 가르침이 되기 마련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이 예언을 이렇게 이해한다. 특히 대표적인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가 이런 해석을 제일 선호하는 것 같다. 예언의 은사는 없지만 설교 잘하고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기 때문일 것이다.14)

그러나 칼뱅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과 설교·가르침의 유사점과 차이점를 모르기 때문에 예언을 설교·가르침으로 이해하면서도 성경 구절에 따라 서로 헷갈리는 해석을 하고 있다. 고전 12:28절 주석에서, 칼뱅은 ‘선지자는 탁월한 성경 해석자이자 특별한 지혜와 민첩함으로 교회의 현재의 필요를 바르게 알고 전달할 줄 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대사’라고 말한다. ‘교사는 바른 교리가 지속되고 전파되어 교회에서 종교의 순수성이 유지되게 하는 사람’이라고 주석한다.

칼뱅은 다른 곳-특히 고전 14장-에서 예언은 ‘덕을 세우는 교리’, ‘성경의 해석은 물론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라 해놓고, 고전 12장에서 선지자는 성경 해석자이자 신적 메시지를 전하는 자이고 교사가 교리를 가르치는 자라고 주장한다. 즉 고전 14장에서는 ‘예언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놓고, 12장에서는, 선지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이고 교사가 ‘교리를 가르치고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칼뱅은 둘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잘 모르기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것이다.
 

설교·가르침 및 예언과의 차이

둘의 유사점은 이미 말한 대로 예언이나 설교·가르침은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건덕·권면·위로 및 책망과 훈계의 기능을 담당한다.

차이점은?
설교나 가르침은 사전에 준비하여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선포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 중에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통한 건덕·위로·권면(형제를 권면하고 굳게 한 유다와 실라 선지자-행 15:32) 및 책망과 훈계는, 사전에 준비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즉흥적, 직관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찰스 스펄전의 예를 들어보자.15)
19세기 영국의 ‘설교 황제’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은 어느 날 설교하던 중, 갑자기 회중 속에 앉아있는 면식이 없는 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외쳤다.

“저기에 구두를 만드는 어떤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그는 주일에도 가게 문을 엽니다. 그 가게는 지난 주일 오전에 문을 열어서 9펜스를 벌어서 4펜스를 남겼습니다. 그는 4펜스 때문에 사탄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이후, 도시의 선교사 한 명이 이 구두 가게 주인을 만난 적이 있다. 구두가게 주인은 자신이 어떻게 회심했는가를 간증했다. 그(구두 가게 주인)는 어느 주일에 예배 드리러 가서 예배당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가 마치 아는 사람처럼 자기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가 구두 가게 주인이며 주일에 가게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가 그날 그가 9펜스짜리 물건을 팔아서 4펜스를 남겼다고 말하자, 그는 하나님이 스펄전 목사를 통하여 자기 영혼에게 말씀하신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래서 그는 다음 주일에는 가게 문을 닫았다. 다시 교회에 가기가 두려웠지만 주님이 그를 반겨주셔서 영혼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스펄전은, 자신도 전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때로는 자신이 전혀 생각지 도 않은 말을 한 경우가 열 번도 더 넘는다고 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친구에게 스펄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와서 내가 한 모든 짓을 다 말한 이 남자를 한 번 보라.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내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 틀림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한 일을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을까?”

스펄전은 때로는 사람들의 생각은 물론, 교회 문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까지 알 정도였다.

또 다른 경우는 도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설교 중 스펄전은 갑자기 한 청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보게 젊은이, 자네가 끼고 있는 장갑은 값을 치르지 않은 것이군. 그것은 주인에게서 훔친 것이야!”

설교 후 젊은이는 창백하고 당황한 모습으로 스펄전 목사에게 상담 요청을 하여 장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후 자백했다.

“이번 일이 처음입니다. 앞으로 절대로 다시 훔치지 않겠습니다. 저에 대한 소문을 내시지는 않겠지요? 제가 도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니가 저를 죽일 겁니다.”

하나님은 스펄전의 예언을 통해 이 청년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존 낙스의 죽음 예언이나 스펄전은 비록 예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고전 14장24-25절에 한 말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이처럼 예언은 설교나 가르침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모든 회중이 아니라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매운 hot와 뜨거운 hot을 당연히 잘 구분한다. 그러나 미국 사람은 매운 음식이 별로 없기 대문에 이 둘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잘 구분하지 못하니 단어도 동일한 hot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예언의 직·간접 경험이 없으면 둘의 유사성 때문에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위대한 칼뱅이나 유명하고 똑똑한 신학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직·간접 경험이 없으니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변화하거나 정당화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기적중지론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면 중지론자들은 “왜 성경을 경험으로 해석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들은 무경험에 근거하여 성경을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경험적 해석과 논리적 해석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XX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에 더하여 예언은, 존 낙스의 경우처럼, 특정 개인, 단체 및 국가의 미래의 일을 예측하거나 경고하기도 한다(행 21:10-14에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경고한 선지자 아가보 등).

마지막으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29절)에서 칼뱅은 혹시나 잘못된 교훈-예언-를 말할 지도 모르니까 두세 사람이 분별해야 한다고 칼뱅은 주석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모여서 무슨 학술 대회를 하나? 평신도 한 사람이 어떤 교훈을 하고 다른 두세 사람은 그것이 바른 교훈인지의 여부를 분별하라고? 예언이 설교나 가르침이라 주장하는 기적중지론자들 중에서 실제로 이렇게 하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결국 칼뱅은, 가톨릭의 기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적은 없다’고 주장해 놓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혹시 우리가 배은망덕해서 기적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오지에서 선교할 때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교회에 새로운 회복이 필요하면 기적을 행하는 전도자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횡설수설한 것처럼, 예언에 대해서도 예언과 가르침의 차이점을 몰랐거나, 알면서도 미래 예측의 은사를 가진 선지자를 인정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니까 횡성수설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학자인 토인비의 말처럼, 개인이나 단체나 문명의 운명은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지만, 만일 칼뱅이 가톨릭이나 광신자들의 도전에 대해 다르게 반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기적 주장에 대해 ‘너희가 주장하는 기적은 잘못되었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적 관련 구절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비기적화를 하지 않았다면 개신교 개혁주의의 현재 위치는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칼뱅은 성경의 권위와 종결성을 수호한다는 선의의 의도로 “어떤 사람이 자기 주인을 공격하면 개도 짖는다……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데 내(칼뱅)가 어떻게 침묵을 지킬 수 있겠느냐?”16)면서 가톨릭과 광신자들을 대적하고 성경의 기적 관련 구절을 비기적화했지만 그것은 비성경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기적중지론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교회의 역동성과 성장성을 갉아먹어 버린 것이다.

칼뱅의 이런 잘못된 기적중지론이 아직도 수많은 개혁주의자들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기적중지론의 본산인 유럽의 교회는 공동화(空洞化)되었고 칼뱅주의르 따르는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들도 군소 교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시’라는 단어의 의미? 

오늘날 한국 교계는 누가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한다고 하면 ‘직통 계시파’라고 비아냥 거리고 폄하한다. 번 포이트레스는 많은 중지론자들이 '계시'라는 말을 전문적인 용어로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특별 계시는 곧 성경 말씀'이라고 단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고 비판한다.17)

성경에는 '계시 또는 계시하다'라는 말이 항상 정확무오한 성경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 1:18),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5),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것 (엡 1:17)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D. A. 카슨(Carson)도 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

“전문 술어에 대한 잘못된 가정: 이 오류는 어떤 단어가 항상 또는 거의 항상 특정한 전문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오류이다. 이 의미는 일련의 증거 구절들이나 해석자 개인의 조직신학에서 도출된 의미이다………만일 아포칼립토(reveal. 계시하다)가 항상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특별 계시만을 의미한다면 해석자는 빌 3:5하(‘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이와 관련된 다른 오류는 어떤 해석자는 전체 교리를 자기가 이해한 한 단어의 전문적 의미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18)
 

웨인 그루뎀도 유사한 의견을 개진한다.

“고전 14:30에 사용된 ‘계시’로 번역된 단어가 관심을 끈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포칼립토’인데,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만일 앉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드러나면, 다른 사람은 조용하라’이다……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예언자)에게 즉흥적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해주시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신약의 예언은 ‘계시’에 의존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계시는 당연히 그 말에 신적 권위가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계시하다(동사)나 계시(명사)라는 단어는 단지 사람의 권위에 지나지 않는 계시를 보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계시는 설교, 성숙한 신앙인의 권면 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로 이런 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또한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19)

그러면서 그루뎀은 아포칼립토를 사용한 빌 3:15; 롬 1:18; 엡 1;17; 마 11:27을 예를 들면서 여기에 사용된 ‘계시하’다는 단어가 반드시 성경급 특별계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20)

 D. A. 카슨도 그루뎀의 견해에 동의한다.

“바울이 고전 14:30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정경의 종결성을 위협하는 권위있는 형태의 계시로 제한된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논쟁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용어를 개신교 조직신학의 용어로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21)

정리하면, 신자는 자구 중심이 아니라 문맥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중지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성경의 단어를 자구 중심으로 해석하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쉽게 정죄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기적중지론을 주창하기 위해 ‘계시’, ‘성령 세례’ 등을 지나치게 자구 중심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원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위원들은 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정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private spirits(사적 계시), 즉 로마서 12:6, 고린도전서 12장-14장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교회 시대에도 지속된다고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처 : 구요한 저,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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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1) Wayne Grudem, Appendix Seven: “Some Evidence for the Existence of the Gift of Prophecy at Various Points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The Gift of Prophecy in NT and Today, Kindle edition.

2) ibid.; Jasper Ridley, John Knox (Oxford: Clarendon, 1968), 43.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은 칼뱅주의 신앙을 담고 있는 개신교의 신앙고백이다. 개혁교회의 중요 문서 또는 신조(Creed)로 많이 채택되는데, 현재 한국 장로교에서도 사도신조, 니케아 신경 등과 더불어 개신교의 중요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다. 신도게요서(信道揭要書)라고도 불린다.

1643년 영국 의회가 당시 국왕이던 찰스 1세와 의회와의 내란(청교도 혁명) 중에 영국 교회가 공통으로 따를 수 있는 전례, 교리, 권징 등의 기준을 수립할 필요를 느끼고 회의를 소집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 총대들과 의원,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학식있고 거룩하며 분별력 있는 신학자들"이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모였고, 이 회의는 5년 동안 지속되었다. 회의의 결과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는데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 신앙고백서 뿐만 아니라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 또한 작성되었으며 이듬해 영국 의회에서 공인되었다.

이 문서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 장로교회(PCUSA)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인정되었고, 한국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와 한국 장로교 교회의 표준문서로 통용되고 있다.(자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wiki/%EC%9B%A8%EC%8A%A4%ED%8A%B8%EB%AF%BC%EC%8A%A4%ED%84%B0_%EC%8B%A0%EC%95%99%EA%B3%A0%EB%B0%B1

4) Wayne Grudem, The Gift of Prophecy; Samuel Rutherfurd, A Survey of the Spiritual Antichrist. Opening the Secrets of Familisme and Antinomianisme in the Antichristian Doctrine of John Saltmarsh (et al) (London, 1648).

5) 물론 이 진술도 기적계속론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주장이다. 비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수십 명의 뛰어난 학자에 의해 5년에 걸쳐 성안된 고백이지만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다. 최근 개혁주의 신학자들 내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여러 분야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일고 있다. 포괄적인 비판으로는  “Recent Criticisms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http://spindleworks.com/library/wcf/ward.htm. 2015.10.28을 참조하기 바란다.

6) 예장합동 홈피(http://www.gapck.org/sub_06/sub09_01.asp) 및 예장통합 홈피(http://www.pck.or.kr/PckInfo/law01.asp?Depth=4&volume=제1편).

최근에 한글로 출간된 대부분의 웨스트민스터 해설서도 private spirits을 “거짓 영”(윌리암스, G.I.『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나용화 옮김. 개정판. 개혁주의신행협회, 2014, 36), “사적인 영들”(쇼, 로버트,『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 조계광 역, 생명의말씀사, 2014; 스프롤, R.C.,『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 부흥과개혁사, 2012,  15)로 번역하고 있다.

7) Curtis, Byron, “’Private Spirits’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10 and in Catholic-protestant Debate 1588-1652.” WTJ 58:2 (Fall 96) 257-66.

8) Wayne Grudem, Appendix Seven: The Gift of Prophecy in NT and Today에서 인용.

9) Vern Poythress,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 to Apostolic Gifts: Affirming Extraordinary Works of the Spirit within Cessationist Theology.” http://www.frame-poythress.org/modern-spiritual-gifts-affirming-extraordinary-works-of-the-spirit-within-cessationist-theology

10) Garnet H. Milne, “Private Spirits’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and in Protestant-Catholic Debates: A Response to Byron Curtis.” WTJ 61:1 (Spring 1999) 102-10); David F. Coffin, Jr., The Teaching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n the Cessation of Special Revelation. http://www.newhopefairfax.org/files/04.%20WS%20on%20Cessation.pdf

11) Vines, W. E., M. A. Entry for 'Prophecy, Prophesy, Prophesying'.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NT Words. http://www.studylight.org/dictionaries/ved/view.cgi?n=2236. 1940.

12) Wayne Grudem, Appendix Seven: The Gift of Prophecy; Vern Poythress, “Modern Spiritual Gifts as Analogous”에 게재되어 있음.

13) 박영돈도 이런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예언을 비판한다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IVP, 2011, 38-39). 그러나 제대로 알면 예언처럼 유익한 은사도 드물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4:1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한 것이 아닌가? 물론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남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금지나 중지’와 ‘규제와 통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14) John MacArthur, Strange Fire, 123-25.

15) Wayne Grudem, Appendix Seven: “Some Evidence for the Existence of the Gift of Prophecy at Various Points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16) John Calvin,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Vol. 4. Letters 1528-1545 (Ages Software CD-Rom, 1998), 441-42.

17) Vern Poythress, NT 853 Miracles Class 강의 (Philadelphia, P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0, 1991).

18) 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4), 45-46.

“전문 술어에 대한 잘못된 가정: 이 오류는 어떤 단어가 항상 또는 거의 항상 특정한 전문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오류이다. 이 의미는 일련의 증거 구절들이나 해석자 개인의 조직신학에서 도출된 의미이다………만일 아포칼립토(reveal. 계시하다)가 항상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특별 계시만을 의미한다면 해석자는 빌 3:5하(‘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이와 관련된 다른 오류는 어떤 해석자는 전체 교리를 자기가 이해한 한 단어의 전문적 의미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19) Wayne Grudem, The Gift of Prophecy.

“고전 14:30에 사용된 ‘계시’로 번역된 단어가 관심을 끈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포칼립토’인데,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만일 앉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드러나면, 다른 사람은 조용하라’이다……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예언자)에게 즉흥적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해주시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신약의 예언은 ‘계시’에 의존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계시는 당연히 그 말에 신적 권위가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계시하다(동사)나 계시(명사)라는 단어는 단지 사람의 권위에 지나지 않는 계시를 보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계시는 설교, 성숙한 신앙인의 권면 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또한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20) ibid.; Samuel Storms도 동일한 주장을 편다(“Appendix 2: Why NT Prophecy Does NOT Result in ‘Scripture-quality’ Revelatory Words,” in Authentic Fire: A Response to John MacArthur’s Strange Fire, edited by Michael Brown, Excell Publishers, 201), 367-82).

21) D. A. Carson, 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 (Baker Books, 1987), 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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