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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⑤]조나선 에드워즈의 신앙과 감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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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12  2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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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⑤]

조나선 에드워즈의 신앙과 감정(1)

-조나선 에드워즈의『종교적 감정론(신앙 정서론)』을 중심으로-

   
 

집회 중 사람들의 감정이 고양되고 극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희한한 영적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열광적이다’, ‘사탄적이다’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한편, 이런 체험들을 많이 하고 신앙적 열심을 내면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최고의 칼뱅주의 신학자요 부흥신학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미 종교적 감정 분야의 ‘고전’(classic)이 된 『종교적 감정론』에서 양쪽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전자의 경우, 그런 현상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 자체로 은혜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감정이나 현상만으로 영적 분별을 하려는 이성주의적 반 부흥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짜 은혜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자체가 진정한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것은 신앙적 열심과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부흥파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은혜의 진정한 표지들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진정한 신앙은 상당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앙 감정(정서)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정서)이 없는 사람은 신앙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종교적 감정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은 미국 내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 교회를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 휫필드, 프릴링하이젠, 길버트 테넌트,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그의 두 제자 조셉 벨러미와 사무엘 홉킨즈에 의해 교회는 급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뉴잉글랜드 교회인데 “30만 인구의 뉴잉글랜드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해인 1730년대 말 2년 동안 약 25,000명이던 교인은 약 50,000명으로 불어났다.” 대각성운동의 결과 동부의 9개 대학 중 6개가 설립되었고 수많은 선교사가 중국, 인도 아프리카에 파송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의 좋지 않은 결과는 교회의 분열이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 교단이 바로 장로교이다. 당시 미국의 장로교는 강력한 칼뱅주의 전통에 근거한 영국의 청교도 전통에서 온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과 경건주의-부흥운동의 특징을 더 많이 지닌 뉴잉글랜드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1차 대각성운동을 거치면서 부흥으로 인한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1741년 교단은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신파(뉴잉글랜드 계)와 반대하는 구파(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로 분열하게 되었다.

또한 회중교회도 예일대학 출신의 조나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를 중심으로 한 새빛파(New Light)와 하버드 대학 출신의 찰스 촌시(Charles Chauncy, 1705-1787)를 비롯한 옛빛파(Old Light)로 나누어 졌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주도한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은 물론 영국의 요한 웨슬레가 인도한 부흥집회에서 항상 문제가 된 것은 '종교적 감정'이었다.

조지 휫필드의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의 기록이다.

"그(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 빛이 변하였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받았으며 그들의 양 무릎이 서로 심하게 부딪쳤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괴로워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몇몇 젊은 여자들은 광적으로 발작했고 울부짖으며 '나에게 화가 있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괴로워했다"(Arnold A.  Dallimore, George Whitefield. Vol I. Westchester, Ill: Crossway, 1980, 183).

1769년에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2-1791)의 집회에 참석한 어느 남자는 그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고함을 지르는 현상에 구역질이 나서 분노를 터뜨리며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듯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한참동안 괴롭게 울부짖었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웨슬레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John White, When the Spirit Comes with Power, IVP, 1988, 78에 인용된 웨슬레가 그의 형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장로교, 감리교 및 침례교 목사들이 주최한 19세기 초의 미국 켄터키 주 케인 리지(Cane Ridge)시에서 개최된 캠프미팅 부흥 운동기간 중에도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많은 사람들의 몸이 흔들리기도 하고, 더러는 춤을 추기도 하고, 더러는 개처럼 심하게 짖기도 하고, 더러는 심하게 웃기도 하였다 (Sydney E.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Yale Univ. Press, 1972, 434-35).

부흥기에는 언제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다. 그래서 반(反)부흥파들이 부흥에 대해 제일 먼저 공격하는 것이 열광(enthusiasm) 이나 광신주의(fanaticism)다. 열광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종교개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기록된 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인도를 맹신하는 좌익 열광주의자들인 즈윅코 예언자들(Zwickau Prophets)과 제세례파들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퍼부었다. 칼뱅도 열광주의자들에 대해서 곱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청교도들도 퀘이커 교도들 및 기타 열광주의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로마 카톨릭의 주교인 로날드 낙스(Ronald A. Knox)는 30 여년에 걸친 연구와 조사로 집필한 『열정』(Enthusiasm. Collins Liturgical Publications, 1950)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은사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몬타너스 주의자들, 중세의 완전주의자들, 종교개혁 당시의 급진주의자들, 퀘이커 교도들, 모라비아주의자들 및 웨슬레의 감리교도들을 망라하는 모든 운동의 ‘종교적 열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국 교회에서는 감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한 인상을 풍긴다. 1907년의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이 회개의 눈물과 함께 상당히 열광적인 현상을 동반했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각종 기도원 및 부흥회 등을 통하여 '뜨거움'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으며 또한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어느 중견 목사 한 분은 한국의 장로교는 모두 '순복음 장로교회'라는 긍정 반 부정 반 표현을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장로교인에게 “교회의 예배가 어떠냐?”고 질문하면 '우리 교회 예배는 뜨겁다'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충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의식한 듯 '그게 어디 성령 충만이냐 감정 충만이지'라고 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또한 기적중지론자가 아니어서 성령의 외적 사역이나 기사와 이적을 인정하는 사람 중에서도, 예배나 집회 시에 지나치게 감정을 쏟아놓거나(?) 신체적 현상이 일어나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종교적인 감정에 대한 바른 이해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 때에 반(反) 부흥파의 대표인 제일교회의 찰스 촌시가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 것도 그 운동이 ‘지나치게 열광적’이라는 것이다. 촌시는 부흥운동을 통해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감정적인 경험에 만족하여 삶 속에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거듭났다고 고백한 수많은 사람들이 곧 믿음에서 떠났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적인 교만에 빠져 기성 교회의 교역자들이나 교인들을 깔보고, 영적인 술에 취하여 주체 못할 축제에 빠질 뿐만 아니라 환상과 비전에 의존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이때 친(親)부흥파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는 일련의 설교들, 특히 『신앙 감정론』("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 1746)에서 부흥운동을 '열광'으로 매도하는 촌시의 논리를 비판하고 종교적인 감정과 체험을 유려한 필치로 변호했다.

필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찰스 촌시나 그의 주장을 따르는 미국의 존 맥아더 보다는 보다 균형 잡힌 에드워즈의 변호에 좀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1899-1981) 목사는,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뱅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할 만큼 에드워즈의 체험신학, 부흥신학 또는 마음의 신학(Theology of Heart)에 반해 있다.

로이드 존스의 말을 들어 보자.

"그(에드워즈)는 체험의 신앙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았다. 그는 마음(heart)을 크게 강조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에드워즈라는 사람을 볼 때 두드러진 사실은 완벽성과 균형이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고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게 되었는가?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람은 신학자이기도 하면서 전도자였다. 그는 또한 위대한 목사였으며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극단적인 칼뱅주의를 반대했으면서도 동시에 알미니안을 반대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오늘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만남이다. 하나님과 나 자신, 이들 "두 실체"만이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고 실제적이다. 참된 덕이나 거룩은 본질적으로 머리보다도 마음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은, 참된 덕이나 거룩은 주로 감정에 있다는 것이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해력이 주는 지식은 소용이 없다. 마음에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변적인 판단도 있지만 그의 신적 속성 때문에 얼마나 친밀하신 분인가를 아는 지각도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저· 서문강 역,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 『청교도 신앙』, 생명의 말씀사, 1992, 366-68).

에드워즈는 제1차 영적 대부흥 당시에 한편으로는 극단에 치우쳐 잘못을 저지른 제임스 데번포트(James Davenport, 1716-1757)와 같은 열광주의자들과 싸워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흥운동을 부정하고 감정을 싫어하는 찰스 촌시와 같은 이성주의적 반(反)부흥파들과 싸워야 했다.

이러한 운동으로 인한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 전의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으로 무대를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18세기 초반의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은 유럽과 미국 전체를 휩쓴 이성주의의 대두와 어업 및 선박건조 산업의 활성화로 교인들은 자기 만족에 차 있었고 신앙생활 생활은 형식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노댐턴(Northampton)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조나선 에드워즈를 선두로 하여 이 지방에서는 새로운 영적인 대각성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명한 설교가인 영국의 조지 휫필드가 1740년 가을에 이 지방에 도착하여, 45일간 40개의 마을을 순회하면서 97개의 설교를 전했을 때 대부흥의 불길은 마침내 활활 타오르고 말았다. 딱딱한 원고 설교만 들어왔던 주민들은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이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휫필드의 설교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며칠씩이나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휫필드의 설교를 듣는 중, 쓰러져서 울부짖거나 심령이 괴로워 괴성을 지른 사람들도 있었다.

댈리모어는 당시 보스톤에서 존경받던 티모시 커틀러 목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기록한다.

“휫필드에 대한 증거는 많다. 그가 야기시킨 혼란은 끝이 없다. 가족이 이웃이 갈라졌다. 아내와 남편의 불화; 애들과 종업원들의 불성실; 교사간의 분쟁; 집회로 인한 시끄러운 밤들; 노동과 사업이 중단되고; 추수가 방치되고 있다. . . .
수많은 집회에서 여러가지 일들--수차에 걸친 설교, 권면 및 기도가 동시에 행해지고--나머지는 울고 웃고 고함지르고 기어다니고 쓰러져 있다. 이러한 흥청거림이 어떤 지역에서는 며칠간 계속되기도 했다” (Arnold A.  Dallimore, George Whitefield, ?)

에드워즈는 대각성 기간 중 여러가지 회심의 양상을 목격하였다.
1741년 가을 경 그는 “괴로워서 또는 너무나 기뻐서 울부짖고, 기절해 쓰러진 사람들로 온 집안이 가득한 경우를 보는 것은 보통의 일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잠잠하던 뉴잉글랜드 지방은 갑자기 왁자지껄해지고 종교적인 일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휫필드는 1740년 10월에 뉴잉글랜드 지방을 떠나면서, 뉴잉글랜드 중부지역의 부흥운동 지도자인 장로교 목사인 길벗 테넌트(Gilbert Tennent, 1703-64)에게 억지로 그 바톤을 물려주었다. 테넌트가 보스톤에 도착했을 때, 그는 휫필드가 남긴 친구들과 적을 동시에 물려 받았다.

반(反)부흥파들은 이미 휫필드가 이끄는 부흥회를 ‘광신적인 집회’로 규정지었고 테넌트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그의 설교가 불화, 반목, 혼란, 중오의 씨앗을 뿌렸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의 독특한 징조들』

에드워즈는 부흥 현상과 함께 부흥 자체를 부정하는 찰스 촌시의 주장에 대항하여 설교를 통해 부흥기간 중에 일어난 여러 가지 영적인 현상을 변호했다.

에드워즈는 각성기간 동안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연구하여 집필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의 독특한 징조들』을 통해 감정적 반응이나 생소한 영적 현상이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는 반대파의 주장을 일축했다 (Jonathan Edwards, The Distinguished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first printed 1741,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에드워즈는 서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영적인 현상에 대해 편견을 가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욕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 . 일부의 편견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일에 대해 바른 소개를 받을 기회가 없었거나 외부로부터 잘못된 소개를 받은 것에 기인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체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기분 나빠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른 틀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어떤 원칙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지지하고 확인해 주기 때문에 현재의 이런 현상들을 싫어한다. 확실한 것은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알미나안주의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자신들이 도구로 사용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 일을 싫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진정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승하고 우리는 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만약 누구라도 이 일을 믿지 않고 비판하고 반대하기로 굳게 작정했다면 그들은 그들을 깨우치고 구조해 주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자비에 자신들을 맡겨야 할 것이다” (같은 책, 83).
 

에드워즈가 행한 설교의 본문은 요한일서 4장1절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그의 설교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도시대에 성령의 능력이 크게 부어져서 사도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크신 사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풍성하게 역사하는 곳에는 사단의 가짜 역사도 활개를 친다. 이 때문에 교회는 이런 것들을 분별한 원칙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영들을 분별할 것인가? 성경은 그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이 말씀들을 통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첫째 모든 것을 쉽게 믿어서 이상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을 경계한다. 둘째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이 세상에서 활약하기 때문에 가짜들이 많으므로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가, 내주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가로 판단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표지가 아닌 것들(No signs) 

에드워즈는 이이서 제1부에서 ‘부정적 표지들’(Negative Signs), 또는 현상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사역의 징후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닌 것들’(no signs) 12가지에 대해 말했다.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분은 "[쓰러지는 현상⑥] 조나선 에드워즈와 쓰러지는 현상"(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44)을 참조 바란다).
 
(*signs을 번역자에 따라 표지(標識), 표징(表徵), 표증(表證)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I. 교회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행해온 그 자체―전통이나 관습―가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 신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예를 들어, 울고, 몸을 떨고, 괴로워하고, 울부짖고, 몸을 흔들거나, 힘이 빠져 쓰러지는 경우―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역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할 때 사람의 몸에서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특히 빌립보의 간수가 좋은 예가 된다(행 16장). 간수는 죄수가 도망갔다는 두려움에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29절). 간수는 바울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두려워 떨었기 때문에 무릎을 꾼 것이다.

3. 소란을 피우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사도시대에 성령이 강하게 임했을 때 ‘지나치다’고 반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성령충만한 소수의 무리가 온 세상을 시끌법적하게 만들었으며 실로 이들이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놓기도 했다(행 17:6).

4.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마음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환상을, 마치 예언적인 환상이나 신적인 계시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천상의 진리인 것처럼 너무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며, 때로는 그 내용이 다르게 판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신적인 것에 대해 생동력 있는 느낌을 가진 것을 살펴볼 때, 그러한 일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들이다.

5. 어떤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물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지만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은 입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신앙의 본을 보임으로써이다.

6. 그러한 영적인 현상을 체험한 사람들이 건방지고 (성격이나 삶이) 불규칙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목적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어떤 사람을 정치가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골고루 부어주시기 때문에 건방지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지근한 신앙이야말로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며 열심은 신자의 덕성 중에서 무엇보다도 훌륭한 은혜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점검될 필요는 있다.

7. 사탄이 가라지를 뿌려서 판단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게 임할지라도 사도들을 감동시켜 정확무오한 성경을 기록한 것처럼 완벽하게 임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애굽의 술사들이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모세를 통한 진정한 기적은 없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사단의 역사로 인해 가짜가 조금 드러났다고 해서 부흥의 현상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8. 어떤 사람들이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말썽 많은 방법으로 집회를 인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가짜가 있기 때문에 진짜가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도시대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떠나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이단에 빠졌다. 이들의 일부는 교사요 직분자요 지도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운동 기간 중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은 개혁에 동참했지만 이후 변덕스럽고,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고, 지나친 열정주의에 빠져, 영적인 체험과 완전함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심각한 잘못에 빠졌다. 그러므로 어떤 운동에 사단이 가라지를 좀 심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9. 어떤 사람이 지나친 열심과 진심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으로 인한 진노를 강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지옥의 두려움과 공포를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하지 않는가? 목회자들이 불신자들에게, 비록 말로는 끔찍한 곳이라고 하지만, 표정도 없이 냉랭한 자세로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그곳을 피하라고 한다면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말은 물론 행동도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표지들 : 성령의 사역이라는 독특한 증거들”

그렇다면 어떤 사역이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라는 독특한 성경적 증거들(distinguishing scripture evidence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즉 긍정적인 표지들(Positive Signs)은 무엇인가?

(어떤 번역본은 neagtive signs와 no signs를 ‘부정적 표지들’과 ‘소극적인 표지들’, positive signs를 ‘적극적인 표지들’로 번역했는데, 필자는 neagtive signs와 no signs를 ‘부정적 표지들’과 ‘표지가 아닌 것들,’ positive signs를 ‘긍정적 표지들’로 번역한다).

에드워즈는 제2부에서 5가지를 제시한다.

1.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어떤 사역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시고,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높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것은 틀림 없이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다.

2. 그것이 죄악적이고 세상적이고 사탄적인 것을 대적하는가?

현재 역사하는 영이 죄를 장려하고 정착시키며, 사람의 세상적 욕망을 부추기는 사탄의 왕국의 이익을 대적하면 그것은 틀림 없이 진리의 영이지 거짓의 영이 아니다.

3.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귀중하게 여기게 하는가?

현재 역사하는 영이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성경의 진리와 신성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역사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4. 그것이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확신하게 하는가?

영을 분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과 “미혹의 영”(the spirit of falsehood)(6절)이 존재하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하는 영이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며 그 진리를 확신하게 하면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고 진실한 영이라고 안전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5.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진시키는가?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하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표지인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부흥 기간 중에 나타나는 격렬한 감정과 신체적 반응 등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부흥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자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에 대해 좀더 신중해졌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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