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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2)] 기적중지론과 성령세례 논쟁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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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20  19: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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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중지론과 성령운동②]

 

기적중지론과 성령 세례 논쟁(2)

-‘성장’은 물론 ‘열매’에서도 월등하게 뒤지는
기적중지론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

 

   

▲모든 성령운동의 뿌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들어가는 말

인간은 꾀가 넘치고 영악하다.
자기의 잘못이 드러나거나 지적을 받으면 솔직하게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견지해온 신앙과 신학은 더욱 그렇다. 필자가 기적중지론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중지론자들이 기적계속론을 비판하기 위해 ‘얼마나 성경을 왜곡하고 편파적으로 해석하는가’를 보고 기가 질릴 정도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의 기적을 신화, 전설, 심리현상 및 이교 현상이라고 하면 보수주의자들은 극구 부인하면서 성경의 기적은 ‘사실’이고 ‘역사적 사건’이라고 변증한다. 그러다가도 ‘교회 시대에도 기적이 계속된다’고 주장하면 자유주의자들의 그 논리를 그대로 도용하여 ‘심리 현상이다’, ‘이교 현상이다’, ‘학습된 행위’라고 주장한다. 성령의 내주가 없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고 성령 체험이 없는 중지론적 보수주의자들은 교회 시대의 기적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지론자들은 자기들이 성경의 권위와 진리를 제일 잘 수호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 결과는?
양적 쇠퇴와 질적 저하이다. 만일 그들의 중지론이 옳다면 교회는 성장하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중지론의 본산인 유럽의 교회는 골동품화 된 지 오래이고, 미국에서도 중지론을 고수하는 자유주의 교회와 보수주의 교회는 쇠퇴 일로에 있다. 그러나 지난 회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계속론을 당연하게 여기는 성령 운동하는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왜 그런가?
전쟁의 승패는 무기에 달려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은 각종 첨단 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영적 무기이다. 특히 기적행하는 은사는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기적행하는 은사가 없으면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의 계략을 잘 알지도 못하고 능력을 잘 이겨내지 못한다.

특히 중지론자들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신유, 방언과 예언, 축사는 강력한 정찰무기이자 공방무기이다. 성령 운동하는 교회는 이런 영적 무기를 잘 사용하기 때문에 전도와 신앙에 효과적이다. 중지론은 영적 군인들이 전투 할 때 고성능 무기-기적행하는 은사-는 특별한 사도들이나 사용하고 또한 위험하니 보통 신자들은 사용하지 말고 재래식 무기로만 싸우라는 주장과 같다. 그렇게 영적 전투를 하니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를 제대로 이기지 못하고 그 결과 교세가 쇠퇴하는 것이다.

중지론자들은 ‘은사 보다는 열매’라고 하는데, 이는 ‘전투는 못해도 생활만 잘 하면 유능한 군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유능한 군인은 전투도 잘 하고 생활도 잘 한다. 영적 군인인 신자도 마찬가지다. 전투는 못하면서 생활만 잘 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많은 학생들이 기적중지론적 교회에 다니다가 대학을 가면 대부분이 무신론자가 된다고 한다. 중지론적 변증에 동조하다가 세상 재미, 그럴듯한 진화론, 논리적인 자유신학에 금방 말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력한 영적 체험이 있거나 초자연적 은사를 경험하면 세상 풍조나 인간의 논리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중지론은 중지론자들이 자기들의 영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중지론은 구 한말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근 영적 쇄국정책이나 다름 없다.
 

은사적 성도가 비은사적 성도 보다 열매의 수준도 더 높다 

중지론자들은 ‘숫자 보다는 성숙이 더 중요하다,’ ‘은사 보다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자기들은 성숙하거나 열매를 더 잘 맺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스캔들에 빠진 몇몇 은사주의 지도자들을 거명한다. 그러면 중지론자들 중에는 스캔들에 빠진 지도자들이 없는가? 더 많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장자 교단의 대형 교회 지도자들의 3G 스캔들-Gold(돈, 공금 횡령), Girl(이성, 성추행), Glory(영광, 논문 표절)-이 대표적이다. 그외에 총회 회장 및 임원의 금권선거, 교회 세습, 성직 매매, 교회 찬탈(노회 임원의 계략으로 개 교회를 강탈하는 것) 등은 전통적 교단의 고질적인 악성 폐해이다. 그러면서 과연 은사주의자들의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도들의 신앙의 열매도 은사적 성도들이 비은사적 성도들 보다 더 낫다는 연구 보고서가 있다. ‘종교와 공적 삶에 대한 퓨 포럼’(Pew Forum) 사(社)가 2006년에 출판한『성령과 능력』(Spirit and Power)이란 제목의 보고서에 의하면, 은사운동이 비(非)은사운동에 비해 정통성, 도덕성, 경건, 전도에 대한 열정 및 사회적 참여에 대한 기여도가 전반적으로 더 높다고 한다.

정통성. “은사주의자들 즉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운동가들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실천사항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은사주의자들 대부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데, 이러한 견해는 비은사주의자들보다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확고하다.”

도덕성. “오순절주의자들은 동성애, 혼외 정사 및 음주와 같은 사회적, 도덕적 주제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한다.”

경건. “은사주의자들은 또한 교회 출석, 개인 기도 및 성경 읽기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실천행위 참여율이 비은사주의자들 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다.”

전도에 대한 열정. “10개국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의무감에 있어서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 보다 더 열심이란 사실이다.”

왜?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만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오순절파의 믿음은 특별하다”고 기록한다.

사회적 참여.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운동가들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충분하면 사회적 병폐들이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한 은사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여긴다.”

은사주의자들은 은사는 물론 열매에 있어서도 비은사주의자들을 앞지른다는 것이 퓨포럼 보고서의 핵심이다.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객관적 보고서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중지론자인 존 맥아더는 이전에는 그래도 은사운동을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부 무절제하고 지나친 자들도 있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 하는 은사주의자들을 많이 알고 있으므로 모두를 한 통속으로 몰고 싶지 않다고 했다.12)  그런데 이후에 출간된 『다른 불』에서는 은사운동의 급격한 성장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복음주의 학계나 교계에서도 은사운동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은사운동 전체가 마귀적이라면서 동키호테처럼 ‘전면전을 치르라’고 광기를 부리자13) 사방으로부터 강력한 역공을 받았다.14)

만일 오순절-은사운동이 맥아더의 주장대로 마귀 운동이라면, 어떤 마귀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존중하게 만들고, 도덕적이고, 성경적으로 경건하게 만들고, 열심히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가? 이런 것이 열매가 아니라면 도대체 맥아더가 주장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기적중지론을 신봉하고 기적을 행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맥아더가 기껏 한다는 짓이 칼뱅, 벤자민 워필드, 개혁주의 중지론자인 리차드 개핀, 존 스토트, 패트 로벗슨(Pat Robertson), 세대주의 중지론자인 메릴 엉거(Merrill Unger) 등의 견해를 짜집기 하는 정도이다.15) 한국에도 맥아더 류의 꼴통 중지론을 추종하는 자들-김재성, 이승구, 최병규, 이인규, 정이철, 박형택 등-이 지속적으로 한국 교계의 영적 분위기를 흐려놓고 있다.

이들은, 바울 이전의 사울처럼, 지식을 몰라서 자기 의로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경험적’ 성경 해석과 ‘논리적’ 성경 해석

중지론자들이 계속론자들을 가장 비판하는 가장 것 중의 하나는 계속론자들이 진리가 아니라 ‘경험’을 신앙의 기초로 삼고,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경험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바탕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은근히 과시한다.

과연 그런가?
필자가 보기에 중지론자들은 ‘논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자기들이 성경적 경험이 없으니까 인간의 철학과 논리를 바탕으로 중지론이란 엉터리 교리와 신학을 세워놓고 그것을 성경의 진리,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이성과 경험에 우선한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이성적인 철학과 논리로 바탕으로 세운 중지론으로 교회 시대의 기적을 부인한다.  계속론자 중에 경험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자도 있지만 중지론자에 비하면 폐해가 훨씬 덜 하다. 중지론자들이 교회 시대의 기적을 논리적으로 부인하면서 빠뜨리지 않고 하는 소리가 ‘경험은 영적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하여 교회의 분열을 촉진한다’, ‘기적은 위험하다’이다.

자동차와 자건거를 비교해 보자.
자동차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특히 한국은 OECD국가 중에서도 자동차 사고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2011년에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이 5,229 명, 부상 34만 1391명이고, 자건거 사고로 죽은 사람은 275명, 부상은 1020명이었다. 그런데도 ‘자동차가 위험하니 운행을 중단시키고 자건거만 타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그런가? 위험은 하지만 효율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적행하는 은사도 마찬가지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영적 오·남용의 기회가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2세기의 몬타니즘(Montanism)16), 가톨릭의 기적 인정, 각종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의 기적 주장 등. 그렇다고 해서 중지론 신학으로 기적행하는 은사 자체의 사용을 ‘중지’시키는 것은 자동차가 위험하니 사용을 ‘중지’하고 자전거 타자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것에는 원래 가짜가 많은 법이다. 100 달러 짜리 위조 지폐는 흔해도 10달러 짜리 위조 지폐는 드물듯이, 기적이 위험하지만 효과가 있고 좋으니까 가짜가 많은 법이다. 그런데 가짜가 많다고 해서 진짜를 부인해야 하는가? 기적중지론은 기적은 위험하고 가짜가 많으니 아예 싹을 도려내는 신학이다. 기적중지론은 정통을 가장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여 결과적으로는 마귀만 좋게 만드는 이적 신학이다.

신자의 경험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어 새롭게 깨닫게 하시거나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방언, 신유, 예언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서 경험한다고 생각하는가, 짜고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운동이나 가짜가 있고 조작자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나 사람들은 금방 퇴출된다.

요즈음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얼렁뚱당해서 진리를 포장하고, 짜고 하는 행동에 20세기 초부터 100년 이상 지속된 성령 운동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열광하겠는가? 초기의 오순절 운동은 교육 수준이 낮고 가난한 하류층이 주요 멤버였지만 1960년대의 은사운동부터는 중산층과 고학력자들이 많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론자들은 ‘경험’으로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경에 있는 교리를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경험’도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먼저, 성령 하나님이 어떤 구절이나 단어를 ‘새로운 의미로 해석’해 주신다.

왜 교회는 1500년 동안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를 주장할 때까지 이 교리를 몰랐을까? 성경에는 분명히 있었지만 루터가 이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낼 때까지 가톨릭은 사람들이 ‘믿음과 행위를 통해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도 이 교리를 갑자기 쉽게 깨달은 것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마음의 부담으로 가톨릭에서 말하는 온갖 고행과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마음의 평안이 없었다. 그러던 중 로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예수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의 심령은 편해졌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초가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루터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셔서 ‘하나님의 의’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여겼던 구절들의 의미를 ‘경험’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해주신다.

방언 운동이 그런 경우이다. 하나님이 오순절 성령운동의 시조인 찰스 파함(Charles Parham)에게 ‘성령 세례’의 다른 의미에 관심을 갖게 만드셨다. 그는 이미 중생 이후에 오는 성령 세례로 인한 ‘성화’와 ‘능력’의 3단계 축복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능력’이 ‘방언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신학교 학생들을 통해 시험해 봤더니 그들 모두가 방언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오순절 성령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이런 것들은 경험으로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경에 있는 교리를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거나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경험에 머물면 발전이 없다. 루터교와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당시의 칭의 교리가 워낙 강렬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아직도 구원에서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화를 등한시 하며, 나아가서 은사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아직도 기적중지론을 고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지론자들은 자신들의 무경험과 상대방들을 통한 나쁜 경험들- 은사주의자들의 오·남용과 무절제-을 바탕으로 중지론을 주장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줄을 모른다. 개인적, 역사적 경험의 제한이 교리와 신학의 한계를 가져 온 것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성령 세례에 대한 견해가 교파 별로 다른 것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성경의 진리를 그 정도의 수준만 열어주셨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필자는 이것을 점진적 조명17) 이라고 부른다 점진적 조명은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에서 성경공부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동안, ‘성령’이나 ‘성령 체험’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방언을 하고 나서 성경 특히 사도행전을 보니 ‘성령’이란 말이 도처에 깔려있었다.

왜 이전에는 그 ‘단어’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경험이 없으니 관심도 없고, 누가 드러내어 가르치지도 않으니까 성경에는 있지만 내 생각이나 삶 속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설령 눈에 들어왔더라도 무관심하게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방언을 받았을 당시는 방언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때이므로, 오순절 계통에서 강조하듯 행 2장, 8장, 10장, 19장에서 8장 외에 성령을 받은 결과 ‘방언을 했다’는 구절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한참 후 음성을 듣고 예언의 은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니 고전 14장1절에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구절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소개하면서 모든 육체에 성령이 부어져서 남녀노소가 ‘예언’ 한다는 구절도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으면 방언 한다는 구절에만 눈이 갔었는데 자세히 보니 성령이 임하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구절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계속론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경험하는데도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세운다’고 비판한다. 경험으로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경에 숨겨져 있던 교리를 새롭게 드러낸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물론 모든 성경 구절을 실제로 경험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 없으면 중지론자들처럼 이론적,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들이 많다. 중지론자들이 성령 세례를 중생·회심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성령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회심과 동시든-실제로 회심과 동시에 성령 경험하는 경우는 드물다-이후이든 성령 경험이 회심 자체와는 별개의 색다른 경험이란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자, 이제 성령 세례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가보자.
 

기적중지론과 성령 세례 논쟁

기적중지론자들은 성령 세례에 대해서도 기적계속론자들과 견해를 달리한다.

성령 세례가 서신서(고전 12:13)에서는 중생·회심18)하여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도행전(행 1:5; 11:16)에서는 사역을 위한 능력을 받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동일한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무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했고 오순절주의는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여 다른 의미를 배제해 버렸다.

제대로 해석하면 서신서의 성령 세례는 구원성령세례이고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는 능력성령세례이다. 단어는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구원성령세례는 받았지만 능력성령세례는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두 성령 세례는 동시적이기도 하고(행 10:44-46). 시차를 두고 구원→능력의 순서로 받기도 한다(행 8:14-17; 19:1-6). 능력성령세례는 반복하여 받을 수가 있는데 이때는 능력성령충만(행 2:4; 4:8, 31)이라 하며 신앙생활, 관계회복과 유지를 위한 성화성령충만(엡 5:18)과 구별된다.

구원성령세례믿음으로 받고(갈 3:2, 14), 능력성령세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도 하지만(행 4:8; 13:9), 많은 경우 기도안수를 통해 받는다(눅 11:13; 행 1:14; 4:31; 8:17; 9:17; 19:6; 고전 14:1, 13). 그러므로 계속론자들은 성도들에게 능력의 성령을 부지런히 구하라고 권면한다. 중지론자들은 이 두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는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는 언급은커녕 오히려 비판하고 부인한다.

중지론자들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 서신서의 성령은 강조하지만 사역하고 경험하는 성령(Ministerial and experiencing Holy Spirit), 사도행전의 성령은 부인하여 교세가 쪼그라들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하시기 전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구절(요 20:22)은 실제가 아니라 오순절에 받을 성령을 ‘상징적 행동’(symbolic act, acted parable) 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오순절주의가 선호하는 ‘중생 이후에 오는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 subsequent to regeneration·conversion) 개념을 개혁주의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웨슬레안은 자기들이 시초라고 자부심을 가지는데, 알고 보면 이 개념은 청교도들이 ‘중생 이후에 오는 구원의 확신’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로 사용한 개념이고 웨슬리가 이 개념을 차용하여 ‘구원의 확신’ 대신 ‘완전 성화’라고 부른 것이다.
 

-중생·회심이 곧 성령 세례라고 주장하는 중지론자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성령 세례를 ‘중생’이나 ‘회심’으로만 해석하여 사도행전의 의미에 대입시켜 사역을 위한 능력을 부인해 버렸다.

중지론적 개혁주의자들인 제임스 던(James Dunn, 1939),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및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Jr, 1936) 등은, 중생이 곧 성령 세례이며 중생 이후(Subsequent to~)의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나마 존 스토트는 성령 세례(회심) 이후의 성령 충만(엡 5:18)을 강조하고 성령 충만이 주는 신비적인 체험과 사역을 위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다행이지만 방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는 부인한다.

제임스 던의 신학은 신랄한 비판을 받으면서 용도 폐기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던은 서신서의 의미로 성령 세례(회심-입문이란 용어 사용)를 해석하여 사도행전의 의미에 대입시켜 오순절, 사마리아, 고넬료 및 에베소에 임한 성령을 회심-입문을 위한 구원의 성령으로 잘못 해석했다. 구원성령세례와 능력성령세례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서철원, 정이철이 제임스 던의 용도 폐기된 견해를 답습하고 있다.

존 스토트는 ‘교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기사체(복음서, 사도행전) 보다는 교훈서(서신서)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전 12:13의 의미로 성령 세례를 중생으로 해석한 후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도 모두 회심과 관련된 성령으로 잘못 해석한다. 그러나 교훈서 우선의 주장은 이현령비현령 신학(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중지론자들은 무조건적 선택(요 6:44; 행 13:48), 동정녀 탄생(마 1:23), 교회 정치 제도(행 20:17이하), 선교학 교리(행 13:1-3)를 위해서는 기사체도 서슴없이 사용하면서 유독 기적에 관련된 교리에만 교훈서 우선이라는 편견과 모순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교육의 방법으로 동양에서는 단순한 진술보다는 이야기를 더 활용해 왔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 보다 맹인인 아버지의 수술비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판 심청의 이야기 중 어느 것이 효도의 교육에 더 효과적일까? 요즈음도 교육이나 계몽을 위해 단순한 슬로건 보다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교훈서 우선의 해석’은 성경 안의 성경을 인정하는 잘못된 신학이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성경의 불분명한 구절은 분명한 구절로 해석한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장9절)과도 어긋나는 주장이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Jr)가 메릴 엉거(Merrill Unger)의 세대주의적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 리차드 개핀의 구속사적 성경해석, 존 스토트의 ‘서신서 우선해석’을 따르면서 중생=성령세례(고전 12:13)→성령충만(엡 5:18)을 주장하지만, 존 스토트와는 달리 성령 충만이 주는 신비적 경험과 능력 경험은 인정하지 않는다.

존 스토트는 그래도 학자적 양심이 있어서 은사운동을 비판은 하진만 좋은 점을 강조하고 마귀 짓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삼가는데 존 맥아더는 구원성령세례,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만 강조하면서 능력성령세례, 사역하고 경험하는 성령에 대한 무지로 인해 전 세계적 은사운동을 마귀의 장난으로 정죄하고 있다.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를 통한 ‘사역의 능력’을 강조한 로이드 존스 

개혁주의자이자 마지막 청교도인으로 불리는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성령 세례는 중생 이후에 오는 경험’이며, 청교도들이 중생 이후에 오는 성령의 인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인침과(엡 1:13) 성령 세례를 동일시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는 ‘사역을 위한 능력’이라 강조하지만 방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는 부인한다.

영국의 청교도인인 토머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80)은 구원의 확신 경험을 성령 세례 및 에베소서의 성령의 인침과 동일시 했다(James Dunn, 1970, 1).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 1608~1680)도 “약속된 두 번째 축복에 대하여 알아 보기 전에 나는 다음과 같은 힌트를 주어야겠다. 곧, 기쁨과 평화와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품삯보다 일에 더욱 몰두 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로버트 헐데인(Robert Haldane, 1764~1842)도 “신자의 영에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언과 위로를 주심은 그의 첫번째 사역이 아니다. 오히려 중생케 하시는 사역 다음에 나오는 것이다. 그는 먼저 믿음을 주시고 그런 다음에 인친다”(엡 1:13).

즉, 로이드 존스는 중생→성령세례=성령의 인침→’능력 성령충만’ 생활(성화)성활충만(엡 5:18)으로 주장한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중생 이후 성령의 인침-성령 세례-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중생 이후~’ 개념을 비개혁주의적으로 간주하여 비판 일변도로 나가는 것은 자기들의 얼굴에 침 뱉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중지론자들도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을 목회 현장에서 가장 큰 기도 제목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은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강한 성령 체험을 통해 가질 수 있다.

필자는 관상기도를 뉴에이지나 범신론이 기원이라고 공격하는 일부 개혁주의자들에게도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청교도들이 관상기도를 즐겼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19) 그러므로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자들은 남들이 하는 좋은 것을 비판 일변도로 대적하기 전에 자기들의 전통에서 그런 것이 없었을까 하고 먼저 연구해 보기 바란다. 장로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오순절교인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죄로 인해 은혜로 구원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중생 이후 제2의 축복인 ‘완전 성화’를 강조한 웨슬리 

기록에 의하면,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중생 이후의 제2 축복 개념’을 청교도의 ‘구원의 확신’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웨슬리는 칼뱅의 이중예정설을 반대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생 이후’의 개념은 차용했지만, 제2의 축복을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완전 성화’로 설명하고, 후계자인 존 플레처(John Fletcher, 1579~1625)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웨일즈 지방의 칼뱅주의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s)20)와의 경쟁과 갈등을 의식하여 성령 세례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와 웨슬리의 ‘완전 성화’

그런데 실제로 보면, 로이즈 존스가 말하는 ‘성령 세례’의 결과나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 성화’ 체험은 표현이나 결과가 대동소이하다.

로이드-존스가 말하는 ‘넘치도록 풍성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비상한 체험, 구원의 명백한 확신, 기쁨, 증언 능력의 체험’은 성령세례가 발생시킬 수 있는 여러 효과들이다. 웨슬리가 말하는 ‘내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비상한 깨달음, 중생한 자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완전한 제거,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함, 완전한 순종, 계명의 철저한 준행’을 내용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도 성령세례가 발생시킬 수 있는 여러 효과들이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의 결과 나타나는 사역을 위한 능력만을 강조하면서 완전 성화를 부인했고 웨슬리는 성령 세례의 결과 나타나는 완전 성화 즉 성결만을 강조하면서 능력과 은사는 위험하다면서 부인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둘 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인데 각자가 신봉하는 칼뱅주의와 웨슬리언 알미니안주의에 충실하려다 보니 상호보완적인 것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중생 이후 제2의 축복인 ‘성화’를 강조한 성결운동, 제3의 축복인 ‘능력’도 강조한 케직 운동

한편, 존 플레처의 영향을 받은 영국과 미국의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은 중생에 이후에 오는 제2의 축복을 성령 세례라고 부르면서 웨슬리처럼 성결(purity)을 강조했다. 이후 찰스 피니의 영향으로 성령 세례는 ‘성결’ 보다는 사역을 위한 ‘능력’을 강조하게 되었고, 성결운동의 후신인 영국의 케직 사경회(Keswick convention)는 ‘중생’ 이후의 제2축복인 ‘성결’에 더하여 제3의 축복인 사역을 위한 ‘능력’도 강조하게 되었다.
 

-중생 이후 성령 세례의 ‘능력’을 강조한 무디와 토레이

D. L. 무디(D. L. Moody, 1837~1889)와 르우벤 토레이(Reuben Archer Torray, 1856~1928)는 경건 운동과 케직 운동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 체험으로 인한 '완전 성화'를 거부하고 '사역을 위한 능력'만을 강조했다. 또한, 피니나 무디는 사역을 위한 능력은 강조했지만 이들에게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기적행하는 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생 이후, 제2의 축복인 성결과 제3의 축복인 방언을 강조한 찰스 파함

1901년 1월1일 20세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미국 캔사스주 토피카의 조그만 성경학교에서 찰스 파함(Charles Fox Parham, 1873~1929)에 의해 시작된 방언 운동은 성령 세례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케직 사경회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파함은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는 방언이며 중생 이후에 오는 제2의 축복(성결)에 이은 제3의 축복(방언)으로 전파하기 시작했고, 1906년 흑인 목사 윌리암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에 의해 방언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고전적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s)의 시초가 되었다.
 

-중생 이후 성령 세례에 의한 방언을 강조한 하나님의 성회 교단

그러던 중, ‘방언은 중생 이후에 오는 최초의 가시적 증거라는 두 단계 축복’을 주장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의 윌리암 더햄(William H. Durham, 1873~1912)에 의해 3단계 축복을 주장한 파함과 시모어는 제명되어 ‘성결 오순절 교단’을 설립한다. 고전적 오순절운동은 방언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은사가 모두 회복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방언과 신유의 은사가 주로 나타났다.

오순절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 사역자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고 인종간의 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요즈음도 미국의 전통적 교단 교회는 대부분이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로 구분될 정도로 인종간의 화합이 쉽지 않다. 그러나 성령운동하는 교회는 흑인인 윌리암 시모어 목사 때부터 흑백 구분 없이 예배를 드렸는데 요즈음에도 미국에서 성령 운동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인종간의 구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교리가 아니라 성령이 사도행전의 사마리아 교회나 고넬료 교회처럼 인종간의 벽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중지론자들은 사마리아 교회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교회, 안정을 잡기 전의 교회이므로 교회 시대의 모범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흑·백인종 별로 따로 예배를 드리는 미국의 교회들은 아직도 '과도기적 교회'인가? 성령이 오신 지 2000년이 되었는데도 그 잘난 중지론으로 왜 아직도 인종의 벽을 넘지 못하는가?
 

-중생 이후 성령 체험을 통해 방언 및 여타 은사를 강조한 은사운동 

1963년 미국의 성공회 신부인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 1917~1991)이 방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오순절 성령 운동은 이제 기존 교단-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성공회 및 장로교-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신오순절주의(Neo Pentecostals), 은사주의(Charismatics) 또는 은사갱신운동(Charismatic Renewal)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성령 세례의 가시적 표현이 방언은 물론 다른 은사도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강조하다가 이후에는 중생하는 성령 세례와 지속적으로 충만 받는 성령 충만을 구분했다.
 

-중생은 곧 성령 세례이며 이후의 성령 충만을 통한 ‘표적과 기사’를 강조한 제3의 물결

한편, 1908년대에는 존 윔버(John Wimber, 1934~1997))와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1930~) 교수가 풀러신학교에서 『표적, 기사 및 교회성장세미나』를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표적과 기사 운동(Signs and Wonders Movement) 또는 제3의 물결 운동(The Third Wave)이 시작되었다. 고전적 오순절주의를 제1의 물결, 은사주의를 제2의 물결이라 부르고 ‘표적과 기사 운동’ 을 제3의 물결이라 부른다.

존 윔버는 조지 래드(George G. Ladd)의 ‘하나님 나라’ 신학  기초하여 말씀 전파(proclamation)와 능력 증거(demonstration)를 통한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를 강조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과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성령세례는 중생 시 받으며(고전 12:13), 성령 충만은 중생 뒤에도 계속 받는 현상으로 본다(엡 5:18). 방언만이 성령 세례의 첫 가시적 증거라고 보지 않으며 성령 체험은 전도와 교회성장을 위한 능력으로 본다.

이들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로 불리기를 꺼리는, 패러다임 변환을 경험한 개혁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이 구성원으로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표적과 기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성령 기적행하는 은사는 당연한 것이고 사도와 선지자 직분·은사의 회복을 강조한 신사도운동 

1990년대에는 미국의 독립교단 및 은사적 교회들, 남미의 풀 뿌리 교회들, 중국의 가정교회들 및 아프리카의 독립교회들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 교회들은 사도적 권세와 선지자적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특히 영적 전쟁을 활발하게 하면서 제1, 제2, 제3의 물결의 교회들의 성장이 주춤하거나 둔화될 때에, 전세계적으로 이슬람교의 성장을 능가하는 유일한 교회 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며, 중생과 성령 세례가 동시냐 이후냐, 성령 세례냐 충만이냐는 논쟁에서 일찌감치 벗어나서 하나님의 교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잃어버린 사도와 선지자적 직분이나 은사(엡 4:11)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터 와그너 교수는 이 운동을 신사도 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이라 부른다.

이들이 말하는 사도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좁은 의미의 사도가 아니라 교회를 개척하고 돌보고, 목회자를 멘토링하는 사도를 말한다. 와그너 교수는 교인 800명 이상의 담임목사 사역 단체의 대표나 초교파적 모임의 대표는 ‘사도’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라는 개념이 아직도 너무나 급진적이라 성령운동에 참여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서도 이에 대해 열려있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많은 오해와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칼뱅주의를 견지하면서 기적을 인정하는 ‘신칼뱅주의’의 등장

미국의 TIME잡지는 2009년에 “현재 세계를 변화시키는 10대 사상”을 선보였는데 그중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종교 운동으로는 유일한 신 칼뱅주의(New Calvinism)이다.

이 운동의 주창자들은 칼뱅주의의 5대 강령21)에 입각한 구원론을 수용하여 감정 보다는 심오한 교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 성화를 주장한 미국 제1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의 주장을 따르고, 문화적으로 친근하여 예배 시간에 CCM은 부름은 물론 탈 전통적이며, 기적계속론을 주창하는 개혁주의자 침례교도들이 주류를 이룬다.

존 파이퍼(John Piper),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 및 뉴욕 리디머 교회의 팀 켈러(Tim Keller) 등이 주요 주창자인데 특히 보수적인 남침례교와 남침례교신학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성장하고 있다.

1600만 명의 회원을 가진 미국 최대 보수교단인 남침례교가  10년 만에 선교지의 경쟁력 약화를 기화로 선교사에게 방언을 허용을 한 것도 이런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기적중지론적 입장이던 남침례교가 신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서서히 기적계속론적 입장으로 전환해 간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남침례교는 2005년 방언을 하는 선교사 후보들을 탈락시켰지만 2015년 5월13일, 남침례교의 웬디 노벨 IMB(국제선교이사회) 대변인은 “향후 방언을 하는 선교사들을 위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하는 선교사들을 자동탈락 시켜온 정책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신칼뱅주의의 주요 특징22)을 드리스콜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운동이 “신파”(New)라고 불리는 이유는 “구파”(old)와 4가지 점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1. 구 칼뱅주의는 문화에 다소 적대적이지만 신칼뱅주의는 선교적이며 문화를 추구하고 창조한다. 신칼뱅주의자 중에는 예배 시 정장을 하지 않고 문신과 흡연을 허용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신칼뱅주의는 세상과 타협한 운동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2. 구 칼뱅주의가 도시에서 이탈하여 교외로 갔다면 신칼뱅주의는 도시선교에 주력한다.

3. 구 칼뱅주의는 일반적으로 기적중지론적 입장이지만 신칼뱅주의는 일반적으로 기적계속론적 입장이다. 따라서 마크 드리스콜은 2013년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가 “다른 불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동안 입구에서 시위 조로 자기 저서의 사인회를 열어 주최측과 마찰을 빗기도 했다.

4. 신칼뱅주의는 다른 단체와 대화의 장을 열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개혁주의자들도 신칼뱅주의를 전향적인 차원에서 연구 검토하여 수용해 볼 것을 제안한다. 칼뱅-프란시스 튜레틴-찰스 핫지-벤자민 워필드-리차드 개핀 등으로 이어지는 이성적 기적중지론적 구 프린스토 신학의 칼뱅주의가 아니라 칼뱅-청교도-조나선 에드워즈-마틴 로이드 존스- 존 파이퍼, 웨인 그루뎀, 등으로 이어지는 친 부흥적, 기적계속론적 칼뱅주의를 전향적으로 수용할 때 한국의 장로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본다.
 

나가는 말

이상 필자는 기적중지론과 관련하여 성령이 시대적으로 교회를 통해 하시는 일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비록 성경에는 있지만 시대에 따라 점진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드러내신다.

성령은 개혁주의를 통해 칭의와 중생을, 청교도들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웨슬레안을 통해 완전 성화를, 경건운동을 통해 성결과 능력을, 오순절운동을 통해 방언과 신유를, 제3의 물결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신사도운동을 통해 예언과 영적전쟁 및 사도적 리더십을 강조하게 하셨다는 점이다.

교단적 배타성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이다. 이것은 교단에도 해당되고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필자는 중생, 구원의 확신, 완전 성화 체험, 방언은 물론 각종 은사를 모두 체험한 사람이다. 만일 훨씬 이전의 시대에 살았다면 이중 한두 가지 밖에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은혜를 풍성하게 베푸신 덕분에 모든 것을 다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므로 개인은 물론 교회나 교단도 전통이나 신학의 배타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둘째, 성경은 다관점23)에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한 가지이지만 4복음서를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공생애를 조명한다. 구약의 열왕기나 역대기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다. 성경의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 논리가 아니라 다관점에서 조명할 때 더 풍성한 은혜를 받는다. 교단적인 배타성에 매여있으면 본의 아니게 한 면만 강조하다 보니 성경의 진리의 다른 면을 왜곡하거나 폄하하기 쉽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다양성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성경대로 하는 교회가 성장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교회가 제대로 성장한다.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한 자유주의의, 성령의 기적행하는 은사를 부인한 기적중지론적 보수주의는 몰락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인간의 신학이나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이는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을 늘 가슴 깊이 새기면서, 과거에 성령이 하신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장소에서 성령이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계 2:7, 11, 17, 29; 3:6, 13, 22).

한국 교회,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이미 와있다. 다만 신학적 편견과 교단적 배타성을 벗어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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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

12. John F. MacArthur, Jr., Charismatic Chaos, Grand Rapids, MI : Zondervan, 1992, p. 354,『무질서한 은사주의』.

13. John F. MacArthur, Jr., The Strange Fire-The Danger of Offending the Holy Spirit with Counterfeit worship, Nelson Books, 2013, xvi(16).

14. “존 맥아더의 다른 불 비판(2)-조지 우드,”『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4

“존 맥아더의『다른 불』비판(3)-마이클 브라운의 『진짜 불』,”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5

15. 자세한 내용은 “기적중지론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1),”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80)을 참조하기 바란다.

16. A.D. 156년에 몬타너스(Montanus)라는 예언자가 나타나서 브리스길라와 막시밀라라는 두 여(女) 예언자와 함께 제도적 교회에 대항하여 성령의 즉흥성을 강조하는 예언 운동이었다. 이들은 잦은 금식, 극단적 자기 부정,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강조하면서 교회 갱신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특히 요한복음의 성령(보혜사, 파라클리트)를 강조했는데 이 운동을 몬타니즘(Montanism)이라 한다. 초기에는 그들의  도덕적 생활에 동조하여 교부인 터튤리안도 참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은 스스로를 보혜사 성령이라 칭하면서 제도적 교회를 과격하게 공격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8세기에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후 교회는 몬타니즘의 후유증으로 인해 교회들이 은사운동에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17. 성경 계시가 초기의 씨앗과 같은 원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 모세의 시내산 언약을 통해 둥지를 내리고 가지를 내다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완전히 꽃을 피운 것을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라고 한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성경에 있는 진리가 실제로 드러나는 것도 점진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점진적 조명(Progressive illumination)이라 부른다.

초대 교회 시대(A.D. 600년까지)에는 정경의 완성(선택), 삼위일체 교리,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교리 확립, 중세기 암흑기를 넘어서 종교개혁 시대(16세기)에는 이신칭의 교리, 이후 웨슬리에 의한 완전 성화 교리, 무디의 대중 부흥운동, 20세기 오순절 성령운동을 통한 방언 및 기적행하는 은사의 전반적 회복, 1960년대의 은사운동, 1980년대의 제3의 물결과 찬양과 경배, 내적치유, 영적전쟁, 셀 교회 등은 때를 따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렇게 열린 자세로 보면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을 텐데, 교파적 편견과 무경험으로 인해 오히려 비판하고 대적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시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

18. 중생과 회심(Regeneration, Conversion). 중생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비밀스러운 단독 사역이고, 회심은 중생한 신자가 성령의 도움으로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의식적 행위를 말한다. 개혁주의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만 다른 교파에서는 중생을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회심이란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른 교파 독자의 편의를 위해 붙여서 사용한다.

19. “관상기도를 즐긴 청교도 신비주의자들: 탐 쉬안다, 「영혼의 재창조: 청교도주의의 관상적 신비적 영성」,『글로리아타임스』, 2015.5.22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53.

20. 칼뱅주의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s).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생소한 말이지만, 칼뱅주의 신학을 고수하면서 웨슬리의 열정은 받아들이는 웨일즈 지방의 장로교회 교인들을 말한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다니엘 롤랜드(Daniel Rowland, 1713~1790), 하월 해리스(Howell Harris, 1714~1773) 등이 18세기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요 지도자이다. 요한 웨슬리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칼뱅주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마지막 칼뱅주의 감리교도’, ‘마지막 청교도인’이라 불려진다.

21. 흔히 TULIP(튤립)으로 불리는 ‘칼뱅주의 5대 강령’(5 points of Calvinism)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또는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다.

22. “신칼뱅주의,”(New Calvinism)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New_Calvinism. 2015. 08. 08.

23. 다관점주의(Multiple Perspectives)에 관심이 있는 분은 포이트레스 『조화신학』(Vern Poythress, Symphonic Theology: The Validity of Multiple Perspectives in Theology)을 보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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