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뉴스 > 영적현상
[종교적 감정⑧]신앙과 감정(4) : 칼뱅주의의 잘못된 기능심리학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7.27  14:26:5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종교적 감정⑧]

신앙과 감정(4) :
칼뱅주의의 잘못된 기능심리학

-칼뱅주의의 잘못된 ‘기능심리학’과 조나선 에드워즈의 ‘전인적 접근’-

“믿음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믿음의 행동은 믿음의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에 종속되며,
성화된 순종의 행위가 믿음의 핵심이다” -에드워즈

   
 

집회 중 사람들의 감정이 고양되고 극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희한한 영적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열광적이다’, ‘사탄적이다’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한편, 이런 체험들을 많이 하고 신앙적 열심을 내면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최고의 칼뱅주의 신학자요 부흥신학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미 종교적 감정 분야의 ‘고전’(classic)이 된 『종교적 감정론』에서 양쪽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전자의 경우, 그런 현상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은혜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감정이나 현상만으로 영적 분별을 하려는 이성주의적 반 부흥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짜 은혜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자체가 진정한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신앙적 열심과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부흥파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은혜의 진정한 표지들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진정한 신앙은 상당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앙 감정(정서)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정서)이 없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감정을 경시하는 기능심리학

종교개혁 당시 막강한 로마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칼뱅이나 루터는 인문주의의 꽃인 헬라 논쟁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플라톤이 주창한,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감정보다 우위에 놓는 기능심리학(faculty psychology) 및 사변적인 스콜라주의의 영향으로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는 신학 체계를 정립시켰다.

기능심리학(faculty psychology)이란 사람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기능(faculty)이 있는데 이중에서 이성과 의지가 주된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원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거스틴이나 칼뱅 및 다수의 칼뱅주의자들도 기능심리학의 바탕 위에서 사람의 마음의 운행을 이해한다.

칼뱅주의는 초기부터 종교적 믿음은 사람 속에 깊숙하게 도달하는 어떤 종류의 지식으로 설명했다. 칼뱅 자신도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만 머무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마음의 깊이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청교도들도 믿음은 이성적 동의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믿음은 지성은 물론 경향과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인격의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기능심리학에 의존하는 바람에 그들의 의도는 현저하게 좌절되었다. 청교도들 또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 반응이라고 간주했지만, 반응의 요소가 무엇이냐고 설명할 때는 이성과 의지가 믿음의 주된 기능이라고 강조했다.


청교도들 : 어떤 자는 이성을 강조하고 다른 자는 의지를 강조

청교도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이성을, 다른 사람은 의지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토마스 쉐파드(Thomas Shepard)는 이성을 더 강조했다. 그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 전 영혼이 그리스도께 이끌린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할 때는 ‘의지는 이성에 종속된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성은 가장 두드러진 기능이며, 제멋대로 사람을 조정하려는 열정을 통제하는 코치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복음이 그리스도를 먼저 마음(생각, mind))에 계시하고, 그 다음에 의지에 계시하여, 믿음이 복음에 따라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는 의지를 더 중요한 기능으로 간주했는데, 믿음의 행위를 거꾸로 설명했다. 그는, 구원 얻는 지식은 의지의 행위를 따르고 그것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성은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의지의 행위에 종속된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는 기능 심리학의 영향 때문인데 기능 심리학은 사람의 기능 중에서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기능보다 우위에 있다고 가정하고, 각 기능이 따로 작동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믿음이 생길 때, 의지, 이성이 각각 따로 행동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떤 기능이 먼저 행동하느냐?’인 것이다. 믿음을 단일체인 사람의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 기능의 독특하고 분리된 행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인간의 기능은 서로 융합되어 있다

에드워즈도 믿음은 이해, 의지, 감정의 행위는 물론 하나님과 전 영혼이 일치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은 이해와 의지의 행위라고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마음(heart)의 감각 즉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의지적이고, 애정적이고, “사랑하는 지식”(loving knowledge)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의 기능은 서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조부인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 또한 “구원 얻는 회심의 성격”(Nature of Saving Conversion)에서 이해와 의지는 두 가지가 아니라 동일한 영혼으로서, 분리가 불가능한 두 가지 다른 행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에드워즈는 특히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에드워즈는 존 로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존 로크가 제시한 사람의 심리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존 로크는 『인간의 이해론』(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사람의 마음을 기본적인 두 가지 능력으로 구분했다. 즉 (1) 마음의 여러 가지 행위나 몸의 움직임을 시작하거나 견디는 것, 계속하거나 중지하는 능력과, (2) 마음에서 생각, 상징이나 말의 중요성 및 생각에 대한 동의나 반대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지각하는 능력으로 구분했다.

로크에 의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의지가 아니고 이해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의지력이나 이해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심리 능력을 의지나 이해로 나누는 것을 부인하고 전 인간이 이해하고 의지력을 행사한다고 이해했다. 의지력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의 선택이지 의지 자체의 능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로크가 말한 바와 같이 기능적 역할이 서로 분리된 실체의 운영이라는 주장을 버린 것은 물론, 믿음의 행위에서는 자아 내의 능력들 즉 기능들 자체의 구분 마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믿음에 관한 인간의 행위는 이성과 의지의 뚜렷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7세기 영국의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은 기능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서 믿음에는 3 가지 구분되는 행동이 있다고 말했다.

-이지적 동의(assent)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믿는 것
-자발적 동의(consent)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또는 새로운 본성의 실질적인 행동
-신뢰(affiance), 의뢰, 의지 또는 확신 즉 나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 마음이 조용하게 휴식하는 것
 

에드워즈는 믿음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을 비판했다. 믿음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의 능력은 하나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 사람의 행동은 여러 가지 다른 행동이 아니라 같은 행동의 다른 방법, 형식, 양상(mode)에 불과하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믿음은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의 그분의 실체와 선하심에 대한 관점과 확신에서 볼 때 나의 구세주로서, 전체적인 영혼이 동의, 묵종, 묵인(acquiescence)하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마음의 지식 즉 감정적인 지식 또는 살아있고 역동적인 의지의 행사에 의해 파고드는 지식이다. 마음의 감각 또는 분별력이 이성의 기능을 성화시켜서 이성이 종교적인 실체에 대해 광범위하게 추론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는 믿음의 내적 능력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으로 간주한다. 주입(의지)과 비침(이성)은 한 실상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행동이 아니라 한 실상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설명이다. 성령의 비침은 단지 지성이나 의지력에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빛의 영향은 믿음의 본질인 의지적 앎(willing-knowledge), 감성적 이해에 작용한다.  온 마음이 복음에 반응한다.
 

에드워즈는 영적 지식을 ‘맛보는 감각’(sensation of tasting)에 자주 비유했다. 마음의 지각은 거룩한 맛(holy taste) 또는 마음의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탁월하고 신적인 것을 영적으로 맛보고 즐기는 것이다(it is a spiritual taste and relish of what is excellent and divine).

이런 지식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며 “—에 대한 지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꿀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의 지식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지식이다.

이런 점에서 마음의 지식은 생각하고 파악할 뿐만 아니라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맛보기 비유에서 인간의 기분, 느낌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믿음이란 지성과 살아있고, 감성적인 의지적 행동과의 친밀한 연합이다. 마음의 지식의 본질은 살아서 행동하는 지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은 사랑과 사모의 태도에 의해 어떤 대상과 친밀하게 맺어진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서는 대상에 대한 판단, 또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다. 진리와 신적인 것의 실재에 대한 확신은 믿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데, 믿음은 이성의 기능을 성화시켜서 그것이 종교적인 것에 관해 추론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믿음의 행동은 믿음의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에 종속되며, 성화된 순종의 행위가 믿음의 핵심이다.

 

이성주의자 찰스 촌시와 전인격주의자인 조나단 에드워즈

미국의 대각성 운동기간 중에 찰스 촌시와 조나선 에드워즈의 대결도 한 마디로 부흥의 현상(들), 즉 하나님의 사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정리된다. 기능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이성주의자인 촌시는 이성을 중시하여 부흥 기간 중에 나타나는 격한 감정을 '가짜'로 단정해 버렸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이성은 물론 감정과 의지의 영역까지 결부시키는 전 인격적인 접근법을 옹호하였다.

서구 정통 신학의 산실인 프린스톤 신학교는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의 산물이다. 초대 학장인 아키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nader, 1772-1851)는 에드워즈의 설교와 저서를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프린스톤의 학장이 되었을 때 그는 에드워즈의 신학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시드니 올스트롬은 이렇게 기록한다.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역사는, 이처럼 영향력이 있는 스콧트란드 및 아일랜드 인(아키볼드 알렉산더를 가르킴)이 그가 필요한 지적이고 교리적인 안내를, 뉴 잉글랜드의 에드워즈의 신학 전통(비록 알렉산더가 에드워즈의 저서를 통하여 회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에서도 아니고, 후기 청교도인들의 새로운 신학에서도 아니고, 위더스푼(Witherspoon)의 스코틀랜드 철학적인 전통(비록 이 요소가 프린스톤 신학에 필요적인 요소로 가미되어 뚜렷한 자취를 남겼지만)에서는 더군다나 아니고, 프란시스 튜레틴(Franscois Turretin, 1623-87)의 17세기 스콜라주의에서 찾았고 또한 발견하였다. 튜레틴은 제네바에 거주하면서 무엇보다도 엄격한 예정론과 문자적인 성경의 영감이론을 수정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공격한 정통이론의 방어자이다.

1873년에 알렉산더의 존경하는 후계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될 때까지, 튜레틴의 『논쟁적인 신학강요』(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제네바, 1679-85; 에딘버그에서 1847-48에 4권으로 재판됨)는 스위스 신앙고백과 웨스터민스터 공식과 나란히 수백명의 신학교 졸업생들이 미국 전국은 물론 많은 외국의 선교의 현장에까지 들고 간 메세지를 위한 구조와 내용을 제공하였다.

특히 프린스톤 신학은 챨스 핫지에 의해 전개되고 방어되어서 미국 개혁정통신학의 기준이 되었다. . . 그래서 에드워즈의 신학조차 부당하게 모험성이 있는 신학으로 간주되었다"(Sydney E.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Yale University Press, 1975, 463).

칼뱅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인 프란시스 튜레틴의 『논쟁적인 신학강요』(Franscis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는 제목이 밝히듯 논쟁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하고 지적 도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기쁨(?)을 주는 책이다. 튜레틴은 "정확하고 완전한"(precise and complete) 교리적인 위치를 확고하게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밝은 빛은 있지만 따뜻한 열이 없어, 이성과 교리를 중시하는 반면 감정과 경험을 경시한다.

튜레틴의 아들조차 장로교를 분리시키는 정확한 교리들의 사용을 지양하고 연합을 장려하기 위해 사도신경 같은 기본적인 신앙 고백들만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는 튜레틴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이후 튜레틴의 『논쟁적인 신학강요』가 정통 장로교인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교과서가 되었다 (Walter A.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1994, 1,116).

인간은 누구나 죄로 인해 비록 '계시의존 사색' 즉 성경에 의해 사고를 하지만 왜곡되는 면이 많이 있다. 더군다나 서구의 신학 논리전개 자체에 결함이 많다.


하워드 라이스는 윌리암 보즈마(William Bouwsma)가 지은 칼뱅의 전기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개혁신학의 원조인 칼뱅에 대해 가지는 두가지 상반된 측면을 분석한다.

"한 측면은 칼뱅을 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전통의 입장에 선 확고한 원칙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이다. 칼뱅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정적인 정통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신자는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 받은 사람이다. 칼뱅의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칼뱅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질서와 이성을 중시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칼뱅의 또 다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삶의 역설을 인정하며, 그 모호성을 이성화 하기를 거부하며, 신앙의 핵심에 있는 신비성(mystery)을 환영했다. 보즈마에 의하면 칼뱅은 '신학에 대한 경험과 실천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 상당히 관대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의 칼뱅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역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교리의 정확성보다는 믿음과 삶의 질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칼뱅주의자들로는 유럽 대륙의 경건주의자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 미국의 영적 대각성의 지도자들―조지 휫필드 및 조나단 에드워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바른 교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인들의 실제적인 체험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정통 교리의 공식화를 저항했다. 이들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신비체험을 허용했으며, 자신들의 경험들을 표현하기 위해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용어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했다.

양측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깔뱅을 강조하다 보니 부흥기 때마다 대립과 분열이 고조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깔뱅을 지지하는 측들이 너무나 우세한 위치를 고수해 왔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개혁신학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깔뱅을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최근에 들어서 시작되고 있다.

문제는 칼뱅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식(knowledge)을 어떤 측면에서 이해하는가이다. 자주 이 말은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무감정하여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소요리 문답서에서 처럼, 하나님의 특징을 제대로 정의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보즈마는 주장하기를 신자들이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안다'(know)라는 말보다는 '체험한다'(experience)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지성적이고 이지적인 것은 물론 인격체와 인격체를 체험적으로 아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지적이고 명제적인 지식을 강조하여,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경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Howard Rice, Reformed Spirituality: An Introduction for Believers, Westminster Knox Press, 1991, 24-27,『개혁주의 영성』).


개혁신학은 이성을 강조하는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이성과 교리를 중시하고 감정과 경험을 경시하는 신학을 존속시켜 온 것으로 본다. 이성과 논쟁을 중시하는 신학방법론은 '중산층 백인 남성신학'(White Male Middle Class Theology)이란 비판을 면치 못한다.

이들이 자기들과 다른 파에서 어떤 것을 주장하면 요리조리 피하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영락 없이 법정에서 변호사가 상대방 변호사의 변론을 이것저것 트집잡아 과소평가하거나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별로 없다.
 

오늘날 찰스 촌시의 이성주의적 경향을 가장 잘 이어 받은 사람은 미국 그레이스 교회의 존 맥아더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는 탁월한 설교가이지만 건전한 영적 체험의 결핍과 기적종식론을 금과옥조로 삼고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누리는 영적 체험과 능력 현상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학자인 윌리암 디아르테가는 맥아더의 '기능심리학'(faculty theology)을 비판한다.

“한때 맥아더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 이 학생에게는 축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맥아더)의 신학적인 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는 상담이나 전문적인 심리학자를 통해 이 학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했다. 이 학생은,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나쁜 생각하기를 중지해야 된다는 상담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맥아더의 접근 방식은 중세기에 시작되어 칼뱅이 사용한 기능심리학적인 것이었다. 기능심리학은 의지가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며 그것은 보다 저급한 감정이나 생각을 지배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학생에게는 우울증적인 생각을 중지할 수 있는 의지력의 발동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William Dearteaga, Quenching the Spirit : Thomas Nelson, 1992,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


한국의 장로교 신학도 많은 경우 이러한 반 부흥파이자 구학파(Old School)인 프린스톤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개인의 경건시간이나 목회 현장에서 가슴은 뜨거우면서도 편견적인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뜨거운 가슴을 애써 무시하는 기현상을 속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부흥기에는 언제나 동반되는 감정이나 열광에 대해 에드워즈같이 균형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열광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적당하고 질서 지키는 것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그런 집회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무질서를 초래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얼마나 냉랭하고 이성적이고 판에 박은 듯한 행사 같은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예배인지 장례식인지 분간을 못하겠다."
"예배 드리고 나면 더 심령이 컬컬하다."
"3대지에 삼분의 미끈한 설교, 성경 구절은 인용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설교로 은혜를 받으라고?"
(그렇다고 필자는 이런 설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분을 하든 십분을 하든 은혜 되는 설교도 많다.)


필자는 이런 냉랭한 집회에 가면 머리가 띵하여 십분도 앉아 있지를 못할 지경이다. 예배 중에 찬송가 한 곡(그것도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아예 부르지도 않는다), 성령 충만보다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더 치중하는 성가대의 노래, 3 대지에 25분 내지 30분 길이의 설교, 예배 시간이 한 시간이 넘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시계를 보고 벽시계를 수시로 쳐다보는 사람들. 이런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으라는 사람들의 영적 식욕에 의심이 간다. 비판자들은 오늘날 필자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감정을 중시한 나머지 이성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성―사고력 추리력 종합력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날 프린스턴 신학은 개혁신학의 중추를 이루며 그 공적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통 교회에서 너무 지성적이고 질서 있고 점잖은 것을 추구한 나머지 성경에서 가르치는 여러 가지 감정들―사랑, 기쁨, 환희, 평강 비애 등―의 표현을 을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개혁신학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알아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로교가 그 잘난 개혁신학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데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이 그렇게 잘 났으면 왜 전세계에서 장로교인이 늘지 않는가?"
"20세기에 들어서서 장로교의 개혁신학을 따르는 곳에서 교회가 성장했거나 부흥이 일어난 곳이 어디 있는가?"

비판자들은 이런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한편 은사주의자들은 견제가 필요할 정도로 감정과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고 이성과 교리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단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냉랭한 전통적인 집회에 대한 반(反)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균형'(마 23:23)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필자는 다만 개혁, 보수신학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등한시 해 왔던 '종교적인 감정'에 대해 균형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이 분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가 드물기 때문이다.

산업화 기계화로 비인간화 되고, 사회가 복잡 다단하여 많은 스트레스와 소외감이 가중되는 현대인들에게 감정의 문제는 더 없이 중요한 것이 되었다. 더군다나 영상 시대, 체험 시대, 감성 시대에 사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먼저 느끼고 그 다음에 이해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먼저 이해하고 느낀 지금의 세대와는 다르다.

기성 세대가 빈야드가 나쁘고 토론토공항교회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아무리 주장해 본들, 젊은 세대들은 빈야드 음악에 심취하여 은혜를 받고 있다. 그런 것들이 그들의 기호와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비판자들은 꼬리 타분한 화석화된 교리의 수호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전도사 초창기에 대학부를 맡았을 때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젊은이들이 바른 교리를 모르는 것 같아 조직신학을 쉽게 풀어 가르쳤더니 두 번째 주에 모두 다 달아나버렸다.

필자는 "아차!"하면서 찬양 팀을 구성하여 예배 시 찬양과 경배에 역점을 두었다. 그랬더니 부모의 덩살에 교회에 오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어른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대학생은 물론 30대의 청년들까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몇 달 되지 않아 참석 인원이 백 명 가까이 늘어났다.

이들은 이제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전통적 예배에 익숙한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자기들이 선호하는 전통적 예배가 ‘교리’가 아니라 ‘문화’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IQ(지능지수) 보다는 EQ(감성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IQ는 높아서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다녔지만 낮은 감성 지수로 인해 대인 관계, 위기 관리 능력, 정서적 불안으로 인해 사회적 낙오생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IQ보다는 EQ가 높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성경 지식, 신학 지식 많이 아는 사람이 체험 많고 실생활에서의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

신학 지식이 많은 사람이 가장 신앙 생활을 잘 한다면 신학 박사가 신앙 생활을 제일 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신학 박사(후보생) 중에서도 미움, 원한, 용서 못함, 시기심, 조급성 등의 감정 처리를 잘 하지 못하여 낭패를 당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개혁주의자들은 체험과 감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불균형을 비판하기 전에 건전하고 거룩한 감성과 체험을 등한시하거나 폄하하고 메마른 지성과 지식을 강조하는 자들의 불균형도 마찬가지로 지적해야 할 것이다. *

   
 

 

[관련기사]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110 Nuuanu Ave, Honolulu, HI 96817 USA  |  대표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구요한
Mail to: gloriatimes77@gmail.com
Copyright © 2018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