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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재발견①] 방언 기도의 열풍을 일으키자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구요한 발행인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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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18  00: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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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 재발견①]

방언 기도의 열풍을 일으키자 !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고전 14:15).

   
 

새해는 밝았지만 좋은 소식 보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먼저이다.
해가 바꾸어지기가 무섭게 북한의 김정은은 수소폭탄 실험을 통해 남한을 다시 한번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가득이나 한국 교계와 경제 사정이 흉흉한 이때에 김정은의 전쟁놀이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보다는 짜증스럽게 만들 뿐이다.

한때 세계인들의 선망의 적이 되었던 한국 교계와 한국 경제는 이제 세계인의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선교 100년 만에 괄목할만한 발돋움을 한 한국 교계는 엄청난 도약을 했지만 1990년대부터 침체된 이래로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유명 인사들의 잇단 추문으로 개신교는 종교 선호도에서도 불교, 천주교 다음으로 꼴찌다.

한국 경제는 어떠한가?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6.25 동족 상잔으로 인해 세계 최빈국에서 맴돌다가 폐허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서 식민지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60년 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한국은 경제 대국에 이어 국제사회에서 정치 대국으로도 인정 받아서, 한국은 국운융성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장미 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몇 년 사이에 한국 교계는 물론 한국 경제도 사면초가에 빠져서 이제는 여기저기서 좌절과 절망의 탄식만이 나오고 있다. ‘헬 조선’(Hell Chosun, 지옥 같은 한국)과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 이에 더하여 주택과 인간관계를 포기한 ‘5포 세대’,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한 ‘N포 세대’란 자조 섞인 말이 유행하고 있고, 최근에는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이 등장하고 있다.

왜 이렇게 한국에 대해 부정적일까?
실제로 한국이 살기 힘든 나라인가, 아니면 가상적인가?
외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에 대한 3가지 비밀'이 있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최근 버전은, 첫째, 세계적으로 일본을 깔 보는 유일한 민족이 한국인이다, 둘째 남북 대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한국인만 모르고 있다, 셋째 한국인 자신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필자는 셋째 이유에 필이 꽂혔다.

필자도 오랜 미국생활을 접고, 대충 20년 만인-이전에는 출장도 자주 왔었지만- 2000년대 초에 한국에 와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비록 미국에서 한국 신문을 보고 케이블 TV 수준의 KBS뉴스도 정기적으로 시청했지만 실제로 와서 본 모습은 전혀 달랐다.

깨끗한 지하철, 친절한 안내원들(물론 대기업 콜센터나 백화점 영업사원들이 대부분이지만), 밤에도 거리낌없이 대도시를 활보할 수 있는 치안(미국의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는 야밤의 외출은 생각조차 못한다), 아파트와 원룸의 에어컨과 가스 난방은 기본이고(물론 아직도 달동네 수준도 있지만), 국민 2명 당 1명꼴의 자동차 소유, 스마트폰 5000만대 소유,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연봉 수준 등.

2015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전세계에서 11등이고, 일인당 구매력 평가지수는 일본이나 서구 유럽의 수준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국은 정말 잘 사는 나라이고 동남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국민의 행복도는 이전 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하류층이고 신분상승의 기회는 점점 없어진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인들은 한국의 경이적인 발전에 놀라는데 왜 유독 한국인 자신들은 한국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일까?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을 헬 조선이라고 부르면서 부정적으로 보는 첫째 이유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어서(50.6%), 둘째 이유는 공평하지가 않아서(24.4%), 셋째 이유는 빈부 차이가 심해서(15.7%), 그 다음은 경쟁이 심해서(9.3%)라고 한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잘 견뎌내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힘든 현실을 이겨내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미래에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남들이 아무리 한국이 잘 산다 해도 실제로 사는 사람은 힘들고 고통스럽기 마련인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OECD국가에서 가장 높은 것은 이런 탓도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한국 사회가 과연 실제로도 ‘헬 조선’인가?
실제로 미래에 더 나아질 희망이 없는가?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면 정치, 경제, 사회도 덩달아서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의 위기는 다름아닌 교회의 위기이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영육간의 침체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다. 위험을 잘 다루면 기회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말 그대로 위험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나면 사회도 위기에서 벗어난다.

어떻게 해서 위험이 기회인가?
영적 침체가 심할수록 대안은 전능하신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분상승의 기회가 없는 미래에 대한 좌절감, 교회 성장의 침체,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 요구, 스쿠크 자본과 할랄음식을 통한 이슬람의 전방위적 공격 등을 막아낼 수 있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영적 부흥으로 나타날 때, 교회는 새롭게 되고 능력을 회복하여 세상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일 것인가?
기도의 열풍을 통해서이다. 기도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인다.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회개기도가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다.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기도이고 마음으로 하는 변화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 기도이다.

20세기에 시작된 성령운동의 아쉬운 점은 중생(Regeneration, Conversion)과 은사(Gifts)를 강조하고 이전의 운동들에서 강조한 성화(Sanctification. 감리교나 성결교에서는 ‘성결’[Purity]이라함)와 말씀의 능력(Power of Word. 설교의 능력)을 소홀히 한 점이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성령운동은 중생과 은사(Gifts)는 물론 말씀의 능력과 성화(Sanctification)를 강조하는 4중적인 성령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영으로 하는 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

이 운동을 위해서는 무엇 보다 강력한 기도가 필요하다. 강력한 기도는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변화의 기도가 필요하다.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

고든 피는, “나의 영이 기도한다는” 말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내 영과 함께 기도한다'고 해석한다(My Spirit/spirit prays). 방언은 물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마음의 기도도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기도이지만 바울은 여기서, 성령이 내 영에 직접 역사하여 하는 방언기도와 성령이 마음에 역사하여 하는 마음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장소’가 아니라 ‘이해’의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영으로 기도하면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15절)고 말하는 것이다. 즉 바울은 15절에서 영으로 하는 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하는 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그 기능이 다르다.2)3)
 
 

“영으로 기도하고~” 

첫째, 방언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기도이다

필자는 이번에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는 책을 쓰면서, 기적중지론자들이 기를 쓰고 방언을 공격하는 이유를 찾았다. 방언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오순절 성령운동은 방언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성령운동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방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순절 운동 이전의 부흥은 대부분이 단명이었다.
조나선 에드워즈의 제1차 영적대각성운동, 찰스 피니의 제2차 대각성운동, 무디의 부흥운동 등은 대부분이 단명이었다. 그러나 방언운동으로 시작된 오순절운동은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으면서 거의 100년 동안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그 배후에는 방언기도가 있다고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셨다.

그런데 마귀는 현학적인 학자들과 기적중지론자들에게 역사하여 방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방언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게 만들어서 가능하면 방언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방언을 조심해서 하거나 방언 사용을 자제하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전략이다.

필자도 책을 쓰면서 방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도 방언을 많이 했지만 이제 더욱 더 방언기도에 불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책을 교정해 준 한 목사는 지금까지 방언을 하기는 했지만 책을 통해 방언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면서 방언기도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책을 교정하면서 여러 번 읽다 보니 방언의 모습도 바뀌었다고 한다.

말썽 많고 반대도 많은 방언, 이제 그 방언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야 할 것 같다.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초 체력이 더 중요하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방언기도를 통해 기초적 영력을 강건하게 하면 다른 은사와 능력은 쉽게 임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방언 열풍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와야 한다.
 

둘째, 방언기도는 마귀의 진을 허무는 기도이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모든 기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기도지만 방언기도는 성령의 역사가 더 강한 기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고전 14:15).

이 시대의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사람들에게, 허무, 공허, 무기력, 좌절 낙심의 마음을 심어준다. 범신론 사상은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는 마귀의 최상의 도구인데, 선진국은 물론 특히 한국에서 불교와 같은 범신론적 사상-뉴에이지운동, 명상운동, 요가 등-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영이 역사하면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와 무기력에 빠져 쉽게 절망하고 심하면 자살로 치닫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신자들은 이슬람의 전방위적 공격에 절치부심하고 있다.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불교가 ‘현재 위험’이라면 이슬람교는 ‘미래 위험’이다. 불교는 1800년 동안 한국인의 생각과 문화를 지배해 온 사상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불교 신자 숫자가 개신교나 천주교 보다 많다. 불교의 범신론적인 사상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에 가장 적대적이며,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무속신앙인 미신과 점술과 굿을 대부분 흡수하여 요즈음에는 절에서 제사도 대신 치르게 해준다고 한다.

대부분의 지역 교회는 이슬람의 위협 보다는 불교의 사찰들이나 점집들과의 영적 전쟁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경인 지방이나 전라 지방에 비해 영남 지역의 복음화율이 낮은 것도 역사적으로 불교가 강했던 신라와 고려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하고 큰 사찰들이 아직도 영남지역에 많다. 이 때문에 불교가 강한 지역의 많은 목회자들이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영적 무기력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신자들 중에서도 본인이나 가족들이 한때 불교를 열심히 섬긴 탓에 영적 돌파를 이루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한국의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은 물론 공중파 TV(KBS, MBC, SBS)도 기독교의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대서특필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불교 특집을 통해 불교 사상을 전파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불교 사상의 핵심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중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그들의 인사인 ‘성불하십시오’, ‘부처가 되십시오’는 기독교인의 ‘할렐루야’와 같은 보편적인 인사이다)는 마귀의 유혹을 부추기는 것이며, 불교에는 죄나 윤리도덕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동성결혼을 하든 상관을 하지 않는다. 불교 단체나 불교 관련 인사들이 차별금지법의 배후에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불교는 인간이 108 번뇌를 내려놓고 성불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인간의 건전한 욕구나 희로애락마저 부인한다. 유명한 중인 성철 스님(?)의 ‘무소유 개념’은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차 있고,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법륜 스님(?)이나 하버드 대학 출신의 미남인 혜민 스님(?)은 청소년들이나 불교 계통의 사람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 없다.

가득이나 불교 기운이 센 한국에서 이들의 가르침이 한국 사회에 더욱 불교의 기운인 혼미, 허무, 공허, 무기력증을 가져오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불교가 강하고 불교가 기독교 보다 더 인기를 끄는 한국에서 혼미와 허무와 좌절과 낙심과 절망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안은 무엇인가?
각 지역별로 대(對) 불교 영적 전쟁을 치르되, 신자들은 강한 방언 기도로 불교는 물론 기타 세상의 영들을 제압하여 자신은 물론 사람들에게서 혼미와 허무와 절망의 기운은 물론 거짓과 불법과 탐욕과 음란의 기운을 뽑아내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열정을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불교계의 감시와 반발을 의식하여 공식적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것을 자제해 왔지만 이제는 쉬쉬할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연합하여 불교의 영을 깨뜨릴 필요가 있다.
 

필자도 지난 한 해를 힘들게 보냈기 때문이다.

첫째, 지난 한해는 기적중지론자들과 싸우는 한 해였다.
말도 안 되는 기적중지론을 주장하는 자들과의 싸움은 무미건조하고 열불나게 하는 싸움이었다. 말도 되지 않고 은혜도 되지 않는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읽고 반론을 생각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고 은혜도 되지 않고 생기는 것도 없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나?"라는 반문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국 교계에서 오랫동안 펜으로 성령사역을 대적해 온 일부 기적중지론자들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정이철 같은 극단적인 무리들이 설치고 있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바람에 자기들 서클 내에서도 서로 물어뜯는 자중지란이 일어날 정도이다.

둘째, 불교의 심각성을 새삼 깨닫는 한 해였다.    
필자는 하나님의 인도로 오랫동안 불교를 대적하는 기도와 연구를 해왔다. 그런데 지난 한 해는 앞 길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조차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격이 심했다. 그러다가 연말쯤에 가서야, 지금 불교의 기운이 한국 전체를 덮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현실이나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혼미, 공허, 허무의 기운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필자도 실제로 그런 기운 가운데 살게 하시면서, 미래와 희망이 없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인가를 실제로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강력한 기도인 방언 기도를 통해 의심과 좌절과 절망의 영적 먹구름을 헤치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강하게 임할 때, 대부분의 산적한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은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 다음은 마음으로 하는 기도이다.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는 영으로는 열매를 맺지만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

은사사역자들 중에서 영의 기도인 방언기도를 많이 하여 능력은 받았지만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여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이 많다. 이제 이들은 마음의 기도를 통하여 회개하고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기도를 많이 하여 변화된 성품,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영적 깊이도 더해 지고 영의 기도로 끌어들인 능력도 오래 머물 수 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의 중심에는 ‘회개기도’가 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최근 한 성령운동 집회에 참석하였다.
주 강사들은 은사사역을 중시하는 능력 사역자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입에서 ‘마음의 완악’, ‘주님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라’는 주제의 설교가 나왔다. 기대와 전혀 달랐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물론 구체적인 회개기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할 여유가 없었지만 적어도 내면의 마음을 주제로 다루었다는 자체가 신선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가?
만물 보다 더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렘 17:9), 사람의 마음처럼 변화무상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주님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가? 필자는 그것을 마음을 지키고(잠 4:23),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롬 12:2 등). ‘주님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곧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솟아나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잠 4:23),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것이요(롬 6:11),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악한 세상을 본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롬 12:2),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입는 것이요(엡 4:22-24), 겉사람이 죽고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이다(고후 4:16).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작은 회개기도이고 끝은 주님으로 채우고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회개기도만 하고 주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주눅이 들어서 하기가 어렵다. 목표는 회개가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회개기도는 먼저 나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교회, 직장 및 나라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좋다. 회개 기도의 제목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이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죄의 목록에 질려서 회개기도를 포기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회개를 한다는 자체가 힘들어서 회개기도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만큼 회개기도는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힘든 만큼 열매도 풍성하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기도도 하는 요령이 있다.

첫째는,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회개가 잘 되지도 않고 회개를 잘 할 수도 없다. 마음이 연약하여 회개라는 영적 훈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 치유의 첫걸음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나에게 죄 지은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하여 용서하면 그 혜택을 가장 먼저 누리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용서하지 않았을 때, 한(한), 울분, 응어리, 분노가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갉아먹지만 제대로 용서하고 나면 기쁨과 평강이 임하는 심령천국을 누리고 힘들었던 관계가 회복된다. 용서와 축복만 제대로 해도 심령천국을 누리고 묵은 관계가 회복된다(눅 6:28; 엡 4:32). 어떤 집사는 30년 묵은 부부관계, 어떤 전도사는 20년 묵은 부부관계를 회복하고 불치의 병도 말끔히 나았다.

둘째,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외로움, 거절감, 배신감, 슬픔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중에서부터 죽으실 때까지 많은 도전을 받으셨지만 내적치유가 필요없는 분이시다. 상처는, 외부의 ‘도전’에 대해 죄인의 방법으로 ‘반응’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반응하면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고(눅 6:28), 원수 갚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롬 12:14-21), 상처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가 생기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방법대로,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미워한 죄 회개하고(요일 3:15), 원수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눅 23:34; 행 7:60) 상처가 치유된다.

셋째, 죄의 통로를 차단해야 한다.

요즈음 유명 인사들 중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성추행을 하여 평생 쌓아 올린 명성에 먹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럴까? 음욕은 인간의 죄성 중의 하나이지만 음욕을 키우는 환경이 문제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인해 초등학생은 물론 성인들도 포르노에 쉽게 노출되어 음욕을 자극하고 부추기니까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이나 습관적으로 음욕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음욕 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그것을 강화하는 도구나 매체에 노출되는 만큼-잔인한 게임, 중독성 도박, 음란물 등-죄성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죄성이 강화되는 도구나 매체에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

넷째, 고질적인 죄성을 집중적으로 회개한다.

사람에 따라 혈기, 고집, 두려움, 의심, 정욕, 탐욕, 시기, 참소, 조정과 통제, 판단과 정죄, 무기력과 낙심 등의 고질적인 죄악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성경 보고, 기도해도 잘 제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회개할 죄목을 많이 적어놓고 한번씩 읽고 회개하는데 이런 방법은 별로 효과가 없다. 죄악의 뿌리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성격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두 가지만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필자는 초기에 염려와 두려움을 이런 식으로 치유했다. 환경이 특별히 나쁘지 않은데도 막연한 염려와 두려움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염려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고(마 6:31, 34). 몇 개월 동안 이것만 집중적으로 회개하여 염려와 불안의 죄성의 뿌리를 뽑았다. 그리고 난 후 20여 년 동안 필자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심령천국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아무리 거듭났더라도 신자 안에는 여전히 죄성 즉 옛사람의 성품과 기질이 권능으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이런 것들을 하나씩 집중적으로 처리하고 반대되는 좋은 것으로 채우면 상당히 효과적이다(롬 7:20, 23; 엡 4:22-24).

어떤 사람은 요일 1:8을 예를 들면서 한 번만 회개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필자가 반문했다.

“미워한 행위 한 번 회개했다고 님의 마음 속에 미움의 뿌리가 없어졌습니까?”

그제야 그는 알아차렸다.

“아, 미움의 뿌리까지 뽑아야 하는군요.”

이렇게 하여 한두 가지 죄성을 회개하여 뿌리 뽑고 나면 그로 인해 누리는

영적 축복-심령천국, 은사개발 및 영적체험, 자신의 변화 등-이 너무나 좋아서 자발적으로 계속하게 된다. 육체의 질병의 70~80%가 심인성 질병인데 용서와 회개를 제대로 하면 고질적인 70~80%의 질병이 저절로 치유된다.

다섯째, 중보기도를 한다.

가족, 이웃, 교인, 나라와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할 때, 죄를 대신 회개하면(눅 23:34; 행 7:60; 느 1:6-7; 단 7:20) 상당히 효과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이 죄 지은 자의 희생제사를 대신 치렀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신약의 신자는 모두가 제사장이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회개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는데 실제로 해보면 대신 회개만큼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기도도 드물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를 잘 모른다.
게으른 사람에게, ‘너 게으르다’, 고집 센 사람에게 ‘너 고집 세다’고 하면 순순히 인정하는가? 대부분이 반발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아는 사람이 대신 회개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그러지고 자신의 ‘게으름’이나 ‘고집’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대신 회개를 통해 그 사람의 기질이 고쳐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본인이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며 인정하기 시작해야 ‘고치려고 마음’을 먹는다.

주변에 속 썩이는 사람이 있으면 당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 회개해 보라. 사안에 따라 금방 그 사람이 누그러지거나 그 사람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 대신 회개는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영적 햇볕 정책이다.

한때, 한국에는 영적 중보기도가 유행한 적이 있지만 자신의 상처나 죄를 먼저 다루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죄를 다루는 바람에 역공을 받아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지역의 영을 다루는 기도는 엄청난 영력과 연합기도가 필요한데 영적으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잘못 건드리며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난다.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는 한 대신 회개하는 중보기도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마지막으로, 비운 곳을 주님의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

회개기도만 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주눅이 들기 쉽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반대되는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 은혜와 능력의 역사는 비우고 난 후 제대로 채울 때 일어난다. 온전히 비운 후 채울 때 임하는 은혜는 단순히 외부에서 임하는 은혜와 차원이 다르고 지속력이 다르다. 능력 뿐만 아니라 변화도 같이 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고 그 능력을 내 안에 머물게 하여 나도 변하고, 가정도 변하고, 일터도 변하고, 교회도 변하고 나라도 변화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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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1)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228-31.

2) 그런데 중지론자인 리차드 개핀은, 바울이 사람의 ‘영’과 ‘마음’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동의어로 자주 사용하므로 여기서도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람의 ‘영’과 ‘마음’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 은사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과 방언자의 마음의 무활동을 대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5절에 대한 해석은 어물쩡 넘어가 버린다(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91).

그러나 바울은 15절에서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개핀의 주장은 자기의 견해를 강요하기 위해 근접문맥의 의미-‘영’과 ‘마음’을 다른 의미로 취급-는 무시하고 원접문맥의 의미-‘영’과 ‘마음’이 동의어로 사용-를 끌어들이는 불공정한 해석이다.

3) 한편 존 맥아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프뉴마)에는 영, 바람, 호흡의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바울이 가정법으로 사용하여, “내가 비록 사도일지라도 너희가 말하는 지껄임을 말한다면, 내 마음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헛바람 소리를 내는 것에 불과하리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맥아더는 이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반드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ohn MacArthur, First Corinthians,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Kindle location 8179).

맥아더의 주장대로라면, 바울은 영으로 기도한 후 반드시 마음으로 기도했으므로, 바울이 ‘헛바람 소리를 내는 기도도 즐겼다’는 엉뚱한 주장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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