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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3)] 성령 운동, 이대로 좋은가(1)성령 운동의 변호와 확장을 위한 전략과 단합이 필요하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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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29  21: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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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3)]

성령 운동, 이대로 좋은가?(1)

-성령 운동의 변호와 확장을 위한 전략과 단합이 필요하다-

 

지난 수 개월 동안 기적중지론에 관한 기사를 쓰고 또한 종합적인 책을 쓰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적중지론은 원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그것을 체계화하고 대중화시킨 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의 시조인 장 칼뱅이다. 장 칼뱅은, 종교개혁 당시에 기적을 강조하는 천주교 가톨릭과 급진적인 광신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기적은 사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정당한 사자들임을 입증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기적은 중지되었다고 주장했다.

만일 칼뱅의 기적중지론이 여기에서 그쳤다면 가톨릭과 광신도들의 기적만 부인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경의 기적 관련 구절들을 모두 ‘비기적화’(Demiraclization) 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성경의 신화적 이야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성경의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성경의 신화적 언어를 현대적이고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성경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라고 한다.

필자는 칼뱅이 신약 성경의 기적 관련 내용이나 구절들을 모두 비기적적인 것으로 재해석한 것을 ‘성경의 비기적화’ 또는 ‘비기적화’로 부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칼뱅은 ‘방언의 은사’를 ‘알려진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설교나 가르치는 은사,’ ‘치유의 은사’를 ‘그리스도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는 것’으로 비기적화 하여 해석한다. 오늘날 기적중지론자들의 대부분이 칼뱅의 비기적화 해석을 바탕으로 살을 좀 더 붙이거나 떼면서 은사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중지론자들의 비기적화 해석에 의하면 성경의 기적은 모두 사도 시대에 중지되었으므로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기적은 모두 가짜가 아니면 심리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자들이 아무리 기적을 전파하고 간증해도 이미 기적중지론으로 머리가 굳어진 반대자들에게는 가짜 사역 전파자로 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신학과 사고방식을 깨지 않으면, ‘나는 그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것을 어떻게 믿나?, ‘말세의 기적은 모두 사탄의 소행이다’면서 일축해 버린다.

그런데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라면서 무관심하거나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목회자는 물론 성도들도 사역의 현장이나 실 생활에서 기적중지론자들과 부딪치기 마련이다. 성도라면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 중에서도 기적중지론자가 있기 때문에 불신자 못지 않게 기적중지론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핍박과 비난과 압력을 받는다. 목회자나 사역자라면 사역이 조금 확장되고 이름이 알려지면 반드시 기적중지론자의 배척과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령의 새로운 사역이나 운동이 소개될 때마다 홍역을 치른다. 어떤 사역이나 프로그램들-찬양과 경배 등-은 세월이 흐르면서 확장되어 안정적으로 정착하지만 다른 프로그램들-방언, 쓰러지는 현상, 웃는 현상, 예언 등-은 상당히 수용되고 있지만 아직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은사주의자와 기적중지론자의 대결이 치열하지만,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고, 은사주의자들의 층이 두텁고, 기적중지론을 체계적이고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땅덩어리가 좁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개인이나 운동이 뜨면 주변 교회들이 교인 이탈과 신학적 논쟁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새로운 운동에 대한 이단 시비가 더 치열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기적중지론자들의 잘못된 신학과 논리를 비판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상황에서 성령운동가들의 요건과 영적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성령 운동가의 영적 자세 

첫째, 성령 운동가는 강해야 한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6).

성령운동은 새로운 사역, 새로운 운동을 소개하는 사역이다. 사역하는 사람은 은혜 받고 좋아서 하지만 외부 환경은 호의적이 아니다.

-먼저, 새로운 사역은 마귀의 역공의 대상이다.

성령 사역-은사 사역, 능력 사역-은 마귀의 진지를 허물고 회복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마귀의 역공이 심하다. 마귀는 성령운동가에게 끊임없이 의심, 불안, 두려움, 무기력의 기운을 불러 넣어서 포기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진다.

-둘째,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하다.

개인이면 가족이나 친지의 배척과 비난, 목회자라면 교회 내 반대파의 배척과 비난, 운동의 지도자라면 교단이나 교계의 배척과 비난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 내공-속사람-이 약하면 쉽게 주저 앉거나 허물어 버린다.

영적 내공이 강한 사람은 잘 견뎌내지만, 강한 은사는 나타나지만 영적 내공이 약한 성령 운동가들이 생각보다 많다. 어떤 목회자는 이단 시비에 걸리자 안절부절하지 못하여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약과다. 비판자들이 지속적으로 공격하면 견디지 못하여 이빨이 다 빠지고 사모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죽어간 사람도 있다. 성령사역은 기도로 영적 내공을 쌓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치열한 영적전쟁이므로 강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진다.

 

 둘째, 성령운동가는 담대해야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역을 할 때,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대적했다. 예수님은 죄인인 창기와 세리들은 불쌍히 여기셨지만 새로운 사역을 대적하고 비판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16등).

사도들도 담대하게 대처했다.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7-29).

강한 것이 영적 내공이라면 담대한 것은 영적 외공이다. 성령운동을 하다가 외부의 배척과 비난과 비판을 당하다 보면 사람이 위축되기 쉽다.

성령 운동은 패러다임의 충돌이다. 새로운 사역은 반드시 이전 사역과 패러다임의 충돌을 일으킨다. 자기의 텃밭을 순순히 내놓는 옛 패러다임은 어디에도 없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다. 배척, 비난, 시기와 모함은 기본이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빌라도)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 5:17-18).

이전에는 교리가 다르거나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면 반대파를 죽이거나 화형 했다. 요즈음에는 그게 안되니까 영적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성령 운동가들은 기존 교회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을 많이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성령운동가들 중에는 ‘두려움의 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한두 번 공격을 받고 나면 의기소침하여 존재감이 드러날까 봐 조심스럽게 드러나지 않게 사역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럴 경우, 성령이 소멸되기 쉽다.

성령은 성령 보다 제도나 전통을 우선 순위에 두거나 사람의 눈치를 보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전통적인 교회는 전자에 속한다. 초기에 카리스마틱한 지도자가 새로운 운동을 일으켜서 핍박과 배척, 수용과 정착, 성장과 확장의 단계를 지나면 반드시 제도화, 교리화, 관료화되어서 성령의 새로운 사역 보다는 시조(始祖)의 가르침과 전통을 더 의지하면서 과거지향적이 된다. 그러면 성령은 또 다시 주로 ‘주변의 광신자’(lunatic fringes)를 통해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신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belt) 대통령은 “모든 개혁에는 주변의 광신자가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12제자, 천주교 가톨릭을 대항한 루터나 칼뱅,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찰스 파함이나 기타 운동가들은 모두 당시에는 ‘주변의 광신자들’이었다.

성령은 또한 사람의 눈치를 보는 자들에게서 떠나신다. 교회에 은사사역을 소개할 때, 찬반 세력으로 갈라져서 교회가 분란에 쌓이고 심지어는 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 지도자가 어떤 처신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교단이나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성령사역을 양보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약화되거나 떠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사람 눈치 보는 지도자와 함께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마지막으로, 핍박과 비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분야이다.
위에서 잠시 밝혔지만 새 패러다임인 성령사역은 전통적인 옛 패러다임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성령 운동가들은 ‘좋은 것’을 전파한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반대파의 반격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반대파의 집중 공격을 받고 허물어지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사실을 목격해왔다. 필자는 수십 년 동안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왔다. 많은 성령 사역자들이 순진한(?) 마음으로 성령의 좋은 것을 전파하다가 기존 교단의 감시망에 걸려 공격을 받고 오랫동안 곤욕을 치르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새로운 운동이 조용히 정착한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이 기득권층과의 피 나는 갈등과 투쟁을 통해 정착했다. 예수님·사도들과 종교지도자들, 천주교와 종교개혁가들, 성공회와 요한 웨슬리, 오순절 운동과 주류교단들. 그런데 한국의 성령 운동가들은 기독교 역사가 연천(年淺)해서인지 이런 것에 대한 안목도 부족하고 대처 방안에도 신경을 쓰지 않다가 당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 운동가들의 공통적인 패턴

일반적으로 성령 운동가들에게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대부분의 성령 운동가들은 우뇌 중심적이다

은혜와 감동을 사모하는 우뇌 중심자는 따지고 분석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저급하고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따지고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중지론자들의 비판망에 걸려 허무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하니까 이성과 논리를 관장하는 좌뇌와 감성과 경험을 관장하는 우뇌를 주셨다. 중지론자들이 좌뇌중심적이라면 성령 운동가들은 우뇌중심적이다.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애플의 스마트폰, 페이스북, 구글이 세계 기업계를 제패하는 이유는 좌뇌중심적 기업계에 우뇌적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융합하고 통섭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우뇌의 시대이고 통섭의 시대이다. 좌뇌적 기술은 평준화되지만 상상적이고 창의적인 우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크니까 우뇌의 시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뇌와 좌뇌의 통섭의 시대이다. 일반적으로 좌뇌적 기술은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우뇌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지 우뇌 시대라고 해서 좌뇌적 기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일부 성령 운동가들은 지나치게 우뇌 중심적이 되어 좌뇌적인 것을 무시하다가 좌뇌 중심적인 중지론자들의 비판에 걸려 넘어진다.
 

둘째, 비판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운동은 소멸된다. 

한국 교계에 논란을 가져온 ‘빈야드 운동’을 예를 들어보자.
빈야드 운동은 예수님의 사역 방식인 말씀 전파(proclamation)와 능력 시위(demonstration)를 통한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와 임재 찬양과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의 핵심이자 논란의 대상이었다. 필자가 미국에서 한참 은혜를 받을 때, 빈야드 운동이 미국의 성령 사역을 휩쓸었다. 필자도 당연히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관련 서적들도 많이 읽었으며, 한국의 수많은 목회자들도 빈야드 운동에 매료되어 미국 집회에 많이 참석했고, 미국 빈야드 협회의 한국 대표를 통해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우려했다. 이전에 이미 이와 비슷한 사역을 하던 Q 목사가 한국 교계의 집중 포화를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소개자가 적어도 장로교가 70%를 점유하는 장로교 대국인 한국의 상황[context]을 감안하여 소개하기를 바랬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갈 1:8)고 할 정도로 강경하게 대처했지만, 디모데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할례를 받는 것은 허용했다(행 16:3). 교리와 문화적 차이를 구분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운동의 소개자들은 이런 배려나 지혜가 부족하다.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뭣하지만, 한때 인기를 끌었다가 반격을 받고 허물어진 어떤 가르침이 있다. 필자는 그 분이 한국에 그것을 소개하기 전에 나름대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글을 통해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운동이나 가르침의 지도자들은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책은 출판되자 말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에서 그의 사역은 번성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도 그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엉성하여 조만간 역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장로교 신학자들의 집중 포화를 받고 허물어져 버렸다

빈야드 운동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소개된 빈야드 운동은 기존 교단과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고 무너져버렸다. 물론 그 영향으로 찬양과 경배는 새로운 탄력을 받고 지금은 한국 교회의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지만 빈야드 운동의 공식적 명맥은 끊어진 셈이다.

미국에서도 빈야드 운동에 대한 신학 공방이 치열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웨인 그루뎀, 잭 디어 및 샘 스톰즈 같은 신학자들이 빈야드 운동을 당당하게 변호하면서 존 맥아더나 행크 해너그라프 같은 비판자와 맞섰다. 그 결과 비록 빈야드란 이름은 사라졌지만 존 윔버가 시작한 제3의 물결파는 지금도 번성하고 있으며 『기독교백과사전』 편찬자인 데이빗 배렛은, 2025년에는 제1의 물결이 9700만 명, 제2의 물결이 2억 7400만 명, 제3의 물결이 4억 6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한국 교계는 어떠한가?
빈야드 운동에 열광해 있던 수많은 목회자들 중에서 한국 교단이나 언론의 집중 포화에 당당하게 맞서서 신학적 논쟁을 벌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빈야드 운동을 비판하는 함량 미달의 글이나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질 뿐이었다. 다른 운동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성령 운동 주도자들이 매스컴을 타고 화려하게 등장하여 사역의 이익을 누리다가 반격이 시작되면 제대로 대꾸 한번 못하고 맥 없이 주저 앉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기독교는 핍박의 종교’라면서 인내하고 감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도들도 순교했지만 사역을 할 때에는 반대파들을 당당히 대적했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 당시, 부흥파의 대표인 조나선 에드워즈도 반(反)부흥파인 찰스 촌시의 신랄한 비판에 침묵하지 않았다. 촌시의 비판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부흥 집회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현상, 감정적 현상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뒤돌아보면 에드워즈의 변론은 명쾌한 신학적 논증으로 남아있지만 찰스 촌시의 비판은 이름도 없이 묻혀 버렸다.

새로운 성령 운동 주도자들이 신학적 소양이나 지혜나 담력이 부족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운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운동이 소멸되거나 다른 곳으로 촛대가 옮겨지기도 한다.
 

성령 운동의 전파와 변호를 위한 대안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순식간에 유럽을 초토화한 나치 독일로부터 실지(失地)를 탈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합군은 3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 끝에, 1945년 6월6일에 프랑스의 노르망디만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1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정규군 20여만 명이 투입된 지상 최대의 작전이었는데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전의 역할이다.

하나는, 해변에 상륙하는 병사들을 적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속한 상륙정과 해변 지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신속하고 피해가 적은 상륙을 위해 수륙양용 상륙정을 개발하고, 또한 장갑차 앞에 동시다발 지뢰제거기 등을 설치하여 피해를 줄이고 장애물을 해결했다.

또 하나는 독일의 암호를 깨는 것이었다. 독일의 ‘에니그마’라는 암호기계는 매일 암호를 변경시키는데 이 암호를 깨지 못하여, 연합군에게 공급되는 군수물자 운반선이 독일 해군의 공격으로 번번이 바다에 침몰되는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은 암호 해독 특공대를 조직하여 1년 정도 만에 독일 암호를 해독하여 오히려 독일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전쟁 기간을 2년 단축하고 1000만 명 이상의 병력 손실도 막았다고 한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은사주의자들은 정규전(사역)은 잘하는데 특수전(언론을 통한 홍보나 변호 등)에는 약한 것 같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정규전에는 약하지만 특수전에는 강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적이 나타나면 일치단결하여 전방위적으로 공격하여 무너뜨려 버린다. 은사주의자들은 사역은 잘하지만 특수전에 약하여 그 좋은 은사나 능력을 갖고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도 도로에 장애물이 있으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은사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장애물’을 다루는 대안이 거의 없다. 은사운동을 비판하고 대적하는 중지론자들과는 언론이면 언론, 신학이면 신학으로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필자가 지난 수년 간 한국 교계에 논란을 일으킨 비판 글들을 분석해 보니, 유치하고 오류투성이인 글들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는 평신도인 이인규, 성령 운동에 문외한인 정이철과 박형택 등이 종횡무진으로 한국의 성령 운동을 초토화했지만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만일 성령 운동가들 중에서 그 당시에 조나선 에드워즈처럼 당당하게 맞섰다면 성령 운동의 향방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점을 깨닫고 준비를 해왔다. 10여년 전부터 이 일을 하려했지만 어쩐 일인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아서 기다리다가 재작년에 블로거, 작년에 『글로리아타임스』를 시작했다. 성령 운동가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갖고 있어도 편견의 색안경-기적중지론-을 끼고 대하는 자들을 당당히 맞서서 논쟁하고 설득시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글로리아타임스』를 하면서 중지론자들에 비해 여러 가지로 역부족인 것을 깨달았다.
 

첫째  ‘논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중지론자들은 학적(學的)인 논객이 넘쳐난다.

다음의 인터넷 사이트를 보라.

   
 

기적중지론자들의 집합체인 세이연(세계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에 동조하는 단체들이 수십 개나 된다. 이들은 이단을 척결하는 공로도 있지만 성령 운동을 비판하고 대적하는 폐해도 크다. 이들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한인 교회가 있는 곳에는 대부분이 개설되어 있다. 이들은 한쪽에서 글을 쓰면 다른 쪽에서 공유하고 퍼나른다. 그외에 익명으로 개설된 블로그나 회원제인 카페 등에서 기적중지론을 열심히 전파하고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운동을 전하고 변호하는 사이트는 『글로리아타임스』외에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필자도 이전에는 십 여 년간 성령운동을 전파하는 사이트-『글로리아넷』과 갓피플 카페 『GEM글로리아』-를 통해 많은 자료를 공급해왔다. 물론 이런 글들은 성령운동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비판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구체적으로 반박하지 않으면 난공불락 같은 기적중지론이 끄덕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적인 은사나 사역에 치중하다 보니 중지론자들을 대적하는 학적 소양을 쌓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에 별로 관심도 없고 중요성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성령사역의 대상인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런 인터넷 매체의 영향을 받아 마음 문을 쉽게 열지 않거나, 수시로 교회에서 성령운동을 비판하고 대적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령사역를 변호하는 언론이 필요한 이유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성령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운동의 확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운동가들 중에서 이런 논쟁으로 반박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필자는 내년부터는 은사사역을 변호하는 논객을 많이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둘째,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

무슨 사역이든 ‘재정’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일도 재정 지원이 없으면 힘을 받지 못한다.

중지론자의 집합체인 ‘세이연’은 매년 해외에서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정기 모임을 가질 정도로 재정이 풍부하고 다른 언론들도 각 교회나 단체의 후원으로 유지를 하는데 하나 뿐인 『글로리아타임스』는 아직도 재정적으로 열악하여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성령 운동하는 교회나 단체의 규모가 작고 열악한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의 중요성을 모르거나 단결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필자도 글 쓰는 일을 그만 두면 된다. 필자를 직접 공격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총대를 메고 성령운동 대변자와 변호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나마 중지론자들의 쓸데 없는 비난이나 집적거림을 많이 걸러내었다고 자부한다.

인터넷과 SNS가 보편화 된 현대에 사역을 변호하고 대변하는 언론은 필수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은사 운동을 삼키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누군가가 이것을 막지 않으면 그나마 침체된 성령 운동이 더욱 침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듯이,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런 사역에 관심을 갖고 조금씩만 후원해도 성령 사역 변호와 확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특히 연말을 맞이하여 『글로리아타임스』가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감동이 오시는 분들께서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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