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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특집③] 묵상기도와 관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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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0  17: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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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특집③]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임재기도)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의 차이

묵상기도(meditation, meditative prayer)는 주로 지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이다. 생각과 논리의 작업을 통해 기록된 말씀이나 기독교의 진리를 묵상하여 삶에 적용하는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한편 관상기도-임재기도(presence prayer, contemplation, contemplative prayer)는 이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다. 생각과 의지는 뒤로 물러나고 사랑, 신뢰, 감사와 같은 감정이 전면으로 부상되고 말이 줄어드는 기도다.

묵상기도는 기록된 말씀을 바탕으로 진리를 깨달아 의지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한 기도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얻는 기도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는 신선하고 창조적인 생각을 개발한다. 이것을 '계시 의존 사색'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성경적 사고방식을 형성한다. 주로 조용한 시간(Quiet Time)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 기록된 말씀, 하나님의 사역 및 과거에 행하신 은혜를 묵상한다.

주의할 점은 묵상기도는 주로 생각, 논리, 의지의 작용이므로 영적으로 메마르기 쉽다. 또한 이로 인한 지적, 의지적 교만이 생기기 쉬우며 신랑이신 예수와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가 결여되기 쉽다.

한편, 관상기도는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신랑이신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의지의 종교를 초월하여 우리의 실존 자체―온 마음으로―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마 22:36-40; 신 6:4-5). 그렇다고 우리 존재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자아의 실현을 맛보는 체험이다. 인간적인 자아 실현은 죄악의 산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완전한 자아 실현을 맛볼 수 있다.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가 중요하고 좋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된다.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주 안에 거하게 된다(요 15:4).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을 좇아―성령과 동행하는―행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광야시험도 하나님과의 동행의 일부이다(요셉의 삶,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가신 예수).

하나님과 독대하는 친밀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는 갖지 못하는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관상의 처소가 있어야 한다.
 

관상기도의 목표와 유익 

영성사역자인 짐 W. 골은 [관상(명상) 기도]에서 관상기도의 목표와 유익을 이렇게 정리했다.

1. 관상기도를 통해, 성령은 이기심의 원천을 치유하여 우리들의 의식적인 활동의 원천이 된다.

2. 관상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을 돕는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반대와 모순을 이기는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증거와 인정의 필요로부터 해방된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진 부정적인 것들을 치유해 준다.

3. 이러한 형태의 변화시키는 기도는 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강화시킨다. 우리가 가진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특히 우리가 위협을 받을 때, 불안정과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필요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항상 하나님의 사랑의 관상에 의해 확인 받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사람이 보기에 모순되거나 강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안에서 성숙해 가노라면 겸손한 사람이 된다.

4.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대화의 수준에서 그분과 교제의 수준으로 인도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욱 실질적'(more real)으로 만드는 것이다.

5.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증가함에 따라, 당신은 당신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것을 덜 두려워하게 된다. 예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어두운 면을 알고 계셨지만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다.

6. 관상기도의 내적인 고요함은 우리 전 인격에 그처럼 심오한 정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의 얼어붙은 감정이 부드러워져서 우리 자체가 이 유해한 독소를 뽑아내게 된다. 멍에가 부러지고 견고한 진이 파괴된다.

7. 비록 위대한 내적 평강(Inner peace)이 체험될지라도 이것이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연합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 없이 연합되어 가는 것이다.

8. 관상기도를 통해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분의 신적인 사랑의 실체에 반응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보다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

9.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시험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자.

10. 관상기도는 우리에게 인내, 하나님을 기다림, 내적 침묵을 위한 능력을 제공해 주고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운행하심에 민감하도록 도와준다.

11. 관상기도는 원천을 밝혀주고 모든 다른 형태의 헌신을 실천한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며 모든 관계적인 실천을 도와준다.

12. 이 신적인 삶은 실제로 매일 24 시간 우리 안에서 지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를 모르거나 느끼거나 방출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의 흐름으로부터 차단되어 자신의 위선적인 자아의 왕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13. 관상기도는 우리가 그분의 치유하는 사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멋있는 행진을 계속함에 따라, 우리가 우리를 통해 그분의 삶을 동일시하고 경험하고 또 우리에게 풀어 놓는 것을 도와준다.

14. 마담 귀용이 말한 것처럼 "이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불을 던지셨다. 그것은 당신 속에 있는 모든 불순한 것을 태우기 위한 것이다." 그 불의 능력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그분의 지혜는 단 한 가지 목적―하나님과의 합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위해 사람 안에 있는 모든 불순한 것을 태워버린다.


관상기도 할 때 주의할 점 

그러나 주의할 점도 있다. 관상기도에 치우치다 보면 신기한 세계 속에 들어가서 일상 생활과 괴리되어 일상생활의 다반사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오스왈드 체임버스가『지존하신 주님께 나의 최고의 것을』(Oswald Chambers, My Utmost for His Highest)에서 말한 것처럼 "정상의 체험은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열매는 골짜기에서 여물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변화 산상의 신비로운 체험을 한 예수님은 골짜기에 내려오셔서 병자와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섬기셨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균형 이룬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의 신비주의자인 프랑스의 버나드는 명상적 삶과 행동적 삶은 상호 조화되고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다(행동적 신앙)와 마리아(명상적 신앙)는 자매간이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영적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저수지는 물이 고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득 차면 밖으로 흘려 보낸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성숙은 세상을 섬기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자기 부정이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기 의'로 지나친 금욕이나 극기를 행할 위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또한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찼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요 3:16).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고 사랑하셨다. 우리는 명상적 삶을 산다고 해서 삶을 초월하는 초영성주의자(super-spiritualist)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영성을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보다 못하고 낮은 자를 섬기는 자가 성숙한 신앙인이다.

또한 신비적 체험을 누린다고 하여 신앙의 지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성경공부, 제자훈련, 묵상 기도 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기한 영적 체험을 좀 하면 마치 다된 것같이 착각하여 책을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체험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체험도 배우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 기도는 기본적인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등의 과정을 거치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적인 분야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관상기도를 권장하기 이전에 성숙한 믿음의 표적을 항상 찾아왔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하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에 대한 계속적인 갈구, 개인적인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능력, 사람의 마음의 갈구를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다는 살아있는 감각, 기도를 통해 얻는 깊은 만족감, 개인적인 능력과 약점을 실제로 파악하고 있는 것, 영적인 성취에 대한 자부심에서 자유로운 것, 삶의 요구를 인내와 지혜를 통해 살아온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관상의 삶을 추구한 나머지 영적 개인주의나 독선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성장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원수 마귀의 제일의 목표는 광야의 한 마리 '외로운 늑대'(lone wolf)이다.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도 있고 내가 믿음을 작동시켜야 할 때가 있다.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거늘"(사 30:15). 능동적 기도와 수동적 기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노력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조지 휫필드의 말처럼 우리는 100% 하나님을 의지하고 100%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묵상 기도와 관상 기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묵상기도에만 치중하고 관상기도를 소홀히 하면 지적 교만이 생겨 죽은 정통주의자―바리새인―가 되기 쉽다. 한편, 관상기도에만 치중하면 현실성이 결여된 신비주의자가 되기 쉽다.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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