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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감정⑥] 조나선 에드워즈의 신앙과 감정(2)-광신적 열광주의와 이성적 복음주의에 모두에 대한 충고-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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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17  17: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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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⑥]

조나선 에드워즈의 신앙과 감정(2)

-광신적 열광주의와 이성적 복음주의 모두에 대한 충고-

   
 

집회 중 사람들의 감정이 고양되고 극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희한한 영적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열광적이다’, ‘사탄적이다’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한편, 이런 체험들을 많이 하고 신앙적 열심을 내면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최고의 칼뱅주의 신학자요 부흥신학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미 종교적 감정 분야의 ‘고전’(classic)이 된 『종교적 감정론』에서 양쪽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전자의 경우, 그런 현상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은혜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감정이나 현상만으로 영적 분별을 하려는 이성주의적 반 부흥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짜 은혜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자체가 진정한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신앙적 열심과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부흥파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은혜의 진정한 표지들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진정한 신앙은 상당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앙 감정(정서)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정서)이 없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부흥의 새로운 국면-열광주의자의 등장

영국의 부흥사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미국을 다녀간 제1차 영적 대각성의 3년째인 1742년 말에, 뉴잉글랜드 지방의 청교도 칼뱅주의자들은 부흥을 지지하는 새빛파(New Lights)와 부흥을 부정하는 옛빛파(Old Lights)로 완전히 양극화 되어 있었고, 뉴잉글랜드 지방은 부흥의 열기 대신 양쪽의 지도자인 반(反)부흥파인 찰스 촌시(Charles Chauncy, 1705-1787)와 친(親)부흥파인 조나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신랄한 지상(紙上) 신학논쟁이 그 열기를 대신했다.

촌시는 이성과 판단을 경시하고 지나치게 감정을 자극하고 경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을 경계하였다. 촌시는 “뉴잉글랜드의 종교의 상태에 관한 몇가지 적절한 생각들, 5부로 된 소논문”(Seasonable Thoughts on the State of Religion in New England, a Treatise in Five Parts, 1743)을 통해 부흥운동의 폐단을 체계적으로 공격하였다.

부흥운동은 그 동안 제임스 데번포트(James Davernport, 1716-1757)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데번포트는 뉴헤이번 주 설립자의 손자이자 예일대학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라는 흠없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휫필드에 대한 심한 열등감으로 인해 부흥운동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데번포트는 집회의 설교를 통해, 부흥을 반대하고 자기를 비난하는 교역자들을 사정없이 비난했다. 그는 마침내 ‘종교 집회를 빙자하여 마을의 질서를 해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742년 8월부터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1744년에 그가 공개적인 사과서를 제출했을 때 이미 부흥의 불길은 꺼져 있었다.

에드워즈는 처음에는 부흥운동을 극구 두둔하다가 데번포트의 열광주의로 인한 찰스 촌시의 정당한 지적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최근의 종교적 부흥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Thoughts on the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을 통해 부흥운동을 변호하는 한편, 촌시의 정당한 공격을 받아들여서 부흥운동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 치유책을 제시하였다.
 

부흥사들의 오류

에드워즈가 『부흥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에서 지적한 부흥사들의 오류를 대별하면, 영적교만,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육적인 영성,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 및 잘못된 가르침들이다.

고든 콘웰 신학교의 역사신학 교수인 리챠드 러브레이스(Richard F. Lovelace)는 역사적으로 많은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을 통해 분석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사소한 견해 차이를 제외하고는, 에드워즈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러브레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후대의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에드워즈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옥석을 가려냈었더라면 별난 스캔들들(distinctive scandals)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Richard F. Lovelace, “How Revivials Go Wrong.” Dynamics of Spiritual Life--An Evangelical Theology of Renewal, Dowers Grove: IVP, 1979, 239-270).

이후, 에드워즈는 1746년에 참된 종교적 감정과 그렇지 않은 종교적 감정을 정리한 소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에서 종교적으로 풍부한 감정을 체험했다는 그 자체로 스스로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종교적 감정에 관한 소논문”
(‘종교적 감정론’ 또는 ‘신앙 정서론’)

에드워즈의 『종교적 감정에 관한 소논문』(Jonathan Edwards, "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I, Banner of the Truth, 1992, 236-43)은 벧전 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에 관한 연속적인 설교로 되어있다.

에드워즈는 이 소논문을 3부로 나눈다.

관련 한글 서적들 소개:

-조나단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정성욱  옮김, 『신앙 감정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1권), 부흥과개혁사.
-샘 스톰즈 지음 장호준 옮김, 『우리 세대를 위한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Coram Deo 시리즈 5), 복있는사람.
-양낙홍, 『체험과 부흥의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

번역자에 따라 『종교적 감정론』,『종교적 정서론』,『신앙 감정론』,『신앙 정서론』으로 번역하고 있다.
 


제1부  "종교에 있어서의 감정의 본질과 그 중요성에 대해”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Affections and their important in religion)

사실 감정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리를 설교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냉랭하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신앙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감정(정서)(affections)과 열정(passion)을 구분한다. 감정은 사람의 의지의 생동력 있고 활발한 활동들을 말하는 반면 열정은 갑작스러우며 생각이 마비되는 폭력적인 동물적인 활력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여 감정 전체를 저급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취급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진정한 종교는 상당부분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인 감정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이어서 마음과 감정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그것을 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영적이고 (진리를) 밝히고 거룩하게 만드는 영향력들--에 있다. 부르심 또는 복음의 제시를 영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그 영혼에게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에 대한 어떤 영적인 감각, 또는 향기(relish)와, 하나님의 달콤하고 황홀한 은혜를 맛보게 하는데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풍성하게 충족시키시는 거룩한 장엄함과 신실성을 은혜롭게 맛보게 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것들을 웅켜쥐도록 하여서, 그 결과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여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게 한다. . .

이러한 신적인 감각과 마음의 밝힘이 없이, 생각에만 영향을 끼치는 말들로만 믿게 하고 그 외의 다른 기초가 없는 것들은 맹목적인 적용에 불과하며, 이러한 것들은 어두움의 영에 속한 것들이지 빛의 영에 속한 것들이 아니다” ("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 ?).
 

(진정한 은혜의) 확실한 표지가 아닌 것들

제2부 종교적 감정이 참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확실한 표지가 되지 못하는 것들(Showing what are no certain Signs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truly gracious, or that they are not)

제2부에서 에드워즈는 신중한 자세를 취한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 자체가 진리라는 ‘확실한 표지(no certain signs)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기쁨과 사랑이 넘치고 찬양과 대단한 확신을 표현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그것이 진정한 진리를 참으로 증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도 이러한 감정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하면 그 사람은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도 그러한 외적인 종교적인 행사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감정의 ‘확실한 표지가 될 수 없는 것들’(no certain signs) 12가지를 제시한다.

원문은 다소 난해하고 분량도 많아서 다음의 자료를 참조했다.

-나용화, 『영성과 경건』: CLC, 1999, 83-91.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것들,”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5부 종교적 정서(요약1), 439-572. 
     (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VSt0&articleno=510#. 2015.6.26).
-이강학,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분별:『구별하는 표지』와『종교적 정서론』을 중심으로”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
http://www.ttgst.ac.kr/upload/ttgst_resources13/20149-350.pdf. 2015.6.26).
-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12가지 참된 신앙의 표지.”『데오스앤로고스』, 자료검색일 2015.6.28 (http://www.theosnlogo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4).
 

1. 감정의 강도

종교적 감정이 상당히 크거나 최고조에 오른다고 해서 참된 것도 아니고 거짓된 것도 아니다.”

참된 종교는 많은 부분이 종교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신앙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감정도 커진다. 사랑은 감정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강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아주 크고 강한 욕망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기갈을 노래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이다”(시42:1).

벧전1:7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높은 정도의 기쁨을 드러내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2). “기뻐하고 뛰놀라”(눅6:2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68:3).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슥 9:9).

그러나, 단지 강도가 크다고 해서 그 종교적 감정이 정말 은혜롭고 신령한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한때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려 했을 것이라고 바울은 회고하지만 얼마 후 바울은 그들을 위한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염려를 표한다(갈 4: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고, 언약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신속히 다른 신에게로 향했는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이 얼마 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변했다.

그러므로, ‘종교적 감정이 최고조로 오르는 그 자체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는 주장이나, 종교적 감정이 최고조로 오른 사람을 열광주의자로 정죄해서도 안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2. 몸의 격렬한 반응

 “종교적 감정들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도 아니고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신체적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까무러친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이 꼭 은혜 받은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집회 중에 신체적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도 참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면으로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지적한다. 마음이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동할”때는 예외 없이 신체가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은 지각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확증은 전혀 아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은 먼지와 재 같은 존재인 연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적인 깨달음이 강하게 주어질 때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육체를 압도하게 만든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인식으로 자신의 육체가 받은 영향을 언급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시편 기자는 강렬한 감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3.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누가 종교적인 것들에 대해 유창하게 열렬히 그리고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의 감정이 참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 많으면 바리새인이나 외식하는 자라고 정죄하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무지하고 신중하지 못하게 그런 사람을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력” 아래 있는 자로 판정해 버린다. 입술과 말뿐인 신앙은 성경에서 “잎만 무성한 나무”로 묘사된다. “잎사귀가 지나치게 많은 나무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경우는 드물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사람이 종교적 일에 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못 된다. 거룩하지 않은 종교적 정서가 충만한 경우에도 종교에 대해 많을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종종 대단한 열심과 굉장한 열의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되었던가”

에드워즈는 종교적 주제에 대해 단지 말을 많이 하고 또 잘하는 것이 참으로 은혜 받은 증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4.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어떤 종교적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감정의 표지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성격의 자연스런 결과로 인한 감정이 아니라  외부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감정이 흥분되면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성령의 역사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낳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으로서, 인간의 능력과는 전혀 다르고 자연적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며 감지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5. 성경 구절이 갑자기 떠오름

“성경 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감정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은혜의 결과거나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어떤 성경 구절이 놀라운 방식으로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참 은혜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떠오른 성경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떠오른 방식이 놀랍고 희귀한 것이라는 이유로 생겨난 감정은 참된 은혜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가 성경 본문을 마음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마귀는 예수를 시험할 때도 말씀을 이용했다. 기쁜 감정이 성경 구절과 함께 온 정도가 아니라 성경 구절로부터 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구원을 주는 참 신앙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커다란 기쁨을 얻었다. 그것도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 사랑의 피상적 표현

“종교적 감정 안에 사랑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긴 하나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가만히 보면 어떤 것이 탁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더 많다. 철이나 구리보다 은의 모조품이 더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다이아몬드나 루비도 모조품이 많다.

사랑과 겸손만큼 많은 모조품을 가진 은혜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를 전혀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은혜 없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외치면서 예수를 높혔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겠나이다!” 혹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7. 여러 종류의 감정 체험 여부

“여러 종류의 종교적 감정이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로운 감정의 결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못 된다.”

 여러 가지의 거짓 감정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은혜로운 감정들에도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왕, 아합 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8. 감정의 체험 순서

“위로와 기쁨이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온다고 해서 종교적 감정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은 전혀 아니다.”

청교도들(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셰퍼드, 토머스 후커)의 회심론에 의하면, 회심은 먼저 각성, 공포, 그리고 끔직한 불안 후에 전적 죄성과 무력함에 대한 인식 속에서 율법적 겸비가 따르고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빛과 위로가 오는 순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인간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순서대로 회심을 체험하는 것이 꼭 그 체험이 가짜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러한 순서대로 체험한 정서가 참된 회심의 표지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기쁨과 위로가 커다란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 단계가 회심의 전 단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마음과 삶의 죄악됨”, “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 “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9.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신앙생활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예배의 외적 의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된 종교적 감정의 표적도 아니고 또한 아닌 것도 아니다.”

참된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등의 종교적 활동들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월삭, 안식일, 대회 등의 절기가 아주 많았다. 손을 펴고 많이 기도했다(사 1:2-15).

구원 얻는 신앙이 없는 자들도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각근히 준수할 수 있다. 돌 밭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들도 기쁨으로 말씀을 들었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 단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각종 교회 집회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이 참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10. 찬송을 열심히 부름

 “입술로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영광 드린다고 해서 참된 종교적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도 또한 갖지 않은 것도 아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것이 꼭 그 사람이 남들보다 더 은혜가 충만하다거나 참된 종교적 정서를 소유했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죽지 않은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사울 왕을 그러한 예로 제시한다. 사울 왕은 굴복되지 않은 교만과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윗의 전례 없는 자비를 높이면서 외쳤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 26:21).

 

11. 자신의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 감정이 참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가 되지 못된다.”

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합당치 않은 일이며 또 크게 비난받을 만한 일(고후 13:5)”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본인들 스스로 표명하는 자신감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의 여부와 상관 없이 그들의 자신감만 보고서는 어떤 확실한 단정도 내릴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성도이며 “가장 휼륭한 성도”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 성도들이 가끔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한다.

에드워즈는 위선적 확신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첫째, 위선자들은 신중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참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각성과 신중함이 점점 더해 간다.
둘째, 위선자들은 자기의 영적 소경 상태, 자기 마음의 거짓됨, 자기의 낮은 이해력에 대한 인식이 없다.
셋째, 마귀는 위선자들의 소망은 건드리지 않는다.
넷째, 거짓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자기 부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아무런 영적 빛이나 조명 없이 사람들에게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 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옛날에 받은 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정욕과 부패”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으면 “은혜로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해야지 체험을 의지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믿음으로 살아야지 보는 것으로 행하면 안 된다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혜롭고 은혜로운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성도가 상황이 불투명해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과 영적 조명 없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령한 빛이 비취는 체험 없이 자신의 구원을 직관하는 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12.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외적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경건한 자들이 듣기에 아주 감동적이고 유쾌하여 그들의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해서 참된 종교적 감정의 표지로 단정할 수 없다.”

위선자들도 많은 종류의 종교적 감정을 소유할 수 있다.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주 비슷한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며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에 대한 경탄, 죄에 대한 슬픔, 순종, 자기 비하, 감사, 기쁨, 종교적 갈망,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심 등의 외양을 다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커다란 각성과 양심의 가책 후에 올 수 있다.

모조품 사랑과 기쁨이 참된 회심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순서로 올 수도 있다. 실로, “성도들 속에 있는 모든 구원 얻게 하는 은혜는 그 모조품들이 위선자들 속에 존재한다. 영적이고 아주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성령의 참된 구원의 역사로 쉽게 착각할 수 있는 유사품들이 위선자들에게 있다.”
 

결론

에드워즈는 이처럼 참된 종교적 감정과 거짓된 종교적 감정의 유사성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참되기도 하고 거짓되기도 하므로 이런 감정 자체만으로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본인이 경험한 감정이 참된 것이냐의 여부는 다른 방법으로 분별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예배 중에 어떤 사람은 성령의 죄를 책망하시는 능력으로 인해(요 16:8) 통곡하며 울부짖을 수도 있고, 자기의 개인적인 서러움 때문에 통곡할 수도 있고, 이 두 가지의 혼합으로 통곡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첫 번째는 진정한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실제로 보면 세 번째가 많을 수 있다.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면서 당하는 환란과 고난과 핍박과 서러움으로 인해 힘들어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나 위로로 인한 통곡도 나오지만 고난으로 인해 받은 상처의 아픔을 쏟아놓은 통곡도 될 수 있다. 전통적인 교회는 이런 감정의 표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비판적이기 대문에 오히려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를 오해하여 이러한 종교적 감정들의 표출 자체가 “거짓된 표지”(false signs)이거나 광신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에드워즈의 주장을 오해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 자체가 진리라는 “확실한 표지가 아닌 것”(no certain signs), 즉 어떤 종교적 감정 자체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감정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진정성 여부는 다른 방법으로 분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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