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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감정①] 이성은 고상하고 감정은 저급한가?-감정은 저급한 것이 아니라 이성, 의지와 함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 값진 선물이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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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6  17: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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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감정①]
 

이성은 고상하고 감정은 저급한가?

 -감정은 저급한 것이 아니라 이성, 의지와 함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값진 선물이다-
 

   
 

장면 1
200x년 서울, 남북 이산가족 찾아주기 현장.6.25 민족 상잔의 비극으로 수 십 년 동안 갈라진 이산 가족이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즈음하여 다시 한 번 상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무려 반 세기 만에 만난 이들. 젊은 부모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해졌고, 코흘리개 아들 딸들이 장성한 어른이 되어 나타났다. 이들은 쌓이고 쌓인 회한과 오열을 감추지 못해 서로 부둥켜 안고 얼굴을 비비며 울부짖는다. 꿈인지 생시인지 기뻐서 울고 한이 맺혀 운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내 누이 내 형제, 행방불명 되었던 내 자식과 내 부모를 수 십 년 만에 만났을 때의 감격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장엄하게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잃어버린 혈육, 반 세기만에 만나다."

이산 가족들의 오열과 포효를 비 정상적이거나 광신적인 감정의 발로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얼마나 인간적인가?”

너무나 인간적이고 당연한 감정의 표출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헤어졌던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집회에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말썽이 된다.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진다.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병적인 심리 현상이다.' '마귀의 장난이다.'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나쁜 형용사가 다 따른다.

장면 2
200x년 월드 컵 축구 경기가 시청 앞 대형 TV에서 중개되고 있었다.
피 말리는 접전 끝에 우리 팀이 결정적 한 골을 넣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환성을 지르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부둥켜 안기도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열광하면서 기뻐하고 춤추면 ‘망정 맞다’, ‘질서가 없다’, ‘광란이다’면서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서양은 신사도에 의해서 한국은 유교사상에 의해서 감정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고 감정 표현을 억제한 결과 엉뚱한 곳에서 감정이 분출된다. 한국인들은 낮에는 점잖은 체하다가 밤이 되어 유흥소나 노래방에 가서는 신분이나 학력에 상관 없이 “얼씨구 절씨구, 니나노”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저명한 학자나 정치인이 성추행으로 타락하고, 차분한 지성인이 잔인한 악을 행하는 것을 문학 작품은 물론 현실에서 많이 본다. 이성 훈련은 극대화된 반면 정서 훈련이나 감성 훈련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의 '완전 타락'(total depravity)을 주장한다. 완전 타락이란 사람이 타락하여 짐승같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전 영역이 골고루 타락했다는 말이다. 인격체의 기본 요소인 지성, 감정, 의지가 골고루 타락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성과 의지는 믿을만하고 감정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종교개혁가들의 이런 영향이 오늘날 교회에도 깊이 침투하여 감정적인 것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한다.

기적중지론을 반대하고 오늘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배나 집회 시에 감정이 고조에 달하고, 갖가지 신체적 현상이 일어나면 눈쌀을 찌푸리거나 지나치다면서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감정은 에너지다

감정이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제대로 분출되지 않으면 억눌린 감정이 폭발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오늘날 관심을 끄는 내적치유의 주제가 바로 상한 감정과 나쁜 기억의 치유다.
미움, 억눌림, 버림받음, 억울함, 증오심, 외로움, 용서 못함의 감정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사랑, 사람의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른 교리를 고백하고 바른 행위를 하기만 하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바른 감정, 바른 체험이 결핍되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감정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감정적인 사랑의 관계를 갖고 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서구 신학은 '중산층 백인 남성신학'이라고 한다. 중산층 백인 남성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이 대학 교육을 마친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이다.  
 

칼뱅도 『기독교강요』에서 성령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조명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고 말했다. 감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의 후예들은 그의 가르침을 본받아 지성과 논리를 중시하고 성경도 그렇게 해석하여 오늘날 찬란한 신학 전통들을 이루어왔다.

칼뱅은 ‘감정’을 정서가 아니라 ‘변덕’이라 이해했다. 이후 후계자들도 이런 주장을 착실히 전수해왔다. 더군다나 이성주의, 계몽주의가 꽃을 피우던 당시 뛰어난 논증가인 프란시스 튜레틴, B.B. 워필드, 찰스 핫지 등이 개혁신학의 뼈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부흥 보다는 교리’, ‘감정이나 체험보다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운다.

언젠가 어느 보수계통의 목사에게 필자가 "은혜 받고 성령 체험했다"니까 "그것은 '감정적인 것'(emotional)이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대응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만 이해한다.

과연 그래야 하는가?
인간의 전적 타락설은 인간의 감정은 물론 이성, 의지 및 양심 모두 타락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감정이 이성과 의지보다 열등하다는 말인가? 과연 그런가? 이성은 믿을만하고 감정은 믿을 만하지 못한가?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런 주장이 통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성을 한껏 치켜세우던 서구 철학은 몰락했다. 이성이 뛰어난 인간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이성에 대한 회의의 수준을 넘어 패닉(공포)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성령사역 대적자들은 아직도 수백 년 전 이성시대에 정립된 신학으로 현대의 성령운동을 난도질하고 있다. 시대착오라도 유분수지.
 

오늘날 발달된 뇌과학이나 심신의학에 의하면, 감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이성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정설이 되고 있다. 사람이 결단을 내릴 때 뇌 속에 감정의 홍수가 일어난다. 특히 위험 상황이 닥칠 때는 누구나 공포 회로가 자동적으로 반응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또한 감정이나 정서가 풍부하지 않으면 이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도 감정을 중시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무시되거나 등한시 되었다.

강준만은 『감정 독재』에서 ‘이성은 기껏해야 감정의 졸(卒)이거나 호위 무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강준만은 분노,슬픔,두려움,즐거움,사랑,놀람,혐오, 부끄러움 등 8명의 가족과 그밖의 여러 식객을 거느리고 있는 감정은 한마디로 말해 ‘행동하려는 충동’ 이라고 말한다. 행동하려는 경향성이 모든 감정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캐나다 신경학자 도널드 칸(Donald Caine)은 “이성은 결론을 낳지만 감정은 행동을 낳는다”고 말했다.

일찌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인간은 동정, 사랑, 공포, 증오 등에 더 영향을 받는다며 이성을 “감성의 노예”라고 했지만 이런 주장이 당시의 주류적 견해이기는커녕 그의 책은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18~19세기 내내 이성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찬하는 신도들의 수는 늘어갔지만, 동시에 소수나마 이성에 대한 회의와 도전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rational being)라기보다는 ‘합리화 하는 존재’(rationaIizing being)라는 걸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강준민은 말한다.
 

성경을 보면, 종교 지도자나 대적자들이 표면적으로는 교리적 이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시기와 분노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을 알 수 있다. 미운 털이 박히면 교리나 논리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 5:1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행 19:28).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한 책이 바로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쓴 『데카르트의 오류: 감정, 이성 그리고 인간의 뇌』(Antonio Damasio,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Putnam, 1994; revised Penguin edition, 2005)이다.

이 책은 이성과 감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왜 이성까지도 파괴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한다.

30대의 비즈니스맨인 엘리엇은 어느 날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대수술이었지만 기억, 언어, 운동, 시각은 정상이었고 생활에도 큰 지장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엘리엇은 정상적으로 의사 결정을 못하고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반복해 결혼, 직업, 인간관계, 사업이 모두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사고로 인해 감정 뇌가 현저하게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풍부해야 이성도 제대로 작동한다는 말이다.
감정이 풍부하지 않으면 사람이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사회생활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만 보고 이론에만 밝은 전형적인 샌님들의 모습이다.
 

현대는 우뇌시대, 감성시대, 영성시대이다.
오늘날 전통적 교회는 이성과 교리에 치중하고 감성과 정서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결과 머리와 귀는 크고, 가슴은 차고, 손과 발은 마비된 기형신자들을 속출하고 있다.

감성과 초자연적 체험이 풍부한 성령운동은 현대인들의 이러한 요구를 잘 채워준다. 왜 현대인들이 불교, 명상, 뉴에이지, 요가에 탐닉하는가? 학력이 높은 그들에게 논리적이고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책 몇 권만 보면 된다. 평신도들도 주석성경을 보고 원어로 성경을 보는 시대이다. 그들은 이제 느끼고 참여하고, 인간의 이성이 주지 못하는 초자연적 체험을 사모한다.

성령운동은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를 잘 채워준다. 이전의 성령 운동에는 못 배운 자, 못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요즈음에는 지식인들이나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든다. 당연한 현상이다.
 

감정과 감정주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는 감정주의(emotionalism)에 대하여 이렇게 항변한다.

"더러는 우리가 너무 감정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감정적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교인을 잃고 있다. 우리는 교인들의 생각을 잡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들이 믿음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  목사는 "이 말씀을 믿으시오"라고 만 하면 그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고 확신하는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아무것도 '느끼지'(felt) 못하는 것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두려워하여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워드 라이스도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에서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

"자신을 칼뱅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다수의 칼뱅의 추종자들은 바른 교리의 공식에 대한 동의로서의 믿음과 신뢰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분리시킨 잘못이 있다.

믿음에 의한 구원으로 알려진 것이 자주 (교리적으로) 바른 믿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왜곡되어 온 결과 신자들의 생활은 바른 교리에 대한 동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일단의 명제에 대한 합의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는 설득으로서의 믿음, 헌신으로서의 믿음, 내적인 증거나 확신으로서의 믿음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한 재발견으로 인해 우리는 또한 감정과 사고의 균형을 이루어 '느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으로 인도될 수 있다."

 

미국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기독교 감정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감정론』(On Religious Affections)에서 "진정한 종교는 상당 부분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인 감정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그는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이 없는 사람은 종교라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변덕과 전인적 감정의 구분이 필요

일반적으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의 감정과 일시적인 변덕의 구분을 하지 못하여 감정 자체를 매도하는 경향이 짙다.

어느 유력한 성경공부 교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구원을 받은 사실을 감정으로 측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에 의해 믿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 되겠지만, 인간의 고유한 감정과 일시적인 변덕을 구분하지 않고 통틀어 감정이라고 표현하여서 순진한 신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신약신학자인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는 『기적』 강의에서 "인간의 감정이 저급한 것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편을 주셨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감정을 경시하는 이성주의자들의 실책을 이렇게 경고한다. 그는 이어서 "개혁신학자인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는 스토아학파(극기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고 덧붙였다.
 

왼쪽 뇌와 오른 쪽 뇌의 역할

사람의 뇌에는 두 개의 뇌반구가 있으며 서로의 기능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과학이 발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티 에드워즈(Betty Edwards)에 따르면, 왼쪽 뇌는 말을 사용하여 이름을 말하고 묘사하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언어표현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 반해 오른쪽 뇌는 사물을 인식하지만 언어표현 능력은 없다고 한다,

왼쪽 뇌는 분석적이어서 사물을 한 단계씩 그리고 한 부분씩 이해하지만 오른쪽 뇌는 종합적이어서 사물을 합쳐서 전체로 형성한다. 왼쪽 뇌는 추상적이어서 아주 소량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전체를 표현하는 데에 그 정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오른쪽 뇌는 유비적(類比的)이어서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느끼고 비유적인 관계를 이해한다.

왼쪽 뇌는 이성적이어서 이치와 사실에 근거하여 결론을 끌어낸다. 이와는 정반대로 오른쪽 뇌는 비이성적이어서 자발적으로 판단을 중지한다. 왼쪽 뇌는 논리적이어서 수학적인 공리나 잘 언명된 논증과 같이 논리를 토대로 하여 결론을 끌어낸다. 그러나 오른쪽 뇌는 직관적이어서 예감이나 감정이나 눈에 보이는 이미지같이 불완전한 장식에 토대를 두고 종종 비약적인 통찰을 한다.

인간의 뇌의 이원적인 측면이 성경에 대한 이해나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어떤 도전을 주는가? 전통적인 성경 해석이나 적용은 주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왼쪽 뇌의 기능을 최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이성을 중시하는 헬라적 방법이다. 그러나 히브리식은 보다 직관적이 종합적이고 경험적이다.

존 씽크스는 『왼쪽 뇌에 설교하기』에서 "교회에서의 이야기는 왼쪽 뇌의 사고로 가득 차 있다. 즉 그것은 바로 신학적인 것이다"라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왼쪽 뇌와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오른쪽 뇌의 균형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
 
왼쪽 뇌의 기능에 치중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바른 교리와 지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한다. 그러나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주로 오른쪽 뇌의 기능을 강조한 것 같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이성을 중시하여 왼쪽 뇌의 기능에만 치중한 것 같고 은사주의자들은 감정이나 경험을 중시하여 오른쪽 뇌의 기능에 치중한 것 같다.

반(反)성령파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성령운동파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들이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성이 비대하고 감성이 빈약하면 비판과 분석을 잘하지만 행동력이 결여되어 ‘죽은 정통’을 낳고, 감성이 비대하고 이성이 빈약하면 열정은 있지만 알맹이가 결여되어 ‘냄비 신앙’을 낳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신학과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왼쪽 뇌냐 오른쪽 뇌냐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두 뇌반구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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