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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한칼럼⑩] 성경교사, 은사자 및 영성가였던 사도 바울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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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28  23: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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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한칼럼⑩]

성경교사, 은사자 및 영성가였던 사도 바울

-당신은 어느 쪽을 강조하는가?-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따를 수 없는 독특한 길을 걸어갔지만 동시에 ‘신앙인’ 바울로서는 우리의 좋은 사표(師表)가 된다.

일반적으로 보수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을 주로 성경 교사-신학자-로 간주한다. 전통적 신학교에서 신학 논문을 쓸 때 ‘바울 신학’에 대한 주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개혁주의에서는 ‘이신칭의’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어느 성경 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그러면 바울은 성경 교사에 그치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뛰어난 성경 교사요, 탁월한 은사자요, 심오한 영성가였다. 성경 교사가 되기 전에 바울은 은사 사역자로 시작했다.
 

은사 사역자 바울

크리스천을 핍박하던 사울이 바울이 되고 은사 사역자가 된 것은 본인의 직접적 체험 덕분이다. 바울은 회심부터 특이한 체험을 한 사람이다. 크리스천들을 체포하기 위해 기세도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말 타고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급진적 회심’을 한 사람이다(행 9:1-9). 이 체험으로 사흘 동안 봉사가 되어 금식 하던 중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충만하여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곧 바로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다(행 9:17-20).

바울은 예수의 환상을 통해서 선교지를 결정했다(행 16:9).
바울은 빌립보에서는 점치는 여종에게 역사하는 파이손이란 귀신을 쫓은 탓에 수입원을 잃어버린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체포하여 곤욕을 치르게 했다(행 16:18). 체포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을 부르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저절로 옥문이 열리고 기적을 목격한 간수가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16:25:32).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안수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6). 설교 중 졸다가 높은 데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는 바울의 기도로 다시 살아났다(행 20:9-12).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지만 해를 받지 않자 섬 주민들이 그를 모셔서 신유 집회를 갖게 되었다(행 28:1-10).

이처럼 바울은 성령충만을 받아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여러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돌본 탁월한 은사 사역자이다.

이후 기록한 서신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정리한다.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8).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기적중지론자들은 바울 같은 사도들과 동역자들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그들의 기적 사역은 '구속사적'으로 독특한 '계시적 사건'이므로 교회 시대 신자의 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자기들의 무경험을 변호하기 위한 인간의 논리에 불과하다. 신자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경 말씀 대로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다.
 

성경 교사 바울

성경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는 성도라도 사도 바울이 신약의 서신서 13권-히브리서까지 포함하면 14권-을 쓴 뛰어난 성경 저자이자 성경 교사 및 신학자라는 사실을 잘 안다. 성경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교회에서 그렇게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서로 보면 은사 사역자 바울이 먼저이고 성경 교사 바울은 나중이다. 바울이 쓴 서신서는 사도행전적 표적과 기사를 통해 설립된 각 지역 교회의 구체적인 교리적, 관계적, 윤리적 문제를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교회의 사역 방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님과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통한 ‘기적적 사역’에서 서신서의 ‘목회적 사역’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기적에 대한 무경험’을 바탕으로 한 주장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서에 등장하는 교회들은 바울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개척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제1,2,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설립된 교회들에 구체적인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각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록한 책이 곧 서신서들이다.

하나님이 바울 한 사람을 통해 수많은 서신서를 기록하게 하신 것은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당시 최고 학문가인 가말리엘의 제자일 정도로 뛰어난 유대 율법학자였기 때문이다. 성령충만한 바울이 풍부한 구약의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역을 기록한 서신서는 만대에 길이 남을 귀중한 가르침의 보고이다.

어떤 사람들은 빌립보서에는 기적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으므로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줄이고 줄여서 기록한 책이며, 훨씬 이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에서 구체적으로 다룬 문제를 굳이 빌립보서에서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빌립보에서는 바울이 점 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는 홍역을 치렀었다. 그러므로 서신서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기적과 상관 없는 교회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침묵에 의한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이라고 한다.
로마 천주교는 ‘마리아 승천설’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마리아가 죽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사람들이 화장실 갔다는 기록은 있는가? 그렇다고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지 않는가? 또한 중지론자들의 주장대로 목회 서신서인 디모데전·후서의 시대에 와서는 ‘십자가’에 대한 중요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디모데전·후서에는 ‘십자가’란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역의 방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음서·사도행전의 ‘기적적 사역’에서 서신서의 ‘목회적 사역’로 전환했다는 패러다임과 ‘기적적 사역’은 전도와 선교의 모델이고 서신서는 그런 체험을 한 성도들을 위한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을 위한 ‘목회적 사역’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 대로 하면 사도행전은 기적적 사역의 모델이고 서신서는 목회적 사역의 모델이다. 이 둘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은사적 교회는 ‘기적적 모델’을 강조하고 기적중지론적 교회는 ‘목회적 모델’을 강조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대로 기적적 모델과 목회적 모델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기적적 사역’만 강조하고 ‘목회적 사역’을 무시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생동력은 있지만 균형과 성숙에 뒤지기 마련이다. 한편, 목회적 사역만을 강조하면 교회가 차분하고 안정은 될 지 모르지만 생동력과 역동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영성가인 바울

은사 사역자이자 성경 교사인 바울은 동시에 영성가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힘쓰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정화시키는 자’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마땅한 성경적 용어가 없어서 영성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더 좋은 용어가 있으면 언제라도 수정할 의향이 있다. 혹자는 성경의 ‘경건’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주창하지만 기독교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영성, 영성가라는 말이 오히려 시의성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은사 사역자이자 성경 교사라는 사실에는 쉽게 동의하지만 영성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은 드물 것이다. 필자 또한 바울을 성경 교사이자 신학자라는 인식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은사를 받고 나서야 바울 또한 탁월한 은사 사역자라는 사실을 재인식했다. 그러다가 한참 후, 필자가 친밀한 교제와 관상 기도, 사막의 교부들의 영성에 눈을 뜨게 되자 바울처럼 위대한 영성가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통한 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사람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면 행위구원론자나 율법주의자로 몰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책임있는 반응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신학자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때로는 십 년 가까이 신학 공부를 한다. 성서 원어는 물론 각종 외국어들, 머리가 깨어질 정도로 수많은 책들을 읽고 소논문을 쓰고 학위 논문을 쓴다. 이 공부를 누가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학생은 책만 들고 있으면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가? 비록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기도는 하겠지만 실제로 공부하고 암기하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학생 자신이다.

그렇다면 이 학생이 나중에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렇게 힘들게 공부한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사람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찬양 사역자를 보자. 은혜로운 찬양을 부르는 찬양 사역자들이 기도 한 번 강하게 하고 ‘아멘’ 한 후 강단에 오르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하면서 부단히 새로운 곡을 찾고 팀들과 연습을 한 후에 강단에 오르지 않는가?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도 한 번 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갖고 바로 강단에 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강해 설교를 하지 않는 한, 본문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한편의 설교를 탄생시키기까지 엄청난 영적 산고를 겪는다.

우리의 영성 훈련 즉 경건의 연습도 마찬가지다.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여기서 ‘연단하라’는 말은 ‘귐나조’ 영어로는 exercise yourself(NKJV), train yourself(NIV), discipline yourself(NASB)로 번역한다. 이 단어에서 체육관(gymnasiuym), 체육전문가(gymnasiast, gymnast)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성행하던 스포츠 행사를 염두에 두고 신자들의 영적 성숙과 경건의 연습을 스포츠 훈련에 비유한 것이다.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5-27).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스포츠 선수들이 어떻게 연습하는가? 기본적인 기초 체력단련에 더하여 자기 전공 분야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여 연습할 것이다.  스포츠 훈련의 기본은 반복훈련이다. 부족한 분야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는 반복 훈련을 한다. 훈련이 완전함을 낳는다(Practice makes perfect).

피겨 스케이터인 김연아는 고난도 과정인 3회전 플립+3회전 토룹 연속 점프의 반복 훈련을 하루에 수백 번씩 반복했다고 한다. 올림픽 탁구 선수였던 유승원은 백핸드 스트로크 훈련만 하루에 수천 번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의 사역 경험에 의하면 개신교에서 제일 약한 것이 반복적인 경건의 연습 즉 영성훈련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사람이 열심을 내어 반복 훈련을 하면 율법주의자나 중세의 사막의 수도승 같은 신비주의자로 폄하하는 편견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고질적인 기질이나 습성이 하루 아침에 고쳐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안수 기도 한 방에 담배를 끊거나 술을 끊고, 어떤 목사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돈에 대한 탐욕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와 능력을 많이 체험한 사람도 드물다. 말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충만하여 소경이 된 눈을 보게 되었고, 삼천층에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 체험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 족하다고 하지 않았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경건의 연습에 힘썼다.

-문화에 따라 다른 욕망 처리의 방법

요즈음에는 세상에서도 ‘자기 절제’를 잘 한 사람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을 장악하고 있는 '인도 출신' CEO들”이란 제하의 기사가 심심찮게 매스컴을 달구고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펩시, 마스터카드, 아도비 등 미국 내 유수 기업의 CEO로 인도 출신들이 급부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인은 ‘콩글리쉬’ 수준이지만 영어가 상용어이고 수학과 컴퓨터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다. 필자가 미국에 거주할 때 동네 컴퓨터 교육 기관의 강사들이 대부분 인도 계열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도인의 민족성이나 영성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의 영성은 욕망 부인형이다.

인간의 욕망을 처리하는 방법이 문화마다 다르다고 한다. 중국의 사상가인 양수명은 서구식, 중국식, 인도식으로 대별한다. 서구식은 욕망 충족형이다. 욕망 충족형은 적극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문화이다. 이런 성향 덕분에 서구는 찬란한 물질 문명을 이루었다. 그러다 보니 욕망이 탐욕화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중국식은 현실 안주형이다. 전형적인 중국인은 지붕이 비에 새면 지붕을 고치는 대신 밑에 물받이를 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형이다. 양수명은 만일 중국이 19세기에 서구와 문명 충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시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도식은 어떤가? 현실 안주형 보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는 욕망 부인형이다. 상황이나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상황이나 문제를 아예 취소하려고 한다. 이런 성향의 인도가 경제적, 물질적으로 궁핍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인도식의 욕망 부인형이 욕망 충족형인 미국에서는 위력을 발휘한다. 서구인의 욕망 충족형이 최악에 달하면 월스트리트 금융가적 탐욕으로 이어지고 생활이 난잡해 진다. 그런데 욕망 부인형의 삶이 몸에 배인 인도인들은 수녀 수준으로 자기 절제에 뛰어나다고 한다. 또한 인도인의 리더십은 포용적 스타일이라 독재적이고 통제적 리더십을 경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어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문성과 도덕성을 제대로 갖춘 인도인 경영자들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 한국인은 두뇌는 뛰어나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정상급 리더가 드문 것은 이런 훈련이 결핍된 탓이 아닐까?

우리 한국인은 욕망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해방 되기 전까지 한국인은 중국식 현실 안주형과 불교와 무교가 가미된 무속적 치병구복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6·25사변의 참변을 겪으면서 숙명처럼 욕망을 억누르면서 가난하게 살다가 군사 혁명에 의한 경제 개발로 인해 움츠렸던 욕망이 한껏 살아나는 욕망 충족형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도 나도 ‘잘 살아 보세’에 도취되어 높은 교육 수준과 열정적인 헌신 덕분에 대한민국은 이제 해방 70년 만에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욕망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욕망 충족은 얼마 전부터 답보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세계인들은 경탄의 눈초리로 한국의 발전상에 놀라지만  정작 한국인은 빈부 격차가 심하고 미래가 없는 헬조선(Hell Chosun)을 떠나고 싶어한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욕망 충족형에 경도되다 보니 ‘현실 만족’과 ‘욕망 부인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대가는 너무나 값비싸다. ‘잘 살아 보세’에 편승하여 성공과 출세를 거머쥔 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이 국회 청문회에 나와서 윤리도덕적 치부가 드러나는 바람에 평생 쌓아 올린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개 청문회가 아니더라도 성 추문이나 뇌물 수수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전문인들도 너무나 많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은사적 교회나 비은사적 교회의 구분 없이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이 서구의 건강축복 복음[Health-Wealth Gospel]에 편승하여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한 업적은 어느 정도 있지만 ‘자족’과 ‘절제’를 가르치지 않아서 이제는 오히려 성공이 짐이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한국 사회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봉사와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종교 선호도는 불교와 천주교에 이은 꼴찌다. 왜 그런가? 한 마디로 욕망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명 지도자들의 추문-돈, 성추문, 명예 등-은 한국 교회 전체의 성향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의 대표적 영성

왜 그럴까?
교회가 바울의 ‘신학’과 ‘은사’는 가르쳤지만 바울의 ‘영성’은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울의 대표적 영성은 무엇일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다.

-자기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귀하게 여기는 영성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배설물로 여겼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 관계적으로 아는 고상한 지식 보다는 눈에 보이는 큰 사역, 세상적 성공과 출세를 더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기 위해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것과는 정 반대이다. 누구나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많다.

뼈를 깎는 회개를 통해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이 눈에 보이는 각종 집착과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면 더 이상의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의 국회에서도 인사 청문회를 통해 고위공직자의 전문성과 도덕성을 시험할 만큼 세상이 변했다. 더욱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탐욕과 집착을 제어하지 못하면 더 이상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왜 탐심이 우상 숭배인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드는 것,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는 모든 것이 우상이고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돈, 가족, 명예, 사역 등 이 모든 것을 청지기적 자세로 다루지 않으면 금방 우상이 되어 버린다.

청지기적 자세로 다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동기가 순수해야 하는데 동기를 순수하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타락으로 인해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 영광과 세상 영광을 누리려는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마음의 동기와 상태-를 보시는 분이시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똑 같은 일을 해도 마음의 동기에 따라 사람 영광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 마음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마음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의 동기가 순수하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간단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현재 가진 것, 현재의 기득권을 아무런 미련이나 조건 없이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시험에 합격이다. 이 정도 되려면 비우는 훈련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런 훈련을 하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빈부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

사도 바울은 또한 풍부와 가난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필자도 ‘절대 가난’은 반대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고, 인생을 살다 보면 빈부의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빈부의 정도가 신앙의 징표라는 기복적 신앙은 반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영성을 배우면 빈부가 내면의 영성이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외부에 있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할 만큼 상황이나 환경에 상관 없이 심령천국을 누린 사람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나 한국 사람들이 현실에 맞추어 ‘욕망 충족’, ‘현실 만족’ 및 ‘욕망 부인’의 진리를 닦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진 자는 나누어주기를 힘써야 하지만 못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도 욕망을 절제하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욕망을 부인하는 훈련도 해야 한다. 신자들의 삶은 이생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이생에서 좀 못 가졌더라도 저 천국의 큰 상급을 바라면서 얼마든지 희망찬 삶을 살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지나치게 세상적이고 현세축복 중심이 되어서 이 땅에서 모든 축복을 받아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통한 내면 정화 및 천국 상급-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교만과 시기와 파당에서 벗어나는 영성

사도 바울의 영성을 배우면 좀 가졌다고 교만하고 좀 갖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갖거나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잘 난 것 보다 오히려 못 나고 약한 것을 자랑한 사람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2:5).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은 무엇을 조금만 가지면 교만하고 못 가진 자를 업신여기고, 못 가진 자는 열등감을 가지거나 가진 자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사역자들도 마찬가지다. 사역이 좀 잘 되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 안 되면 위축된다.

사역자들 간의 시기와 갈등 또한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전의 어느 목회자는 자기가 임원으로 섬기는 한 단체의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동료들 간의 시기와 질투를 목격하고 진절머리가 났다고 한다. 선교지에서 선교사 간의 시기와 질투가 선교 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특히 은사자들 간의 교만과 안하무인, 시기와 질투는 악명이 높다. 수많은 이단 시비도 결국은 내 사역을 내려놓지 못하는 탐욕과 집착,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 많다. 시기와 질투가 심하면 당이 생기고 분열이 생겨 서로 물어뜯으면서 싸우게 된다.

한국 사람은 배 고픈 것은 잘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잘 참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 참소와 모함을 잘 하는 민족이다. 이조 5백년의 당파와 모략 중상의 역사가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를 하면서까지 내 사역 키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천만의 말씀이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온갖 수고를 다하고도 악한 종이라고 버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훈련을 제대로 하면 이런 악성 종양도 뿌리 뽑을 수 있다.

또한, 요즈음 교회의 설립자가 물러나고 후계자가 들어서면서 파당이 생겨 양쪽이 철천지 원수가 되어 서로 물어뜯는 교회가 많다. 이중에는 유명한 교회들도 많다. 나름대로 무슨 훈련, 무슨 사역으로 한때 유명했던 교회들이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어떻게 훈련시켰기에 후계자 한 명 때문에 이전에는 서로 하나가 되었던 교인들이 저렇게 원수가 되어 피 터지도록 싸울 수가 있단 말인가?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씁쓸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불의한 세습에 의한 분열은 예외로 치더라도 새로운 지도자로 인해 서로 분열하여 싸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양쪽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라도 해보았을까? 양쪽 모두가 비우고 내려놓는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교회에서 아무리 이런 훈련 저런 사역을 많이 해도 이런 것들이 욕망과 집착, 시기와 파당 등을 뿌리뽑는 영성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런 훈련과 사역은 단지 신자들이 교회 생활 잘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국 교회에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들은 많지만 성도를 하나님 앞의 ‘거룩한 신부’, 진정한 ‘영성가’로 단장시키는 훈련은 보기 드문 것 같다.

그 대가는 교회가 갈등에 쌓일 때나 지도자가 교체될 때 여지 없이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교회 전체가 세상 사람의 눈에 부도덕한 단체로 보이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이런 죄악 때문에 한국 교회에 대해 진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회개해야 할 죄악들

불교에서는 탐(탐욕)·진(분노)·치(무지)가 모든 번뇌의 원인이라고 하면서 이 세 가지 제거에 힘쓰고 있다. 기독교회는 역사적으로 나태·교만·시기·정욕·분노·탐욕·탐식을 7대 죄악(seven cardinal or deadly sins) 으로 간주해 왔다. 이 죄들이 가장 극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죄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나쁜 죄악의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는 대표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죄는 물론 여러 가지 죄악의 해악상을 단호하게 경고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들

“16.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6-19).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짓는 죄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이런 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면 하나님이 죄를 짓게 방치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 중의 하나가 바로 죄의 방치 곧 신적 유기이다.

-육체가 저지르는 죄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여기서 말하는 ‘육체’(헬라어 사륵스, flesh)는 몸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죄된 인간성 전체를 의미한다.

-불의한 자들이 짓는 죄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땅의 지체가 저지르는 죄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8).

‘땅의 지체’는 옛사람이 갖고 있던 죄의 본성을 말한다. 이런 것은 예수를 믿어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죄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말세에 저지르는 죄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런 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이런 죄들은 비록 신자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저지르는 죄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당위적 원론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의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들 모두를 한 장의 종이에 적어서 매일 읽으면서 회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났지만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첫째, 죄는 뿌리가 깊어서 한 번 회개한다고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이 한 번 미워한 죄 회개한다고 마음 속의 분노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째, 회개만 하면 주눅이 들기 쉽다.
아무리 회개해도 죽을 때까지 모든 죄를 다 회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필자가 오랫동안 해오면서 많은 열매를 맺은 방법이 있다.
 

-회개와 변화의 방법 

첫째, 가장 고질적 죄악 한두 개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회개하라

필자는 초기에 염려와 불안을 죄로 여기고 집중적으로 회개하여(마 6:31-34) 삼 개월 정도에 뿌리를 뽑았다. 그때 이후 환경은 수시로 변하지만 염려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많은 경우 심령천국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우상 숭배를 오랫동안 해 온 한국 사람들은 특히 염려와 불안과 걱정이 심하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염려와 불안의 뿌리를 뽑은 것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필자는 또한 영성훈련의 기본이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이런 훈련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좋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내가 원했던 일 보다는 원하지 않았던 일, 남들이 모두 가는 넓은 길 보다는 좁은 길을 많이 걷게 하셨던 것 같다.

그외에도 우리가 고쳐야 할 옛사람의 성품들이 많다. 상처로 인한 분노, 또 자유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이나 기적중지론자가 갖는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의심, 또는 사람에 따라 혈기, 고집, 정욕 등을 이런 식으로 해결한 사람이 많다. 이런 ‘중요한 일들’은 사역이나 은사와 같은 ‘긴급한 일들’ 때문에 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해놓으면 일상의 삶에서 심령천국과 관계천국을 누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보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편 이런 훈련을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나쁜 기질이 올무가 평생 쌓아올린 업적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기 쉽다.

둘째, 반대되는 좋은 것으로 채워라

성도의 성화는 회개와 믿음의 연속 과정이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것이다. 죄만 회개하면 주눅이 든다. 신자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는 것이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회개의 보상은 반대되는 좋은 것으로 채울 때 일어난다.
회개 자체는 재미 없고 지루한 과정이다. 처음에는 아무리 비우고 채워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뒷맛이 좀 편안하고 잔잔한 기쁨이 임할 뿐이다. 그러나 의지력을 발동하여 오랫동안 뽑고 채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강렬한 돌파’가 일어난다. 그러면 마치 태고의 고요와 적막 가운데 들어가는 것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이 임한다.

필자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성령 체험도 많이 한 편이지만 새마음 회개훈련을 통해 체험하는 성령 체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필자는 이 맛에 새마음 회개훈련을 오랫동안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영성훈련 

결국 말씀이나 은사나 영성훈련은 모두 우리가 이런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돕는 수단들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신자들은 성경 말씀, 성령의 은사 및 영성훈련을 통해 나는 물론 이웃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게 해야 한다.

이것은 곧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세상의 악한 풍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죄악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죄와 세상을 따르는 겉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것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가게 될 것이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4-11).

물론 이런 훈련이 쉽거나 화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 성숙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이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많은 은사를 받아서 큰 사역을 하더라도 내 영혼이 주님 보기기에 합당하게 다듬어 지지 않으면 이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뛰어난 성경 교사요 은사 사역자인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7-8).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의 영성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수도원의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막 교부의 영성이다. 전자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를 추구한 것이다. 후자는 사막 교부들이 금욕적인 고행의 방법을 취해 가면서 내면의 욕망과 죄악을 치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훈련이었다.

당시는 종교 개혁 이전이므로 몇 가지 신학적 미숙이나 오류가 있지만 그런 잘못을 걷어내고 그들의 의도나 내용을 오늘날 개발된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수용하면, 이것처럼 귀중한 교회의 유산도 드물다.

수도원의 영성가들이 말하는 ‘영적 결혼’(spiritual marriage)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합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회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한 금욕으로 ‘신화’(神化. deification)를 이루려 한 오류는 있다. 그들이 말한 ‘신화’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의미이겠지만 개신교가 말하는 ‘신화’는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결국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나 사막 교부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신앙 생활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런 수련을 어느 정도 쌓은 후 그들은 세상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섬겼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신앙의 기본에는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런 중요한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이 신학교에서 신학 좀 배우면 가르치려 하고 은사 좀 받으면 사역하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사역은 이론이나 능력 보다는 인격을 통해서 나와야 진정한 가르침, 진정한 사역이 된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이제는 사도 바울을 닮아서 성경 교사나 은사 사역자는 물론 영성가가 되어야 한다. 보이는 세상 것 보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얻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탐욕과 집착,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 것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영성가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셋 중 어느 한두 개를 중시하고 다른 것을 무시하면 절름발이가 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말씀 사역을 잘 하면 은사 사역에 약하고, 은사 사역이 강하면 말씀 사역은 약한 교회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이 모든 교회들이 영성 사역은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미 절름발이가 된 한국 교회, 이제 사도 바울을 닮아서 세 가지 모두에 매진할 때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도 바울과는 달리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사회 정의와 경제 정의 실천을 통한 사회 변혁에도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이 주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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