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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4)] 성령 운동, 이대로 좋은가(2)말씀과 열매로 보완되어야 한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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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06  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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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④]
 

성령운동, 이대로 좋은가?(2)

-말씀과 열매로 보완되어야 한다-

   
 

성령운동, 은사운동이 교계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많다.
J. I. 패커, 안토니 후크마 등 저명한 신학자들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 예언 및 치유(신유)의 은사가 신약의 그것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도 교계에 끼친 긍정적 영향력-예배 갱신, 은사 체험을 통한 사역의 역동성, 살아있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봉사와 섬김 등-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J.I. 패커는 은사운동의 여러 가지를 진단한 후 장·단점을 이렇게 평가한다.
( J. I. 패이커•서문강, 『성령을 아는 지식』, 322-23).

1. 성령세례나 성령의 ‘해방’ 으로 말마암아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의 그리스도와,그리스도인 삶의 초자연적인 차원들을 재발견한다 .
2. 사람의 영혼이 양육받기 위하여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으로 되돌아간다.
3. 사적이든 공적이든 의도된 헌신을 전인적으로, 곧 몸과 영혼이 다 성령을 바람직하게 의뢰하는 습관을 가지게 한다.
4. 자유롭게 누구나 참여하는 공중 찬미와 공중 기도의 스타일을 개발한다.
5.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마다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게 한다.
6. 교통하는 삶의 양식을 통하여 사역의 여려 가능성들을 개발시킨다.
7. 복음전도와 봉사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이러 저러 한 방편을 통하여 능동적인 구제를 행한다.
8. 두드러진 섭리(기적들) 와,이러저러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예언적 메 시지와, 환상과, 초자연적인 치유와, 유사한 나타남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손이 거듭하여 드러날 것이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기대감을 갖게 한다.

안토니 후크마도, 오늘날의 교회는 은사운동으로부터 성령의 계속적 충만, 감정적 욕구 충족, 성도들에게 자발적 부여, 기도의 중요성 및 선교와 소그룹 강조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안토니 후크마 지음 정정숙 번역, 『방언연구』, 생명의 말씀사, 1982, 167-71).

물론 부정적 평가도 있다.
필자는 이번에는  은사주의자는 물론 기적중지론자들이 비판하는 두 가지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은사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말씀’이 약하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중지론자들의 예배는 설교 중심이다. 찬양이나 다른 순서는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을 돕는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목회자는 말씀 준비와 성경 가르침에 심혈을 기울이고 설교 잘 하는 목사가 유명한 목사이다.

한편, 은사주의는 예배는 찬양과 간증과 체험이 예배의 중심이다. 은혜롭고 기름부음이 넘치는 찬양, 기적 체험의 간증과 은사 전이 안수기도 사역이 예배나 집회의 핵심이다. 그러나 보니 말씀을 자세히 강해하여 가르치는 것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은사주의 예배는 기적의 기름부음이 강한 목사가 유명한 목사이다.

은사주의 예배는 전반적으로 감성과 경험적 요소를 충족시켜주고 설교 중심 예배는 이성과 사고를 충족시켜 준다. 일반적으로 설교 중심의 전통적 예배에 길들여져 있다가 은사주의 예배에 맛을 들이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다. 영과 혼에 생기가 돌고 기쁨이 넘친다. 이런 예배에 맛 들이고 나면 전통적 예배는 따분해서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이다.

얼마 전 필자는 기회가 있어 전통적 예배를 드리는 집회에 서너 번 참석한 적이 있다. 임직 예배는 당연히 격식이 있어야겠지만 은혜를 강조하는 예배조차 순서에 따라 한 순서씩 또박또박 질서있게 (?)드리는 것에 대해 필자는 이질감을 느낄 정도였다.

        "(속으로) 아직도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나? 숨 막힐 지경이네!"

사람은 이성과 감성의 두 분야가 골고루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강조점이 시계 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이성을 강조했다 싶으면 감성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감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성적 욕구가 살아난다. 전통 예배는 이성을 강조하고 은사주의 예배는 감성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후자는 말씀이 약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은사주의자들은 비록 성경을 강해해도 체험적이고 개인적인 경우가 많아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전통적 교회에 다니다가 은사주의 교회로 옮겨 온 어떤 자매는 목사님의 설교에 뿅~ 가버렸다. 이전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성경 구절들이 살아서 역사했다. 그런데 6개월 정도 듣다 보니 똑 같은 구절들이 계속 반복되어 식상해 버렸다고 한다.

은사주의의 감성적 예배도 마찬가지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짧으면 1년, 길면 3년이면 물려버린다. 그래서인지 그런 교회는 물갈이가 심하다. 처음 1~3년은 신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새로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성도들은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 체험과 단계별 양육이 필요하다. 은사주의 예배를 몇 년 드리고 나면 영적인 갈급함이 용솟음치고 마음밭이 잘 경작되어 있을 때이다. 이때 말씀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잘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은사적이고 감성적인 목회자는 조용하고 점진적인 양육에 약하거나 취향이 맞지 않다. 본인이 약하면 부교역자나 동역자를 통해 보완하지 않으면 성장에 한계가 오거나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물갈이 한다.

미국 교회도 지나치게 은사적인 교회치고 큰 교회는 드물다. 은사적이면서도 말씀을 다양하게 잘 가르치는 교회가 성장한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은사적이면서도 말씀을 잘 가르치고 소그룹을 통한 양육과 전도를 잘 하는 교회가 균형 있게 성장도 하고 성숙도 한다.
 

일반적으로 은사주의 교회는 ‘킹덤 나우’(Kingdom now, ‘이미’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능력)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무엇이든 성령의 능력과 믿음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킹덤 레이터’(Kingdom later,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고난과 갈등)에 젖은 전통적 교회에 좋은 도전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약점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무엇을 성취를 한 사람은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서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은사주의 교회는 성경 대로 킹덤 나우와 킹덤 레이터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아무리 기름부음이 넘치고 믿음이 좋아도 신앙 여정에서 고난과 환란과 핍박은 피할 수가 없다. 실제로 보면 은사주의자들이 고난과 핍박을 더 받는다. 능력을 받는 만큼 연단과 핍박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것을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숨기는 것 같다. 은사주의자들은 이제 이런 것에 대해서도 솔직해 질 필요가 없다.

최근 미국에서 은사운동에 오랫동안 몸 담았다가 식상하여 떠난 자가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은사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이 예언이나 신기한 영적 현상들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구원과 성화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적 현상 자체를 이교도 현상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의 지적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요즈음, 미국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신 칼뱅주의(New Calvinism)가 양쪽의 이런 욕구를 잘 채워주는 것 같다. 신 칼뱅주의는 칼뱅주의 구원론을 견지하면서 깊이 있는 강해설교와 심오한 교리 교육을 하고, 문화적으로 친근하여 자유로운 복장으로 설교하고 예배를 드린다.

또한, 미국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의 부흥신학과 적극적 성화론을 전파하고, 기적이 교회 시대에도 일어난다는 기적계속론을 주장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한국의 보수 장로교에 해당하는 회원 1600만 명의 미국 최대 교단인 남침례교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한다. 장로교 강세인 한국의 장로교 계통 교회들이 적용하기에 적합한 모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둘째, 은사주의자들은 인격과 열매에 더욱 신경 쓰야 한다

사실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는 은사주의자들이나 전통주의자들이나 오십보 백보이다. 그러나 같은 스캔들이라도 은사자가 저지르면 더 큰 구설수에 오른다.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것이고, 체험도 성령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은사자의 언행이 그 정도냐?’는 것이다.

은사와 열매는 별개의 것이다.
은사자들이 신앙과 인격적으로 더 성숙하기 때문에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성령이 부어주시는 외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사모하고 구하는 자가 받는 것이지 신앙적으로 성숙했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도구나 무기이지 인격이나 열매와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의 기적행하는 은사를 강조하고,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의 동기를 구하고 사용할 것을 강조한다.

•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들)를 사모하라 //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고전 13장 : 사랑장
• 고전 14:1 : 사랑을 추구하라 //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성경은 강조할 것을 중간에 넣어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헬라어 카이(k) 비슷하다고 하여 ‘카이애스틱 구조’(역평행 주조)라고 한다.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의 종류에 대한 설명, 방언은 물론 모든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이리라’고 말한다. 가장 좋은 길은 곧 ‘사랑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12장과 14장 사이의 13장에 사랑장을 넣어서 사랑을 강조한다.

‘더욱 큰 은사’(고전 12:31) 중 바울이 구체적으로 예를 든 것은 예언의 은사이다(고전 14장). 예언의 은사가 방언 보다 ‘더욱 큰 은사’인 이유는, 예언의 은사는 방언 보다 예배나 집회에서 공중의 덕을 세우기에 좋은 은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고 열매이자 신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계명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갈 5:22).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또한 ‘더욱 큰 은사(들)’는 원어로는 복수이고 사랑은 단수이다. 그러므로 더욱 큰 은사가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인가?
바로 ‘사랑의 길’, ‘사랑의 방법’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더욱 큰 은사(들)를 구하라고 한 후, 바로 그 다음장에서 은사를 구하고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사랑을 강조한다. 바울은, 은사를 구하거나 사용할 때 사랑의 동기와 자세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소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은사를 사용하는 자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여서 사용하기는 하는데 ‘사랑의 자세나 동’기로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일부 은사자들의 품성이나 자질 문제 때문에 은사 사역계를 떠나거나 소극적인 사람들도 많다. 중지론자들이 가장 공격하는 것도 바로 은사자들의 품성과 자질 문제이다. 방언은 사모되는데 방언하는 교인, 부모나 가족의 성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음 문이 닫힌다는 사람도 많이 있다.

더군다나 기적중지론자들은 ‘거룩한 성령을 많이 만난 은사자의 언행이 어떻게 그 모양이냐?”면서 그런 은사자의 은사를 가짜로 여기거나 경원 시 한다. 그런데, 은사자 중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더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니까 은사를 주셨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령한 은사를 많이 받고 체험을 많이 할수록 자기는 다 된 줄로 잘못 생각하여 인격과 열매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은사가 없을 때는 겸손하다가도 은사를 받으면 갑자기 목에 힘이 들어가고 교만해지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은사와 능력으로 남들을 구원 한 후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아무리 큰 기적과 예언을 하더라도 불법을 행하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님은 많이 받은 자로부터 많이 요구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일반 목회자나 성도 보다는 특별한 은사가 있기 때문에 은사자의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 언행이 더 지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신유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신유의 경우, 은사자를 통해 병이 나으면 은사자는 그 사람을 조정하고 통제하기 쉽다. 예언의 은사는 활용도가 넓은 만큼 더 폐해가 클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요즈음 목회자는 물론 일반 성도에게도 보편적으로 부여된 '예언의 은사'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유익하고 절제 있게 잘 사용하는 사람도 많지만 오남용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하나님의 대사』의 저자인 김하중 대사는 최장 중국 대사를 역임했고, 장관 인사 청문회 도중에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될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인격과 신앙이 성숙한 엘리트 신앙인이다. 그런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잘 사용한 것은 모든 사람의 귀감이다. 그러나 책 내용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김영한 박사도 지적한 것처럼, 김 대사는 그가 기도 중에 받았던 모든 지식이 100%정확한 것처럼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김 대사도 그의 간증집에 인간적 실수 내지 시행착오를 같이 적었더라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영한,『영적 분별』, 357, 401-402).

한편, 정윤석의 『기독교포털뉴스』에는 “성령님이 ‘저 남자랑’ 자라고 하신다”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하나님의 음성듣기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기사들이 실려있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97).

김영한 박사도, 이 내용의 주인공인 성 집사라는 여 예언자는 일류대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윤리도덕 관념이 희박하고, 언행이 경박하며, 심지어는 내담자인 여 권사에게 ‘성령께서 저 남자와 자라고 지시했다’는 황당한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고 기록한다 (김영한,『영적 분별』, 317-18).

물론 대부분의 예언 사역자들은 양 극단의 중간 어느 지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은사란 점에서 은사자나 내담자 모두 사용 상의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예언의 은사가 오남용되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 보자.

1. 모든 것을 예언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

예언은 부분적이다(고전 13:9). 물론 예언의 은사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알려주지만 삶의 다반사의 미주알고주알을 다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사업가나 정치가들 대부분이 유명 점쟁이 몇 명에게 앞날의 일, 주요 결정을 의지한다고 한다. 신자도 예언에 경도되면 자신도 모르게 예언의 말에 지나치게 의지하려는 성향이 된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에 종속되고 상식이나 본인의 건전한 판단력을 간과하여 오히려 낭패를 보기 쉽다.

또한 잘 된다는 예언을 지나치게 의지하면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기 쉽다.

‘하나님의 뜻으로 지은 교회당이 왜 이단에게 넘어가는가?’

얼마 전, 경기도 소재의 수백억 원에 달하는 교회당이 경매로 이단에게 넘어갔다. 담임목사와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교회당을 지었다는데 왜 그런 결과를 초래했을까? 필자는, 비록 교회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규모나 방법 면에서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실제로 건축의 과정을 보면 큰 규모에 대한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더라도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될 수 있다.

2. 예언으로 조정하고 통제하지 말라

예언의 은사를 가지면 자신도 모르게 안하무안이 되어 반말은 물론이고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사람이 있다. 은사는 성도와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조정하고 통제하고 군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특히 우상숭배를 심하게 하고 어릴 때 상처가 많은 사람이 은사를 무기로 삼아 내담자를 자기 페이스로 조정하고 통제하면서 불순종하면 위협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특히 마 7:21-23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예언의 말을 강요하지 말라

하나님은 뜻을 강요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고(빌 2:13), 분별하여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라고 하신다 (고전 14:29; 살전 5:21-22).

특히 결혼의 경우, ‘한 마디 예언’이나 ‘일방적 예언’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자매는 예언 한 마디를 듣고, 불순종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전혀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또 어떤 자매는 예언자의 강제에 의해 결혼했다가 얼마 후 헤어졌다. 또 어떤 자매는 어떤 형제의 어머니가 일방적 예언을 통해 자기 아들과 결혼하지 않는다고 악소문을 퍼뜨려서 힘들어 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본인은 물론 상대방에게도 감동을 주시고 서로 이성적으로도 끌리게 하신다. 결혼 같은 중요한 일은 예언의 말이라도 다양한 루트를 통해 확인하고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도 살펴보고, 상대방과 교제하고 대화도 하면서 인간적이고 이성적으로도 끌려야 한다.

4. 예언의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라

A 목회자의 교회에 어떤 목회자가 지나다가 잠깐 들렸다. 잠시 혼자 기도하더니, A 목사에게 ‘큰 귀신이 붙어있는 것이 보인다’는 말을 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A 목사는 며칠을 두고 기분도 나쁘고 고심도 했다고 한다.

어떤 예언 은사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을 하여 상처를 준다. 물론 예언의 말은 숨은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고 훈계한다(고전 14:24-25).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므로 사용의 묘를 살려야 한다.

듣기 좋은 예언도 당사자의 허락 없이 전하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든다. 하물며 책망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준다. 이런 경우, 본인이 직접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대신하여 중보기보를 하거나, 잘 아는 사이라면 충분히 기도한 후에 본인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 좋다. 신약의 예언의 은사는 주님이 교회에 주신 수많은 은사 중의 하나이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성도 보다 특별하게 잘 난 것은 아니다.

5. 예언을 사리사욕의 도구로 삼지 말라

‘쪽집게 예언’을 하면 자연히 많은 사람이 몰린다. 이때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려는 유혹이 강해진다. B 형제는 쪽 집게 예언을 하는 자매와 동업을 했다. 쪽집게 예언자는 말 그대로 쪽집게처럼 척척 잘 맞추어서 B형제도 사업 상 많은 유익도 얻었지만 뜯긴(?) 돈도 수억 원 대가 되어서 심각하게 고소를 생각하고 있다.

예언을 통해 사업 성공을 추구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영광과 하나님 나라 일이 우선이다. B집사는 쪽집게 예언자를 탓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탐욕을 회개해야 한다.

6. 크게 된다는 예언에 우쭐하지 말라

언젠가 어떤 청년이 찾아왔다.
상담하러 온 줄 알았더니 자기 자랑하러 왔다. 자기가 여러 외국 사람에게 예언을 받았는데 빌리 그레이엄을 능가하는 사역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대답했다.

“고층 빌딩을 세우려면 땅을 깊이 파야 한다.
요셉과 모세가 꿈이 이루어지는 데 몇 년이 걸렸는가?
그만한 사역자가 되려면 적어도 20년 이상 강한 연단을 받아야 한다.”

청년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다가 시계를 보더니 ‘갈 시간이 되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떤 자매들은, ‘캐서린 쿨만 같은 사역자가 된다’는 말에 흥분하여 이미 자기가 그렇게 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청년이 나중에 빌리 그레이엄 같은 사역자가 될 수도 있고, 그 자매가 캐서린 쿨만 같은 사역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일수록 땅바닥을 깊이 파야 한다.

더군다나 우상숭배가 심한 한국적 상황에서 크게 된다는 예언에 대한 마귀의 방해나 역공은 너무 심하다. 기독교 역사가 수백 년이 되는 미국과는 영적 토양이 전혀 다르다. 더 많은 인내와 환난과 연단과 공격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크게 된다는 예언을 받았다고 우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지금 세대는 한국에서 예언 사역의 개척 세대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가야 한다.

7. 교만과 시기를 내려놔야 한다

교만과 시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취약점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도 교만과 시기의 덫에서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은사자의 교만과 시기는 더 심하다. 남 보다 좀 더 가지면 교만하여 잘 난 체하고 남이 나보다 더 가지면 시기하고 질투한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기억하라.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잘 사용하면 칭찬 도 받고 상급도 받지만 잘못 사용하면 책망 받고 버림도 받는다.

8. 자신의 예언의 은사를 너무 과신하지 말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순간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밧세바를 성폭행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마저 전쟁터에서 죽게 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선지자 나단의 다윗의 죄를 비유적으로 책망한 후에야 통회자복 하면서 회개했다.

예언의 은사에 능하다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을 모두 알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잘 알려주시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예언 사역자들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도 스스로 올무에 빠져서 분별하기 어려우므로 늘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2-13).

하나님의 음성을 오랫 동안 듣다 보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은 과거의 것을 확인하는 것들이 많고 새로운 것들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이럴 때일수록 예언의 은사를 자신의 치유와 변화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좋다. 신자는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생각과 이론이 100% 하나님 중심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활용하여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원인을 찾거나, 하나님이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내 기질이나 성격을 찾아내어 회개하면 좋다.

9. 예언의 은사가 강할수록 성경 말씀을 더 가까이 하라

예언의 은사를 활용할수록 접할수록 말로 설명하기 힘들고 난해한 환상, 꿈, 음성을 접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최초에 이런 경험을 하자,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말씀 뒤에 숨겨라.”

은사자 중에, 자기가 듣고 본 것을 그대로 발설하다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과 만나서 춤도 추고, 같이 여행도 갔다’는 말은 열린 사람에게는 수긍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엽기적인 스토리가 되므로 지헤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도 ‘셋째 하늘’ 경험을 두루뭉실하게 표현하고(고후 12:1-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2:5)고 말했다.

또한, 신약의 예언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보고 듣는 계시-해석-적용의 3단계가 모두가 점검되고 분별되어야 한다. 이중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틀린 예언이 된다. 그러므로 예언의 전 단계-특히 미래의 인도함에 대한 말씀의 경우-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10. 권위에 순종하라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 은사자들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권위에 대한 순종 여부이다. 미국인들은 권위와 질서 개념이 강하다. 필자가 30대초에 주재원으로 있을 때, 70대의 미국인 영업 사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필자가 자기 보스라고 해서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업무 면에서 깍듯이 대했다. 그러면서도 장관이 자기 커피를 타 먹을 정도로 가부장적 권위에서 자유로운 나라이다.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다.
외국 집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안수 사역자 대부분이 훈련 받은 평신도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목회자의 권위에 자연스럽게 순종한다.

그러나 한국은 좀 복잡하다.
우리 한국인은 아직도 리더십에서 능력보다는 연공서열, 섬기기 보다는 군림하려고 한다. 평신도라도 은사를 받으면 목회자를 제치거나 목회자 위에 군림하여 교회 내의 질서를 흐리는 경우가 많다. 은사자는 교회와는 별도로 자기 사역을 하는 사람도 많다. 신학적, 신앙적 훈련이나 사용법에 대한 훈련 없이 은사 하나만으로 개별 사역을 하다 보니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교회에서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가 무엇을 좀 가지면 섬기기 보다는 군림하고 통제하려는 죄 된 본성-우상숭배가 심할수록 강하다-이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한국인은 꼬리가 되기보다는 머리가 되려는 본성이 강하여 더욱 그런 것 같다. 이 문제는 은사사역을 하는 한국 교회가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이다.

11. 예언과 설교·가르침을 구분하라

특히 예언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성경 말씀을 풀이하고 가르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직관에 의존하는 예언의 은사자는 종합적이고 분석적인 말씀 가르침에 약하다. ‘예언의 은사’와 ‘가르침의 은사’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때 미국에서 뛰어난 예언·치유 사역자였던 윌리암 브랜험(William Branham)은 전혀 모르는 회중의 집 주소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힐 정도로 뛰어난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강력한 ‘신유의 은사’를 가졌지만, 나중에 동역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경 교사’-그는 정규 신학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가 되어 이단 사설을 말하여 곤욕을 치르던 중, 하나님이 그를 일찍 데려가셨다.

그러므로 예언 은사자는, ‘하나님이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해 주셨다’. ‘저 구절을 저렇게 풀이해 주셨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전에 반드시 유명 주석을 참고하여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을 때 선포하기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예언의 말씀에 의지해서만 성경을 풀이해서는 위험하지만 훈련이 되면 예언의 말씀을 통해 성경 말씀을 푸는 만큼 은혜로운 것도 드물다. 필자는 아직 완전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예언적 설교 준비 과정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적이 많다. 성령께서 어느 유명 주석에서도 보지 못한 신선하고 은혜로운 깨달음을 주셨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가진 목회자는 예언적 상담도 중요하지만 예언적 설교를 위해 은사를 활용하면 아주 훌륭하고 참신한 설교자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강력한 능력과 체험을 통해 사역이 활성화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서신서는 기적을 체험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관계적, 윤리적 문제를 다룬 책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보완적이다. 그런데 중지론적 교회는 서신서를 강조하고 은사적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적을 강조하여 서로가 절름발이가 되기 쉽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이란 말이 있듯이, 무엇이든 지나치면 반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회가 주지 못하는 여러 가지 좋은 것을 채워주지만 동시에 전통적 교회의 좋은 것을 소홀히 취급하려는 약점도 있다. 은사도 중요하고 말씀도 중요하다. 능력도 중요하고 열매도 중요하다. 사역[doing]도 중요하지만 품성[being]도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마 2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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