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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재발견②] 방언기도의 비밀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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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24  20: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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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 재발견②]

방언 기도의 ‘비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개인이나 교회에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한다. 오순절날, 구약에서 약속되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여 120문도들은 모두 성령충만하여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행 2:4).

하나님은 영언(靈言)인 방언(Glossolalia)의 내용을 초자연적으로 15개국에 달하는 언어로 통역(‘해석’)하셔서 세계 각처에서 오순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다’(행 2:11).

이후 성령이 새롭게 임할 때마다 방언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성령은 예루살렘에서(행 4:31), 사마리아에서(행 8:17), 고넬료의 가정에서(행 10:45-46), 에베소에서(행 19:6) 단체적으로 임했는데, 고넬료의 가정과 에베소에서는 방언 현상이 일어났다. 고넬료의 가정에서는 방언과 통역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지만 에베소에서는 방언 현상만 나타났다. 비록 성령이 임할 때마다 방언이 임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 임함과 방언 현상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

또한, 필자가 지난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부흥은 단명이었지만, 20세기 초에 방언 운동으로 시작된 성령 운동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데 각 운동마다 강조점은 다소 다르지만 각 운동에는 방언이 공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왜 다른 부흥운동은 대부분이 단명이었는데 20세기 이후의 방언운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흥의 불길이 사그라지기는커녕 계속 활활 타오르고 있을까?

방언기도에 숨겨진 ‘비밀’ 때문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기도이다. 여기에 방언 기도의 비밀, 방언 기도의 능력이 있다.
 

기적중지론자들의 잘못된 해석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사도행전은 물론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알려진 외국어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말하는 것’(Xenoglosso, Xenolalia)이라고 잘못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종교 개혁운동가인 장 칼뱅의 해석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종교개혁 당시, “네 말이 그렇게 옳다면 기적으로 한 번 증거해 보라”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및 토머스 아퀴너스 등에 의해 개발된 각종 기적중지론을 집대성하여 로마 가톨릭이나 급진 개혁주의자들의 기적 주장을 반박했다. 칼뱅은 교리가 바르지 못하고 윤리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행했다고 하는 기적은 모두가 ‘가짜 기적’이 아니면 ‘사탄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만일 칼뱅의 기적중지론이 여기에 그쳤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더 큰 해악은 칼뱅이 신약에 기록된 기적들은 사도 시대에 중지되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신약의 기적 관련 구절들을 기적중지론적 교회 시대에 어울리게 모두 ‘비기적화하는 해석’을 했다는 사실이다.

방언의 은사는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하는 것으로, 방언 통역의 은사는 이런 외국어를 초자연적으로 통역하는 은사로, 예언의 은사는 기록된 성경말씀을 잘 풀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은사로, 신유의 은사는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이후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적 칼뱅주의자들은 칼뱅의 이런 해석에 살을 좀 더 붙이거나 빼는 방식으로 성경의 기적이나 기적행하는 은사들을 이해한다.

따라서 장 칼뱅(존 칼빈)을 위시한 기적중지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4:2도 은사주의자들과 다르게 해석한다. 칼뱅은, 고전 14:2의 주석에서,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하나님’(God)이 아니라 ‘이방신’(god)에게 하는 것으로 주석한다. 칼뱅은 번역은 “방언은……하나님께~”하는 것이라고 해놓고, 주석은 ‘사람이나 이방신에게 하는 것’(“그는 자신에게 노래하고 음악의 신(神) 뮤즈에게 노래한다”는 속설 인용)으로 해석하여, 방언은 이방신에게 내용도 모르는 모호한 말로 지껄이는 부정적인 것-‘비밀’-이라고 잘못 설명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적 신학자들은 칼뱅의 잘못된 해석을 잘 인용하지 않는다. 칼뱅의 이런 헬라어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존 맥아더2)는 칼뱅의 이런 해석을 적극 수용하면서 더욱 개악시켰다. 이창모3)는 존 맥아더 보다 한 술 더 떠서, 바울이 마치 고린도 교회의 ‘가짜 방언’을 척결시키기 위해 고전 12-14장을 기록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고, 정이철4)도 골수 기적종지론자인 서철원 박사와 이승구 교수를 등에 업고 이창모의 주장을 착실하게(?) 따르면서 방언의 뿌리라도 뽑으려는 듯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다.

이들은 바울 이전의 사울 처럼 지식이 없어 힘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정리하면, 기적중지론자들의 잘못된 해석처럼 “방언은 이방 신에게 사람이 인위적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쓸데 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방언은 하나님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의 말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언 기도에는 능력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필자는 반대자들이 방언을 극렬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방언 은사자들은 오히려 방언을 더욱 열심히 하기를 촉구한다. 영적인 방해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방언 기도의 ‘비밀’은 무엇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5)을 말함이라”(고전 14:2).
 

첫째,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순도가 높다

일반적으로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 보다는 기도자 본인의 생각이나 필요를 기도하기 쉽다. 그러나 방언 기도는 하나님의 성령이 방언자의 영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의 순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신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도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제대로 모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환란이나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들을 통과하기를 바라시는지 우회하기를 바라시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방언 기도를 하면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가 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이 구절들은 방언 기도에 관한 구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기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기도이므로 굳이 방언 기도에만 해당되는 구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방언 기도는 일반 기도 보다 더 우리의 영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기도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잘 모르지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간구해 주신다. 이처럼 방언 기도는 일반 기도 보다 순도가 높으므로 당연히 일반 기도 보다 더 효과적이다.

어떤 주제나 환경을 두고 일반 기도를 통해 마땅히 어떻게 빌 바를 모를 때, 방언 기도를 한참 하고 나면 신기하게 마음도 차분해지고 기도 제목도 분명하게 떠오를 때가 많다. 성령이 나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기도 제목을 가지고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 기도가 잘 되는 것을 체험한다.
 

둘째, 방언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환경적으로 아주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지만 막다른 소송에 연루되어 너무나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다. 신앙은 초보에 불과했지만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성격이라 방언은 쉽게 받았다.

그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방언을 하게 하고 통변을 하자 깜짝 놀랐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의 영혼은 계속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면서 필자는 몇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찬송과 감사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우리가 인간적, 육신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겉사람은 환경을 보고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지만 주님을 향한 속사람은 끊임없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극한 상황에서도 방언 기도를 하고 주님의 모습을 상상하면 주님이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경우가 많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주님은 왜 저렇게 좋아하실까?”

우리는 아무리 신앙이 깊어도 육신과 세상을 따르는 ‘겉사람’이 주님의 온전하신 뜻을 따르는 ‘속사람’ 수준으로 살기 어렵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잘 되면 복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복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좌절하고 원망하고 낙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방언 기도를 통변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환경을 해석하시는 경우가 많다. 믿음의 사람은 환경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해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해석이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이 일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래서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마음으로 찬양하는 방언 기도와 방언 찬송’은 하나님을 싸우시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제사장들이 앞서서 7일 동안 찬양한 후, 큰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졌다(수 6:1-21).

-모압과 아람의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유다 왕 여호사밧은 두려움으로 인해 사색에 빠졌다. 이때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찬양대를 앞세워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찬양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이 싸우셔서 전쟁에 승리하게 하셨다(역대하 20:1-30).
 

셋째, 방언 기도는 일반 기도에 비해 오랫동안 할 수 있다

기도의 질이 중요한가, 양이 중요한가?
일반적으로 기도의 양이 질보다 중요하다. 기도를 많이 해야 잡생각이나 육신적 생각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로 하는 기도에는 한계가 있다.
기도 제목을 많이 정해 놓고 하지 않는 한 한두 가지 주제로 기도를 집중적으로 오래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방언 기도는 일반 기도보다 오랫동안 할 수 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목회자들 중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하루 평균 3배 정도 기도를 오래한다고 한다.

일반 기도는 본인이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하지만 방언 기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기도이므로 본인이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자동항법장치(automatic pilot)처럼 지치지 않고 계속 할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어떤 제목이나 뜻을 알려주시면 그 제목으로 방언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일반기도 보다 훨씬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다.

방언 기도를 오래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영혼이 강해지고 영적으로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 쉬워진다.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6)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3-4).

방언 기도를 많이 하면 영혼이 강해지고 하나님의 성령의 운행하심에 민감해지기 때문에 다른 은사도 상대적으로 쉽게 받는다. 이 때문에 방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방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런 말이 성경 어디에 있나?’라면서 반문한다. 성경도 모르고 영적 경험도 없으니까 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신자라면 누구든 하루 3시간 정도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성경 특히 고전 12장에 기록된 기적행하는 은사를 거의 다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도 성경에 있어야 하는가? 성경에 명시적인 기록은 없지만 성경의 전체 내용과 신앙 경험을 감안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넷째, 방언 기도는 마귀의 진을 무너뜨리는 기도이다

앞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방언 기도는 마귀의 존재를 대적하고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기도이다.

또한, 방언 기도가 마귀에게 위협적인 이유는 방언자가 마귀도 모르는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보안이 철저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내용을 기도하는지 마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마귀는 속수무책이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말로 하는 기도는 사람이 듣고 마귀가 듣는다.
물론 우리는 기도 제목을 내어놓고 중보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알면 시기와 질투로 인해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아주 잘 된다’는 예언을 받으면 본인은 좋지만 주변 사람은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하나님이 하시려는 새로운 일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기도를 할 필요도 있다. 중간에 정보가 누출되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방언 기도가 적격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 보다 낫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물론 방언을 하는 사람도 “랄랄라~” 하면서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거나 어색해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 보다 훨씬 낫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18-20).

초대 교회 당시, 최고의 흉악범에게나 시행하는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미련한 방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

우리는 세련된 환경에서 점잖고 교양 있게 기도하고 예배 드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한 방법으로 은혜 주시는 경우도 많다. 방언 하는 것, 안수하여 쓰러지고, 웃고, 딩굴고, 흔드는 일 등은 점잖은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역겹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미련한 일들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 주기를 기뻐하신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과 상식을 깨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하나님이 어떤 희한하고 이상한 일을 하셔도 놀라지 않는다. 다만 그런 희한한 모습이나 경험을 통해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내 생각 수준, 내 경험 수준으로 길들여진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 수준, 자기 생각 수준으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방언과 생소한 영적 현상 등을 통해 성장한 일부 교회가 수준 높아지려고 방언과 영적 경험을 자제시킨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수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소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의 미련한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방언 기도를 새삼 강조하는 이유도,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는 책을 쓰는 중에, 필자도 어느 틈에 수준 높아지려고(?) 방언 보다는 예언, 예언 보다는 열매와 품성에 치중하다 보니 신앙생활에서 생동력과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볼 때, 개인도 그렇고, 단체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교회의 성장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초기의 야성과 열정과 생동력을 잃어 버리고 성장과 정착기에 들어서서 문약(文弱)과 전통에 빠지면 세련된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보다 야성적이고 수준 낮게 보이는 운동이나 세력에 의해 추월되거나 지배되거나 정복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비틀거리는 이유 중의 하나도, 교회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탁상공론적인 무미건조한 교리와 체면과 교양과 전통에 매여 성령의 야성과 생동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순서가 거꾸로 되어야 한다. 사람 보기에 미련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인 방언 기도를 다시 한번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다시 한번 도약의 기회를 맞이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누구 보다 뛰어난 지성인이었지만 동시에 방언을 사랑하고 즐기는 성령의 사람이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사람이 아무리 교회 성장과 개혁의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그것은 사람의 지혜에 불과하다. 그런데 혹자는 한국 교인의 70~80%가 방언을 한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영적 자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방언의 중요성을 깨달아서 방언을 활성화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방언 기도의 열풍을 일으키자. 방언 기도의 ‘비밀’을 통해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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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일부 기적중지론자들이 무엇 보다 ‘방언’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으므로, 다소 장황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어서 자료로 남기고자 한다. 성경적, 신학적으로 관심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초기의 오순절운동은 성령-성령 세례-이 임하는 최초의 육체적 증거가 방언이며 모든 신자가 제2의 축복인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1960년대부터 주류 교단에 퍼지지 시작한 은사운동은 방언은 성령 체험의 유일한 표적이 아니라 다른 현상들도 포함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2)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Charismatic Chaos(『무질서한 은사주의』), Strange Fire(『이상한 불』), First Corinthians(『고린도전서 주석』)의 3 가지 책에서 방언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비판과 악담을 퍼붓고 있다.

존 맥아더가 ‘과연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목회자일까?’라고 의심할 정도로 오늘날 수억 명의 은사주의자들이 활용하는 방언에 대해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망언을 주저 없이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설교자이자 성경교사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편파적인 성경해석과 성서 헬라어 지식에 대한 무지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존 맥아더의 망언을 이창모정이철이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존 맥아더의 오류인가?

첫째, 존 맥아더는 성경적 방언은 ‘외국어 방언’으로 고린도 교인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이 외국어 방언을 성경적 방언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존 맥아더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고린도 교인의 방언을 '가짜 방언'이라 주장하는 것은 칼뱅의 잘못된 해석을 이어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맥아더와 같은 중지론자들이 고린도 교인의 방언을 ‘가짜 방언’이라고 주장하는가? 고린도 시(市)는 우상숭배가 심한 도시였으므로 이방 신전에서의 예배는 음란하고 무질서했다.

“그 당시 이방 신전에서 고용된 신전의 창녀들은 이교적인 음란한 종교의식을 집전함에 따라 무아경의 광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한 음란한 봉헌식에서 광란에 빠진 여자들이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광경은 그리스-로마 문화시대에는 흔한 것이었다.”(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105; W.A. Criswell, The Baptism, Filling & Gifts of the Holy Spirits, Ministry Resources Library, 1966, 113).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감안할 때, 고린도 교인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맥아더는 주장한다. 이교도 신전 예배에서 성전 창녀들이 방언을 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의 방언이 ‘가짜 방언’이라면, 그들이 문란한 성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가 가지는 성 관계도 음란하고 이교적인 것인가?

일부에서는 한 때 ‘교회에서 북 치고, 기타 친다’고 하여 ‘무당굿이다’, ‘광란이다’면서 비판한 적이 있는데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즈음 교회는 모두 무당굿하는 교회인가? 기적중지론자들은 필자가 여러 군데서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 은혜는 일반 은혜의 도구·수단·문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마귀가 하나님의 좋은 것을 먼저 오남용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존 맥아더는 통일교도가 아니면 모르몬교도이다.

-통일교나 모르몬교에서는 예배 때에 경전을 읽고, 강해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한다.
-존 맥아더의 교회에서도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존 맥아더는 통일교도가 아니면 모르몬교도이다?

중지론자들은 마치 기독교가 이교도 풍습을 모방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데 이는 창조의 영광을 마귀에게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은혜를 통한 이 세상의 문화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마귀가 먼저 와서 오남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사람의 영혼은 물론 문화도 구속해야 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 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2)-논리적 오류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60

또한, 헬라어 해석에 의할 때, 존 맥아더는 고린도 교인의 방언은 ‘하나님’(God)께 하는 성경적 방언이 아니라 무아경에서 ‘이방신’(god)에게 지껄이는 ‘가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원어인 헬라어 데오스(God, god) 앞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주장을 백업하기 위해 사도행전 17:23을 인용한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데오스, god)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행 17:23)(MacArthur, First Corinthians, Kindle location, 8045).

얼른 보면 맥아더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그러나 데오스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과 단지 사도행전 17:23의 사례만을 제시하면서, 고전 14:2의 데오스를 이방신(god)으로 해석하는 것은 편견과 무지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헬라어 ‘데오스’는 무려 1181회나 사용되는데 이중에서, 행 17:23 및 행 28:6의 두 경우에서만 (god)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God)에 대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복수형인 신들(gods)은 고전 8:5에서 단지 2회 사용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 사용된 ‘데오스’ 단수 중에서 정관사가 사용된 경우도 있고 사용되지 않은 경우도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마 4:4; 5:8,9; 6:24; 12:28; 고전 12:3,6; 15:10 등). 이처럼 헬라어는 정관사 유무가 의미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맥아더는 고전 14:2에서 데오스 앞에 정관사가 없다고 해서, <무관사+데오스>가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사용된 수많은 다른 경우는 덮어두고, 단 한 가지 사례인 행 17:23(‘데오스’ 앞에 ‘알지 못하는’ 이란 형용사가 사용됨)만을 제시하면서, 고전 14:2의 데오스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이라고 성급하게 해석한다.
 

그런데 고전 14장에는 <고전 14:2 상>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 <고전 14:28 하>에 등장한다.

“방언(단수)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고전 14:2).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두 구절 모두에서 방언과 방언하는 자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복수로 사용된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고 단수로 사용된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잘못 주장한다 (다음의 미주 3 참조).

또한, 맥아더는 고전 14:2의 데오스를 이방신(god)으로 해석한 후, 고전 14:2가 말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단수로 사용된) 방언을 가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고전 14:28의 경우는 주어와 수를 일치시키기 위해 단수이지만 ‘진짜 방언’이라고 미리 연막을 쳐놓았다.

왜냐하면 고전 14:28에는 <정관사+데오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맥아더라도 ‘하나님’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 14:27-28에서 방언이 단수로 사용되었지만 감히 가짜 방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주어와 수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단수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맥아더는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자기가 성경 말씀 위에 올라타서 자기 유리한 데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맥아더는 고전 14:28은 교회에 방언 통변자가 없으면 ‘혼자 하나님께 외국어 방언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고전 14장이 말하는 방언은 성령으로 하는 영언이기 때문에 혼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맥아더의 주장처럼 그것이 ‘외국어 방언’이라면 통역 없이 하나님께 혼자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를 들어, 필자가 의미도 모르는 중국어를 음역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맥아더는 고전 14:28이 그런 뜻이라고 해석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한편, 장 칼뱅은 그의 주석에서 고전 14:28의 의미를, ‘그(방언하는 자)는 자기에 부여된 호의를 마음으로 감사하게 인정하고, 공중 앞에서 사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즐기라’고 바울이 말했다고 칼뱅은 해석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해석인가? 바울은 분명히 통변하는 자가 없으며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혼자 하나님께 방언을 말하라-방언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칼뱅은 단순히 ‘그것을 마음으로 즐기라’고 했다고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즐기라는 말인가?


이창모는 한술 더 떠는 주장을 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혼자 하나님께 하라’는 뜻이 아니라 ‘바울이 거짓 방언 말하는 자들을 퇴출시키기 위한 냉소적인 말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창모는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에서 ‘자기(사람)와 하나님’이 ‘그리고’(헬, 카이)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과 하나님을 동격에 놓는 것이며, 이것은 자신이 하는 방언 기도를 자신이 하나님처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이창모는 이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기도야 말로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은사가 아닌가”라는 소설 같은 주장을 하면서, 이 구절은 바울이“너희는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니 여기 회중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너나 실컷 들으면서 하나님께 하라”고 말한 것이라면서,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저 혼자서 중얼거리는 헛소리임을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잘못 주장한다(이창모, 방언, 『그 불편한 진실』, 344-65).

이창모의 주장대로 사람과 하나님이 접속사(kai, 그리고)를 통해 연결되어 사용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동격인가?’ 그렇다면 ‘개와 사람이 같이 간다’고 하면, 그 개는 사람과 동격인가?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라.
이창모의 주장대로 하면 이 구절 모두가 문제가 있는 내용들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그리고’(카이)로 연결되어 동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카이)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카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카이)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8)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카이)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카이)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이창모의 주장과는 달리 고전 14:28에서 “자기에게 말한다”는 뜻은 듣는 사람없이 “독백하다, 혼자 말하다”(talk to oneself)는 관용적인 표현이며, 공중의 모임에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말하는 것’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중의 모임이 아니라 ‘사적인 공간에서 혼자 하나님께 말하라’는 뜻이다(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93).

또한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께 하라”고 했는데 이창모는 무슨 근거로 방언은 ‘그저 혼자서 중얼거리는 헛소리임을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더 나아가서, 맥아더는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한 사례만 있지 알아듣지 못한 말로 기도한 사례가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방언이 영언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MacArthur, First Corinthians, Kindle location, 8045).

맥아더의 논리대로 한다면,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도 잘못된 것이다. 복음서외의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모두 ‘남자를 통해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문법적·역사적 방법으로 평이하게 해석하는 것이 해석의 원칙이다. 이것은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것이다. 그런데 장 칼뱅, 존 맥아더 및 이창모와 같은 중지론자들은 기적이나 초자연적 은사에 관한 한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서, 마치 성경 구절의 숨겨진 비밀을 찾는 것처럼 헬라어 해석을 왜곡하고 온갖 헛된 상상력을 발휘하여 숨바꼭질하듯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직접 경험 없이 각자가 상상과 추측으로 해석하다 보니 봉사들이 코끼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이렇다, 아니다 저렇다’-군맹무상(群盲撫象)-면서 제 각각의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 은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영언(Glossolalia)이라고 일관성 있게 말한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나 경험은 사람의 구분 없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건전한 영적 체험이 없이 성경의 기적이나 은사를 해석하는 것은 이처럼 위험하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거듭나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도덕적 군자로 여기지만 구세주로 영접하지는 않는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영적 체험이 없기 때문에 기적에 관한 구절들은 모두 비기적화하거나 기적행하는 은사는 중지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해야 자기들의 무경험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3) 이창모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은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 리차드 개핀, 존 스토트 등의 견해를 잔뜩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방언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뭔가 거창한 내용이 있는 것같이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편견적인 견해와 오류투성이 견해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창모의 견해를 졸저인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의 “8장, 방언의 은사”와 “9장 방언의 유익과 통역의 은사”의 미주(Endnotes)에서 자세히 비판하였다.

이창모는 존 맥아더의 견해를 상당 부분 차용하고 또한 극단적인 주장들을 가미하여, 고전 14:2, 3이 말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령에 의한 방언이 아니고 사람이 임의로 의지적으로 하는 ‘변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고전 14:2,4에서 방언이 하나님께 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은 고린도교회의 변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이창모, “김동수의 방언은 고린도에 나타난 변태방언: 현대의 방언은 바울이 퇴치하였던 사탄의 모조 방언.”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95).


이창모는 (1) 고전 14:2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고 (2) 고전 14:2의 “하나님”(God)을 “신”(a god)으로 해석하고, (3) 고전 14:2의 “성령으로”(with the Spirit)를 “사람의 영으로”(with his spirit)으로 해석하고, (4) 글로사(단수)와 글로사이(복수)의 용법에 의하면 단수 방언은 거짓 방언이고 복수 방언은 다양한 외국어 방언이라고 주장하면서, 고린도교회 방언은 사람이 만든 ‘변태 방언’이란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이 주장을 근거로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을 변태 방언이라고 정죄한다 (이창모, “하나님의 영이 아닌 '그 영'의 거짓 방언: 고린도 방언은 신자들의 은사 남용이 아니라 다른 영의 거짓 은사였어,: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63; “김동수는 방언 단.복수 표현의 의미를 몰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78).


과연 그런가? 이창모의 주장을 비판해 보자.

(1) 이창모는 고린도전서에는 인용문들이 많은데 고전 14:2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방 주장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대의 말을 수용하는 듯 논박하는 고대 수사법인 ‘디아트리베’(diatribe) 방식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이창모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창모는 고전 6:12, 13; 7:1-2을 실례로 제시한다.

그러나 D.A. 카슨은 이런 해석법은 한때 유행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고전 6:12; 7:1b; 8:1b외에는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인용문이 되기 위해서는 길이가 짧아야 하고, 통상 지속적인 제한 규정이 있어야 하고, 바울이 전적으로 동의하여 다른 추가 설명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D.A. Carson, Showing the Spirit, 53-55).


그런데 이창모가 주장하는 고전 14:2은 내용이 너무 길고 동일한 구절이 아닌 다른 구절인 3절과 대조된다. 그러나 고전 14장은 전체가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과 ‘알아듣는 예언’과 지속적인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4절의 방언과 예언, 5절 전반의 방언과 예언, 19절의 가르침과 방언 등). 만일 이창모의 주장대로라면 고전 14장의 구절들 중에서 서로 내용을 비교하는 구절들의 앞에 나오는 내용들은 모두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과 알아듣는 예언을 대조하면서, 공적 모임을 가지는 교회에서는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지 말고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하도록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 바울은 말썽 많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서신서의 서두에서 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고 말하고, 고전 12:8-10에 방언의 은사를 포함시키고, 고전 14:1에서는 방언을 포함한 모든 ‘신령한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는가? 존 칼뱅, 존 맥아더 및 이창모 등의 주장과는 달리 고린도전서 어디에도 고린도교인의 방언이 ‘가짜 방언’이거나 ‘변태 방언’이라고 명시적이나 암시적으로 기록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린도전서의 이러한 전체적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바울이 마치 고린도 교회의 변태 방언을 척결하려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건전한 석의(Exegesis)가 아니라, 이교도의 풍습, 방언자의 말썽과 교만, 자기의 편파적 견해를 성경 본문에 주입시키는 아이스제시스(Eisegesis)에 불과하다.


이창모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필자가 위의 미주 2)에서, 맥아더의 견해 비판에서 다룬 것처럼, 바울이 고전 14:2의 서두와 거의 동일한 내용인 “자기와 하나님(정관사+데오스)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를 명령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고전 14:2를 책망하는 것이라면 왜 고전 14:28에서 동일한 것을 하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령했을까? 방언이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하는 사적 기도언어(private prayer language)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이창모는 고전 14:28도 방언을 인정하는 구절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린다(위의 미주 2참조).
 

(2) 고전 14:2의 데오스를 ‘하나님’이 아니라 ‘신’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위의 미주 2)을 보라.


(3) 이창모는 고린도교인들이 ‘성령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영으로, 그 영으로’ 방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증거로 이창모는 윈터의 주장과 성경 원문의 해석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창모가 인용하는 윈터의 의견은 티슬턴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것은 12:2-3의 가장 훌륭한 설명이 될지 모르지만 기정 사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훌륭한 가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전통적인 접근을 단순히 부인할 수 없다”(Anthony Thiselton, 1 Corinthians, Kindle location, 2681/4575)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창모는 윈터의 주장이 마치 ‘기정 사실’인 것처럼 확신있게(?) 그릇 인용한다.


또한, 이창모는 고전 12:3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이고 고전 14:2은 ‘사람의 영으로, 그 사람의 영으로 하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고전 12:3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못한다’는 신앙고백에 관한 구절이지 방언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또한, 고전 14:2의 퓨뉴마티(pneuvmati)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영으로(무관사+프뉴마티)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퓨뉴마티’가 “성령으로”(in the Spirit)인가, “(사람의) 영으로”(in the spirit)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리차드 개핀은 전자로 해석하고(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89-91), 존 맥아더는 후자로 해석하는데(MacArthur, First Corinthians, Kindle location, 8045), 이창모는 존 맥아더의 견해를 따르면서 『톰슨II-성경주석』과 NIV 번역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이창모, 『방언 그 불편한 진실』, 126-27).


과연 그럴까?

고린도전서에서 <무관사+프뉴마>가 성령의 의미로 번역된 구절들은 고전 2:4, 13; 12:3, 13; 14:2, 12, 14, 15, 16, 32이다. 또한 <정관사+프뉴마>로 사용한구절들은 고전 12:4,7,8,9,10; 14:14,15이다. 이 경우 모두 프뉴마 앞에 정관사가 있든 없든 성령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왜 유독 고전 14:2만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는가? 이창모는 고전 14:2의 원문에 ‘호(정관사)+ 프뉴마’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정관사의 의미를 살려서 ‘성령으로’가 아니라 ‘그 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어 성경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영어 성경은 대부분이 ‘사람의 영’이란 의미로 번역하면서 원문에는 없는 정관사(the)를 사용한다. “in the spirit”(KJV) “in [his] spirit”(NASB), “with his spirit”(NIV)으로 번역한다. NIV는 원문에도 없는 ‘그의’ (his)라는 의미를 삽입했는데, 이창모는 이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아무리 여러 헬라어 성경을 봐도 고전 14:2를 ‘호+프뉴마’로 기록한 헬라어 성경이 없다. 이창모는 어떤 헬라어 성경을 보는지 제시하기를 바란다.

 

둘째, 위에서 밝힌 대로 프뉴마 앞의 정관사 유무에 상관없이 프뉴마는 문맥에 따라 성령이나 사람이 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이창모는 프뉴마 앞에 정관사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일반적으로 호(정관사)가 있을 때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상식이다.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도 프뉴마가 사람의 영으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더군다나, 성경에서 기도와 관련되어 ‘성령으로’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사용된 곳은 고전 14장 외에는, 엡 6:18 및 유 1:20 두 곳 뿐이다. 두 구절 모두 정관사 없이 전치사 엔(in, with, by)+프뉴마(spirit)를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으로’ 해석했다.

“항상 성령 안에서(‘엔’+무관사+프뉴마티) 기도하고”(엡 6:18).
성령으로(‘엔’+무관사+프뉴마티) 기도하며”(유 1:20).

이처럼 성경은 '사람의 영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 기도 자체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이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성령으로’란 표현을 할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일부러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란 표현을 한 것은 그만큼 성령의 능력에 의한 기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어 성경이든 성경 주석이든, 사람이 자신의 신학과 은사의 경험 유무에 따라 번역하고 주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논쟁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나 자료라도 무비판적을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이전에 성서적 마귀론을 쓰면서 영어 번역본의 오류를 지적한 적이 있다. 헬라어는 ‘다이모니조마이’(demonize, 귀신들리다)인데 이것을 영어 번역본은 ‘귀신에게 소유되다’로 잘못 해석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마 8:28, 개역개정).
“~two demon-possessed men”(NIV).
“~two possessed with devils”(KJV).
“~two demon-possessed men”(NKJV).

성경에서 마귀(호 디아볼로스)는 사탄과 마찬가지로 단수로 사용된다. 그런데 KJV은 ‘귀신’이 아니라 ‘마귀들’로 잘못 번역했다가 개정판(NKJV)에서는 '마귀들'을 ‘귀신’으로 수정했지만 ‘소유된~’이란 의미로 여전히 잘못 번역하고 있다.
 

정리하면, 이창모는 자신의 편견에 의한 헬라어 해석을 성경 구절에 주입시키기 위해, 고전 14:2의 ‘프뉴마티’를 ‘성령으로’가 아니라 ‘그 영, 즉 사람의 영으로’ (in his spirit)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주석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진 고든 피는 바울이 사용하는 프뉴마(Spirit, spirit)의 다양한 용법을 분석한 후, 여기서와 같이 ‘무관사 여격(간접 목적격)’의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든 피는 고전 14:2의 경우는 직·간접으로 ‘성령’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런 용법의 삼분지 일이 고전 12-14장, 갈 5장, 롬 8장에서 사용되는데 이런 경우 이 구절은 주변에 성령을 의미하는 구절들로 둘러싸여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자의 행동 모두가 성령의 사역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내 영’(my spirit)이라고 표현해도 실제로는 성령의 영향을 받는 인간의 영의 활동이므로 the Spirit/my spirit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 14:14-15도 “my Spirit/spirit 이 기도하고 노래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15-21, 특히 21, 25 참조).
 

더 나아가서, 고든 피는 고전 14:2에서 ‘프뉴마’에 정관사가 없이 사용된 것은 바울이 ‘인격적인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심’-일하시는 성령'을 의미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ibid., 24).
 

정리하면, 존 맥아더나 이창모는 어줍잖은 헬라어 지식으로 특정 단어가 성경에서 전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지 않고, 단어 앞의 정관사 유무에 따라 가장 중요한 하나님(God)과 이방신(god), 성령(Spirit)과 사람의 영(spirit)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창모가 고전 14:2의 ‘프뉴마티’를 ‘성령으로’가 아니라 NIV의 번역을 따라 ‘그의 영, 즉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맥이나 ‘프뉴마’의 일반적 용법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억지 해석에 불과하다.


이창모는 또한 맥아더의 잘못된 주장을 따라 단수로 사용된 방언(글로사)은 ‘변태 방언’이고 복수로 사용된 방언(글로사이)은 성경적 ‘외국어 방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다음에서 자세히 그 주장의 허구를 살펴보자.
 

단수 방언은 ‘거짓 방언’이고 복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이라는 주장.
존 맥아더와 이창모의 잘못된 주장을 살펴보자.

 

이창모는 존 맥아더의 주장(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277. n. 15; _________, First Corinthians, Kindle location, 8087)과 킹제임스 번역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펴는 것 같다
(이창모, “김동수는 방언 단.복수 표현의 의미를 몰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278;
________, 『방언 그 불편한 진실』, 310-18).

그러나 방언 옹호자인 김동수 교수는 물론 방언 반대자인 옥성호도 이런 분류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옥성호,『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110).
 

필자는 존 맥아더와 이창모는 어떤 확실한 주장을 하기 전에 적어도 성경의 원어를 한번 꼼꼼히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필자는 혹시나 하여 고전 14장에서 사용하는 글로사의 헬라어 용법 14개를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발견한 사실은 글로사의 단·복수는 ‘거짓 방언’과 ‘여러 외국어 방언’의 구분이 아니라 ‘주어’나 ‘다른 구절들’의 수(數, number)와 단순히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글로사가 사용된 횟수는 이창모가 말하는 15회가 아니라 14회다. 이창모가 복수로 지목한 14:21은 명사 글로사가 아니라 ‘형용대명사 복수형’으로 ‘다른 방언 말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고전 14장에서 글로사(단수)와 글로사이(복수)의 용례를 살펴보자.

고전 14:2 For one who speaks in a tongue
고전 14:4 One who speaks in a tongue
*고전 14:5 you all spoke in tongues……… one who speaks in **tongues
*고전 14:6 if I come to you speaking in **tongues
고전 14:9 unless you(복수) utter by *the tongue(여기서는 ‘혀’의 의미로 사용) speech that is clear
고전 14:13 him that in a tongue
고전 14:14 I pray in a tongue
고전 14:18 all more with tongues
고전 14:19 I~ in a tongue
(고전 14:21 ‘형용사 남성 복수형’)
고전 14:22 tongues are for a sign.
고전 14:23 all with tongues
고전 14:26 every one has a tongue, a psalm a didache
고전 14:27 if any man speak in a tongue
고전 14:39 brethren, forbid not to speak with tongues

고전 14장에서 사용된 글로사(단수)는 고전 14:5,6의 2개 구절 외에는, 주어나 동사의 수와 일치되게 단수나 복수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은 학술 논문이나 과학 서적이 아니므로 모든 것에 정확하게 일치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만 해도 글로사(단수)와 글로사이스(복수)는 ‘가짜 방언’과 ‘여러 가지 외국어’가 아니라 한 가지 영적 방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필자가 굵은 글씨로 표시한 방언은 단수인데 문맥이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비판자들도 인정하는 성경적 방언이다. 어떤 원칙에 예외가 많다는 사실은 원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복수 유무로 ‘가짜 방언’과 ‘진짜 방언’을 분별하려는 시도 자체가 지극히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존 맥아더는, 글로사(단수)가 사용된 14개 경우 전체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칼뱅의 잘못된 주장을 따라 고전 14:2의 방언(글로사-단수)가 ‘거짓 방언’이란 잘못된 결론을 내린 후, 자신의 해석을 정당화 하기 위해 다른 구절들에 사용된 글로사(단수)를 ‘가짜 방언’으로 짜맞추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맥아더는 고전 14:27에 사용된 글로사(단수)는 예외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주어가 단수 남성이기 때문에 수를 맞추기 위해 방언도 단수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맥아더가, 바울이 다른 경우에도 주어나 관련된 격의 수(數)와 맞추기 위해 글로사이(복수)나 글로사(단수)를 사용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주장을 할지 궁금하다.
 

결국, 이창모의 주장은 헬라어 원어 전체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 오류투성이인 존 맥아더의 견해를 성급하게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KJV(킹제임스 영어성경)이 단수 방언(KJV에서는 ‘an unknown tongue’으로 번역했다가 나중에 NKJV에서는 ‘a tongue’로 수정하여 번역)과 복수 방언(tongues)을 구별하여 번역한 것은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잘못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기적의 은사에 관한 한, 필자는 존 맥아더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횡포를 몇 차례 지적한 적이 있다.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존 맥아더의『무질서한 은사주의』를 비판한다.” ”『글로리아타임스』(2014.4.29).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2

☞“[성경Q&A] '기적'과 '믿음'은 상관이 없는가?”『글로리아타임스』(2014.6.3).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0)


정리하면, 이창모의 주장은, 잘못된 단어 해석(데오스, 프뉴마, 글로사), 추측에 의한 배경 설명(고전 12:2-3), 근거 없는 인용 구절-디아트리베(고전 14:2)을 바탕으로 내린 잘못된 결론이다. 즉 고전 14:2은 이창모의 잘못된 주장처럼 “’너희는 방언을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나 사람의 영으로 자의적이고 의지적으로 하는 변태 방언이다”가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성령으로 비밀을 말함이라”이다.


기적행하는 은사에 관한 해석은 이미 밝혔듯이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도 기적중지론자와 기적계속론자의 견해가 상반되기 마련이다. 이창모는 유명한 신학자이지만 기적중지론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필자는 기적계속론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또한, 영어성경이라 해서 헬라어 원어를 항상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번역도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번역자의 신학과 영적 경험에 따라 번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 같은 기적계속론적 견해를 따를 것인가, 이창모 같은 기적중지론적 견해를 따를 것인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오늘날 영언을 성경적 방언으로 받아들이는 은사주의자들이 수억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장 칼뱅, 존 맥아더, 이창모와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의  견해가 틀렸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성경을 경험으로 해석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반문하는 그들은 ‘무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방언 경험자들은 고전 14장의 방언을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데 무경험자들인 장 칼뱅, 존 맥아더 및 이창모는 제 각각의 논리로 고전 14장의 방언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 정이철은 최근 출판된『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292-335에서, 이전의 잘못된 방언관 및 이창모의 잘못된 방언관을 소개하고 있다.

정이철의 잘못된 방언관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방언특집①] 방언이란 무엇인가: 이 보다 더 엉터리일 수 없는 정이철의 방언관 비판.”『글로리아타임스』(2014.7.2)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7

 

공교롭게도 정이철이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를 출간한 지 얼마 후 필자의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 기적중지론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가 출간되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정이철이 다룬 대부분의 주제를 비판하는 책이 되었다. 기적중지론과 기적계속론이 서로 첨예하게 부딪치는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5) 고린도전서 14:2이 말하는 ‘비밀’은 무슨 의미인가?

레이몬드는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비밀(뮈스테리온)이 드러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용을 모르는 "광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라 분명하게 내용을 아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레이몬드, 『신오순절 운동 비판』,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4, 24-25).

팔머 로벗슨(O. Palmer Robertson)도, “신약 의 비밀은 한때 숨겨졌지만 이제는 계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The Final Word, 23). 대부분의 방언 비판자들이 ‘비밀’을 이렇게 잘못 이해한다.

정이철도 다음과 같이 잘못 주장한다.

“D.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2:2). 이 내용을 근거로 현대의 방언기도가 성경의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이 주장이 가장 옹알거림을 성경의 방언으로 미화하기 위한 가장 그럴싸한 논리적 근거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란 무엇일까? 바울에게 ‘비밀’이라는 단어은[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것, 즉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 계시를 뜻하는 말이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바울에게 비밀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계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정이철, “이단이 시작한~”『뉴스M』(구 미주뉴스앤조이).

성경은 ‘비밀’(mystery.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를 이전에는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드러난 복음의 의미로만 사용하는가? 물론 신약 성경에는 이런 의미로 ‘비밀’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즉 성경이 말하는 비밀이나 신비 즉 미스테리온은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지혜이며 이전에는 감추어졌다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제는 완전히 드러난 구원의 복음을 말한다(롬 16:25; 고전 2:7, 8상; 고전 4:1; 엡 1:9등).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 곧 계시의 복음 전파 사역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미스테리온은 이제 더 이상 신자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비밀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이다(마 13:11; 막 4:11; 눅 8:10 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미스테리온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 완악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롬 11:25).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살후 2:7).

-보통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도 있다(고전 13:2).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신자의 몸이 홀연히 변하는 현상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고전 15:51).

-“이와 같이 집사들도~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9).

그렇다고 이런 비밀은 인간의 노력으로 소수만이 가지는 특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비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밀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고전 12:10; 14:24, 25), 신앙의 성숙으로 인해 말씀을 보다 깊이 깨닫는 것 등을 포함한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초신자 보다 성경의 내용을 더 많이 알고 의미를 더 깊이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방언이 말하는 비밀이 과연 드러난 복음일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구절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다. 정이철이나 로버트슨의 주장 대로 ‘비밀’은 ‘이제는 드러난 복음’의 의미로만 사용된다면 왜 사람이 하나님께 드러난 복음을 말하는가? 하나님도 구원을 받으시라는 말인가?

성경에서 ‘비밀’이란 말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복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른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S. 모티어(S. Motier)는 성경이 말하는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를 자세히 분석한 후 이렇게 결론 짓는다.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 (미스테리온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물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측면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에게 모든 지혜 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찾지 못할 정도이다"(롬 11:33)("Mystery," in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94), 740).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계시되었으므로 방언도 이제 더 이상 비밀의 말이 아니라는 주장은 동문서답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분명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자기들의 신학으로 성경의 명백한 구절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6) 기적중지론자들은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므로 무용한 것이라고 잘못 주장한다.

존 맥아더는 사랑의 원칙에 반하여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방언을 사용하는 자들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비판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고전 13:5). 고전 14:4에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부정적 또는 긍정적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을 자기들의 이기적으로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했다. 그들의 동기는 건전하지 못하고 이기적이었다. 그들의 동기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하고 뽐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미 고전 10:24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했다
(John MacArthur, Charismatic Chaos, 279).

존 스토트도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을 비판한다. 헬라어 ‘오이코도메오’는 언제나 교회, 집, 건물, 회당 등 다른 사람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137-38).

“신약 성경이 ‘세움’을 다른 사람들이나 교회에 대한 일로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는데 유독 예외적으로 방언하는 자만은 ‘자기를 세운다’라고 말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 확실히 바울의 글 속에는 어느 정도 아이러니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말 자체가 거의 모순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를 세우는 것은 신약 성경 천체가 의미하는 세움과 뜻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창모도 존 스토트의 이런 잘못된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이창모, 『방언, 그 불편한 진실』, 149-50).

그러나 실제로 신약 성경을 보면 오이코도메오는 39회 사용되었다. 존 스토트는 그중에서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한 구절 13개만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존 스토트가 제시한 용법 외에, 지혜로운 자가 자기 집을 짓는 것(마 7:24), 일반적으로 건축하는 것(눅 12;18; 14:28; 17:28), 자신의 담력을 세우는 것(고전 8:1) 및 피차 덕을 세운다(갈 2:18; 살전 5:11)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단어는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인데, 존 스토트의 논리대로 ’A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저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건축자는 남의 집을 세워야지 자기 집을 세우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물론 건축자는 남의 집을 세우는 사람이지만 필요에 따라 자기 집도 세우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중지론자들은 방언은 뽐내기만 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기도이므로 권장할 만 것이 못 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방언은 척결되어야 한다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기의 덕을 제대로 세운 사람이 공동체의 유익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바울은 분명히 은사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7)고 말했다. 우리는 은사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공동체의 유익만을 위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본인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주어진다.


필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남을 위해서도 사용하지만 필자 자신을 위해서도 잘 사용하고 있다. 방언은 물론이고 다른 은사도 그렇다. 예를 들어, 과거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는 ‘지식의 말씀’을 통해 필자의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의 원인을 찾아내어 치유한 적이 더러 있다. 또한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사용한 적도 많다.

그런데 이런 것이 이기적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중지론자들이 말씀 보고 기도하여 자기 영혼을 가꾸는 것도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인가?

성도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해 자기를 영적으로 세우면 왜 안 되는가?
오히려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영혼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남의 영혼을 세우려고 하니까 오히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집에서 기도를 길게 한 사람은 공중기도를 짧게 하고
집에서 기도를 짧게 한 사람은 공중기도를 길게 한다.”

개인의 경건 없는 단체의 건덕은 있을 수 없다. 방언의 기능은 개인의 경건을 위한 것이다. 다만 바울은 공중 예배에서는 다른 사람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개인의 건덕을 위한 방언 자체를 부인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은사들-을 (시기할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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