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역•선교 > 기도
[관상기도 특집④] 관상기도는 영지주의가 아니다인간의 지식과 성령이 주시는 지식은 서로 다르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5.13  13:49:1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관상기도 특집④]
 

관상기도는 영지주의가 아니다

-정이철, 김재성의 잘못된 관상기도관 비판 :

‘영성’이란 단어 사용은 무방하고 
‘관상적 앎’은 ‘영지주의적 지식’이 아니다

 

   
 
   
 

정이철의 천방지축 같은 행각은 영성훈련과 관상기도에도 미친다.
함량 미달의 글을 보고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본인이 『바른 믿음』이란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놓고 무엇이 있는 것처럼 버젓이 글을 올려놓고 있길래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관상기도를 영지주의라 주장하는 김재성(국제신학대학원 부총장)을 비판하고 관상기도를 반(半)펠라기우스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승구(합신대 교수)의 글은 다음 글에 비판하고자 한다.
 

-정이철, “영성운동의 바탕은 영지주의-뉴 에이지 :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 집중하는 영성수련의 끝은 귀신체험.” 『바른신앙』. 2014.12.31

-김재성. “영성신학, 성경보다 인위적 방법 치중”. [심층기획] 현대 성령운동 진단 ⑦ / 흐름과 문제점들. 『교회와 신앙』. 2006.06.22).
 

첫째, ‘영성, 영성 훈련이란 단어가 성경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

정이철은 물론 김재성과 같은 골수 장로교 신학자들은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 보다는 ‘경건’(piety)이란 단어를 선호한다. 물론 성경에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깔뱅이 말하는 ‘경건’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성’에 비해 다루는 범위가 훨씬 좁고 만일 ‘경건’이란 단어로 하나님의 구원과 신자의 성화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을 설명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성경의 다른 표현은 어떻게 되는가?

-신자의 삶은 믿음에 자라가는 삶이다
-신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삶이다.
-신자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한다.
-신자는 경건의 연습에 힘써야 한다
-신자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자는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을 늘 새롭게 되어야 한다.
-신자는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가야 한다
-신자는 세상을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자의 싸움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악령들과의 싸움이다.
-신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신자는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돌봐야 한다
-신자는 사회 부조리를 타파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다스리고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비판자들이 선호하는 ‘경건’(piety)이란 단어 하나가 신자의 성화의 이러한 다양한 측면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일부에서는 영성을 ‘인간의 내면적이고 초월적인 면’을 다루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요즈음에는 개혁주의 영성, 웨슬레안 영성, 가톨릭의 영성, 불교적 영성, 힌두교 영성, 뉴에이지 영성, 개인적 영성, 사회적 영성과 같이 앞에 형용적 표현이 있어야 할 정도로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미 잘 알려진 '영성'이란 단어가 함의하는 바가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미 [관상기도 특집①]에서 밝혔지만 한국이나 외국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지만 이미 보편화된 ‘영성’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교보문고 검색란에 [영성]이란 단어를 쳐 넣으면 ‘영성’이란 제목을 포함한 개신교 저서들이 많이 검색되는데 그중에는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회자의 저서들도 더러 있다.

김영한. 『개혁주의 영성의 기초-개혁주의 영성 총서1권』
나용화. 『영성과 경건』
장경철. 『삼색 영성』
알리 맥그라스 지음. 김남준 추천. 『종교개혁시대의 영성』(Roots that refresh: A celebration of reformation spirituality).
하워드 라이스.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
 

그런데 정이철은 "영성운동의 바탕은 영지주의-뉴 에이지.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 집중하는 영성수련의 끝은 귀신체험"이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영성수련의 끝은 귀신 체험이다. 그러나 정이철은 여기서 세상적인 영성수련이 아니라 개신교 영성수련의 끝이 귀신 체험이라고 몰아간다. 그렇다면 위에 예로 든 신학자들이 말하는 영성이나 영성수련도 귀신 체험으로 끝나는가? 무식과 만용도 유분수지. 아무리 무식하고 영성수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어떻게 이런 극단적 표현을 할 수가 있는가?

성경을 포함한 인문학이나 사회학에서 용어의 ‘정의’(definition)와 ‘해석’(interpretation)은 필수이다. 물론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도 ‘의도’와 ‘목표’, 용어의 ‘정의’를 개신교 신학적 관점에서 매끄럽게 다듬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비판자들은 개신교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방법’에 대해 ‘자라(이단)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이단과 비슷한 성향) 보고 놀라는 태도’로 비판하는 것은 지양하기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정이철이 공부한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원죄가 후손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달리 설명하는 ‘대표론’과 ‘실재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삼위일체’란 단어들이 성경으로부터 나온 단어인가의 여부부터 따지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전문 용어들’(Technical terms)은 성경의 개념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성경에 있는가 여부를 따지는 자체가 오만과 무지의 산물이다. 개혁주의자 자신들은 입만 열면 온갖 전문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타 교파나 운동에서 자기들이 잘 모르거나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면 “그게 성경에 있느냐?”고 반문한다. 정이철은 그런 무지하고 오만불손하고 무지한 태도부터 고치기 바란다.
 

둘째, 정이철은  여전히 각종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필자는 여러 군데에서 영적 현상이나 하나님의 새로운 운동을 비판하는 자들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한 바 있다.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는 불신자와 신자에게 골고루 베푸신 일반은혜의 방법, 단어, 문화, 관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불교, 통일교, 사이비 종교도 한국에서는 한글 경전을 사용하고 한글로 설법, 설교한다.
-사이비 종교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전을 강해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한다.
-사이비 종교인도 은혜 받으면 울고, 좋으면 웃는다.
-사이비 종교도 구원을 말한다.
-사이비 종교도 종교 활동을 통해 초월적 기쁨과 황홀을 누리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사이비 종교인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종교적 수행을 한다.기독교 신자도 말씀 묵상, 기도 등을 통하여 신앙생활, 영성생활을 한다.

이처럼 기독교와 유사 종교의 수행 방법, 영성훈련 방법이 ‘유사’하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내용’과 ‘의도’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유사 종교의 차이를 ‘내용’과 ‘의도’에서 찾지 않고 정이철처럼 ‘방법’과 ‘목표’에서 찾는다면 기독교 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이철 같은 무리들은 어떤 것이 조금만 자기들에게 생소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법’과 ‘목표’의 유사성을 통해 기독교의 영성훈련, 예배 형식 등을 공격한다.

본 주제와 관련있는 명상 기도, 관상 기도는 불교, 힌두교, 뉴에이지와 같은 범신론 계통에서 특히 강조하는 수행 방법이다. 기독교의 관상기도도 범신론의 명상기도와 ‘방법’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지만 ‘내용’과 ‘의도’는 전혀 다르다.

제대로 된 기독교 신자라면 정이철이 말하듯 “일상의 의식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식, 즉 우주와 인간에게 동시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제, 참된 자아, 신성 등으로 표현되는 존재를 만남으로 진정한 행복과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대로 된 신자라면 누구나 정이철이 말하듯, “죄을[를] 안고 태어난 인간이 자기의 영적 수준을 도약시킬 수 있는 참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영원한 진리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아주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정이철은 관상기도의 ‘방법’이 유사 종교의 명상기도 방법과 ‘유사’하다고 해서 “문제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영성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도 결국 이 길로 간다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운동가들의 행태는 약간 모양이 다르기는 하나 일반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일반 종교인들의 영성 수련 방법을 약간 변형하여 자신들의 신앙 속으로 끌고 오기 때문에 결국 성령을 가장하는 귀신과 교제하게 되는 함정을 피할 수가 없가[기]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정이철의 주장 대로 하면 ‘교회에서 찬송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도 금지하고,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논문 쓰고, 학위 수여하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세상이나 사이비 종교와 ‘약간 모양이 다르기는커녕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이철은 이런 ‘논리적 오류’를 밥 먹듯이 저지른다.
왜 그런가? ‘내용’과 ‘의도’의 차이는 보지 않고 ‘방법’과 ‘수단’의 유사성과 동일성만 보기 때문이다.

정이철의 논리대로 하면 정이철은 불신자이다.

-불신자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정이철도 비판하는 글을 쓴다.
-불신자도 컴퓨터를 사용하고 정이철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정이철은 불신자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정이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불신자와 신자의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이 무엇인지 정이철도 알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의 영성훈련, 명상기도와 유사 종교의 영성훈련, 명상기도는 서로 유사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유사점을 강조하기보다 차이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나 신앙생활에서는 모든 방법과 수단이 이교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정이철은 또한 기독교의 영성훈련, 명상기도를 비판하기 위해 불교의 명륜, 최수운의 동학사상, 도울 김용옥 등을 자세히 인용한다.

필자는 비판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참 희한한 현상을 발견했다.
기독교에서 어떤 새로운 현상이나 운동이 소개되면 비판자들은 성령운동가들의 저서나 간증은 모두 귀신적인 것으로 돌리고 유사 종교의 가르침을 더 깊이 연구한다는 사실이다.

정이철도 기독교적 관상기도를 통해 은혜 받은 사람들의 책 보다는 유사 종교인의 경험을 더 깊이 연구하고 있다. 필자는 오히려 정이철에게 권면하고 싶다. 불교나 유사 종교의 책들을 깊이 보면, 그 책 뒤에서 역사하는 악령들의 영향을 받아서 본인의 신앙생활에 유익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이철은 기독교 명상기도가 기도자를 귀신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그런 책들을 통해 정이철 자신이 실제로 귀신의 세계로 인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이철 사이트에 올라있는 정태홍도 마찬가지다.
내적 치유를 비판하기 위해 그는 두꺼운 책 몇 권을 썼는데 책이 온통 심리학자들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정태홍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인지 심리학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
요지는 간단하다.
정태홍은 기독교에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무의식’, ‘잠재의식’ 및 기업이나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구상화’(Visualization) 같은 ‘단어’나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태홍도 정이철처럼 ‘단어의 의미’와 ‘방법’ 및 ‘수단’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신학, 설교학에서 ‘논리학’은 제거되어야 한다.
논리학은 헬라 철학자 아리스톨레스에서 시작된 것인데 논리학은 정태홍이 졸업한 고신 계통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잘 사용하는 신학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정태홍이 내적 치유를 비판하는 그 방법 자체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확대해석하고 불리한 것은 축소해석하는 전형적인 변호사 논증법’이기 때문이다. 정태홍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관상기도의 앎’은 ‘영지주의적 지식’이 아니다

정이철과 김재성은 물론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자들은 반드시 ‘관상기도와 영지주의’를 연관시켜 비판한다.

-정이철.영성운동의 바탕은 영지주의-뉴 에이지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 집중하는 영성수련의 끝은 귀신체험” (『바른신앙』. 2014.12.31).

-김재성 :
"특히, 영성신학에 열광하는 현대 기독교의 경향이 영지주의를 답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는데, 영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영적인 사람’(pneumatikoi)만 빛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내부에 이미 빛의 요소드을 갖고 있으며 단지 물려받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 자각으로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본다. 그보다는 열등하지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 ‘혼에 속한 사람’(psychikoi)이며, 단지 물체로만 구성된 ‘육체적 사람’(sarkikoi)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파멸에 이르도록 결정되어져 있다고 구분하였다"(김재성.“영성신학, 성경보다 인위적 방법 치중”. [심층기획] 현대 성령운동 진단 ⑦ / 흐름과 문제점들. 『교회와 신앙』. 2006.06.22).

정이철의 글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깽판을 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름부음 사역도 귀신적이다, 영성훈련도 귀신적이다'면서 무엇이든지 귀신적으로 몰고 간다. 잘 모르는 사람은 겁이 나서 아예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꼼수인지 무지와 만용의 소치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이다. 이런 주장들은 얼른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가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다른 곳에서 자주 언급해왔듯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유사성’과 ‘동질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영혼 구원, 예배, 기도, 헌금, 봉사와 전도를 말하고 다른 종교도 이런 것을 말한다. 기독교도 비움과 채움을 말하고 다른 종교도 이런 것을 말하고 기독교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말하고 다른 종교도 이런 것을 말한다. 영지주의와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형식적,’ ‘방법적’ ‘단어’의 유사성과 동질성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내용’과 ‘핵심’이 다르다.
 

-영지주의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고대에 존재하였던 혼합주의적 종교 운동 중 하나이다. 영지주의 종교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시기는 기독교가 태동하던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시기로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

'영지주의자' ·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번역되는 나스틱(Gnostic)은 헬라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ῶσις gnosis)에서 생긴 말이다. 그노시스는 선택 받은 자에게만 계시되는 신적 비의(秘義)의 지식을 가리키며 때로는 지식 위에 형성된 종교체계를 말하기도 한다. 이를 영지주의라고 한다. 영지주의는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주후 2세기에 홍수와 같이 교회에 밀려들어왔다. 3세기 초에는 로마제국의 모든 지적인 교회가 현격하게 영지주의에 오염되었다.

이들은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식 즉 신비한 지식”인 그노시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지식은 특별한 "영적” 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만이 최고 신의 빛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고 그 다음 단계는 '혼적인 사람'과 '육체적 사람'의 3 단계로 구분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타력 종교(他力 宗敎)인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 스스로의 행위나 지식을 통해 구원을 얻는 자력 종교(自力 宗敎)이다. 영지주의를 굳이 종교라고 분류한다면 자력 종교의 한 종류이다. 천주교는 타력과 자력의 혼합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가 로마 천주교와 결별한 주요 쟁점은 구원관의 차이다. 가톨릭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도 필요하고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 즉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에게 ‘행위’는 필요 없는가?
아니다.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4, 26).

즉 개신교는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칭의)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믿음에 상응하는 선한 행위가 따라야 한다(성화)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님 옆의 강도는 죽기 직전에 믿음만을 고백하고 구원을 얻었지만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믿음 고백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믿음의 행위를 증거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구원의 서정인 성화의 단계에서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술 만의 고백이 참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로 그 믿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영지주의는 스스로 깨달은 높은 경지의 지식인 그노시스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불교, 뉴에이지운동 같은 범신론에서도 대부분이 높은 경지의 지식이나 깨달음을 열반이나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신앙 · faith)"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 "앎(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성경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영생이라고 기록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기노스코) 것이니이다”(요 17:3).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받는다고 배웠는데(엡 2:8-9) 요한복음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한다. 이 앎, 이 지식은 어떤 지식인가? 영지주의의 지식과 다른 지식인가?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에프그노시스)~”(엡 1:17).

이 구절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지된 지식이 아니라 성장해 가는 지식이다. 그런데 이 지식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얻는 지식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그노시스)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또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아는 지식’ 모두 구원을 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전에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어떤 자는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반(半)식자우환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또한, 성경도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3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해 기록한다.

 -육에 속한 사람(불신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미성숙한 신앙인).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성숙한 신앙인).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얼른 보면 영지주의가 말하는 3단계의 사람과 성경이 말하는 3종류의 사람은 너무나 유사하다.

정리하면, 영지주의나 성경은 동일하게 ‘지식’을 ‘그노시스’로 표현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에게 지식의 정도의 차이가 있듯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degree)에 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영지주의적 지식이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동일하게 보인다.
 

-자력 종교와 타력 종교

그렇다면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적이냐, 사교적이냐의 중요한 차이는 ‘단어’가 동일하냐, ‘특별한 지식으로 구원’을 얻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구원에 필요한 ‘어떤 특별한 지식’을 ‘어떻게’-자력이나 타력이냐-얻느냐에 있다.

영지주의나 범신론적 지식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알고 깨닫는 지식’(자력 종교)이고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성령이 깨닫게 하고 알게 해주는 지식’(타력 종교)이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3-14).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는 지식은,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타락한 죄인이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지식을 말한다. 이 지식은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교리적, 경험적,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안다’(know)와 ‘앎, 지식’(knowledge)은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경험적이며 친밀한 관계적 지식을 말한다. 아담이 이브와 동침한 것도 ‘안다’(know)를 말하는 히브리어 야다를 사용했다(창 4:1).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닌 것’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뭐라고 기록하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아는 것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아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신뢰와 사랑의 관계이다. 특히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은 구원 받는 자가 아니다.

악행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들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1-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이다.

성경 지식 많다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예수 그리스도)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잘 알기 위해서 성경을 잘 알아야 하지만 성경 지식 많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신학자 중에서도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나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잘 안다. 그녀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의 맏딸이고 지금은 한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박 대통령을 잘 알고, 서로 잘 아는 사이인가? 이런 지식은 '박 대통령에 대한 지식'이지 '박 대통령을 아는 지식'이 아니다.

필자가 박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서로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교제가 있고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다. 성경 지식, 신학 지식이 많아도 예수님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성경 지식, 신학 지식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아니다.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J. I. 패커는『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구분한다.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다.
신학, 신앙고백, 하나님에 대한 주제들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많은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친교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경건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외적인 경건의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장 깔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가지는 거의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이 두 지식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깔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를 불러 일으키는 지식’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범하지 않도록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면서 만물을 지배하시는 그분의 권능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과 자비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그분의 권위와 계명에 복종하고 위엄을 경외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애쓰며, 그분의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를 의식하고, 그분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경외하여, 그분에게 예배 드리고 찬양한다. 즉 반대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을 몸서리치면서 떨쳐버린다.”

깔뱅은 『기독교강요』의 제1권의 첫 6개장을 할애할 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했는데 그의 후예들은 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는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후 발전된 개혁신학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연구나 자료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론과 신학 보다는 깔뱅이 말하는 경건과 영성의 산물인데 연구와 학문을 선호하는 깔뱅의 후예들이 이 분야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없어서 개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기사와 이적은 행했지만 불법을 행한 자들을 예수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다(마 7:15-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 말씀은 오늘날, 기사와 능력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큰 일을 하지만 내면 변화와 말씀 순종에 소홀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따끔한 경고가 된다.
 

교회 마당은 밟지만 예수 신랑을 믿음으로 예비하지 않은 자들을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신다(마 25:1-13).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 25:11-12).

구약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의 태도와 삶의 열매가 문제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가지면 세상 부귀 영화를 '배설물'로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기의 대(大) 신학자이다. 개신교에서는 별로 알아주지 않지만 천주교의 거의 모든 교리가 그의『신학대전』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을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신학자이다.

그는 사람이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그런 그가 그만 죽기 얼마 전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신학대전』집필을 중단했다. 비서가 완성할 것을 누차 강요하였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난 하나님에 비하면 나의 작품은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런 지식을 더욱 많이 가지기를 기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신앙 성장은 곧 이런 지식에 자라가는 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그런데 교리 바르고 전통 바르고 깔뱅을 자랑하는 전통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교단 큰 것 자랑하고, 박사 학위 자랑하고, 총회장과 같은 감투를 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세상의 부귀영화를 ‘배설물’로 여기는데 전통주의자들이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을 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제대로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관상기도는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필자는 관상기도를 알기 전에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및 말씀묵상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 물론 그 동안 성령 체험을 하여 방언도 하고 신유와 축사도 했지만 관상기도는 잘 몰랐다. 기도라고 하면 무조건 간구하고 부르짖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장기간 광야훈련을 받으면서 관상기도를 배우게 되었다.

간구기도는 기도 제목을 응답 받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기도이기 때문에 강하고 끈질긴 의지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가는 기도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나의 생각이나 소원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과 임재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문제는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잠재우고 마음의 눈으로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생각 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눈을 감고 의지적으로 내 생각을 내려 놓고 말을 하지 않는 순간부터 내면에서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온갖 잡생각이 살아나고 치유되지 않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드러나서 주님께만 마음을 집중하기가 어렵다. 잡생각을 제어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몇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이것을 ‘반 펠라기우스적이다, 인위적인 노력이나 기교다’라고 폄하한다. 자세한 것은 다음 글에서 다룬다. *
 

[관련기사]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실시간인기기사
회사소개만드는 사람들광고문의후원안내회원자유게시판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110 Nuuanu Ave, Honolulu, HI 96817 USA  |  대표 구요한  |  청소년보호책임자 구요한
Mail to: gloriatimes77@gmail.com
Copyright © 2018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