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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②] 순복음교단 내에서 새로운 성령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구요한목사, 한세대에서 ‘칼뱅주의와 기적중지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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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13  22: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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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②]

순복음교단 내에서 새로운 성령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

-구요한목사, 한세대에서 ‘칼뱅주의와 기적중지론’ 강의-

   
▲ 강의하는 구요한 목사(중앙), 왼쪽은 지도교수 신문철 박사
   

▲ 구요한 목사의 저서인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를 소개하는 신문철 박사(왼쪽),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오른쪽).


2016년3월7일(월)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구요한 목사는 한세대 신학관 2층의 세미나실에서 박사학위 후보생을 포함한 신학생들 30여명에게 “칼뱅주의와 기적중지론”을 강의했다. 강의의 1부는 ‘성령운동과 기적중지론’의 전반적인 개괄에 대해 말했고, 2부는 ‘*칼뱅주의와 기적중지론’에 대해 강의하고 나머지 30분은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칼뱅주의와 기적중지론’에 대해서는 ☞여기 를 참조하라)


성령운동과 기적중지론-패러다임의 충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그 다음은”
“백전불태(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입니다.”
“나만 알고 적을 모르면?”
“………”
“나만 알고 적을 모르면 반은 이기고 반은 집니다.”

“성령운동가들은 ‘나’는 잘 아는데 ‘적’을 몰라서 싸움에서 반은 이기지만 반은 진다”는 말로 구요한 목사는 강의를 시작했다.

예수님이나 사도 시대는 물론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도, 새로운 운동은 항상 기득권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령 운동하는 분들은 나이브(naïve. 순진한, 고지식한)하여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기득권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대적하면 대안이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여서 성령이 소멸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새로운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성령 사역을 하는 것은 물론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반박하는 전략도 세워야 한다.

왜 적들이 새로운 운동을 공격하는가를 분석하여 대적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체험이나 은혜가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변증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고 금방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은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좋다는 사실을 금방 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체험되고 설명되고 변호되어야 한다. 좋은 것은 마귀들도 흉내를 내어서 ‘짝퉁’이 많기 때문에 ‘우리 것은 짝퉁이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변호해야 한다.

반대자들-기적중지론자들-은 이런 공격에는 가히 천재적이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들이 직접 체험하지 못한 영적 현상이나 은사에 대해서 짝퉁 주장-가짜 주장-마귀의 장난-으로 몰고 가면 체험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득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9개 좋아도 1개가 심히 나쁘면 외면하는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비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성령 운동가들은 비판을 반박하는 분야에 무관심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핍박의 종교’라면서 반대파가 비판하고 핍박하면 참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도 핍박을 당하면 기뻐하라고 하셨고(마 5:10-12), 핍박하는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 5:43-44).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한 면만 알고 다른 면은 모르는 주장이다.
첫째, 핍박 받는 당사자가 분을 품고 복수를 꾀하면 본인에게도 좋지 않거니와(엡 4:26-27),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다(요일 3:15). 그래서 필자도 기적중지론자를 반박하는 글을 쓸 때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위해서 기도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잘못을 용인하라는 말은 아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새로운 사역을 대적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신랄하게 책망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 5:7-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15, 16 등).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성령충만을 받기 전의 제자들은 겁쟁이였지만(마 26:56; 69-75), 이후의 제자들은 담대하게 종교 지도자들과 맞섰다.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7-29).

일반적으로 은사자들은 내부에서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지만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령의 은사’는 담대하게 사용하지만 적에 대한 전략이 없고 ‘영적 내공’이 약하여서 외부 적들의 공격에 담대하게 맞서는 배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성령의 능력은 물론 적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반대 전략과 담대한 배짱도 있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할 때, 서슬이 퍼런 로마 가톨릭은 ‘만일 루터가 60일 이내에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나는 교황이나 위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양심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도 취소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비전을 이어 받은 장 칼뱅은 로마 가톨릭의 교리적 오류와 무능 및 부패를 과감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그러나 칼뱅의 치명적 약점은 이중 예정설, 하나님 주권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자유 의지의 약화, 그로 인한 전도에 대한 무관심이나 소홀, 기적중지론의 대중화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찰스 촌시와 같은 반(反) 부흥파들이 부흥운동을 비판하고 대적하자 조나선 에드워즈는 탁월한 성경 지식과 유려한 필체로 오히려 반대파들을 제압했다. 오늘날 조나선 에드워즈는 기억해도 찰스 촌시를 기억하는 자들은 드물다.

필자는 한국의 성령 운동가들도 이런 영적 스펙을 구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신학교에서 기적중지론만 배우고 기적행하는 은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한편 은사자들은 신학교에서 은사에 대해서는 배우지만 기적중지론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은사자들이 기적중지론을 배우지 않고 적들이 비판해도 반격할 방법을 모르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이다.

은사자들은 그래서 적들이 공격하면 되받아 치고 반박하면서 설득하기 보다는 기세에 눌려서 잠수 타 버리기-숨는 것-가 일수였다. 적들은 이미 이런 전략에 익숙해 있다. 인터넷이나 매스컴을 점령한 중지론자들이 말도 되지 않는 논리와 교리로 어떤 성령운동을 비판하고 공격해 버리면 그 동안 그렇게 좋다고 강조해 오던 지도자들이 모두 숨어버리고 침묵하기 때문이다.

핍박과 비판을 받으면 인내하고 용서하면서 참거나, 억울해서 이빨이 빠지고 사모는 화병을 앓다가 죽어가는 수모를 당해도 적극적으로 반박하거나 대적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양보하면서까지 기득권자들에게 절충안을 내세워 자신에 대한 ‘살생부’를 풀게 하거나 후원금을 바치면서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다.

최근 이름만 대면 금방 알만한 모 성령 운동 단체가 핍박과 공격을 두려워하여 성령 운동을 핍박하는 모 기독교 언론 단체에게 거액의 후원금을 지불하여 무마했다는 정보를 접한 필자는 가슴이 아팠다. 하나님의 성령을 전하는 단체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타협하는 것을 성령이 기뻐하실까? 과연 그런 곳에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실까?
 

-성령 사역을 변호하는 언론의 후원

한국의 반(反) 기업적 진보 언론은 역설적이게도 기업들이 양성했다고 한다. 기업들이 친(親) 기업적 보수 언론에 대한 후원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진보 언론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많은 후원금을 주다 보니 진보 언론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서 이제는 공해가 될 정도로 비대해져 버렸다고 한다.

한국의 기독교 언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국 기독교 언론의 절대 다수가 기적중지론적 입장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령 운동이나 운동가가 언론의 표적이 되면 이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기사를 공유하면서 초토화시켜 버린다. 그러면 그 운동은 순식간에 사그라져 버리고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이단이나 사이비로 낙인 찍혀 인터넷상에 영원히(?) 둥둥 떠다닌다.

그러면서도 성령 운동가들은 지금까지 성령 운동을 변호하고 비판을 반박하는 영적 특공대나 성령 운동 변호 언론을 만들어서 맞불 작전을 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필자가 『글로리아타임스』처럼 성령 사역을 변호하는 언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언급해도, “아, 내용 좋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정도에 그친다.

자신들이 중지론적 언론으로부터 공격과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론적 언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한국 교계에서 ‘기적중지론의 뿌리를 뽑아야 교회가 산다’는 인식에는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성령 운동이 성령 사역과 같은 ‘정규전’을 아무리 잘 해도 막강한 기득권을 가진 반대자들을 반박하고 대적하는 ‘특수전’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면 성장에 한계가 있다. 그런데 성령 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언론을 양성하고 후원하여 담대하게 맞서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더 이상 찍히지 않으려고 노출을 자제하면서 물 밑에서 조용히 사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적 특공대 양성

필자는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이 겨우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이단 제조자’ 또는 ‘이단 감별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다소 늦었지만 『글로리아타임스』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들 배후에는 지원하는 다수의 교회가 있겠지만 지원자들 또한 대부분이 목회자들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활동하는 영적 특공대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런 전쟁은 어떻게 보면 ‘특공대’와 ‘특공대’와의 전쟁이다. 그런데 필자는 기적중지론의 대부인 장 칼뱅을 비판하지 않고 잔챙이들만 쳐보았자 계속 악순환만 반복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는 책을 쓰면서 장 칼뱅과 칼뱅주의의 모든 기적중지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필자는 차제에 기적중지론적 주장을 맞받아치고 성령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파할 ‘영적 특공대’를 양성하려고 한다. 중지론자들은 어떤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면 그에 관련된 모든 지도자의 이름과 단체를 거명하면서 온 천하에 공포하기 때문에 그 위력은 생각 보다 크다. 그래서 ‘영적 특공대’를 양성하여 그런 ‘중지론자’나 ‘교리들’을 하나씩 때려 잡아서 성령 운동의 방해물을 뿌리뽑으려는 것이다.
 

종교의 성장과 타락-새로운 것은 ‘무식하고 저급한 방법’으로 온다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도 새로운 것은 무식하고 저급하고 희한한(?) 방법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많은 경우 기득권의 세력이 초기의 카리스마나 생동력을 잃어버리고 안정과 보수와 문약(文弱)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과 전통에 뛰어난 그리스 문명이 무식한 로마 문명에 제압되었고, 장장 천 년을 누리면서 성골과 진골과 육두품을 따지면서 문약에 빠져있던 신라는 서자 출신 왕족인 궁예(태봉), 하급 관료 출신인 견훤(후백제), 상인 출신의 주몽(고려)에 멸망되었다.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과 문명을 자랑하는 유럽을 방문했을 때, 한낱 시골뜨기 같은 소외감을 느꼈지만 그 미국이 유럽을 압도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카리스마틱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새로운 개혁과 부흥을 주도하지만 핍박과 오해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운동은 안정과 성숙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후진들은 성령의 새롭고 신선한 인도하심 보다는 설립자의 가르침과 전통을 이어받는데 골몰하면서 신학화, 교리화, 제도화, 관료화하면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자기들은 안정화, 성숙화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조주의화, 관료화, 죽은 정통화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설립자 때에 역사했던 성령의 가르침과 기름부음에 천착(穿鑿)하여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게 된다.

로마 가톨릭이 종교 개혁운동을, 종교 개혁가들이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미국에서는 반(反)부흥파들이 제1,3차 영적 대각성운동을, 20세기초에는 주류교단들이 오순절 성령운동을, 21세기에는 오순절 성령운동이 새로운 성령운동을 비판하거나 대적하고 있다.

그 근저에는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새로운 개혁과 부흥의 도구이며 자기들과 다른 가르침을 주장하는 새로운 주창자들(?)은 ‘급진파’가 아니면 ‘열광주의자들’이라는 고정 관념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운동을 하실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 기득권자가 아니라 주변의 광신자들(lunatic fringes)을 통해 일하신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루터나 칼뱅, 웨슬리 등은 초기에는 모두 주변의 광신자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득권자들에게 좋은 경종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통이다, 우리가 최고다’는 종교적 교만과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새로운 기름부음에 마음 문이 닫혀있는 자들을 우회하여, 편견이 없고 생소해 보이는 집단, 즉 주변의 광신자들을 통해 성령의 새로운 기름부음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득권자들은 자기들도 한때는 주변의 광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자기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게 성령의 새로운 기름부음이 임하면 대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기득권자들은 적반하장격으로 과거의 운동에 경도되어 오히려 새로운 성령 운동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의 대안은?

장로교 입장에서는 필자가 시조인 칼뱅을 비판하기 때문에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의 죄인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섭섭해 하거나 기분 나빠 할 필요가 없다. 칼뱅 또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비판 받아야 하지 않는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지 않는가? 후손들이 칼뱅의 잘못된 기적중지론을 바로 잡아주면 천국에 있을 칼뱅도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만일 시조인 모택동의 교지에 천착하여 경제적 실용주의를 택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약소국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등소평이 모택동의 노선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흑묘백묘(黑猫白猫)의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결과 단 기간 내에 G2에 돌입했듯, 한국의 장로교도 칼뱅의 교조적 기적중지론에서 하루 빨리 탈피하여 성령이 지금 세계적으로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경제적 실용주의 정책)

만일 은사운동을 직접 수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요즈음 미국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 칼뱅주의(New Calvinism)를 전향적으로 검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미국의 TIME(타임) 잡지는 2009년에 “현재 세계를 변화시키는 10대 사상”을 선보였는데 그중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종교 운동으로는 유일한 신 칼뱅주의(New Calvinism)이다.

이 운동의 주창자들은 칼뱅주의의 5대 강령에 입각한 구원론을 수용하며, 감정 보다는 심오한 교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 성화를 주장한 미국 제1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의 주장을 따르고, 문화적으로 친근하여 예배 시간에 CCM을 부름은 물론 탈 전통적이며, 기적계속론을 주창하는 개혁주의자들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 등이 주요 주창자인데, 미국 내에서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특히 보수적인 남침례교와 침례교신학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성장하고 있다.

장 칼뱅-프란시스 튜레틴-찰스 핫지 등으로 이어지는 ‘기적중지론이고 이성적이고 논증적인 구 프린스턴 신학’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한국의 보수 장로교가 장 칼뱅-조나선 에드워즈-존 파이퍼, 웨인 그루뎀 등의 ‘기적계속론적이고 경험적이고 은사적인 신 칼뱅주의’로 보완될 때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존 교단 내에서 어떻게 성령의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첫째, ‘초기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순복음 교단은 원래의 ‘영적 야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복음 교단이 성장과 정착기에 접어들면서 ‘무식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방언과 열정적인 기도를 등한시 하고 신학적이고 지성적이 되어 인간적으로 고상해 지려다 보니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요즈음에는 일부 장로교 교단에서 오히려 순복음 교단 보다 더 열정적이고 은사에 더 개방적인 교회가 더 많이 생기게 되었다.

둘째,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교단 정체성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령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교단의 전통이 깊어지다 보면 시조(始祖)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교단 신학’이 발목을 잡고 있어서 앞으로 나갈 추진력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미국 순복음 교단도 자기들 보다 앞서 가는 일부 성령 운동을 비판하고 이단시 하고 있다. 한국 순복음에서도 한때 내적치유나 음성듣기를 비판한 적이 있다.
 

-교사와 선지자의 차이

여기에서 교사-학자-와 선지자의 역할이 구분된다.
교사는 과거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잘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미리 알려주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새로운 운동은 이미 성경에는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교리나 가르침이 새롭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칼뱅이나 웨슬리는 선지자이자 교사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루터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칼뱅의 ‘이신칭의’ 교리는 로마 가톨릭의 ‘믿음과 행위를 통한 구원론’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교리였다. 웨슬리의 ‘완전 성화관’-물론 점진적 성화도 주장했지만-은 전통적인 ‘점진적 성화’ 교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교사는 과거지향적이고 선지자는 미래지향적이다. 전통적 교회는 교사들의 영향력이 크고 새로운 교회는 선지자들의 영향력이 크다. 여기에서 교리나 가치관 및 예배 스타일의 충돌이 일어난다. 과거지향적 교사들이 많은 전통적 교회에서 새로운 운동과 가르침을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경에는 있지만 우리가 몰랐던 어떤 진리가 어떻게 새롭게 드러날지 모른다. 그러므로 좀 안다고 하는 교사나 지도자들은 항상 개방된 자세로 성령의 새로운 가르침에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과거의 잣대로 현재 성령이 하시는 일을 대적하고 비판하면 이것은 성령 소멸죄가 되고 심하면 성령 훼방죄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성령 운동이 ‘몬타니즘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 못지 않게 더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후기

두 번의 강의와 질의 응답 시간 중에 많은 참석자들이 강의에 상당히 도전을 받은 것 같았다. 특히 성령 운동을 적극 변호하고 비판을 반박할 ‘영적 특공대를 양성하겠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몇 명이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

모 박사과정 후보생은 학위 논문 주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도전을 받아서 자기의 박사 학위 논문을 ‘칼뱅주의와 기적중지론’으로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식 강의를 끝내고 프리 토킹을 하던 중, 어느 목사는 오늘의 강의는 현재 순복음 교단의 문제점과 대안을 정확히 제시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순복음 교단이 이전에 그렇게 공격과 핍박을 받았을 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과감하게 대적하고 변호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한 것을 안타깝고 부끄럽게 여겼다.

다른 목사는 순복음 교단이 외부로부터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다 보니 방언도 절제하면서 학문에 치중하여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는데, ‘순복음 교단은 방언과 열정적인 기도 운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강사의 말에 도전을 받았다고 한다.

또 어떤 목사는 ‘일반적으로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이라서 단결이 잘 되지 않고 동시에 두려움도 많다면서, 아프지만 꼭 필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강사는 생각한 것 보다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에 놀랐다. 순복음 교단 내에서부터 새로운 성령 운동이 다시 일어나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교정을 떠났다.

[광고 사항]

성령치유 및 은사집회 :

강사: 구요한 목사. 날짜: 3월9일(수) 오전 10시. 장소: OO교회

강사: 서은혜 목사. 날짜: 4월6일(수) 오전 10시. 장소: OO교회

       (*교회 이름은 필요나 요청에 의해 공개하지 않습니다)

        ☞강의 및 집회 문의 : 010-7522-0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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