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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감정③] 교리와 체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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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3  18: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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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③]

교리와 체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명제신학과 체험신학의 조화-

   
 

서구 사람들은 논리와 분석에 치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경의 가르침을 논리화, 추상화 시키는 명제 신학(Propositional Theology)을 개발해 내었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원리화, 교리화 시켜 방대한 교의학(敎義學. Dogmatics) 즉 조직신학을 집대성했다. 자연히 한국의 신학도 이들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필자는 체험적 영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바른 교리를 누구보다 강조하는 사람이다. 필자도 영성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주관화, 신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항상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신학 저서들을 옆에 두고 혹시나 '헛소리'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법정변론적 명제 신학의 폐해

그러나 우리가 이런 명제 신학들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나 신령한 체험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하기 쉽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와 그분'(I-Thou)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I-It)의 비인격적인 관계가 되기 쉽다는 말이다.

불행하게도 명제 신학은 진리의 빛은 있지만 뜨거움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저서를 보면 지성의 똑똑 소리가 나지만 냉랭하여 감성의 따스함은 별로 느낄 수가 없다. 이런 명제 신학은 어쩔 수 없이 논리학을 도입하는데 이 논리학이 '사람 잡는 논리학'이 되기 쉽다.

필자는 미국의 로 스쿨(Law School, 법과대학원)에 다니면서 이런 서구식 논리학의 맹점을 간파했다. 요즈음에는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의 법과대학원의 첫 학년에는 Legal Writing(법무서류 작성)시간이 있다.

첫 학기에는, 어떤 사람이 소송을 의뢰했을 때 법률회사의 하급 변호사가 상급자에게 그 사건에 대한 법률의견서를 작성하는 훈련을 한다. 이때는 양쪽의 입장을 충분하게 고려하면서 상당히 객관적인 견해서(Memorandum)를 작성한다.

다음 학기에는 법정변론서Advocate)를 작성한다. 이때는 객관적인 의견서가 아니다. 상대방의 장점은 무시하고 약점을 침소봉대하면서 자기편의 약점은 최소화하고 장점은 최대화하는 법정변론서를 작성한다. 유능한 변호사는 상대방의 사소한 약점을 잘 물고 늘어져서 배심원의 관심을 끌어 재판을 이기는 사람이다.

오늘날 특히 양당 정치가 발달된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에서도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엄청난 시각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런 논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훈련을 받은 후 신학교에 들어가서 강의를 들었더니 "맙소사. 신학이 바로 법정변론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들의 주장은 가장 성경적이고 다른 전통의 주장은 철저하게 부정하는 논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혁주의 신학만 그런가?
웨슬레의 신학, 성결교의 신학, 침례교의 신학, 오순절 신학도 잠시 보았더니 그들도 제각기 자기들의 신학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기 신학이 좋다는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나무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 것은 옳고 너희 것은 틀렸다는 자세는 문제다.

결국 이런 법정변론적 명제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일부 영성 운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말이나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말꼬리나 단어의 의미를 트집잡아 비판하는 모습을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사이비나 이단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법정변론적 신학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으로 지성은 개발될지언정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영성을 제대로 계발하는 것은 어렵다.

 

‘성경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전통주의자들이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잘 나누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주로 공의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종교개혁가들의 영향이 크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들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부족함이 있는데 문제는 그들의 긍정적인 영향력 못지 않게 부정적인 영향력 또한 지대하다는 점이다.

-신관(神觀)의 왜곡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감히 가까이 근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인식해 왔다. 그 결과 후계자들은 이런 신관(神觀)이 신자들의 삶과 너무나 괴리가 있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언약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키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을 개발했다.

언약의 핵심은 사랑이다(신 6:4-5).
그런데 이 언약신학 자체도 그 자체의 경직성으로 인해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공의의 하나님을 부각시켜 신자들을 율법적이고 냉랭하게 만들어 버렸다.

번 포이트레스 교수는 『과학과 해석』(Science & Hermeneutics)에서 언약신학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오해와 결함을 지적하면서,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언약이라는 계약적인 측면은 물론 아버지와 자녀라는 가족적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가족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자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자녀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종교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에도 많은 장로교회에서는 예배도 조용히, 끽 소리를 내지 말고 드려야 한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아멘’도 하면 안 되고, 예배 중에 손을 들거나 손뼉 치는 것을 경망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신관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분명히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주권적이시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죄인인 우리는 감히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께 근접할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자 자녀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시 68:3).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랑이신 하나님

루돌프 오토가 『거룩에 관한 아이디어』(The Idea of Holy)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 체험은 두렵고 떨리게 하는 하나님과 이끌리고 매혹되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지닌다.

그에 의하면 참다운 하나님 체험은 거룩 체험의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가지는 두렵고 떨리는 체험, 피조물을 태워 버리고 멸절시켜 버리는 권능 체험, 인간의 허무, 무기력, 죄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체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한낱 한 줌의 흙이요 재에 불과하다는 체험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철저한 존재론적인 거룩 체험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도덕적이고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행사로 전락하고 만다.

다른 한 가지 체험은 매혹되어 이끌리는 (사랑) 체험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 감사이고 압도당하는 체험, 한없는 매혹과 영광으로 이끌리는 체험,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안식하고 뛰어 놀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체험을 말한다.루돌프 오토는 참다운 하나님 체험은 이 두 가지를 통해 회개하고 변화 받는 체험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유비(類比. Analogy)

더군다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왕과 백성, 아버지와 자녀 및 목자와 양의 관계로 그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만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관계 즉 신부와 신랑의 관계가 빠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이 단지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의 일부로만 취급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하나님의 속성의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인데 겨우 '선하심'(Goodness)의 한 부분으로 취급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자인 도날드 맥크레오드는『당신의 하나님을 바라보라』(Behold Your God)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사랑을 경시한 개혁 신학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2. 하나님은 감정적인 분이시다”를 참조하라).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는 기뻐한다고 말씀하셨다(마 9:15).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처럼 그 비밀이 크다(엡 5:32). 이 관계를 가장 감미롭게 묘사한 책이 아가서이다. 아가서는 사람의 성(性)의 구속을 기록한 책이기도 하지만 교회인 성도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개인적이고 친밀한 것임을 증거한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은 상당히 감정적이고 성애적인 것들이다.

신부인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님과 가지는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도 상당히 감정적이다. 성경은 우리와 예수와의 관계를 '안다'(know)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이 단어도 지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 이해해 왔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경 지식과 동의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성경 공부 많이 하여 성경 지식 많이 알고 제자훈련 많이 하여 행위를 제대로 하면 하나님을 잘 알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과연 그런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구분

저명한 보수신학자인 J. I.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다.
신학, 신앙고백, 하나님에 대한 주제들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많은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친교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경건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외적인 경건의 행동을 할 수가 있다고 패커는 주장한다.

성경이 말하는 '안다'라는 말은 지식적이고 의지적인 측면도 있지만 관계적이고 체험적이고 친밀한 측면도 있다. '안다'의 히브리어인 '야다'는 아담과 이브가 동침하다 는 말에도 사용되었다(창 4:1).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부부가 성 관계를 가질 정도로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안다'는 말이다. 이것은 관계적이고 체험적인 앎이지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앎이 아니다.

신약에 와서는 '안다'는 말에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기노스코'이고 다른 하나는 '오이다'이다. 오이다는 기노스코 보다 완전한 지식을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알아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시는 것만큼 잘 알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알고(오이다)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 8:55).

물론 기노스코가 지성적인 앎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지식도 많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 지식 많이 아는 것이 곧 성경이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친밀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이 앎은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아내나 남편을 잘 알기 위해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따는 사람이 있는가?  부부가 동행하면서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나누면서 서로를 잘 알아 가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이런 지식을 말한다. 이런 지식이 있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요 구원을 받는 자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5).

이런 지식이 있는 자가 곧 예수님께 알려지고 구원을 받는 자이다. 큰 능력은 행하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들(마 7:23), 신랑을 맞이하러 가면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들을(마 25:) 예수님은 '모른다'(not know)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런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배설물로 여겼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

왜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하고, 전통, 학식을 자랑하는가? 이런 지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런 지식이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훌륭하기 때문에 미련 없이 세상 것들을 버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기의 대(大) 신학자이다. 개신교에서는 별로 알아주지 않지만 천주교의 거의 모든 교리가 그의 『신학대전』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을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신학자이다. 그는 사람이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그런 그가 그만 죽기 얼마 전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대전』 집필을 중단했다. 친구들이 완성할 것을 누차 강요하였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난 하나님에 비하면 나의 작품은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런 지식을 더욱 많이 가지기를 기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신앙 성장은 곧 이런 지식에 자라가는 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또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관상기도-임재기도-이다.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알아갈 수 있다. 뛰어난 영성가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을 사모하고 이런 지식에 자라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중심의 신앙과 체험 중심의 신앙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회사 교수는 (칼뱅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부분의 장로교 중심의) 개혁 전통과 다른 전통을 비교하면서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교리를 중시하지만 저들은 체험을 중시한다.”

물론 개혁 전통에는 좋은 점이 많지만 필자는 교수의 이런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교리냐 체험이냐”는 잘못된 이원론의 발로이다. 구원에 필수적이고 일차적인 교리가 아닌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교리의 경우, 이는 “교리냐 체험이냐’의 이원화가 아니라 많은 경우 “무체험에 근거한 인간의 논리에 의한 교리”냐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성경적 교리”냐의 구분이 더 맞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개혁 신학이 말하는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교리의 대부분도 알고 보면 실질적인 영적 체험이 없는 학자들이 상아탑에 앉아서 사변적, 논리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많다. 그래서 자기들은 ‘바른 교리’하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인간이 만든 논리”에 불과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기적중지론, 귀신 쫓는 것도 사도시대에 끝났고 *신자는 귀신 들리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 신자는 믿을 때 성령을 받았으므로 다시 구할 필요도 없고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면 신비주의자이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면 은사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주장들이 사실은 무체험을 근거로 한 잘못된 교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떻게 성령과 악령이 한 몸에 거주할 수 있는가’, ‘마귀는 보혈의 선을 넘지 못한다’는 논리로 신자가 귀신 들리는 것을 부인한다. 그렇다면 죄와 성령은 어떻게 한 몸 안에 공존하고, 신자도 죄를 짓는데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보혈의 선을 넘는가? 이런 것은 논리가 아니라 성경적으로 풀어야 한다. 성경 대로, 하나님이 이 둘을 공존하게 허용하셨다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줄은 모르고, 자기들 식으로 하면 말씀 중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체험 중심이라고 잘못 비판하는 것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것이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오늘날에도 영성 사역과 능력 사역을 강조하면 “왜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신비 경험과 (외적) 능력 중심, 체험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느냐?”면서 은근히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면서 마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이란 바른 교리를 고백하고 “말씀, 말씀”이라고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되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 체험보다는 교리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이란 실제로는 사변적인 교리와 고백 중심, 프로그램 중심, 무체험 중심의 신앙 생활임을 곧 알 수 있다.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의 원래의 뜻은 성경 중심의 신앙 생활, 더 나아가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말한다. 그러므로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고, 예배 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한다.

또한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말씀이 이렇게 가르치고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기도도 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고 구제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과연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인가? 아니다. 그런 생활은 행함이 없는 죽음 믿음의 삶이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체험이나 열정도 없이 냉랭하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삶이 과연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인가? 아니다. 이런 생활은 고백과 교리는 바를지 모르지만 건전한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바른 삶이 따르지 못하는 냉랭한 죽은 정통의 삶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한편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체험 중심의 삶”은 과연 비성경적인 것인가? 사실 체험 중심이 아닌데도 자기들의 체험이 없으니 “체험 중심”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삶에 더하여 성경이 말하는 영적 체험도 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가지는 영적 체험 또한 말씀의 적용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을 초자연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신의 삶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고향을 떠났고, 야곱은 돌 베개를 하고 자면서 신령한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요셉도 꿈과 환상을 통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오랜 연단을 거쳐 그 꿈이 실현되는 축복을 누렸다.

구약의 인물은 물론 신약의 인물들도 소위 말하는 신령한 체험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했고 천국에 가는 신비적 체험도 맛보았다.

이런 예는 성경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어거스틴, 폴리캅 등과 같은 교부들은 물론 수많은 주의 사자들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주님께 크게 영광 돌린 사람들이 많고, 오늘날에도 많다.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변화되고 주변을 변화시킨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사람들은 "오. 그런 체험은 구속사적으로 특수한 시대에 산,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체험이죠. 이제 우리는 온전한 성경이 있기 때문에 그런 체험이 필요 없죠. 우리는 실제로 체험한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내용을 믿기만 하면 되죠"라고 말한다.

성경 어디에 이런 주장이 있는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늘날 이런 거짓 주장을 하는 자들이 오히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뽐내고 있는 우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특수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이 구속사적으로 특수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도들이나 성경의 인물들이 체험한 것을 오늘날의 우리들이 체험하지 못한다는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의 무체험을 변호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고 성경의 인물들을 신격화, 우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위대한 구속 사역을 감당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권적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대한 구속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말씀과 전통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지향하는 예수님을 모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기록된 성경 말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그것이 지향하는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우리가 그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이 그 목적이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가 따라야 할 가르침과 명령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인격체이신 예수님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없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교리나, 지켜야 할 명령에만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신앙은 율법주의, 사변주의, 형식주의에 이르기 쉽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냉랭함, 열정의 부족, 세속주의, 전통주의,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교회나 사역의 행사에는 온갖 인간적인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있다. 말씀의 내용은 알지만 정작 말씀이 지향하는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고 그런 식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신앙 생활은 “말씀 중심”이 아니라, “교리 중심,” “고백 중심,” “전통 중심,” “무체험적인 지식과 외적 행동 위주의 신앙생활”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들의 신앙 생활은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들이 말하는 대로 진정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말씀이 가르치고 명령하는 것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말씀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도 누리면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초월적인 체험도 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기사와 이적도 행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인물들이 이렇게 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렇게 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신비 체험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도 행하면서, 성령의 가르침과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진정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이 고질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사회 구석구석에 인종차별의 잔재가 깊게 깔려 있다. 국가에서 워낙 강력하게 인종 차별을 법적으로 규제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삶의 전 분야에서 인종 차별의 뿌리가 아직도 만연하다.

교회라고 예외일까? 아니다. 소위 말하는 주류 교단-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루터교, 성공회 등-의 교회에 가보면 대부분의 경우 백인은 백인들끼리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성령 운동하는 교회는 대부분의 인종이 혼합되어 예배를 드린다. 필자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다. 언젠가도 어느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안내원이나 성가대원들의 상당 수가 흑인들이었다. 필자는 속으로 궁금했다. 담임 목사가 백인일까, 흑인일까? 그렇다고 교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교회를 소개하는 조그만 팜플렛을 보아도 목사의 이름만 나와있으므로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소개하는 것을 보니 담임 목사는 백인이었다. 그렇지만 흑-백이 구분이 없이 성령 안에서 서로가 하나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주류 교단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얼마 전 미국의 주류 교단이 연합하여 인종 차별을 없애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인종간의 연합을 다짐했다. 그러나 수백 년간 몸에 배여 온 인종차별이 성명서 한 번 발표하고 대회 한 번 개최하고 위원회를 조직한다고 해서 단단한 장벽이 무너질까?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의 단합대회나 조직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도행전 8장에서 유대인이 원수로 여기는 사마리아인과 하나가 되고, 10장에서 유대인이 개 취급하는 이방인이 하나가 되듯,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체험을 통해 인종과 배경을 뛰어넘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인간적인 의로 이런 일을 할 때 여기저기서 삐거득거릴 것이다. 소속 교단의 정체성, 교단 규모의 대소에 따른 목에 힘주기, 교리에 대한 배타성, 사소한 용어의 사용 트집,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인해 겉으로는 연합과 일치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다른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늘 삐거덕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체험을 하고 한 성령 안에 거해 보라. 교단이나 (부수적인) 교리의 차별성이 얼마나 부질없고 별 볼일 없는 것이란 걸 절감하고, 하나님은 진실로 위대하신 하나님, 인종과 교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임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성경적 신비 체험을 하면 이런 일은 물론 다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한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이 제발 성경적 신비 체험, 하나님의 사랑 체험을 좀 하기를 바란다. 그럴 경우 이전에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부한 것이 얼마나 자기 교만과 자기 의와 영적 무지에서 생긴 잘못된 발상인가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명제 신학은 신앙의 뼈대이자 기초이다. 기초가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관계를 가지고 아무리 신령한 체험을 해도 오히려 문제만 일으킨다.

한편 아무리 좋은 신학을 가지고 바른 교리를 가졌더라도 실질적 체험이 결여되면 지적 교만이 생겨 '자기 의'에 차서 스스로 만족하는 바리새인들을 양산하고, 자기들과 조금만 다른 주장을 하면 정통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법정변론적인 명제 신학의 칼을 내려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영혼은 메말라서 처음 사람을 잃어버리고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져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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