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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감정②] 하나님도 감정적인 분이시다-예수님도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시고 기뻐하신 분이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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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30  15: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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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②]

하나님도 감정적인 분이시다
 -예수님도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시고 기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고통이나 기쁨을 느끼는 감정을 가지셨는가?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아니오”(No) 라고 대답했다. 이들은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감정에 좌우 받지 않는 감정이 없는 분으로 생각했다.

정통교회 최초의 회의인 칼세돈 공회(주후 451년)는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실 수 있다’는 주장은  헛된 지껄임에 불과하다고 정죄했으며, 칼뱅을 포함한 이후의 종교개혁가들도 하나님은 무감각하거나 감정이 없는 분(impassibility)이라고 가정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하나님은 몸과 지체가 없으시며, 감정(passions)도 없으시고, 변치 않으시는(immutable) 분’이라고 표현했다. 초대교회 이래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해 왔으며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개혁신학자인 도날드 맥크레오드는 그 결함을 지적한다.

"첫째 문제는 신론(神論)을 형성하는데 사용된 언어의 사용에 있다. 그것은 대부분이 비성서적이며 주로 라틴어를 사용한다. 단순함(simplicity),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aseity), 광대무변(immensity), 단일성(unity), 불변성(immutability), 무한(infinity), 전능(omnipotence), 전지(omniscience), 무소부재(omnipresence), 공의(justice) 등이다. 문제는 이러한 단어들이 성경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생긴 말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뛰어난 성경적인 개념 (사랑)이 스콜라주의의 교리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헵의 저서를 읽으면서,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라는 생각을 결코 할 수가 없다.

부른너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개신교 스콜라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선 지나치게 결핍되어 있다’는 지적은 절대적으로 옳다. 불행하게도 이후의 개혁주의 교의학(조직신학)도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지는 못했다.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속성의 목록 중에 사랑을 언급하지도 않으며(답4) (개혁신학자인) 카녹이나 바빙크의 저서에는 사랑에 대한 장(chapter)이 없다. 이들은 하나님 사랑을 하나님의 ‘선하심’의 부제(副題)로 취급한다.

이러한 일은 신약이 강조하는 것을 정당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에서, 사랑(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언어이다)은 십자가의 지상 메시지이며, 선택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속성의 핵심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교의학은 이단적이고 불균형적인 가르침에 대한 책임이 있다" (Donald Macleod, Behold Your God, Christian Focus Pub., 1990, 13).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잡지도(1997. 2. 3) 전통적인 견해의 잘못을 비판한다.

다음은 잡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는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은 사랑하시는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아브라함 헥셀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고통을 느끼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내주(Indwells)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고통을 나누어 가지셨다.

친구나 인척이 서로의 기쁨이나 고통의 감정을 나누어 가지듯,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감정을 나누어 가지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들의 친구나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도 함께 느끼신다.

만일 하나님이 감정이 없는 분이라면 우리는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는 분이라고 기록한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나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일듯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호 11:8-9).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처럼 감정적이거나 좌절하거나 실망한 진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를 조금도 참지 못하시는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속성은 ‘행동하는 사랑’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것들에 대한 진노이다.

만일 하나님은 감정이 없는 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성육신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는 분이 아니라면 진정한 십자가의 고난은 있을 수가 없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성(humanity)이 고통을 당하셨지 신성(divinity)이 고통을 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의 양성을 분리시켜서 단일성을  부정하는 이단 사상인 네스토리안파(nestorianism)의 잘못을 저질렀다.

존 어스틴 베이커가 말하듯,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이 세상이 목격한 하나님의 정확한 모습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곧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는 하나님이시다.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마틴 루터는 예수님의 신성도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고통을 당할 수 없는 분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너무나 나약한 것이라는 루터의 말을 칼뱅주의자들은 경청해야 한다.


감정이 없이 홀로 멀리 떨어져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복음전도에도 큰 위력을 발휘한다.

온타리오 신학교 교수인 데니스 기엔의 간증에 의하면, 그는 공산독재 치하에서 40여년간 고통을 당해온 체코의 정부관리 한 명과 비행기에 동승했다. 그 관리는 40여년간 그와 가족들이 당한 고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었다. 체코 관리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찰할 까지 하나님을 비난하고 저주했다.

그는 친척이 선물한 예수님의 그림―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림―을 벽에 걸어 놓고 있었는데 그는 그 그림을 진한 케이크로 떡 칠을 해놓았다. 그 때 데니스 기엔은 그 그림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고통을 받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체코 관리는 일생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곧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생명을 예수님에 맡겼다.

체코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내가 눈물을 흘릴 때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고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기쁨은 물론 고통도 함께 나누시는 분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감정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예수님은 감정이 풍부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화를 내셨고, 진노하셨고, 마음이 상하셨고, 슬픔을 당하셨고, 고통을 당하셨고, 마음이 크게 동하셨고, 눈물을 흘리셨고, 때로는 통곡도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고, 사랑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측면을 너무나 무시해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가지셨으며  동시에 감정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보이신 감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속성(성품)이기도 하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긍휼이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셨다 고 기록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사람의 속 내장이지만, ‘가슴이 메어진다’, ‘머리가 핑 돈다’는 말과 같이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누구를 민망히, 긍휼히, 불쌍히 여기셨는가?
문둥병자(막 1:40-41), 독자를 잃은 과부(눅 7:13), 두 소경(마 20:34) 등과 같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버려진 채 고통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부터 나온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를 하신 후 문둥병자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다(막 1:35-42). 홀로 한적한 곳에 있으실 때 무리들이 물려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마 14:13-14). 홀로 한적한 곳에 계실 때 예수님은 감정적인 수용상태에 계시면서 능력을 받으셨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은 그들을 버린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진노의 형태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막 3:5).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율법을 거스리는가의 여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또한 분하게 여기셨다.
제자들이 자신들을 내세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박대했을 때,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막 10:16). 우리들이 분을 내는 것은 주로 자신의 이익에 도전을 받았을 때이며 그 결과 마음 속에 앙심을 품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내지만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화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은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고는 슬픔에 잠겨 우셨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가에서도 우셨다(요 11:35).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심령에 통분히 민망히 여기셨다 (요 11:33).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 중에 한명이 배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는 마음이 매우 고민스러워 지셨다(troubled in spirit).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슴이 메어지고 통분하는 기도를 하셨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마 26:38)고 말씀하셨다.

통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자주 쉽고 빠르고 고통이 없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패스트 푸드(Fast Food)같은 복음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자주 고난을 받는 분으로 표현되지만 기쁨을 가지신 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눅 10:21). 이 말은 점잖게 미소를 띄었다는 말이 아니다. 70 제자들이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하셨다.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계시를 전하신 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 15:11; 17:13).
 

고난의 예수님은 동시에 기쁨의 예수님이시다.
슬퍼하시고, 우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고난과 슬픔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풍부하신 예수님을 본 받아 그의 형상으로 변해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후 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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