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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⑤] 퓨전신학, 통섭신학의 구원관: 회심의 단계-장로교+감리교+오순절 + 알파(a)의 구원관, 성화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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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23  20: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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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⑤]

퓨전신학, 통섭신학의 구원관:

회심의 단계

-장로교+감리교+오순절 + 알파(a)의 구원관, 성화관이 필요하다-


지난 글에서 필자는 퓨전 신학, 통섭신학의 구원관, 성화관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했다. 그것은 곧 장로교, 감리교, 오순절 성화관 모두를 아우르는 구원관, 성화관을 말한다.

영성 신학의 구원관에서 각성(회심)-정화(점진적 성화)-합일(성숙과 변화)의 3 단계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5단계가 훨씬 성경과 경험에 더 부합한다. 즉 각성(회심)-정화(점진적 성화)-조명(순간적 성화-성령체험)-영혼의 어두운 밤(광야훈련)-합일의 단계 또는 과정이다.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람에 따라 순서가 다를 수도 있고 전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회심의 단계에 대해 살펴보자.

   
 

회심의 단계-각성(Awakening)의 단계
 

단어 설명

성경은 신자가 거듭나고 회심하는 과정에 대해 다양한 단어로 설명한다.

-중생(Regeneration)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거듭난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난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인데 사람이 영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하며 본인은 거듭난 시기를 알 수 없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칭의(Justification)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중생을 통해 영적 의인이 되고 칭의를 통해 법적, 신분적 의인이 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 3:1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회심(Conversion)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의식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의 죄인임을 고백하고(회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믿음)을 말한다.

장로교를 제외한 타 교파에서는 칭의나 회심은 별로 언급하지 않고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을 중생 즉 거듭남(born-again)으로 표현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중생은 사람의 협력 없이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약 1:18; 벧전 1:23) 역사하시는 단독적 사역이고 당사자는 언제 중생되었는지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다(요 3:5, 8), 그러나 회심은 중생한 본인의 의식적인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회심의 특징

자아의 각성이 일어난다.

생리적 각성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린다. 바울의 눈에 붙은 비늘이 떨어지듯(행 9:18) 갑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사고와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적 세계를 맛보는 단계이다.

영적인 각성은 일상성과 일반 체험 한계 안에 갇혀 있던 인간의 영혼과 심령이 불현듯 또는 점진적으로 실재의 초월적 차원을 의식하면서 홀연히 속 눈을 뜨는 일이다.

회심은 말씀을 듣는 중에(행 2:37; 10:44이하), 찬양하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간증을 듣는 중에, 전도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체험을 하게 된다.

회심을 통해 사람은 자아 안에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신적 내재를 느낀다. 영적 임재는, 조나선 에드워즈가 말한 것처럼, ‘신적인 달콤한 감정, 그것을 웅켜지고 싶은 열망’ 등을 말한다.

가끔 자연 안에서 신적 내재를 느끼는 사람들(예술가, 시인)도 있지만 차이가 있다. 예술적인 것은 일반계시적 체험이지만 거듭남이 없다. 신적 각성 체험이 동반되지 않는 종교생활은 기껏해야 도덕주의, 주지주의, 심미적 정서의 감상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신적 체험의 본질적 핵심은 도덕적인 변화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변화, 즉 존재론적 충격이다. 자기보존과 확장본능에 중심을 두고 형성되었던 자기중심의 한정되고 작은 자아인격이 보다 넓고 큰 의식으로 확장하는 사건이다.

그 결과 회개와 정화(성화)가 자연히 수반되어 새사람이 된다
회개와 정화가 없는 각성은 동양적 신비 체험(뉴에이지, 기 훈련, 초월명상 등)에 지나지 않는다.

두렵고 떨리는 체험과(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사랑하고 이끌리는 체험(사랑의 하나님)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회심의 3 가지 주요한 특징은,

-자유하고 해방되었다는 감정을 느낀다
-하나님 또는 궁극적 실재가 지극히 가깝게 느껴지는 초월적 실재를 현존적으로 체험한다.
-하나님께로 지향해 가려는 사랑과 동경의 열정, 사도 바울이 체험한 것 같은 빛의 충만을 체험한다.  
 

성경은 회심으로 인한 구원이 주는 축복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구원 받은 자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자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구원 받은 자는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의, 진리, 거룩함-을 회복하는 자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믿는 자가 죄로 물든 세상이나 유한한 자신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구원 받은 자는 사망에서 신적 생명으로 옮겨진 자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2).

여기서 말하는 생명(헬라어 조에)은 때가 되면 죽는 자연적 생명(헬라어 비오스), 인간적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신적 생명을 말한다.
 

-구원 받은 자는 사탄의 왕국에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진 자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5).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하나님의 권세, 능력, 축복을 받는 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
 

회심 체험 : 지성, 감성, 의지의 산물

회심 체험은 전인격적 체험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지성, 감성 및 의지에 끼치는 영향이 다르다.

안토니 훼케마는 다양한 회심 체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헤르만 바빙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회심의 양상의 재미있는 차이점을 기록한다.
‘루터의 회심은 깊은 죄의식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죄 은총을 기쁘게 인식하는 전환 과정이다.
쯔윙글리는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행복으로 인도되는 것으로서의 특별한 회심 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칼뱅의 체험은 오류에서 진리로, 의심에서 확신으로 인도되는 체험이었다.’

회심의 패턴은 그외에도 다양한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
항상 전인격이 개입되지만, 회심은 주로 지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적인 회심의 대표적인 예는 (뛰어난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저술가인) C. S. 루이스의 경우인데 자신의 영적 자서전인 『기쁨에 놀라서』(Surprised by Joy)에서, 그는 지적인 문제와 장애로 오랫동안 씨름해 왔는데 마침내 그러한 어려움을 만나서 하나님께 승복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르시면서, '영국에서 가장 풀이 죽고 마음이 내켜 하지 않는 회심자'인 그를 하나님 나라로 이끄셨다고 기록한다.

의지적인 회심 체험의 대표적인 예는 어거스틴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와의 투쟁으로 수년을 허송 세월 한 후 로마서 13: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을 읽은 후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기는 힘을 얻었다.

감정적인 회심 체험의 대표적인 예는 존 번연이다.
그는 수년 동안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으로써 영혼의 평안을 얻었다"
(Anthony Hoekema, Saved by Grace, 118, 앤서니 후쿠마, 『개혁주의 구원론』).

위대한 지도자들의 이러한 회심 체험이 그 이후의 성경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저서나 주장을 보면 자신의 회심 체험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진리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칼뱅의『기독교강요』가 지적이고 논리적이라면 어거스틴의『고백록』은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회심 체험을 고집하여 다른 종류의 회심 체험을 무시하여서도 안되고 또한 사람의 어느 한 측면―지성, 감정, 이성―만을 강조하여 다른 측면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물론 믿음의 선진들이 다양한 회심 체험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회심과 진짜 회심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열매 맺는 회심이 진짜 회심이다.

우리는 때때로 외양만으로 회심한 자를 가끔 본다. 겉모양이 진짜 회심한 사람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심 체험은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지적인 동의에만 그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회개를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고(마 3:8), 진정한 믿음이라면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약 2:26). 회심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회심인지 아닌지를 하나님은 아시겠지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열매 맺는지의 여부로 그 사람이 진정 회심하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가짜로 회심한 사람인가?

씨 뿌리는 자가 좋은 예를 제시한다(마 13장).

먼저 마음 밭이 길 가와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는다. 그러나 온갖 세상 지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말씀에 믿음을 화합하지 못하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버린다. 그 동안에 마귀가 말씀을 주워 먹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한다.

둘째는 마음 밭이 돌 밭 같은 사람이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금방 말씀의 싹을 낸다. 그러나 돌밭이라 뿌리가 내리지 못한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금방 넘어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만다.

그 다음에는 가시 떨기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이다.
가시 떨기는 생명력이 왕성한 잡초의 일종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곡식과 너무 비슷하여 같이 자란다. 자라는 동안 성장이 너무 왕성하여 곡식에 필요한 양분을 모두 섭취하여 버리기 때문에 곡식이 영양실조에 걸려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살이에 염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돈이 주는 아늑함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는 동안 이런 것들이 주는 염려와 편안함 때문에 신앙이 열매를 맺지 못하여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회심한 것 같지만 마음으로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오직 믿음을 화합하여 인내로 지켜나간 자만이 결실을 맺는다.

회심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회심 체험은 당연히 지성, 감정, 의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의 회심만을 강조하면 신앙에 불균형을 초래한다.

정통적인 교회에서는 주로 지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래서 교리 교육이 중심이 되고 전도하는 것도 논리적인 설득에 치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자칫 잘못하면 지적인 면을 강조하고 감정을 소홀히 취급하여 교리는 바르나 바른 체험을 경시하여 생동력이나 활력이 결여된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을 낳기 쉽다. 이것이 바로 정통 교회가 지니고 있는 위험이다. 지식과 활동만 있으면 참된 회개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통회자복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경우가 드물다.

한편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면 지적인 면을 소홀히 하기 쉽다.

오늘날 은사 집회에서 강조되는 방법이다. "은혜, 은혜" 만을 강조하여 지적인 바른 교리를 경시한다. 그러나 보니 소위 말하는 냄비 신앙을 낳는다. 뜨거울 때는 물이 끓고 시끌법적하여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데 건더기(말씀, 교리)가 없기 때문에 식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의지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흥집회에 참여하여 강사의 호소에 결단을 하여 예수를 영접하지만 바른 지식과 바른 체험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대회 때 부름을 받아 결단한 사람이 교회로 흡수되어 제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10% 미만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회심의 단점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지성, 감정 및 의지에 골고루 영양을 미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조용한 회심과 급진적 회심: 디모데형과 바울형

일반적으로 모태신앙이나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자신이 언제 회심 체험을 한 지 모르게 조용하게 회심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성령 체험을 통해 급진적으로 회심 체험을 하기도 한다. 디모데는 전자의 경우이고 바울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네(디모데)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5).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은 크리스천들을 체포하기 기세 등등하게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강한 빛이 둘러싸서 그는 땅에 떨어진 후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

이 사건으로 소경이 된 사울은 금식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성령충만하여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동시에 조금 전만 해도 핍박하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디모데처럼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체험한 줄도 모르게 ‘조용한 회심’을 한 후 조용하고 은밀하게 ‘점진적 성화’만을 이루어 가는 사람도 많다. 주로 모태신앙인들이 이렇다.

일반적으로 성령운동파들은 성령 체험과 같은 ‘제2의 축복’ 체험을 ‘위기 체험,’ ‘정상 체험’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서정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한국의 차영배 교수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반성령운동파들은 비록 이런 체험으로 인정은 하지만 아직 구원의 서정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교회사를 볼 때, 영적 부흥 시기나 오늘날의 성령운동파의 집회에서는 바울처럼 ‘극적인 회심 체험’과 다음에 언급할 ‘순간적 성화 체험’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때 바울처럼, 여러 가지 생소하고 이상한 영적 현상들-쓰러지고, 웃고, 딩굴고, 고함치고, 뛰는 등-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생경한 반성령운동파들은, 진정한 회심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온다는 ‘조용한 회심’과 ‘점진적 성화’ 교리에 경도되어 성령운동파를 비난한다.

반성령운동파들은, 성령운동파가 ‘경험을 바탕으로 교리를 세운다’고 비판하지만, 자기들이야 말로 극적인 회심 체험과 순간적 성화 체험이 결핍되어 조용한 회심과 점진적 성화만이 성경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기들이야 말로 '영적 무경험으로 인해 ‘(인간의) 논리로 교리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성경은 바울과 디모데의 경우에서처럼 분명히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회심 양상과 성화에 대해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사도 바울의 경험은 구속사적으로 단회적인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체가 그들이 자기들의 극적인 회심 체험이나 순간적 성화 체험의 결핍-무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된 무경험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 기존 교단 내에서도 실제로 성령 체험과 같은 순간적 성화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나선 에드워즈의 변호

☞”글로리아타임스 : [성경Q&A] 바울 형이냐 디모데 형이냐
-극적 회심과 조용한 회심, 순간적성화와 점진적 성화” 참조
(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78)
 

극적인 회심과 순간적 성화 및 그에 따르는 생소한 영적 현상에 대해 가장 고민하면서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설명과 변호를 한 사람은 미국 제1차 영적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였던 조나선 에드워즈이다.

에드워즈는 대각성 기간 중 여러 가지 회심의 양상을 목격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주도한 부흥기간 중에 이상한 영적인 현상들을 동반하는 집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회심의 여러 양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놀라운 회심 이야기』(A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s) 에 기록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 지방의 부흥의 불길에 대해 곱상한 눈길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전형적인 이성주의자인 제일장로교회의 찰스 촌시(Charles Chauncy, 1705-1787)는 한 강의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한 사역은 ‘마음과 삶이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련의 집회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종교적 광란”으로 매도했다. 필자는 오늘날의 성령사역 대적자들을 보면 금방 찰스 촌시가 떠오른다. 찰스 촌시는 반(反) 부흥파의 기수였다. 그러나 오늘날 조지 휫필드, 조나선 에드워즈는 기억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역사가 심판한 셈이다.

에드워즈는 생소한 부흥 현상 때문에 부흥 자체를 부정하는 찰스 촌시의 주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의 독특한 표지들』이란 설교를 통해 부흥 기간 중에 일어난 여러 가지 영적인 현상을 변호했다.

에드워즈는 서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영적인 현상에 대해 편견을 가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 . 일부의 편견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일에 대해 바른 소개를 받을 기회가 없었거나 외부로부터 잘못된 소개를 받은 것에 기인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체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른 틀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어떤 원칙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지지하고 확인해 주기 때문에 현재의 이런 현상들을 싫어한다. 확실한 것은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알미나안주의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에드워즈)는 자신들이 도구로 사용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 일을 싫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진정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승하고 우리는 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만약 누구라도 이 일을 믿지 않고 비판하고 반대하기로 굳게 작정했다면 그들은 그들을 깨우치고 구조해 주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자비에 자신들을 맡겨야 할 것이다”(『놀라운 회심 이야기』, 83).

오늘날 막무가내 비판 일변도의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역사에 따라 어떤 사람을 조용하게 회심시키기도 하시고 요란하고 시끄럽게 회심시키기도 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자들이 오히려 제한된 인간의 신학과 무경험이나 나쁜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은 이렇게만 역사하신다’면서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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