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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 재발견③]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고 열심히 사용하라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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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14  21: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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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기도의 재발견③]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고 열심히 사용하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리고 신령한 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라.
그러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 18, 일부 원문 개인번역).

   
 

“나에게 구할 마음이 없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려나 보다.”

“우리 교단에서는 방언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나도 그렇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 견해인가?
‘은사’ 특히 고전 12장이 말하는 ‘기적행하는 은사’(Miraculous gifts)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은사는 구하고 싶으면 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일부 기적중지론자들은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노력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그런데 필자는 왜 이런 사람들은 동일한 성경에 있는 고전 14:1는 보지 않는지 의문이다. 필자가 헬라어 원문으로 해석해 보면, 성경은 은사를 단순히 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신령한 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

 영어 성경들은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서 번역했다.

“eagerly desire spiritual gifts~”(NIV).

“desire earnestly spiritual [gifts,]”(NASB).
 

‘사모하라’에 사용된 헬라어 ‘젤로’는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열심당을 의미하는 ‘질로트’(Jealot)가 파생되었다. 그런데 왜 많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기는커녕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고  받아서 누리는 자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방언과 같은 기적행하는 은사는 사도시대에 중지되었다는 잘못된 신학(기적중지론) 탓이다.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이 이런 입장이다. 기적중지론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다루었으므로 반박 논증은 생략한다.1)

둘째, 고린도 교인들이 했다는 방언 자체가 ‘가짜 방언’이라는 잘못된 주장 탓이다.
복수로 사용된 방언(헬, 글로사이)은 바울이 애용한 ‘외국어 방언’인데 단수로 사용된 고린도 교인의 방언(헬, 글로사)은 가짜 방언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장 칼뱅의 잘못된 방언관을 존 맥아더가 개악했고 한국에서는 이창모 목사와 노우호 목사가 적극 수용하고 있다.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방언의 복수형과 단수형을 사용한 것은 주어나 관련된 단어의 수(數. Number)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방언기도의 비밀”을 참조하기 바란다. 2)


노우호 목사의 엉터리 방언관

얼마 전 경상도 지방의 목회자 한 분에게 이메일이 왔다.
교회의 직분자 중 한 명이 노우호 목사의 에스라하우스 성경공부에 참석 한 후, 방언 금지를 주장하다가 교회를 나간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알아보니 노우호 목사가 방언에 대한 성경의 원어 연구 등을 통하여 현대 방언은 모두 사탄의 방언에 놀아나는 방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우호 목사는 심지어 통성 기도나 내적 치유도 부인한다고 한다. 필자도 노우호 목사의 사이트를 방문하여 방언 관련 서적을 구입해 보려 했더니 회원으로 가입하여 구입하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이미 『교회와 신앙』에서 김동찬 목사가 노우호 목사의 방언관을 비판했고, 김동수 교수가 기고문과 저서를 통해 노우호 목사의 방언관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자료 목적 상 여기서도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한 마디로, 노우호 목사의 방언관은 장 칼뱅-존 맥아더로 이어지는 ‘가짜 방언관’에 자신의 엉터리 헬라어 해석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편집 비평을 가미한 엉터리 방언관에 불과하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을 검증하자』에서 “한국교회의 방언은 100% 거짓 방언이며 악령 운동”이라는 표현을 하여 소속 교단인 예장 통합으로부터 “극단적인 표현 순화”에 대한 경고를 받고 표현 순화를 약속했다.3)

그러나 일반 성도들은 그가 칼뱅(칼빈)을 들먹거리고 에스라하우스의 성경공부를 통해 지명도가 있고 전문가가 보기에는 엉터리 해석이지만 헬라어를 풀어 설명하므로 그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노우호 목사가 말하는 성경적 방언은, 존 맥아더의 잘못된 주장처럼 외국어 방언인데4), 오늘날 ‘외국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라 가짜 방언이 아니면 마귀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적 방언은 영언(Glossolalia)이므로 오늘날 은사자들이 하는 영언 방언은 당연히 성경적 방언이다.

노우호 목사도 이창모 목사와 마찬가지로, 존 맥아더의 잘못된 주장을 따라 5), 복수형 방언(글로사이)은 외국어 방언이고 단수형 방언(글로사)은 '가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방언의 단수형이나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가짜 방언’이나 ‘외국어 방언’이 아니라 주어나 관련 단어와 수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밝힌 바 있다.

노우호 목사는 고전 14장의 몇 개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사용한 방언을 가짜 방언으로 몰고 간다.6) 그의 헬라어 해석은 한 마디로 치졸 한 엉터리 해석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노우호의 방언관은 장 칼뱅-존 맥아더-노우호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잘못된 방언관 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제발 이런 엉터리 방언관을 가진 자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방언은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 은사인가?

셋째, 방언과 같은 은사는 성령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구해서 받는 것이라는 잘못된 주장 탓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의 협력 관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특히 자신의 노력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딴 사람들이 더 앞장서서 이런 주장을 한다. 만일 그렇다면 자기들이 오랜 세월 공부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자기는 팔짱을 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랐는가?

성경은 대부분의 경우, 구원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 의지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기록한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지만(마 6:32),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신다(마 7:7).

성경에는 이런 기록이 도처에 많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성령 하나님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지만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런데 존 맥아더는 여기에서도 꼼수를 부린다.
고전 12:31의 헬라어 원문은 ‘직설법’도 되고 ‘명령법’도 된다. 그러므로 맥아더는 자기의 입맛에 맞게 이 구절을 직설법으로 해석하여-“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구나. 그러나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구절로 해석하면서, 고든 피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고 말한다.7) 

그러나 고든 피는, 바울이 고전 12:31과 동일한 내용을 고전 14:1 및 고전 14:39에서 분명한 ‘명령법’으로 사용한 것을 감안할 때, 고전 12:31도 명령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 자신이 고전 12:31에서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것을 책망하고, 고전 14:1과 14:39에서는 ‘더욱 큰 은사인 예언을 사모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 14:12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후반의 내용을 볼 때,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수용하거나, 고전 1:7을 감안할 때 그들을 기특하게 여기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8)
 

마지막으로,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구하여서 받는 것이 아님은 물론 연습해서 받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 때문이다.9)

그러나 이런 것을 반대하는 정성욱 박사처럼 박사 학위 취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곽선희 목사처럼 설교 잘 하기 위해 설교학을 연구하고 책을 많이 보는 것은 괜찮고 방언 받기 위해 연습하여 안 된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발상인가? 이런 발상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경험적 발상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신령한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는 구절은 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고, 말씀 전하는데 전무하겠다는 말은 있지만 ‘설교 잘 하기 위해 노력하고, 박사 학위 따기 위해 노력하라는’’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대부분이 즉흥적인 설교를 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배우고, 설교 준비 하기 위해 주석을 보고 예화집을 보는가? '이런 식으로 설교 준비하라'는 성경 구절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신학교 박사 학위 따서 제자들을 양육했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는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적인 제도인 박사 학위자를 교수로 임용하여 신학생을 가르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곧 방언 받기를 훈련해도 된다는 대답이다. (필자는 설교 준비나 학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 받기 위해 훈련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 세미나를 통해 설교 잘 하는 법을 가르치듯, 방언 세미나를 통해 방언 받는 훈련을 시키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중지론자들에 비해서 신학적이나 인격적으로 더 잘나 방언 같은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니까 받는 것이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은사를 구하라는 선언적인 명령을 하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실제로 어떤 경우에 어떻게 받는가를 묘사한다.
 

방언을 어떻게 받는가?

방언을 포함한 은사를 어떻게 받는가
다른 곳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10),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행 2:4)

필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방언은 받은 편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쉽게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기도한 후에 받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아는 어느 집사는 방언기도를 구한 지 10여년 만에 받았다면서 좋아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전 12:31; 14:1)

언젠가 기도원에 참석할 때였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각자 기도를 할 때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한 청년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 성령 세례 주옵소서, 성령 세례 주옵소서~”

그는 이 말만 계속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순복음 계통에서는 아직도 성령 체험을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행 1:5)로 표현한다.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랄랄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비판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말씀을 듣는 중에 주신다(행 10:44-46).

-찬양 중에 주신다(눅 24:53; 왕하 3:15).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에 늘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찬양했다.
찬양과 성령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찬양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상대적으로 쉽고 강하게 임한다.

-안수를 통해 주신다(행 8:17; 19:6).

언젠가 성령사역 세미나를 할 때이다. 아는 목사 한 분이 친구 목사를 데리고 참석했다. 안수기도 시간에 그 친구 목사의 순서가 되었다.

“저는 신학도 다르고, 교단이나 교회에서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저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기도는 받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는 통상 하듯이 ‘은사가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안수 했다. 그리고 잊었다. 얼마 후, 아는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친구 목사가 수지 맞았다는 것이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때 안수기도 받은 후 방언이 터지고 음성을 듣고 환상도 보게 되어 너무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간구와 안수가 병행될 때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한다. 필자도 집회할 때 뜨거운 찬양, 간절한 기도 후 안수를 하면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성령 체험도 하고 방언도 하고 음성도 듣는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신다(행 2:33; 5:32).

한 동안 방언을 대적하거나 방언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지다가 마음이 변하여 방언을 받고자 하면 방언을 잘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방언을 무시하고 대적한 죄를 회개하면 금방 쉽게 방언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신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나 관련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은 교회 시대의 신자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모두 ‘특수한 시대’에,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임한 ‘특수한 현상’이라고 오도한다. 이런 주장은 자기들의 무경험이나 자기들이 기적의 은사를 구하지 않고 받지 않은 것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꼼수에 불과하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실제로 사모하고 구해 봐라. 성경 대로 은사를 받는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성경을 개신교 성경해석의 기본인 문법적·역사적으로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숨겨진 비의(祕義)를 찾아내듯 헬라어 해석이나 기록 배경을 왜곡하여 바울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성경 해석을 하여, 은사자를 비판하고 자기들이 은사를 사모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대로 하지 않으니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유럽 교회는 공동화 되었고 미국의 기적중지론적 교회들도 군소교단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한국 교회는 이제 수백 년 동안 개신교를 지배해 온 기적중지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기적행하는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 교회나 미국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어쩌면 지금 그 전철을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언을 열심히 사용하라 

방언을 받았으면 사장하거나 소멸하지 말고 바울처럼 당연히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11)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이미 방언 은사를 받았지만 신학적 이유, 남들의 눈치 등의 이유로 묻어두거나 잘 계발하지 않으면 사장(死藏)되어 있거나 잠자기 마련이다. 사장되었거나 잠자고 있던 은사는 계발하고 활성화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 1:6).

“불일 듯하게 하다”는 말은 ‘부채질로 불씨를 키워서 활활 타오르게 하다’(fan into flame, NIV), ‘다시 불이 타오르게 하다’(kindle afresh, NASB)는 뜻이다. 디모데가 다소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점을 염두에 두고 이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받아놓고도 이런 이유 저런 핑계로 사장해 놓은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나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만일 게으르게 사용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마 25:14-30).

바울은 또한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은사를 나누어주기를 원한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임파트)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

여기서 말하는 은사(카리스마)는 선물, 은혜도 되지만 성령의 은사도 된다. 기적중지론자들은 바울이 나누어 주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구원의 축복이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자들은 사도들이나 안수하여 나누어주었지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성경Q&A]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12)를 참조하기 바란다.


-은사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사도 바울

이처럼 바울은 은사에 대해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받은 은사를 사장한 디모데에게는 은사를 불일듯하라고 권면하고, 은사를 받지 못한 로마인들에게는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어했다. 바울 자신은 또한 누구보다도 방언 말함을 즐기고 애용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영으로 하는 방언 기도는 물론 말로 하는 기도도 많이 한 사람이다.

14. 내가 만일 방언(단수)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직설법 현재형)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직실법 현재형)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정리하면, 방언은 내용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영적 유익이 많으므로 바울 자신은 누구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고전 12:30), 고린도 교인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하면서(고전 14:5),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했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가짜 방언을 척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14장을 쓴 것처럼 오도한다.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도 바울이라고 하면 금방 ‘신학자 바울’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적 보수주의 신학교에서 바울은 서신서의 저자이며 특히 바울의 로마서는 구원론의 핵심이고, 성령론을 가르쳐도 바울의 성령론에 입각하여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바울은 신학자는 물론 방언하고 예언하고 신유와 축사를 행하는  은사자요, 환란 중이나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면서 심령의 평강을 누릴 줄 아는 신령한 사람이었다.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고든 피는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오순절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책망한다.13)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오순절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은 후에는 자신의 덕은 물론 공동체의 덕을 위해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여기서 말하는 유익은 은사자 본인은 물론 공동체의 유익을 말한다.

기적중지론자들은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예언을 강조하고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개인의 덕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개인의 덕이나 유익을 위한 방언은 이기적이고 자랑이나 하는 잘못된 은사라고 성급하게 결론짓는 데(고전 14:2), 이는 은사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유익’의 동사형인 헬라어 ‘쉼페로’는 개인의 유익을 위한다는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쉼페로)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쉼페로)”(마 5:29-30; 18:6 등).

또한,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듯, 은사를 가지고 타인의 덕은 물론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눈의 들보와 타인의 눈의 티의 비유에서처럼(마 7:3-5), 은사 좀 있다고 하여 자신의 영혼은 돌보지 않고 타인의 영혼만 돌보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더 많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가는 말 

정리하면, 우리는 무경험을 바탕으로 은사를 잘못 이해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의 왜곡에 대해 과감히 맞서야 한다. 성경은 방언을 포함한 기적의 은사를 간절하게 사모하고 구하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기적중지론자들은 이런 신학, 저런 논리로 성경의 은사를 부인하려고 한다.

기적중자론자들은 자기들의 알량한 신학으로 성경이 말하는 기적을 부인했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한국 교회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것은 교단이나 일부 신학자들은 비판하지만 은사적인 지역 교회에서 은사주의적 프로그램들-찬양과 경배, 중보기도와 철야기도, 소그룹 모임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탓이다.

기적행하는 은사 중에서 방언의 은사는 가장 기본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와 말씀인데, 방언 은사는 신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기도를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방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의 문이 열리면 각종 기적행하는 은사가 임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를 섬기는 도구이다.
동시에 신자들의 대적인 죄와 마귀의 세력들을 제압하는 가장 유용한 영적 무기들이다. 오늘날 서구 교회와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이 비틀거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초자연적 무기를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영전 전쟁에서 승패는 무기의 성능이 좌우하는데 인간의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영적 무기는 내평개치버리고 인간의 논리와 이론으로 다듬은 교리만으로 싸우려고 하니 중과부적인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기적중지론이라는 백해무익한 신학을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방언은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모든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고 받아서 열심히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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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

*일부 기적중지론자들이 무엇 보다 ‘방언’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으므로, 다소 장황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어서 자료로 남기고자 한다. 성경적, 신학적으로 관심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글로리아타임스』우측 배너 “기적중지론의 허구” 참조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5&view_type=sm

2) “[방언기도의 재발견②] 방언기도의 비밀,” 미주 3) 참조.『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06

3) “방언 검증 노우호 목사, 극단적 표현 순화 약속,”『교회와신앙』, 2015.10.08.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2

4) John MacArthuer, Charismatic Chaos (Zondervan, 1992), 278.

5) 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277. n. 15; _________, First Corinthians (Kindle location, 8087),

6) 노우호 목사는 고전 14장의 몇 개 구절을 다음과 같이 엉터리로 해석한다. 김동수 교수의 비판을 참조하여 그의 주장의 허구를 비판해 보자 (김동수, “노우호 목사의 방언 부정론 과연 성경적인가(하),”『뉴스미션』(2015.4.6). http://www.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61340

• 고전 14:2:

바울은,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한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꾸짖는 구절이라고 노우호는 주장한다.

개역개정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왜냐하면, 헬라어 ‘가르’)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 해석 :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헬라어 ‘가르’ 해석 생략)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but)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114).

이런 주장은 이창모의 디아트리베(diatribe) 주장과 비슷한 잘못된 주장이다. 이 구절은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방언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즉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14:28에서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분명히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노우호는 꼭 번역해야 할 ‘가르’(for, 왜냐하면)는 번역하지 않고 번역하지 않아도 될 de를 but(그러나)로 번역하여 뒤 문장 앞에 두는 오역을 범하고 있다.

• 고전 14:4.

노우호는 방언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는데 이는 교회를 세우는 것에 반대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 구절에 보면 성령의 나타나심은 단순히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의할 때 은사는 ‘본인’은 물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필자는 방언 은사를 통해 필자의 영혼을 살지게 하고, 에언의 은사를 통해 타인은 물론 필자의 미래도 알아보고, 지식의 말씀을 통해 필자는 물론 타인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잘못되었는가?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은사를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이런 해석을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다만 교회의 모임에서는, 방언을 사용할 때 개인의 유익 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하라는 권면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방언기도의 비밀, 미주 6”『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06을 보라.

• 고전 14:14:

개역개정판 : “내가 만일(ean=if) 방언으로 기도하면(가정법 현재형)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직설법 현재형)”

노우호 번역 :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가정법이므로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의 말이라면서 그는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만일(ean=if)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de=but)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단수형 변태 방언이고, 가정법을 사용했으므로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을 말한다고 가정하면’으로 해석한다. 헬라어나 헬라어 문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누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그런가 보다’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엉터리다.

이창모도, 바울이 여기서 가정법을 사용한 것은 ‘바울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김동수 교수가 특히 본문에서 가정법 현재형으로 쓰인 구문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혹은 기도할 때 마다]’라는 뜻이다(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 ed., 742)고 한 주장을 부인한다 (이창모, “영의 의미를 모르는 변태방언 옹호자 김동수,”『바른 믿음 』(2015.8.1)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310)

그러나 노우호 목사와 이창모 목사의 주장이야 말로 억지로 끼어 맞춘 주장이다.
영어는 물론이지만 헬라어에서 현실과 반대되는 가정법을 사용하려면 ‘가정법 과거형’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건절(ean=if)은(“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물론 귀결절(“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이 모두 현재형이다.

<ean=if 가정법 현재형>은 현실과 반대되는 내용이 아니라 조건을 갖추면 미래에 확실하게 어떤 결과가 기대되는 것을 말한다((Ernest De Witt Burton, Syntax of the Moods and Tenses in New Testament Greek, Fig Books, 2011, Kindle location, 2004). 성경 어디에도 가정법 현재형을 사용하여 현실과 상반되는 표현을 한 곳이 없다. 이런 경우는 모두 가정법 과거형을 사용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순수한 ‘가정법’이 아니므로 if를 when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즉 “내가 (나중에)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물론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즉, 바울이 지금은 내가 글을 쓰고 있으므로 나중에 ‘(실제로)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알아 듣지 못하는 영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실제로) 내용을 모르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영적 열매는 맺는 방언 기도와 내용을 알아들어서 마음도 열매를 맺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여기서의 핵심은 ‘알아 듣는, 이해하는’ 이란 뜻이다-를 병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고전 14;15).

• 고전 14:15

개역개정판 :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노우호 번역 : “만약 방언 기도가 있다면 미래에 영과 마음으로 번갈아 기도해야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

노우호는 헬라어 미래형을 상상력을 가미하여 위와 같이 잘못 해석한다. 원어 어디에도 “~번거롭겠는가”라는 표현이 명시되거나 암시된 곳이 없다. 노우호는 자기 생각을 성경 본문에 대입한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직설법 미래형’은 화자(話者)의 ‘주장’(assertion)이나 ‘약속’(promise)의 의미를 지닌다(Ernest De Witt Burton, Syntax of the Moods and Tenses in New Testament Greek, Kindle location, 690). 그러므로 15절은 바울이 미래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주장과 약속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편 존 맥아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프뉴마)에는 영, 바람, 호흡의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바울이 가정법으로 사용하여, “내가 비록 사도일지라도 너희가 말하는 지껄임을 말한다면, 내 마음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헛바람 소리를 내는 것에 불과하리라”(고전 14:15)로 말했다고 해석한다.

맥아더는 이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반드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ohn MacArthur, First Corinthians,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Kindle location 8179). 맥아더의 주장대로라면, 바울은 영으로 기도한 후 반드시 마음으로 기도했으므로, 바울이 ‘헛바람 소리를 내는 기도도 즐겼다’는 엉뚱한 주장이 된다.

• 고전 14:18, 39:

노우호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사용한 단수 방언은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 복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 고전 14:40:

노우호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개역한글판) 보다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개역개정판)가 더 좋은 번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방언을 말하지 않는 것이 품위 있는 것이고 방언을 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인가? 누구 기준의 품위인가?

• 노우호의 편집 비평.

노우호 목사는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편집비평법을 사용하여, 바울이 나중에는 방언의 은사를 취소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 은사를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은사의 실상을 알고 나중에는(고후 11장) 은사를 취소했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 전체를 궤휼의 역군으로 간주하여(고후 11:4, 13), 그들이 하는 방언을 취소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성경의 전체의 통일성, 덜 분명한 부분은 더 분명한 구절로 해석한다’는 개신교 성경 해석의 기본도 모르는 주장이다. 성경 어디에 고린도 교인 전체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요 궤휼의 역군’이란 주장이 어디 있는가. 노우호의 주장대로라면 고린도 교인 전체가 이단이라는 소리인가? 만일 그렇다면 고후 1:1에서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

7) 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280.

물론 맥아더의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고 고전 14:12도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한때 고린도전서 해석에서 유행했던 디아트리베(diatribe)로 해석하는 것이다. 디아트리베는 상대방 주장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대의 말을 수용하는 듯 논박하는 고대 수사법인데, 존 맥아더와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이런 수법을 악용하여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폄하하고 은사 구하는 것을 중화시키기 위해 이런 해석법을 남용한다. 이창모가 디아트리베를 남용하여 고전 14:2의 방언을 변태 방언으로 몰고 갔듯(방언기도의 비밀 미주 3 참조), 존 맥아더는 <고전 12:31상>을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주장(디아트리베)으로 해석하여, 바울이 ‘더 큰 은사를 구하는 자체를 책망’하는 것처럼 잘못 해석한 것이다.

8)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Hendrickson Publishers, 1994), 195-97.

9) “[방언특집②] 방언받기 훈련을 하면 왜 안 되는가?”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8를 참조하라.

10) “[방언특집②] 방언받기 훈련을 하면 왜 안되는가?”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8)

11) 기적중지론자들은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중지론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모두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여기서는 복수형이 사용되었으므로 당연히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방언기도의 재발견②] 방언기도의 비밀,” 미주 3) 참조.『글로리아타임스』”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주어와 관련된 단어의 수(수. Number)에 맞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2) ‘[성경Q&A]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3

13) Gordon D. Fee, Listening to the Spirit in the Text (Eerdmans Pub, 2000), 105.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오순절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 . .

많은 현대인들이 이 현상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즉, 생소한 것에 대한 두려움, 명백하게 합리적인 아닌 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것, 은사주의자들로 인한 몇 가지 나쁜 경험들 등),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런 체험을 오랫동안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신학적 견해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 현상에 대해 오순절주의자들이 종종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이 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바울의 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기양양한 태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태의 기도나 찬양은(고전 14:15-17), 기본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가치를 깎아내려 버린다. . . .

바울이 엄하게 꾸짖은 것은 공중 집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방언 말하는 것이었다. 그외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방언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도 기도하고(즉 방언도 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할 것이다"라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 .

결론적으로, 바울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방언 말하는 것은 그의 모든 신학적 전망에 부합된다. 이제 우리는 방언을 통해 찬양, 감사, 기도 및 중보기도를 함으로써 심령 깊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연약함 중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연약함 중에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바울은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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