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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④] 구원과 성화(1)-장로교+감리교+오순절 + 알파(a)의 구원관, 성화관이 필요하다-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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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9  15: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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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④]

구원과 성화(1)

-장로교+감리교+오순절 + 알파(a)의 구원관, 성화관이 필요하다-

   
 

들어가는 말

한국의 개신교가 잘 하는 분야가 많다.
개신교가 타 종교에 비해 한국에서 사회 봉사나 구제를 제일 많이 한다. 장애시설의 66%, 아동보호시설 72%, 노인복지시설의 46%가 기독교이며, 10년간 북한 지원을 3천억 원이나 했다.

또한 세상적으로 성공한 개신교 신자들도 많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과 총리, 대법원장 여당 원내 대표가 장로이고, 야당 대표가 집사이며, 4성 장군의 55%, 180개 대학 학·총장의 70%, 국회의원 35%가 크리스천이었다.

그런데 종교 선호도는 불교, 천주교에 이어 꼴찌다.

왜 그럴까?
대형 교회 목회자의 비윤리적 스캔들, 돈과 부정으로 얼룩진 교단 임원 선거,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이단과 사이비로 정죄하는 배타성, 대형 교회 세습 등을 통해 삶의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추태만 연출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종교인들에게 ‘거룩한 삶’을 기대하는데 개신교 신자들이 일반 신자 못지 않게 온갖 비윤리적인 추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하나님 앞의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서 매주 정기적으로 예배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텐데 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신자가 구원을 받은 이후 ‘성화의 삶’에 소홀하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가 우세한 한국 교회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빈주의 가르침이 오도 되어 ‘한 번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아무렇게 살아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구원관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세월호 참사를 야기한 세월호의 실 소유주가 구원파의 수장인 유병언이라는 사실로 인해 일부 기독교 언론에서는 다시 한 번 구원파의 이단적 교리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구원파는 ‘불신자가 한 번 회개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 없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윤리적 삶을 도외시 한다. 그러나 정통 교회는 불신자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더라도(신분적 회개) 계속 회개해야 한다(성화의 회개, 신자의 회개)고 가르친다.

문제는 과연 정통 교회 신자들이 교리가 가르치는 것처럼 성화를 위한 회개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란 가르침으로 인해 개신교 내에는 ‘실천적 구원파들’이 많다고 한다. 믿음으로 한 번 구원 받은 후의 신앙생활은 구원과는 상관 없이 상급 받고 축복받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하여 신자들이 윤리적 삶을 무시하는 발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 성화관

한국 교회에는 좋은 훈련 프로그램들이 많다.
전도 프로그램, 능력전이 프로그램 및 양육 프로그램 등이 많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들은 절대 다수가 사람이 거듭나서 교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섬기기 위한 프로그램들이거나 4차원 영성훈련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적 성공을 위한 프로그램들이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그러나 신자 각자가 하나님의 앞의 단독자로 서는 변화와 성숙을 위한 프로그램은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신자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잘 하지만 ‘하나님 앞의 단독자,’ 사회나 세상이 ‘본 받을만한 신자’는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필자는 각 교파의 구원의 서정(抒程)(구원의 순서. 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과 성화관을 살펴보았다. 각 교파의 구원관, 성화관을 타 교파의 것으로 보완하고 전체적으로 부족한 것에 대한 첨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은사'와 '열매', '사역'과 '품성', '축복'과 '나눔'의 균형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사람에게도 칭찬 받는 진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 비교

성화를 다루기 전에 먼저 '칭의'와 '성화'의 차이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이 구분한 칭의와 성화의 차이다.

   
 

각 교파의 구원관, 성화관
 

일반적으로 장로교 계통에서는 중생, 칭의, 회심을 구분하여 사용하지만 다른 교파에서는 중생 즉 거듭남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필자는 각 교파의 구원관, 성화관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각 교파별 구원관, 성화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 장로교의 구원관, 성화관 

장로교의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여(예정과 선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유효 소명, 내적 소명), 복음 전파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중생한 후(영적 의인) 본인이 하나님 앞의 죄인임을 시인하고(회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다(신앙-이것을 ‘회심’이라 한다).

장로교가 말하는 구원의 서정은 논리적 순서이지 시간적 순서가 아니다. 즉 어떤 일이 논리적으로 먼저 일어나고 다른 것이 그 다음에 일어난다는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회심하면 자동적으로 칭의되고(법적 의인) 하나님의 자녀(양자됨)가 되는 특권을 누린다. 칭의와 동시에 죄와 결정적으로 결별된 신자(‘결정적 성화’)는 이후 점진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간다. 비록 유혹, 환란, 핍박으로 잠시 넘어지지만 하나님이 끝까지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성도의 견인).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영화’ 되어 구원이 완성된다.
 

-가짜 회심, 가짜 구원의 확신, 일시적 믿음

개혁주의자들은 ‘가짜 회심’, ‘가짜 구원의 확신’ ‘일시적 믿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 예정 받고 선택되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매일의 삶 속에서 전심으로 부지런하여 예정과 선택을 확인하면서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 구원 받은 신자는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구원관에 의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로교가 말하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은 입술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시인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열매를 통해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에 열매를 좀 맺었다가 중도에 실족한 사람은?
그 사람도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회심이나 일시적 믿음일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성도의 견인). 이렇게 볼 때 장로교에서 말하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의 진짜 의미는 신자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키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증거되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진정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어렵다. 가짜 구원의 확신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장로교의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은 ‘나는 이미 구원 받았으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가 아니라 ‘내가 예정되고 선택되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키고 합당한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구세주로 영접하면 자신은 예정 받고 선택된 사람으로서 구원을 받았으며, 이후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이 땅의 신앙생활은 상급 받기 위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장로교 신자들이 많다.

그러나, 제대로 알면 장로교 구원관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가짜 회심, 가짜 구원의 확신, 일시적 믿음이 있으므로 매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 가면서(빌 2:12),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확증해야 한다(고후 1:5).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장로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또한, 장로교의 구원의 서정은 신자들이 회심한 후 죽을 때까지 해나가야 하는 성화의 삶에 대한 설명이 흑백 영화처럼 지극히 단조롭고 밋밋하다. 비록 불완전한 세상이지만 성령 충만이 주는 기쁨, 황홀, 열정, 넘치는 사랑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그저 죽을 때까지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인내로 믿음을 지켜나가라고 가르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주는 능력과 축복은 소홀히 한 채 아직 오직 않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고, 십자가를 강조하는 만큼 부활의 능력은 소홀히 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만큼-실제로 하는 지는 의문이지만-믿음을 통해 내세의 능력이 주는 신령한 축복을 실제로 누리는 것에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이 때문에 장로교의 구원관은 신학적으로는 거창한 것 같고 말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의 인내와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미지근하고 율법주의적 신앙인을 양산하기 쉽다. 또한 순간적 성화 체험인 성령 체험을 부인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바른 교리를 중시하는 교조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신자들의 삶에 열정과 담대함이 결핍 되기 쉽다.

 
-'결정적 성화'가 대안?

오순절이 말하는 성령 체험의 대안으로 존 머리(John Murray)가 말하는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를 제시하지만 이 또한 강렬한 경험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리하면, 장로교의 구원관은 삶에 기복이 별로 없고 학자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환란이나 핍박이나 고난이 오면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서 순응하면서 고난을 견뎌내기에 적합한 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앙에 이런 면도 필요하지만 적극적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여 확장하는 것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감리교의 구원관, 성화관

감리교는 요한 웨슬레가 오랫 동안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다가 올더스게이트 가(街) (Aldersgate Street) 의 체험-가슴이 따뜻해 지는 성화 성령체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서 칭의와 점진적 성화에 이어 순간적 체험인 완전성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신자는 완전 성화 체험을 통해 신앙이 한 단계 성숙된다고 가르쳤다.

-불완전한 완전

여기서 말하는 ‘완전’은 죄 없는 완전이 아니라, ‘동기의 완전, 사랑으로 충만한 완전’을 말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신자는 완전해 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감리교는 장로교와 달리 한 번 구원을 받은 신자도 본인이 믿음을 버리거나 아는 죄(들)를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다시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한국에서는 워낙 장로교의 위세가 강하니까, 누가 ‘신자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 어김 없이 장로교로부터 이단은 아니더라도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집회 참석 금지’, ‘접근 금지’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최OO, 신OO 같은 장로교 신학자나 필자가 아는 상당 수 목회자들 중에서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완전 성화의 유익 

웨슬레의 ‘완전성화’의 공헌도 많다.
웨슬레의 완전 성화는 루터와 칼빈이 시작한 종교개혁이 100여년 정도 지나자 교회가 교리 논쟁에 빠져 신자들의 삶이 형식적이고 냉랭해지는 ‘죽은 정통’의 시대에 신자들의 삶에 열정과 사랑을 부어 넣은 새로운 활력소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텔레이오스)은 웨슬레가 말한 대로 문자적인 ‘완전’이 아니라 ‘성숙’의 의미가 더 강하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던 노아도 나중에 술 취하여 방탕한 죄를 지었고 웨슬레 못지 않게 신비 체험을 많이 한 바울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고전 9:27; 딤전 1:15)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완전’이란 말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다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또한, 완전 성화체험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죄를 생각지도 않고 죄를 짓지도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력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안의죄성이 꿈틀거리면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다. 필자 또한 누구 못지 않게 완전 성화체험 및 각종 성령체험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이런 체험은 내면의 죄성을  뿌리 뽑은 것에 대한 보상이나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지 그런 체험 자체가 많은 죄성을 뽑아내고 내면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그런 체험을 통해 동기를 순수하게 하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솟아오르지만 내 안에 깊게 뿌리 박고 있는 죄성을 뽑아내는 데는 별 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각종 성령체험을 많이 하는 오순절이나 성령운동파들이 가장 거룩하고 품성이 가장 좋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완전 성화 체험의 어려움 

더 나아가서 ‘일반 신자들이 요한 웨슬레가 체험한 완전성화 체험을 어떻게 하는가?’이다. 필자가 보기에 웨슬레의 완전성화 체험은 성령 체험의 일종이다. 이런 체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구한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J. I. 패커(Packer)도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 성화 체험을 하기 위해 사모하면서 구하고 성결교 식의 헌신에 재헌신을 거듭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체험하지 못했다면서 투덜대었다. 어디 패커 뿐이랴!

웨슬레는 ‘무엇’(what)은 말했지만 ‘어떻게’(how)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모하고 구하여서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물론 요즈음에는 안수를 통한 기름부음 전이(임파테이션) 사역, 회개와 채움을 통한 임재연습 등을 통해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게 열려있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웨슬레의 완전 성화 체험은 ‘불완전한 완전’을 통해 다소 갈등은 야기시켰지만 사랑 체험으로 인한 ‘동기의 순수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냉랭한 죽은 정통을 보완하는 활력소 역할을 한 공로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감리교도 나중에는 외적 행위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와 인간의 교육을 강조하는 학문 쪽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 오순절의 구원관, 성화관

오순절 성령운동파의 구원관은 중생—성결-신유-재림인데 특히 성령 체험을 강조한다. 물론 요즈음 오순절운동파들은 중생-점진적 성화-순간적 성화를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순절 성령운동의 강조점은 성령 세례이다. 고전적 오순절파인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 교단은 아직도 성령 체험을 ‘성령 세례’(행 1:5)란 단어로 표현한다.

전통적인 교단은 신자는 누구나 성령 세례를 받았으므로(고전 12:13) 그 이후의 성령 체험은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성경적으로 말하면 전통적인 교단의 성령 세례는 ‘구원성령세례’이고 오순절 교파가 말하는 성령 세례는 ‘사역성령세례’이다. 또한 웨슬레의 성령체험이 성화 성령체험이라면 오순절의 성령체험은 사역 성령체험이라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교육자료/[성경Q&A]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보기 바란다)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중생 이후에 오는 능력 체험이며 이런 체험이 있어야 신자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된다고 가르치면서 오순절 교단은 신자 모두가 성령 체험 할 것을 촉구한다. 고전적 오순절주의자들(하나님의 성회 교단-한국의 순복음교단)은 ‘성령 세례의 초기의 실질적 표적이 방언’이라고 주장했지만 기존 교단 내의 성령운동인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은 물론 다른 표적도 일어난다고 주장하고 성령 체험 또한 반드시 회심 이후에 오는 체험이 아니라 회심과 동시에 올 수 있다는 수정된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강조

전통적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치중하여 회개와 고난을 강조할 때 오순절 성령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여 방언 및 초자연적 은사, 신유, 축사를 강조하고 동시에 믿음을 통한 건강&재정 복음을 강조하면서 100년 이란 짧은 기간 내에 전 세계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나 전통적인 교단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순절 교단의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단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의 특성인 회개와 내면성숙을 위한 성화가 약하다는 것이다. 오순절식 성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은사 체험이나 능력을 많이 받는 자가 성숙한 신앙인이고, 동기나 윤리 도덕이 어떻든 내가 성공하고, 이웃이야 어떻게 되든 내 믿음으로 내가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 신앙인을 양산하기 쉽다.

 

삼분설의 구원관, 성화관

장로교, 감리교 및 오순절 신앙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구원관, 구원관이다. 특히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이런 삼분설을 따르기 때문에 장로교가 강세인 한국에서 수시로 시비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이단에서도 선호하는 ‘사람의 삼분설’, ‘삼분설 구원관’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삼분설 구원관은 윗치만 니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웟치만 니는『영에 속한 사람』을 통해 경직적인 삼분설, 죄의 실재설(개혁주의는 대표설이다), 영과 혼과 몸의 계급적인 단계성, '혼'(soul)이 지성, 감성 및 의지의 자리이며 신자는 ‘영’의 구원은 받은 후 '혼'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영, 혼, 육(몸)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살전 5:23을 증거 구절로 든다. 영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므로 가장 고상하고, 육(몸)은 물질계와 접촉하므로 가장 저급하며, 혼은 영과 몸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구약 시대의 성막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제사장들이 지성소에 들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듯이, 사람도 가장 속에 숨겨져 있는 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타락 이전에는 영이 혼을 통하여 몸을 지배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였는데, 타락 이후 몸이 혼을 통하여 영으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사람의 혼은 하나님의 영이 흙으로 만든 몸이란 용기 속에 담겨질 때 생긴 것이다.
혼은 이와 같이 피조 된 것이므로 타락의 소지가 있다. 사람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는 혼에 속한다. 사람이 타락한 것은 혼이 영에 비해 비대해진 때문이다. 이브는 내가 하나님이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생각이 혼적으로 타락하여(이성), 금지된 열매를 따 먹었고(의지), 아담은 이브를 사랑하기 때문에(감정),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의지). 그러므로 사람은 죄로 인해 지, 정, 의의 혼이 타락하였으므로 우리들의 구원은 혼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어서 웟치만 니는 혼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통의 수단인 영이 죽었으며 사람은 죄의 결과, 육체의 열매(몸에서 생기는 나쁜 욕망들--시기, 질투, 음란, 분쟁 등)과 혼에서 생기는 나쁜 욕망들(자기 의 및 독립심)이 있는데 혼은 몸만큼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상이 웟치만 니의 인간관이며 인간의 타락과 구원에 관한 요약이다.
 

비판해 보자.

첫째 그의 경직적인 삼분설을 비판한다

많은 개혁주의, 보수주의자들은 사람은 세 부분이 아니라 두 부분(이분설) 즉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창 2:7; 마 6:25; 고전 5:3).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죽음을 통해서만 나누어 진다.

안토니 훼케마(Anthony Hoekema)나 허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은 사람을 여러 부분(part)으로 나누는 자체를 배격하며, 영·혼·육을 한 사람의 각각 다른 한 측면(aspect)으로 이해한다(전인격설). 사람을 이분으로 보든 여러 측면으로 보든 하나님은 영혼은 물론 육체도 선하게 창조하셨으므로 둘 다 모두 선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편 한국 개혁신학의 거두인 박형룡 박사는, 프란즈 델리취의 삼분설을 비판하면서 영과 혼은 ‘실체적 상이’가 아니라 ‘작용적 상이’라고 주장한다(박형룡,『박형룡저작전집-교의신학/인죄론』, 5, 60). 즉 ‘실체적’으로는 이분설이 맞지만 ‘작용적, 기능적’으로는 삼분설도 무난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은 물론 육체의 구원(부활)을 말한다. 그러므로 헬라 식으로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이나, 영이 몸보다 우월하다는 계급 사상을 배격한다.
 

둘째 혼이 지, 정, 의의 자리가 아니다 

사람이 지, 정, 의를 가진 것은 영과 육이 접촉할 때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1:26, 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비슷하게 인격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지성),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노여워하시기도 하며(감정),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도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체이다.

혼이 지, 정, 의의 자리이고 혼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지, 정, 의를 가진 하나님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사람이 타락하여 영이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사람은 타락으로 인해 지, 정, 의가 심히 손상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지, 정, 의를 사람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셋째 ‘육체의 열매’는 몸(physical body)이 저지르는 죄악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헬라어 사륵스. Flesh)(갈 5:19 등)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인격을 말하는 것이지 신체적인 몸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헬라식 사고로 물질인 몸은 악하다고 전제하므로 이런 틀린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육체의 열매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든, 생각에서 나오는 열매든 그 죄악들은 모두가 타락한 한 인간의 전인격에서 나오는 죄악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몸은 신체적인 몸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자주 전인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롬 12:1; 고전 6:19; 고후 5:10). 영어의 somebody(어떤 사람), everybody(모든 사람)란 말이 이 개념을 잘 설명한다.
 

넷째 삼분설의 구원론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구원은 영-혼-육의 순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즉 예수를 믿으면 먼저 영이 구원을 받고 그 다음 혼이 구원을 받으며 죽으면 육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람이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죽어서 구원받는 것은 육(flesh)이 아니라 몸(body)이다. 즉 사람은 일단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어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고전 15:44, 51).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육’을 ‘몸’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히브리어 ‘바살’과 헬라어 ‘사륵스’이고 영어로는 flesh인데 한글 성경은 그렇지 않아도 헷갈리는 단어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육, 육신, 또는 육체로 여러 가지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육, 육신, 육체

성경이 말하는 육, 육신, 육체의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몸의 고기 부분(레 19:18), 전신(全身)(갈 4:13) 또는 몸(body)(고후 12:7; 엡 2:15; 벧전 3:18)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둘째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란 뜻으로 사용된다(창 6:3; 마 26:41).

셋째 전인(全人) 즉 인간(요 1:14; 고후 7:15)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님도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지니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요 1:14), 죄를 알지도 못하고 짓지도 않으신 분이다(고후 5:21; 히 4:15).

그러나, 성경 특히 바울 서선서가 말하는 육신은 무엇보다도 죄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삶의 스타일 또는 전인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그러나 신자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갈등을 일으키므로 전자를 죽이고 후자를 살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이처럼 신자들이 갈등하고 투쟁하는 분야는 혼과 영이 아니라 육신과 성령, 또는 거듭났지만 죄의 지배를 받는 겉사람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속사람, 옛사람과 새사람의 투쟁이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러므로 영-혼-육의 순서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은 얼른 듣기에는 쉽고 편한 주장이지만 성경적으로는 틀린 주장이다.
 

다섯째 귀신은 영에 있지 못하고 혼과 몸에만 있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귀신이 영에는 있지 못하고 혼이나 몸에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타당한 주장일까? 이것도 사람을 기계적인 삼분설로 나누어서 보기 때문에 생긴 주장이다.

 성령님은 과연 우리의 영에만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성령은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도 함께 하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마음) 속에 새 신(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 11:19).

성령은 또한 우리 몸 속에도 계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성령은 우리의 영, 혼, 육 어느 한 부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 속에 계신다(롬 8:11).
 

그러면 악령인 귀신은 어디 있는가?
귀신도 우리의 전 인격 속에 있으면서 우리의 영, 혼, 육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룩하신 성령과 더러운 악령이 한 몸에 계실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가? 그러면 질문해 보자. 거룩하신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데(이것을 하나님의 편재라고 한다), 그럼 어디에 악령들이 존재하는가? 다른 피조 세계에 존재하는가? 또한 신자 속에는 성령이 거주하시는데 어떻게 죄가 함께 거주할 수 있는가?(롬 7:20)

이런 문제는 인간의 논리로 풀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풀어야 한다. 즉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성령과 악령, 성령과 죄가 한 몸에 공존할 수 있게 허용하신 것이라고. 그외에 달리 해석하면 오히려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탐 마샬의『자유케된 자아』

탐 마샬은 내적 상처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전형적인 삼분설의 오류를 범한다. 즉, 거듭난 영에 성령이 거하면서 지·정·의가 자리하는 혼을 정화시켜 나간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혼 안에 지, 정, 그리고 의의 기능을 두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혼에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잠재적 능력이 있으며 사탄이 공격하는 곳도 바로 이 영역이다. 영을 좇아 사는 인간을 유혹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영(양심)은 문제가 있으면 성령께 전달하고 성령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혼에는 자기주장과 반역의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유혹을 받고 타락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64).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 그의 정신(mind)이 그의 육체(the body)를 지배하고, 그의 영(spirit)이 그의 정신(mind)을 지배하고 성령(the holy spirit)이 그의 영(spirit)을 지배했다" (202).

"마음으로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정보나 자료를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영이다"(218).

그러면 새 영을 우리 마음에 두시겠다는 성경 구절은?(렘 31:33; 겔 36:26-27)
 

-잭 하일스의 『성령님을 만나세요』

잭 하일스도 전형적인 경직적인 삼분설의 오류를 범한다.

"사람은 삼중적 피조물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사람을 영·마음(혼·정신), 그리고 몸으로 부르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6 가지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 가운데 자리잡은 이 배열 순서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질의 삶을 사는지 결정합니다"(97).

그가 주장하는 6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영-마음-몸. 영이 마음을 주장하고 마음이 몸을 주장할 때 그는 인생의 우선순위에 관한 모든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2. 영-몸-마음.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몸이 마음을 주장한다. 비생산적이고, 계획성이 없고, 자기훈련이 없어 경건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다.

  3. 몸-영-마음. 영이 마음을 지배하므로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몸이 그의 영을 지배하므로 세상 열락이나 [은사]주의(charismatic movement)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다. (*번역본은 [신비]주의로 잘못 번역함)

  4. 마음-영-몸. 종교적이지만 이성을 영보다 우위에 두는 위험한 자유주의자나 이단이다.

  5. 마음-몸-영. 마음이 몸을 주장하므로 성격은 괜찮은 사람이지만 영이 없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6. 몸-마음-영.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육체의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향락을 즐기는 사람이다.

   독자 여러 분은 위의 6가지 중 하나에 속합니다. 당신은 어떤 그룹인지 구별해 보십시오."

정리하면, 삼분설은 아직도 장로교 외의 다른 교파에서 따르는 주장이지만 장로교 강세인 한국에서는 어김 없이 비판 받는 주장이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대항하여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디모데를 위해 할례를 시행했다(행 16:3). 교리가 아닌 문화적, 현실적 이유에서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도 바울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본질이 아닌 삼분설을 고수하려고 본질인 복음 전파가 위축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퓨전 신학, 통섭 신학의 구원관, 성화관
 -장로교+감리교+오순절+ 알파(a)의 성화관

세상은 이제 통섭과 퓨전(Fusion)으로 간다.
스티브 잡스의 스마프폰은 삶을 편리하게 했을 뿐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좌뇌와 우뇌의 통합,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섭(統攝, Consilience)과 퓨전(fusion)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고 돈 버는 기업에 인문학 붐을 일으켰다. 현대는 이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르네상스 형 팔방미인’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못 먹고 못 살 때는 흰밥에 고기 국 먹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 퓨전 음식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커피도 이전에는 한 가지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원두커피, 카페라떼 등을 찾는 시대이다. 사람들이 살만해지니까 입 맛도 다양해 진 것이다. 물건 하나 사려해도 여러 가지를 꼼꼼히 따지지 않고 사면 전혀 나와 상관 없는 물건을 사게 된다. 백 고무신, 까만 운동화를 신던 시대는 먼 옛날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신학이나 교회가 고리타분한 옛날 생각에 젖어있다.
성경 공부나 제자훈련만으로 신자들이 만족하던 시대는 지났다.
찬양과 경배만으로 은혜 받던 시대도 지났다.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시대이다.
다양한 신앙인들이 다양한 영적 욕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필자 또한 신앙의 여정에서 다양한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이제는 신학도 통섭 신학, 퓨전 신학이 필요한 때이고, 교회도 신자들의 다양한 영적 욕구를 해결하고 채워주어야 하다는 사실을. 어느 한두 가지 신학이나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신앙인의 다양한 욕구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영성 신학의 구원관, 성화관

장로교, 감리교, 오순절 성화관 모두를 아우르는 성화관이 있을까?
있다. 바로 영성 신학의 구원관이다. 영성 신학의 통찰력을 오늘날 개신교 신학에 접목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통섭 성화관, 퓨전 성화관을 필자는 생각해 보았다.

영성 신학의 구원관에서 각성(회심)-정화(점진적 성화)-합일(성숙과 변화)의 3 단계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5단계가 훨씬 더 성경과 경험에 부합한다. 즉 각성(회심)-정화(점진적 성화)-조명(순간적 성화-성령체험)-영혼의 어두운 밤(광야훈련)-합일의 단계 또는 과정이다.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람에 따라 순서가 다를 수도 있고 전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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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고서적 :

-구원과 성화 관련 서적

구요한.『새마음 & 새사람』(한아, 2006).
김광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총신대학교 출판부, 2000).
김남준. 『자기 깨어짐』(생명의말씀사, 2006).
-----.『마음지킴』(생명의말씀사, 2011).
-----.『죄와 은혜의 지배』(생명의말씀사, 2005).
이순홍. 『구원의 두 기둥-칭의와 성화』(CLC, 2010).
존 오웬.『존 오웬의 죄죽이기』(생명의말씀사, 2006).
G. I. 윌리암슨 지음, 나용화 옮김. 『웨스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개혁주의 신행협회, 1993).
G. I. 윌리암슨 지음, 최덕성 옮김. 『소요리문답 강해』(개혁주의 신행협회,1990).
박형룡.『박형룡박사 저작전집―교의신학 구원론』 (한국기독교 교육연구원, 1988).
차영배.『성령론―구원론 부교재』(경향문화사, 1992).

Alexander, Donald, ed. Christian Spirituality-Five Views of Sanctification (IVP,1988).
Berkhof, Louis.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41).
Calvin, John. Calvin: 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2 vols.(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Ferguson, Sinclair. B. The Christian Life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1).
-------. ST 313 Doctrine of the Holy Spirit Class Note (Philadelphi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Frame, John.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 & R Pub., 1987).
Grudem, Wayne.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4).
Gundry, Stanley N, Series Editor. Five Views on Sanctification (Zondervan, 1987).
Hodge, Charles. Systematic Theology. 3 vol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41).
Hoekema, Anthony. Saved by Grace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9).
Murray, John.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9).
--------.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Noll, Mark A. Ed. Confession and Catechism of the Reformation  (Baker, 1991).
Poythress, Vern. Symphonic Theology-The Validities of Multiple Perspectives in Theology (P & R Pub., 2001) ; 포이트레스.『조화신학』(나침반, 1993).
Williams, G. I. The Heidelberg Catechism Study Guide (Phillisburg, NJ: P & R Publishing, 1993).

-영성관련 서적

구요한.『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한아, 2009).
김외식. 『오늘의 목회와 영성』(감신대 출판부, 2005).
-----. 『현대교회와 영성목회』(감신대 출판부, 2002).
레나드 스윗.『관계의 영성』(IVP, 2013).
박영만. 『기독교 영성의 뿌리와 열매들』(성광문화사, 1993).
유기종. 『기독교 영성 』(은성, 1997).
유해룡. 『영성의 발자취』(장신대 출판부, 2011).
Foster, Richard. Celebration of Disciple (Hodder, 2012); 리처드 포스터.『영적훈련과 성장』(생명의말씀사, 2009).
-------------. Prayer (Hodder,2012); 리처드 포스터. 『리처드 포스터 기도』(두란노, 2011).
------------. Streams of Living Water (Harper One, 1998); 리처드 포스터.『생수의 강』(두란노, 2011).
Russell, Norman and Ward, Benedicta. The Lives of the Desert Fathers (Christian Pub., 1981); 노만 러셀 저, 이후정, 엄성옥 역. 『사막교부들의 삶』(은성, 1995).
Underhill, Everlyn. Mysticism  (Kessinger Pub., 2010).
Ward, Benedicta. The Desert Fathers :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Penguin, 2001) ; 베네틱타 와드 저, 이후정, 엄성옥 역. 『사막교부들의 금언』(은성,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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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skorea
"개신교 신자들이 일반 신자 못지 않게 온갖 비윤리적인 추태를 보이기 때문이다."는 "개신교 신자들이 일반인 못지 않게 온갖 비윤리적인 추태를 보이기 때문이다."의 오기인 것 같습니다.
(2016-08-30 21: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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