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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5)] 성령 운동, 이대로 좋은가(3)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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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22  2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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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⑤]

성령운동, 이대로 좋은가?(3)

-나는 알고 적을 모르면 반은 이기고 반은 진다-

   

▲ 성령 사역자들은 (1) 은사와 능력, (2) 성경지식과 신학이론 및 (3) 신앙인격과 성품의 열매라는 3중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미국은 자유 경쟁체제를 신봉하는 나라이다.
어지간한 사업에는 규제가 거의 없다. 무한 자유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나라이다. 그만큼 기업도 창의력을 발휘하여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늦게 시작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한국보다 더 개방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묘한 나라이다. 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요소요소에 ‘규제의 덫’이 너무 많고 촘촘하여 차려준 밥상도 제대로 찾아먹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기업들이 규제를 감당하지 못하여 해외로 나가거나 사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수시로 성령을 부어주시지만 성령운동을 규제하는 ‘신학적 덫’이 너무 많다. 사업은 해외라는 돌파구가 있지만 사역은 그렇지 못하다. 죽으나 사나 한국에서 해야 한다. 그런데 기적중지론과 기타 신학적, 실천적 편견의 덫이 심하여 한국에서 성령운동을 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한국은 장로교 대국이다

한국 교계의 70%이상을 점유하는 장로교는 칼뱅의 기적중지론을 착실하게 계승한 교단이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의 원로들 중에는 아직도 골수 기적중지론자들이 많기 때문에 성령운동의 새로운 사역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통성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는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찬양과 경배, 방언 등은 우여곡절 끝에 수용되고 있지만 아직도 예언, 쓰러짐, 웃음 등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심하다. 따라서 새로운 운동이나 사역의 주창자는 예외 없이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된다. 이런 운동이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상회(上會)나 주변의 심각한 배척과 반발에 직면하여 사역이 축소되거나 사역을 포기한다.

둘째, 한국은 우상숭배가 심한 나라이다

국민의 70~80%가 아직도 제사 지내고 점치고 굿하는 나라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잘 수용되고 정착되는 성령운동이 한국에서는 몸살을 앓는다. 더군다나 성령 운동에 앞장 서는 사람들은 마귀의 세력의 심한 역공을 받는다.

본인이나 가족이 마귀의 직접적인 영적 공격을 받음은 물론 기존 교단이나 단체를 통해 사역적이고 단체적인 역공을 받는다. 그러므로 영적 내공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으면 견뎌내기 어렵다. 영적 내공-속사람-을 단련하지 않고 은사사역을 오래한 사람들은 말년에 후유증이 좋지 않다. 연약할 때 영적 역공이 더 심하게 오기 때문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성령운동을 대적하는 장로교 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 뿐만 아니라 반박하는 실력도 갖추어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나만 알고 적을 모르면 반은 이기고 반은 진다.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르면 항상 진다.
-손자병법

일반적으로 성령사역자들은 자신은 아는데 적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반은 이기고 반은 지는 것 같다. 내가 은사 받고 능력 받아서 사역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기득권자들의 엄청나게 거센 반발에 위축되거나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적에 대해 사전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사역자들은 능력과 은혜에 치중하다 보니 적의 전략에는 별 관심이 없다. 따지고 분석하고 반박하는 것은 은혜가 떨어진다면서 별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남한이 아무리 경제적 발전을 했더라도 국방을 소홀히 했다면 벌써 호시탐탐 노리는 북한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은혜와 변증이 같이 가야 한다.
신앙의 변증은 신앙을 보호하는 성벽과 같은 것이다. 성벽이 튼튼하지 않으면 성 안의 삶이 아무리 풍성해도 적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 버린다. 초대교회 직후에 아직도 어린 기독교 교회는 안팎으로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로마당국의 핍박, 철학사조와 이단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교부들이 기독교를 당당하게 변증했다.

물론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교부들이 기독교를 당당하게 변증하는 과정에서 ‘은사자’ 보다는 ‘신학자’와 제도적 ‘성직자’가 득세하는 바람에 기독교는 생동력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변증을 소홀히 하면 기독교 자체가 와해되어 버린다.

오늘날 성령운동도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적절한 변증이 없으면 ‘생존’은 할지는 모르지만 ‘성장’이나 ‘확장’은 힘들다. 변증은 나도 알고 적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적의 전략인 기적중지론을 제대로 알고 항변할 수 있는 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성령사역자들도 드문 실정이다.

소위 말하는 정통 교회들은 정기적으로 교단이나 교회 차원에서 이단 교육을 한다. 문제는 이단 교육 내용 중에 성령운동의 일부 사역들이 아직도 약방감초처럼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사역자들이 아무리 기적을 외치고 은사를 외쳐도 신학과 이론으로 무장된 사람들에게는 ‘가짜 기적’, ‘사이비 운동’으로 취급 받을 뿐이다.

체험만 있고 신학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적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 버린다. 방언을 하다가도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금방 포기해 버리는 성도가 많다. 어떤 목회자는 외국의 능력사역자를 초청하여 집회를 했는데 교인 중의 한두 명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사람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글을 읽고 극렬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해답은 있다.
적에 대해 배우고 대처 방안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운동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것이다.

언젠가 교회의 집사가 전도를 나갔다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성경적, 신학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집사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런 것은 목사님에게 따지고 아무튼 예수나 믿으세요.”

이단이나 천주교는 교리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데 전통적 교회나 은사적 교회는 은혜와 체험을 강조하다 보니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 생활 오래한 중직들도 희한한 가르침을 하는 이단에게 쉽게 넘어간다고 한다.

필자는 기적중지론에 대한 책을 쓰면서, 필자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오늘날의 기적은 ‘모두 가짜’라고 주장하는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글들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장로교의 시조 장 칼뱅(Jean Calvin),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할 때 성경의 무오성을 적극 변호한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인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등의 기적중지론 신학은 한국의 박윤선, 박형룡, 권성수, 박영돈, 최병규, 이승구 등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고, 뛰어난 강해설교를 통해 한국에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이단 척결로 명성이 자자한 행크 해너그라프(Hank Hanegraaff) 등이 모두 지금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기적중지론자들이다. 이들의 신학, 이들의 기적중지론이 아직도 한국 장로교 신학과 교인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전통적 신학교에서는 기적중지론을 가르치고 ‘은사(들)’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초대교회에 중지된 것을 가르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은사적인 신학교에서는 은사와 능력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만 기적중지론은 가르치지 않는다. 은사가 나타나는데 기적중지론을 가르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은사와 능력을 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령사역은 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점령한 영역을 탈환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운동은 반드시 기득권층의 심각한 반발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사와 체험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제압하기 위한 신학과 논리도 중요하다.

전통적 교회는 은사에 대해 방어적 입장이지만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를 쏟으면서 성령운동을 연구하여 자신들의 아성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최근에 필자는 기적중지론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다가 깜짝 놀랐다. 중지론자들의 철저한 변호와 방어에 기가 지릴 지경이었다.

물론 기적계속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중지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논박이 약하다. 기적계속론을 주창하는 장로교 신학자들 중에서도 두루뭉실하게 기적게속론을 주장하지면 구체적인 사안-방언, 예언, 치유, 쓰러짐과 웃는 것과 같은 영적현상 등-에 대해 자세하고 철저하게 논박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러나 중지론자들의 변호와 반박은 철저하다.
필자는 기적중지론 책에서 기적중지론 전반과 방언, 예언 및 신유 등에 대해 다루었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방언에 대해서 철저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그런데 평신도인 옥성호의『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2008년)는 편파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세계적인 유명 학자의 주장을 담은 방언 비평서이다. 옥성호의 책은 『하늘의 언어』(2007년)를 통해 한국에 방언 열풍을 가져온 간증 위주의 김우현 감독의 저서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에 김동수 교수가 방언에 대한 저서를 3권이나 낼 정도로 진화에 나서서 옥성호의 저서와 노우호의 마귀 방언 주장을 어느 정도 잠재웠지만 최근에 이창모 목사가 496쪽에 달하는『방언, 그 불편한 진실』(2014년 9월)을 통해 김동수 교수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아직 김동수 교수의 반박글이 없다.

이창모는 원래 방언을 하던 자였는데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기적중지론자인 안토니 후크마(훼케마)의『방언연구』를 통해 방옹자(방언 옹호자)에서 가장 극렬한 방폐자(방언 폐기자)로 돌아섰다고 한다. 신학이 제대로 서있지 않으면 체험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초기에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Perspectives on Pentecost)과 안토니 후크마의 『방언연구』를 보고 속으로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책들이 있나?”라면서 대충 한번 읽어 보고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리차드 개핀과 안토니 후크마의 저서들이 한국 보수 장로교 신학자, 목회자 및 평신도들에게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줄은 몰랐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교회 방언은 인위적이고 마귀적인 변태 방언이고 오늘날 성령 운동가들의 방언도 모두가 고린도교회의 변태 방언이라고 주창하는 이창모 목사의 책에, 평신도인 장로가 추천서를 쓰면서 이 저서가 한국 교계의 개혁을 주도할 책이라고 극찬했다는 사실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보자.

“나는 방언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방언하는 현장의 비상식적인 모습들 그리고 다는 아니겠지만, 방언하는 자들의 별로 상식적이지 않은 삶의 모습들이 나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방언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못한다. 그 까닭은 사실상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방언에 대한 명백한 해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 논쟁이 벌어질 때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 논쟁은 마침표 없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 명확하게 정답을 알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성경은 정작 그것을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래서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만약 지금의 모든 방언기도들이 성령의 은사가 사실이라면 지금 한국 교회의 방언 열풍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 되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정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방언 문제는 한국 교회의 흥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방언을 찬성하는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인용해 설명하는 내용들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방언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들이 성경을 인용해 주장하는 내용들이 다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양측의 방언 설명을 들을 때,심증으로는 모든 방언이 다 성령의 은사가 아닌 것 같은데,그럼에도 성경적으로는 지금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은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며, 개인의 덕을 위하는 것이라고 엄연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방언하기를 원했고 방언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방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성경에 어긋나는 단순히 나의 감정적인 오판인가? 그러나 나는 솔직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방언에 대한 성경 말씀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신학적인 해박한 지식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꼼짝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이 책 안에 가득히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오랜 가뭄 끝에 만난 단비였다. 아니 단언컨대 이 책은 오랜 영적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한국 교회의 황폐한 땅에 쏟아진 폭우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동안 아무도 찾지 못했던,그래서 오랫동안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지루하게 논쟁만 해 왔던,방언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동안 100년 넘게 끌어온 방언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성경적인 정답을 가질 수 있는 한국 교회는 분명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한국 교회가 새롭게 개혁되는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의 내용이 준 유익 못지않게 내가 얻은 유익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성경을 보는 시각이었다. ‘아, 성경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구나!’라고 하는 깨달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성경을 읽어왔던 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후회였다. 이제부터 제대로 성경을 입어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렇게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귀중한 것들을 다른 믿음의 지체들도 얻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일선에서 뛰고 있는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다 일독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끝으로 이 책을 얻을 수 있도록 내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책이 1517년에 비벤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렸던 루터의 95개 조항이 되어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흔들어 깨우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창모 목사의 책은, 방대한 자료 수집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방언에 대해 가장 편파적인 신학자들의 주창과 풍부하지만(?) 엉터리 헬라어 분석과 중지론신학, 나름대로의 그를듯한 논리를 담고 있어서 평신도는 물론 어지간한 목회자도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쓰여져 있다.

한편, 『바른 믿음』사이트를 통해 방언과 예언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는 정이철은 서철원 박사와 이승구 교수의 우호적 서평을 담은『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2015년 11월)를 통해 오순절 성령운동을 위시한 현대의 모든 성령운동을 다시 한번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로 몰고 가고 있다.

이창모의 저서와 정이철의 저서를 은사주의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저서들은 기존의 기적중지론자들에게 그릇된 확신을 주고, 체험 위주의 은사주의자들과 은사 체험은 했지만 신학적 확신과 소신이 없는 사람들을 상당히 움츠리게 할 책들이다. 필자는 곧 출간될 저서에서 이들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비평을 했지만 지면 관계상 자세히 언급하지는 못했다.

성령 운동은 확장을 위한 공격적 운동이다.
성령 운동은 중립적 상황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중지론자들의 기득권의 아성을 깨는 운동이다. 물론 성령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지만 장로교 대국인 한국은 유례 없이 저항이 심한 곳이다. 공격을 제대로 하려면 방어 병력 보다 최소 3배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의 좋은 은사, 좋은 체험을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 성령 사역자들은 전통적 교회 보다 3배 이상의 노력과 전략이 필요하다.

기적중지론 신학은 치유의 입장에서 보면 생각과 사고의 ‘견고한 진들’이다. 견고한 진을 깨기 위해서는 그들 신학의 허구와 오류를 알아야 한다. 나도 알고 적을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그런데 성령 사역자들은 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적의 기적중지론 신학을 숙지하고 반박하려고 노력이나 해 보았는가? 아니면, 은혜 떨어지고 지루하고 재미 없다고 무시해버렸는가?

어떤 교회는 성령 세미나 중에 쓰러지는 안수사역을 하면서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쉬쉬하니까 오히려 스파이(?)를 통해 기적중지론자들을 통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을 숨기고 쉬쉬하는가? 정통 교회가 이단 세미나를 하듯 은사적 교회도 이제는 은사세미나에 더하여 기적중지론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하여 신자들을 무장시켜서 모든 성령사역을 당당하게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영적 내공을 쌓아야 한다 

미국은 기독교인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이다. 미국 인구 중, 구교, 개신교, 기타 군소교단 합해서, 1990년도에 인구의 약 86%가 기독교인으로 자기를 나타냈다. 2012년도에는 73%이다(Aris, American Religious Identification Survey). 물론 미국은 세속주의가 팽배한 사회이지만 이런 인구별 구분법으로 보면, (현재까지는) 미국은 여전히‘기독교적 국가’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신앙연조도 100년 정도에 불과하고 아직도 국민의 70~80%가 제사를 지내고 굿하고 점 치는 우상숭배에 찌든 나라이다. 따라서 성령 운동도 안팎으로 거센 역공을 받는다. ‘성령운동, 이대로 좋은가(1)’에서 밝힌 것처럼 개인적으로 어지간히 강하지 않으면 성령 운동을 감당해 내기 쉽지 않다.

한국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환경에서 일반적 신앙을 유지하려 해도 쉽지 않은데 성령 운동을 한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사역자나 성도들은 특히 영적 내공-속사람-개발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감안하셨는지 하나님은 십여 년 전부터 필자에게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새마음훈련을 강도있게 시키셨다. 그때만 해도 한국 교계가 은사운동에 열광해 있을 때인지라 별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은사도 받아 보았고 능력사역도 해보았지만 자신의 내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은사나 능력도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고 있다.

새마음훈련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회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믿음) 신앙 훈련, 즉 겉사람은 죽이고 속사람은 강건하게 하는 훈련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22.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기름부음 사역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은 부어주시는 은혜(Infused grace)이다. 우리는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해 구원도 받고 능력도 받는다. 문제는 부어주시는 은혜는 지속력이 약하고, 주로 ‘사역’을 위한 것이므로  내면의 ‘변화’에 별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은혜의 현장에 있거나 은혜를 받은 얼마 후까지는 은혜 가운데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은혜가 빠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또 다시 외부의 강한 기름부음으로 은혜를 채워야 하는데 이러다 보니 신앙에 기복이 심하다. 은혜를 받을 때는 천국의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은혜가 빠지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부어주시는 은혜는 주로 체험과 능력을 위한 은혜이므로 내면의 변화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은사자들이 능력은 행하지만 열매가 부족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앙은 흘러나오는 은혜(Effused grace)로 보완되어야 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새마음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면 죄와 세상을 따르는 겉사람이 깨어지고 성령을 따르는 속사람이 강건해 진다. 새마음을 통해 속사람이 강건해 지고 마음이 깨끗하고 새로워지면 뱃속 깊은 곳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 이것이 밖으로 나오면 ‘거룩한 웃음’이 된다. 외부의 기름부음으로 주어지는 웃음과 또 다른 신선한 웃음이 솟아난다.

새마음훈련을 통해 속사람이 강건해 지면 어떤 사람으로 변해가는가? 새마음 훈련을 한 사람들의 간증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환경에 좌우되지 않게 된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바깥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처럼 환경에 상관 없이 심령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성령 사역자들 중에서도 사람과 교단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생각 보다 많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건해 지면 사람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않게 된다.
물론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보이는 것-교세, 지위, 재력, 명예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더 귀하게 여긴다.

-내면의 평강을 누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화목해 진다
새마음훈련을 통해 용서와 축복을 제대로 하면 내면의 평강을 누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화목해 진다.

-한, 울분, 응어리, 분노, 혈기에서 벗어난다.
새마음훈련을 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용서와 축복 훈련을 통해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는 훈련을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 민족의 고질적 기질인 한, 울분, 응어리를 치유하는 훈련을 한다.

-의심, 불신, 염려 불안 및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특히 우상숭배를 많이 한 집안 출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밀려오고 염려와 불안이 심한 경우가 많다. 집주적인 훈련을 통해 이런 기질을 치유한다.

-고집,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난다.
이런 것들도 주로 우상숭배에서 오는 기질들이다. 새마음훈련은 이런 기질들을 치유한다.

-시기와 질투, 교만과 무례에서 벗어난다.
이전에는 자신 보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가 생겼는데 이제는 그들을 오히려 더 축복해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또한 은사가 있다고 교만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세워주게 된다.

-혼미, 공허, 허무, 무기력에서 해방된다.
특히 우상숭배가 심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이런 증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새마음훈련을 통해 죄악의 기운을 뽑아내면 머리가 명료해진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쉬워진다.
이전에는 마음이 복잡하고 산란하여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잘 되지 않았지만 새마음훈련 통해 마음이 새롭게 되면 친밀한 기도가 잘 된다.

-문제가 풀리고 형통한다.
문제와 실패의 원인인 죄를 지속적으로 회개하면 문제가 풀리고 여러 가지 일들-사업, 관계, 치유 등-이 형통한다.

-육신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으로 변해 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안의 육신의 사람(겉사람)이 성령의 사람(속사람)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마음훈련을 통해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쉬워진다.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 민감해진다.
개인적 회개와 영적 전쟁도 필요하지만 한국 교계를 짓누르는 우상숭배의 세력들-불교·유교·무교-에 대한 심각한 중보기도와 영적 전쟁를 하게 된다.

-눈 앞의 나무 보다 전체적인 숲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개인의 앞날도 인도하시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알게 해주신다. 속사람이 강건해 지면 하나님이 시대를 통해 하시는 일에 눈을 뜨게 하신다.
 

나가는 말

성령 운동은 기존의 신앙 체계와 패러다임을 깨는 공격적 운동이지 방어적 운동이 아니다. 공격은 방어 보다 3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억하라. 성령 사역자들은 (1) 은사와 능력, (2) 성격지식과 신학이론 및 (3) 신앙인격과 성품의 열매라는 3중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반대자들의 거센 반격과 방어 진지를 깨고 성령 운동을 제대로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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