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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⑦]조나선 에드워즈의 신앙과 감정(3)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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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2  19: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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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⑦]

조나선 에드워즈의 신앙과 감정(3) :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의 두드러진 표지들”(조나선 에드워즈)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와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마틴 로이드 존스)

   
 

집회 중 사람들의 감정이 고양되고 극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희한한 영적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열광적이다’, ‘사탄적이다’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한편, 이런 체험들을 많이 하고 신앙적 열심을 내면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최고의 칼뱅주의 신학자요 부흥신학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미 종교적 감정 분야의 ‘고전’(classic)이 된 『종교적 감정론』에서 양쪽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전자의 경우, 그런 현상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은혜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감정이나 현상만으로 영적 분별을 하려는 이성주의적 반 부흥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짜 은혜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자체가 진정한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신앙적 열심과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부흥파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은혜의 진정한 표지들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진정한 신앙은 상당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앙 감정(정서)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정서)이 없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의 두드러진 표지들”
(Showing what are distinguishing Signs of truly gracious and holy Affections)

에드워즈는『종교 감정론(신앙 정서론)』제3부에서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의 두드러진 표지들"(Distinguishing signs of truly gracious and holy affections)에 대해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영적이고 신적인 영향들에서 나오는 것"이며 감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균형 잡힌 입장을 취하여서, 성령을 소멸하지도 말고 육신의 이끌림을 받아서 마귀에게 속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에드워즈는 영적 지식을 맛보는 감각(sensation of tasting)에 자주 비유했다. 마음의 지각은 거룩한 맛(holy taste) 또는 마음의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탁월하고 신적인 것을 영적으로 맛보고 즐기는 것이다”(it is a spiritual taste and relish of what is excellent and divine).

이런 지식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며 “~에 관한 지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꿀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의 지식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지식이다.

이런 점에서 마음의 지식은 생각하고 파악할 뿐만 아니라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맛보기 비유에서 인간의 기분과 느낌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믿음이란 지성과 살아있고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행동과의 친밀한 연합이다. 사람은 사랑과 사모의 태도에 의해 어떤 대상과 친밀하게 맺어진다. 마음의 지식의 본질은 살아서 행동하는 지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서는 대상에 대한 판단, 또는 진리에 대한 확신도 있다. 진리와 신적인 것의 실재에 대한 확신은 믿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데, 믿음은 이성의 기능을 성화시켜서 그것이 종교적인 것에 관해 추론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믿음의 행동은 믿음의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에 종속되며, 성화된 순종의 행위가 믿음의 핵심이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의 두드러진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다소 난해하고 내용도 많아서 다음의 자료를 참조했다.
-나용화, 『영성과 경건』: CLC, 1999, 83-91.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것들,”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5부 종교적 정서(요약1), 439-572(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VSt0&articleno=510# 2015.6.24).
-이강학,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분별:『구별하는 표지』와『종교적 정서론』을 중심으로”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http://www.ttgst.ac.kr/upload/ttgst_resources13/20149-350.pdf. 2015.6.26)
-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12가지 참된 신앙의 표지.”『데오스앤로고스』(http://www.theosnlogo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4. 2015.6.28).

1. 성령의 내주-
그들은 신적 조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참된 성도됨의 첫 번째 표지는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영향과 작용들이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나 영향력이 아니라 특별하고 은혜롭고 구원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시는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다.


2.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진짜로 은혜로운 감정은 현실에 대한 자각과 신적인 것에 대한 확실성이 동반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들이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받은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3.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진정 거룩한 감정은 신적인 것에 기초한 도덕적인 탁월성에서 생긴다.

신적인 일들이 ‘도덕적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자연적(본성적) 선과 악’을 구분한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이 거룩한 감정을 드러낼 때 주로 신적인 일들 안에 거룩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신적인 일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체를 좋아하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함이나 도덕 완전성 때문에 신적인 일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그 본성이 성령에 의해서 거룩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거룩)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것을 이해하는 마음과 영성에서 생겨난다.

참된 성도는 빛과 열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성도가 갖고 있는 영적인 지식은 마음의 새로운 감각 또는 신적인 것의 아름다움과 도덕적 탁월성을 이해하는 감각과 같다. 영적인 지식은 개념적인 지식과는 달리 그 안에 신적인 것의 아름다움과 도덕적 탁월성을 맛보는 새로운 감각이나 새로이 창조된 것을 담고 있다.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들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신적인 미각, 혹은 영혼의 거룩한 미각과 취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신적인 미각에 의해 참된 성도는 진정으로 영적이고,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는 행동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며 구별하게 되고 은혜가 강하고 생명력 있게 임할 때, 어떤 행동들이 옳으며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지 판단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5.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진짜로 은혜로운 감정에는 현실의 자각과 신적인 것들에 대한 확신을 동반된다.

참된 성도는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 표지는 네 번째 표지와 연관돼 있다. 복음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견고하고, 온전하고,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확신한다.
 

6. 참된 겸손-
은혜로운 감정에는 ‘복음적 겸손’이 동반된다

복음적 겸손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인 자신은 전적인 무능함, 혐오할 만함, 그리고 추악함과 같은 심령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감각을 갖고 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복음적 겸손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으시고 작용케 하시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며, 신적인 일들에 있는 탁월한 아름다움을 느낄 때 생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겸손한 참된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가장 큰 은혜의 체험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함을 더욱 예리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더욱 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7. 성품의 변화-
은혜로운 감정의 특징은 ‘본성이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는 창조주의 능력에 의해서 영혼의 본성 자체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이것은 회심시에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게 되는 변화다. 참된 사람에게는 죄를 저지를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죄들이 인격의 주된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본성의 변화는 오직 신적인 역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데, 영적 깨달음과 감정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영혼의 본성 자체가 바뀌는 과정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다할 때가지, 또는 영광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성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를 성경에서는 본성의 계속적인 회심과 갱신으로 묘사한다고 말한다. 즉, 본성의 변화는 단회적 성격과 점진적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참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심령을 닮아가는 사람, 즉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온유, 평온함, 용서, 자비의 심령을 자연스럽게 닮아가는 사람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탁월하게 기독교적인 정신’이며, ‘기독교인의 심령에 있는 참되고 뚜렷한 성향’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기질과 성향들을 가지지 않고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신앙고백과 특이한 은사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했다. 참된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질과 성향 속에 그리스도를 닮은 정신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9. 하나님을 두려워함-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리스도의 부드러움이 동반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성령께서 구원의 은혜로 임하실 때 사람의 돌과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참으로 거룩한 성도는 죄나 또는 무엇이든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주의 깊음과 신중함과 엄격함을 갖게 된다.
 

10. 신앙의 균형-
은혜로운 감정은 ‘삶에서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참된 성도는 신앙에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가 있다. 이 땅 위에서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성화의 보편성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조화와 균형을 누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형상 전체가 각인돼 있다.
 

1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은혜로운 감정이 고양되면 ‘영적인 욕구와 갈망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거짓된 체험을 하는 위선자들에게는 쉽게 만족하고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참된 성도는 더 큰 은혜와 사랑을 갈망하면서 사는 것이 특징이다. 참된 성도는 더 큰 깨달음과 감정들을 체험하면 할수록, 더 성장하기 위해 은혜와 영적인 양식을 더욱 간절히 갈구하는 거지가 되어 적절한 수단들과 방편들을 사용해서 더욱 더 간절하게 은혜와 영적 양식을 추구하게 된다.

 

12. 행위의 열매로 나타나는 신앙-
은혜로롭고 거룩한 감정은 ‘실천적이며 열매를 맺게 한다.’

참된 성도는 열매 맺는 삶을 산다. 성령의 내주하심 때문에 삶과 행위를 통해 열매는 맺는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실천의 세 가지 특징으로 1) 사람들은 금지의 명령 뿐 아니라 믿음의 적극적인 명령에도 보편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과 2) 자신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힘쓰는 것만큼이나 신앙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아주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이어야 하며 3)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전적인 순종의 길과 부지런하고 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가 실천적으로 열매 맺는 사람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성도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성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기독교적인 실천이라는 열매는 참된 성도들에게서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요, 위선자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했다. 특히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은혜의 모든 표지 중의 으뜸이고, 표지 중의 표지며, 증거 중의 증거이고, 모든 다른 증거들을 인치고, 그것들보다 탁월하다고 주장한다.
 

정리하면, 에드워즈는 고양된 감정이나 신체적 반응들만으로는 진정하고 은혜로운 감정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에 더하여 12가지 은혜로운 표지들이 나타나야 진정하고 거룩하고 은혜로운 종교적(신앙적) 감정(정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가 어떤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진짜라고 주장하지도 말고 또한 자기가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쉽게 부정하고 의심하는 성향을 버릴 것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특별한 시기에 성령이 베푼 독특하고 경이로운 체험을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 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마치 자신이 하늘에까지 올라가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경우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는데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들이 광신적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에드워즈)는 내 뇌가 그런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것이 정신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러한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으로 다 사로잡힐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저· 서문강 역,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 『청교도 신앙』, 생명의 말씀사, 1992, 376-77).

에드워즈는 당시의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나(에드워즈)는 내 의무를 감당하는데 있어서 청중들이 오직 진리로만 감동 받고 그 감동이 주제의 본질에서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는 한 청중들의 감동을 최대로 불러 일으키고 싶다.

나는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인 설교 방법이 오랫동안 멸시 받아 온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학식이 많음과 논리 정연함 방법과 언어의 정확성이 설교자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게 만드는 풍조를 알고 있다. 그러한 설교가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좋은 성향으로 생각되어 온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부족 또는 합당한 고찰 부족에서 기인했다고 겸손하게 생각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신앙의 진리에 대한 교리를 다룸에 있어서 명확한 구분, 예증, 논리 정연함, 좋은 방법 등이 많은 면에서 필요하고 유익하며 또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신학에 관한 사변적 지식 증가가 우리 교인들에게 다른 것만큼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빛은 풍부하면서도 열심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이런 지식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논리의 힘과 침투력 학식의 정도 명확한 분별력 바른 문체 표현의 명확함 등이 이처럼 빼어난 세대가 언제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이 죄를 이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천국을 사모하는 일 그리고 삶의 거룩함이 이처럼 빈약했던 적이 언제 있었는가?

현재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많은 것을 저장시킬 필요보다는 마음이 감동을 받을 필요가 더 급하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훌륭한 성향을 가진 유의 설교를 가장 크게 필요로 하고 있다”(에드워즈, 상게서,  380)(필자가 강조).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와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

로이드 존스 목사는 바른 체험과 바른 감정을 경시하고 바른 교리만을 중시하는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은 열정(Enthusiasm)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그 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열정을 싫어하는 것은 곧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교회사를 볼 때 부흥기 때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진 비난이 지나친 열정이다.

특히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지르기 쉬운 위험한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한 가지 중요한 법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는 것이다'(고전 14:40). 그러나 또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라는 명령도 있다" (Martin Lloyd-Jones, Revival : Crossway Books, 1987, 73,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먼저,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는 말을 살펴보자(같은 책, 74-75).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다. 고전 14의 문맥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할 때 한꺼번에 시끄럽고 무질서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질서대로 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예언이 임했으니 나는 주체할 수 없다'(고전 14:32)는 행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기쁨이나 흥분을 제어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육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상주의(emotionalism)를 조심해야 한다. 감상주의는 감정이 지나쳐서 미친 듯이 흥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 시에 특히 인위적인 감상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을 살펴보자(같은 책, 76-79).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것에 너무나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까 이것을 소홀히 한다. 혼란을 두려워하다 보니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부흥기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거룩한 무질서'와 혼란을 혼동한다.

그러나 부흥 기에는 항상 신약에 기록된 대로 단순하게 된다. 말하자면, 성전에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호숫가의 배에 타고 앉으신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차이이다. 으시댐, 예전적인 형식, 순서, 가운이나 정장이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막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기에 있지 않을 때에는 성가대 특히 유급 성가대나 독창자를 강조하여 회중들은 앉아서 그들을 감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이 더 필요 있을까?

특히 프로그램을 중시하다가 보면 성령을 소멸하기 쉽다. 또한 인위적인 흥분 상태를 지나치게 두려워 할 때 성령을 소멸하기 쉽다. 물론 지나친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정통교회이면서도 죽어 있는 이유는 가짜 흥분과 감정의 표현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감상주의자도 되지 말고 감정을 지나치게 두려워 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가짜 지성주의 때문에 생긴 현상들이다. 위대한 지성인 바울은 동시에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살전 5:19-22).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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