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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 재발견④]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인가성경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영언이다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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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21  21: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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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기도의 재발견④]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인가?

성경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영언'이다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4-13).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2-5).


방언의 성격

방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론자와 중지론자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방언, 도대체 무엇인가? 방언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성경의 방언은 영언(Glossolalia)이다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성령이 초자연으로 말하게 하시는 영적 언어이다. 절대다수의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상당수의 은사주의자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신학자인 스탠리 호튼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목적’은 달랐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방언은 성령세례를 증거하는 ‘증거적인 표적 방언’이고 고린도전서 방언은 덕을 세우는 은사적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1)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모두 영언으로 이해한다.2)

성경의 방언은 외국어(Xenoglossa, Xenolalia)이다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말하게 하신 ‘알려진 외국어 방언’이다. 절대다수의 중지론자들은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라고 주장한다.3) 그러므로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방언은 심리 현상, 자율 발성, 흉내내기 또는 학습효과라고 주장한다.4) J.I. 패커는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방언은 심리현상이지만 영적 유익은 있으므로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장 칼뱅의 잘못된 방언관을 이어 받은 존 맥아더, 노우호, 이창모, 정이철 등은 고전 12-14장에서 바울이 한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한 방언은 ‘가짜 방언’, ‘변태 방언’이라면서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방언을 척결해야 한다고 잘못 주장한다.6)

성경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자 ‘영언’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영적 언어라는 절충안이다. 상당수의 온건한 계속론자들이 절충안을 지지한다.7)

방언은 무아경의 지껄임이다

방언은 무아적, 환상적 도취 속에서 의미도 모르게 지껄이는 것이다.

이 견해는 중지론자들이 방언 말하는 자들을 폄하하고 조롱하기 위해 이방인의 방언 습성을 차용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의 경우, 방언자가 방언을 말하는 중에도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방언자가 임의로 방언을 중지하거나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견해는 설득력이 빈약하다.

필자는 방언이 영언이라는 첫째 견해를 지지한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기’ 때문에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칼뱅 이래로 절대 다수의 중지론자들이 지지하는 주장이다. 물론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영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외국어 방언이 드물게 나타난 사례는 있다고 주장한다.8) 그러나 절대 다수의 경우는 ‘외국어 방언’이 아니라 ‘영언’이다.
 

칼뱅의 잘못된 방언관

방언에 관한 칼뱅의 주석을 잠시 살펴 보자.

행 2:4주석: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방언은 다양한 외국어-헬라인에게는 헬라어, 히브리인에게는 히브리어-를 말하는 은사이다. 비록 베드로가 한 언어로 설교한 것을 알아들은 것은 그들이 갈대아 언어에도 익숙했기 때문이다.”9)

고전 12:10 주석: “방언들은 학습되지 않은 다양한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초자연적으로 말하는 은사이고, 방언 해석은 다양한 외국어들을 본국어로 해석하는 은사이다.”10)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속담에 의하면, ‘그는 자신에게 노래하고 음악의 신(神) 뮤즈에게 노래한다’고 한 것처럼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소리는 듣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즉 ‘성령의 은사에 의해(이것은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따른다) 비밀(들)과 숨겨진 것들을 말하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에서 비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 계시라는 좋은 의미로 해석하는데, 나(칼뱅)는 나쁜 의미로 해석하여, 모호하고 ‘그가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말한 것처럼 비밀스런 말들이라고 이해한다.”11)

오늘날 절대다수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칼뱅의 외국어 방언관에 살을 좀 더 붙이거나 빼는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칼뱅의 방언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성경의 방언은 ‘영언’(glossolalia)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라는 주장은 한 면만 보고 하는 소리다. 필자는 오히려 사도행전 방언은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첫째, 만일 120명의 제자들이 동시에 각각 다른 외국어-총 15개 외국어-로 말할 경우 소리가 혼잡하여 식별이 어려울 텐데 어떻게 자기 나라 말만 골라서 들었을까? 요즈음 음성 식별 기계가 발달해도 서로 다른 소리를 분리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둘째, 120문도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헬라어·히브리어·아람어가 아닌 “다른 방언들”로 말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다.” 유대인인 120문도들이 “다른 방언들”로 말했는데 다른 유대인들이 “자기들 언어”로 들었다. 초자연적 통역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12) 로드맨 윌리암스와 루터교 은사주의자인 래리 크리스텐선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13)

셋째, 다른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몰라서 120문도들이 술 취했다고 조롱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이들이 조롱한 이유는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만일 외국어 방언이었다면 왜 이들이 의미를 몰라서 조롱했을까?

넷째,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각 나라의 언어로 말했다면 왜 베드로는 그 다음에 한 가지 언어로만 설교했는가?(14절)

다섯째, 바울은 고전 14:9-11에서 방언과 알아듣는 말을 대조시킨다. 만일 방언이 외국어라면 알아듣는 말과 대조시킬 이유가 어디 있는가? 방언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알아듣는 말과 대조시키는 것 아닌가?14)

여섯째, 방언의 헬라어가 글로사이고 외국어도 글로사란 단어를 사용하므로 방언은 외국어이다?  언어란 표현에 한계가 있다. 동일한 언어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상이한 단어도 문맥에 따라 동의어로 해석된다. 고린도전서의 방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고전 14:2, 9) 이란 형용사가 분명히 따른다. 그런데 글로사란 단어만 따져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외국어라면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은 같은 의미인가? 여기서의 강조점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과 ‘죽은’ 믿음으로 오히려 서로 반대되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과 방언(언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일곱째,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송한다고 말했다(고전 14:15).
외국어 방언으로 어떻게 영으로 기도하고 영을 찬송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이었다.” 방언을 통역해 보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

정리하면,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 방언 현상이 가끔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주신 영언이며 오순절에 임한 방언은 말하는 기적과 듣는 기적이 동시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방언의 은사는 통역이 필요하다.

토론토대학교의 언어학자인 윌리암 사마린(William Samarin) 교수의 연구는 중지론자나 계속론자 모두 서로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한다. 사마린 박사는 5년 동안 유럽, 북미 등의 여러 나라에서, 여러 소그룹 모임은 물론 대형집회에 참석하여, 오순절주의자와 은사주의자들을 상대로 연구조사 한 결과, 방언은 언어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언어처럼 말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언어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15)

존 맥아더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의 외국어 방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16) 필자는 오히려 이 연구가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방언 자체가 외국어 방언이 아니고 오늘날 방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방언이 불신자를 위한 표적인가?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 14:21-22).

필자는 이 책을 쓰면서 어떻게 해서 기적중지론자들은 어떤 구절들을 필자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희한하게 해석하는가에 대해 의아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주인공인 사도와 동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말씀을 담대히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성령 전이를 통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하는 모습이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중지론자들은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희한한 해석법을 도입하여 그런 것들은 모두 교회시대의 신자들의 본보기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3000명이 아무런 영적 현상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성령만을 받은 것은 모든 신자의 본보기라고 한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을 쫓은 것은 교회 시대 신자들의 본보기가 아니고, 믿음도 없는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이 귀신 쫓다가 당한 것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므로(행 19:14-16) 귀신 쫓는 것은 위험하므로 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또한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수많은 병자를 고친 것은 우리의 본보기가 아니고, 사도 바울 자신이 육체의 가시로 고생하고(고후 12:7), 디모데가 치유를 위해 포도주를 쓰고(딤전 5:23), 에바브로디도가 병 걸려 죽게 된 것(빌 2:25-27)을 강조하면서 은근히 신유 무용론을 주장한다.

중지론자들은 방언의 유익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좋은 것은 보이지 않고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라는 것만 강조하여(고전 14:22) 방언을 경원시하게 만든다. 같은 성경을 보더라도 계속론자는 기적이 일어나는 쪽을 강조하고 중지론자들은 일어나지 않는 쪽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독자 여러분은 문학이나 연극·영화·드라마을 볼 때 주인공의 언행에 관심을 가지는가, 엑스트라의 언행에 관심을 가지는가? 당연히 주인공의 언행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주인공의 언행이 곧 저자의 의도나 목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어찌된 셈인지, 적어도 기적에 관한 한, 성경을 볼 때 주인공인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우리의 본보기가 아니므로 따르지 말고 엑스트라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면 은사 받지 않은 것을 정당화하고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나 능력을 이런 식으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은사를 받으라’고 명령을 하지 않고 직설법과 명령법의 중간인 권면의 형태를 취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 14:5).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은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알아서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고전 12:11) 많은 경우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이 받는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기적이 사도시대에 중지되었다고 잘못 주장하여 신자들이 사모하고 구하는 가능성의 싹 마저 잘라놓은 것이다.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이라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온 교회 사람들이 한꺼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면 외부인이나 불신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이므로 공중 예배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혼자 조용히 방언기도를 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이 구절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방언 자체가 마치 복음인 것처럼 오도한다.17)

성경 어디에도 불신자들이 방언을 듣고 회심했다는 구절은 없다. 중지론자들은 방언에 대한 분명한 성경 구절은 이런 저런 핑계로 잘못 해석하고 성경에도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치 사도 바울이 외국어 방언 은사를 받아서 선교지에서 다양한 외국어 방언으로 선교했다는 소설을 쓰고 있다.

또한 만일 방언이 ‘불신 유대인을 위한 표적’이라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과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왜 방언 현상이 일어났는가?(행 10:46; 19;6). 이에 대해서는 방언은 이방인도 성령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8)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목회나 선교의 현장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고든 피는,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치켜세우면서 방언을 해야만 영적이라고 자만하던 그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 불신자가 시험이 들어서 오히려 구원 얻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 대신에 알아 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하라고 권면한다고 해석한다.19)


방언에 대한 신학적 설명들

학자들은 성령 충만이나 성령 체험을 통해 신자들이 방언과 같은 기적의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측면 보다는 어떤 현상에 대해 신학적, 이론적 설명 하기를 좋아한다.

몇 가지를 살펴 보자.20)

-방언은 언약 갱신을 위한 것이다. 일부 유대인 그룹에서는 오순절을 언약 갱신 절기로 지켰기 때문에, 오순절에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모국어로 들린 것은 누가가 오순절을 언약 갱신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순절은 추수절이지 언약 갱신절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방언은 바벨탑 사건의 전복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의 저주를 받은 인류에게 제자들이 방언을 말함으로써 언어의 소통이 일어난 사건이다. 물론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누가가 방언을 기록한 주목적이 단순히 언어 불통에서 언어 소통의 전복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당시 전 세계에서 모인 유대인들은 아람어나 헬라어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굳이 방언을 통해 소통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방언은 선교를 위한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있어온 주장이고 칼뱅을 위시하여 오늘날 많은 기적중지론들자이 선호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상상과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이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방언을 통해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순절에 방언을 통해 선교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방언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끈 후 베드로의 아람어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회심한 것이지 방언을 통해 회심한 것은 아니다.

-방언은 교회 탄생의 표적이다. 사도행전에 의할 때 성령을 받을 때마다 방언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방언은  교회의 탄생을 맞아 새로운 사건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교회 발전의 이정표로서 왜 방언이 주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방언은 성령 세례의 우선적 증거이다. 초기는 물론 현재의 오순절파의 주장으로서, 방언은 성령 세례의 ‘우선적 육체적 증거’(initial physical evidence)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나 은사주의자들도 이 견해를 비판한다.

-방언은 성령 체험의 증거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은 7가지 경우 중(행 2:4; 4:8, 31; 8:18; 9:17-18; 10:45-46; 19:6), 3번이나 방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포함한 신령한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 명령한 것을 감안할 때, (능력)성령 세례나 성령 체험을 할 때의 외적 표적으로 방언을 받는다는 주장은 여러 견해 중 가장 유력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방언에 대한 기타 잡설들 

방언 부인자들은 장 칼뱅을 위시하여 존 맥아더, 노우호, 이창모나 정이철 같은 극단론자들은 물론 존경 받는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 존 스토트, 월터 카이저 등도 초자연적 은사인 방언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방언을 폄하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온갖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방언은 영적 고수들이 하는 것인가?21)

이창모는 방언에 대한 엉터리 해석이 드러나자 이제는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영적 고수인 셈인데, 실제로 고린도교인들이 윤리도덕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이므로 이런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영적 고수라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는 이창모의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삼손에게도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임했고(삿 14; 6, 19), 말세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지므로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본다고 했다(행 2:17). 그렇다고 이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는가?

은사를 받았다고 자기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가 받은 은사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주장도 문제다. 은사나 성령의 외적 능력은 신앙 성숙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창모의 논리대로라면 그렇게 교리 바르고 전통 바른 예장 xx교단에서 웬 추문들-논문 표절, 성 추행, 공금 횡령, 돈 선거 등-이 그렇게 많은가? 그렇다고 그들 교리나 전통 모두가 잘못된 것인가? 이창모는 남의 ‘티’를 겨냥하여 불화살을 퍼붓기 전에 자기가 속한 교단이나 단체의 ‘들보’를 좀 보기 바란다.

-역사적으로 방언 현상은 소수의 집단이나 이단들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현상이었다.22)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인 안토니 후크마(훼케마)는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난 것이며 방언 현상이 교회사적으로 있었다 해도 소수의 집단이나 몬타너스 같은 이단에게만 일어난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서는 만일 방언이 교회 시대 전체를 위한 것이라면 왜 하필이면 20세기에 와서야 방언 운동이 일어났느냐는 비판이 깔려있다. 이창모와 정이철 등 기적중지론자들이 즐기는 잘못된 논증 방법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첫째, 역사는 누구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승자인 수양대군(세조)의 입장에서 기록한 조선의 역사는 당연히 세조는 치켜세우고 조카인 단종을 무능하고 잘못된 사람으로 기록한다. 마찬가지로 정통을 표방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의 입장에서, 교회사적으로 나타난 은사운동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록할 리가 없다.

둘째, 교회사적으로 나타난 은사운동에 대한 연구와 재해석이 최근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도 시대 직후의 ‘신생한 어린 교회’는 로마 당국은 물론 각종 이단 사설과 싸우면서 성령의 능력 보다는 변증학이 발달하여 은사를 소홀히 취급하거나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설령 성도들에게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가 나타나더라도 교회가 조직화, 제도화 되어 사역의 중심이 성직자들에게 넘어가면서 설교와 가르침 및 목회적 돌봄을 성직자가 전담하게 됨에 따라 기적의 은사가 발휘될 장(場)이 소멸되거나 무시되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절대다수의 기적중지론적 교회에서 아직도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영적 은사에 대한 체험과 성령의 능력 보다는 교리와 전통에 매이고, 목사 중심의 교회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적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나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활성화하기는커녕 소홀, 무시 및 대적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이 자체의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것을 나중에 후손들이 보면, “아, 그 당시에 이미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았구나”라고 평가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요즈음 성령은사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의 은사를 개발하고 활성한 결과 평신도들이 소그룹이나 전체 회중들들에게 성경공부, 전도사역, 치유사역 및 중보기도 사역 등을 감당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 후대들이 이런 교회에 대해 평가한다면, “아, 교회에서는 그때도 기적행하는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났었구나”라고 할 것이다.
 

성경 진리의 점진적 조명

셋째, 성경의 진리는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성경 계시는 초기의 희미한 계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밝히 드러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만개된 것을 기록한다. 이것을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주요한 교리도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초대 교회 시대(~A.D. 600)에는 66권 성경의 정경화, 삼위일체 교리,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가 확립되었다. 중세의 1000년 암흑기를 지나 16세기 초에 마르틴 루터를 통해 ‘이신칭의’ 교리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점진적 계시와 대비하여 점진적 조명(Progressive illumin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 운동이 초대교회 이후 1900년이 지난 20세기에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점진적 조명’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만일 방언 운동이 20세기에 일어난 것을 부인한다면 종교개혁 운동이 16세기에 일어난 것도 부인해야 한다. 왜 루터, 즈윙글리 및 칼뱅은 교회사를 통해 1500년 동안 수용되어온 천주교의 교리를 전복시켰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거스틴, 터튤리안 및 크리소스톰 같은 이전의 교부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루터나 칼뱅이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성령 하나님의 조명으로 이신칭의와 오직 성경의 교리를 드러내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20세기의 성령운동도 이렇게 해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성령 세례 약속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단회적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잘못 주장하여,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인 ‘말세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행 2:17)고 약속하신 말씀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한편, 일부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들은 방언과 성령 체험을 한 자기들만이 진정한 신자이고 그렇지 못했던 이전의 신자들은 영적으로 합당하지 못해서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자 교만한 주장이다. 하나님이 오순절주의자들이 특별히 잘 났거나 영적으로 더 성숙하여 은혜를 부으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못 배우고 못난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전 1:26-31).

 또한,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 강림이 오순절과 사도시대 이후에는 전혀 없다가 20세기 초에 갑자기 다시 부어졌다고 잘못 주장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 개념을 도입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은 파종을 위한 이른 비이고 20세기 이후의 성령 강림은 추수를 위한 늦은 비 성령 강림이란 주장은 그 동안에는 하나님이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았다는 주장과 다름 없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종교개혁 운동, 웨슬레의 부흥운동, 미국의 제1,2,3차 영적대각성 운동, 무디의 부흥운동 및 20세기의 성령운동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통해 일어난 운동이다.


새로운 진리와 패러다임의 충돌

성령의 새로운 부어주심과 함께 새로운 진리, 새로운 가르침이 드러난다. 성경에는 있지만 묻혀 있거나 무관심했던 새로운 진리가 밝히 드러난다.  문제는 새로운 진리, 새로운 가르침은 늘 기존의 교리와 전통에 도전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자존심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규 집단을 핍박하고 대적한다.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죽기살기로 핍박하고 대적했다.

종교 개혁가들의 이신칭의 교리와 오직 성경으로의 교리는 당시 기득권자인 천주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대적한 것이었다. 천주교는 믿음과 행위를 통해 구원 받고, 자기들의 전통과 성경을 동격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후 100여 년 이상 유럽은 신·구교의 종교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웨슬리가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할 때 기득권자인 성공회는 성령의 외적 역사를 강조하는 웨슬리를 핍박하여 장소 대여를 금지하는 바람에 야외 집회를 않을 수 없었다.

초기의 오순절 운동, 은사운동도 모두 방언과 성령 체험을 강조하여 기존의 주류 교단들의 엄청난 핍박과 대적을 받아왔다. 그러나 1960년대에 성령운동이 기존 교단에 퍼지면서-은사운동-수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성령운동에 가담하면서 새로운 교리를 변증하고 방어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방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이러한 갈등의 연장선 상에 있다. 기득권자인 기적중지론자들은 ‘기적은 사도시대에 중지되었다’는 기적중지론에 경도되어 아직도 방언은 물론 다른 기적행하는 은사를 부인한다. 그러나 계속론자들은 인간이 무슨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해 성경에 있는 진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무수한 갈등과 투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요즈음 ICT기술이 워낙 빠르게 발달하면서 관련 사업도 급성장하게 되자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파이(pie, “밥 그릇”의 은유)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통해 신규 사업의 진입을 막지만 대세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매일 경제』(2016.2.15)의 “콜버스는 달리고 싶다”는 제하의 논설은 기득권자와 신규 진입자의 충돌을 이렇게 기록한다.

“1826년 영국에서 사상 최초로 증기기관을 탑재한 자동차가 등장했다. 그러나 증기자동차 보급은 실패했다. 당시 운송수단을 꽉 잡고 있었던 마차조합과 철도업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동차 보급을 막기 위해 의회를 설득해 규제할 법을 만들었다. 그 유명한 `적기조례(Red Flag Act)`다.

자동차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달리면서 자동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황당한 규정이다. 당시 자동차는 시속 30㎞로 달릴 수 있었는데도 시속 3~6㎞로 운행하도록 제한했다. 30년간 지속된 이 악법은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독일, 프랑스보다 뒤처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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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에선 신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어김없이 신구(新舊)세력 간 불화가 있었다. 산업혁명 직후 방적기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운동`을 벌인 게 대표적이다. 고종 때 구식군대가 별기군 창설에 반대해 일으킨 `임오군란`, 사이고 다카모리를 옹립한 일본 사무라이들이 칼의 휴대를 금지한 메이지 신정부에 저항한 `세이난 전쟁` 역시 신구세력의 극렬한 대립이었다.

기술 진보 속도가 빨라지면서 최근 전통산업과 신산업 간 충돌이 더 잦아지고 있다.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버스를 부르는 서비스인 `콜버스`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전세버스가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승객들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집 근처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는 방식이다.

심야 시간 택시 잡기 힘들었던 소비자들은 이 서비스에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데 택시업계의 반발이 만만찮다. 택시조합들은 최근 신문에 `창조경제의 미명하에 택시업계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광고까지 싣고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노선을 정하지 않은 버스는 불법이고 기존의 버스와 택시업계를 고사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강남·서초에서 무료 서비스 중이지만 반대 여론 때문에 론칭이 늦어지고 있다.

택시비의 3분의 1 가격인 데다 야간에 놀고 있는 전세버스를 사업 아이템화한 것이니 그야말로 혁신이자 창조다. 전통산업을 보호할 것인가, 혁신산업을 키울 것인가. 국토교통부가 콜버스의 허용을 놓고 고심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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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는 중고차 모바일 경매 서비스인 `헤이딜러`가 오프라인 주차장을 갖추도록 한 법 개정 때문에 사업을 접었다. 차량 공유 서비스인 `우버`도 택시업계 반발로 중단됐고, 숙박 공유 플랫폼인 에어비앤비도 숙박업 등록을 안 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불법 판결을 받았다. 쿠팡이 신병기로 내세운 당일배송 서비스 `로켓배송` 역시 기존 택배업체들이 반기를 들면서 불법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스타트업은 기존 플레이어들이 생각지 못했던 기술과 아이디어로 판을 흔들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싹부터 잘린다면 사회는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규제 공화국’인 한국과는 달리 불법 시비에 시달리던, 소유한 택시가 한 대도 없는 우버 택시회사의 시가 총액이 회사 설립 불과 몇 년 만에 전통적인 강자인 GM자동차나 포드 자동차 회사의 시가 총액을 초월했다. 검색 창 하나 달랑 있는 구글이 전통적 세계 최대 기업인 엑슨 석유와 스마트폰 강자 애플을 뛰어 넘고 시가 총액 세계 최대 기업으로 등장했다. 한국도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우버형 창조 기업을 대우하는 규제 완화에 매진하지만 기득권자들의 반대와 저항이 만만치 않다.

교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운동, 성령의 새로운 부어주심은 반드시 기득권층에 도전을 주면서 교인 이탈 현상이 일어나고 교계가 재편성된다.

이때, 피해자가 할 일은 두 가지다.
기득권에 안주하여 새로운 운동을 대적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인가? 전자에 안주하면 전통적 기업처럼 발버둥치다가 도태될 것이요 후자처럼 새로운 것을 적극 도입하면 성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존 맥아더나 정이철과 같은 극단적 중지론자들이 득세하는 일부 전통 교단은 아직도 전자를 택하여 대원군과 같은 쇄국정책을 펴면서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도 모르고 성령이 하시는 새로운 일도 모르는 자들, 지식이 없어 자기 의로 열심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쌍한 자들이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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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

*일부 기적중지론자들이 무엇 보다 ‘방언’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으므로, 다소 장황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어서 자료로 남기고자 한다. 성경적, 신학적으로 관심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Stanley M. Horton, The Book of Acts: A Commentary (Springfield, MS: Gospel Publishing House, 1981), 33; John R.W. Stott, The Message of Acts (IVP, 1990,) 67.

2) J. Rodman Williams, Renewal Theology II (Zondervan Academic Books, 1990), 215.

3) 성경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알려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

F.F. Bruce, The Book of Acts, NICNT (Rev., William B. Eerdmans, 1988), 51-53;
John MacArthur, Charimatic Chaos, 270-86 ; _______, Strange Fire, 133-54;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3), 33-51;
John Stott, The Message of Acts (IVP, 1990), 66;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81);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사역』 (한국기독교연구원, 1983),134-40;
안토니 후크마, 방언연구 (신망애출판사, 1972).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CLC, 2013), 213-21;
서철원,『성령신학』, 81-83;

4) D.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 77-86, 138-39에서, 외국어 방언 쪽에 기울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여서인지, Vern Poytrhress가 히브리어 문장에서 모음을 제거하고 대신 남은 자음에 아(a)를 붙이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과 비슷한 소리가 난다는 ‘자유 발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학습에 의해 흉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5) J.I. 패이커(패커),『성령을 아는 지식』, 269-78.

6) 성경의 방언은 외국어이고 고린도 교회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

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270-86;
______________, Strange Fire, 133-54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경남, 에스라하우스, 2014).
이창모, 『방언, 그 불편한 진실 』(Band of Puritans, 2014).
정이철,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 Books, 2015), 292-33.

7)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영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 절충론자인지의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에는 이쪽으로 분류한다.

D.A. Carson, Showing the Spirit;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172-73; The First Epistle to Corinthians, NICNT
          (Williams B. Eerdmans Pub., 1987), 569-712.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1069-79;
John Piper, http://www.desiringgod.org ;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킹덕북스, 2009) 등.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개정판, 두란노아카데미, 2008), 340-44.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IVP, 2011), 140-87.
이한수•막스 터너 저, 『그리스도인과 성령』(총신대출판부, 1991), 382-87에서, 터너는 바울의 방언은 외국어, 오늘날 은사주의자의 방언 및 천사의 방언 모두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387).

8) 오순절 방언운동의 효시인 찰스 파함이 1901년 1월1일 송구영신 기도회 때, 성령세례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그네스 오즈만(Agnes N. Ozman) 이란 자매에게 안수기도를 했을 때, 오즈마 자매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서 자매는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영적 방언이 아니고 중국어 방언을 하게 되었는데 3일 동안 영어를 말하려고 하면 중국어 방언-그것도 글로 쓰는 방서-가 나왔다고 한다.

이 집회기간 동안, 학생들은 ‘알려진 외국어’로 말했는데, 스웨덴어,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일본어, 노르웨이어, 불란서어, 항가리어, 이태리어 및 스페인어 등 21개 외국어-원어민들이 확인했다고 한다-를 말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외국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찰스 파함은 이에 힘입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면 외국어를 배우지 않고 선교사들이 선교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방언을 받고 현장에 나간 선교사들이 이후 외국어 방언이 나타나지 않아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Vinson Synan, The Century of the Holy Spirit, Kindle locations, 878-889/9967.).

막스 터너도 비록 외국어 방언에 대한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은 방언자들이 알고 있는 여러 소리들을 이리저리 합해 놓은 어절들의 집합이라고 주장한다(이한수·막스 터너 저, 『그리스도인과 성령』, 384-85).

그러나 김동찬 목사는 『교회와 신앙』(2015.7.17)에서 노우호 목사의 방언관을 비판하면서, 외국어 방언에 대한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데이브 로버슨(Dave Roverson)목사가 인터뷰 중 자기도 모르게 말을 했는데 나중에 독일 이민자가 로보슨 목사가 모르는 독일어로 독일 사람을 향해 연설을 했다고 말해 주었다. 로버슨 목사는 외국어 방언 경험을 19번이나 했다고 한다(김동찬, “방언 은사 지속 여부: 김동찬 목사⑦-데이브 로버슨의 외국어 방언도 귀신 속임수?”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96).

또한 캐네스 해긴 목사가 어느 집회가 끝난 후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이 해긴 목사에게 “어쩌면 그렇게 그리스어를 잘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해긴 목사는 자신은 단지 방언으로 기도했을 뿐이며 그것이 무슨 언어인지 몰랐다고 한다.

또한, 랄프 해리스 목사는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서 35년간 목회하고 25년간을 교단 국제본부 총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외국어 방언 사례에 관심을 갖고 전 세계에서 60여권의 자료를 모아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Spoken by the Spirit)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김동찬, “방언은사 지속 여부: 김동찬 ⑧-” 배우지 않은 외국어 방언 사례, 랄프 해리스 목사.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17).

이처럼 ‘외국어 방언’은 간혹 나타나지만 영언에 비해 사례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9)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10)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s to the Corinthians.

11) ibid.

12)  Simon J. Kistemaker는, Exposi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NTC (Baker Book House, 1990), 77-79에서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면서도 몇 가지 의문 점을 제시한다. 즉 신자들이 각 나라의 언어(방언)로 말했다면 왜 베드로가 나중에는 한 가지 언어로 설교했는가?(14절). 만일 군중들이 베드로가 한 설교를 이해했다면 그들은 헬라어나 아람어를 알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언어들”은 ‘유대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9절). 왜냐하면 그들은 아람어나 헬라어를 말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 높임을 들었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술 취했다고 조롱했을까?(13절)

 막스 터너는, 이한수·막스 터너, 『그리스도인과 성령』, 329에서, 하나님은 방언 보다 더욱 큰 은사인 방언 통역의 은사를 베풀고 있다고 할 수 없다면서 부인하지만, 하나님이 거짓 선지자인 발람에게 예언의 은사는 물론 당나귀의 음성도 듣는 은사를 주신 것을 감안하면(민 22:28)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는 방언’(akolalia)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한 가지 언어로 말하는 것을 여러 사람이 각자의 모국어로 듣는다는 뜻이므로 ‘다른 방언들’(other tongues)로 말했다(행 2:40)에 어긋난다.

13) J. Rodman Williams, Renewal Theology II, 215; Larry Christenson, Speaking in Tongues, 24.

14)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173.

15) William J. Samarin, Tongues of Men and Angels (New York Macmillan , 1972), xii, 103-28, 227.

16) 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278.

17) 방언은 ‘불신 유대인을 위한 표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John F. MacArthue, Charismatic Chaos, 282;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 47-48;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231-32;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119-20.

18) 정이철,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 Books, 2015), 329.

19)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238-44.

20)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187-97;
________, 『신약이 말하는 방언』, 114-27.

21) 이창모,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425

22) 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신망애출판사,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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